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초인 현대영미드라마학회 영한대역 22
조지 버나드 쇼 지음, 허종 옮김 / 동인(이성모)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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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쇼는 그의 생명력life force와 초인superman에 대한 사상을 희곡으로 표현한 작가이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사회 개혁을 위한 극작품을 썼다. 그에게는 [극작품의 질은 그 속에 담긴 사상의 질이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작가인 셈이다.

그가 그리는 초인은 인간의 모든 욕망과 제한을 벗어버린 개인을 의미한다. 또한 헤겔적으로 표현한다면 세계사적 개인들인 셈이다. 기존의 질서를 부인하며 의지와 열정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역사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맞추는 사람들...버나드 쇼는 이 작품에서 특별히 개인의 성적 영역, 특히 결혼이라는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초인으로서 부정의 자세를 보여준다.

과연 관습적 남녀 구속의 틀인 결혼은 그 자연의 생명력의 힘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남자를 사냥하여 자손번식의 희생물로 삼고자하는 여성의 본능과 로맨스와 사회의 관습, 육체의 본능에 따라 이를 위해 사냥감이 되는 남자에 대한 조롱으로 이 극은 일관한다. 결국 끝까지 저항하던 터너 또한 이 힘 앞에 굴복하고 앤과의 결혼에 동의하고 만다. 그러나 이제 결혼의 낭만적 의미란 사라지며 이들에겐 [본능에 충실한 서로간의 합의]만이 남는다. 쇼는 이 낡은 제도의 개편에 대한 反인 터너를 뛰어넘는 힘force이 앤 안에 표출 되어짐을 보인다. 새로운 변증법적 신여성인류의 사고방식이다.

버나드 쇼를 통해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모든 사회 구조의 의미와 틀을 새롭게 짜고자하는 신인류의 의지와 만나게 된다. 이런 인간의 유형을 그는 니체의 초인superman과 헤겔의 영웅heroic human의 결합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충실히 이를 그의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지끈거리는 철학의 논조가 아닌, 사실적 현실의 언어로 뱉아 놓는다. 철학이 소화된 여물의 형태로 오락거리의 수단이었던 연극에 뛰어들어온다. 이제 연극은이 철학적 프로파간다로 훌륭히 거듭나는 셈이다. 사람들의 기존관념을 비웃고 어리둥절하게 하며 결국 동의와 대안에 대한 긍정까지를 요구한다. 그 해답은 이 극에선 기존질서인 램스덴이나, 사회적 순응자인 옥타비우스도, 그 반대자인 터너나 사회부적응자인  멘도사에게도 없다. 승리는 생명력의 초인 앤에게 있었다. [포스가 강력한 자가 최후에 승리한다](요다)

결국 초인들이 만드는 사회의 꿈은 천국과 지옥의 재편이다. (3막) 이성의 편(초인)으로 투쟁해 갈 것인가? 아니면 관습의 편(인간)으로 편히 살 것인가? 끊임없는 기존사회에 대한 야유와 뒤집기는 삶에 대한 삐딱히 보기를 넘어 이제 우리시대에는 하나의 인간 삶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이들 탈도덕, 탈관습적 부류가 과연 새로운 인류homo supermanicus인지 혹 스스로의 궤변에 함몰되어 퇴행되어버린 Regressian인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지만 이 희곡은 분명 그 생각들을 가장 잘 표출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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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이성 - 헤겔학 총서 7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지식산업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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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슈타인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의 근대화 개혁 정책을 계승한 총리 하르덴베르크에 의해 설립된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은 1818년부터 강의를 시작한다. 이 책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 1822년에서 1828년까지의 첫번째 초안과 1830년의 두번째 초안을 싣고 있다. 1831년 사망하기 직전까지의 그의 강의록이란 점에서 그의 역사철학의 대강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면서도, 그가 직접 쓴 책에 비해 읽기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강의의 전반적 줄기는 그의 [정신현상학]에 있다. 세계사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태는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욌다는 이성에 대한 확신이다. 역사가 어떤 이성적 의지에 의해 섭리되어진다는 믿음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을 닮았다. 하지만 헤겔에게는 신적 의지는 일반화된다. 선택이 아닌 일반계시가 전적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인류전체는 이미 이 [신의 백성]으로서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해석하고 그 긍정에 힘입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럽적 가치에 있어 죄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고 모든 유럽인은 혹은 독일인은 이미 선택받은 신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감과 물려있다. 

이런 섭리의 궁극목적, 혹은 운동의 방향은 자유이다. 더 많은 자유. 역사는 그렇게 움직여왔다는 것이다. 해방. 그래서 고찰의 대상은 인간적인 자유의 이념 The idea of human freedom이다. 이념은 세계사 속에서 가장 구체적 현실성을 나타낸다. 현실로 나타나는 정신은 결국 개별자(개인)로 환원될 수는 없다. 헤겔은 이 정신의 현실적 구현, 현상을 국민정신으로 본다. 국가를 통해 이성의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는거다. 인간은 이런 국가안에서만 자신의 본질을 지니며 자유를 얻는다. 국가는 목적,시민은 도구라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하지만 이건 헤겔이 직접한 표현이다.

이런 이해는 자연스레 나로 하여금 우리민족의 사명과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끈다. 헤겔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규정성 안에 놓인 자유에 관한 정신의 의식과 그 발전의 단계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1) 동양의 감각적 동기의 포기의 단계와 2) 그리스의 국부적 특수성을 소멸하는 보편성의 발견의 단계 3) 규정한계의 인식과 새로운 규정의 창출이 이런 역사의 발전 단계이다.  이 단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 놓인 현재적 세계정신을 파악하는 것은 정신이 세계사의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낸 정신 자신의 행적을 아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 역할을 감당할 우리 민족의 사명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국가에 속한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는 정신의 이해이다. 개인은 교양을 쌓아 정신에 관한 자기의 개념을 확립하여야 한다. 개인은 스스로 앞선 시대의 각기 다른 영역을 경과하여야만 이런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정신이 지금 현재 속에서 그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면 [우리나라의 단계는, 나의 단계는?] 이라는 질문과 함께 당연히 그 이해의 틀로서 [정신현상학]을 사용하도록 이끈다. 이는 신학(정신의 포착)을 벗어나 각 개인도 철학과 정치로 가라는 권유이기도 하다. 둘째는 세계사적 개인이 되고자, 정당하고 필연적인 것을 의욕하고 완수하려는 열정과 의지이다. 실현의 능력이며 열정으로 집중하여 정신이 현상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 이들은 보편적 실체에 대한 통찰력으로 또한 이 정신의 현실적 실현으로 말미암아 이 역사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민족이 역사속에 실현하고, 봉사하여야 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관점이 우리 역사이해의, 나아가 [인간의 사명] 이해의 단초인가? 즉 역사발전 혹은 신적 의지에 의한 인간자유의 지상적 실현에 있어 이 민족이 어떻게 타오르 횃불이 되고 또 사그러져야 하는지(타고르)를 아는 것이 우리의 존재와 의미를 규정지을 수 있는가? 진정 그러한가 그리고 그것이 인간존재 목적의 모두다인가? 헤겔이 말한 집단적 의미(大我) 이외에 개인실존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긴 진정한 신의 모습이 그리스도가 아니던가? 헤겔은 혹시 그가 원하는 모습만을 그리스도에게서 보는 것은 아닌가? 국민교육헌장적인 인간이해와 개인의 존엄성은 과연 같은 것인가?

결론부에서 헤겔은 신의 자기귀착적 목적성(웨스터민스터 교리문답1번,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을 전용(轉用)하여 정신의, 또 그 현재형으로서의 국가의 합목적적 자기정당성을  획득하게 한다... [개인은 정신 혹 국가를 위하여 존재한다] ...필요한 생각이며 그리스적 이기주의의 파행을 극복하는 길임에는 틀림없으나, 나는 나 자신을 이런 목적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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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의 처녀 서문문고 306
프리트리히 쉴러 지음, 최석희 옮김 / 서문당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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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 독일의 정신은 이제 역사철학의 틀 안에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절대정신의 역사 속에 나타남을 이웃나라의 혁명을 통해 목도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 파국의 모습인 영웅 혹은 참주(僭主)인 나폴레옹에 짓밟히는 자기 조국의 현실 앞에 괴로와 한다.

예나대학 역사학 교수였던 쉴러가 표현한 15세기의 영웅 쟌다르크(독일명 요한나)는 그래서 이런 독일적 상황과 역사에 대한 한 빛을 던지고자 한다. 절대정신의 나타남이지만, 그 형태에 있어 철저히 민족적인 배타성을 띤 역사 속의 정신이다. 그녀에게 영국은 철저히 응징의 대상이며 프랑스, [내가 태어난 곳]은 그 이유만으로도 목숨으로 지켜야 할 곳이다. 침략해 오는 프랑스에게 19세기의 독일이 그러하듯이...이것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인 [자유]를 거스르거나 되돌리려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의 정신인 프랑스 삼색기에 맞설 명확한 독일적 이유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 친프랑스적이었다 회의를 품게 된 독일 지성에게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나의 조국.

그래서 쉴러가 그리는 요한나는 1429년, 역사 속의 쟌다르크와는 다른 변형을 거친다. 그녀는 더 이상 우연히 신의 음성을 듣고 전쟁에 뛰어든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곧 절대정신의 현현이다. 그녀의 죽음은 이제 탑에서의 마녀심판과 그리스도의 법정의 유사성을 넘어, 역사의 도도한  물결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주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시험을 거쳐 예정된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전장에서 죽었던 그녀는 [이미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선포한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성취한 것은 역사가 그녀에게 준 사명의 깃발이었음을... 그녀는 떠오른다. 갑옷은 날개옷이 되며 땅은 점점 멀어진다.

내가 바이마르에 앉았던 독일인이라도 이 결말에 벌떡 일어나 눈물지으며 열광하였으리라. 그리고 독일 역사철학을 다시 썼으리라. 이제 독일이라는 땅에 태어난 한 개인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민족을 구원하여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국민정신의 나타나는 모습인 열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적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19, 20 세기 프랑스, 독일 이 두 민족이 저지른 민족적 범죄 또한 이런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이들의 [암흑의 핵심]은 이들의, 또 그 사상의 마녀성을 감추지 못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된 독일인의 학살과 프랑스인의 식민지전쟁과 자신들의 호사를 지탱키 위한 수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국민정신이 또 있을까? 혹 스스로 세계의 수호자라 여기며 현재 聖戰중인 국가도 이런 모더니즘적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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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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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은 발자크의  [인간희극] 91편 중 하나인 소설이다. [인간희극]의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중 3분의 2 이상의 소설이 풍속 연구에 속해 있다. [풍속 연구]에 속한 사생활 정경, 지방 생활 정경, 파리 생활 정경, 정치 생활 정경, 군인 생활 정경, 전원 생황 정경 가운데에서 작품 수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생활 정경이다. [고리오 영감]은 이 풍속 연구의 사생활 정경 항목 속에 분류되어 있는 작품이다.

1834년 나온 이 책은 1819-1820년의 파리의 한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 두 딸을 위해 자신의 재산, 생활, 행복, 몸뚱아리 전체를 갈아 바친 삶을 산 아버지가 바로 고리오다. 그 두 딸은 자신들을 사랑한 아버지를 철저히 이용한다. 사랑이라는 족쇄는 인간을 이용하는데 더 할 나위 없는 덫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야유이며, 희생적 사랑을 당연시 하는 자들에 대한 고발이다. 이 고발은 고리오의 부성애 뿐아니라  여인들의 사랑을 이용해 돈을 떼먹고 달아나는 그 딸들의 남편과 그 애인들에도 역시 유효하다. 부모의 사랑과, 이성의 사랑. 얼마나 많은 희생들의 이유가 되어왔던가? 응답하는 사랑을 보였던 리어왕의 셋째 딸과 같은 구원이 없는한 이 사랑은 결국 일방적 비극이 되고 만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순수했던 청년 라스티냐크이다. 시골에서 올라와 법학을 공부하던 그는 세상의 힘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에 눈뜨게 된다. 사랑을 이용해, 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출세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고 믿게 된 라스티냐크. 그는 고리오영감의 죽음에 분노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이 사랑을 이용하는데는  얼마나 두 딸과 똑같은지는 인정치 않는다. 그는 갈등 속에서도 [상대적 선]에 스스로를 위로하며 점점 이 길로 들어서고 있다. 그렇게 심하게 이용해먹진 않는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미 들어선 것과 이제 막 들어서기 시작한 것의 차이 정도만으로 비칠 뿐이다. 발자크는 라스티냐크의 변모를 통해서 인간의 선하고자하는 마음이 어떻게 사회라는 환경속에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무너져가는가를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병폐, 황금 만능주의, 인간성 상실의 코드로 읽혀지기도 한다. 또 한편으론 고리오를 나폴레옹의 유비 인물로 보아 지배계층이 단물 빨아먹고 부르조아층도 결국 떠나며 버림받아 유배로 삶을 마치는 것과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겐 단지 딸 생각도 나고 부모님 생각도 나게 하는 소설이다. 나의 사랑은 진정 딸에게 올바른 것인가?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받아들였나? 고리오는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한다. 딸을 잘못 길렀다는거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거라고 고백한다. 현실의 상황이 그리 만들었다 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겠다. 시간이 없어서...다들 그 정도는 애들에게 해주니까...말하기전에 내리사랑의 본능이 아닌 올림사랑의 노력을 시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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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쉽게 읽는 철학 3
랄프 루드비히 지음, 이동희 옮김 / 이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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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역사속의 이성]을 읽고자 먼저 잡은 책이 이 책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의 역사철학, 논리학, 법철학, 종교철학을 [정신현상학]의 발췌에 지나지 않다고 할만큼 그의 모든 사상의 체계와 윤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때문이다. 

1806년 멀리 예나의 외곽지역으로부터 나폴레옹 군대의 포성소리가 들려올때, 이 위대한 철학자의 가슴속에는 정신현상의 포성소리, 독일정신을 깨우는 포성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그의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나온 교회의 표상을 극복코자하는 마음의 기획과, 당시의 프랑스로부터 밀려들어온 새롭게 한 민족의 역사를 쓰는 정신의 만남이었다.

종래의 철학이 절대정신 혹은 이성의 완성을 성부적 절대자에게서 찾았다면,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이제 육화된 세계정신이었다. 이것은 마치 성육신의 유비이며, 주인으로서의 신이 육화되어 지옥의 끝까지를 온전히 겪은 후 누리는 화해와도 같다. 이 새로운 피조물 즉 부활한 절대정신인 자기의식은 이제 새로운 세계를 보며, 지상의 삶 또한 궁극적 가치로 파악될 수 있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기치를 올린 독일민족에게, 루터가 파악한 이 진리는 300년이 지난 후 그 후손에 의해 철학으로 바뀌어진다. 하지만 변증은 원래의 계시 위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화해의 규정과 이성에 의한 자기세계 구축이라는 인간적 생산물을 들이댄다.

또한, 정신의 일대혁명과 이를 역사속에 행동으로 구현한 프랑스인들은 이제 코밑에 다다랐다. 그의 육화된 절대정신은 이제 독일민족 안에서의 현실이 되어야 했다..인간이 왜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의 형이상학적 논의(칸트)가 아닌, [그따위 철학이 무엇에 쓸모있다는 말인가?] 라는 명제에 충실한 현실로의 철학의 전회다. 그는 독일연방의 통일과 국가 이데올로기의 제조에 그리고 단일국가에 익숙치 않은 독일 민족 구성원의 복종에 허다한 말들을 쏟아놓는다. 그래서 결국 강한 종교적 성향의 파편화된 민족을 새로운 탈종교적 삼위일체로 묶어내고자 한다. 어찌보면 abuse of theological concepts for the foundation of profane nation로 볼 수도 있지만 [철학이란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명제를 따른다면 당연한 운동인지 모른다.

[쉽게 읽는 헤겔]이라 붙힌 제목이 무색하게 몇번을 어려움을 느끼게 한 책이지만, 이 책을 마치고 집어든 [역사속의 이성]이 너무나 재미있고 와닿는 것이 된걸 보면, 분명 [정신현상학]의 원본 읽기 대신 선택한 것이지만 나와 같은 의도를 갖는 독자에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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