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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 p.17~18
이 세계가 전쟁으로부터 차츰 멀어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참 지긋지긋하게도 전쟁과의 연을 끊지 못 했던 인류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다. 지구 반대편에선 전쟁을 겪고 고통에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있지만 나와 비슷한 세대는 전쟁을 모르고 산다. 아마 세대를 한번 더 건너뛰면 거의 잊고 살 전쟁.. 하지만 우린 늘 전쟁의 긴장감도 느끼고 살고 있다.
끔찍한 것, 아픈 것, 두려운 것은 마냥 나에겐 회피 대상이었다. 잘생긴 배우를 내세운 영웅 이야기로 흥행을 달리고 있는 전쟁영화라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항상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 있던 전쟁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역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본 근전쟁사는 단순히 글로만 읽기엔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소설책에 점점 이끌리면서 그 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증폭되어 갔다.
아무리 무서운 공포영화도 손바닥을 얼굴을 가리긴 하지만 빼꼼히 손가락 사이로 보고픈 심리와 비슷하다고 할까? 참혹한 전쟁터 현장에 대한 호기심과 이제는 끔찍한 장면쯤은 조금 참아줄 연륜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까.. 그래서 작년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쟁영화는 곧잘 찾아보았다. 그런데.. 어느 영화나 책에도 거의 없던 여자 병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여자들이 들려주는 전쟁이라니. 당연히 외면할 수 없는 주제였다.
즉 남자들의 영웅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이야기가 아닌 여자들의 감성으로 이야기하는 책이라서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이기에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 속에서 그녀들은 어떻게 전쟁을 견뎌 내었을까? 그리고 그녀들이 전쟁에서 무엇을 하였나? 에서부터 그녀들이 느낀 전쟁의 그림은 어떠할까?까지 궁금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악은 분명 매혹적이다. 그리고 선보다 솜씨가 뛰어나다.
마음을 더 잡아끈다.
우선 이 책을 읽기 전에 보았던 『마지막 목격자』와는 차이점이 느껴진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전쟁은 마냥 불쌍하고, 처절하고, 가슴 아프고, 슬펐다면 여성이 말하는 전쟁은 아슬아슬한 두려움과 무섭고 끔찍하지만 용감함도 느껴지고 슬프지만 따뜻함도 느껴지는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여 나를 울린다.
애국심에 불타 조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전쟁터로 나 섯거나 아니면 증오심에 불타 기차를 탄 어린 소녀들, 어떠한 임무라도 주어지면 그 임무에 최선을 다 해내던 그 용감한 소녀 병사들, 갓난쟁이 아이들 데리고 작전을 수행하는 여군, 죽음의 두려움 따윈 내던진 채 목숨 걸고 부상병을 살려낸 열아홉 살의 소녀병, 전쟁에 동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상사의 다그침에도 어린 독일 포로병에게 빵조각을 떼어줄 수밖에 없던 그녀들의 동정심 등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그렇게 그녀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잘려나간 팔다리가 수북이 쌓여있는 그곳에서도 그녀들은 용감했다. 여자이지만 그 어느 남자들보다도 꿋꿋했고 여자이기에 단 한순간이라도 예뻐 보이고 싶은 욕망도 버리지 못 했던 그녀들, 전쟁 중에도 봄이면 피어나는 꽃들에 애잔한 눈물을 감추지 못 했던 그녀들이 죽음을 피해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 전쟁의 기억마저도 드러내지 못 했던 안타까움이 화가 나기도 했다. 전쟁을 겪은 이들에 대해 장막을 치는 이들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단 말인가.
"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죽어서 관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거야 ‥‥‥ 꼭 어여쁜 신부 같더라니까." -p.338
" 진군할 때였는데 ‥‥‥여자 병사들 200명 정도가 앞서가고, 남자 병사들 200여 명이 그 뒤를 따랐어. 푹푹 찌는 날씨에 30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걸었어. 자그마치 30킬로미터를! 그렇게 계속 걷는데 우리가 지나간 자리, 모래 위로 빨간 얼룩들이 남는 거야 ‥‥‥ 붉은 자국들이‥‥‥그러니까 그건 ‥‥‥왜, 우리 여자들의 그거 있잖아 ‥‥‥그런 상황에서 뭔들 감출 수 있겠어? 뒤따라오는 남자 병사들은 붉은 자국을 보고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어‥‥‥" -p.357
지금은 일상의 무심함 속에 전쟁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오히려 전쟁의 아픈 상흔에 그리 관심을 가지는 이는 많지 않다. 누군가에겐 사는 게 전쟁인데 뭣하러 끔찍한 과거는 들추어 내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즉 시대가 다르면 사람도 다른 것 마냥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선 어떠한 공감도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전쟁은 진행 중이다.. 쉬고 있는 휴화산처럼 언제 다시 활동을 재개할지 모를 일이다. 더욱이 한반도 국민이라면 더욱 전쟁에 대해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뼈아픈 역사를 알면 알수록 현재의 어리석은 나를 깨우쳐 주는데 이만한 교본은 없는 듯하다.
전쟁이 아닌 전쟁터를 이야기하고 전쟁의 역사가 아닌 감정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더욱 진실되게 느껴졌다.
" 여자들은 다른 것을 기억하고, 그래서 기억하는 방식도 다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는 냄새와 색깔과 소소한 일상이 함께한다." - p.28
"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p.29
날씨가 추워지면 그 어떤 책보다 전쟁 서적들이 떠오르는데 이번 겨울은 더욱 이 책이 놓지 못하고 있다. 혹독한 추위가 아니더라도 전쟁은 너무나 살이 애릴만큼 차가운 느낌을 주어서일 것이다.
나를 잊지 말라고,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그 소녀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그들의 가쁜 숨소리를 덜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우리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나의 삶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읽어 보길 잘 한 것 같다. 더 많은 기회와 선택의 시기에 태어난 것이 어쩌면 타고난 복이 아닐는지도..
언젠가 빨간색 천으로 블라우스를 만들어 입었는데, 다음날 양팔에 반점 같은 게 돋았더라고, 물집도 생기고, 내 몸은 빨간 사라사는 물론, 장미나 패랭이꽃 같은 빨간 꽃에도 거부반응을 보여. 빨간색이나 피 색깔은 어느 것도 견디지 못하지. ‥‥‥그래서 우리 집엔 빨간색이 하나도 없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거야. 사람의 피는 아주 선명하지. 자연 풍경에서도 화가들 그림에서도 나는 피처럼 선명한 색은 아직 본 적이 없어. 석류즙이 조금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아주 잘 익은 석류즙도‥‥‥" - p.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