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의 말

 

 

기슭아, 네게 편지를 쓰고 싶은 순간이 많았어. 노트북 앞에 앉아서 말을 건네는 것보다 조금 급하게 보이는 일들이 있었어. 사실 급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 겨울이야. 한 해 동안 무슨 책을 읽었나 생각해보니, 딱히 생각나는 책이 별로 없어. 주로 시집을 읽어서 그런가 싶어. 산문은 읽으면 쌓이는데 시는 흘러가는 느낌이랄까.

 

잔잔한 시, 격렬한 시, 슬픈 시, 웃긴 시, 난해한 시... 그런 걸 서정시와 현대시라고 딱 잘라 말해야 할까. 시가 이렇게 불통이어서 되겠냐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고, 미래파야말로 우리 시의 미래라는 목소리도 있어. 난 어려운 시는 못 읽겠다,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읽혀. 이해할 수 있는 시만 읽겠다고 고집하면 우리나라 유명 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집의 반 이상을 못 읽을 것 같기도 하고.

 

뭐든 이해하고 싶지. 하지만 우리 아들 마음도 이해 못 할 때가 있는데, 아니 내 마음도 이해 안 될 때가 있는데 뭐든 다 이해하고 살 수 있나 싶어. 교과서 시들을 다 이해해야 하는 공부를 너무 오래 해서 이해가 안 되면 답답하고, 머리 아프고, 읽기를 그만두게 되는 건 아닐까.

 

물론 체한 것처럼 읽어 내려가기 힘든 시도 있어. 그러다가 간혹 이해는 안 되도 좋아하게 되는 시도 있고. 모르겠다, 모르겠다, 싶은 시가 머릿속을 확 뒤집고 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앎이 다가 아니긴 해. 특히 시는.

 

간혹 이런 생각이 들어. 많은 시인들이 소통을 원하지만 어떤 시인은 자기 시를 독자가 잘 알아듣지 못하기를 바랄 수도 있겠다. 그런 시는 알아듣지 못해도 이미지와 리듬이 있으니까 읽히기는 읽히겠지. 몇몇은 숨은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겠지. 그러나 모른 척해 주기를 바랄 수도 있겠다. 모른 체 하면서도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를 다시 찾을 수도 있겠다, 하는.

 

시인이 아니라도 우리는 뭔가 말하고 싶어 해. 그래서 나도 이렇게 중얼중얼 하는 건지도. 기슭아, 너는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니? 내가 엿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다른 나라의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피의 책

_하재연

 

 

너는 피의 책이다.

네 눈의 뜨거운 신경다발은 목구멍까지 이어져 있다.

얇은 낱장들이 내게서 펄럭였다.

한 권의 책에는 어떤 사건도 담기는 법.

너는 육신으로 기록한다.

내 몸의 모래 알갱이들,

발바닥을 찌르는 빛나던 유리잔 ,

토마토의 차가운 속살,

네 피는 붉고, 너를 서서히 채우고,

그리고 식는다.

바람은 어디에서든 잠깐, 불어왔을 뿐.

네게는 너의 현재가 읽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도모하지 않기 위해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언젠가 피로써 번역되기를 바라면서.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문학과지성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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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다가

 

 

 

시간이 빨리 간다, 빨리 간다, 벌써 한 해가 간다, 는 말을 하기도 많이 하고, 듣기도 많이 들어. 우리가 20대에도 이런 말을 자주 했던가?

 

크리스티안 예이츠라는 교수가 마음 시간이란 걸 계산했다고 해. 우리가 감지하는 시간은 우리가 이미 살았던 기간의 비율에 좌우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10살 아이에게 1년은 자신의 삶의 10%이고, 20살 청년에게 1년은 자신의 삶의 5%. 이런 식으로 계산하면 5~10살이 5년 동안 겪는 경험이 40살부터 80살까지 40년간 겪는 경험과 같은 셈이라고.

 

우리 아이가 사는 1년과 내가 사는 1년이 서로 다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 그렇다면 내 시간은 이제 짧아지는 것만 남은 걸까? 기계적으로만 장수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도 마음의 시간으로는 내 아이의 마음 시간 5년 정도만 사는 걸까?

 

마음 시간이라는 말 대신 주관적 시간이라는 말로 왜 어떤 시간은 빨리 흐르고, 어떤 시간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쓴 책을 본 적이 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책 제목이 생각이 안 나. 거기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친구 집을 찾아가는 예가 나와. 갈 때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돌아올 때는 짧게 느껴진대. 갈 때는 낯선 길이지만 올 때는 이미 익숙한 길이잖아. 새로운 걸 하면 시간이 느리게 가고, 익숙해지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지.

 

주관적 시간마음 시간처럼 연령대를 설정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지. 아이들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 어른보다 몇 배는 더 많으니까 그들의 마음 시간이 더 천천히, 길게 흐를 수 있지 않을까. 주관적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새롭게 사는 사람, 새로운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를 수 있겠다. 여행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더 젊게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이런 시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 소양이 달려서 뭐라 할 수 없지만 열 살에, 스무 살에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요즘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생각이 자주 나.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하기도 하지만 내가 새로운 걸 시도하고, 새로운 곳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까닭 같기도 해.

 

장자에도 수명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옛날에 대춘이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게는 8천 년 동안이 봄이고, 다시 8천 년 동안이 가을이래. 그러니까 수명은 그보다 훨씬 길겠지. 장자 시대에 700살 넘게 산 팽조라는 사람이 장수로 유명한데, 이 나무에는 비길 수가 없다는 거야. 근데 대춘 나무와 팽조 중에 주관적 시간으로는 누가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있을까? 너무 차이가 크게 나서 예로 들기 뭐한가?

 

기계적 시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아차리면서 살 수 있다면 자신의 주관적 시간의 길이도 달라지지 않을까. 어찌보면 그보다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고, 시간을 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거실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 착착, 척척, 턱턱.

 

기슭아, 네 시계 소리는 어때?  

 

 

 

  시계

  _송승언

 

 

   그 집 대문 앞에는 시계와 의자가 있었다 시계는 멈춰 있었고 움직이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의자에 앉은 늙은 시인은 종일 아무것도 없는 거리 멈춰 있는 시계를 보다가 대문 안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시계와 의자가 있었다 이제 늙은 시인은 없고 의자는 비어 있다 나는 조심스레 빈 의자에 앉아 내가 가스를 마시며 뛰어다녔던 그 거리를 본다

 

-송승언, 사랑과 교육(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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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에서 신선처럼 사는

 

 

홍순지라는 가수가 있어. 불교 관련 노래를 주로 하는 분이야. 오래 전 포항 보경사에 갔다가 그분이 노래하는 걸 들었어. 돌아가신 둘째 아주버님이 좋아하셔서 녹음도 하시고, 녹음테이프를 우리 집에도 주셨어. 

 

거기 노귀재가 있어. 그 노래 중에 안덕에서 신선처럼 사는이라는 구절이 있어. 차 안에서 노래를 듣다가 이 구절만 나오면 언덕인가, 안덕인가, 하고 남편과 궁금해했어. 발음이 애매하게 들렸거든. 포털에 다 언덕으로 가사가 나와 있어서 언덕이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친정 오빠가 두 해 전에 청송으로 이사 갔어. 청송 어디로 갔나 했더니 바로 안덕이라는 거야. 오빠 집으로 가는 길에 노귀재가 나오고. , 안덕이구나! 언덕 아니고. 좋아하는 노래에 나오는 지역에 오빠가 살게 되다니, 참 묘해.

 

저번 주말에 친정 식구들과 오빠 집에 갔어. 오빠가 청송 간다고 했을 때 걱정이 많았어. 당사자보다 더 깊이 고민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 잘 결정했겠지, 하면서도 자기 일이라 넓게 못 보고 결정하는 건 아닌가 노파심도 들었지. 가족이 모두 이사를 한다니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카의 학업은 어떻게 하나, 그런 것도 걸리고.

 

엄마는 걱정이 너무 지나치셨어. 심지어 오빠가 망해서 엄마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까지 걱정하시는 거야. 대학을 두 개나 나오고, 전문직인 오빠가 그렇게까지 망할 일도 없거니와 힘든 일이 생긴다고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할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시냐고 나는 엄마를 타박했지. 당시 그런 염려 때문에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석증도 생겼고.

 

지금 조카는 기숙사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오빠 일터도 안정되고, 오빠네 가족들 얼굴도 다 좋아 보여. 그래서인지 엄마 얼굴도 많이 밝아졌어. 전에 했던 걱정이 무슨 유익이 있었는가 싶어. 만에 하나 오빠가 거기서 적응을 못 했다 하더라도 똑같이 그 걱정이 무슨 유익이 있었을까.

 

있지도 않은 일로 엄마가 받았던 고통을 생각해.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일이 어쩌면 엄마의 염려 같은 것일 수도 있어. 나의 일이나 가족의 일에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걱정한다 싶으면 엄마의 이석증을 떠올려. 실재하지 않는 일에 실재하는 고통을 심지 말아야지, 하면서.

 

오빠의 이사를 계기로 어떤 사람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됐어. 청송은 산이 깊고 고요해. 오빠는 신선처럼까지는 모르겠지만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안덕에서 살고 있어.

 

 

 

 

노귀재

_홍순지 노래

 

 

노귀재 넘으며 노귀재 넘으며 넘으며

노귀재 그 숨찬 가파름은

아직도 내게 묻어 따라 오는

속세의 먼지 속세의 먼지 털어 버리라고

저 아래 계곡으로 떨궈 버리라고

모조리 다 던져 버리라고

 

노귀재 이곳은 노귀재 이곳은

사람과의 만남에 묻혀 잊혀온

바람과 만나고 구름과 만나고

푸르름이 푸르름과 만나고 먼 산 가까운 산

모두 모두 만나고 잊고 산 것이

무엇인지 다 가르쳐 주고

 

노귀재 지나면 노귀재 지나면 지나면

도시의 답답함이 싫어

빌딩 숲 사이에 숨어 사는

비루한 개 같은 시궁창 쥐 같은 삶이 싫어

안덕에서 신선처럼 사는 친구 있어

술잔 놓고 기다려 종일토록 날 기다려

 

 

*안타깝게 노귀재 노래를 못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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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패딩 입은

 

 

저번 토요일에는 어찌해서 저녁에 혼자 학교 운동장을 걸었는데 속이 메스꺼웠어. 항생제 탓인가 하면서 집으로 오는데, 아무래도 속이 불편해서 잠시 편의점 의자에 앉아 쉬었어. 거기서 롱패딩을 입은 남자를 봤어. 뚫어지게 TV를 보고 있었어. 그 편의점에 밖에서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날이 좀 쌀쌀해서 그의 행색이 영 이상하진 않았어. 그래도 식구랑 싸우고 집에 못 들어가나, 하는 생각을 들었어.

 

다음날 도서관에 갔다가 전화를 받으려고 휴게실에 갔어. 사람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나지만 이 가을에 롱패딩을 입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못 알아보겠어.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가 똑같이 검은 패딩을 입은 남자와 함께 있었어.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는데 밝은 데서 보니 나보다 훨씬 어려 보였어. 그의 곁에 놓인 낡고 작은 캐리어를 보니 정말 집이 없거나 집 나온 사람이구나, 싶었어.

 

그다음 날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 근처에서 패딩 입은 두 남자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걸 또 봤어. 그때서야 저 사람들은 어디서 자는 걸까? 궁금해졌어. 우리 동네에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잘 데가 있나? 그냥 노숙하느라 롱패딩을 낮에도 입고 다니나?

 

오늘은 도서관 바깥에 둘이 서 있는데 벽에 붙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무슨 그림자처럼 보였어. 노숙을 오래 한 사람은 아닌 건지 며칠 만에 초췌해졌어. 도서관에서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 로비에서 현악 3중주 연주가 있고, 사람들이 북적거렸어. 그래서 못 들어갔나?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 건 그들이 모르는 사람이지만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니까. 게다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어쩌다 둘이 이 동네에서 노숙하게 되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내일도 도서관이나 편의점에서 만나게 될까, 싶기도 하고.

 

나중에 그 두 사람이 따뜻한 방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젊었을 때 그림자처럼 길게 누워 있던 때가 있었잖아, 작은 캐리어처럼 좁은 동네에서 지독하게 추운 가을밤을 지냈지, 궤도를 이탈해 떠돌았잖아, 하면서.

 

어둠이 불어와. 그림자가 어둠에 덮이듯 저들도 어떤 어둠에 덮여 있는 걸까? 겨우 며칠이 지났는데 초췌해진 모습이 떠올라. 그게 그냥 내 눈에 비치는 모습이었으면, 그들의 내면은 자유롭게 반짝이고 있었으면. 그렇지만 기슭아, 이제 6시가 좀 넘었는데 벌써 어둡고 서늘해.

 

 

 

 

  이탈한 자가 문득

  _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문학과지성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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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1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결석하셨습니다

 

 

오전에 교육이 있어서 나가려고 하다 왜 전날 교육 알림 문자가 안 왔지? 하는 생각에 폰을 확인했어.

 

결석하셨습니다.”

 

출발도 안 했는데 결석이라니. 교육은 일주일 전에 있었어. 생각해 보니 지난주에 주말이 바쁘다고 친구에게 말한 기억이 나. 그런데 어쩌다 문자는 확인을 못 한 걸까? 어째서 지난주에 주말이라고 한 그 주말이 기억 속에서 제멋대로 이번 주말로 바뀌어버린 걸까? 뇌의 굴곡을 오르던 계획과 기억이 어느 비탈에서 숨이 차 주저앉아 버린 걸까?

 

이럴 수도 있지, 하면서도 황당하고 허전해. 이렇게 허술해진 나에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오늘은 나만의 일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었으면 마음이 더 불편했을 거야. 이제 일정마다 알람을 해야겠어.

 

입은 옷을 벗기도 그렇고 이렇게 잠깐 앉았다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반납하고 올까 해. 모처럼 아이들이 아람단 활동하러 가고 없어서 늦잠을 잘 수도 있었는데 아깝다.

 

 

 

분더캄머*

_오은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뱃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는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은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은 공유자처럼

묵묵하고 꿋꿋하다

우정 따위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너희들이 더 많아질수록

너희들이 더 다양해질수록

나는 더 작아지고 적어진다

 

재능이 넘치면 노력이 부족해

시작이 창대하면 끝이 미약해

 

어떤 경지에 오르려다

어떤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현재는 왜 항상 불완전한가?

 

뱃속을 다 채우면

나는 예정대로 구역질을 한다

신물 나는 완벽함을 향해

 

빛나가면서 빗나갈 때

뒤쳐지면서 뒤처질 때

 

놀랍게도

나는 방 안에서 놀라워진다

내 방을 누가 들여다볼까 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진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인다

너희들이 빤히 보인다

 

, 대체 나는 어디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내 앞에 도래하는

백지상태의 내일 앞에서,

새로운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한 나는

 

 

*독일어로 놀라운 것들의 방이라는 뜻.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에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방을 분더캄머(Wunderkammer)라고 불렀다.

 

 

-오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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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0-21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톡이나 문자가 들어오면 아주 잠깐 확인만 하고 넘어가는 버릇이 있어요. 그 속에 있는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아요. 그러면 진짜 중요한 내용이 적힌 문자를 보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생겨요.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생기는 나쁜 습관인 것 같아요.

2019-10-21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