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그런 입사 동기의 추억이 있다. 정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데에 가까웠다. 밝고 맑고 친절했다. 그런데 설명하기 힘든 어긋남이 있었다. 그는 나의 결혼식을 앞두고 여러 번 전화가 왔다. 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고 여러 진행 상황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주었다. 참고로 나는 그의 결혼식에 이미 기꺼이 참석했고 동기 회비에서 갹출한 부조금 외에 개별적으로 추가로 또 부조를 했다. 아, 계속 치사해지는 것 같지만 향후 할 이야기에 이 부조금은 대단히 중요해진다. 그는 반드시 내 결혼식에 오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건 내가 먼저 원하거나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연락도 없이 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부조금도 조금 기대했던 선물도 없었다. 아, 이 사람을 어찌할까나. 사실 그는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전에 나에게 했던 그 지켜지지도 못할 약속과 마치 자신의 결혼식처럼 기대를 나타내던 그 모습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아마, 그는 아마도 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에게 연락해 수다를 떨었지 싶다. 나는 진심으로 황당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인간형인데 또 미워할 수도 없는...  그런데 그러한 인간을 다시 만날 줄이야.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의 처음 이야기 '잘 살겠습니다'에서 나는 마치 그 동기를 아는 사람이 살짝 비틀어 이야기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싱크로율 백퍼센트의 현현인 빛나 언니의 등장에 움찔했다. 아, 이런 인간형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구나. 그러니까 비호감인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마구 미워할 수도 없는, 대단히 계산적인 것 같은데 또 영 어리숙한 결국 내가 지고 마는. 장류진은 회사라는 조직에서 우리가 흔히 사람에게 가졌다 배반당하는 신뢰와 기대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조직 안에서 나누는 교감은 어떤 한계와 의외성을 지닌다. 그것은 시스템이 각자에게 기대하는 몫과 그 시스템 안에서 자신이 가지는 페르소나의 격자와 충돌하는 개인성의 발견이다. 다른 환경, 다른 조직에서의 인간 관계의 역학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내가 빛나 언니를 미워하면서도 하려 했던 그 사소한 복수의 황당한 결말에서 언니를 결국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근방에서 나는 잊었던 그 동기에 대한 나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었다는 것. 여전히 어떤 속수무책의 오지랖들에 어쩐지 넉넉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 잘 살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 


대부분의 이야기가 어떤 허를 찌르는 기대의 배반의 변곡점을 지나 따스하게 마무리되어 좋았다. 특히나 마지막 <탐페레 공항>은 또 어떤 추억을 환기했다. 다큐멘터리 피디의 꿈을 지닌 화자가 아일랜드에 워킹홀리데이를 가다 들르게 된 경유지인 핀란드의 공항에서 만난 시각장애를 지닌 노인과의 교감. 연락처를 주고 받고 막상 바쁜 일로 답장을 보내지 못하나 가슴 한켠에 남는 그 어떤 부책감, 상대의 안부에 대한 염려. 


그리고 언어, 인종, 국경, 시간을 넘어 여전히 남는 서로에 대한 마음. 


<일의 기쁨과 슬픔> 덕분에 나는 잊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잘 살고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어긋남으로 각자의 인생의 경로는 다시는 교차하지 못할 방향으로 선회했지만 그럼에도 나누었던 시간들이 가지는 그 가치와 무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어떤 안도감을 얻었다. 어떤 관계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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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5-10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혼식에 참석할 의사가 분명한 사람은 개인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한다면서 미리 연락을 합니다. 입사 동기는 애초에 결혼식에 참석할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인사치레를 한 것일 수도 있어요

blanca 2021-05-11 12:42   좋아요 0 | URL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튼 결혼식에 얽힌 황당한 일들이 제법 많았어요^^;;

레삭매냐 2021-05-12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결혼식을 치르면서 관계
의 손절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자연
스레 정리가 되는 게 아닌지...
사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출현하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요.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것 참.

blanca 2021-05-12 10:17   좋아요 0 | URL
저는 안 그러게 될 줄 알았는데 역시가 참 사람 치사하게 온 사람, 안 온 사람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훌쩍.
 

줌파 라히리의 신간이 오늘 아마존에서 출간된다고 해서 두근두근하며 기다렸다. 원서를 직접 받아보고 싶어서 고민하다 킨들로 다운받아 읽기 시작하는데 오잉? 왠지 이것 너무 낯익다. 장소와 관련한 소회, 다리를 건너는 일에 대한 삶의 은유, 친구 남편과의 커피타임. 이상하다. 이젠 점점 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이럴 수가 있나? 직장의 죽은 전임자의 모르는 삶에 대한 상상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킨들을 껐다. 
















2019년 3월 이미 번역되어 나온 책, 이탈리아어로 줌파 라히리가 쓴 첫 소설은 단지 아마존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에 불과하다. 신간이 아니었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이 영어 출간이 안 된. 나는 낚인 것이다. 나의 부주의함에. 

















아, 무르고 싶다. 그러나 이미 펼쳤기에 무를 수 없다. 그러면 나는 다시 하루키로 회귀한다.















하루키 신간이 나왔다. 사고 싶다. 참으로 나는 양심도 없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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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4-28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신간 소식만 듣고 깜짝 놀랐는데 아니었군요! 좋은건지 아닌건지 모르겠네요..

blanca 2021-04-28 13:21   좋아요 1 | URL
줌파 라히리는 몇 년 간 신간을 대체 왜 안 내는 거죠? 지금 이탈리아에 있는 것 같은데 왜 단편집이라도 안 내는 거죠? 이게 다 줌파 라히리가 너무 뜸해서 벌어진 일이라고요.--;;;

scott 2021-04-28 14:44   좋아요 1 | URL
블랑카님 줌파가 이딸리아말로 글을 쓰고 부터 미국내 문학계 입지가 확 꺾였어요,
이제야 출간되는 이유가 있음
줌파는 요즘 주로 이딸리아 작품 단편위주 번역하고 있고 대학 문창과 강의에 집중

잡지 뉴요커에 몇몇 단편 실렸는데 독자들 반응이 시쿤둥!
미국 독자들 냉정함 ㅎㅎ

하루키 티셔츠 에세이 작년에 나오자마자 읽었는데
맘 편히 설렁 설렁 읽기 딱 좋아요!

blanca 2021-04-28 15:13   좋아요 1 | URL
아니, 하루키는 왜 이리 요새 들어 다 짧고 설렁설렁... 좀 길고 묵직한 걸 써 주셔야 하는데... 아, 줌파 라히리가 단편을 냈었군요! 한번 찾아봐야 겠어요. 필력이 떨어졌나. 아니면 이탈리라어를 자꾸 고집해서 그런가.

잠자냥 2021-04-28 1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 진짜 무르고 싶겠어요....ㅠ_ㅠ

blanca 2021-04-28 15:14   좋아요 1 | URL
일단 몇 장 읽어서 불가능하더라고요. 비싸긴 또 어찌나 비싼지. 이걸 신간인 줄 알고 떨면서 음료까지 대령해서 시작했다는 ㅋㅋㅋ 이상타? 아, 이상하다, 계속 그러면서...

단발머리 2021-04-28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안타깝지만 이미 결제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ㅠㅠ
하루키 신간 읽으며 속상한 마음 달래시기를 바래봅니다.

blanca 2021-04-28 15:30   좋아요 1 | URL
근데 양심이 ㅋㅋ 바로 구입하기는 좀 그래서 참아보려고요. ^^;;;

레삭매냐 2021-05-1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떤 책을 샀는지 안 샀는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몰라서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답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조이스의 <율리시즈>이지만 흔히 난삽하고 어떤 체계나 구조가 없는 표현기법에 자주 차용된다. 무엇보다 청자나 독자가 화자와 작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을 때 방패막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작가가 의식의 흐름대로 썼다고 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불친절하고 난해한 글쓰기를 연상하게 된다. 

















솔직히 버지니아 울프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파도>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에 따른 불친절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은 해체되어 있다. 뚜렷한 서사 대신 여섯 명의 화자가 독백처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마저도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그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가 아니라 불투병한 휘장이 드리워진 듯 각각의 구역 안에서 독립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중심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가 버나드의 관찰이 가장 두드러지지만 결국 이 어린 시절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여섯 명은 독립 분리된 개별자들이 아니라 버나드의 내면이 다 포괄하는 하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그 경계는 모호하다.


아홉 개로 나뉘어진 섹션은 자연, 특히 파도를 중심으로 한 간주 형식의 묘사와 삶의 유년, 청춘, 중년, 노년, 죽음의 모습과 맞물려 이루어져 있다. 우리 인간들이 시간과 사회,외면에서 부여한 삶의 경로에서 기대되는 역할의 페르소나를 입은 채 소멸로 걸어가는 여정의 묘사는 태양이 떠오르고 지고 마침내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로 종결될 때까지 각종 부조리와 무의미와 충돌하지만 무의미와 절망의 종결부와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데에 울프의 진가가 있다. 울프는 어떤 섭리와 초극을 향해 죽음이 가지는 한계와 동시에 확장에 가닿은 시선을 언어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는 창조자이다. 과거의 수많은 집단들에 합류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도 무언가를 창조했다. 혼돈 속으로가 아니라 세계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 정복하고, 빛을 발하고, 영원한 길의 일부를 만드는 세계 속으로."

-버지니아 울프 <파도> pp.153


그것은 역사 의식이자 타인과의 합일이다. 나와 너와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고 심원하고 영원한 회귀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 더 큰 의미의 일부가 되는 삶과 생명으로서의 자각이 이 생의 한계를 허물 때 우리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울프는 믿었던 것 같다. 그녀가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고 몇 달 후 죽음으로 걸어들어간 행로를 그래서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녀 나름의 마침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이 생에 부과 받은 언어화의 작업을 완수했다고 여겼을 때 그녀는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라는 <파도>의 마지막 문장과 만났다.


<파도>는 읽어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살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의 이야기다. 아직도 제대로 다 읽은 것인지 제대로 작가의 의도를 읽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시간의 방울, 하루 하루의 경계를 넘어가며 사는 우리들이 각자의 외피를 입고 견디는 나날들의 심연에 가닿은 울프의 언어로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착각이 유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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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4-01 19: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읽다가 점점 오리무중의 늪에 빠지는 거 같아서 일단 멈추고, 해설을 읽고 다시 읽으니 그제야 진도를 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책은 한 달에 한 권 이상 읽으면 머리통 지퍼 열릴 거 같아요.

blanca 2021-04-01 20:50   좋아요 2 | URL
이게 참 묘했던 게 사실 초반부 읽으니 뭔 말인지 도통 헷갈려서 집어치우려 했거든요. 그런데 손에서 놓을 수가... 진짜 이게 버지니아 울프의 힘인가 싶더라고요. 정말 재미 자체는 없었는데 이건 진짜 대단하다, 이런 생각이 들고...여하튼 무언가 보통 작가가 아니라 이 사람은 뭔가 평범한 사람은 보지 못한 삶의 비의를 엿본 사람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이드 2021-04-01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마전에 등대로 읽으면서, 아, 쉬운 글 쓰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지금 읽는 책에 버지니아 울프처럼 길게 글 쓰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깐 한다면서 예시 나와서 공감했습니다. ㅎㅎ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으로‘ 읽으면서 울프가 가족 이야기들 본인과 주변 이야기들 소설에 녹여낸거 생각하면, 그나마 좀 읽혔는데, 파도는 또 벽이 크지 싶습니다. 울프 책 쭉쭉 읽고 있는데, 저는 지금 ‘울프 일기‘ 읽고 있어요.

blanca 2021-04-02 12:13   좋아요 0 | URL
아, 이게 진짜 버지니아 울프는 마성의 매력이 ㅋㅋ 분명 재미가 확 있는 건 아닌데 중독성이 있어요. 저도 아예 전작 시도를 할까 지금 고민중입니다. <세월> 고민 중이에요. 여기에서도 남자 형제들, 여자 형제들의 모습이 녹아 들어간 느낌이랍니다. 자전적인데 자기 복제적이지 않은 게 또 대단한 것 같아요.
 

만나고 보니 연인이, 배우자가 세기의 천재라면....뜬금 없이 이런 생각을... 내가 나의 삶을 포기하고 그를 완성하기 위해 투신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올랜도>는 이미 시도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읽어보니 몰입이 쉽지 않지만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다. 버지니아 울프가 사랑했던 비타 섹빌웨스트에게 헌정한 책. 남성과 여성의 경계, 시공간의 경계를 모두 해체한 작품이다. 16세기에서 출발하여 이 책이 출판된 1928년까지를 아우르는 이야기는 올랜도라는 신비로운 귀족 소년이 서른여섯 살의 중년의 여인으로 변모하는 지금, 현재에서 끝난다.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데 울프의 현란한 언어는 내적으로 이미 설득력과 구조를 품고 있어 전혀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아무리 허황돼도 기꺼이 속아줄 준비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비로운 마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그녀는 우리 삶의 '시간성'에 대한 심오한 천착을 예술적으로 승화한다. 우리 안의 수많은 자아들, 기억들, 우리 바깥의 죽음들을 아우르는 그 광범위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은 내가 느꼈지만 인식으로 포착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모호한 지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살아가는 기술의 달인들은-그런데 그건 종종 이름 없는 사람들이지만-정상적인 인간의 신체에서 동시에 고동치고 있는 60이나 70개의 서로 다른 시간을 어떻게든 하나로 묶어, 시계가 열한시를 치면 나머지 것들도 일제히 종을 치게 해서, 현재가 심한 혼란에 빠지는 일도, 과거 속에 완전히 매몰되는 일도 없게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이들이 묘비에 새겨진 대로 68년이나 72년을 정확히 살다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비록 우리들 사이를 걸어 다니고는 있지만, 이미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 어떤 이는 여러 형태의 인생을 경험하고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 밖에 자기가 36세라고 말해도 실은 몇백 살이 된 사람들도 있다. 

-<올랜도> pp.269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 초개처럼 죽어간 사람들이 허무하게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 차곳차곳 쌓여 계속된다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삶은 미래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억으로 추억으로 과거로 기억될 거라고. 우리는 그들의 과거가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 본다. 내가 되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그 모든 것의 현현이 내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절망하고 동시에 꿈을 꾸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생에서 나는 그를 완성시켜야 한다고...그건 지난하고 절망스러운 타협이지만 하나의 성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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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29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랜도 읽으면서 핀타지적 요소가 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자연스러웠어요. 다만 시간성 때문에 이해를 못하고 앞부분 다시 읽고 이해하고 넘어갔던 기억이ㅎㅎ
(현현 이란 단어 정말 매력적인 단어 같아요)

blanca 2021-03-29 16:56   좋아요 1 | URL
그게 참, 제가 판타지를 안 좋아하는 게 사실 몰입이 잘 안 되고 말도 안 된다, 이런 생각을 기저에 깔고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올랜도>는 그냥 다 설득되게 되는 묘한 힘이 있더라고요. 막, 그래, 그럴 수 있어, 이러고.., 울프는 정말 천재 같아요.
 

이런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책 내용도 좋지만 '옮긴이의 말'이나 '해설'은 더 좋은 경우. 아니면 심지어 그 '해설'과 만나야 그 책의 내용이 완성되는 경우. 여러 번 언급했지만 소설가 김연수와 평론가 신형철의 조합이 그랬고 콜레트의 <여명>과 옮긴이의 말이 그러했고 노로 구니노부의 <사랑에 관한 데생>이 또 그러하다.
















사실 서재분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노로 구니노부는 접하지 못할 뻔 했다. 나가사키 태생의 아쿠타가와상 작가로 이 소설은 그가 심근경색으로 죽기 전 마지막 작품이다. 아버지의 고서점을 물려받은 이십 대의 청년 게이스케가 헌책과 거기에 얽힌 사람들의 삶의 탐방기 형식을 띠고 있다. 오래된 책, 읽어버린 인연, 망각된 아버지의 삶이 태피스트리처럼 엮여 잔잔하고 여운이 길다. 실제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를 목격한 작가의 경험은 전체주의에 대한 혐오와 경고로 이어지며 일본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평화가 우리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년이 선대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이야기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들을 주워담아 재구성하는 그 찬란한 시간들에 대한 절창의 복원으로 빛난다. 


자네는 젊어서 아직 인생의 잔혹함을 몰라. 잘 듣게. 무상이라는 건 산 사람이 죽는 일이 아니야. 아름다운 게 추해지는 일이지.

-노로 구니노부 <사랑에 관한 데생> pp.216


시간의 힘은 놀랍다. 어쩌면 가장 인간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다. 아름다움도 스러지고 불꽃도 사그라든다. 모든 영원과 절대의 추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찰나의 시간들은 더 형형히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진다는 가정하에 향유했던 그 낭비했던 젊음의 시간을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되돌려 받을 수 없다. 그러니 해설자도 번역가도 모두 자신들의 이십 대를 추억한 것은 <사랑에 관한 데생>의 마침표로 유효적절하다. 소설가 사토 쇼고는 대학 시절 노로 구니노부의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어쩌면 자신의 왜곡된 기억일 수도 있다고 시인한다. 옮긴이는 "그토록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던 시대에도 그리운 일들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라고 추억한다. 


아름다운 게 추해지는 일이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뒤돌아 보며 아름다웠던 것을 아름다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깨달음조차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오니까. 노로 구니노부는 그것을 알고 표현하기 위해 <사랑에 관한 데생>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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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27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벌써 읽으셨어요?! 전 아직! ㅎㅎ 저도 오늘 같은 날 읽어야겠어요.

blanca 2021-03-27 16:25   좋아요 0 | URL
비 오는 오늘과 맞춤한 책인것 같아요. 벌써 읽고 계시려나요.

scott 2021-03-27 17: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어 번역가중 송태욱님이 최고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분의 번역은 무조건 신뢰!

blanca 2021-03-27 17:40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옮긴이의 말이 너무 좋아서 예사롭지 않더라니...역시나 그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