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사랑과 혁명 1~3 세트 - 전3권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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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작가의 [사랑과 혁명 1-3]을 읽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영화를 본 것 이상으로 여운이 남아 계속해서 소설 속의 장면이 떠오를 때가 있다. 1,500 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구한 스토리를 따라가다보니 열흘 내내 1,800년대 조선의 전라도 곡성을 비롯한 짙은 어둠이 자리한 길도 없는 산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리뷰를 쓰기 위해 표지에 음각처럼 인쇄된 사랑과 혁명이란 글자를 손으로 쓰러내리다 갑자기 ‘사랑의 혁명가’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벌써 30년 전인 어느 여름날 바닷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었다가 당신은 주님품으로 떠난 학장 신부님의 트레이트 마크와 같은 낱말이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신학생들은 신부님을 기리며 노래를 만들었고, 평소 신부님의 신념과도 같은 가르침을 노랫말로 삼아 오랫동안 신부님을 생각하며 불렀다. 


“사랑의 혁명가는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서 평생을 사는 것

소박한 웃음과 불같은 열정을

한몸에 가득히 품고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현실이 꿈보다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던 모습

잊지 않으리 언제까지나”


잊고 지냈던 노랫말을 떠올리니 저자가 소설의 제목을 왜 [사랑과 혁명]으로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기에, 그래서 그 혁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면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전의 자신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랑은 혁명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혁명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천주교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 말기에 극심한 박해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들어봤을 것이다. 현재 가톨릭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도 초기 교회에서는 거의 300여년에 걸쳐 박해가 지속되었고, 목숨을 부지하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지하에 굴을 파고 들어가서 살았고 지금까지도 카타콤베라는 이름의 순교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거의 백년에 걸쳐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에 양반도 중인도 천민도 가릴 것 없이 평등 사상에 입각해서 천주를 받아들였기에 이름이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 많아 정확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순교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1984년에 103위 순교 성인을 기리게 되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까지 예상컨대 1만명쯤 되지 않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유럽에 여행을 가면 성당을 보지 않고서는 역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나라 조선 말기의 역사에서도 천주교가 도래한 부분은 생략하기 힘들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선교사들에 의한 전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공부하며 믿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에 관대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처음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에는 양반들을 중심으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불교의 영향력보다 사대주의의 뿌리와도 같은 유교사상이 나라의 근간을 이루던 때이고, 기득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공맹사상은 계급의 차이를 지속시키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효과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계급이 정해진 삶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조선시대의 대다수였던 일반 평민들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끼니를 잇기 힘든 부조리와 부폐가 만연한 상태였다. 계급의 차이가 있더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정의가 존재했다면 서학의 영향력이 미비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중간에도 언급이 되는데, 정말 악랄하고 치가 떨릴 정도로 묘사된 징제비 금창배는 유독 자신이 천주교 신자들을 발본색원하여 뿌리까지 뽑으려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미 조선에 천주를 믿는 이들 뿐만 아니라, 절에 다니며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굿을 하는 무당들도 많다고. 하지만 이들을 잡아서 문책하고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정도로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드리는 염불과 무당에게 큰 돈을 들여 굿판을 벌인다 해도 조선의 계급 사회와 부조리와 부폐의 현실과 대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주를 믿게 된 이들은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양반과 천민의 차이를 없애고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관습처럼 지속된 악습의 이별을 선고한다. 많이 가진 이들은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길까 항상 경계하며 지내왔기에 귀신같이 알아챈 것이다. 아 이들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은 정해박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4대 대박해만큼 많은 이들이 희생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 곡성을 중심으로 옹기를 굽는 교우촌을 형성해 살아온 많은 이들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에 시달리다 배교를 해서 풀려나거나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해 병을 얻어 죽게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천주교가 처음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용어들이 한자어로 축약되어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는 단어들도 있지만 탁덕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말들도 많이 등장한다. 지금이야 전국 어느 성당을 가도 신부님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가장 먼저 입국했던 중국인 주문모 탁덕이 치명당하고 나서 몇 십년 동안 새로운 탁덕을 모시기 위해 부단히 애쓰게 된다. 탁덕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렵더라도 신자들은 간간히 성체를 모시고 성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탁덕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소회장의 역할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하게 중요했다. 어찌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 회장은 놀라운 카리스마로 덕실, 무명 교우촌을 이끌어간다. 


독립운동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꼭 나오는데, 바로 밀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다. 사실 최후의 만찬 이후 예수님을 잡아갈 절호의 찬스를 제공한 유다의 배신은 너무나도 유명하고 아주 머나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라 그런지 감정이입이 쉽게 되지 않았는데, 징제비 금창배로 인해 간자로 한 평생을 산 공원방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반드시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특히나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공원방이 배교하기 이전에 함께 치명하기로 약속했던 이오득 야고보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 강송이 아가다를 고문하는 부분이다. 옥리들에게 쥐를 죽이지 말고 잡아들여 사람이 들어갈 만한 항아리에 쥐를 무려 80여 마리나 넣어놓고 뚜겅을 닿아놓은 채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강송이 아가다에게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공원방은 항아리 안에 아가다를 집어 넣는다. 치도곤으로 살이 터지도록 매를 치고, 주리를 틀고 뼈를 부러뜨리는 폭력과는 어쩌면 차원이 다른 고통이 아니었을까. 강송이 아가다는 쥐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입을 다물지만, 옥에서 나간 후에도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 얼마 후 죽게 된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몹쓸 짓을 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비하를 하게 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짐승은 인간과 같은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는다. 짐승에게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본능이 있을 뿐이지,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기 위한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인두겁을 쓰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한탄이 섞인 말이 나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만행들, 전세계에서 반복된 제노사이드. 그리고 과거를 묻어버리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수많은 위정자들. 


3권에 이르러서 전라감영에 갇힌 채 십여년의 옥생활을 하며 배교를 거부한 6명이 등장하는 내용은 그냥 차라리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텐데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도 감옥생활이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소설에 묘사된 조선시대의 옥은 그야말로 누구라도 없던 병마저 생기고 얼마나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 감히 장담할 수 없는 끔찍한 상태였다. 입으로는 신념이나 자존심을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다고 쉽게 말하지만, 머리속으로 상상해온 고통과 실제 내 몸이 겪는 고통은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전혀 체감할 수 없다. 생살이 터져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뼈가 휘어져 앉은뱅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대체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한 고통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을 십년 넘게 견디며 치명의 순간이 왔음을 기뻐하며 기도하는 이들의 굳건함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신태보와 이태권이 주교에게 부탁받은 옥중기를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인정 요안은 공원방이 원하는 <옹기꾼의 노래>를 적어 전해주는 묘수를 실행한다. 1권에서부터 등장한 덕실마을 교우촌 부부인 전원오 안또니와 감귀남 글나라가 일생에 걸쳐 만들고자 했던 노래인데, 자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얼마나 심오한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으려는 것이까 궁금했는데, 3권의 말미에 그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3권의 소제목이 왜 ‘나만의 십자가’인지 그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나자렛에선 가족이 원수였고

갈릴래아에선 이웃이 원수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선

가난과 배고픔과 목마름이 원수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다음엔

유대교라는 종교와 로마라는 제국이 원수였어라

십자가에 매달렸을 땐 

원수라 여긴 모든 것들을 사랑하여야 하므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맹세보다 

더 어렵고 무섭고 벅찬 것은 없어라

십자가를 지고도 원수가 여전히 원수라면

당신의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3권 332)”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시대가 아무리 좋아졌다해도 불변의 진리를 뼈아프게 알려주고 있다.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말로, 십자가라는 말로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을 정당화했는가. 나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지만 이미 그때 진리를 깨달았기에 거짓 사랑과 거짓 십자가를 지닌 이들은 감히 이해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인내로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새로 태어나는 모든 이들에게는 동등한 삶의 숙제가 주어진다. 사랑을 참사랑으로 받아들여 내 안에 혁명을 일으킬 것인지, 아니면 공원방과 같은 간자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김탁환 #사랑과혁명 #해냄 #옹기꾼의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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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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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작가의 [불타는 작품]을 읽었다. 15년 전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수하물로 붙이고 울쩍한 마음으로 탄 비행 중에 우연히 구스타브 클림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워낙에 작품 ‘키스’로 유명했던 터라 그의 일대기를 무심한 눈길로 따라갔었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비엔나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 있던 후배에 의해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클림트의 미술관을 관람하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 전세계의 유명한 명화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거대한 사이즈의 실제 명화를 감상하다보니 예술가의 개인적인 삶의 내력과 무관하게 예술작품만이 갖고 있는 무한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정말 가뭄에 콩나듯이 가게 되는 미술관에서 아주 오래된 명화를 감상할 때마다 항상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나리자‘와 같이 정말로 유명한 작품들은 유리관 같은 것으로 감싸져 있다고 하던데, 그 외에 대부분의 미술 작품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안내라인을 제외하고는 그 그림을 보호할 아무런 장치도 없다는 사실이 항상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다. 행여라도 어떤 미친 사람이 갑자기 그림에 이상한 물질을 부어버린다거나, 칼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그림을 상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슬쩍 그림에 손상을 가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이다. 


예술의 영역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화적 사치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술 활동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과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디는 이들과 예술활동을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아는 여유있는 이들에게 모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어떠한 고통과 슬픔에도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해 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불타는 작품]은 안지아라는 작가와 로버트 재단과의 최고의 작품을 소각시키려는 긴장감을 누리는 즐거움 뿐만 아니라, 어쩌면 정여울 작가가 작품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활동을 지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을 내라고, 그가 원하는 활동을 멈추지 말라고 격려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건의 발단은 빌 모리라는 어느 사진 작가가 우연히 찍은 웨딩 사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랜드캐넌의 멋진 뷰포인트에서 찍힌 그 사진은 SNS를 통해서 주목을 받게 되지만 웨딩 사진의 주인공인 여자가 거대한 회사의 딸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소문에 빌은 행여나 사법적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서 사실을 실토하게 된다. 하지만 빌이 말한 사실은 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바로 그 사진을 찍은 당사자는 빌 자신이 아니라 세워놓은 휴대폰 카메라의 버튼을 그곳 주위에 머물던 파피용 개가 찍었다는 사실이다. 실종당한 리나를 수사하던 경찰은 빌의 증언을 미심쩍어 했지만, 실제로 그 개가 동일한 상황에서 사진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보고 빌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파피용 종의 개인 로버트는 유명해지고 리나의 아버지는 로버트와 함께 미술 작가를 지원하는 재단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그만두고 배달 알바를 하던 안이지 작가는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받게 된다. 


주인공인 안이지 작가는 영어로 표현하면 ‘Not easy’는 센스가 담긴 닉네임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주인공의 이름은 아마도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단순히 재능의 우열을 떠나 지속적인 작업을 이어나가기 위한 응원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안이지 작가가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제시하는 최부장을 만났을 때만 해도 안이지 작가의 천재적인 잠재력을 로버트가 단숨에 알아보았기에, 이제 로버트 재단의 프로그램을 성실히 참가하여 유명해지는 일만 남지 않았을까란 희망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막상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은 밤이 될때까지 재단에서 마중나온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허름한 호텔에 묵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원치 않던 1/2 화장실을 공유한 방을 배정받게 되고, 유일하게 한 장 가져온 신용카드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가 없다. 두려움에 떨며 화장시를 공유한 옆방 사람이 샤워를 다 마치고 나서도 20여분이 지나서야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심리가 얼마나 불안한지 독자인 나 또한 로버트 재단의 어이없는 대응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주인공은 로버트 재단의 담당자가 실수로 데리고 간 비슷한 이름의 안영이라는 사람의 여정을 책임져 주는 동안 샘이라는 인턴 직원의 응대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재단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화장실을 공유한 옆방 남자인 오디션을 보러온 한국배우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재단에 간신히 도착하지만, 로버트 재단의 사람들인 샘과 대니는 주인공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인해 자신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럽게 했다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인다. 로버트 재단의 직원들이 보인 반응은 단지 소설 속에서만 그려진 황당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의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엄청 화를 내거나 황당하게 여겨질 일들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거나 미안하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이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냐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아무튼 산불로 인해 재단에 도착하는 것도 수월치 않았던 안이지 작가는 재단 사람들이 보인 황당한 대응 플러스 로버트와의 첫 번째 만찬을 앞두고 받은 편지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게 정말로 자신을 예술가로 초대한 호스트의 환영인사가 맞는 것인지 분노가 치밀고, 로버트와의 식사를 하면서 몇 단계를 거쳐 개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소통되는 가운데 과연 서로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정말로 로버트인 저 파피용 개는 정말로 대화가 가능한 존재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로버트 재단은 작가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하겠다는 시스템을 구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로버트 재단은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 자기들이 선택한 예술가를 통해 탄생된 예술작품의 가치를 최고로 높이고 그 작품을 소각하는 의식을 통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부가가치를 상승시키는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었다. 작가가 원하는 모든 창작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배려와 작가가 창조해낸 최고의 작품을 소각하겠다는 권리 주장과 같은 아이러니를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주인공은 로버트와의 불편한 식사와 산책을 지속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작업은 하나도 진행되지 못한 채 로버트 재단을 둘러싼 Q라는 도시와 관련된 각종 이익집단의 제안을 받게 된다. 이슈가 이슈를 만든다는 말처럼 로버트 재단에서 간택한 무명에 가까운 작가가 기발한 작품을 탄생시키고 그 작품의 모티브가 된 Q라는 도시는 작가의 작품의 소각됨과 상반되게 주가가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되는 것이다. 안이지 작가는 이후 열 개의 작품을 완성하게 되고 <R의 똥>이라는 로버트가 선택할 것이라 예상되는 작품을 만들게 된다. 9개의 작품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R의 똥>에 로버트가 원하는 것들로 구성했음에도 막상 그 작품이 소각용으로 선택되자, 주인공은 똑같은 위작을 그리며 그 작품을 소각에서 구하고 싶어진다. 소각될 것이라 생각하자, 마치 예언처럼 그 작품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소각식을 앞두고 주인공은 작품을 구하기 위해 보관된 장소로 몰래 잠입하게 되고 그곳에서 로버트를 만나고 어떤 것이 자신의 원작인지 위작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채 하나만 들고 나오게 된다. 그리고 대니는 주인공에게 로버트를 어디로 숨긴 것이냐는 추긍을 당하게 되고 주인공의 작품을 사겠다는 런던의 s 갤러리의 딜러는 소각되지 않은 작품은 구매할 가치를 상실했다는 말로 처음의 제안을 거둬들인다. 과연 로버트는 어떻게 된 것일까? 대니와의 설전에서 드러난 것처럼 로버트 재단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처음의 로버트가 지금의 로버트와 같은 존재일 필요가 있느냐는 대답으로 보아 로버트를 대체할 파피용들은 어디선가 계속해서 관리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열린 결말에 대한 대답을 작가의 말에서 찾은 듯 하다. 


“작가의 책상 위에서 발견되는 것은 잔해뿐이다. 로켓 아랫단의 추진체처럼, 이야기를 중력 너머로 쏘아 올리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버려지는 존재. 그러므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원본을 찾고 싶다면 독자의 책상으로 건너가야 한다. 우리가 읽던 책의 모서리를 삼각형으로 살짝 접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거나, 굳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책 속의 말이 그걸 바라보는 이를 흔들 때, 책을 비로소 원본이 된다. 하나뿐인 진짜가 된다. 

우리도 책처럼 저마다 원본인데, 과잉과 과속의 시대에 그 중요한 사실이 자주 누락된다. 각자의 고유성을 증명할 만한 모서리가 떨어져나가거나 닳아서 뭉툭해지고,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뻗어나간다. 소설에 등장한 ‘아트하이웨이’는 그런 불안감을 극대화한 설정이다. 예술가의 영감에서부터 예술의 파급력까지 이르는 과정을 단축하자는 움직임인데, 영감도 파급력도 우리가 제자리를 만들어둘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다소 우스꽝스럽다. 이런 주객전도의 코미디는 언제나 나를 매료시키는 것이므로 기꺼이 그 안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을 초대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344)”


#윤고은 #불타는작품 #은행나무 #897번째사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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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정지아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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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를 읽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저자만의 깨알같은 재미를 만끽했는데, 역시나 에세이에서는 소설에 버금가는 한 마디로 '깬다'는 즐거움을 넘치게 전해주었다. 아니 이렇게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빨치산의 딸이기 때문인 것인가? 술을 사랑하는 아니 무엇보다도 블루를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시간을 사랑하는 저자의 오래전 추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경험하기 힘들 것 같은 진귀한 사연들이 에세이 답지 않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조니워커 블루는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발렌타인 위스키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고급진 술이 아닐까 싶다. 술에 문외한인 나도 몇 번 맛을 봤었고 심지어 맛도 모르는 술을 선물로 받거나 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도 사람들이 블루 블루 하길래 그 이하의 술은 깡소주처럼 별 볼일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위스키를 즐기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시바스 리갈도 꽤 괜찮은 위스키라고 하니 대체 블루는 어느 정도의 고급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좋은 술을 소주 마시듯이 돌렸단 말인가? 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 술이 받는 체질이라는게 무엇보다도 우선이겠지만, 몸이 술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술맛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치 물처럼 마시게 된 게 불과 1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것처럼 예전에 커피는 그냥 쓴 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마시다 보면 그 쓴 맛에 감춰진 각 원두만의 고유한 향과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더불어 각성되는 시간은 덤이고. 아마도 위스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백날 소주만 마시던 사람이 위스키가 숙성된 시간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술과 거리가 먼 몸을 타고난 나는 죽어도 위스키의 진정한 맛을 알지 못할 것 같아 몹시 아쉽지만 책에 나온 저자의 술자리를 대체삼아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을 때만 해도 저자가 한 때 수배까지 받으며 도망다니는 삶을 살았는지 전혀 몰랐다. 생각해보면 불온 서적이라고 빨간 딱지가 붙은 검열에서 자유로워진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사상검증이라는 사실 그게 가능이나 할까 싶은 그저 린치에 가까운 혹독한 폭력에 노출되면 누구라도 빨갱이가 될 수 밖에 없는 시대에서 잡히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이렇게 저자가 한창 강연도 다닐 수 있으며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마도 오늘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 저자가 북한에 방문했을 당시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비전향장기수의 사연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노동이 두렵다'는 인텔리 사회주의자였던 남한이 고향인 그분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북송을 원했던 것을까? 


저자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선배, 후배, 제자, 스승 등은 정말 저자 만큼이나 개성이 넘치는 이들같다. 저자의 기억속에서 왜곡되거나 소설처럼 묘사된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각 개개인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사는 누구라도 그렇게 소설같은 일을 견뎌내며 살아간다는 것을 저자가 살뜰한 애정을 갖고 살펴봤기에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저자의 삶에는 과히 독보적이고 신기한 만남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의 자리에는 항상 술이 함께 하고 있었고 시간의 압박을 벗어나 늘어진 술병들은 쌓이고 쌓여 저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이니셜로 가끔은 실명으로 표기된 저자의 지인들이 누구일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이니셜로만 짐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간직했기에 이야기에 담긴 모습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다. 


술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 역시나 나 또한 무척 놀라고 감동 받았던 내용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아프리카 초원 어딘가의 이야기를 다룬 '먹이사슬로부터 해방된 초원의 단 하루'라는 장이다. 나도 내용을 읽으면서 인터넷을 다 뒤져서라도 저자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말미에 나온 저자가 소설을 썼더라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아 아프리카 초원에서 발효되어 술로 변한 사과를 먹은 동물들이 날 뛰는 모습에 대한 각각의 감상은 분명 상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감상은 어쩌면 진짜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이자 천국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천국은 자연이 만들어낸 사과주가 선물 같은 시간을 자아낸 것이다. 그렇게 원숭이와 사자와 코끼리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밤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동물들이 잠에 든 사이, 외로운 달은 부지런히 하늘을 달리고, 달이 사라진 자리, 태양이 떠오른다. 청량한 첫 햇살이 가장 늦게 잠든 원숭이의 눈꺼풀에 닿는다. 반짝 눈을 뜬 원숭이가 하품을 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자기 눈 바로 앞에 놓인 사자의 머리를 원숭이는 인지하지 못한다. 잠시 뒤, 제가 베고 누운 것이 사자의 배라는 것을 인지한 원숭이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내지르며 평소보다 더 높이 더 멀리 튀어 오른다. 

그 소리에 먹이사슬의 맨 아랫것들이 먼저 깨어난다. 취기가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온 힘없는 것들이 우다다 초원의 먼지를 깨우며 사방으로 내달린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사자와 코끼리는 그제야 곤한 잠에서 깨어난다. 끔벅끔벅, 대체 여기가 어딘지 주변을 돌아보던 사자와 코끼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씨발, 좆 됐다.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그쯤일 눈빛으로 둘은 황망히 시선을 피한다. 술에 취해 처음 본 사람과 원나잇을 한 남녀처럼, 정신을 차린 여자가 황급히 옷을 입고, 이미 깬 남자가 자는 척 꿈쩍 않듯 사자와 코끼리는 겸연쩍게 몸을 일으켜 상대를 곁눈질한다. 그러고는 숙취에 찌든 무거운 걸음ㅇ,로, 정반대의 초원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66-67)"


#정지아 #마시지않을수없는밤이니까요 #마이디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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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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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작가의 [마주]를 읽었다. 어느덧 병원과 관련된 곳이 아니라면 마스크를 꼭 써야할 필요가 없는 때가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일상을 보내야만 하는 곳이 남아 있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편안함에 젖어드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진리가 팬데믹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했던 게 언제였었나 싶을 정도로 일상 회복이 되었다. 사실 팬데믹 초기에 실행되었던 많은 법적 행정적 절차들이 지금와서 돌이켜보니 과하다 싶었던 것들과 어떤 순간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당연히 비슷한 재난이 발생된다면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와 같은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팬데믹 시기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 행했던 선택이 과연 무조건 옳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작품은 마치 3년 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된 직후의 1년 동안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마스크를 벗은 편안함과 당연함에 불과 얼마전까지 그 긴장의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까막히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나리는 은채라는 딸을 둔 엄마로 홈 캔들 공방을 8년 째 유지하다가 상가의 개인 공방을 연지 얼마 안 된 소상공인이다. 이야기의 시작이 마치 전생과 현생을 왔다 가는 것처럼 팬데믹을 거친 시기를 구분짓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경계하게 만들고 구분짓게 만드는 호흡기 질환인 코로나 바이러스와 더불어 주인공 나리는 잠재적인 결핵 보균자로 딴산 마을 사람들과 만조 아줌마를 떠올리며 추억을 그리게 된다. 


나리에게 은채라는 딸이 있듯이 같은 동네 주민 수미에게는 서하라는 딸이 있다. 은채와 서하를 키우며 가까워진 나리와 수미는 아이들을 키우며 친분을 유지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로를 경계하는 얇은 벽이 느껴진다. 나리와 수미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봉합되지도 않은 채 팬데믹을 맞이하게 된다. 팬데믹 초기에 코로나에 걸린 수미는 석달 동안이나 격리병동에서 지내게 되고, 나리는 수미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퇴원한 수미가 자신에게 바로 연락하지 않았음에 서운함을 느낀다. 남편과의 불화로 딸 서하를 소유하고자 하는 수미의 애착은 사춘기를 맞이한 딸과 오히려 거리감을 만들고 서하가 나리에게 사적인 말을 건네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술에 취한 수미가 나리에게 '네가 뭔데 자기 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느냐, 네가 뭔데 내 삶을 판단하느냐'는 막막을 퍼붓게 되지만, 나리는 수미와의 관계를 절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미와의 악화된 관계를 계기로 소식이 끊긴 만조 아줌마의 연락처를 받아내게 되고 다짜고짜 수미에게 만조 아줌마가 있는 여안 사과밭에 가자고 한다. 어릴 때 일주일에 한 번 씩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만조 아줌마와의 시간은 나리에게 있어 어떤 해방구의 역할을 했었고 만조 아줌마가 정성스레 담구었던 사과주는 나리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신비로운 과거와도 같았다. 15년만에 다시 만난 만조 아줌나는 여전히 나리를 반겨주었고 그 옛날 작은 방 안에서만 만들었던 사과주는 커다란 양조장이 되어 나리와 수미를 하룻밤 더 묵게 만든다. 


소설에서 명확히 표현하지 않아도 나리의 엄마가 그토록 여안을 떠나고 싶었던 것은 만조 아줌마를 비롯한 딴산 일꾼들이 머무는 곳이 오래 전 결핵을 앓던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병 또는 문둥병이라 불린 한센병에 그랬던 것처럼 전염성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질병을 걸린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외딴 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만조 아줌마를 비롯한 여든 너머의 노인들이 모여 사는 딴산 마을은 결핵 환자를 비롯해서 배척당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딴산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사태 이전에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이라고 묘사된다. 결국 딴산 할머니들에게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감염되었고, 마치 딴산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격리시켜야 할 대상처럼 딴산 주변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코호트 격리에 들어가게 된다. 이미 고령의 나이에 합병증까지 겹쳐지면 금방 죽음의 위협이 다다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딴산 마을의 노인들은 병원으로 호송되지 않는다. 


생명을 위해서라면 개인정보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공개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도 모두의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정책과 선택이 팬데믹 시기에 여실히 드러났다. 소설 속에 등장한 딴산 마을 할머니들은 상상 속에 그려진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외면하고 싶은 어딘가에 살고 있는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과호흡과 공황장애로 운전조차 하지 못하던 나리가 만조 아줌마와의 재회와 양조장의 사과주를 마시고 나서야 자식을 옥죄이던 증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은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을 진심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리가 겪는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팬데믹을 지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어야 하는가? 학교를 떠나 진실을 마주하는 삶을 선택한 서하의 용기가 그리고 서하를 지지하는 나리의 응원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이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만 해도 두렵고 피곤해서. '사는 낙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서.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86)


#마주 #최은미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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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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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었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거의 다 읽었음에도 이번 작품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분권되지 않은 상태로 거의 벽돌책에 가까운 분량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떤 사건의 흐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보다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때로는 의식과 마음의 거리를 인식하게만드는 이름이 없는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하루키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벌써 던져 버렸을지도 모를 감당하기 어려운 소설의 구조를 인내롭게 따라가보기로 했다. 하루키 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작기 후기에 나온 내용을 보니 이 작품의 첫 시작과 마무리에 무려 40년이라는 긴 터울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작품이 쓰여진 시기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자발적인 감금이 지속된 시기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암울한 실재가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고, 주인공과 그의 그림자가가 대화를 나누는 부분과 결국 그림자를 살려 그림자가 주인공의 삶을 대체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상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이 세상 어딘가에 특별한 존재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두터운 벽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는 또 다른 곳이 존재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야만 하고 자신에게서 떼어진 그림자는 얼마 되지 않아 소멸되고 그림자가 없어진 존재는 다시는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설정. 그림자에게 인격적인 지위를 주고 본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지만 소설에 나온 것처럼 주인공을 대신해 주인공이 원래 있던 세상에서 그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해 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온 것처럼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그대로 믿고 있는 진실들이 때로는 우리를 둘러싼 바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티브로 삼지 않았나 싶다. 


주인공이 열일곱 살때에 첫사랑이었던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가공의 도시. 소녀는 그렇게 주인공에게 첫사랑의 애틋함을 남기고 연락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소녀를 잊지 못하는 주인공은 아주 오랜시간 타인과의 내적인 교감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소녀와 함께 만들었던 도시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여전히 열여섯살인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는 소년과 만날 때 말했던 것처럼 그 도시에서는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소녀를 만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시계탑에 바늘이 없는 도시에서는 계절의 변화는 있지만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멈춰있기에 본래 시간의 흐름으로 생겨나는 것들에도 의미를 둘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은 오래된 꿈을 읽어 정체되어 있던 무언가를 풀어 소멸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치 꿈 속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일어난 일들을 더 이상 얽매여 있지 않도록 자유를 주는 것만 같다. 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주인공이 유일했는데, 주인공은 그림자가 소멸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림자를 본래 자신이 있던 세상에 보내기 위한 선택을 한다. 


주인공은 그림자와 함께 문지기 몰래 그 도시에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림자만 보내고 자신은 남기로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깨어난 주인공은 자신이 원래 있던 현실 세계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고, 그동안 일해온 직장을 그만두고 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었던 것처럼 현실 세계의 도서관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게 된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현실 세계를 돌아간 것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그림자임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 이전에 도서관장으로 일하며 펼쳐지는 이야기에서는 그런 기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벽 안의 도시에 있는 주인공 또한 바깥세계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대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본체인지, 그림자가 본체인지 서로가 역할을 바꾼 것인지 의아해한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논하고 있기에 이야기를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하루키 특유의 인간 내면에 대한 집요한 통찰은 어느 사람이든 인생을 쉽게 얏잡아보며 막사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특히나 타인의 선택과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도 쉽게 폄하하며 단정짓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타인의 삶도 결코 그렇게 막나갈리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내면의 고독함과 어려움을 갖고 있기에 그것을 함께 나눌 이가 필요하지만 마치 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완벽한 분업이 가능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운이 좋아서 그런 대상을 일찌감치 만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재능 때문에 그런 기회를 얻었다고 자신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소년은 바깥세계에서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소년으로 도서관의 어머어마한 양의 책을 읽으며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다. 그 소년과 가족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 소년이 가족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오히려 도서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와 잘 통하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 소년이 벽 안의 도시로 사라지자 주인공이 만난 소년의 아버지가 해왔던 고민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깥세계에서 불완전해보였던 그 소년은 주인공의 양쪽 귓볼을 강하게 깨물어 주인공과 벽 안의 도시에 일체가 되고 주인공을 대신해 오래된 꿈을 읽는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해낸다. 


바깥세계에서는 필담과 간단한 말 밖에 주고받을 수 없었던 소년이 벽 안의 도시에서는 주인공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고 오래된 꿈을 해석하는 데 완전하지 못했던 주인공과는 다르게 수월하게 꿈을 읽는다. 현실과 비현실이 경계를 나누어 하나의 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한 그 불확실한 벽에 가려진 도시에서는 바깥세계에서의 판단과 기준이 모두 허물어진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진 첫사랑 소녀를 만나게 되고 오래된 꿈을 읽는 작업이 끝나면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바깥세상에서 공허한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위로받는다. 그림자가 다시 하나가 되어 바깥세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주인공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 것 또한 자신의 그림자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바깥세상에서 겪었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독의 시간이 더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벽돌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특별한 자격을 얻는 것과 현실세계에서는 그 수많은 톱니바퀴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 사이의 간극이 주인공의 선택을 응원하며 동조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마치 뭔가 꺼림칙한 게 남은 것처럼 언젠가는 주인공이 있던 자리에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이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자신을 대체할 능력을 가진 소년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주인공은 바깥세계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게 되고 촛불을 단숨에 불어 끔으로서 일장춘몽 같았던 오래된 꿈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로서의 역할을 마감한다. 


어쩌면 하루키가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 중의 하나는 유령 혹은 영혼이 되어 주인공과 마주한 여정을 통해서 비현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비루한 하루 하루를 보낸다 하더라도 분명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고야스 씨는 한때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고뇌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대로 약간의 수정과 가필을 하여 다시 자기 아이에게 물려준다 - 결국 자신은 단순한 일개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설령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 널리 회자될 만한 일을 이뤄내지 못한다 한들 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은 이렇게 어떤 가능성을 -그거 가능성일 뿐이라 해도-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꺼 살아온 의미가 있지 않은가.(380)”


특히나 벽 안의 도시와 바깥세계에서의 극명한 차이점은 바로 시계바늘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반대로 양쪽 다 계절의 변화는 명확하게 드러나서 겨울을 지나 봄이 오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분명 시간은 흐르기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겠지만 , 벽 안의 도시에서는 시간이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어리고 젊을 때에는 시간이 무한한 것처럼 느끼듯이 말이다. 

“나는 눈을 감고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 -이를테면 내가 열일곱 살일 때는- 시간 같은 건 말 그대로 무한에 가까웠다. 물이 가득찬 거대한 저수지처럼. 그러니 시간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 시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나이들수록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쨌거나 시간으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가니까.(635-636)”


#무라카미하루키 #도시와그불확실한벽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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