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 되면 TV나 드라마에서 쉽게 공포물을 만나게 된다. 올 여름만 해도 영화 <고사 2>를 비롯해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 같은 납량특집물들이 무더운 여름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저런 설정으로 포장하지만, 사실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면 현대 공포물도 결국 고전 속 귀신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학원물로 포장을 해도, 아무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고 해도 결국 그 근본은 '귀신'이라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와 맞닿아 있다.
무더운 여름, 가슴 졸이는 추리소설보다, 긴장백배의 스릴러보다 더 매력적인 우리 옛 이야기 속 귀신인 처녀귀신과 도깨비를 책으로 만났다. 그 옛날 달리 오락거리가 없었던 사람들의 여름밤을 책임져줬던,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처녀귀신과 도깨비.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전설의 고향> 류의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는 처녀귀신이 아닐까 싶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 하얀 소복, 머리털이 곤두설 것 같이 흐느끼는 소리. 판에 박혀서 새삼스럽지도 않은 처녀귀신의 모습은 아무리 익숙하다 해도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왜 하필 처녀귀신일까? 총각귀신도, 아줌마 귀신도 아닌, 처녀귀신. 대체 왜 처녀귀신은 무슨 한이 그리도 많아 이승을 떠돌며 여러 사람을 놀래키는 걸까? 그 답을 <처녀귀신>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에 의하면 죽어서도 관리로, 가정의 보호자로 자리매김 하는 남자 귀신과 달리 여자 귀신(특히 처녀귀신)은 구천을 떠도는 원귀가 되어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살아서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던 여자들은 죽어서야 비로소 으스스한 귀곡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원한을 풀어주면 그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처녀귀신은 '복수'보다는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다. 처녀귀신의 이야기가 향유되었던 남성 중심의 유교 사회에서 억눌릴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은 처녀귀신을 통해 흐느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구애를 했다가 거절당해서, 혹은 겁탈을 당해 순결을 잃어서 억울한 죽음을 택했던 그녀들. 결국 처녀귀신이 유발하는 공포는 그 여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정절을 요구했던 사회, 적극적인 모습보다는 순종적인 모습을 요구했던 사회,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간 구성원 개개인이 만든 것임이 드러난다.
처녀귀신이 목소리나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존재라면 도깨비는 조금 다르다. 가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도깨비불이라고 제보가 들어와 찾아가곤 하는데, 이렇듯 도깨비는 보통 형상 자체보다는 도깨비불이라는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감지된다. 머리에 뿔을 달고 신기한 방망이를 들고 나타나는 도깨비는 처녀귀신의 공포와 달리 어쩐지 사람을 골려주는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내려주고, 나쁜 사람은 혼내준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존재.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천방지축 같은 모습의 도깨비. 그런 도깨비를 <도깨비 본색, 뿔 난 한국인>에서 만날 수 있었다.
폐쇄적인 조선 사회가 낳은 비극적인 산물로 처녀귀신을 예로 들었던 것과 달리 도깨비는 한국인의 무의식을 반영한고 이야기한다.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한국인의 속내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도깨비라는 존재를 통해 표출된다고 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익살과 재치를 놓치 않는 모습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조금은 심술궂고, 조금은 극성이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게 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도깨비이기에 우리는 도깨비는 어쩐지 친근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귀신과 도깨비. 소재는 다르지만 <처녀귀신>과 <도깨비 본색, 뿔 난 한국인> 두 권의 책 모두 설화, 민화 등 우리 고유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된 소재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처음에는 그저 무섭게만 느껴졌지만, 사연을 듣고 나니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지는 처녀귀신도, 마냥 개구지게만 느껴지지만 한국인과 닮은 도깨비도, 결국 우리 문화의 한 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생명력을 갖고 등장하는 두 귀신. 무더운 여름밤, 마치 할머니집에 놀러가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대청마루에 누워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두 권의 책을 통해 옛 귀신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을 읽으며 즐기는 것도 좋은 피서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