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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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도 좋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는 것도 좋다. 외국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도 좋지만,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내가 속한 세계를 새롭게 보는 것 역시 좋다. 김연수 작가가 2023년에 발표한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읽으며 이 작가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 살고 있어서 운이 좋고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아름다움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짧거나 긴 소설 여러 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이다. 여러 정황상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이는 이 글은 작가의 어머니와 사별한 과정을 그린다. 저자는 경북 김천의 한 제과점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실은 부모님이 셋째를 원하지 않았다거나, 어머니가 일본 치바 현 출신이라거나 하는 디테일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김연수 작가의 이전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크게 새롭지 않을 내용인데도 읽는 내내 따뜻하고 뭉클했다. 특히 미취학 아동 시절의 저자가 각각 일터나 직장으로 떠난 식구들을 기다리며 집을 지키던 장면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그런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저자가 보낸 시간들에 대한 기록도 좋았다. 저자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집 근처 호수공원을 달리거나 걸으면서 현실을 잊거나 현실의 다른 면을 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된 책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다. 이 책에 따르면 "나의 소유를 줄일수록 자연은 점점 늘어난다. 무소유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을 다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욕망에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돌보는 사람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이 가난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풍요로운 삶이 됐다." (247쪽)


나는 이 대목이 생에 대한 집착 또한 어떤 면에서는 소유이고, 소유를 줄이면 자유를 얻을 수 있듯이 집착을 버리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다시 말해서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 또한 욕심이며, 그러한 마음은 가지면 가질수록 괴로울 뿐이니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딸 열무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사별의 고통과 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데, 이는 저자의 또 다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담긴, 미래를 긍정하는 힘으로 현재의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과 이어져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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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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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독일 뒤셀도르프. 화가가 되기 위한 미술 교육을 받으러 노르웨이에서 온 청년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함께 교육을 받는 동료들은 외국에서 온 그를 따돌리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 줄 알았던 하숙집 딸은 엄마와 삼촌의 반대를 핑계로 자신을 멀리한다. 그렇다면 한 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면 좋으련만, 라스는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 한스 구데와 만날 약속을 잡았으나 막상 약속 시간이 가까워오자 만남을 피하고만 싶다. 이와중에 눈에는 보여선 안 되는 것이 보여서 자꾸만 시야를 방해하고 정신을 어지럽힌다. 라스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I-II>는 19세기 말에 실존한 노르웨이의 풍경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일대기를 그린다. 소설은 라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라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하숙집 딸 헬레네가 삼촌과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느니, 술집의 웨이트리스가 자신을 유혹했다느니 하는 말들로 점점 더 곤경에 처한다. 급기야 희고 검은 천이 자신의 주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착란 혹은 환상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결국 라스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진다.


여기까지가 I부의 줄거리이고, II부는 라스의 누이 올리네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이미 가족의 대부분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마저 치매를 앓는 노인이 된 울리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라스의 모습과 음성 등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인물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욘 포세의 또 다른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표지 그림이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자신의 고향 풍경을 직접 그린 그림 <보르그외위섬>이라는 걸 알았다. 완독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었는데 그림을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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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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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빵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 김소연 시인이 출연해 정희진 작가와 대화를 나눈 편을 듣고 궁금해져서 구입한 책으로 기억한다. 구입한 지 한참이 지난 최근에야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한 대로 좋다. 이 책 이전에 읽은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들도 좋았지만 이 책이 가장 내밀하고 솔직하다고 느꼈다. 글쓰는 사람이 자신의 생애나 생활을 속속들이 보여줄 필요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가 그를 더 가깝고 친밀하게 느끼게 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저자의 아버지는 '무능하지만 무해'했고, 저자의 어머니는 '같은 무능이었어도 유해'했다. 능력은 좋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했던 아버지는 비록 식구들로 하여금 가난을 경험하게 했을지언정 정서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만 예뻐하고 두 딸은 그만큼 귀하게 대하지 않은 어머니는 저자에게 늘 애증의 대상이었다. "나는 엄마를 오래 싫어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오빠보다 뒤에 서 있기를 지나치게 종용해온 억압의 주체였다.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되 오빠보다 더 자랑스러우면 안 되었다." (15쪽)


그런 어머니가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딸인 저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아들을 병으로 잃고, 남편을 여의고, 치매를 앓았다. 아무리 어머니를 오랫동안 싫어했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연민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저자는 어머니를 자식처럼 돌보기 시작했다. 사람 만나고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틈만 나면 어머니를 만나러 요양 병원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병이 진행되면서 어머니는 점점 더 딸을 잊었는데, 그럴수록 저자는 어머니에 관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이 책은 그렇게 되살아난 추억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자랄 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이지만, 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게 좋은 것들도 많이 받았다. 그중엔 시도 있다. 웅변 대회에 나갈 정도로 글보다 말을 중심으로 살았던 저자는, 학창 시절 어머니에게 선물받은 시집을 읽으며 시의 세계를 만났고 종국에는 시인이 되었다. 정작 어머니 자신은 딸이 쓴 편지에 답장 한 번 써준 적이 없을 만큼 글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게 받은 것도 유전이고 사랑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랑이 이 책으로 전해진 것 역시 인연이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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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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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라는 문구에 혹해 이 책을 구입했다. 읽어보니 방점이 '실험적인'에 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로서의 재미가 덜하다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 속 비슷비슷한 인물, 비슷비슷한 배경, 비슷비슷한 사건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실험 자체가 트릭이 되고 사건 해결의 키(key)가 되는 이 소설이 신선하고 파격적인 재미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실종된 한 남자가 남긴 원고로부터 시작된다. 실종된 남자의 이름은 '시몽 르쾨르'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신분증은 위조되었고, 사람마다 기억하는 그의 이름은 제각각이다. 실종되기 전 그가 타자기 옆에 남긴 원고의 내용도 사실인지 아닌지 불명확하다. 원고의 내용은 이렇다. 한 남자가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 장소로 간다. 면접 장소에는 정체가 모호한 면접관 '진'이 기다리고 있다. 진의 지시로 북부 역으로 향하던 남자는 길에 쓰러진 소년을 발견해 근처에 있는 소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알쏭달쏭한 말만 들을 뿐이다.


이후에도 예측을 불허하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조차 불분명하고, 현실은 꿈이 되고 꿈은 다시 현실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세계... 익숙지 않은 설정과 전개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독자에게는 인내심을 요하는 독서가 되겠으나, 어느 책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한 번 도전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을 미덕으로 받아들인다면 인상적인 체험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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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9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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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 런던. 부유한 이모 댁에서 사촌 이디스의 시중을 들며 지내온 마거릿은 이디스의 결혼을 계기로 고향인 남부의 시골 마을 헬스톤으로 돌아간다. 런던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뒤로 하고 전원에서의 소박한 생활에 적응하기로 마음 먹기가 무섭게, 마거릿의 아버지 헤일 씨가 깜짝 놀랄 만한 선언을 한다. 더는 마을의 교구 목사로 지낼 마음이 없어졌으니 가족 모두 북부의 공업 도시 밀턴으로 이사를 가자는 것이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결심을 번복하지 않고, 앞으로의 생계와 눈 앞에 닥친 이사, 지인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자리 잡고 살아갈 생각에 마거릿은 눈앞이 캄캄하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소설 <북과 남>은 초반부터 흥미진진하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촌이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도 탄탄한 남자와 결혼하는 상황부터가 유쾌하지 않은데, 그 결혼으로 인해 자신은 가난한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데다가 그 사촌이 소개해준 남자와도 잘 안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적은 수입이나마 보장해 주었던 교구 목사직을 가족과 상의도 없이 개인적인 이유로 그만두고, 불평불만 많은 어머니와 자신을 적대시하는 하녀를 데리고 사실상 혼자서 이사 준비를 해야 하는 주인공이라니. 이 소설과 자주 비교되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버넷의 상황이 훨씬 더 낫게 느껴질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가 마무리된 후에도 마거릿의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자신의 고향인 헬스톤이 비록 가난한 시골 마을일지언정 자연의 아름다움과 공기의 깨끗함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했던 마거릿은 삭막한 공장 일색인 데다가 매연 때문에 제대로 숨 쉬기도 힘든 공업 도시 밀턴의 환경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지인 하나 없는 이곳에서 마거릿이 겨우 알고 지내게 된 가족이 둘인데, 하나는 아버지의 제자인 공장주 손턴 씨 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공장 노동자인 히긴스 씨 가족이다. 졸지에 공장주 측과 노동자 측 사이에 낀 처지가 된 마거릿은 양측의 사정을 청취하며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거릿과 손턴 씨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처럼 첫 만남부터 자신에 대한 '오만'과 상대에 대한 '편견'으로 반목을 거듭하며 팽팽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립은 그저 두 남녀의 밀고 당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첨예한 화두였던 노동자와 공장주 간의 갈등, 나아가서는 농업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영국의 경제 중심지였던 남부와 산업 혁명 이후 공업을 기반으로 신흥 경제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북부 사이의 세력 다툼을 상징한다. 양심상의 이유로 목사직을 그만두는 목사, 상관의 폭력에 대항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된 군인, 하녀보다 더 나은 수입을 보장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취직하는 여성들 등 당대의 급변하는 사회상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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