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대의 쇼 - 진화가 펼쳐낸 경이롭고 찬란한 생명의 역사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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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는 거의 대표작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 즉 복제 매개물질로" meme"이라는 논의를 제기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눈먼 시계공>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요모조목 비교 비판하면서 포스터 다윈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고 급기야 <만들어진 신>를 통해서 창조론자들과 유신론자들에게 다윈을 뛰어넘는 문제아 '울트라 다윈'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그동안 도킨스의 삶과 연구는 그야말로 창조론과의 진검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진정한 전사로서의 면모를 십분발휘해 주었다. 특히 <만들어진 신>를 통해서 종교의 폐해중 가장 큰 부분인 어린자녀들에게 강요되는 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은 두고두고 무신론자나 유신론자들에게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시각을 틀을 약간만 회전하면 마치 도킨스의 학문과 신념들이 마치 창조론을 부정하는데 촛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편협되고 사소한 걱정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기우를 가질 수 도 있다. 물론 그의 여태까지의 논조의 강약과 화련한 비유를 볼 때 일반 독자들로서는 충분한 오해의 소지가 담겨져 있음을 아마 그 자신도 100%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물론 도킨스 자신은 소를 물가까지 끌고가는데 온갖 감언이설과 약간의 물리적인 협박(?)이 필요하지만 막상 물가에서 물을 먹는것은 소자신만의 선택이지 않느냐고 향변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런한 측면에서 이번 <지상 최대의 쇼>는 창조론과 진검승부를 펼쳤던 그간의 전사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아주 조용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필체의 저서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내용중에 간간이(여태까지 그의 저서에서와 정말 다르게 빈도가 낮은)전사적인 태도로 돌변할 때도 있지만 전반적인 플롯은 서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의 타 저서에 비한다면). 본 저서가 출간되자 마자 또 다시 세계는 뒤숭숭해졌고 각계각층에서 찬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창조론자입장에서는 그저 또 하나의 창조론 반박서 정도로 폄하 하겠지만 건강하고 상식적인 정신적 구조를 가진 일반인들에게는 다른 측면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150여년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이후 출간된 제대로된 진화론의 입문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다윈이후 진행되고 발전하고 발견된 각종 증거와 과학적 사실 그리고 자연현상등 흔히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수긍하는 진리의 파편들을 한데 모아서 "진화란 무엇을 뜻하는가?","진화는 사실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던져 주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각종 증거와 사실들은 그동안 창조론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막상 창조론자들의 반박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실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특히 저자 특유의 비유는 이번 저서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진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사건발생 이후 뒤늦게 도착한 탐정에 비유하면서 풀어가는 진화의 비밀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를 보는 듯한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 홈즈가 사건 현장에서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서 사건을 해결 하듯이 우리가 진화라는 실체를 파악하는 과정 역시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흔적들을 통해서 진화론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그동안 진화을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도 잘못되고 곡해된 진화의 진실에 대해서 재무장을 요구하고 있다. 막연하게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명확하고 잊혀지지 않는 개념정리를 제대로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논증들과 이론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진화적인 현실들과 각종 실험결과들 하나하나를 일일이 기억할 필요성은 없다. 이 분야는 전문가들의 몫일 뿐이다. 단지 일반독자가 기억해야할 것은 진화라는 거대한 줄기를 잡는 것이다. 화는 흔히 창조론자들이 말하는 지적설계자의 절제되고 효율적인 설계도면에 의해서 어느날 갑자기 이 지상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는 철저하게 자연선택과정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가는 기나긴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과정속에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이것 마저도 진화라는 큰 줄기의 지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자의 저서들을 통해서 창조론과 신에 대한 반박(사실 무신론자나 진화론자입장에서는 표현이 좋아 반박이라고 하는 것이지)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번 저서는 진화를 사실로 믿고 있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막연하게 그리고 얄팍한 몇몇 단어로 진화가 사실이라고 믿어 오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하면서도 완벽에 가까운 정신적 무장을 해주는 바이블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진화론이 맞다 아니다(창조론은 분명히 틀렸기에 진화론의 진의 여부만 파악하면 된다는 말이다)라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만한 저서라고 봐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창조론자들(저자는 역사부인자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 역시 도킨스다운 표현이다) 이 간혹 딴지를 거는 '잃어버린 고리'라는 개념에 굳이 반박할 필요성도 없이(사실 도킨스는 어떤면에서 너무 요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안쓰러워 보일정도로 말이다) 진화는 그냥 사실일 뿐이다. 진화라는 현상은 지금도 우리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쇼를 자연 그래도 즉 지적설계자의 설계에 의한 쇼가 아닌( 안무가 없이 엄밀히 말하면 자연이 안무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무계획적이고 무절제한 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는 장엄하고 버라이어티한 쇼를 우리들 눈앞에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우리에게 선사한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도 이 지상 최대 쇼의 출연자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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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와 규칙 - 스티븐 핑커가 들려주는 언어와 마음의 비밀 사이언스 마스터스 19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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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지 1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윈이전부터 막연하게나마 진화론의 개념이 대두되긴 했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인해 세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게 된다. 농업혁명, 문자발명, 산업혁명등 인류역사를 뒤바꾼 거대한 패러다임들이 있었지만 진정한 인류역사의 새장을 연 혁명적 사고는 바로 다윈의 진화론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이치를 신의 시각이 아닌 자연과 인간자체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종교의 영역을 떠나 권력을 쟁취하면서 왜곡된 인간들의 사유는 암흑의 시대 중세를 거치면서 변하지 않는 진리였고 이 진리에 신이 아닌이상 인간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유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사유의 틀을 뒤흔든 혁명이 바로 진화론이었다. 지금처럼 진화론에 기반을 둔 과학적사고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우리들이지만 불과 150년전만 하더라도 아주 위험한 사유였던 것이다. 

그럼 다윈의 진화론의 어디까지 그 해석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을까? <단어와 규칙>은 바로 진화론에 근거를 둔 영역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단어에까지 미치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빈 서판>으로 국내에도 상당히 알려진 저자의 언어학에 대한 고찰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윈사고의 유추는 현대 생물학뿐만 아니라 언어학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화론의 범위를 생물학분야에 한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범위를 확장하면 진화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동안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을 설파하고 있는 이들에게 언어학만큼 구미가 당기는 분야도 없었다. 인간은 어떻게 그 수많은 단어, 특히 영어의 경우 각종 시제와 그 시제에 따른 규칙형과 불규칙형, 단수의 복수화, 명사의 동사화등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체계를 인지하고 사용하는 것은 진화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적설계자에 의해 설계된 시스템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를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반박도 있어지만 그 논조가 강할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진화론의 가장 거대한 뼈대는 자연선택적 논리에 의한 일종의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연성에 근거한 현상이 아닌 나름의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규칙성이 단어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방대한 자료를 살펴보면서 단어의 규칙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뇌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동안 미지의 영역이었던 뇌관련 질환과 언어사용능력의 원인이 서서히 발켜지면서 단어는 일종의 패턴이라는 형식보다는 우리들 마음속의 사전에서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으로 일관되게 연결된 거대한 규칙에 의해 인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대영어와 현대영어를 비교할때 고대에 그토록 많았던 불규칙동사들이 현대에 이르러 급격하게 감소한(물론 비영어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많게만 느껴지지만)원인을 일종의 자연도태로 볼 수 있고 좀 더 확장하여 이러한 불규칙동사를 규칙형의 돌연변이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규칙과 불규칙을 분리하여 패턴적으로 인용해 사용해왔다는 패턴연상망 기억보다는 거대한 규칙형안에 불규칙이 존재했다는 규칙성을 보여주므로서 다윈사고의 확장이 그대로 적용됨을 다시한번 확인하여 준다. 

<단어와 규칙>은 언어학에 대한 진화론적 입장을 적용하여 진화라는 담론을 확장시키는데 기여를 하는 책이다. 물론 언어학적 전문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난해한 내용임은 틀림없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방대한 영어 단어들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인한 그 번역의 이해등에 의해서 이해하기 만만치 않는 책이다. 하지만 거대한 줄기는 진화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읽어가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그동안 영어단어는 규칙형이든 비규칙형이든간에 암기형식으로만 인식했던 비영어권의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영어단어들의 일종의 규칙성을 깨닫게 되면 새삼 죽어만 있었던 영어단어들이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모처럼 영어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어가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규칙은 생물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생물학이던 언어학이던 규칙을 거슬리는것은 불편한 것이다. 결국 불편한 것은 어딘가 어색한 것이고 어색한 것은 자연의 선택에서 제외될 확률이 그 만큼 높은 것이다. 저자는 다윈사유의 유추를 통해서 우리가 여전히 혁명적인 패러다임속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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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1859년의 과학과 기술
피터 매시니스 지음, 석기용 옮김 / 부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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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양조씨들에 의해 일명 강화도령이라고 알려진 정말 정치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철종의 재임기간이 10년째를 맞이하고, 신흥대륙 북아메리카에서 두개의 결정적인 철도 노선의 완공, 해저 케이블의 설치로 인한 격지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증기 인쇄기와 철도의 발달로 인해 거의 실시간의 뉴스가 유럽전역에서 공유되고, 한때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스포츠 패션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서커스 곡예사 박물관 동물원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등장하고, 노동자들의 의식이 한층 깨어나 노조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바로 1859년에 일었났던 세계소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859년이 우리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름아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1859년을 기점으로 세계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오는 한편의 예고탄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지금의 우리나 그 당시를 살아갔던 이들이 예상치도 못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서양세계는 팍스로마나를 거쳐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승인과 이후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성쇄로 인해 흔히들 표현하는 암흑이 시대 즉 중세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종교와 신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에서 인간의 역활을 하나 둘씩 찾게 되지만 그 시작과 힘은 극히 미비했다. 다시 계몽주의와 민족국가형성 그리고 절대왕권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러한 미비했던 인간의 힘은 한층 강화되지만 역시 아직까지도 지구의 역사가 구약성서를 해석한 종교인들에 의해 6000년이라는 연대적 숫자를 정설로 받아 들여야할 만큼 시대는 성숙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물며 신에 의한 천지창조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창조가 설계되었다는 창조론이 한줌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역사는 수십억년은 족히 되고도 남는다는지 혹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신이라는 설계자에 의해 빈틈 없이 설계되고 계획되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을 통해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진화했다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야말로 허튼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이느 마치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라 뜨는 것 처럼 보인다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859년 다윈의 <종이 기원>출판을 계기로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마치 예정된 선로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는 바로 세계사적으로 주시되는 1859년의 시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859년을 전후해서 발생했던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면 왜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나열을 통해서 얼핏 보기엔 다윈과 무관하리만큼의 시대적 소사를 통해서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엄청한 과학적 발전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비단 이러한 해택이 인류에게 골구로 퍼지지 못한 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창조 해내고 관리하지 못한 제도적인 문제점이지 이는 결코 역사발전의 오류내지는 역행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적 풍요와 기술발달을 하루아침에 이루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1859년을 전후에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다윈의 <종이 기원>의 근간이 되었고 세상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다윈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무르익은 분위기에 다윈은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생각은 다윈의 독창적인 학술이 아니다 이전부터 라마르크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의 관심사였고 그들은 이제 근접했던 것이다. 단지 다윈이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면 아무도 생각지 못한 사실을 그대로 세상에 뿌렸을 뿐이다. 바로 이점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1859년을 전후로 세상은 서서히 변화의 패러다임속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단지 그 패러다임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지 망설이거나 주저했을 뿐이다. 이제 다윈의 등장으로 이러한 패러다임은 가속 받게 되었고 끊없이 확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미래의 장미빛만을 예고했던 것은 아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게 새로운 골치덩어리 역시 그 맥을 같이 하여 확대재생산 되었던 것이다. 부의 집중과 그로인한 갈등, 새로운 질병의 대두, 혼인과 이혼이라는 가족관계의 새로운 역학관계와 범죄의 증가등 각종 사회적 병폐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희망의 패러다임속에 파묻혀 고스란히 후대에 전달된 것이다.

저자는 정과 부의 두가지 관점에서 1859년전후를 파악하고 보여주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은 같은 강에 발을 담그지만 그 담 강의 강물은 늘 다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는 흐르는 강이라는 거대한 변화는 그 어떠한 누구도 거를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변화라는 거대한 강물 앞에서 머뭇거릴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강을 건너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인 것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필두로한 1859년전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은 바로 변화라는 강물에 과감히 발을 담갔던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긍정적인과 부정적인 것들이 담겨져 있더라도 변화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단 이미 한번 흘러간 강물을 어떻게 되돌리수 없지만 다시 다가오는 변화라는 강물에 어떻게 발을 담글건지에 대한 판단은 지금의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고민거리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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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일 속의 우주 - 한 천문학자의 사계절 산책기 자연과 인간 14
쳇 레이모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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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는 되는 다반사나 좀 더 한차원을 넘어서 사고를 고찰하거나 대상을 관찰할 경우 거시적 즉 매크로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다. 특히 우주라는 담론적인 개념에선 그 방대함과 거대함에 자칫 기가 눌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고안한 아니 정의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의 속도로 우주의 범위를 표현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추론되는 은하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숫자들의 향연속에서 그저 멍해질 뿐이다. 이런면에서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 세상의 진정한 미스터리는 보이지 않는게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매크로적인 그리고 그 크기의 정량화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를 과연 우리는 볼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역으로 생각해서 우주-->우리은하-->태양계-->지구라는 크기의 절대화를 축소하여 마이크로적인 시각으로 대상을 볼때 비로소 현학적인 대상으로 가늠자의 범위내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마이크로적인 범위 즉 우리가 쉽게 보고 넘기는 대상들을 우리는 많이들 외면하고 있다.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볼 필요성이 없어서 넘어가는 것인지 몰라도 다름아닌 바로 우리 발길에 닿고 손길로 느낄 수 있는 미시적인 대상에 대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 또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쳇 레이모의 <1마일속의 우주>는 물리학자겸 천문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일터로 대략 1.6km를 걸어서 출퇴근 하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마을, 숲, 돌덩이, 개울, 들판, 초원등을 통해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보여주는 과학에세이이다. 저자 자신이 37년간 걸었던 길은 신대륙의 발견과 이주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대격변을 통해서 급속한 산업화과정속에서 세계 어느 곳이나 겪어던 곳중에 하나이다. 산업화는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지 무지했던지 간에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에 모든 생명체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 풍요롭고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단 물론 이러한 풍요의 잣대는 인류이외의 생명종에게 동의를 구할순 없을지라도 농업혁명이후 인류사의 흐름속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는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단 타종의 희생이 있었고 의도 되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것 또한 사실임에는 분명한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오랜시간 걸었던 길을 통해서 이러한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그리고 마이크로적인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산업혁명의 대명사격인 에임스 삽공장의 흥망성쇠와 그로 인한 주변 자연 환경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인류가 자연에게 가했던 행위 그리고 반대급부로 자연이 인류에게 되돌려줬던 현상에 대해서 제3자적 관점에서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다. 급격한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온난화등을 비롯한 환경파괴에 대해서 마치 환경보호를 주창하는 전도사적인 견지에서 설파하는 형식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기술하고 있다. 

지금같은 추세로 가면 머지않는 장래에 환경파괴로 인한 엄청난 댓가를 치룰것이라는 대재앙을 여기저기서 예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이 책에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확인 시켜준다. 한때 황무지화된 들판과 초원 그리고 개울과 숲에서 인간의 약간의 노력(부작위을 포함해서)만으로도 자연은 그 자정능력과 회복능력에서 탁월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사례를 대표적 사례로 보아서 그동안 환경파괴에 앞장선 인류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차피 인류와 자연과 우주라는 존재는 같이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중에서 인간인 우리에게 선택의 폭이 다소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인류가 수렵, 채집생활을 포기한 오래전 부터 자연에 대한 인공적 변경과 우월의식은 가졌던 것이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의식은 버리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인류와 자연의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유기적관계를 인식하고 상생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자신이 오래동안 걸어왔던 길주변의 아주 작은 세계를 통해서 재확인 하고 그 생명력의 기적에 다시금 감탄한다. 그동안 너무 거시적 시각에서 접급했던 인류와 자연과의 공생관계의 방법을 작은 숲과 개울에서 찾은 것이다. 저자와 같이 걷는 길은 주변에 햇살을 머금고 있는 숲과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는 초원에는 자연 나름대로의 규칙과 생명의 기적이 숨어있는 것이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미스터리의 해법이 바로 우리 발아래에 놓여있다. 대우주의 거대한 생명이 바로 1마일속으로 고스란히 다가온 것이다


밤하늘의 시인이라는 별칭처럼 저자는 책을 읽는 동안 참 편안하게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이나 새로운 현상이나 사실을 추구하는 지식전달이 아닌 우리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아주 작은 곳에서 그리고 보지 않을려고 했던 현상들에서 저자는 자연과 인류의 공생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바로 우리와 함께 숨을 쉬고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우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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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엽충 -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오파비니아 4
리처드 포티 지음, 이한음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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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나 한번 쯤은 박물관이나 아니면 TV다큐멘타리를 통해서 삼엽충이라는 고대생물에 대해서 들어보고 보아왔을 것이다.

엽충(三葉蟲; Trilobites)
그러니까 이 고대생물은 정확히 지금으로 부터 5억 4천만년전인 고생대 전기 캄브리아기에 우연히
출생(지금의 과학으론 그 진화단계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에서 약 2억 5천만년전인 고생대 후기 폐름기에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고대생물이다.  

우리가 자연사 박물관에서 접하는 삼엽충의 화석으로 보면 그 생김새도 독특하거니와 크기 또한 각양각색이다. 대충 일반인들의
짐작으로 수십종이 있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금까지 화석이라는 타임캡술을 통해서 확인된 삼엽충의 종수는 자그만친 1만 5천여종이 넘는다. 아마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생물보다도 방대한 가족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일반인들에게 고대생물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비록 중생대에 지구를 점령했던 공룡을 제외하고는 그
이외의 고대생물들에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자은 이른 고대생물의 전문가이다. 특히 삼엽충 연구에 30년이상을 매진하고 있는 이른바 삼엽충의 매니아이다. 어린시절 우연
히 접하게 된 삼엽충의 화석에서 감흥을 받아 삼엽충을 사랑하게 되었다(저자의 표현). 그 만큼 삼엽충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것이다. 처음 책을 접하면서 약간은 당황했다 서문에서 부터 출발한 내용은 일종의 소설같은 뉘양스를 풍기면서 더욱더 읽는이로 하여금 과학서적인지 에세이인지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지을수 없었으나 책을 더 읽을수록 역시 전문가의 논지가 제대로 표현되고 있다. 이 책이 단지 딱딱한 과학적 지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면 상당히 읽기가 난해하고 정말 몇달을 읽어도 그 내용이 쉽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저자인 기처드 포티가 삼엽충을 연구하게된 동기가 삼엽충의 사랑에서 부터 출발했듯이 저자의 서술내용은 그야 말로 삼엽충 가족사를 대변하
고 있듯이 아주 상세하게 그리고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한 부분이 확연히 들어난다. 서평을 통해서 삼엽충의 구조나 진화방식 그리고 생활환경에 대해선 논할 수 없지만. 단 하나 우리가 보기엔(지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정말 단순해 보이는 고대생물이 자그만치 3억년이라는 긴세월(인간의 역사로 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시간적 개념임이 틀림없다)을 살아갔다는 것 자체가 경이 그 자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룡의 경우도 대략 2억년정도를 지구상에서 살았다. 삼엽충보다 더 진화했다고 하는 공룡도 말이다. 그 만큼 삼엽충은 끈질긴 생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폐름기에 가서 아직 그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이유로 전 지구상의 90%에 가까운 생명체가 갑자기 멸종하는 시기에 삼엽충도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그 흔적은 이제 화석이라는 형태로 인간에 고슨란히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달해주는 삼엽충에 관한 지식은 정말 방대하고 상세하다. 삽화나 사진을 통해서 보는 삼엽충의 눈은 그야말로 지금
도 살아있는 생명체를 보는듯한 착각을 주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가 단지 삼엽충에 대한 지식을 일반인들에 널리 알리는데만 국한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칼 세이건과 그의 아내 앤 드루얀의 공저인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를 통해서 현생인류가 얼마나 많은 착각에 빠져 살아가고 있
는가를 보여주듯이 저자의 의도 또한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지구생명의 역사에서 고작 몇 퍼센트의 비중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는 인류가??이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자그만치 3억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1만5천여종이라는 방대한 혈통을 가지고 지구를 호령했던 삼엽충이라는 생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의 가장 큰 의도는 이런 고대생물을 통해서 진정한 지구사랑에 있지 않나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그 먼나먼 옛날
앞서간 생물들의 연장선에 놓여있는것이지 현생인류탄생이후 인류만의 지구로 남지 않는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지층속에는 아직 발견되지 못한 삼엽충의 화석들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흔적은 다름 아닌 우리
인류의 거울인 셈이다. 언젠가 우리 인류도 화석이라는 형태로 인류뒤를 이를 생명체에게 전달될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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