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극찬 덕에 내게 오게 된 책. 그래도 남들이 좋다고 하는 책은 왠지 꼭 읽어봐야할 것만 같은 강박. 게다가 재미있다고 칭찬일색이지 않은가. 

그. 러. 나. 오랫만에 다 읽지 않고 덮어 버려야 할 듯한 예감. 80% 정도 읽었는데 인내가 필요한 독서를 하고 있다. 감히 대가를 평가하거나 비판할 깜냥은 꿈도 못꾸고, 절대 나의 취향이 아님을 고백해야 겠다. 일단,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너무 모호하다.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적어도 그 경계는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괜히 자주 불편하다.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작가의 목소리인지 대체 구분지어낼 수가 없다. 한 때 탐닉했던 작가 이덕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 지점을 지목하던데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봐도 될까? 기대했던 헨델 메시아 작곡과 톨스토이의 만년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흑흑, 재미가 없다. 이 점이 중요하다. 너무 지루하다.  

독일 국민들이 가장 사랑해 마지 않는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데, 그 작가의 저작을 이렇게밖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가 괜히 우울하게 다가온다.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지. 모두가 아니 대부분이 추어주는 작가의 작품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도 전에 그냥 덮어버릴 듯.  

오랫만에 책 읽는 것이 싫어졌다. 읽고 싶은 책도 그닥 없고. 괜히 책까지 나를 따돌리는 기분. 이 시큼털털한 맛. 상큼한 독서를 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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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0-2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작가 있어요. 미셸 투르니에, 그 중에서도 방드르디.. 으으 읽다가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 주인공 하는 꼬라지도 맘에 안들고 ㅎ

blanca 2009-10-26 22:15   좋아요 0 | URL
주인공 하는 꼬라지 ㅋㅋㅋ 뒤로 넘어갑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0-2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겐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
듬성하게 책읽는 직장인이라 그런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blanca 2009-10-27 13:35   좋아요 0 | URL
^^ 원래 저도 그랬는데 한동안 추천리뷰 많은 책들 사서 읽다보니 대부분 재미있어서 신났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사는 책들 다 줄줄이 어찌나 지루하고 우울한지. 한동안 책값은 굳을 것 같아요. 재미난 책 추천좀 해주세요~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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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사지 않는다...
소설은 사서 읽지 않는다...
가장 먼저 처분하는 장르이다... 

이런 개별적인 명제를 가장 충실하게 논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의 책이 있다면, 끊임없이 줄긋고 메모하고 별표까지 덧붙이게 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 대열의 중심에 김훈의 작품들을 지명하고 싶다. 그는, 나도 언젠가는 소설을 쓸 수 있고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철저히 풀어 헤친다. 그는 소설가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가이며 수많은 현상들을 채집하여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언어로 하나하나 닦아내어 대중들에게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하는 지를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기자 생활의 30년 내공이 그의 소설 속 언어들과 묘사들을 얼마나 치열하게 연마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근거라면, 소설가로 가는 길은 분명 극도로 험준하고 선택받은 소수들만 걸어갈 수 있다는 아주 특별한 노정이다.  

일단 '공무도하' 아주 재미있다. 사실 그간 '칼의 노래', '남한산성', '화장', '언니의 폐경' 등을 읽었는데, 작가가 워낙 관조적이고 치열한 문장들을 뿜어내는 지라 읽기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진화를 이루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막 읽어낼 수 없는 본연의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문정수와 노목희의 일상적인 대화를 읽어 가다 보면 툭툭 터지는 웃음들이 김훈도 충분히 간질간질하고 살랑살랑한 남녀 간의 분위기를 살려 낼 수 있구나, 싶어 놀라게 된다.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의 중량감이 진득한 이러한 소설은 분명 그의 치열한 집필 과정에서 나올 수 있으리라. 

주인공? 글쎄, 사회부 기자인 문정수가 1인칭 화자도 아니거니와 그가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를 과연 주인공이라고 지명할 수 있을까 싶다. 오히려 그는 그 어떤 관조의 중심에 있고 모든 죽음들을 흘려 보내는, 모든 현상과 인간의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개별화할 수 없는 한계의 중심에 서 있는, 작가 자신 같다. '공무도하'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문득 피안을 응시하는 것 같으면서 피안을 거부하는 약육강식의 현존을 감내하는 조금은 허무하고도 차가운 것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라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해망'은 작중 인물들이 교차하는 아주 특별한 지점이다. 해망은 작은 어촌마을로 미군의 공습훈련이 이루어져 수많은 고철이 해저에 가라앉아 있는 곳이고, 매립지 기반공사가 한창으로 급격한 산업화의 표본과도 같은 곳이다. 그 과정에서의 탈인간화는 차라리 하나의 부속품 같다. 이 지명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서는 고도의 상징성을 획득한다. 운동권의 주변부에 있다 선배형사의 권유로 장철수가 삶의 또다른 근거지로 떠난 곳이기도 하고, 인명구조특공조장 소방위였다 화재현장에서 금품을 훔치고 박옥출이 귀향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개에 물려 죽은 아들의 죽음을 스산함으로 받아들였던 오금자가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가는 곳이기도 하며, 문정수가 군복무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망은 출발지가 아닌 도착지로서 '에서'가 아니라 '로'가 되었던 곳. 강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간 백수광부는 어쩌면 또다른 이곳에 정착해 또다른 비루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피안도 강건너 이쪽에서 볼 때만 저쪽의 가능성일 뿐, 또다른 이곳이 되면 또다른 남루한 삶이 되버린다. 해망에서처럼.  

그리고 노을에 대한 이야기,
해망의 묘사에서 노을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해망 그 자체의 발붙일 수 없는 떠있는 느낌을 가장 극적으로 집약하여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주 자주 등장한다. 정말 아름답고 엄정한 묘사들로.  

염전에 소금이 내렸고 소금 위에 노을이 내렸다. 바닷물이 말라가는 동안의 시간의 무늬와 그 시간 속을 스쳐간 바람의 무늬가 소금 위에 깔려 있었다. 사내들이 밀고 나가는 삽날 앞에서 소금은 노을에 버무려졌다. 소금은 노을의 알맹이처럼 보였다.  

그. 러. 나. 작가가 냉소적으로 얘기했던 강저편에는 하나의 지향점이 떠오른다. 그 지향점에는 노목희가 작업하는 책 '시간 너머로'의 저자 타이웨이 교수가 있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서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무리하게 사물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중략>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힐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중략> 그의 글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성찰에 가까웠고 증명이 아니라 수용이었으며,  

이 아름다운 이상화된 사유의 자유스러운 기운을 떨치는 이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맹목적인 것 같다. 결국 그는 덕적스러운 인간들에게서도 하나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사실 가장 인간들이 가지기 힘든 극복의 과제를 타이웨이 교수에게 던져내어 풀어낸 것은 그 만큼 그런 이상화된 인간형과 그러한 인간들이 만들어 낼 피안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큰 탓이 아닐까? 그가 혐오해 마지 않는다는 그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가 기실은 가장 끈끈하게 맺어지고 싶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런지. 고독을 자초하는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애정을 갈망하는 이들의 다른 군상이다.   

소설이 단순하게 현실의 상념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고 몽환적인 세계에서 작중 인물들에 스스로를 투영하며 욕구불만을 한시적으로 누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허구의 중량감으로 모든 진지한 가치를 내리누르고 말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성찰(그것이 아무리 처절하고 비루할지라도) 및 그것을 넘어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시지프스적 희구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 성취를 얻게 되는 것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그런 지점에서 분명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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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문방사우에 집착했다.
지금도 팬시점에 풀어 놓으면 하루 종일도 놀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도 일종의 자존감 부족에서 비롯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가 가져야 할 것, 가지고 싶은 것에 훨씬 더 비중을 많이 두는 습성. 

각설하고 요즘에는 로디아에 꽂혔다. 그렇다고 로디아에 관련된 것이 있냐 하면, 단 하나도 없다.-..-
그저 매일 검색과 후기 정독으로 그 세계에서 놀다 로디아 메모지 쓰니까 좋냐고 한마디 물었더니
모든 사물에 대체로 무관심한 옆지기가 또 질러댈까 두려워 그랬는지 "하나도 안좋다."고 하도 강조하는 통에
참고 있다.  

내 책상은 십곱하기십에서 충동적으로 공수한 실패한 품목들이 처절하게 누워있다. 왜 내가 화이트 보드가 필요한가? 그것도
탁상식으로 세워진다고 혹해서 구입했더니 지금은 불량한 자세로 아예 수시로 드러누워주신다. 왜 내가 그 많은 마스킹 테이프가 필요하겠는가? 딸내미님이 친히 다 방바닥에 붙이고 다녀 주신다. 몰스킨을 쓰면 내가 헤밍웨이의 문장을 조금은 빌려올 수도 있을 성싶고 로디아를 쓰면 그 모랄까, 사각거린다고 하니 그 소리에 갑자기 명필이 될 성도 싶고, 완전 착각 및 망상에서 비롯된 허무한 구매욕이지만 그래도, 나는 로디아 메모지에 로디아 연필로 장 갈 품목을 메모하고 싶다는 것.  

족욕을 시키면 잠을 잘 잔다기에 족욕을 시켜주었더니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오히려 더 자주 깨주시는 공주님처럼 나를 헛된 기대로 채우지 말 것.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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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나를 미치게 할 때 -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고 아이 마음과 소통하는 법
에다 레샨 지음, 김인숙 옮김 / 푸른육아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사람을 미치게 할 때.  

웃긴 게 사람상대하는 일을 하면서도 저 진상이 참 싫구나, 정도의 감흥이었지, 그 사람이 나를 미치게 한다는 과대 망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사실 사람이 그것도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게 현존에 발을 담근 제대로 된 인식일 리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 즉 내가 너무 괴로워서 내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서 미치고 싶다는 표현과 다름아닌 것이 아닐까. 

그 런 데 두 돌 언저리의 나의 딸이 드디어 사람을 미치게 하기 시작했다. 정말이다. 악을 쓰며 아무 이유없이 삼십 분을 방바닥을 마구 굴러당기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사람을 미치게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구나. 참을성 많고 감정 컨트롤 잘한다고 말도 안되는 자랑을 마음 속에 품었던 내 자신을 이제 다시 검토해 볼 때가 왔구나. 나는 다 혈 질이었던 것인가? 

그 때 내 맘을 그대로 표현한 이 책 제목이 왔다. 의역이 아니었다. 직역이었다. 제목이 다분히 선정적이고 상업적으로 보이지만 이 책 내가 읽어 본 육아서 중 가장 통찰력 있고 섬세하며 현실적이고 실효성이 있다. 일단 작가가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상을 강요하지 않고 감기 걸린 아들 둘을 일주일 동안 집에 가둬놓은 상태에서 너그러운 엄마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외치는 부분은 정말 엄마가 된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연관된 상황에서는 늘 통찰력을 갖고 섬세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바로 '인내'다. 자신의 성장에 대해 나름의 시각이 있는 아이는 한 명도 없다. 아이가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89쪽)  

 
   
싸이에 육아가 행복해 죽겠다고 올려대는 얄미운 친구들은 나에게 육아의 핵심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은 고통어린 인내의 저 끝 지점에 있었다. 육아의 핵심은 인내다. 정말 극렬하게 동감한다.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이거나 무관심한 것과는 다르다. 아이의 성장에 관여하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는 뜻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기다림이란 성장에 꼭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을 철학적으로 인식하라는 의미다. 또 아이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단계에 머물러 있을까봐 전전긍긍하며 불안해 하지 않는 태도다.(90쪽) 

 
   
육아가 힘든 것은 이 상황이 지속될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밤에 여섯 번씩 깨서 울어댈 것이라고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한 공포 영화가 있을까? 
   
 

어리고 약한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하고, 나와 아이 모두에게 얼마나 많은 격려가 필요한지 알았더라면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편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내 딸은 물론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어린 시절의 나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 안도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197쪽) 

 
   
이 문구 만으로 나는 충분히 위로를 받았다. 감사.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어야 너그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확신이 설 때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329쪽) 

 
   
 맞아.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을 테니까.
   
 

어린아이의 성에 대해 가르칠 때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말고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까지 가르쳐야 한다. 우리 어머니는 자위행위를 아주 명확하게 정의해 주었다. 정상적이고 즐거운 일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이다.(353쪽) 

 
   
   
 

어떤 관계에서든 중요한 것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강요나 선입견 없이 자연스럽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374쪽) 

 
   
 이 책은 단순한 육아서가 아니다. 이런 대목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부모란 어머니날을 맞아 꽃과 근사한 카드를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사랑만을 외치는 달콤한 배경 음악 같은 것도 아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 노릇이다. 부모 자식의 관계야말로 신의,책임,헌신 같은 말들이 완벽하게 통하는 관계이며 그런 관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기쁨이 곧 진정한 기쁨이다.(413쪽)

 
   
육아는 정말 힘들지만 한 번 걸어가 볼 만한 가치 있는 길이라는 격려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 준 사람은 바로 이 책의 저자 에다 르샨이다. 엄마는 무조건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경이로운 감정으로 아이가 이뻐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대며 살아야 자애롭고 모성애 어린 정말 엄마라는 작금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한 나 같은 엄마에게 괜한 죄책감을 조장하고 있다. 애가 항상 너무 이뻐서 감격어린 것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전두엽이 완전히 성숙하지 못해 자제와 절제를 모르는 그 어린 생명체를 하루 종일 끼고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놀이까지 동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모랄까 참으로 지치고 단조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견디는 것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오는 경이로움이다. 내가 생명 하나를 탄생시켜 하나의 어른으로 키워내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각성 같은 순간이 찾아오면 갑자기 사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내 앞의 작은 생명은 하나의 기적의 표본으로 보인다. 이 책이 여느 육아서와 다른 것은 아이 입장도 중요하지만 양육자로서의 엄마의 어린 시절의 결핍을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아이를 돌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복원해 가는 과정. 아픔을 치료해 가는 과정. 그럼으로써 나는 과거를 다시 되살려내 불가능할 것만 보이는 바로잡는 과정을 시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육아의 기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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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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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솔직히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 수많은 방언들, 토속어들, 주어를 찾으려 두 번정도는 다시 읽어야 겨우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만연체의 문장들. 지극히 남성적인 거칠고 투박한 묘사들.  

한국 문학의 금자탑으로 추앙받는 이 연작 소설이 나에게는 사실 뒤이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성장 소설들에 물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상큼하지도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아 조금은 심드렁하게 읽혔다면 무식의 자랑이 될까, 오만이 될까. 

이 소설은 흔히 그렇듯 작가의 실제 성장기에 가깝다고 한다. 70년대에 씌어진 작가의 유년시절을 보낸 관촌에서 측근들(특히 이 측근들은 대체로 식모, 머슴 등 그의 기준에서는 하층민이다)과 어우러져 겪은 수많은 추억들에 대한 회상이다. 그는 특히나 상주목사의 증손자로서 한산이씨의 명문 거족의 후예라는 것을 할아버지의 얘기를 풀어가며 고백하게 된다. 평론에서 언급됐듯 그에게 은연중 유교질서에 대한 선망이 아로새겨져 있는 듯한 것이, 어린 나이임에도 하대하며 지내는 주변 인들에 대한 관찰기에 우리는 은연중 계급의식이 고착화되어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70년대라는 산업화의 질주 환경 속에서 가지는 이 작품의 의미를 복원할 수 없는 나의 한계가 이 작품의 무게를 제대로 달 수 없게 하는 것 같다.

여하튼 이 책을 다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수많은 토속어와 순우리말들을 건져올린 것에 의기양양하련다. '이슬바심'이라는 예쁜 말을 훔치면서. 

이슬바심 : 이슬을 맞거나 이슬이 내리는 풀섶을 헤치며 걷거나 일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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