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 룸
레이철 쿠시너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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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한 여자배우가 토크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의 첫결혼을 후회한다는 발언을 했었다. 그녀는 십대시절 유명한 남자 가수를 만나 스무살에 결혼을 했었고 이 일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져 한창 시끄러웠다. 게다가 그녀는 후회한다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남자 가수들의 여전한 팬들로부터도 엄청난 욕을 먹었다. 왜 스스로 한 선택이 만든 결과로 후회를 얘기하며 그 가수를 욕보이냐는 것이었다. 나 역시 십대 시절 그 가수의 팬이었고 만나고싶다, 친해지고 싶다는 당연한 사춘기적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수에 대해 잊게 됐고, 사실 그다지 팬심이란 것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그 가수의 사생활 역시도 관심이 없었다. 여자배우가 나왔던 토크 프로그램도 보지 않아 정확한 워딩을 알 순 없지만, 나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했던 선택이 자신에게 나쁘게 다가왔다는 걸 지금은 알고, 또 그에 대해 후회하는 것 역시도 당연하다 생각한다. 지금 그 당시 기사를 검색해보니 그 여자배우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 살이라도 더 먹었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도 한 모양인데, 나는 이것도 역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게 열여섯살이었고 상대는 인기 있는 가수 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에게 '네가 한 선택인데 말 함부로 하지마, 네가 한 선택에 책임져'라고 돌려주었다. 나는 그 당시에 대중들의 이 반응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친구를 만난 술자리에서 '어떻게 십대의 여자가 한 선택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나 잔인할 수 있지?' 놀랐더랬다.



'로미 홀'은 종신형으로 감옥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녀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사회인'이었을 때 그녀의 직업은 '스트립 댄서'였고 그녀는 아들 하나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그녀가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마스 룸'에서 그녀에게 '정을 줘버린' 남자 '커트'가 그녀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님으로 그녀의 춤을 보는 걸 즐겼으나 그 관심은 점점 넘쳐서 그녀를 미행하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도 쳐보지만 다 소용없다. 그녀는 그가 여행간 틈을 타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 이제 그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집에 귀가해보니 현관에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쳤고 그녀는 질렸다. 그녀는 아이를 집 안에 들여보낸 후 다시 나와 그 스토커를 죽여버린다. 그렇게 그녀는 종신형을 받았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모습이 그동안 나의 선택들로 형성된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 여기 아니면 거기의 선택에서 무언가를 분명 선택한 순간이 있었고, 그것은 내 생각과 내 결정이었으며, 그것들은 모여서 지금의 나와 지금의 나의 삶의 방식을 이루어왔다. 지금의 내 모습이 과거의 나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거라면 앞으로의 내 모습 역시 지금부터 선택할 내 결정이 형성할 것이다.



로미 홀은 스토커를 죽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가 스트립 댄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 스토커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스트립 댄서로 돈을 버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스트립 댄서가 되기로 했던 것은 그렇다면 그녀의 온전하고도 순수한 선택이었을까? 그녀가 스트립 댄서가 되기 전의 생활은 어땠을까? 어떤 시간들이 그녀를 스트립댄서가 되는 삶으로 데려온 것일까. 그녀의 어린 시절, 더 어린 십대에 그녀에게는 가난한 동네가 있었고 마약이 가득한 동네가 있었다. 그녀가 여기에 이른건 정말 그녀의 온전하고도 순수한 선택들 때문일까. 그녀가 부잣집 딸로 태어났어도 그녀는 스토커를 죽이고 종신형을 받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스토커를 죽였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싶었지만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국선변호사가 할당되었는데, 그에게는 그녀를 지킬 의지도 딱히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고 지독하게 괴롭히던 스토커를 죽였다'는 사실을 배심원들에게 전할 수 없었고, 배심원들은 그녀가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 그녀에게는 종신형이 내려진다.




그런 그녀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에게는 어머니도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보살펴주기로 했으니, 이것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위안이요 행운이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흐르던 어느날, 그녀는 교도관으로부터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 일곱살이 된 아이에게 돌보아줄 어른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건 감옥안에 있는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 소식이다. 그녀는 아들의 소식을 알고 싶다. 아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누가 돌보아주고 있는지 그걸 알고 싶다. 아직 일곱살 아들의 소식을 알려달라고 그녀는 울부짖지만 교도관들은 그런 그녀에게 그러게, 잘못을 저지르지 말고 살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꾸할 뿐이다.



"제 아들이에요." 내가 말했다. "이제 겨우 일곱살이에요.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가 가봐야겠어요."

"네가 가봐야겠다고? 넌 두 번의 부정기형을 선고받았다, 홀.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

"내 아들이라고요. 걔가 병원에 있는데, 내가 ……"

"홀, 누군가의 어미 노릇을 하고 싶으면 사고 치기 전에 그 생각부터 했어야지." (p.205)




존스가 말했다. "넌 그애의 보호자가 아니다, 홀."

"그럼 그 보호자가 누군데요? 내 아이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겠어요."

존스가 수감실에서 멀어져갔다. 그녀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목소리의 톤을 가다듬었다.

"제발요, 존스 교위님. 제발."

그렇게 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디스트에게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존스가 멈춰 서고는 내게 예의를 갖춰 대하는 척 굴었다.

"홀, 힘든 일이라는 것 안다. 하지만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은 백퍼센트 네 선택과 행동의 결과야.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고 싶었으면 다른 선택을 했어야지."

"저도 알아요." (p.251)



그 누구보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고 있는 건 홀 자신일 것이다. 그 때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 아들과 떨어져 살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채로 저 바깥에 엄마 없는 곳에서 아이의 삶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펼쳐질 것을 스토커 앞에서 미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을 때의 선택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는건 아니었다. 그녀가 스토커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디로 피해도 그를 마주치는 일을 계속 겪어야 했을 것이다. 피하고 도망치고 이름을 바꾸고 숨는 일들의 반복이 그녀에게 남겨졌을 것이다. 그녀가 선택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그녀가 그것 말고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딱히 행복한 삶이 펼쳐지는 건 아니었다. 하나의 비극과 또다른 하나의 비극 사이에서 선택한 것은 과연 존스 교위의 말처럼 그녀의 '백퍼센트 선택과 행동'인것일까. 그녀에게 스토커가 없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스토커가 그녀를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설사 그를 죽였어도 그녀를 변호해줄 좋은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있었다면 역시 다른 결과를 손에 들었을 것이다. 이런 로미 홀에게 교위를 비롯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건 네 선택이었잖아, 그러니 결과에 책임져'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가?




이 책은 감옥에 있는 로미 홀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녀가 있는 감옥에는 이렇게 저마다의 선택으로 감옥에 오게된 여자들이 가득하다. 사형수도 있고 곧 풀려나갈-그러나 다시 잡혀 들어올게 뻔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어떤 죄를 저질렀든, 그 순간 그 행동을 '선택'한 여자들이 지금 여기에 갇혀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 채로 뜨개질을 하고 나무를 다듬고 싸우고 약을 한다. 놀랍게도 이들 모두는 사회에 있었을 때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고 또 그들이 살아온 어린 시절도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가난, 마약, 알콜, 양부모, 폭행. 그런 환경속에서 살면서 순간순간 내린 선택들은, 이 사람들의 백퍼센트 선택이며 그렇기에 지금은 그들이 선택한 결과이므로 합당한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를 수시로 떠올렸다. 우리는 그 때 우리가 선택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선택이었을까.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의지라한들 애초에 주어지는 선택지가 달랐다면 다른 삶이 펼쳐졌을텐데, 주어지는 선택지가 다른 것은 왜 고려되지 않는가.



성매매 집결지에 서 있도록 강요되게끔 내 자신을 최초로 허락했을 때, 이상하고 역설적이게도 과감한 결단을 내린 듯한 기분이 샘솟았다. 가출 이후 처음으로 삶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느꼈듯이 말이다. 몇 년 후 과거를 돌아보고 깊이 들여다본 뒤 그 감정이 주도권 상실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을 자각하고는 얼마나 어리석게 느꼈는지 모른다.
성매매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들 사이에서 성매매는 자라난 가정에서 독립하는 일반적인 나이 혹은 권장되는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독립한 10대 여성들이 흔히 진입하게 되는 삶의 국면으로 널리 인식된다.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정말 알아야 할 때는 몰랐다.- 레이첼 모랜,《페이드 포》, P96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레이첼 모랜,《페이드 포》, p.127



스토커를 때려 죽이는 여자가 나온다는 것 정도만 알고 봐서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자유로워지는가를 표현해줄 줄 알았다. 오랜만에 속시원해지는 책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이 책에는 자신의 선택으로 감옥에 오게된 수많은 인생이 담겨있었다.


1번과 2번 중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그렇다면 우리의 순수한 의지이며 선택인가. 1번부터 5번까지의 선택지가 있는 사람도 있고, 애초에 7번부터 100번까지의 선택지를 받아든 사람도 있다. 주어지는 선택지가 다른데도 결국 절망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그것은 네 선택이잖아, 라고 일갈할 수 있을까. 앞으로 로미 홀의 어린 아들이 받아들게 될 선택지는 어떤 것일까.


절망은 이런 식으로 반복된다. 내가 받아든 선택지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토퍼스의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술에 취하고 약에 절어서는 박사가 팬티 옆에 찔러준 지폐 두 장이 미국달러가 아니라 그보다 가치 낮은 캐나다달러라는 사실에도 성질머리를 부리지 않던 밤이 있었더랬다. 하 하 하. 그런데 칵테일 웨이트리스가 대체 왜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을까? 그건 토퍼스 미스터리의 일부였다. 토퍼스 유일의 미스터리였다. 그는 그 미스터리를 부수고 여자를 위장순찰차로 데려갔다. 팬티를 내리고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었다. 여자가 제모기인지 왁스인지로 정리한 저 아래가 꼭 아이처럼 느껴졌으니, 박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수호자가 아니던가. 털 없는 보지의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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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7-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별 네 개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7-08 11:31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책이었고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무거운 책이었어요. 잠자냥 님 읽고나서 어떤 리뷰를 써내실지 너무 기대됩니다. 그리고,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0-07-08 11:43   좋아요 0 | URL
지난번에 추천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런 댓글을 본 적이 있어서 살짝 사볼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사보겠습니다. ㅎㅎㅎ (땡스투는 거여유셀 다락방 님에게 ㅋㅋㅋ)

다락방 2020-07-08 11:59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스릴러 소설을 기대했다가 너무 절망적인 내용을 만나서 과연 이 절망을 추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거든요. 그런데 절반을 지나고 나서부터 작품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자꾸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책장을 덮고 이것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요. 잠자냥 님 이라면 이 책을 읽고 아주 좋은 리뷰를 써주실 것 같아요.

비연 2020-07-0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도착했어요. 지금 간단하게 읽고 있는 소설 하나 다 끝나면 이 책 바로 들어가려구요.

다락방 2020-07-08 12:00   좋아요 1 | URL
비연님, 책장이 쉬이 넘어가는 책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에요. 천천히 읽어보셔요.
 
하리오 드립서버 - 6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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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일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서 내가 드립서버를 샀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넣어 마시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의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내가 알라딘의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도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아아 인생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그러니까 핸드드립 분쇄로 원두를 사서 사무실에 있는 커피메이커에 넣고 내려 마시다가, 흐음, 드리퍼 사긴 싫지만 쫄쫄 내려볼까, 하고는 핸드드립커피필터를 사서 몇차례 쓰다가 흐음, 안되겠다, 하고는 드리퍼를 샀더랬다. 드리퍼를 사기까지는 나름 생각을 많이 해야 했다. 나는 사용하지 않는 모든 것은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사용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드리퍼 역시 플라스틱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고, 나는 세상에 쓰레기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다. 어쨌든 샀고 이제 드리퍼를 이용해 텀블러에 커피를 내려마시기 시작했다. 내릴 때 나는 향을 맡으면서, 이것이 커피가 주는 행복이다, 맛이 아니라 향, 하면서 좋아했더랬는데, 아아, 슬금슬금 서버 욕심이 생겨버린 거다. 나는 또 갈등을 시작한다. 얼마가 됐든 공간을 차지할 것이고, 몇 번 사용하지 않고 처박아둔다면 역시 쓰레기... 쓰레기 만들고 싶지 않다...하는 마음과 투명한 용기에 커피 내려지는 걸 확인하고 싶은 이 마음.. 텀블러에는 얼만큼의 커피가 내려졌는지 몰라서 수시로 드리퍼를 들어 올려 확인해야 했었던 거다. 게다가 텀블러에 내려 머그잔에 따르노라면(커피는 머그잔이잖아요?) 반드시, 꼭, 예외없이 텀블러 바깥으로 커피는 쪼르륵 흘러내리는 거다. 좋다, 사자. 그렇게 나는 세상에 쓰레기 하나를 더 늘려버리는(에코페미니즘 읽은 부작용..) 것이었던 것이었다. 어제 도착했고 오늘 아침 내렸다.






아, 이게 뭐라고 이리 행복해. 나 왜 행복해? 이게 뭐라고 행복해? 아아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여... 투명한 케이스에 커피가 쪼로로 내려지는 거 보는데 왜 행복해? 코끝에 커피 향기가 스며드는데 왜 행복해? 바깥에 비 오는데 빗소리 들으면서 커피 내리는 거 왜 행복해? 왜 이렇게 사소한 걸로 행복해? 흑흑.

다 내리고 나서 머그컵에 따르는데, 아아, 서버 바깥으로 커피가 흐르지도 않는다. 만세 ㅠㅠ 서버 만세 ㅠㅠㅠ



사진을 찍어두고 가만 보노라니 알라딘에서 산 커피, 알라딘에서 산 드리퍼, 알라딘에서 산 서버... 이것은 코로나 때문인가 싶어졌다.


사용하지 않으면 쓰레기이니 사용해야지. 사용하면 돼.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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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6-30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코페 읽은 부작용 ㅋㅋㅋㅋㅋㅋㅋ 머리핀 하나 사도 아 내가 이 지구에 쓰레기를 이렇게 하나 더 늘려가는구나 10년 쓰면 죄책감이 좀 사라질까 캔맥주 마시고난 후에 아 이 캔 어쩔겨 이거 재활용 안되면 또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죄책감 마구 상승하는 시점.... 에코페 읽고난 후......

다락방 2020-06-30 11:56   좋아요 2 | URL
저는 원래 예쁜 쓰레기 싫어하거든요. 필요한 것 실제 쓰는 것만 좋아해서 데코성 물건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안생기고, 드립 서버도 그런 물건이 될까봐 멀리한건데..아아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저도 캔맥주 다 마시고 버릴 때도, 와인병 다 마시고 버릴 때도, 아아 내가 너무 먹고 마시는가...쓰레기를 줄이려면 소비를 줄이는게 답이다... 하게됩니다.

얼마전에는 쿠키를 먹었는데 세상에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있는게 아니겠어요? 집에서 아빠엄마한테 분노했어요. 세상에 왜 쿠키를 플라스틱에 담아, 이게 다 쓰레기야 쓰레기!! 이러면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6-30 12:18   좋아요 1 | URL
저도 어제인가 재활용 쓰레기 내면서.. 와인병을 헤아리며.. 비연, 너 이래서 되겠니. 인류에 이런 병쓰레기를 마구 날려도 되겠니... 하며 한병씩 한병씩.. 차곡차곡 쌓아올렸다는. 그러니까 우리는 먹는 것만 좀 줄이면 세상에 쓰레기 양산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텐데요.. 그러나 그 맛마저 없다면... ㅜㅜ

비연 2020-06-3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살 예정임다... 집에서는 드립커피 먹는데 직장에서도 먹고 싶어서..
이것은.. 에코페 관점에서.. 그래도 네스프레소 같은 캡슐커피는 아니니까 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나이다. ㅜ

수이 2020-06-30 11:41   좋아요 0 | URL
에코페 관점에서 드립도 마시고 네스프레소도 마시는 저는 흑흑흑 죄책감을 따따블로 안고 가고......

다락방 2020-06-30 11:54   좋아요 0 | URL
그렇제만 네스프레소는 캡슐 재활용이 되는걸요... 저 일요일에도 매장 가서 캡슐 반납하고 왔단 말이에요. 흑흑 ㅠㅠ

저 드립 서버 처음 써보는데 좋아요. 으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비연 2020-06-30 12:17   좋아요 0 | URL
아. 캡슐은 재활용이 되는군요.. 전 안 써봐서 잘 몰랐다는...ㅜㅜ
그러나 드립 서버 정도의 소박한(?) 사치는 우리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요.. 라면서 막 에고페를 애써 밀어낸다..
다른 걸 안 사니까. 고럼요고럼요. 다른 걸 잘 안 삽니다.. (흠냐흠냐)

다락방 2020-06-30 12:1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저도 다른건 잘 안사요. 책만...책만 사요..책은.... 쓰레기가 아니니까요. 계속 책장에 꽂혀 있으니까요...... 그쵸?

=3=3=3=3=3=3=3=3=3=3=3=3=3=3

비연 2020-06-30 13:00   좋아요 0 | URL
그쵸 책만.. 책만.. 책만. 책이 쓰레기라뇨. 인류지식의 보고이자.. 책장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제 재산.
.. 그래서 오늘도 내일 살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나이다. 오늘 사지? 아닙니다. 7월에 살 거에요.. 휘릭.

바람돌이 2020-06-3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콩을 갈지는 않나요? 좀 있으면 분쇄기도 하나 사실듯.. 심지어 여름에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기 위해서 캡슐머신까지 산답니다. ㅎㅎ

다락방 2020-06-30 13:48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회사 직원이 이제 분쇄기 사셔야겠네요, 하더라고요 ㅋㅋ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분쇄기까지 사진 않을거야!! 정말 인간이란 모를 존재에요. 저도 제가 이럴줄은 몰랐습니다...

캡슐머신은 집에 이미 있습니다. 집에서는 네스프레소 내려 마시고 있어요. 우힛.

바람돌이 2020-06-3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행복할 일 맞습니다. 좋아하는걸 먹기 위한 장비가 늘어난걸요. 기쁘고도 기쁜 일이죠. ㅎㅎ

다락방 2020-06-30 13:48   좋아요 0 | URL
예전엔 시간 걸려서 핸드드립으로 커피 내려마시는 건 진짜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 쪼르르 물 내려가는거 보면서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사소한 걸로도 행복해하는 소박한 사람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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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에 들었던 정희진 쌤 강연에서 정희진 쌤은 본인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은 책으로부터 얻는다는 말씀을 하셨더랬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으로부터 얻는게 무척 많다고 자부하면서도, 필요한 모든 지식을 책으로부터 얻는다는 게 가능할까, 더 많이 읽는다면 결국 그렇게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책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얻는 것은 가능할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책으로 만들어져 나오는 속도가 있으니, 또 그 책을 내가 읽어야 하는 시간도 필요하니, 모든 지식을 제때에 얻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것은 가능하겠구나.


나는 코로나19 이후의 삶에 대해서 처음부터 불안해하지도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마스크도 벗을 것이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예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내가 가고싶은 곳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시간은 고작 한두달 정도였는데, 지금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코로나는 종식되지 않고 있고, 그 사이에 나는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너무 가고 싶은 마음에 아직 9월 계획을 취소하지 못하고 비행기와 호텔에 예약이 잡혀있는 상태인데, 지금은 6월 초이고 9월까지는 세달 남았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바라고 있었다. 지금도 바라고 있다. 그러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이 책에서 여행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알라디너의 얘기를 듣고는 얼른 사서 읽었다. 내 생각보다 길어지는 이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하겠기에.



처음 등장하는 최재천 박사의 이야기들로 아주 중요하고 당연한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자연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 사실 화해라기 보다는 자연을 더이상 침략하지도 공격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 맞겠다. 최재천 박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진 것은 '우리가 전례 없이 야생동물들을 건드려대기 때문' (p.25)이라고 말한다. 박쥐가 우리한테 부러 와서 옮겼느냐, 아니다, 우리가 박쥐를 잘못 건드린거다, 라는 것. 결국 인간이 자꾸 숲으로, 야생으로 들어가서 들쑤시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았다면 옮기지 않았을 바이러스들이 인간에게 찾아왔다는 거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정리해주니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라도 우리는 더이상 예전처럼 살던 방식을 유지해서는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된거다.



그리고 홍기빈은 여행에 대해 언급한다. 뭐라고 말할지 듣고 싶었지만 듣기 싫은 그런 양가적 감정으로, 알아야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여행에 대한 홍기빈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우리가 대체 왜 해외여행을 그렇게 다녀야 하느나며, 내 안의 욕망을 다스리자고 얘기한다. 홍기빈의 얘기를 읽고 또 읽으면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 무엇보다 내 욕망에 스스로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겠구나, 싶다. 내 마음을 다스려야지. 실상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건 내가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아는 거였다. 가고싶지만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은 갈 수 없다고 나를 다스리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마음먹은대로 되는게 아니었다. 아주 자주, 얼른 정리되어 날아가고 싶다고, 요이땅만 하라고, 그러면 바로 앞으로 튀어가겠다고, 의욕 충만한 상태였던 거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 활자로 얘기해서 정리해주니, 좀 더 단단하게 질서를 잡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꼭 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에게 좀 더 자주 부드럽게 말해줘야 겠구나. 이렇게 쓰면서도 그런데 너무 속상해. 하...




이번 코로나 상황을 보면서 미국에 대해 가장 놀랐다. 너무나 급속하게 확진자가 생기고 사망자도 늘어나는 것에 너무 몰라서, 도대체 미국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인 미국이 도대체 왜 이렇게 대책없이 무너져가고 있는가, 생각한거다. 게다가 뉴스 화면상에서 보는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예방에 참여하는 것 같지도 않은거다. 게다가 최근에는 백인경찰이 흑인을 사망케 하는 사건도 일어나 미국 전역이 들끓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미국은 총체적 난국인것 같았다.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분노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미국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미국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다른 지도자였다면 코로나가 확산될 때에 그리고 백인경찰이 '또' 흑인을 사망케 한 일에 대해, 다른 지도자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것은 지도자의 문제인걸까. 곳곳이 들쑤셔진 미국은 그렇다면 안정이 찾아오긴 할까, 언제 찾아올까, 에 대해서 좀 충격적인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누리' 가 말하는 미국에 충격받은 한국인중에는 이렇게, 내가 있었다.



미국은 사실 내게는 어릴적부터 가고픈 나라였다. 선망의 대상이랄까. 내가 보았던 영화, 내가 읽었던 책, 내가 들었던 음악에 미국이 있었다. 센트럴 파크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내가 살면서 꼭 가봐야 할,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내 손으로 돈을 벌고나서 미국에 여러차례 다녀온 뒤에도 뉴욕이란 도시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현실적이 되어 '언젠가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여기는 내가 살 수는 없는 곳이구나'로 바뀌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언제든 또 찾아가고 또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렇게 처참하게 엉망이 되는걸 보는 건 충격이었는데, 어쩌면 (이 책의 정관용 표현대로)엉망이 '되는'게 아니라 엉망이었던 모습을 내가 미처 보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사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미국에 '여행'차 갔을 때에는 단순히 여행자의 모드로 그곳을 보았지, 거주자의 눈으로 그곳을 보진 못했을 테니까.



그러고보면 반미정서가 가장 적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중의 하나였으면서 그런 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이 씁쓸하다. 우리에겐 어떤 시간들이 있었던 걸까.


얼마전에도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 에 대해서 친구랑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에 대한 감상에서 얘기하게 된건데, 그때 나는 친구에게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의 인용문을 들려주었더랬다.



다음날 저녁은 우리가 마닐라에서 보내는 마지막이어야 했어요. 나는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어요.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중략)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텔레비전에서는 어떤 허구 인물이 죽으면 마음이 많이 움직이죠. 여러 일화를 통해 내게 친숙해진 인물이 죽으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그 순간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모신 하미드, p.66-67



파키스탄 사람인 주인공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여자를 사랑하고 미국에서 직장을 잡고 살지만, 그러나 미국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해 쓴 소설이다. 그는 이 거대한 미국,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배타적인 미국을 무릎 꿇게한 상징성에 대해 즐거워한다. 주인공도 이런 자신의 감정에 대해 혹여나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저어하긴 하지만, 그러니까, 어떻게 미국한테, 이렇게 거대한 나라를 어떻게, 감히, 무릎 꿇릴 생각을 했을까, 에 대해 생각한거다. 

미국은 나에게, 이슬람 사람들에게, 유럽 사람들에게, 아시아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어떤 나라였던걸까.




미국에 친구들이 있다. 다른 나라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멀리 있다는 것이 나에게 그동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정말 그렇게 만나기도 했으니까. 그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도 하고 우리의 중간지점인 다른 나라에서 만나기도 했었으니까. 나는 별 걱정없이 이런 삶이 언제든 가능할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내 '의지'와 '시간'과 '돈' 만 있다면, 아무리 먼 곳에 당신이 있어도 우리가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고 나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산불 때문에, 태풍 때문에, 지진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그런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은 내게 가능해질까? 가능하다면 그건 언제쯤일까? 그리고 그렇게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일은, 정말 괜.찮.은.걸.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내가 만나겠다는 것이, 또 다른 식으로 결국은 자연과 인간을 공격하게 하는 건 아닐까.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에도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면 그런데,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의 여섯학자들은 모두 우리가 '예전처럼' 살게될 순 없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에게 잠재력이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말하는데, 나 역시 이모든 상황이 안정될 것이고 우리가 적응할 또다른 삶의 모습에 우리는 결국 익숙해질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순간 우울해진다.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두렵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뒤로 밀어두어야 하는 것도 두렵다. 무엇보다 이 두려움이 오래 지속될까 두렵다. 마음의 질서를 찾자고, 반복해 속삭인다.






지금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백신밖에 답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백신을 만들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린다면서요. 아마 실질적으로 2~3년 걸리겠죠. 그런데 만일 앞으로 바이러스가 거의 매년 우리를 공격한다면, 백신은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1년 동안 몇만 명 죽고 난 뒤에야 백신이 개발되고 유통되는 셈이죠. 백신은 독성을 약화시켰거나 죽인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로 만들거나 병원체를 둘러싸고 있는 표면 단백질 혹은 독소를 추출해 만들잖아요? 이런 화학백신보다 더 좋은 백신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행동백신과 생태백신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바로 행동백신의 일종입니다. 옮겨가지 못하게만 하면 바이러스는 아무 힘이 없거든요. 그리고 숲속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게 생태백신입니다. 우리가 행동만 확실하게 하면 옮아가지 않습니다. 그게 훨신 더 좋은 방법이죠.


바이러스가 번번이 나타날 때마다 백신 개발한다고 1년이나 3년을 허덕이다가 대충 넘어가게 되거든요. 바이러스의 창궐 시기가 점점 짧아져 3~5년마다 한 번씩 인류를 덮친다면 우리는 늘 뒷북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백신의 안정성과 효과를 검증하려면 바이러스가 계속 유행하고 있어야 하는데,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고 세계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질 무렵이면 바이러스는 저절로 한풀 꺾이기 마련입니다. 사스와 메르스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요. -최재천, p.33





소비가 미덕인 건 현대밖에 없죠.


그렇죠.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꼭 해외여행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명도 이 문명밖에 없습니다.


전부 새로 나온 거죠.


그런데 이런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는 원칙이 계속되는 한 생태 위기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코로나19 위기도 누그러지지 않을 거고요. 현대문명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이 원칙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에 우리 스스로 질서를 부여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무한한 욕망을 계속 무한하게 긍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홍기빈, p.120-121



여기서 우리가 살아온 방식도 바꿔볼 게 있을 겁니다. 우선 매년 한 번씩 해외로 여행을 가서 공기를 더럽히고 돈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가서 피사의 사탑을 꼭 손으로 만져봐야 할까요? 지하수고 암반수고, 심지어 빙하 녹은 물까지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도시에서 마셔야 하겠습니까? 덴마크 사람들도 우리도 농사 짓고 돼지 기르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단 몇백 원, 몇천 원이 더 싸다고 해서 우리 농산물을 덴마크로 보내고, 덴마크에서 돼지고기를 가져오다보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의 질서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진 욕구와 능력의 한계와 질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유한한 인생인데 수십 년을 한없이 먹고 한없이 입다가 끝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이러스는 미물이지만 우리에게 인간과 이웃과 자연이 함께 지복을 누리는 '좋은 삶', 그걸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홍기빈, p.125





미국은 뭐든 잘하는 나라인 줄 알았는데 엉망이잖아요.


미국이 저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가 한국이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국민은 한국인일 거예요. 대체로 유럽에서는 미국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이 넓게 퍼져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실상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전세계에서 가장 반미주의가 약한 나라, 거의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할 정도예요. 우리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우리가 앞으로 선진국이 된다면 따라가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던 미국이 저렇게 처참하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 못 한 거죠.


사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제3세계 수준의 삶을 산다는 것, 게다가 생존과 생명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지켜줄 공공의료시스템이 없다는 걸 지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진 미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너무나 좋은 계기라고 생각하고요. 왜 그런가 하면 한국은 사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미국화가 심한 나라거든요. -김누리, p.134-136





정말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회적으로 원하는 걸 계속 추구하다보면 훨씬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훨씬 더 많이 빼앗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걸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역량을 발전시켜가는 사회나 문화에서는 더 적은 걸 가지고 공존하면서도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겠죠. -김경일,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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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6-1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셔서 약간 의외였는데, 그런 동기가 있었군요.
저도 코로나 때문에 여행 못 가는 게 정말 답답하고 언제나 다시 갈 수 있을까. 우울하기만 했는데, 이 책 내용 보니 정말 여행을 그렇게 가야 하는가 싶어지네요...

최근 쏟아지는 코로나 관련 책 저는 1도 관심없었는데(왠지 다 졸속으로 냈을 거 같아서요;) 이 책은 좀 궁금해지네요.

다락방 2020-06-12 11:32   좋아요 0 | URL
저도 평소 같았으면 이 책을 읽을 생각을 전혀 안했을거에요. 잠자냥 님 말씀처럼, 저도 뭔가 이슈됐다 싶으면 후다닥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해 좀 얄미워하고 있거든요. 뭐야, 똑똑하다고 소문난 사람들 입을 빌어 시류에 편승해 책 팔아먹자는 거잖아,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 ㅎㅎ
그런데 여행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읽게 됐어요. 그렇게 가야만 하는건가 이 책에서 얘기하니, ‘그래, 못가도 아쉬워말자, 그간 충분히 다녔잖아‘ 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면서도 잘 안돼요. 너무 가고싶어요 ㅠㅠ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새로운 안정은 언제쯤 찾아올까요. 언제까지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할까요 ㅠㅠ

단발머리 2020-06-12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아직 읽지는 못 했지만, 이 시리즈 방송분을 모두 들었잖아요. 전, 홍기빈 소장 이야기랑 장하준 교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아서 페이퍼도 쓰고 그랬는데요. 음.... 전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이 아닌데, 최근 몇년 사이 아이들 데리고 간다는 핑계로 여러번 비행기를 탔었더랬죠. 그런 기억이 행복하고 좋고 그렇기는 한데, 홍기빈 소장 이야기가 마음에 와서 박히더라구요. 지나친 소비, 지구에 대한 파괴 행위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상황이 바뀌면 또 그렇게 하겠다는 거냐? 전 속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그러면서도 현재 우리 삶과 문명에 대한 경고를 그런 식으로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아직도 그 속에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의료체계가 엉망이긴 해도 이 총체적 위기는 지도자 때문이라고 전 생각해요. 메르스 때 질본의 공무원들 지금 K방역 그 공무원들 이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리더가 중요하다. 제일 윗대가리가 제일 중요하다. 트럼프는 시위 일어나니까 군대 동원한다고. 그러고도 남죠.... ㅠㅠ

다락방 2020-06-12 15:47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의 갈등이 뭔지 알겠어요. 저도 이 책 읽고 나니까 그렇게 여행을 가야만 하는가, 라고 제 자신에게 묻게 되더라고요.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 욕망대로 행동할순 없는거잖아, 라고요. 그래서 홍기빈 소장 얘기에 막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고..그러면서도 가고싶단 말야 ㅠㅠ 이렇게 되고.

이 책에 실린 모든 얘기들이 다 귀담아들을만한 좋은 얘기였어요. 처음 최재천 박사의 원인분석에 대한 글도 좋았고요. 자연을 침략했다는 부분에서 에코페미니즘 생각도 났어요. 우리가 자연에게 못할짓을 하고 그게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오는거죠.

저도 미국을 보면서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지도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하고 자꾸 생각하게 돼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요. 미국은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싶고요.

이번 주말이 우리 수도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고비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주말에 나가지말고 에코페미니즘 읽어요!!

공쟝쟝 2020-06-18 08:07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 방송이 뭐예용? 알려쥬세요~~~!!!

단발머리 2020-06-18 08:10   좋아요 1 | URL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코로나 19, 신인류 시대> 유튜브에 가면 바로 나옵니다. 굿모닝^^

공쟝쟝 2020-06-18 08:25   좋아요 0 | URL
굿모닝모모닝^.^ 내일은 엄마랑 그 프로그램을 보겠어요! 고맙습니댜!

다락방 2020-06-18 08:35   좋아요 1 | URL
오, 저도 시간될 때 한 번 찾아 봐야겟어요. 감사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은 정말 다방면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고 교양을 막 쌓으시네요. 멋져.. ♡.♡

단발머리 2020-06-18 08:44   좋아요 1 | URL
이렇게 유튜브 달인은 교양인이 되는 건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믿어 주세요, 다락방님! 엄청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 진짜로 그런 사람 되볼려고 합니다요!!!!

psyche 2020-06-18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로 미국의 민낯이 드러났고 바닥 또한 드러나고 있는 거 같아요. 미국이 개개개인은 부족해도 시스템은 제대로 되어있는 줄 알았는데 대통령 하나로 이렇게 무너지는 나라라니 참 ㅜㅜ 이런 상황에도 트럼프가 재선될까 걱정해야 하는 것도 한심하고... ㅠㅠ

다락방 2020-06-18 08:34   좋아요 0 | URL
프시케님 계신 곳은 괜찮은지, 프시케님은 잘 지내시는지 걱정이네요. 하루속히 미국이 좀 안정을 되찾길 바랍니다. 지금 상황은 너무 괴로워보여요 ㅠㅠ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할까요? 멀리서 보는 저로서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할것 같은데 말예요. 하긴 대통령이 될 줄도 몰랐었죠... 미국은 대체 어떤 곳인가요..... ㅠㅠ
 
책 읽다가 이혼할 뻔
엔조 도.다나베 세이아 지음, 박제이.구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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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취향이 너무 다른 부부가 서로 추천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기획을 해 연재를 시작한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그만 읽을까 고민하다 겨우겨우 다 읽었다.


책에 대한 책이라면 보통,


1. 내가 읽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던가

2. 내가 모르는 책들을 읽고 싶어진다던가


해야 재미있을텐데, 이 책은 위의 1,2 번중에 해당사항이 아무것도 없는 거다. 모르는 책들 투성이에 아는 작가는 두어명쯤 나오고(한 명은 스티븐 킹!), 죄다 모르는 책인데 아무것도 읽고 싶은게 없는거다. 종이접기 같은 책은 뭐 어쩌라는건지... 책에 대한 책중 가장 재미없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내와 남편의 성격도 달라도 너무 다른데, 나는 내가 아내와 비슷한 성격인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의 성격이나 취향쪽이 더 잘맞았다.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건지 나랑 비슷한 사람은 싫어서인지 아내에게 묘하게 내가 싫어하는 성격적인 면이 있었던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 자체는 여러가지로 매력 없는 책이다. 걍 이 부부의 자아찾기... 정도의 책으로 마감한 듯.



마지막 부부작가의 대화도, 그리고 번역자 부부의 대화도 좀... 이게 뭐여..싶고...;;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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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20-06-11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믹~~^^ 배려...
 
나는 너를 본다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불법촬영, 스토킹, 데이트앱, SNS, 강간, 살인, 그리고 남자-아들, 남편, 애인, 직장동료-와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여자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더 안타깝다. 실질적인 위험이 닥쳐와도 '내가 예민한건가' 스스로 검열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가 미친년 취급 당할까봐 걱정해야 하고. 게다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오래 반복해야 하는걸까. 왜 위험에 노출되는 것도, 공포에 휩싸이는 것도, 죄책감에 가슴을 치는 것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것도 여자들의 몫일까.


저자 '클레어 맥킨토시'는 12년간 경찰로 근무한 뒤 작가가 되어 이 소설을 썼다는데, 경찰로 근무하면서 얼마나 많이 억울하게 죽어간 여자들을 목격했을까. 여자가 자기 앞에 닥친 위험을 신고했는데 그냥 돌려보내는 경찰들이 영국에도 있다.


'조'는 퇴근길에 신문을 보다가 데이트앱 광고에 자신의 얼굴이 실린걸 보게된다. 자신은 애인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고 데이트앱은 사용해본 적도 없는데. 애인은 그저 사진이 도용당한 거라며 예민하게 대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조는 그럴 수가 없다. 게다가 그 뒤에 일어나는 여성을 향한 소매치기, 살인, 강간 사건들의 피해자가 그 광고속의 여성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래서 경찰에 이 일을 알린다. 담당형사는 그 제보를 크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준 여성경찰이 연관성에 대해 주장하며 사건 해결에 합류한다. 피해자들이 실렸던 데이트앱의 사이트는 암호를 넣고 들어가면, 여성들의 외모부터 하루 일과까지 다 공개되어있다. 그녀가 타는 지하철, 자주 앉는 자리,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 그리고 사진까지. 남자들은 돈을 내고 그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원하는 여성들의 자료를 다운받고, 그녀들의 동선 그 어디쯤에 느닷없이 나타나 그녀에게 마치 우연인듯 자연스레 다가간다. 그렇게 소매치기를 하고, 강간을 하고, 살인을 한다.


조에게 접근했던 남자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느라 데이트할 시간이 없었고, 이제 데이트를 좀 해보자 하니 여자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할지 몰라 이 사이트를 이용한다. 게다가 여자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해 백기사 역할을 자초한다. 백기사 신드롬이란 말을 이 책에서 처음 보았는데, 이 남자가 백기사 신드롬에 빠져있는 장면에서 나는 어릴적에 내가 보았던 숱한 한국영화들을 떠올렸다. 왜, 우리도 그런 장면 다들 한 번 이상씩 보지 않았나. 한 여자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가 그 여자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해 자기 친구나 지인들에게 부탁해 그녀를 둘러싸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시키는 장면, 그리고 그 때 남자가 그 자리에 딱- 나타나서 여자를 구해주는거지. 멋지게 구하면 멋져서 그 남자는 여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얻어 터지면 얻어터져서 동정심에 사랑을 획득하는 그런 장면, 우리 봤잖아. 책 속의 조가 위험에 노출됐다가 구해지는 연출된 장면으로부터 나는 한국영화의 그런 장면들을 떠올렸고, 어릴 적에 별 생각 없이 봤던 그 장면들이 얼마나 큰 여성에 대한 위협인지를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남자랑 사귀게 되는 로맨스의 한 부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막상 낯선 남자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을 때 내가 느낄 공포는 무엇일까. 영화에서는 언제나 남자와의 로맨스로 끝맺었지만, 그 여자는 남은 인생에 수시로 악몽에 시달리고 그 두려움이 떠오를텐데. 남자들은 '여자를 얻기 위해'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도 여성들은 공포를 느낀다. 내 허락 없이 내 얼굴을 촬영하는 것(심지어 어디다 전송까지 했단다),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발소리 같은 것들. 그게 이 책안에서 여성들의 출퇴근길에, 일을 하려는 데에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들이다.



사람은 다 달라서 하나의 사건에 대해 느끼는 바도 그리고 영향을 받는 바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책 속에서 언니는 동생이 당한 강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동생이 그 일로 아플까봐, 트라우마에 시달릴까봐,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동생이 강간범에 대해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왜, 그 놈을 잡아야지, 그 놈을 잡아 족쳐야지, 어째서 너는 그 일이 있는데도 마치 없는것처럼 살아가려는거야. 이 일로 사이좋은 자매는 수시로 긴장감을 형성하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언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범죄자를 쫓으려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에 더 기쁜 일들을 떠올리며 그 일을 잊고 싶어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상처인 이 일에 대해 받아들이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 강간을 저지른 건 강간범인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한 언니여야 한다는 건,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 아닌가.




등장인물인 조의 성격이 좀 짜증나서 초반에 읽기가 힘들었지만, 다 읽으면서는 경찰로 일했던 여성이 쓴 책이라는 게 너무 좋았다.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의심과 피해의식까지,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 썼으니까.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 강간피해자인 여성이 강간범을 만나면 묻고 싶다고 했다. '왜 나였냐'고, 자신의 어떤 점이 강간범을 자극한거냐고 묻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살 거라고. 자신의 하루 일과중에 그 부분을 바꾸겠다고.

피해자들은 모두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한 게 아니라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저 자기 삶을 사는 사람들.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이 범죄자를 자극한 게 아니라, 범죄자는 그저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던 거였다. 조의 동생도 조에게 말한다. 언니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 게 아니라,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고자 작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클레어 맥킨토시는 지금을 사는 작가이고 그래서 현재를 말한다. 데이트앱, 인터넷, 페이스북, 페이팔.. '여자를 찾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거나 태블릿을 손에 쥔 남자들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이거나, 남편이거나, 남자친구이거나, 회사 동료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말 그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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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9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9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9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9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20-06-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12년간 경찰이었다는 점과 현재 사회를 잘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저도 읽어볼게요.

다락방 2020-06-12 12:15   좋아요 0 | URL
고전은 고전의 의미가 충분히 있지만 현재를 말하는 작가는 또 그대로의 의미가 있는것 같아요. 경찰 생활 했던 사람이라 경찰의 부족한 면이나 집착에 대해서도 잘 써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