7살 어린이가 종이접기에 푹 빠졌다. 유치원에 종이접기 책 있는 걸 보고 접다 빠졌는지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뒤집어 쏟으면 색색의 괴물체들이 우수수수… 유치원 색종이 얘가 다 쓰겠다 싶어 쿠팡에서 1000장짜리 한 상자를 사줬다. 사면서 이거 두 박스가 할인율 더 높은데? 했는데 곁의 사람이 하나면 되지 해서 그치, 저거 다 접기도 전에 시들해질지도…했지만 과소평가였다. 한 달도 못 되어 색종이 500장이 넘게 사라졌으니…


 큰어린이 방을 뒤져보니 초등 저학년-중학년 때 마련해 준 종이접기책이 몇 권 있어서 그걸 주자 설득해서 내놓았다. 나랑 동생이 어릴 때 보던 종이접기 책도 있고, 가장 최근 것은 3-4학년 쯤 사준 유튜버로도 유명한 네모아저씨 책이었다.


 작은어린이는 실력 대비 야망만 큰 편이라 책을 받자마자 맨 뒷장 끝판왕 사람 접기를 하겠다고 그런데 어렵고 안 된다고 몇 날을 끙끙댔다. 하다가 안 되면 울고불고 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원통해하고…(수학문제 못 푼다고 질질 짜는 나를 보면 저렇게 속이 터지겠구나…) 어느날 보다 못해 내가 한 번 접어줬더니 신이 났다. 그러고는 색종이 위에 사인펜으로 보조선을 긋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사람 접기에 성공. 그리고…

사람 접기를 활용한 홀로코스트(…) 재현 구성

 바닥에는 무수한 종이 사람이 쌓여갔다… 쌓아둔 걸 보면 조금 섬뜩할 지경…살구색 색종이로 접은 건 조금 더 무섭네…


 책이 있어도 지맘대로 하는 성질 탓에 나름 창의적 접기를 시도하는데, 분명 책에는 2차원 동백, 무궁화꽃이었는데 얘는 접고 보니 3차원… 맛있는 화과자 같다고 내가 집어 먹는 시늉을 하니 아이들이 웃었다.

이런 꽃 접기 설명서를 보고

대체 왜 이런 꽃이 나온 것이냐. 동백, 무궁화, 접시 위에 담은 화과자 같다.

정체 불명의 형체 수십 개를 접어 늘어 놓기도 하고…이건 마치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무리. 새끼 고래도 있구나…


 지난 주에는 작은어린이 생일이 있었는데, 모진 어미는 사 달라는 거 다 사주고 매일매일이 생일날인데, 생일 선물은 색종이 한 상자나 더 사줄게, 지금 있는 거 다 쓰면… 이러고 퉁치려다가… 알라딘에 들어가 주섬주섬 새로 나온 종이접기 책을 검색해서 아침에 주문해서 저녁에 받는 당일배송으로다 새로 한 권 마련해 드렸다. 어린이가 쌍날 표창 접고 싶은데 유튜브 보고 하긴 너무 어려워…했던 걸 기억해서 찾아보니 표창 접기로만 한 권 가득 채운 신간이 있더라…

 대부분 색종이 두 장 이상, 심한 건 색종이 8장까지 써야 해서 작은어린이 수준엔 어렵고…나랑 14살 큰어린이가 몇 개 접어주고 그거 보며 작은어린이도 열을 올리고 거실에는 색종이들(접은 것과 망친 것)이 쌓여가고… 큰어린이가 색종이 8장으로 접어준 유닛을 내가 조립해서 작은어린이가 노래를 부르던 레인보우 표창을 완성하고만 나는 뭔 정신인지 다음 날 한 권 더…(그만 사!)


종이로 접은 표창과 팽이들


 종이의 시대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그나마 내 대신 접어줄 큰어린이(미안)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저 종이접기책들은 다 어린이용이 아닌 보호자용이었구나…


 팽이 종이접기책 사면서 집에 있던 알사탕 책 스핀오프 같은 게 나왔길래 같이 주문했다. 알사탕 제조법의 비슷한 장면 최근에 스폰지밥 보니까 나왔다. 스펀지밥이 물속에서 물방울(비누방울 같은 거) 불려면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자세 취하고 춤추고 돌리고 한 다음에 불면 된다고… 징징이가 말 안 듣고 맘대로 불다 잘 안되었는데 스펀지밥이 시키는대로 하고 나니 잘 되더라… 종이접기도 사탕 만들기도 물방울 불기도 기본이 중요하지… 작은어린이는 책을 스윽 훑더니 사탕 먹고 싶다아…사탕… 사탕 타령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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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4-04-23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차원 꽃이 3차원 화과자가 되는 창의력! 우리도 종이 한 장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이가 참 잘 만드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4-23 22:47   좋아요 1 | URL
지금도 종이 몇(백)장(책)이면 하루이틀며칠 너끈하잖아요 ㅎㅎㅎ 어린 솜씨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님 ㅎㅎ
 

 눈독들이던 ‘음식과 요리’를 질렀다. 알라딘이 선물 준 적립금에 내 돈 조금 보태서 우주점 중고로 샀다. 중고래도 한 권 5만원에 가까운 벽돌…식재료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업체에서 분쇄해준 커피에다 직접 드리퍼 기울이는 것도 귀찮아서 이제 아로마보이로 드립해 먹는 주제에 커피 마스터 되고 싶었는지 커피책도 갖췄다. 1200쪽 넘는 음식책과, 400쪽 넘는 커피책만 있으면 먹거리의 과학 전문가가 될 것 같지만 현실은…


 

 어려서부터 끼니 챙기는게 늘 귀찮고 고역이었다. 알약 하나로 순식간에 한 끼 해결하는 미래를 꿈꿨는데, 아직 그 미래 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나마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인 건, 십몇년전 독서실 다닐 땐 점심 도시락으로 유부초밥 싸 가거나 독서실 아래 분식점에서 깨작깨작 한 끼를 떼우곤 했는데, 요즘에는 단백질 20그램 들었다는 음료수랑 단백질 9-10그램 들었다는 시리얼바 하나로 5분도 안 되서 뚝딱 점심 끼니를 해결한다. 스터디카페에도 원두커피 머신이 있지만 집에서 좋아하는 원두로 드립 커피를 두 잔씩 내려다가 텀블러에 담아와서 마신다. 그 정도 연료로 스터디카페에 7-8시간을 머물 수 있다. 한줌 먹고 책상 머리를 지키고 있으면 내가 공부를 하는 건지, 다이어트를 하는 건지, 죄수 체험을 하는 건지 헷갈린다. 점심은 간편식인 대신 아침 저녁은 과일이랑 요거트랑 견과류랑 고기랑 곡물(주로 귀리) 등등 골고루 챙겨먹는다. 간단하게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나름 식품 공학의 진보이긴 하겠다. 이렇게나 먹는데 소질 없는 놈한테 먹는 것에 관한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부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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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4-04-10 0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 책에 걸맞는 최고급 칼이랑 도마를 사셔야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04-10 08:57   좋아요 1 | URL
눈으로만 만들고 뇌로만 먹는 책상머리 셰프 하겠습니다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4-04-16 09:43   좋아요 1 | URL
유뷰만두님 ㅋㅋ열반인님 부담주셔도 ㅋㅋ부담 안 받으시봐요. 끼니 때우는 알약을 개발하려 하실듯.

근데 책 표지만 봐서는 벽돌인줄 모르겠어요. 실물로 보고 싶다는 엉뚱한 호기심이 생기네요 ㅎ

반유행열반인 2024-04-17 19:50   좋아요 0 | URL
얄님 400쪽짜리 책이랑 같이 붙여둬도 둘이만 찍으니 벽돌 티가 안나네요 ㅎㅎ

라로 2024-04-1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두껍다요! 저도 늘 그런 마음으로 책을 삽니다. 저 책을 읽으면 더 똑똑해 질 것 같다거나, 일본어나 스페인어를 잘하게 될 거 같다거나 등등요. 암튼 잘 지내시죠!^^

반유행열반인 2024-04-14 18:57   좋아요 0 | URL
라로님! 비비 할머님!!도 잘 지내시죠! 공부하시느라 고생 많으시고 저도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ㅋㅋㅋ 이제 진짜 그만 사고 있는 거 남은 평생 읽어야 하는데… 수능책만 읽는(?) 현실…ㅋㅋㅋㅋ
 

 내 책은 제 자리를 찾았고 내게 온 길 잃은 책들도 전송했다. 그새 알라딘이 적립금 선물줘서 애기책 또 질러서 같이 도착…내 기념품으로 음식에 관한 왕벽돌책 우주점에 시켰는데 그건 아직 안 왔다. 


 연애 20주년 기념으로 동네 초밥집 가서 초밥 사왔다. 늘 모질고 모지라게 구는 나새끼지만 조금 덜 모날 궁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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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4-16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애 20주년...^^ 알콩콩

축하드립니다.
기념 초밥 까지 사오시는 센스, 모나시기는요^^ 달달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04-17 19: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얄님 ㅎㅎ초밥은 달달하니 맛있더라고요. ㅎㅎㅎㅎ
 

 읽지는 못해도 책 구매는 꾸준한 나날. 월초가 되어 알라딘 직배송으로 어린이용책 dot to dot이랑 스티커북도 사고, 직배송 중고로 진화 관련책도 샀다. 


 회원 개인 판매 물품 중에 팔백작님께 홍보 당해 눈독들이고 있던 ‘세레나데’를 5000원에 팔고 있는 걸 찾았다. 아니, 나름 신간 아닌가? 이거저거 요거저거 신나게 담아서 출간 1-2년 밖에 안 된 제법 신간들을 3만3천원에 7권… 너무 아름다운 구매다!

 


 스터디카페 다녀와서 신나게 책 택배 상자를 열었는데…열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박스 틈새로 보이는 책은 내가 살만한 제목이 아니었다. 덤을 주신 건가… 그러나 모두다 생소한 책들…깨끗하지만 제목부터 처음 접하는 책들…


 책 상자 열면서 그렇구나…부자는 천천히 벌지 않는구나… 인생 한 방 있는 걸까 궁금하다 그렇지만 이게 무슨 일일까…

 판매자님과 연락을 취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역시나 엉뚱한 소설책 만화책만 받으신 다른 구매자분이 계신 걸 확인했다. 우연히도 둘다 7권의 책을 주문해서 책 배송이 반대로 간 모양이었다. 

 제 책들은 거기 잘 있군요…

 다시 반품 과정 거치지 않고 구매자끼리 서로 보내주고 판매자님이 보상하시는 걸로 합의가 되어서 다행이지만… (아니 이거 알라딘이 알면 안 되는가?) 저녁 시간은 택배 까고, 연락하고, 다시 포장하고, 택배 예약하다가 밤중이 되었다…


 그러고보면 거의 20년을 샀어도 책 잘못 보낸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로 희소한 경우인 것을 보면… 참 잘했어요 알라딘. 중고 구매의 고충? 재미? 이변? 세상은 넓고 다양한 책이 존재한다는 것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두 사람에게 같은 편지 적어 보냈다가 겉과 속의 이름 틀려서 날벼락 떨어진 흘러간 옛 가요도 생각났다. (왜? ㅋㅋㅋㅋㅋ) 같이 듣고 가시죠. 쿨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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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6 0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두 사람한테 편지와 다른 걸 보내기도 하는데, 보내고 나서 편지 바뀐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다행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어요 거의 마지막에 한번 더 보기는 하는데, 그걸 안 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 걱정했어요

책이 바뀌어서 오다니... 그런 일은 어쩌다 한번 일어나겠지요


희선

반유행열반인 2024-04-06 11:3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식은 처음 겪어서 당황했는데 일단 잘 해결되길 빌고 있어요. 저도 애기 때는 종이 손편지 많이 썼는데 아직도 손글씨 편지 쓰시는 희선님 편지 받는 분은 다정함을 오롯이 느끼시겠습니다.

잠자냥 2024-04-06 05: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보통 영화에서는 저러다 사랑이 싹트고……🤔

공쟝쟝 2024-04-06 11:06   좋아요 1 | URL
떼잉…. 몹쓸… 총상 입은 밤하늘과 급박하게 돈버는 부자 사이에는 한 톨의
불꽃이 일지 않는다…

공쟝쟝 2024-04-06 11:08   좋아요 1 | URL
하지만 공쟝쟝은 저 책탑에서… 상당한 위험을 발견하고 마는데…

반유행열반인 2024-04-06 11:36   좋아요 1 | URL
이 경우엔 책 바뀐 사람이 상대인지 판매자가 상대인지
헷갈립니다…둘다?!
공쟝쟝님 그렇죠 푸코가 있더라구요…

공쟝쟝 2024-04-06 11:4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죠 ㅋㅋㅋㅋㅋ 푸코죠 ㅋㅋㅋㅋㅋ 투자…와… 푸코적 저항 ㅋㅋㅋ (그만햇) 저는 저 사람과라면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책 목록의 아이러니를…. 알고 싶다…

반유행열반인 2024-04-06 11:41   좋아요 1 | URL
그래도 책 읽는(?)파는(?)분들이라 순순하게 교환해, 미안해, 잘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물건 같으면 아 됐고 나는 반품신청할란다 알아서 바꿔다 똑바로 내놔라 할 거 같은데 말이죠…

공쟝쟝 2024-04-06 11:46   좋아요 1 | URL
사랑이 싹트지 않아 다행입니다. 제가 이토록 쉬운 여자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안되는데… 댓글 배려브럿네 ㅋㅋㅋ 주말 잘보내요 반반님!

반유행열반인 2024-04-06 11:49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도 주말 잘 보내시길!!

Falstaff 2024-04-06 07: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레나데 5천원, 심봤다!!!

반유행열반인 2024-04-06 11:38   좋아요 0 | URL
심봤다! 외치고 배송비 무료지점까지 살뜰하게 긁어 모았는데…뜯고보니 미셸 푸코랑 톨스토이가 유일하게 아는 이름이지 뭡니까…

새파랑 2024-04-06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극과 극의 책탑이군요... 재미있는 상황은 열반인님에게만 생김!

반유행열반인 2024-04-06 11:39   좋아요 1 | URL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책들이라 당황했습니다ㅎㅎㅎ 상황은 재미있는데 택배 박스가 테이프 칭칭 감긴 걸 뜯다 훼손되서 다시 포장할 때 애 먹어서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아요.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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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 프리모 레비.



 시작은 예쁜 담요였을지도 모른다. 올리버 색스가 자기 나이와 같은 원자 번호의 원소로 이루어진 기념품을 모으는 장면을 읽고 흥미를 느꼈을지도. 이젠 정확한 내 나이를 모르겠다. 이트륨, 지르코늄, 니오븀 셋 중 하나인데, 셋다 내구도가 좋다고 한다. 다른 금속에 섞어 강화시켜주거나, 산화물을 치과 치료에 쓴다. 확실히 살아온 중에 몸도 마음도 제일 튼튼한 시절이긴 하다. 


 

 막연하게 물리나 화학 공부를 더 해 보고 싶었다. 그럼 수학도 왠지 같이 해야 할 것 같고. 과학이든 수학이든 고교 수준부터 보자, 그럼 아예 수능을 볼까? 하다가 그해부터 약대가 다시 수능으로 입학생을 뽑는 걸 알게 되었다. 화학, 화학이다! 하고 EBS 화학 강의를 몇 개 보다 보름만에 접었다. 진리의 생지(생명과학+지구과학)! 입시에 성공하면 나는 주로 화학을 공부하게 될텐데, 화학을 배우려면 생명과학과 지구과학으로 대학 문을 뚫어야 하는 묘한 상황… 작년에 조금 쉬는 김에 물리 해 볼까...하면서 내신 강의를 석달 정도 2/3쯤 듣다가 다시 생명과학으로 돌아왔다. ㅋㅋㅋ반도체까지 배우긴 했는데 역시…물리야 만나서 반가웠고 시험으론 만나지 말자…



 책 쟁이는 비중이 문학과 교양과학책이 거의 반반 비등비등한, 뼈문과지만 이과로 개조되길 열망하는 나새끼는, 그래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라는 책이 오래도록 궁금했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내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았다. 막상 중고로 책을 마련하고 나니 어, 과학책인 줄 알았는데 소설이야? 작가가 과학자 아니야? 소설가야? 아 둘다야? 읽지도 않고 그냥 어리둥절하면서 꽂아놨다. 그러고나서도 프리모 레비 책만 보이면 막 주워모아서 다섯 권이나 꽂아 놨다. 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오래 읽지 않았다. 읽게 된다면 주기율표가 제일 먼저겠지. 



 해가 바뀌고서 책을 펼쳤고, 거의 석 달에 걸쳐 읽었다. 책은 깜짝 놀랄 정도로 흥미로웠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좋았다. 그런데도 책을 매일 읽지는 못하는 딱한 날이 이어졌다. 강제수용소 생활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하여간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나날이다. 공부를 많이 못한 날은 공부도 안 하는 게 책은 무슨! 공부 많이 한 날은 상으로 읽자, 하지만 이미 피곤해져서 그냥 쓰러져 잤다. 졸음을 참고 열한시 열두시 언저리에 원소 한 꼭지씩 읽는 날은 운이 좋았다. 그리고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컵받침에 쏟은 설탕 알갱이 한 알 한 알 집어먹어서 즐거운 건지 설탕은 원래 맛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랬다. 



 철의 이미지와 잘 맞는 산 타는 강인한 산드로(산에 올라가서 산드로? 미안…)의 이야기가 강렬했다. 읽어나갈수록 강렬함과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자꾸 갱신되었다. 폐기물에서 니켈 추출하려고 광산에서 일하던 시절 레비가 쓴 환상동화들도 좀 어이없지만 재미있었다. 야, 거대한 납 맥 찾았으니 이제 자손을 퍼뜨리자! 수은 판 돈으로 내 부인한테 껄떡대는 놈한테 소개시켜줄 여자를 데려왔는데 그냥 이 여자, 나랑 살자! 이런 원시적인 빻은 이야기가 왜 재미있어…

 인으로 당뇨 치료하려는 무의미한 실험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의미있었던, 좋아하는 직장 동료 겸 동창생 여자친구 붙잡지 못하는 이야기, 포로로 잡힌 중에 곧 다시 풀려나 흐르는 강에서 사금 캘 것을 자랑하는 다른 죄수를 보고 부러워하는 이야기, 왠 고객이 고객 상담하자고 갔더니 지루하게 생존담 썰 풀면서 패전 독일 병사들이 준 우라늄이라고 보내준 걸 분석한 이야기, 감광지의 완두콩 얼룩의 비밀, 결함있는 니스 원료와 바나듐 때문에 재회하게 된 수용소의 독일군 학자, 마지막은 탄소 순환을 온갖 비유 버무려 아름답고 비장하게 마무리해서 오 사기다… 화학자가 글도 잘 써… 생존도 잘 해… 남의 이야기도 잘 듣고 잘 주워다 잘 모아놨다 했다. 

 본문도 좋은데 말미에는 필립 로스가 토리노의 레비 집 찾아가서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놨다. 나도 질 수 없지! 문돌이 파워! 하고 인터뷰 도입부부터 겁나 힘준 게 느껴져서 이거 읽는 재미도 좋았다. 필립 로스는 질문 던지는 거 보니까 참 좋은 독자였다… 레비는 로스랑 이야기 나누면서 내 책을 이렇게 열심히 제대로 읽은 사람이랑 말하니까 좋다 히히 했을 것 같다. 그치만 지금은 두 할배 다 이 세상에 없구나…


 나와 주변을 이루는 수많은 물질들 대부분에 앞선 사람들이 열심히 이름을 붙여 두었다. 분자 구조식이랑 특성이랑 다 잘 분석해서 요렇게 조렇게 활용할 방법도 찾아 두었다. 새로운 걸 발견하거나 만들기는 커녕, 남들이 이미 그렇게 정리해둔 물질 중 아주 일부를 시험 기간 앞두고 이름과 화학식과 특성을 나타내는 숫자들과 구조 등등을 달달 잠시 외우다 잊어버리고 말겠지. 나한테 그걸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하고자 하는 것, 하게 될 것은 명확하고 그걸 하겠다고 해야 할 수단도 분명하니까, 해야지. 그때 되면 모아둔 남은 레비의 책도 내킬 때마다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화학 공부 안 하게 되어도 책은 읽을 수 있겠네… 


 알라딘 사은품으로 모셔둔 주기율표 북램프는 왜 이렇게 불빛이 흐릿하고 약하고 표면도 희끄무레하냐...거의 4-5년 만에 그 이유를 알았다. 양면을 덮은 보호 필름을 하나도 떼지 않아서 그랬다. 필름을 벗겨내자 빛도 음각된 주기율표도 아주 또렷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인간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나트륨 넣을 자리에 칼륨 넣고 펑 터지고 난리 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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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9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리 화학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인간은 다양합니다! ㅋㅋㅋㅋ 레비의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궁금해지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3-29 20:56   좋아요 1 | URL
그게 딱 2년 반 전 나새끼의 바람이었고…지금은 아닙니다…안 하고 싶어요…공부 1도 안 한 영어 역사만 1등급, 시간 조금 들인 국어도 1등급인데 대부분의 시간 쏟아 붓는 수학 과학은 내내 3,4등급 ㅋㅋㅋㅋ 저는 역시나 뼈문과였던 것입니다… 레비 다른 책은 읽으셨군요. 저한테는 아주 좋았습니다.

새파랑 2024-03-30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과학탐구 물리 했었는데 ㅋㅋ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번도 물리 화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던데,
대단하십니다 ㅋㅋ

근데 주기율표 북램프 사은품은 갖고 싶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3-30 11:01   좋아요 1 | URL
4-5년 전 사은품이었는데 램프 사진보고 은근히 물욕 올리시는 분이 있네요 ㅋㅋㅋ알라딘은 주기율표 굿즈 시리즈 재출시를 고려해주십시오 ㅋㅋㅋ안경수건처럼 헐랭하게 만들지 말고 이쁘게 ㅋㅋㅋ

2024-04-05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5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