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는 존재!

-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1952)

 

 

 

열아홉 살에 전쟁을 경험했고 스물두 살에 결혼했으며 스물네 살에 아버지가 되었고 바로 그 나이에 직업 작가가 된 헤밍웨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로 스물일곱의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내놓으면서 문학적인 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한 손에 거머쥔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전쟁 로맨스들은 수차례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사실 헤밍웨이는 그의 분신들을 연기했던 웬만한 할리우드 배우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 스스로 기꺼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으며 적어도 그것에 길들여졌다. 네 번에 걸친 결혼과 화려한여성 편력, 역동적이고 남성적인 취미들(권투, 낚시, 사냥, 투우 관람 등), 잦은 전쟁 체험(그는 주로 종군 기자였다), 모험을 향한 추구와 역마살.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졌고 그 출처는 많은 경우 그 자신이었다. 오죽하면 헤밍웨이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들고 있는 사진까지 있을까. 이런 영웅과 같은 인기 작가가 십여 년간 침체기를 겪고서 1952년 쉰 살을 넘긴 노인이 돼서 돌아왔다. 헤밍웨이 특유의 압축적이고 간결한 문체가 돋보이는 소설 <노인과 바다>를 들고서 말이다.

 

 

 

 

 

 

 

 

 

 

 

 

 

멕시코 만류에서 낚시를 하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벌써 팔십사일 째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그를 잘 따르는 소년 마놀린도 부모의 강권 때문에 노인의 배에 타지 못하게 됐다. 노인은 혼자 낚시를 떠난다. 스스로도 운이 다 됐다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청새치 한 마리가 걸려든다. 이 녀석을 쟁취하기 위한, 혹은 지키기 위한 노인의 사투가 시작된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난 너를 죽이고 말 테다.”(55) 이렇게 다짐하는 늙은 어부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요기를 할 때는 녀석이 굶주릴 것이라는 생각에 연민을 느끼고, 캄캄한 밤, 잠이 들 때는 녀석 역시 휴식하길 바란다. 그러다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100)하고 자문하기에 이른다.

 

 

 

정녕 어느 새인가 청새치와의 투쟁은 둘이 함께 하는 아름다운 항해로 바뀌어 있다. 그 때, 진즉부터 주변을 맴돌던 상어 떼의 습격으로 인해 이 유일한 동반자를 잃게 된다. 그럼에도 노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얘기하고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스린다.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107)

 

천생 어부이고자 하는 그의 노획물은 그러나, 앙상한 등뼈와 뾰족한 주둥이와 시커먼 머리통만 남겼을 뿐이다. 노인은 사람들의 조롱을 뒤로 하고 소년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이 든다. 꿈속에서 그는 바다로 나가기 전, 또 낚시를 하는 동안 계속 그리워하던 사자를 본다. 소년 시절에 가보았던 황혼녘의 아프리카 해변을 뛰노는, 새끼 고양이 같은 사자들. 이것이야말로 낙원의 상징일진대, 노인의 삶은 잇따른 실패와 불운에도 불구하고 결코 비극이 아니다. 소설의 바깥, 작가의 삶은 어떠한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 이후 헤밍웨이는 노벨상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은 각종 사고와 후유증, 각종 질병과 그 치료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 때문에 극도로 피폐해졌다가 1961년 엽총 자살로 마감된다. 과연 사냥꾼의 마지막 먹이는 자기 자신”(제프리 메이어스, <헤밍웨이>, 2, 899)이던가. 사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삶을 문학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고행자-순교자 유형이라기보다는 삶과 문학을 동시적으로 소비하고 향유하는 유형에 속했으며 그의 작품 역시 동시대의 몇몇 걸작에 필적할 만한 깊이와 무게를 갖추지 못했다.(제프리 마이어스, 916) 그러나 그에게는 대학과 도서관에서 쌓은 지식과 교양 대신 자연과 역사의 현장에서 얻은 산 체험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문학은 그가 자살로써 완성한 인생과 어우러지면서 진정성을 획득한다. 흐루쇼프 집권 시절, 이른바 해빙기의 소련에서는 그를 모방한 텁수룩한 턱수염과 점퍼 차림이 유행했다. 헤밍웨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정신과 삶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에, 바다 위에서 물고기와 바다 새를 향해 미친 듯 혼자 주절대는 늙은 어부에게 열광한다. ‘노인이 주인공임에도 소년이 더 많이 읽는 <노인과 바다>. ‘소년이길 멈추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 소설을 우리는 언젠가 기필코 노인이 되기 위해 또다시 읽게 될 것이다. 한 시절에는 그 역시 소년이었던 산티아고 노인의 말은 그때 더 소중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104)

 

-- <책&>

 

-- 올해 헤밍웨이 저작권이 소멸돼서 그의 소설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는데요, 오랜만에 쭉 다시 보니 나름 새롭더라고요. 글쎄, 소설 자체가 걸작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으나, 인물이 참 좋지요? ㅎㅎ 어릴 때 봤던, <주말의 명화>(?)와 같은 이런 프로에서 소개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런 영화도 떠오르고요.  낡은 티브이 앞에 코를 박고서 봤던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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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11-1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소니 퀸 주연의 노인과 바다 영화는 1990년 작품이니까 우리나라 텔리비전에서 방영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죠. 어린 시절 보신 노인과 바다는 스펜서 트레이시(1900~1968) 주연의 1958년 작품일 것입니다.

민음사 책 번역하신 분 맞죠?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푸른괭이 2012-11-19 16:38   좋아요 0 | URL
예, 차려놓은 건 별로 없지만 자주 오세요^^; 그런데 제가 밑에서 언급한 영화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랍니다.^^;
 

 

점심을 먹은 다음 소영이는 운동장 한 귀퉁이에서 돌멩이를 갖고 공기놀이를 했다. 옆에서는 아이들이 늑목을 타고 있었다. 은학이와 태형이도 그 틈에 끼여 있었다. 둘이 몸 차이가 너무 나서, 어떨 때는 둘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처럼도 보였다. 은학이의 굵은 팔뚝 밑으로 태영이의 발이 혹처럼 달랑거렸다. 그리고 은학이의 어깨 너머로 태형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춤을 추듯 팔랑댔다. 바로 그 때 다들 얼음 망치로 얻어맞은 듯 화면이 정지되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3초쯤 뒤에는 이전보다 더 부산한 움직임과 더 요란한 소리가 시작됐다. 그 사이로 여느 때와 달리 몹시 흥분한 은학이의 굵직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데려와, 빨리!”

서너 명의 아이들이 다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소영이의 눈앞에는 얼굴 아랫부분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태형이가 서 있었다. 딱딱한 철봉이 살짝 벌어진 입에 탁 받히는 순간, 태형이는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경악과 공포와 통증이 한꺼번에 태형이를 덮쳐버렸다. 급기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 누나, 누나 미워!”

입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태형이는 눈물을 훔친 손으로 아파서 미칠 것 같은 입에 손을 살짝 댔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감지되자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양손은 온통 피범벅이 됐다. 소영이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태형이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의사 선생님이 다 고쳐 줄 거야!”

이렇게 말하며 소영이는 태형이의 손을 잡았다. 피 칠갑을 한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소영이는 태형이의 손을 살짝 펴보았다. 손바닥 위에는, 도무지 어느 순간에 손에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이빨 두 개가 피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그나마 하나는 삼분의 일 정도가 부서져 나간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다시 붙여 줄 거야, 그치, 누나?”

, !”

소영이는 풀었던 태형이의 손을 다시 꼭 쥐어 주었다. 태형이의 믿음은 정녕 소영이의 믿음이기도 했다.

 

태형이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은학이는 자기도 가겠다고 박박 우겼지만 그냥 제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걸로 끝났다. 결국 섬마을 병원으론 해결이 안 돼, 태형이는 시내 병원으로 이송됐다. 위쪽, 아래쪽 앞니 네 개는 완전히 나가버렸다. 그 중 하나는 영구치였다. 이빨이 부서진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잇몸 뼈에 금이 간 것이었다. 태형이는 한동안 입원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아직 성장 중인 아이라 앞으로 이빨을 제대로 유지하는 데 얼마나 더 돈이 들지도 몰랐다.

 

뒤늦게 태형이 어머니가 도착했다. 그녀는 부두 근처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허름한 옷에 양념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병원 안으로 음식 냄새가 확 퍼졌다. 그녀는 생각보다 큰 사고가 아니어서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이 어머니 정말 답답하시네. 사실 학교 측 잘못이거든요? 그 학교, 놀이시설 낡은 걸로 유명한데. 어머니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시면 시민단체 같은 곳에서도 도와줄 거예요.”

담임교사와 보건교사는 잠자코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태형이 어머니는 교사들과 간호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이만하길 다행이지요, . 우리 어릴 때는 이러다가 병신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태형이 어머니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한숨과 함께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도 은학이를 나무라진 않았다. 실제로도 키도 작고 힘도 부치는 녀석이 기필코 은학이를 따라 위로 올라가겠다고 우긴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은학이는 자기가 때문에 태형이가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다. 피범벅이 된 태형이의 손에 들려져 있던 이빨 두 개는 은학이가 보관하기로 했다.

 

은학이와 소영이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태형이를 보러갔다. 마취에서 막 깨어난 태형이는 입과 턱 주변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 내 이빨은? 잘 있어? 안 버렸지, ? 누나랑 형은 이빨이 다 붙어 있어서 좋겠다.”

태형이는 찔끔 거리던 눈물을 왕창 쏟아내기 시작했다. 소영이도 따라 울었고, 은학이도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영이가 킥킥 웃기 시작했다. 은학이가 옆에서 근엄하게 훈계를 했다.

소영아, 너는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에이, 웃긴 걸 어떡해? 뽀얀 밤톨이 시뻘건 사과가 됐잖아!”

누나, 미워! 아픈 사람 놀려!”

하지만 태형이 역시 눈에 눈물을 그득히 담은 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멎자 또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자 다시금 이빨의 존재가 상기되었다.

, 내 이빨 잘 지켜줘야 해, 알았지?”

그럼! 이제 너만 나으면 돼.”

, , 네가 다 나으면 의사 선생님이 이빨 다시 붙여 줄 거야.”

소영이도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음에 올 때는 이빨 가져와, .”

 

태형이의 부탁대로 다음번에 은학이는 유리병에 담긴 이빨 두 개를 들고 갔다. 태형이는 이빨을 꺼내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 여기 깨진 이빨도 붙일 수 있겠지, ?”

당연하지!”

맞아, 내가 나을 때쯤이면 이빨도 알아서 커져 있을 거야.”

태형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은학이는 약간 의아스러웠지만 태형이의 희망에 찬물을 들이붓지는 않았다. 반쪽이라도 붙일 수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퇴원을 하자마자 태형이는 곧장 이빨부터 접수했다. 언젠가는 의사 선생님이 이 이빨을 제자리에 붙여 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두 이빨 중 큰 녀석이 있던 자리가 간질간질해졌다. 자꾸만 혀끝을 그 쪽에 갖다 대고 후비는 버릇도 생겼다. 한 날은 혀끝에 뭔가 딱딱한 것이 감지되었다. 손가락을 넣어봤다. 정말로 뭔가 딱딱하고 평평한 돌멩이 같은 것이 생겨 있었다. 태형이는 이 모든 것이 양치질을 게을리 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빨을 닦을 때마다 그 부분을 유난히 더 세게 문질렀다.

 

*

 

별채 건물은 겨울이 빨리 왔다. 10월 중순부터 특수반에는 특별 난방이 시작됐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도록 교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기만 했던 녹슨 난로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특수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난로 청소를 했다. 장작도 주문했다. 우체부는 한 해 동안 묵혀 놓았던 리어카를 꺼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위해 아껴온 사흘간의 휴가를 냈다. 그는 성 주변 숲 속에서 하루 종일 나무를 벴다. 다음 날에는 그 나무를 열심히 쪼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작을 리어카에 가득 싣고서 우물이 있는 학교까지 직접 갖고 왔다. 우체부가 우람한 육체를 뽐내며 할 수 있는 가장 보람찬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아들의 손을 빌려 장작을 교실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았다. 일이 끝나자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주먹으로 닦아냈다. 은학이도 옆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땀을 훔쳐냈다.

해마다 이렇게 고생을 하시니. 내년엔 연탄으로 바꿀까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나무가 있는데 연탄을 왜 써요?”

우체부는 웃으며 떠나갔다.

 

특수교사는 난로 위에 싯누런 주전자를 올렸다. 군데군데가 우그러졌지만 옥수수차를 끓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 옆에는 은박지를 평평하게 깔았다. 그리고 다소 도톰한 크기로 저민 감자와 고구마, 껍질에 칼집을 낸 밤, 말린 가래떡을 얹었다. 늦가을,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음식이었다. 그 맛을 아이들은 단순히 혀끝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으로 느꼈다. 구워놓은, 말린 인절미는 최고의 상이었다.

 

소영이는 이 음식도 다 먹지 않고 조금씩 떼 내어 한 곳에 모아두었다. 그러곤 쉬는 시간이 되면 한꺼번에 학교 뒷마당에 갖다 놓았다. 그때마다 고수레!”라고 외쳤다. 할머니가 왠지 이 음식만은 꼭, 구덩이 속을 나와 먹고 가리라고 믿었다.

 

태형이는 음식물을 입안에서 용케 돌려가며 악착스럽게 먹어댔다. 소영이나 은학이가 자기보다 더 많이 먹는다는 생각이 들면 또 누나, 미워!” “, 미워!”를 연발했다. 말랑말랑하게 잘 익은 감자나 고구마를 먹고 나면 표피가 바싹 구워진 가래떡을 집었다. 한 번 입을 넣으면 태형이는 있는 이빨, 없는 이빨, 반쯤만 있는 이빨을 다 동원하여 열심히, 하지만 조심스럽게 가래떡을 씹었다. 워낙 공을 들였기 때문에 가래떡은 더욱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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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치혼의 암자에서와 스타브로긴: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

 

 

치혼의 암자에서가 문제적인 것은 탈신화화된 주인공, 인간스타브로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고백-참회를 들어주는 자(confesser-confessor)가 아니라 고해자(confesser)이며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에서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으로 내려선다. 심지어 저는 저 스스로 저 자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게 저의 주된 목적, 제 목적의 전부입니다!”(하권, 1093)라고 외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서류-문건’(документ)의 진정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든 이것은 명백히 고백-참회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각색한 <악령>의 희곡 버전

 

 

하지만 바로 여기에 스타브로긴의 원죄, 십자가의 숙명(그의 이름 자체가 십자가를 의미한다)이 들어 있기도 한바, 그는 신-악마의 지위를 누리며 스스로를 위대한[크나큰] 의 주체로 만들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책형 앞에서 속죄하려는(redemption)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악령에 들렸다 치유된 환자처럼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 동시에 저 악령들의 수장으로서 돼지 떼와 더불어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둘 다 진실이며 또한 거짓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용서 및 속죄에의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내적인 척력 사이의 충돌, 형식적으론 고백()고백’(антиисповедь) 사이의 긴장이다. 이 고뇌를 치혼은 그 나름대로 간파한다.

 

이 기록은 죽도록 상처 입은 마음의 요구로부터 곧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치혼]는 집요하게, 비상한 열의를 보이며 계속했다. “그래요, 이것은 참회이고 당신을 압도해버린, 참회의 자연스러운 요구입니다.() 범죄를 고백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뭣 때문에 참회를 부끄러워하십니까?() 당신은 자신의 심리 분석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것에 일일이 집착하고, 그저 당신에겐 있지도 않은 그런 무감각함을 뽐내며 독자들을 놀래려는 듯. 죄인이 재판관을 향해 오만한 도전을 던지는 게 아니고 뭡니까?” (하권, 1086-1087)

제가 뭘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의 증오를 겸허하게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증오 하나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죠?”

그들의 웃음입니다.”()

됐어요, 어디 지적이나 해주시죠. 도대체 제 수기에서 정확히 저의 어떤 점이 우스꽝스럽다는 겁니까?()”

심지어 가장 위대한 참회의 형식 속에도 이미 뭔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신부님께서는 오직 형식에서만, 문장에서만 우스꽝스러운 점을 발견하시는 겁니까?”()

그 본질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이 죽일 겁니다.”()

뭐라고요?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요? 뭐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겁니까?”

범죄입니다.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범죄가 있는 겁니다.()”(하권, 1090-1092)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뻔뻔함, 그러고서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아집 등의 충돌 과정에서 수치’(стыд)의 감각이 생겨난다. 치혼이 암시하듯, 참회와 용서가 진정으로 아름다우려면 이 수치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소위 대죄인’(ве- ликий грешник)이 수치심 없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한(бесстыжный) 행위임을 스타브로긴은 잘 알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감히 신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라는 자신에 대한 선민의식과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동시에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죄가 낳은 추의 감각, 그것에 대한 통렬한 인식이 개입돼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빚어내는, 자기 분열을 야기할 만큼 치열한 내적 투쟁은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자연스레 웃음’(우스꽝스러움)의 형상을 띨 수밖에 없다.

 

치혼 앞에서 스타브로긴이 보이는 신경질이고 초조한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서류-문건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이 모두 우스꽝스럽다. 루소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기도 하지만(하권, 1066) 신실한 참회와 위악적인 자기 해부 내지는 자기 과시적인 노출증 사이의 경계는 실로 애매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치혼의 암자에서의 스타브로긴은 18세기 계몽의 인간으로서 비교적 행복한 기만에 사로잡혀 있던 루소(실제 <고백> 속의 문학적 자아인 루소의 형상과는 상당히 구분되지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신의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는 한낱 하는 일 없이 빌빌대고 돌아다니는 귀족 도련님”(샤토프의 말: 상권, 396), 무위와 권태에 허덕이며 유희의 욕망에 탐닉하는 28세의 귀족 청년일 따름이다. 이제 다시 <악령>의 플롯으로 돌아가자.

 

치혼의 예측대로 스타브로긴은 오로지 종잇장의 공표를 피하기위해 흡사 출구라도 찾듯 새로운 범죄 속으로 몸을 내던”(하권, 1099)진다. 모든 죄악은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점잖게, 즉 몹시 야비하게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종결된 후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살이 무한히 늘어선 기만의 대열 중 마지막 기만”(하권, 1043)이기에 자신은 결코 자살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치혼의 암자에서를 곁들인다면, 자살은 수치웃음을 극복하지 못한 대가이며 신의 심판을 끝까지 거부하고 오롯이 그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기만성에 관해서라면 스타브로긴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실상 그의 -악마로서의 아우라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하권, 1045)라는 유서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으로 몫으로 남겨진 스타브로긴의 최후, 즉 자기 목을 매달 비단 노끈에 열심히 비누칠을 하고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모습은 가히 키릴로프의 최후만큼이나 희극적이다. 자살 이후에 남는 것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아무리 붙여도 무의미한, 그저 목매단 시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로서 스타브로긴은 우스꽝스러움을 비롯한 온갖 파토스를 체화한 상태로 신화의 영역에 붙박인다. 탈신화화의 공격 끝에 한 마리의 추악하고 유치한 거미로 치환될지라도 어떻든 그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적어도 끝까지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유일한 자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마땅한 리얼리즘의 문법을 생각한다면 스타브로긴은 정녕 베르쟈예프의 말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맹점이자 매혹이자 원죄였으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십자가였다. (...)

 

---

 

 

 

논문 쓸 때 참조했더라면 좋았을 책입니다. 바쿠닌은 물론 그와 네차예프의 관계, 네차예프의 성격 등에 관한 얘기도 나옵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 시절 숙제 목록 일순위였던 것 같은데요(^^;;) , 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도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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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사가 돌아오자 소영이는 대뜸 물었다.

선생님, 마녀야?”

? .”

특수교사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소영이는 발끈했다.

하지만 왜 마법을 쓰지 않아?”

그야 마법을 쓰지 않는 마녀니까 그렇지.”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말 그대로지. 마녀이지만 마법을 쓰지는 않아.”

 

소영이는 마법을 쓰지 않는 마녀, 라는 말에 골몰해 있다가 다시 물었다.

과자로 만든 집에 있던 언니, 선생님 맞지?”

글쎄, 나는 그 시간에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구였을까?”

소영이가 모험담을 쭉 늘어놓아도 특수교사는 애매한 반응만 보였다. 선생님이 의뭉스럽게 딴청을 부리는지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 통 알 수 없었다. 고민하는 소영이를 앞에 특수교사는 마분지 몇 장을 차례로 내놓았다.

 

여기 쓰인 대로 해봐, 알았지?”

소리를 질러 보세요.

으악!”

평소에도 이렇게 외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소영이는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덧셈과 뺄셈 숙제를 하고 있던 태형이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 그 다음은?”

사탕을 먹어보세요.

소영이는 마분지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아주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팔을 양쪽으로 크게 벌렸다가 모으면서 하트 모양을 그렸다. 특수교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자 소영이는 자신의 의사를 더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특수교사를 한 번 가리킨 뒤 또다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입술까지 모아 앞으로 삐죽 내밀었다. 특수교사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소영이는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또 머리를 굴렸다. 마침내는 특수교사 옆으로 바싹 다가가 볼에다 뽀뽀를 쪽 했다.

, 사탕을 사랑이라고 읽었구나!”

특수교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참에 태형이도 기지개를 켰다. 그러곤 소영이를 향해 하트 모양을 동그랗게 그려주며 웃었다. 그런데도 입으론 누나 미워!”라는 말을 내뱉었다. 소영이 누나는 엄연히 누나인데도 자기가 지난봄에 공부한 것을 이제야 배우고 있다니, 그건 미운일이었다.

 

특수교사는 태형이 쪽으로 갔다.

아직 못 끝냈어?”

어려워요!”

그럼 조금 더 생각해 봐.”

특수교사는 교실 뒤쪽으로 가서 앉았더니 책을 펼쳤다. 그 틈에 태형이는 소영이에게 열심히 손짓을 했다. 소영이가 살금살금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태형이가 귀엣말로 물었다.

누나, 5더하기 3은 얼마야?”

“5에다가 3을 더하라고?”

.”

. 5에다 3을 더하면, 그래, 53이네!”

우아, 정말 그러네! 에이, 누나, 미워!”

답 가르쳐줬는데 왜 미워?”

나는 모르는데 누나는 아니까 밉지.”

, 유치해!”

 

*

 

1학년 1반 수업은 따분했다. 4교시라 더 그랬다. 소영이는 수업 내내 칠판 옆에 걸린, 동그란 벽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시침에 집중했다. 12시에 고정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이제 분침을 보았다. 분침 역시 그림책의 시계 침처럼 숫자판에 딱 붙어 있었다. 소영이는 뚫어져라 분침을 응시했다. 새끼거북이처럼 아주 미세하게, 아주 천천히 분침이 움직였다. 그 옆으로 초침이 째깍째깍 분주하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침의 분주한 발걸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분침은 이제 겨우 ‘1’을 살짝 비켜났을 뿐이었다. 세 개의 침에게 부여된 운명이 불공평하게 여겨졌다. 왜 하나는 가만히 있고 또 하나는 기어가고 또 하나는 저렇게 각박해야 되나. 이 생각을 하다 보니 분침은 어느새 ‘3’을 훌쩍 넘어 ‘4’에 근접하고 있었다. 시침 역시도 아주 약간이지만 ‘12’의 정중앙으로부터 살짝 떨어져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듯싶었다. 소영이는 초침에 집중한 채 인내력을 갖고 좀 더 기다렸다. 한참이 흘렀다. 다시 분침을 봤다. 정확히 ‘5’에 머물렀지만, ‘6’으로 가려면 아직도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 동안에도 초침은 조금도 쉬지 못한 채, 동일하고 균일한 속도로 숫자판을 돌아야 될 것이었다.

 

마침내 소영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 갑자기 허기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소영이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친구들의 눈이 그 쪽으로 쏠렸다. 소영이는 문 곁에 있던 의자를 시계 밑에 갖다 놓고 그 위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웅성댔다. 담임교사가 소영이를 보며 말했다.

소영아, 뭐 하니? 연필깎이는 뒤에 있잖아?”

소영이가 수업 도중에 걸핏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연필을 깎으러 가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초침이 불쌍해. 내 배도 불쌍해. 배가 고파서 자꾸 울어.”

?”

담임교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영이를 쳐다봤다.

 

소영이는 손을 뻗어 가늘고 긴 초침을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그러곤 발뒤꿈치를 세워가며 한 바퀴 돌렸다.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소영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연이어, 소영이는 초침을 세 바퀴 더 돌렸다. 분침은 아직도 ‘6’에서 딱 요만큼 떨어져 있었다. 소영이는 초침을 한 번 더 돌렸다. 그제야 소영이는 몸을 돌리며 담임교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1230분이야! 나 밥 먹으러 갈래!”

담임교사는 당혹스러워했고, 소영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위업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의자에서 내려올 때 그만 균형을 잃어버렸다. 오른발이 교실바닥에 닿기도 전에 왼발이 의자 위에서 비틀거렸다. 쾅 하는 소리가 나면서 소영이는 무릎을 움켜쥐었다. 담임교사가 소영이게로 달려갔다. 가벼운 타박상이었지만 연한 피부에는 시퍼런 멍이 생겨버렸다.

 

아이들은 이때를 노렸다는 듯 모두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소영이 말이 맞아요, 선생님! 12시 반이잖아요!”

선생님, 밥 먹게 해주세요!”

수업 끝났다! 밥 먹으러 가자!”

곳곳에서 아이들이 떠들어댔고, 담임교사는 주먹으로 교탁을 탁 쳤다.

다들 조용히 좀 못해! , 3!”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담임교사 역시도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렸다. 진정이 됐을 때 종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허락도 없이 모두 책상에서 일어나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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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타브로긴과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 영웅-주인공, 분신, 가면

 

4-1. <악령> 속의 스타브로긴: 인간의 가면을 쓴 -악마

 

 

<악령>의 구성상 모든 논의는 스타브로긴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그에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작품의 알파이자 오메가로서 그와 여타 인물 간의 관계는 주인공-영웅(원상)과 분신 관계의 신화적 도식을 근대적 틀에서 재현해낸다. 본원적 의미에서의 분신은 웃음과 패러디의 기능을 수행하면서(смеховой двойник, пародирующий двойник) 원상의 생존(부활)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자이다. 따라서 주인공-영웅과 분신은 엄격한 가치론적 위계질서에 종속되며 주종관계 역시 명확히 규정된다.

 

이 도식에 따를 때 스타브로긴의 분신들의 희생은 표트르의 미학적 죽음까지 포함하여 궁극적으론 주인공-영웅의 부활을 예고함과 동시에 오직 이를 통해서만 성스러움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자살로 인해 재구축된 분신 신화의 도식은 상당히 왜곡되고 <악령>성스러운[신의] 희극’(Divine Comedy)이 아니라 희화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비극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구성적 층위가 아니라 미학적 층위인바, 스타브로긴의 형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가 아닌 소설 속에서 을 창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은 그 본질상 ’(육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신성을 상실하는 반면 을 갖지 않으면 소설적 인물(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손쉬운 작업은 그 자체로 신성의 육화인 그리스도를 재현해내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랫동안 이 작업에 공을 들였고 그 성과인 므이시킨, 알료샤 등은 실패한 만큼이나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가 스타브로긴을 통해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소설, 더욱이 정치와 혁명의 탈신화화를 다룬 극히 범속한 소설 속에서 의 형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스타브로긴 인생의 몇 장면>(?) 공연 포스터.)

 

더욱이 그 은 목소리 따위가 아닌, 엄연히 살과 피를 가진 소설 속 인물이며 악마성의 현시를 통해 신성을 획득하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이다. 작가가 그의 유물론적 토대를 제거 내지는 은폐하는 방식은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키릴로프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은 반면, 스타브로긴에겐 젊음과 아름다움, 건강함과 육체적 완력, 부와 세속적 지위 등 무한히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부여한다. 이렇게 그를 1860년대 러시아귀족사회가 낳은 패륜적 돌연변이로 만듦으로써 사회학적 동기화를 획득함은 물론 물질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함으로써 더욱더 시험에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에게 연역적으로 접근한다면 명실상부한 고백록인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짚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곳곳에서 내 힘을 시험해 봤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면서 내게 그 일을 권했지요. 나 자신을 위한, 또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 시험에서, 그 힘은 예나 지금이나 내 평생 동안 무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나는 당신 오빠의 따귀를 참아 냈습니다. 결혼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 바로 이것만은 결코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스위스에서 그렇게 격려를 해주었고 나 역시 그걸 믿었건만.() / 당신의 오빠는 내게, 대지와의 관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신도 상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모든 목적을 상실한다고 말하더군요. 이 모든 것을 두고 끝없는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선 오직 한 푼의 관대함도 없이, 한 푼의 힘도 없이, 부정(否定) 하나만이 흘러나왔을 뿐입니다. 아니, 부정조차도 흘러나오지 못했지요. 모든 것이 언제나 미미하고 시들시들해집니다. (하권, 1041-1042)

 

각종 시험의 결과로 나타난 부정은 상태라기보다는 무한한 운동성을, 따라서 비존재와 무가 아니라 존재와 생성을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낸다. 시험-부정의 일환으로서 다수의 분신을 동시적으로 창조한 것도 천지창조의 메타포를 소설 텍스트에서 실현한 것으로 읽힌다. , 태초에 신이 자신의 모습에 근거하여(образ и подобие) 인간을 만든 것에 반해, 스타브로긴은 대상의 본질에 천착하여 자신의 관념을 그 틀 속에 집어넣고 형상-이름을 고착시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예 형상-이름이 없는, 고로 추한 존재(безобразный-безобразный)이다.

 

여기서 끊임없는 움직임이 시작되는바, 이러한 내적 방황에는 분명히 레르몬토프적인 유산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레르몬토프-페초린이 극히 유아론적이며 또한 유아적으로 강력한 자아의 팽창으로 인해 괴로워했다면, 스타브로긴의 고뇌는 정반대로, 블랙홀과 같은 자아를 하나의 형상-이름으로 고착시킬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에겐 무수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것을 통째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대상은 스타브로긴의 거대한 심연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그는 또 다시 이름을 상실한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이 지상에 왕림할 때는 어쨌거나 형상-이름을 빌려야 한다. 현실에서 그가 참칭자 드미트리’(마리야 레뱌드키나의 폭로: 상권, 432)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의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이다. 파괴적인 열정의 시험(리자베타 투쉬나), 원시적 구원 가능성의 시험(마리야 레뱌드키나), 영원한 안정의 시험(다리야 샤토바) 등은 결과적으로 심연의 넓이와 깊이를 각인시킬 따름이다. 니체의 저 유명한 아포리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속의 괴물 및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공히 스타브로긴의 은유로 읽힌다. 심연이 남은 집어삼킬 수 있어도 자신은 집어삼킬 수 없듯 은 타살은 해도, 또한 살해의 객체가 될 수는 있어도 자살은 하지 못한다.

 

물론, 스타브로긴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문제의 장면에서 작가는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달리 짧은 진술만 던져줌으로써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라는 그 신비스러운 정체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카트코프의 강압적 권유도 없었건만 그토록 공들여 쓴 치혼의 암자에서를 단행본 <악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일 터이다. 달리 말해 1922년까지 방치되었던 이 거친 원고에 스타브로긴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의 요한입니다. 개인적 생각으론, <악령>의 스타브로긴과 싱크로율 99프로입니다ㅋㅋ  스타브로긴의 만화 버전이랄까요 ^^; (나오키의 <플루토>에서는 엡실론이 대략 요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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