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번역한 소설가 정영문이 자신의 단편소설 '동물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 3 - 부엉이의 숲'('목신의 어떤 오후' 수록작)에 울프를 인용한 부분을 찾아둔다. 출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Belle Tout Lighthouse Beachy Head - Eric Ravilious - WikiArt.org


이제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되었다. 그사이 아이들도, 아낙들도 모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개와 함께 산책하는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모습을 꾸며낸 것은 나였으니까. 노인 역시 얼마 전 죽었고-그의 새가 죽은 뒤 조금 후-그의 개는 어디론가 사라졌으니까. 그가 자신의 개와 함께 매일 일정한 시각에 바닷가를 산책한 것은 나의 상상 속에서였으며 그 상상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그의 유령이었다.

어떤 불치병을 앓다가 죽은 그가 죽기 전 정원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과나무 옆에서 들려준, 어떤 소설 속의 구절은 그에 대한 나의 추억의 한가운데 남아 있다. "창문턱에 있는 진짜 꽃은 유령 꽃의 일부였다. 하기야 유령도 꽃의 일부이기는 했다. 꽃봉오리가 터졌을 때 거울에 비친 옅은 색의 꽃도 봉오리를 터뜨렸으니."*(각주: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 인용.) 그 문장은 그후로 나로 하여금 그것을 주술처럼 읊조리게 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유령이 되어 한동안 유령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가 유령으로서 자신의 개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며, 그의 방치된 정원을 서성거리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최소한 어쩌면 누구도 돌보지 않는 그의 집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그것을 모두 삼키기 전까지는. (동물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 3 - 부엉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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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2020'과 최윤 소설집 '동행'에 실려 있는 단편 '손수건'은 묘한 작품이다.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틀이 과연 적합한가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내적 사연인 이 커플의 고생담은 켈러의 연작소설 '젤트빌라 사람들' 중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토지분쟁을 둘러싼 이웃들의 이야기.


[네이버 지식백과] 맹지 [盲地] (부동산용어사전, 2020. 09. 10., 장희순, 김성진)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11818&cid=42094&categoryId=42094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삽화(1919) by Ernst Würtenberger (1868-1934) - 퍼블릭도메인, 위키미디어커먼즈


켈러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1k2670a

N도 나도 인생에 다가오는 모든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열한 살 때 같은 동네, 같은 반 친구로 만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30년째다.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니 그 기간을 더 길게 잡아도 되겠다. 그 길다면 긴 시간 중 많은 부분은 유년과 청소년기의 무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우리가 겪은 것은 삶에 깊은 고랑을 판 고난의 행군과 같은 것이었다. 16세 때 서로 은반지 나눠 끼고 결혼 약속을 했지만 38세, 거의 중년에 나이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결혼을 했다. 그전까지의 기나긴 시간이 우리 존재의 모든 모서리를 다 후렸다. 우리는 어느새 웬만한 문제는 그저 바보처럼 웃어넘기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결혼 전에 준비할 시간이 아주 많았다. 우리가 나름의 약혼식을 선포한 뒤, 처음에는 미성년이었기에 나중에는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이유로, 두 집안은 우리의 결혼에 반대했다.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 것은 겨우 3년 전이다. 다 늙어 결혼했으니 그사이 남는 게 시간이었다. 결혼을 목숨 걸고 반대하던 나의 모친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비극적인 연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의 모친만큼은 아니어도 갖가지 전략을 동원해 우리의 결혼을 반대한 N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라는 적이 사라지자 기세도 꺾였거니와, 노환이 오면서 전의를 상실했다. 마침내 우리의 결혼이 가능하게 됐다.

모든 것이 고향 산 밑 마을에 일찍이 불어 닥친 전원주택 바람으로 땅값이 오른 탓이다. 두 집 소유의 맹지에 길 내는 것을 놓고 오랜 이웃사촌인 N의 집과 우리 집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식구처럼 한마을에서 오손도손 지내던 두 집안은 이 맹지 문제로 ‘급살 할 놈의 집’,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놈의 집’, ‘망하지 않으면 손끝에 장을 지질 집’이 되었다. 다행히 이 모든 저주는 이 집에도 저 집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문제의 맹지는 아직까지도 집이 지어지지 않은 유일한 공터로 남아 있다. 전원주택 마을 한복판의 잡초 밭. 우리가 열여섯 살이 되어 각기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전 겨울, 바로 눈 덮인 그 맹지 한구석의 작은 바위에 앉아서 결혼을 약속했다. 그때는두 집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그런 약속에 걸맞은 두 집안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내 맘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N이 말했다. "오랜만에 맹지 보러 가자." 나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차는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말하자면 우리 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있을 때 다시 마음을 합하기 위해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저기 봐라. 우리가 같이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데, 서로 지난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웬만한 일은 가볍게 떨치고 넘어가자, 고 찾아가는 장소. -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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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똔 체호프 지음/오종우 옮김) 수록작 '검은 수사' 도입부. 


https://youtu.be/ss2G2iNWQFY 2024 체홉서거 120주년 / 안똔체홉학회 10년 기념 [안똔체홉 8대장막전] No.1 검은옷의수도사




석사(碩士) 안드레이 바실리치 꼬브린은 지쳐 신경이 날카로웠다. 이것을 치료받지 않고 지내던 그가 친구인 의사와 포도주 한 병을 마시며 무심코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다가, 친구에게서 봄과 여름을 시골에서 보내라는 충고를 들었다. 따냐 뻬소쯔까야가 그에게 보리소프까로 와주기 바란다고 초대하는 긴 편지를 보내온 것은 이즈음의 일이었다. 그는 정말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직 4월이어서 우선 그는 자신의 고향 꼬브린까로 가서 3주 동안 혼자 지냈다. 그리고 길이 어느 정도 좋아지자, 마차를 타고 예전에 자신의 후견인이자 보호자였던, 러시아의 유명한 원예사 뻬소쯔끼에게로 출발했다. 꼬브린까에서 뻬소쯔끼가 사는 보리소프까까지는 70베르스따*가 채 되지 않아서, 부드러운 봄 길을 따라 편안하게 흔들리는 사륜마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정말 즐거웠다. * 약 75킬로미터. - 검은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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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인생에 핀 한 송이 장미

[네이버 지식백과]지루한 이야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44143&cid=40942&categoryId=33467


재작년 오늘 체호프의 '지루한 이야기'(석영중 옮김) 리뷰를 썼다고 북플이 알려준다. '지루한 이야기'(1889)의 까챠는 배우가 되려고 러시아 남부 우랄 지방의 도시 우파(근처에 우파강이 있다)로 떠난다. 





우파강 By User:StraSSenBahn - Own work, CC BY 2.5, 위키미디어 커먼즈


[네이버 지식백과] 우파 [Uf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0637&cid=40942&categoryId=34079


'지루한 이야기'의 까챠는 체호프가 나중에 쓴 희곡 '갈매기(1896 초연)'의 니나를 생각나게 한다. 지만지드라마 '갈매기' 역자(강명수)해설도 '지루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문석우 저 '안똔 체홉'에 따르면, '지루한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도전하고 있다고 한다.




https://youtu.be/UHEDKDQoqiY 발레로 창작된 '갈매기' Boris Eifman's The Seagull. A Ballet Story - Official Trail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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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22.3.4'의 백수린 인터뷰로부터. 백수린 작가는 데버라 리비의 '살림 비용'에 후기란 형식으로 글을 실었다. 강아지 봉봉이와 함께 단독주택에서 살던 백수린은 봉봉이가 떠난 후 그 집에서 살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Towards Home, 1981 - Maria Bozoky - WikiArt.org


허름한 산동네의 낡고 작은 단독 주택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주변으로부터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대부분 내가 여자라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독 주택에 살아보고 싶었고, 여자라는 이유로 마음에 품은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관리인이 따로 있는 공동 주택보다 불편한 점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언젠가는 떠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이 집을 무척 좋아한다. ― 데버라 리비, 『살림 비용』(이예원 옮김, 플레이타임, 2021) ‘후기’ 중에서

백 지금은 살고 있진 않아요. 개인적인 일이 좀 생겨서. 책상과 책은 거기에 대부분 그대로 있어서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김 단독 주택에 혼자 산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어요. 무섭지 않을까, 외롭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백 계속 혼자 살았던 건 아니에요. 강아지가 줄곧 함께 살기도 했고요. 아무튼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어요. 왜냐하면 저는 단독 주택에서 살았던 경험이 없거든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요.

백 그래서 그 집에서 계속 살 수가 없어졌어요. 아까 말한 사정이 이것인데요. 밤이 되면 너무 슬프고 무서워지더라고요. 마지막에 봉봉이가 너무 아파했던 게 자꾸 떠올라서. 그래서 밤이 되기 전에 나가곤 해요.

백 빈집에 혼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추운데 문밖에 몇 시간씩 서 있게 되더라고요. 밤에 눈을 뜨면 마지막 순간이라든지 그런 게 계속 떠오르고……. 그래서 있을 수가 없어요. - 백수린+김유진 어느 여행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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