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악스트 과월호에서 정지돈 작가가 쓴 크리스 크라우스의 소설 '아이 러브 딕' 독후감을 찾아 읽었다. 내 경우 '아이 러브 딕'을 어쩌다 발견하여 재작년에 읽었다.


영화 '생활의 발견' 예고편 https://youtu.be/jRoMP3F1a9I


『아이 러브 딕』은 환상적인 소설이고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이며 내가 1950년대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성애자 백인 여성이었으면 삼십대 후반에 썼을 법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은 유사-자기애적이면서도 가상-평행 우주적인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생각이다.

『아이 러브 딕』은 실험영화를 만드는 서른아홉의 크리스 크라우스와 그녀의 남편이며 뉴욕의 대학교수인 쉰여섯의 실베르 로트링제의 이야기다. 소설은 그들이 최근 멜버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영미문화 비평가 딕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카우보이 유형의 지식인에게 홀딱 빠진 크리스와 실베르는 기이한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편지와 일기 형식으로 틀을 만들고 섹스 판타지와 문화이론, 철학, 미술사와 미학으로 속을 채운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세상에 다시없는 쓰레기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일약 컬트 클래식으로 추앙받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평가다. 왜 그런 말을 들었을까? 금기를 위반해서? 페미니즘 소설이라서? 페미니즘 소설인 척해서? 지식을 나열해서? 아방가르드적 엘리트 의식에 취해 있어서?

이 가학적이면서 피학적이고 장난기 넘치고 시종일관 이죽거리면서도 열정으로 폭발하는 소설의 핵심은 뭘까. 관계는 깨지기 마련이며 인간의 욕망은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나 사드의 작품에서처럼 허영과 성욕, 착각과 지배욕,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사랑이니 부부관계니 불륜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장치에 불과하고 일종의 지적 유희만이 글로 쓰일 가치가 있다는 뜻일까.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온 유명한 대사 "우리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아이 러브 딕』에 와서는 역전된다. 우리 사람은 되지 말고 괴물이 되자. 미친 괴물들이야말로 세계를 더 진실하게 만드는 존재이니까. - 정지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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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22.3.4' 위수정 작가의 글로부터. 

A Lady with a Dog - Giuseppe Maria Crespi - WikiArt.org

날이 추워. 겨울이니까. 오늘은 유독 더 추운 것 같아.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가? 하지만 걷다 보면 추위는 점점 사라질 거야.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그리고 또 내가 아는 것은, 네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 나는 너를 데려왔을 때부터 너의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거든. 무슨 말이냐면, 개는 사람보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하니까. 사람의 1년이 개에게는 보통 7년 정도라고 하니까. 나는 네가 두 살 때부터 너의 나이를 사람의 나이로 계산하면서 아직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잠이 들었거든. 하지만 네가 여덟 살, 아홉 살이 되면서는 계산을 하지 않았어. 일부러. 생각하기 싫어서. 그런데 네가 아프고 난 후에 나는 깨달았어. 죽음은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준비하고 대비해도 결국 무방비 상태에 가깝다는 것을.

아, 갑자기 어떤 선배의 예언이 떠올랐다. 십수 년 전쯤인가, 내게 전화를 해서 무슨 말 끝에, 너 그렇게 까칠하게 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 나중에 개랑 둘이 살게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웃었다.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선배가 말한 개와 둘이 사는 삶은 결코 밝은 미래로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외롭게 살 거라는 말이었겠지. 지금 생각하니 열이 받는데, 그는 소설 좀 읽는 사람이라면 다 알 만한 작가가 되었다. 누구냐면. - 같이 걸을까, 영원처럼(위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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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아, 사슴아' 출간 최윤 소설가 인터뷰 2023-10-12 ] https://www.mk.co.kr/news/culture/10848547


사진: UnsplashDimitri Iakymuk 


[최윤, 『사막아, 사슴아』를 배달하며(20231221)]- 이승우 https://munjang.or.kr/board.es?mid=a40703000000&bid=0035&act=view&list_no=99663&nPage=1 프로방스에서 유학한 최윤 소설가의 라방드(라벤더)꽃 이야기를 이승우 소설가가 전하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이야기…이승우 소설집 '목소리들' 2023-12-02] https://www.yna.co.kr/view/AKR20231201147200005?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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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Martha Vogeler - Paula Modersohn-Becker - WikiArt.org


이효석문학상 2021 작품집에 수록된 최윤의 '얼굴을 비울 때까지'는 2020년에 대상을 탄 기수상작가 자선작으로 실렸다. 한 초상화가가 담담하게 삶의 여정을 돌이켜보는 가운데, 다 밝혀지지 않은 친구 서영의 사연과 다가올 미래가 궁금해진다. 2021년1월1일 문장웹진에 발표한 단편소설. https://munjang.or.kr/board.es?mid=a20103000000&bid=0003&list_no=2276&act=view 


아래 발췌글 속 '말타'의 뜻도 그렇고, 그녀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하나코는 없다'에 나오는 여성 '하나코'의 작명을 봐도 그런데, 최윤에게는 특유의 감각과 재치, 비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나코는 없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740&cid=41708&categoryId=41737



나는 서영과 아이들을 가르치던 이 년여의 기간을 대체로 매우 평화로웠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공간은 작은 건물의 삼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끔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보듯이 밖에 지그재그로 설치된 꽤 가파른 쇠 층계를 통해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삼층에 있던 창문의 자리에 벽을 부수고 문을 내고 층계를 설치한 것은 서영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서영은 그 층계에 말을 주제로 한 알록달록한 모티브로 색칠 장식을 했기에 누구나의 눈에 띄었다. 매우 이국적으로 들리던 학원의 이름 〈말타〉의 의미가 ‘말타듯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라’는 뜻임을 알고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오는 학원생들에게 전화로 길을 알려줄 때는 늘 ‘알록달록한 말장식이 있는 층계집’이라고 설명을 곁들였다.

지금은 외부 층계를 설치한 건물을 때때로 만나지만,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팬시한 매력을 풍기는데다 어딘지 도발적인 멋이 있었다. 층계는 가파르고 좁았기에 오를 때보다는 내려갈 때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을 해야 했다. 특히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미끄러지다 층계 난간에 매달리는 때도 있었다.

나는 서영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들으면서 이따금 질문을 던져 본다. 한 재능 있는 예술가가 어떻게 그 재능을 포기하게 되는 것일까. 서영에게 어머니라는 악재는 늘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녀가 미술판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간 것도 그렇지만 엉뚱하게 약재상집 아들과 만난 것도 서영이 엄마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인생에서 만나는 악재는 약이 되기도 한다. 악재로 인생에 근육이 붙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지 않던가. 그런데 서영은 그 엄마라는 악재에 지고 말았다. 그녀는 늘 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모녀 관계와는 다른 어떤 관계의 패턴이 서영과 서영의 엄마 사이에는 형성되어 있었다. - 얼굴을 비울 때까지 | 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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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에 출몰하는 레드핫포커 꽃들.

By mattbuck (category) - Own work by mattbuck.,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Pixabay로부터 입수된 Beverly Buckley님의 이미지


트리토마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d1461

그들은 여느 때처럼 정원 아래로 걸어가, 테니스 코트를 지나, 팜파스 풀밭을 지나, 밝게 타오르는 석탄의 약한 불처럼 빨갛게 핀 레드핫포커 꽃들로 둘러싸인 울창한 울타리 속의 구멍을 지나, 여느 때보다 더 푸르게 빛나는 만의 푸른 물이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길을 따라 산책하던 그들은 레드핫포커 꽃들이 핀 쪽으로 걸어갔다. "딸아이들이 당신이 과장하는 걸 보고 그대로 배우고 있어." 그녀를 꾸짖으며 램지 씨가 말했다. 저보다 카밀라 숙모가 과장이 더 심한 걸요. 램지 부인이 대꾸했다.

레드핫포커 꽃이 많이 핀 곳으로 남편과 함께 걸어갔을 때 꽃들 사이의 틈을 통해 등대가 보였지만 그녀는 일부러 등대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거기에 앉아 생각에 잠기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이들 걱정만 했지 남편 걱정은 하지 않았다. 레드핫포커 꽃들 사이에 함께 서 있을 때 그는 만을 가로질러 바라보면서 결혼하기 전에 하루 종일 돌아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그 당시 선술집에서 빵과 치즈로 끼니를 때웠다. 쉬지 않고 열 시간씩 연구했고, 할머니만 이따금 나타나 불을 보살펴주었다. - 1부 창

폐허가 된 방에서 소풍 나온 사람들이 주전자에 불을 붙이고, 연인들은 은신처를 찾아들어 헐벗은 판자 위에 드러눕고, 양치기는 벽돌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떠돌이는 추위를 막으려고 코트를 입은 채 잠을 잘 터였다. 그러다가 지붕이 폭삭 내려앉고, 히스와 독미나리들도 길과 계단과 창을 가리고, 그런 것들이 무성하게 자라 작은 언덕을 덮어버리면 길을 헤매던 침입자가 쐐기풀 속에 피어난 레드핫포커 꽃이나 독미나리 사이에서 도자기 조각을 발견하고 여기에도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 2부 세월이 흐른다

바다는 텅 빈 게 아니라 가장자리까지 꽉 차 있었다. 물이 헤아릴 수 없이 깊었기 때문에 어떤 배는 그녀의 입언저리에 있다가 출발하는 듯했고, 어떤 배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배는 표류하다가 물속으로 침몰하는 듯했다. 저 물속으로 그렇게도 많은 삶들이 빠져들었다. 램지 부부와 그들 아이들의 삶들도 빠져들었고, 모든 종류의 잡동사니의 삶들도 빠져들었다. 빨래통을 들고 빨래하는 여인과, 까마귀와, 레드핫포커 꽃과, 보라색과 회녹색 꽃들도.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된 느낌이 있었다. - 3부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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