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다크>는 2002년작으로 베테랑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유일한 시리즈 캐릭터인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현재까지 마지막 작품입니다. 초창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만화 대본이나 로맨스 소설을 썼다고 알려진 기리노 나쓰오가 진정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받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 제1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1993년에 씌어졌고, 미스터리 신인상 격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며 주목할 만한 작가 탄생을 알렸습니다.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여주인공 미로가 사립탐정이 된 계기와 처음 맡게 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크>를 읽으며 약간 아쉬웠던 것은 시리즈 순서대로 출간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운 좋게 구해 읽어본 저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미로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전사나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할 수 있겠지만, <다크>로 미로 시리즈를 처음 접해본 분들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미로가 사건 관련자를 하나씩 만나 사건의 단서를 그러모으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해가다, 결말에 '네가 범인이다!'를 외치는 비교적 정통적인 하드보일드였기 때문에, <다크>에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범인의 이름이 초반부터 언급되는 것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도 곧 새번역으로 재출간될 예정이기에 <다크>를 먼저 읽고 거슬러간 독자들이 흥미를 잃을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시리즈는 1권부터'라는 표어를 만들고 싶은 순간입니다(물론 <다크>만 따로 떼서 읽어도 이해에 지장이 가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역을 맡은 필립 말로우나 루 아처의 이름을 도저히 뗄 수 없듯이 기리노 나쓰오의 하드보일드도 여탐정 무라노 미로의 개성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간략하게 미로가 탐정이 된 계기를 설명해보자면,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남편이 자살하고 비탄에 젖은 미로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 남자 나루세는 미로의 소꿉친구 요코의 애인이었는데 맡긴 돈을 요코가 가지고 잠적해버렸기 때문에 그녀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돈은 야쿠자의 것이었고, 미로와 요코 둘이 짜고 돈을 감춘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야쿠자는 미로에게 요코와 돈을 찾아내라고 요구합니다. 미로는 야쿠자 '고쿠토카이'의 전 조사관이지만 현재 은퇴한 의붓아버지 무라젠(무라노 젠조)의 도움을 받아 나루세와 함께 요코의 삶을 파고듭니다. 요코는 프리랜서 작가로 사라지기 전 독일에서 '신 나치'의 실체를 취재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미로는 살기 위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탐정이 될 결심을 하며 요코와 관계된 곳곳을 다니며 정보를 얻는데, 역시나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답게 변태적인 섹스 쇼 현장부터 시체 해부 동영상에 탐닉하는 예술가까지 음습합니다.



무사히 첫 요코 사건을 해결한 미로의 모습은 이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단편집 <로즈 가든>에서 더 볼 수 있고, 일종의 외전 격인 <물의 잠, 재의 꿈>에서는 60년대를 배경으로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이 잡지사 기자에서 야쿠자 조사관이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고 합니다(미로 시리즈는 제목도 참 멋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이 <다크>입니다. 위에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정통적인 하드보일드풍이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이 작품의 해결편은 거의 본격 미스터리를 방불케 합니다. 의외의 범인이 등장하는 반전도 있고, 미로의 논리적인 추리도 있지요. 그런데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오랜 세월을 거쳐 양식화되어 규칙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의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나 봅니다. 책 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 탐정 미로가 해결하고 성장한다는 탐정 소설의 패턴에서 벗어나 무라노 미로라는 한 사람의 여성이 시대와 호흡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위의 말처럼 <다크>는 기리노 나쓰오 작품 세계에서 분수령이 될 듯한 작품입니다. 향후의 걸작들을 예감케 하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물들, 음울한 심리 묘사,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와 날카로운 통찰력까지 기리노 나쓰오의 트레이드 마크가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미로는 전작에서 꼭꼭 숨겨두었던 적의와 증오, 분노를 드러내며 초반부에 아버지 무라젠을 사실상 살해합니다. 작품은 무라젠이 죽기 전까지 애인이었던 시각장애인 히사에와 무라젠과 함께 일했던 고쿠토카이의 전 간부이자 절친한 친구 데이, 미로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려 하는 동성애자 도모베가 미로를 추적하고, 그녀가 도피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손길을 피해 미로는 박미애라는 가명으로 한국의 부산과 서울에서 잠적하기도 합니다. 미로는 한국에서 서진호라는 남자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데 서진호의 기억을 통해 80년대 광주사태가 그려져 우리 입장에서는 한층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작풍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전작들까지 서슴치 않고 배신합니다. 이로써 기존 하드보일드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낭만적인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미로는 냉소적이지만 이토록 위악적인 여자는 아니었고, 품위있던 무라젠도 어딘지 나약해졌습니다. 육욕에 불타는 히사에는 거의 괴물같이 느껴지며, 미로의 친구였던 도모베는 돈을 위해 배신을 일삼습니다. 아마 전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이들의 변모에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욕망과 악의로 가득차 있는 캐릭터들이 어두운 에너지를 내쏘는 <다크>는 오늘날의 기리노 나쓰오를 가능케 한 실험작이자 눈부신 성공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줄창 어두운 이야기만 구상하고 쓰는 작가이기에 본인도 어둠에 함몰됐는지, <다크> 이후의 <그로테스크>나 <잔학기> 등의 작품에서는 일체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다크>의 결말에서는 미로의 선택을 통해 약간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로에게 아직까지 인간성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결말이지요.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쓴 2002년 이후의 세상에 더욱 좌절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이야기해서 앞으로는 더 어둡고 더 살기 힘든 세상에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라고나 할까요?"라고 작가는 말했답니다. <다크>는 서진호와 미로의 희생적인 사랑과 결말에서 보여주는 미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의 희망을 노래하며, 2002년을 기점으로 더욱 어두워진darkest 세계 이전의 그래도 비교적 좋았던 어느 한 때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수작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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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읽기전에 확실히 <얼굴에 흩날리는 비>을 읽어 보는데 작품감상에 큰 도움이 될거같아요...전 나루세의 편지내용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작가도 이런 독자의 감정을 파악한건지 중간중간 나루세편지를 상기시켜주더군요...단숨에 읽히고 미로의 앞으로의 행로가 진정궁금해지더군요...하루빨리 다음작품이 읽고시프요^^ 작가의 최근 인터뷰내용이 뼈에 사무치더군요..휴~~~~

jedai2000 2007-08-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디1229님도 정말 대단한 독서가시군요. 거의 안 보신 게 없네요. 저랑 책 보는 취향이나 평가하는 기준도 굉장히 비슷한 것 같구요.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읽어보시면 물론 좋죠. 근데 <다크>를 먼저 보시면 스포일러될 게 제법 있어 출간 순서가 영 아쉽네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도 몇 편 더 나올 테니 곧 기다림이 충족되겠죠 ^^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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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에서는 재치있는 언행으로 인기가도를 달리는 열세 살 소녀 오니시 아오이는 다른 친구들이 모두 기다리는 방학이 되면 오히려 괴로워진다. 아오이의 집에는 괴물이 살기 때문이다. 커다랗고 냄새나는 술에 쩔은 그 괴물은 아오이의 새아빠로 원래는 성실한 어부였지만 다리를 다쳐 집에 들어앉은 후로는 술만 푸며 아오이 모녀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 또래 아이들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아오이가 게임기도 사고 맥도널드에서 친구들과 놀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모으는 용돈까지 손을 대는 새아빠로 인해 아오이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아마도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족을 괴롭히는 폭군 알콜 중독자가 등장한다면 그는 이미 저승에 한 발 들여놓은 상태나 다름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죽이고 싶은 누군가를 대신 죽여 대리만족을 주는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에서 흔히 살해당하는 신세가 되는 사람은 그를 죽이면 내게 이익이 된다거나 내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게 되는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무작정 빠져나온 아오이는 동네에서 놓아 기르는 염소를 치고 때리며 화풀이를 하는데, 같은 반의 한 소녀가 그 광경을 본다. 그 소녀의 이름은 미야노시타 시즈카. 학교에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에 책만 읽는 도서위원인 시즈카는 방학 때는 뜻밖에 기묘한 취향의 옷을 입고 있으며, 아오이에게 살인의 욕망을 주입시킨다. 그 사람을 죽여 편안해지라고. 어느새 친해진 두 소녀는 이런저런 계획을 짜내 아오이의 새아빠를 죽이려 한다. 물론 살인자는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고, 당연히 이런 일에 경험이 있을 턱이 없으므로 계획은 대체로 신통치 않지만 열의가 큰 만큼 또 모를 일이다. 의외로 쉽게 성공할 수도 있지 않겠나.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짧은 1년 동안 두 소녀는 결국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올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쿠라바 가즈키의 작품이다. 원래는 청소년들을 위한 라이트노벨을 주로 썼으나, 최근 일반문학 쪽으로 순조롭게 안착한 여성작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도 주인공들의 연령이나 사고방식, 사용하는 말과 사물에 대한 묘사, 분출하는 십대들의 분노와 절망이라는 주제가 라이트노벨에 가까워 보인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열세 살 시절을 잊었겠지만, 또 그들에게 무슨 고통이 있으랴 하겠지만 사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룬다. 아오이 역시 마찬가지라 집에서는 괴물 새아빠에게, 학교에서는 사소한 오해로 친구들과 소원해져 어디서도 발 붙일 곳이 없다. 열세 살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집을 나가도 혼자 살 수 없고, 좁은 인간 관계의 전부인 친구들에게조차 버림받으면 그야말로 온 세상 전부가 붕괴되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 빠진 아오이와 시즈카가 서로에게 우정을 느끼고 의지하며 강하게 연대하며 두 소녀를 위협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 장렬하게까지 느껴진다. 두 친구가 나름대로 치밀하게 살인 계획을 짤 때는 도서 미스터리나 범죄소설을 보는 듯 두근두근한 재미를 주며, 공들여 세운 계획에 허점이 계속 노출되어 결국 모든 게 어그러지는 두번째 살인의 긴장감은 최고다. 제목 자체가 영국의 여성 미스터리 대가 P.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패러디한 것처럼, 작품 안에도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나 리차드 헐의 <백모살인사건>의 설정을 끌어와 미스터리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쪽의 재미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노벨로도 미스터리로도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으로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약간은 높아졌다. 특히 올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탄 <아카쿠치바의 전설>은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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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설 정말 깔끔해요...이분 다른작품도 빨리 출간되었음 해요

jedai2000 2007-08-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큰 상을 탄 이 분의 대작이 하나 나올거랍니다 ^^
 
도시탐험가들 모중석 스릴러 클럽 8
데이비드 모렐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폐허가 되어버린 황량한 건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대부분 이제는 다시 올 수 없을 지난 날의 화려한 시절을 떠올리며 쓸쓸한 감회에 젖거나 낡고 퇴락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건물이 과거의 풍경, 기억, 생활상 등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는 일종의 보물창고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은 수십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 버려진 빈 건물들-호텔, 공장, 지하터널, 창고 같은-에 몰래 잠입해 그곳에 놓인 부서진 가구나 신문쪼가리 등을 발견하고 예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며 재미있어 하는데, 이런 사람들을 '도시 탐험가The Creepers'라고 부른단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금시초문이었지만 야후나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17만 개 이상의 도시 탐험가 관련 웹사이트가 뜬다고 한다.

 

먼지투성이 버려진 건물에는 도처에 위험이 넘쳐난다. 튀어나온 못, 부서진 계단, 쥐들이 옮기는 전염병 같은 치명적인 위험들이. 어쩌면 일부러 위험한 것을 추구하며 자신이 가진 힘과 지혜를 극한까지 발휘해야 하는 모험 정신이 익스트림 스포츠와 닮아서 그렇게 도시 탐험가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험이 부족한 시대를 살고 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모험에 굶주려 있으니까. 이 책은 매우 독특한 소재인 도시 탐험가의 세계를 그리며 쉴새없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만점 스릴러이자, 악몽과도 같은 호러 소설이다. 주인공은 도시 탐험가들을 밀착취재해 기사를 작성하려는 프랭크 발렌저. 그는 역사학 교수 로버트 콩클린과 그의 제자들인 릭, 코라, 비니의 도시 탐험가 팀과 함께 직접 탐험에 참가하기로 약속이 된 상태다. 목적지는 1900년대 초반에 지어졌지만 1960년대에 폐쇄됐고, 곧 철거될 예정인 패러곤 호텔.

 

패러곤 호텔의 창립자는 일종의 광장공포증을 갖고 있어, 호텔 전체를 마야의 피라미드 모양을 본떠 지어 자신만의 성을 쌓은 다음 그곳에서 평생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외출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호텔 앞 해변가까지 걸어 나가 자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립자 모건 칼라일이 사망한 후 쇠퇴일로를 걷다 몰락한 패러곤 호텔의 모든 문에는 강철 덧문이 잠겨 있다. 콩클린 교수가 조직한 도시 탐험가들은 배수로 터널을 이용해 호텔에 잠입하는데 성공하는데, 수십 년간 폐쇄된 장소에서 근친교배를 거듭해 돌연변이를 일으킨 쥐떼와 고양이가 그들을 반겨준다. 그 녀석들은 보통 다리가 다섯 개거나, 눈이 하나인 혐오스런 족속들이다. 한편 발렌저는 유일한 여성 탐험가 코라의 존재가 대원들에게 묘한 질투와 균열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감지한다.

 

여기까지가 아주 초반부의 내용이다. 발렌저를 비롯한 탐험대원들은 곧 8시간의 끔찍한 호러와 테러에 시달리게 될 예정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령이나 흡혈귀 등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그런 초자연적인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서운 것이 그들을 찾아오니 그건 바로 사람이다. 육체적인 강인함과 교활한 머리, 각종 특수장비까지 겸비한 사이코가 어둠 속에서 한 명 한 명씩 그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 살아나고 누가 희생될지 추측해보라. 그날 밤의 악몽은 날이 새도록 계속된다.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공포가 찾아올 것이다.

 

작가는 영화 <람보>의 원작자로 유명한 데이비드 모렐. 한국에서 '람보'하면 무뇌아 액션 기계의 대표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화 <람보>도, 원작 <퍼스트 블러드>도 그다지 녹록한 작품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지고 있는 존 람보가 미국의 광산 도시에서 지난 날의 악몽이 되살아나 폭주한다는 이 내용의 어디가 유치한가? 물론 2편부터는 정말 무뇌아 액션 기계가 되어버렸지만 데이비드 모렐이 원작을 쓴 1편은 폄하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액션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모렐답게 시종일관 긴박감 넘치고 영화 <다이하드>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발렌저의 액션이 독자를 흥분시킨다. 사실 후반부는 거의 잘 만든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씬 별로 감상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단서를 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진행되면서 점차 사실들이 밝혀진다는 거다. 알고 보니 주인공의 정체가 뭐더라, 알고 보니 주인공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더라 하는 식인데 어차피 치밀한 반전이나 트릭보다는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인상적인 공포의 한 순간에 무게중심을 두고 성큼성큼 건너뛰는 작품이니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또 하나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클라이막스에서 결정적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어떤 물건을 주인공 발렌저가 아무 이유없이 챙긴 다음 위기의 순간에 근사하게 써먹는데, 이 물건을 발렌저가 왜 챙겼는지 개연성 있게 설명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위에도 말했듯이 세부적인 것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작품은 아니다. 발렌저와 도시 탐험가들이 걷는 길을 조용히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고 온통 흥분으로 벌개진 채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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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드는 '프랭크 발랜저'이름이 맞던가^^; 다음엔 더 흥미진진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 기대해 봅니다.

jedai2000 2007-08-10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편이 나온다고 하네요. <스캐빈저>라는 이름으로 나온답니다. 올 여름에 참 재미있게 봤던 작품인데, 내년 여름에도 속편이 나와 시원한 여름밤을 선물해주면 고맙겠어요 ^^
 
잔학기 밀리언셀러 클럽 63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심상치 않은 제목의 <잔학기殘虐記>는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된다. 고미 나루미라는 필명으로 16세에 소설을 발표해 천재작가 등장이라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게이코가 돌연 실종되자, 그녀의 남편이 게이코의 담당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게이코는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을 담은 한 편의 수기 '잔학기'를 남기고 사라졌고, 독자들은 그녀가 남긴 잔학기를 보면서 이제 게이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 그 잔혹한 기억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게이코의 인생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해는 초등학교 4학년인 열 살 때였다. 그녀는 지방 소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성악 전공자라는 허영심에 젖어 현실 감각이 별로 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당시에 이미 게이코는 아빠, 엄마가 그다지 별 볼일 없는 속물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리 조숙할 수 있느냐고 묻지 말길.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인물들은 두더지처럼 본능적으로 어둠을 사랑하고, 자석처럼 어둠에 이끌리니까.

 

방과후 집에 돌아오던 길에 게이코는 유괴를 당한다. 그녀를  납치한 건 철공소에서 일하는 겐지라는 사내. 그는 지옥의 밑바닥처럼 소음이 요란한 공장의 2층 자기 방에 게이코를 감금하고는 애완 고양이처럼 '밋치'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학대만 받는 인생을 살아온 겐지의 정신은 어딘가 이상하다. 낮에는 보통의 성인 남자로 음습한 성욕에 휘둘리지만, 밤에는 아동용 책가방을 메고 게이코의 친구 노릇을 하며 4학년 아이로 돌아간다. 고아원에서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겐지는 4학년이 되고 싶은걸까.

 

겐지와 게이코는 1년을 조금 넘게 기묘한 동거를 계속한다. 게이코는 겐지와 더불어 그 공장의 유일한 종업원이자 겐지를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옆방 남자, 야타베에게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겐지의 주먹맛만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웃음, "야타베 씨는 귀머거리야." 하지만 언젠가는 야타베 씨가 나를 발견하고 구해주리라는 게이코의 희망은 거의 종교적인 믿음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결국 게이코를 구한 사람은 우연히 겐지의 방을 들여다본 공장 사장 내외.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결국 구출된 게이코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야타베 씨의 방에 들어가본 것이었다. 거기서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걸 보고 좌절하며 충격을 받는 게이코. 야타베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몰래 훔쳐보며 게이코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게이코는 겐지의 손에서 도망쳤지만 한 번 그녀를 손에 넣었던 어둠이라는 존재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고통을 선물한다. 열 살 소녀에게 칼날처럼 내리꽂히는 사람들의 편견 섞인 시선, 겐지와 무슨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비열한 호기심,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균열을 일으킨 가족 관계 등이 모두 그녀의 삶을 뒤흔들지만 가장 혹독한 붕괴는 그녀 내부에서 일어난다. 무엇이 성인 남자가 열 살 소녀에게까지 성욕을 느끼게 만드는가, 성욕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그렇게 끈적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에 자답을 거듭하게 되고 어느새 십대 소녀는 성에 집착하고 성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는 성적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잔학기>의 전반부가 게이코가 유괴됐던 열 살 때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고등학생이 된 게이코의 이야기다. 그녀는 현실의 암흑을 잊기 위해 밤의 꿈에 탐닉하게 되고 꿈속에서 이야기를 짓는 데 몰두한다. 겐지와 야타베, 그리고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상상하고 또 상상해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이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점차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고, 당연히 그녀의 이야기도 변해 간다. 이 부분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어떻게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소설을 완성해 나가는가 하는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기리노 나쓰오의 내밀한 창작의 비결을 슬쩍 털어놓는 것 같아 재미있게 느껴진다.   

 

다른 작가들이라면 처절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던 소녀가 결국 세상과 화해하는 식의 감동적인 결말을 그리겠지만 기리노 나쓰오는 다르다. 한 번 어둠을 맛본 사람은 다시는 빛으로 돌아가지 못하다는 염세적인 세계관과 혼란스런 외부와 내부의 사건을 맞아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정신의 균형, 마음속의 어둠이 불러오는 광기를 극한까지 묘사함으로써 우리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잔혹한 한 순간을 선물한다. 이런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이 너무 어둡고 우울해서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릿하게 시작하다 점차 속도를 올려서 결말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를 압도하는 그녀의 영리함과 칼로 베이는 듯한 느낌까지 주는 날카로운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력, 날렵하고 빼어난 문장력에 주목한다면, 취향을 떠나 이 일본의 중년 여성작가가 보기 드문 놀라운 실력의 작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손꼽히는 거장이라 그녀의 작품이 속속 영역되고 있지만, 아마도 10년 후쯤에는 전 세계가 그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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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2007년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소설상을 받은 작품. 작가 제이슨 굿윈은 비잔틴 제국과 동양에 관심이 많아 몇 편의 논픽션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소설은 처음이다. 1800년대 초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그리는 일종의 팩션 미스터리로 볼 수 있을 이 작품으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소설가로 데뷔자하자마자 성공 가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겠다. 수많은 옥석 중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수상작은 그만큼 완성도를 보증해준다고도 할 수 있어 실망하는 경우가 적은데, 안타깝게도 이번 작품은 미국추리작가협회의 안목에 솔직히 납득을 하지 못하겠다.

 

추측해보건데, 각고의 노력으로 19세기의 이스탄불을 실감나게 재현한 이 작품의 성취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과연 이스탄불의 궁정부터 뒷골목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실제로 보고 온 듯한 작가의 실감나는 묘사와 활달한 필치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도한 감이 있다. 작가후기를 통해 본인도 어느 정도 인정하듯이 아직까지 작가의 장기는 오스만 투르크의 사회나 역사, 문화 등을 알기 쉽게 전하는 것이지 이야기는 아니다. 환관 탐정 야심이 맡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어찌나 이것저것에 대한 설명이 많은지 이제 오스만 제국에서 사람들이 흔히 먹는 요리법과 커피의 유래, 무두질하는 법 등에 대한 설명은 집어치우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물론 한 권의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지식들을 많이 얻는 걸 좋아하는 분도 많을 테니까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이다. 하지만 적어도 미스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작품으로서는 단서를 주의 깊게 배치하지 못했고, 야심이 진상을 깨닫는 과정에서도 증거가 부족했으며(특히 할렘에서 일어난 보석 도난사건과 살인사건), 사건이 풀려가는 대부분의 과정이 우연에 의지하고 있고, 중요하게 등장하는 일종의 암호같은 시도 아무 설명없이 그냥 사라진다. 그 시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 독자들은 당연히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미스터리를 처음 써본 작가가 애거서 크리스티 영화를 많이 만든 제작자 등의 조언을 받아 집필했다고 하는데, 다음 작품을 쓰기 전까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세 번쯤 더 통독하기 바란다.

 

다만 그래도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은 예니체리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1400년대부터 4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이끈 특수부대였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들은 당연히 부패하게 되고 결국 나라를 좀 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서양식 군대를 양성한 술탄은 예니체리의 막사를 포격하고, 훗날 '신성한 날'이라고 명명되는 그날 예니체리의 영욕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야 말았다. 이 책은 예니체리가 몰살되고 10년 후에 시작된다. 어느 날 예니체리를 물리친 서양식 신위병 군대의 장교 4명이 실종되고 도시 곳곳에서 한 명 한 명씩 시체로 발견된다. 술탄의 할렘 궁정에서는 술탄의 모후 발리데의 보석이 사라지고, 왕의 여자 한 명이 목졸려 죽는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이 사건들을 해결할 사람은 비록 없이 살지만 약삭빠르고 능력있는 환관 탐정 야심뿐.

 

남성적 가치관이 지배했던 19세기 동양에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환관은 멸시받는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기운차게 살아가는 야심의 배짱과 유머는 보기 좋다. 간단히 말해 야심의 인간적인 매력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사회상에 우선을 둔다면 만족스런 독서가, 반전이나 미스터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니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잘 판단하고 선택해서 즐거운 독서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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