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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6장 본문입니다. 

 

子曰 鬼神之爲德 其盛矣乎.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 使天下之人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詩曰 神之格思 不可度思 矧可射思. 夫微之顯 誠之不可揜 如此夫.    

 

공자는 말씀하셨다. "귀신의 덕 됨이 성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양양하게 그 위에 있는 것 같고 그 좌우에 있는 것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이름을 헤아릴 수 없거늘 하물며 싫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  

 

2. 느닷없이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귀신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냥 이해하는 그 귀신 이미지를 애써 벗겨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움츠러들고 펼쳐지는 세계 운동으로 합리화하여 설명하는 주자식 해석이 오히려 별나 보입니다. 그런  의미의 귀신이라면 거기에 무슨 덕이 있을 것이며, 거기다 대고 제사는 또 뭣 하러 지내는 것일까요?  

 

오감에 잡히지는 않으면서 분명하고 적확하게 일어나는 사물의  운행을 인지할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경외감을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인격적 이미지로 떠올리면 바로 그게 귀신이 됩니다. 인간 지식과 지혜로 감당 안 되는  우주의 이치가 신비 영역으로 '모셔지는' 것은 공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거기에 경건함을 부여한다고 대뜸 미신 운운하는 짓이야말로 방자한 행태입니다. 물론 이는 뭐든지 귀신 역사라고 보는 신비주의 종교나 퇴마 신앙과는 다릅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겸허함이 인간동형론적으로 표현된 문화현상 수준에서 적절하게 머무르는 게 옳겠지요.    

 

3. 그러면 중용을 논하는 자리에서 귀신 이야기는 왜 나온 것일까요? 아마도 핵심은 맨 마지막 문장일 것입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중용의 요체인데 그런 이치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현상이 바로 귀신이다, 이런 맥락입니다.  그것을 귀신 현상으로 묘사한 말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입니다.  

 

그러므로 "미미한 것의 나타남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의 뜻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의 뜻과 함께 이해되어야 합니다. 미미한 것의 나타남(微之顯)과 정성스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 誠之不可揜)이 대구(對句)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습니다. 微: 誠, 顯: 不可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드러나고 가릴/덮을 수 없는 것의 짝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미미함과 정성스러움의 짝입니다. 그 둘은 어떤 의미에서 짝일까요?   

 

우리는 이 대구가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 視之而弗見 聽之而弗聞 體物而不可遺)."는 문장의 역접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보아도 보이지 않아 미미하지만 만물의 주체가 되어 하나도 빠뜨리지 않아 벗어남/어긋남이 없으니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나타나고 가려지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여기 誠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는 덕성이라기보다 벗어나지/어긋나지 않는다는 역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微는 庸이 되고 誠은 中이 됩니다. 中庸의 다른 묘사가 바로 誠微입니다!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권력화하지 않고, 이득을 챙기지 않고 겸손히 "평범한" 소통을 이루는 일에서 늘 벗어나지 않음이 중용이고 성미입니다. 그 성미의 덕이 성(盛)하여 만인이 재계하고 깨끗이 하여 옷을 잘 차려입고서 제사로 받드니 도처에 그 대동의 기운이 깃드는(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 것입니다.  

 

4. 그렇습니다. 핵심은 귀신이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는 올곧은 소통의 실천으로 대동세상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중용이다, 이게 핵심입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 안목으로 보면  오늘 이 땅에 준동하는 "특별한" 정치깡패들의 작태란  참으로 가소로운 허깨비 놀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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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5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詩曰 妻子好合 如鼓瑟琴 兄弟旣翕 和樂且耽 宜爾室家 樂爾妻帑. 子曰 父母其順矣乎.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먼 길 가는 일도 가까운 데서 시작하고 높은 곳 오르는 일도 낮은 데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처자가 화합하니 거문고 타는 듯하네. 형제가 어울리니 익히 즐겁구나. 온 가정이 기쁘고 온 가족이 즐겁도다." 하였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부모가 아마 (중용의 이치를) 따랐을 게다."  

 

2.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마법도 신비도 아닙니다. 마치 지금 여기서 내디디는 첫 발자국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덧 천리 밖에 당도하듯, 낮은 자락에서 출발하여 땀 흘리며 오르다 보면 아득한 산꼭대기에 다다르듯, 그렇게 중용은 실천되는 것입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입니다. 너절해 보이는 일상사 갈래 갈래마다 스며드는 빛줄기입니다. 문득 깨닫는 인식론적 격절 경험으로는 중용을 말할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자를 떠난 면벽 용맹정진으로는 어림없는 게 중용 실천입니다.  

 

평범한 가정의 처자, 형제가 이루는 소통에서 하루하루 중용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리 고귀한 가치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입니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사소한 행복의 고갱이 속에 중용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중용이 아닙니다.  

 

3. 공자께서 또 한 번 정곡을 찌르십니다. "가정이 평화로운 것을 보니 아마도 그 부모가 중용의 이치를 따른 모양이로구나!" 부모의 일상적 실천이 길이 되고 강이 되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 전체의 평화가 이룩되는 도리를 천명한 만고의 명언입니다.   

 

허다한 고수들이 순(順)을 안락함, 순조로움 등으로 이해했지만 우리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 읽으면 부모의 안락함과 순조로움이 결과적 상태가 됩니다. 그것은 이 장 전체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앞 장과 비교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여기 부모는 제14장 부부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중용 실천의 발원지이자 모든 사회, 국가, 나아가 전 인류의 요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부모의 순(順)은 동사입니다. 중용의 도리를 "따른" 원인적 실천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본 장의 앞부분 비유 문장과 뒷부분 인용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  

 

4. 중용 실천의 발원지가 부부/부모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음미하겠습니다. 한 개인이 아닌 두 사람, 그것도 평등한 여성과 남성, 더군다나 부부/부모가 빚어내는 "관통과 흡수"가 중용의 요체라는 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귀중한 통찰은 바로 중용 자체가 사회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용은 그러므로 개인적 덕목이라는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개별적 명상과 웰 빙의 감옥에서 놓여나야 합니다. 공동체적 실천 개념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21세기 인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중용>은 래디컬(radical)한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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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4장 본문입니다.  

 

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行乎富貴 素貧賤行乎貧賤 素夷狄行乎夷狄 素患難行乎患難 君子無入而 不自得焉. 在上位不陵下 在下位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故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僥幸.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군자는 그 자리를 바탕으로 하여 행하고 그 밖의 것은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하여서는 부귀한 처지에서 행하며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한 처지에서 행하며 이적에 처하여서는 이적의 처지에서 행하며  환란에 처하여서는 환란을 당한 처지에서 행하니 군자는 어디를 들어가더라도 자득하지 아니함이 없다.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에게 매달리지 아니하며 자기를 바르게 하고 남에게서 구하지 아니하면 원망할 것이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것을 행하여 요행을 바란다. 공자는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함이 있으니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기의 몸에서 (원인을) 찾는다."고 하셨다.  

 

2. 앞 장에서 중용 도량이 사람이고, 그 사람은 평범한 상대방이고, 그런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자신을 성찰하는 자가 군자임을 말했다면 본 장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자득하는 자가 군자이고 , 그러려면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끝맺음은 동일하게 스스로를 살피는 것(反求諸其身)으로 기본 평행 구조를 살렸습니다.  

 

사람과 삶의 양대 화두 가운데 하나가 "자기 단일성" 문제입니다. 독립된 존재로 어떻게 자율성을 확보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이 문제 또한 대칭적 가치가 마주하는 장을 형성합니다. 불연속적 자율이라는 한 가치와 연속적 의존이라는 가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두 가치는 어느 하나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 하면 병이 되지요. 연속적 의존을 버리면 분열증이 되고 불연속적 자율을 버리면 우울증이 됩니다. 분열증은 남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측면을 포기한 것이고 우울증은 그럼에도 인간은 홀로 가는 생명일 수밖에 없는 측면을 놓친 것입니다.  

 

제13장은 분열증으로 가는 길을 경계했습니다. 남 없이 어찌 살 수 있느냐, 그러니 남 처지에 서 보라,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제14장은 우울증으로 가는 길을 경계합니다. 남 탓, 환경 탓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자득(自得)함 없이는 참 사람이 아니다,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지만 남이 있어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한 편, 남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남은 끝내 내가 아닙니다. 이 불가항력적 모순을 어찌하면 내 인격 속에, 내 삶 한가운데 통합할 것인가, 하는 고뇌가 다름 아닌 중용입니다. 이 중용은 물론 보편 가치입니다. 그러나 고뇌하는 주체가 처한 삶의 맥락과 지평에 따라 구체적으로 다른 역동성을 지닙니다.  

 

공자는 제후적 가치와 맞서고 있는 사대부입니다. 신라 식으로 말하면 성골, 진골 아닌 육두품인 셈이지요. 제후적 가치는 분열적입니다. 거기에 맞서지만 현실 벽에 자꾸 가로막히다 보니 공자는 부지불식간에 의존성이란 절망감에 휩싸이는 자신을 목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단호히 세우기 위해 자득(自得)의 비수를 꺼내 든 것이지요. 과연 고수의 심리학입니다! 
 

3. 그러면 그 자득(自得)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居易以俟命,  쉬운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옵니다. 적어도 공자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제시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개량주의처럼 보이니까요. 아무튼 공자는 극단적 모험주의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리하게 일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혁명은 불가하다는 의중을 드러낸 셈입니다.  

 

아마도 공자는 진정한 혁명, 즉 정곡(正鵠)을 맞추는 일은 反求諸其身, 돌이켜 자신의 몸에서 찾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길고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는 예수의 말과 흡사한 울림을 줍니다.  

 

보는 이의 처지에 따라 불멸의 이상을 천명한 것으로도, 사회동원력을 지니지 못한 데서 오는 한계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상 완벽한 대동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유한하고도 부분적인 성취는 어찌하든 매한가지인 셈입니다. 방법론적 선택에서 우열과 정오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각기 흐름을 타는 것이지요. 설혹 이 居易以俟命만이 옳다 하더라도 무엇이 거이(居易)이고 무엇이 행험(行險)인지는 자신과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구체적 문제입니다.  

 

4. 허나 궁극적으로는 중용의 도가 부단한 성찰을 거쳐 나오는 내면의 힘 아니면 안 되는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 변혁 또한 다르지 않겠지요. 사회적 성공과 인격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성취라 할 수 있으니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항상 뒷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이슈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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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3장 본문입니다.

子曰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執柯以伐柯 睨而視之 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 改而止. 忠恕違道不遠 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공자는 말씀하셨다. "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를 한다고 할 수 없다.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네. 도끼자루를 베네. 그 법이 멀지 않네.'라 하니 도끼자루를 가지고 도끼자루를 베면서 곁눈질해 보며 오히려 그것을 멀게 여기나니, 그러므로 군자는 남의 처지에서 남을 다스리다가 고치면 그친다. 忠과 恕는 도에서 벗어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서 원하지 아니하는 것이면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아니한다. 군자의 도는 네 가지이니 나는 한 가지도 할 수 없다. 아들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신하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임금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동생에게 구하는 것을 가지고 형 섬기는 것을 할 수 없으며, 벗에게 구하는 것을 먼저 벗에게 베푸는 것을 할 수 없다. 평범한 덕을 행하는 것과 평범한 말을 삼가는 데에 모자람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아니한다. 말은 행함을 돌아보고 행함은 말을 돌아보아서 서로 일치하도록 해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하겠는가."  

 

2. 군자 위도(爲道)의 참 도량(道場)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사람도 그냥 "평범한(庸)"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 말한 匹夫匹婦의 性을 바탕으로 하여 이제 찬찬히  사람과 사람 관계를 살펴 나아갑니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드렸듯이 이른바 대가들이 풀어놓은 중용은 지나치게 고답적이고 관념적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중용을 격리시키려는 저의를 가진 것처럼 온갖 현학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허나 중용은 匹夫匹婦의 性이 발원지이고 거기서 부자, 군신,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자연스레 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용이 어려운 것은 신비한 경지를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나를 앞세우는 탐욕으로 가로막히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소통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탐욕이 남을 관통하려고만 하지 남을 흡수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남의 자리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남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할 바를 먼저 남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 마음(忠)이 그대로 '먼저 헤아린 남의 마음(恕)'이어야 중용입니다. 나와 남 사이에 그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야 중용입니다. 내게 필요한 꼭 그것만큼 남에게  필요한 꼭 그것이 서로 유쾌하게 오가야(去來) 중용입니다.  

 

부부가 性을 나눌 때 일어나는 관통과 흡수는 동일한 원리로 부자, 형제, 친구, 군신 관계에 적용됩니다. 대통령의 정치 행위가 부부의 性 행위보다 고급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잘한 일상사에서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 이루어지는 소통이 그대로 중용입니다. 사실은 그 사소함에 마음을 온통 담는 게 어려워 공자는 여기서도 "못하겠다."고 사양합니다.  

 

3. 자연스럽게, 그러므로 공자의 관심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흐릅니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신을 소통의 "서로 주체"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자신과 마주섬으로써 자신의 그릇을 넓힌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관통과 흡수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 모순을 통합하는 역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大同을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언제라도  자신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웅얼거림에 귀 기울입니다. 군자는 천하를 위해 찰나찰나 자신의 내면을 흔듭니다. 마치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림으로써 깨어 있는 군자의 영혼은 정확하게 중용의 축을 가리킵니다.  

 

이런 성찰은 남과의 소통에서 온 깨달음입니다. 거꾸로 남과의 소통은 이런 성찰을 통해 더 깊고 넓어집니다. 궁극은 천하무인(天下無人), 즉 타자화 되는 존재가 없는 생명연대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군자는 독실함을 생활 기조로 삼아 벗어나지 않습니다. 중용은 결코 자격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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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2장 본문입니다.  

 

君子之道 費而隱. 夫婦之愚 可以與知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知焉 夫婦之不肖 可以能行焉 及其至也 雖聖人亦有所不能焉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 일개 부부의 어리석은 수준에서도 알 수가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일개 부부의 못난 수준에서도 행할 수 있지만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천지가 아무리 커도 사람은 오히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을 말하면 천하에 쪼갤 수 있는 것이 없다. <시경>에서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못에서 뛴다." 하니, 그 위와 아래로 나타남을 말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그 실마리가 부부 사이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  

 

2.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君子之道 費而隱)." <중용>을  최초로 읽었을 때 가장 감동을 받았던 문장입니다. 사실 이 한 문장으로 중용은 끝입니다. 뒤에 따라오는 부연 설명은 사족에 지나지 않지요. 위대한 것과 사소한 것의 차별을 단박에 부수는 압권입니다. 명시적 질서와 암시적 흐름을, 거시 구조와 미시 운동을, 천지 거래와 부부 소통을 한 눈에 꿰뚫는 비수입니다. 대칭과 모순으로 이루어진 우주 이치를 역설로 통합하는 초절정고수의 일식(一息)입니다.    

 

이 말을 色卽是空으로 바꾸면 세존의 깨침이 되고 疎而不漏로 바꾸면 노장의 통찰이 됩니다. 사상의 심오함이나 사유의 자재함에서 공맹(孔孟)이 노석(老釋)에 못 미친다는 말은 통속적 편견일 뿐입니다.  문명에 직접 발 담그지 않는 언어가 문명을 빚어가는 언어보다 영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적 실천을 염두에 둔다면 세련미가 덜한 표현이 동원력 면에서는 더 우월할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중용>의 중용다움은 "압도하되 제압하지 않는" "평범한" 어기(語氣)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용을 설파하는 언어 자체의 중용이 아닐까요? 어눌함에 실린 탄탄함!  

 

3. 사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파악한 것만으로도 <중용>은 우뚝 솟은 텍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해석가들이 이 영광의 빛 아래서 멈춰 섭니다. 그러나 세계가 대칭/모순구조로 이치를 삼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결코 구조만이 아닙니다. 세계는 운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운동을 위해 구조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운동은 찰나찰나 대칭구조를 깨뜨림으로써 그 역동성을 유지 확산해 갑니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역설로 통합한다는  말이 바로 이 사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費와 隱의 대칭/모순구조를 깨뜨림으로써만이 역설적 통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즉 운동으로서의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허다한 지성들이 구조의 신비에만 주목한 것이지요.  

 

이런 오류는 앞서 말씀드린 바, "명사적 독법"에 함몰된 교과서적 '먹물'들이 반성 없이 답습한 해석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중용을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 읽는 마음결로 여기 "費而隱"을 보면  역시 隱을 동사로 읽으면서 그 방향으로 강조하게 됩니다. 은밀이라는 명사도 아니고 그런 상태를 지시하는 형용사도 아닙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단호한 결단이 전제되는 실천 그 자체입니다. 이렇게 읽어야 앞장의  遯世不見知而不悔와  같은 맥락이 또렷이 드러납니다.   

  

중용의 도가 실로 위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최고의 덕을 실행에 옮기면서 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권력으로 삼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감춤으로써 "평범함"에 깃듭니다. 전 우주적 보편성을 가진, 그래서 편재성을 지닌 위대한 덕이 사소한 일상으로 내려올 때 진정한 중용이 이루어집니다.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는 동사의 의미는 큰 덕을 작은 일의 수행에도 적용한다는 뜻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 <간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중대한 국사를 논의하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양이 다리를 다쳤다며 들어오자 간디는  동일한 진지함을 유지한 채 양 한 마리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납니다. 조국의 독립과 양 한 마리 치료, 이 엄청난 대칭! 간디는 큰 일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춥니다. 그리 함으로써 위대함과 사소함의 대칭을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신약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일에 충심을 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심을 다한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費而隱을 명사적 독법으로 읽으면 실천적 의미가 명상 범주로 축소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방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야 개인과 사회 모두를 이끄는 실천덕목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됩니다. <중용>은 잘난 인간을 위한 처세훈을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입니다.  

 

소수의 잘난 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허나 그들은 결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위해 세상을 망치는 저 오만한 상위 1%의 제후적 독선에 맞서는 견결한 저항전선이 바로 오늘의 중용입니다. 甲男乙女의 겸손한 연대로 대동세상을 일구는 평범무비의 소통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뿐입니다.   

 

4. 그런데 주목할 것은 부부와 성인을 대비시킨 점입니다. 군자와 소인을 대비시켰다면 아무도 그 자연스러움에 토를 달지 않겠지요. 하필 왜 부부일까요?    

 

뜬금없어 보이지만 사실 匹夫匹婦의 소통이 모든 인간관계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이는 너무나 보편적 진실이라서 오히려 늘 묻혀 지고 말지만  적어도 부부 개념에 앞선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여기 부부 언급은 하등 의아할 게 없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의 핵심은 사랑이고 다시 그 사랑의 핵심은 성적인(sexual) 것입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성교야말로 인간 존재 자체와 소통의 발원이자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sex)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한자어 중 이 性  자 만큼  위대한 쓰임새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의 성은 이렇게 위대하지만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실 성적인 수치심이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강하나 성교를 감춤/드러내지 않음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좀 더 내밀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존재와 소통의 시원을 일부러 드러낼 일은  아니지요.  

 

다른 것도 매한가지 입니다. 숨 쉬는 것, 먹고 싸는 것, 잠자고 일어나는 것, 말하고 듣는 것,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성교는 이들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므로  더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권력, 돈 , 지식처럼 드러낼 경우 아마도 인간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될 것입니다. 대놓고 性을 권력,  돈, 지식 문제와 결합한다면 가장 잔혹한 억압체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아주 하찮게, 아주 조용히 말하지만 부부는, 부부의 性은 중용의 요체이자 뇌관입니다! 그래서 성인도 알 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5. 가만히 보면 이 장에 또 하나의 개념 顚覆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인과 군자의 구별입니다. 앞장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군자 개념이 성인의 상위 개념입니다. 여기 군자는 중용의 완전성을 전제한 요청적 개념이고 성인은 부부와 대비된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전복은 자못 의미심장한 바 있습니다. 문장의 형식에 따라 내용을 보면 중용이 일개 부부, 즉 匹夫匹婦라도 알고 행할 수 있는 사소한 것부터 성인조차 알고 행하지 못하는 광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행간의 강조점은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의 이런 이의제기를 뒷받침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입니다. 제12장 전체 문맥에서 보면 매끄럽지 못한, 불쑥 끼어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입니다.    

 

군자의 언어를 천지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내용인데 사실 중용의 실천적 측면,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 황당한 주장입니다. 마치 장자나 불경의 과장된 초거대 담론적 수사를 보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이해가 잘못일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 상태에서 우리 식 이해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天地之大也 人猶有所憾. 故君子語大 天下莫能載焉 語小 天下莫能破焉. 부분을 양보 문장으로 봅니다. 즉,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중용의 이치를 그렇게 추상화, 신비화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매가 날고 땅(못)에는 물고기가 뜁니다. 천지 일은 그냥 그러합니다. 중용 또한 천지간 일일 뿐입니다. 중용의 최고 경지가 신비 차원까지 올라가서 그런 게 아니고 부부의 性처럼 구태여 드러낼 일이 아닌, 그러나, 아니 그래서 정녕 숭고한 것이기 때문에 성인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라고 이 문제, 즉 性을 더 고상하게 알고 행할 리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용 또한 이와 같습니다. 아니 바로 군자의 도는  匹夫匹婦의 性, 그 평범하고 사소한 소통으로 영원 회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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