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
헤르만 헤세 지음, 강민경 옮김 / 로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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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의 믿음

지은이: 헤르만 헤세/ 강민경 옮김

   : 믿음의 씨앗은 나무로 자란다

 

 

 

이 책<나의 믿음>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가졌던 종교와 그 믿음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헤세가 생전에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그의 믿음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집과 같다.

1910년대 에서 1960년대 에 걸쳐 헤세가 남긴  기고문과  편지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고 그가 추구했던  영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나는 헤세가 그의  자전적 작품들속에서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사랑' '구원' 이 아니였을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가 신실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 이였기 때문에 사랑과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헤세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학교에  진학해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을 정도로 그는 평생을  종교 없이 산 적이 없으며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교회라는 테두리안에  갇혀 있길 거부 하였으며 오히려 일생을 교회 없이도 살아 왔다고 고백 한다.

즉 헤세는 교회를 중요시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보다 영성() 생활을 중요시 하는 그리스도 인이 되고자 했다.

그가 생각했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보편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식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의 영적인 삶에 대한 추구는  탈무드에서 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우파니 샤드, 붓다의 가르침을 거쳐서 공자와 노자에 이르기 까지  진리에 이르는 길을 탐색 했다.

그에게 있어 진리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였다.

헤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붓다의 깨달음을 같은 경지라 여겼고, 공자의 덕()을 이해한 후에는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형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때 부터 외할아버지와 부모님이 가진  경건주의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교회 단체나 교회 종파 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 했다.

그의 집안 어른들이 인도에서 선교 생활을 통해 인도의 종교를 접한 후 결국 종교에는 우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면에 그가 믿었던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에 대한 헤세의 평가는 가차 없다.

<그가 그저 개신교 신자 였다면, 성직 제도를 반대 했거나 교회와 국가에 맞선 개인의 대변자였더라면 그를 나쁘게 탓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교회보다 그 무엇하나 나은것 없는 새로운 교회를 스스로 세웠지요. 또한 국가와 지배자들을 적극적으로 보좌했고 농민들을 져버렸습니다.>

 

또한 또 다른 종교 개혁가 칼뱅(1509~1564)에 대한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칼뱅의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가  은총의 신비를 아주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은총이란  이름은  다를지라도 그러한 것이 항상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은 빛이자  신 그 자체요. 우리가  잠시 마음을 열면 그것이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어린아이든, 현자든  상관 없이 말이지요.>

 

이처럼  헤세는 단지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의 사랑과 그리스도 인만 구원을 받는 다는 식의 경직되고 편협한  믿음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믿음 이었다.

이를  헤세의 세계관 작품속에선  어린시절 순수함을 지나 사춘기 시절의 절망과 타락을 거쳐 결국 어른이 되면서 구원을 얻는  패턴으로 구조화 시켜 표현 했다.

이것은 곧 그가 체험했던 영적 성숙의 단계를 작품속 세계관에 반영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  <싯다르타> 에서 언급 했던 붓다의 '깨달음' 은 곧 '사랑' 이였다.

이는 기독교의 사랑과 다르지 않고 그 '사랑' 을 불교에서는 '자비' 라고 부른다.

그는 이처럼 그에게  사랑과 구원은 맹목적인 종교적 가르침이 아닌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그에게 믿음은  '진리는 둘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교회에 대한 실망은 가졌지만 자신의 개신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즉 개신교를 버리지 않고 불교적이며 유교적이고 또 도교적인 믿음을 갖춘 신앙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원효가 대승기신론에서 주창했고 유마거사가 삶을 통해 보여줬던 불이 ( : 둘이 아닌)의 경지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던게 아닐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주목한  것은 헤세가 1944년 발표했고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유리알 유희>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와  그의 친구 '카를로 페로몬터' 에게  보낸 가상의 편지글 이다.

1960년에 쓴 편지글 엔 헤세가 나이 83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접한 선불교(禪佛敎)에 대한 이해를 흥분된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편지글에서  <벽암록> 제 1칙을 비롯한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을 통해 그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 하고 매력적인 깨달음의 순간에 대하여  어린이 같은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 느껴졌다. 

이는 자신이 80 평생 추구 했던 모든 영적인 삶이 '' 이라는 진리의 큰바다로 흘러 들어 간 것을 기뻐한 게 아닌가 싶다.

 

 

 

본래 불교에서 ''은 혁명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혁명은 기존의 모든 관념을 전복 시켜버린다.

소승불교라는 작은 수레를 던져 버리고 큰 수레에 중생들을 태워 모두 함께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자 했던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 이라는 정신 혁명을 통해 불교는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 서게 되었다.

그렇게  선은 기존의 형식적이며  기복적인 불교를 뒤엎고   깨달음의 불교로 진화 시킨것 이다.

 

 

 

이 책을 통해 헤세가 추구했던 영적인 삶이 어떠 했는지 잘 알았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했고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또한 그가 향한 믿음은 밖으로가  아닌  자신의 안을 향한 것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헤세가 종교간에는  우열이 없고  모든 종교가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그가 분명 편협된  믿음을 가진  개신교인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성경의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잘 알려진 용어  '믿음, 소망, 사랑' 을  불교식으로 바꿔 보면 믿음은  신심(信心)으로, 소망은 발원(發願)으로, 사랑은 자비(慈悲)로 부를 수 있다.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했는데 사랑은 곧  자비이다.

자비는 지혜를 모체로 삼는다.

그래서 지혜는 다른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반야 바라밀' 이라고  부른다.

결국 육바라밀의 마지막 반야 바라밀이 바로 지혜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사랑이 제일이라  했듯이 불교에서도 자비가 곧 지혜요, 지혜가  깨달음이니 사실상 두 종교 모두 다 같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먼저  믿음을 굳게 가져야 발원을 세울수 있고  결국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 라고 한 옛 선사(禪師)들의 말씀은  틀림 없다.

 

헤세가 이렇게 까지 상세히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음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헤세에게 심어진 믿음의 씨앗이 개신교의  뿌리에서 위로 싹이 터져 나와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거쳐 마지막   불교에 이르는 줄기와 가지 이어져 뻗어  믿음의 나무 보이는 듯 하다.

 

 

 

 

 

이 책을 덮고 난후 나에게 헤세는 마치   독일에 태어난 유마거사 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인 대화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영혼을 담아 말하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면 성인에 가깝다. - P30

나에게 삶은 이 세상의 양극 사이를 오가는 것, 즉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기둥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 P43

중국인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과 재능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P97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결국 삶에는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 P167

저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는 신을 믿을 겁니다.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그림으로, 언어로 나타났기에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테지요.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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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5-3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내용이라 유익했어요. 마힐님^^

마힐 2024-05-31 18:13   좋아요 0 | URL
구름 모모님, 저에게 한 분의 지음(知音)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감사 합니다.
 
일류의 조건
사이토 다카시 지음, 정현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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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일류의 조건

지은이: 사이토 다카시 / 정현 옮김

   : 사무라이 문화와 장인 문화

 

 

얼마전 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인한 쇼츠에서 일본의 여배우 (모리카와 아오이) 가  달인(: 통할 통 人: 사람 인 )이라 불리는 사람의 기술을 따라 하는 방송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드를 던져 촛불 끄기, 주사위를 컵으로 흔들어 컵안에서 일렬로 세우기, 부메랑 던지기, 돌을 모서리로 세우기 등등 별 희한한 재주를 가진 달인들이 나온다.

모리카와는 생전 처음 접하는 달인의 기술들을 몇번 시도한 후 금방 습득을 하여 숙달의 경지에 도달한다.

일반인이라면 몇년을 해야 하는 경지를 방송에서 여배우는 믿기지 않을 속도로 달인을 기술을 습득한 후 바로 그 기술을 시연해 버린다.

정말 말도 안되는 재능을 가진 그녀는 한,두 종목에 한해서 특화된 게 아닌 여러 잡다한 종목인 매번 새로운 달인들의 기술을 습득해 버린다.

방송 주작이 아니라고 하는데 보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할 정도다.

방송에 나온 기술을 시연하는 달인 조차도 그녀의 신기(神技)에 허탈한 표정을 지는게 웃음 포인트다.

자신들은 몇 년 혹은 한평생을 갈고 닦은 기술을 옆에서 그냥 쓱싹 보고 난후 그대로 따라 해버리니 달인의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리카와의 '달인의 재능 훔치기' 는 정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훌륭한 예술가는 훔친다.' 고 파블로 피카소는 말했다고 전해진다.

'훔치기' 관련 하여 일본의 베스트 셀러 작가  '사이토 다카시' 가 쓴 책<일류의 조건>은 참고가 될만한 책이다.

원래 이 책은 오래 전에 나왔다가 (2006) 이미 절판된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에 유튜브에서 '박문호' 박사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이 책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는 책을 갑자기 독서 시장에서 찾는이가 많아진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인해 마침내 이 책을 다시 복간하게 되었다.

 

 

 

내용에 앞서 우선 이 책의 겉디자인과 내용까지 전부 일본 스럽다.

(즉 닛뽄 스타일이 강해 보인다.물론 내 개인적 생각임)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제목과 저자가 찍힌 양장본인데 겉면에 초록색 테두리 표지를 감싼 것을 보니 <귀멸의 칼날> 의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 가 입고 다니는 초록색 하오리(상의)가 연상 된다. (위 사진 참조. 순전히 개인적 관점일 뿐.)

 

책의 핵심 내용은 마치 사무라이가 한 칼에 베는듯 간단 명료한데 일류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은 딱 세가지 힘을 기르라고 말 한다.

첫째, 요약하는 힘 키우기,

둘째, 훔치는 힘 키우기

셋째, 추진하는 힘 키우기.

책 제목에서 말하는 '일류' 란 어느 분야든지 그 분야에서 가장 능통한 '달인(達人)'을 말한다. 우리로 치면 '고수(高手)' 가 되는 방법인 셈이다.

즉  무슨 분야든지 그 분야의 일류 즉,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3가지 요령을 숙달 시켜야 된다는 게 책의 요지이다.

이외에도 '집중력이 곧 초능력이다' , 숙달론의 기본서가 되는 <쓰레즈 레구사>에 대한 소개와 고시하라 문화(腰 허리 요 肚 배 두 文化) 같은 저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내용이 훌륭한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약간 아쉽게 느껴 지는게 있다면 이러한 숙달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설명할 때 저자는 수 많은 일본인들을 예시로 든다.

저자가 일본인 인지라 당연히 일본의 운동 선수를 비롯하여 예술인, 문학가 등 많은 장인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들이 일본인일 수 밖에 없긴 하다.

 (많은 사람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메이저 리그 선수 '스즈키 이치로', 아톰의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 정도뿐 나머지는 생소 (生疏) )

물론 저자가 언급한 장인의 경지에 이른 일본인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잘 모르는 일본 장인들이 다수라 일본 문화나 인물들에 대한 이해도가 그다지 높지 않으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의 깊이가 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책의 말미에 '무라카미 하루키' 에 대한 분량이 한 챕터를 차지 하도록 많은 지면을 할애 한다.

하지만 그 유명하단 소설가의 책을 유감스럽게도 나는 여지껏 한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독서를 통해 얻어가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무지의 지'(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를 깨닫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은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 봐야 겠다. 아직은 끌리질 않는다.)

 

장인이 많은 나라 일본.

일본은  왜 장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을까?

일본에 달인이라 불리는 장인들이 많은 이유는 일본 사회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다.

폐쇄적인 사회 문화.

다시 말해 일본의 폐쇄적인 사회 문화 분위기에서는 오늘날 '오타쿠' 같은 문화가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일본이라 나라는 지리적으로 같은 동북아시아에 속하고 또 유교 문화권이라 우리와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전혀 다른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폐쇄적 분위기의 출발점을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 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전통 일본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 였다.

보통 우리 동양권에서는 신분제 하면 유교적 신분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떠올린다.

여기서 우리는 '()'  '선비'로 생각하는데 일본에서 '' '무사(武士)' 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무사는 모두 '사무라이(: 모실 시)'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무라이' '무사' 는 엄연히 다르다.

일본에서 '사무라이 ( 모실 시)' '위 사람을 모시는 사람'을 뜻 하는 것이다.

즉 본래 '무사(武士)' 는 일본의 지배 계층 '다이묘(大名主: 영주)' 를 뜻하고 사무라이는 '다이묘를 경호하는 사람' 을 뜻한다. 

쉽게 말해 사무라이는  다이묘의 경호원인 셈이다.

여기서 '모실 시()' 자를 파훼 해보면 절에 계시는 '스님' 이 연상된다.

(사람 인 '' + 절 사 '' 가 합쳐진 글자 이기 때문이다.)

'절에 있는 사람' 이란 곧 '스님' 이 되고 , '스님'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 이란 뜻이 된는 것이다.

 

이걸 통해 보면 아무래도 일본에서 사무라이 의  '모실 시'와  '스님' 의 관계는 어떤 연관성이 많지 않나 싶다.

또 사무라이가 입는 갑주 복장을 자세히 보면 스님들이 입는 오조가사와 닮았다.

 

일설에 의하면 백제의 무사 '싸울아비' 가 일본으로 넘어가 '사무라이' 가 됐다는 설도 있긴 한데 우리 한반도에서 고대 일본으로 불교가 전파 될 때 스님이 곧 사무라이 가 됐을 수 도 있지 않을까?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연구해 볼 만하다.)

 

아무튼  역사가 진행될 수록 오늘날에 이르러 '무사''사무라이' 는 같은 뜻으로 쓴다. (둘 다 양민은 지닐 수 없는 칼을 차고 다닌 지배 계층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고대에서 부터 '덴노'라 부르는 천황이 있지만 천황이 직접 정치에 관여한 것은 드물었다.(야스카 시대:우리나라 삼국시대와 메이지 유신이후 약간 시대만 관여)

대부분의 역사에는 각 지방의 호족이나 영주가 그 지역을 다스렸다.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를 '' 이라고 부르는데 그 번에 속하는 모든 백성들을 영주가 통제해야 했다.

'' 의 계급, 즉 무사 계급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 준비를 해야 했고, 나머지 농,,상 계급은 자기 신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했다.

농민, 기술자, 장사꾼은 일생동안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살지 않으면 그냥 사무라이 한칼에 죽음을 맞이 할 뿐이다.

신분제는 사회의 근간이 되는 것이고 계급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칼을 찬 사무라이들이 엄격히 통제를 한 것이다.

엄격한 신분제에 대해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따돌림은 곧 죽음이다.

일본인들이 단합이 잘 된다고 하는게 이런 문화 때문이다.

 

 

우동집 아들은 대를 이어 우동을 만들어야 하고, 두부를 쪄야 하는 사람은 대를 이어 두부를 쪄야 하고, 대장장이는 하기 싫어도 대장장이 노릇을 대를 이어가며 해야 했다.

자신은 업종이 안맞아 하기 싫다고 어디로 도망을 칠 수도 없다.

자신이 속한 번 외에는 허가 없이 다른 번으로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어기면 바로 사무라이 한테 한칼에 제거 된다.

그러니  뭐든 대를 이어 한 업종만 파고 드는데 장인이 안 될 수가 있나?

예전엔  목숨을 담보로 한 분야의 달인이 되는 것이 이제는 전통이 되어 버렸다.

 

사무라이한테  칼 맞아 죽기 싫으니 당연히 사무라이 앞에서 '하잇! 스미마셍! ' 외치며 머리 숙이고 바로 납짝 절을 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인이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이유도 칼 맞아 죽지 않을려고 어쩔 수 없이 나온 행동이다.

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지금 까지도 달인이나 장인들의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다 사무라이 문화 때문이다.

 

 

얼마전 작고한 일본 만화가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 볼을 보면 등장 인물들의 '전투력 측정' 이 나온다.

먼저 싸우기전에 스카우터 라는 전투력 측정기를 끼고  상대편의 전투력을 측정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내가 학창시절 처음 접했을 때는 굉장히 신선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만화 속의 이런 모티브도 일본 계급사회의 산물인 것이었던 것이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실력의 강함을 쌀 생산량으로 나타내었는데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400만섬, 마에다 가문 102만섬, 모리 가문 100만섬 ,다테 마사무네 100만섬 영주라 표현했다.

1섬은 현대의 기준으로 150키로, 만섬은 약 200~250명 규모의 병사를 키워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쌀 생산량이 곧 전투력이 되는 것이다.

이걸  통해 보면 전투력 측정은 만화에만 나오는게 아니라 이미 센코쿠시대(전국시대) 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제는 장인 문화와 예절 문화을 탄생 시켰고 오늘날 오타쿠 문화 까지 탄생시킨 셈이다

그  사무라이 문화의 근간은 어쩌면 불교 와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내 개인적인 견해이다.

 

이번에 읽은 책<일류의 조건>은 닛뽕색이  강한 자기 계발서 이지만 일본인들의 장인 문화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니 나름 재미 있게 읽었다.

책을 덮고 생각해 보니 일본에서는 장인 정신을 나중에 불교의 선에서 말하는 선의 경지로 승화 시킨면이 있는 것 같다.

다도(茶道)'다선일체(茶禪一體)', 검도(劍道)'검선일체(劍禪一體)'  같은 그런 말들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달인이 된다는 것은 숙달의 깊이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고 그것은 평상시 수행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에서는 '무엇이든지 깊어지면 선이 된다' 고 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달인의 경지는 그래서 선의 경지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리카와 아오이가  예능에서 보여주는 달인의 경지를 훔치는 능력은 새삼 참 부럽다.

 

훔치려면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는 보는  눈이 먼저 있어야 한다.

당나라때 한유(韓愈:768~824) 라는 사람이 쓴 글에 이런 문장이 있다.

<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 (세유백락,연후유천리마 ) 세상엔 백락이 먼저 있고 난후 천리마가 있다.

千里馬常有,而伯樂不常有(천리마상유,백락불상유)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지 않다.>

 

백락은 천리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천리마는 일반말과 달라서 똑같은 양식을 줘서 키우면 안된다고 한다.

일반말의 몇배에 해당하는 먹이를 먹이고 공을 들여야 한번에 천리를 뛸 수 있는 말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천리마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천리마는 일반말과 섞여 있어 어느게 천리마 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천리마는 항상 있어 왔지만 그 천리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항상 있질 않다는 뜻이다.

어쩌면 훔치는 능력 보다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는게 우선 순위에 둬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메뉴얼을 넘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훔쳐서 체화해야 한다. - P35

요약의 기본은, 핵심을 남기고 그 외의 주변 요소는 과감히 ‘버리는 것‘ 이다... 무작정 쳐내는 것이 아니라, 남겨둔 핵심 속에 어떤 형태로든 녹여,버려지는 요소에도 가치를 부여 하는것, 이것이 요약의 가장 이상적인 요약이다. - P62

전혀 다른 상대의 기술을 경험하면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관계는 단순히 주고받는 관계 이상으로 창의적인 관계다. 이 관계 속에서는 서로의 스타일이 더욱 명확해진다. - P167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선명하게 의식하면 숙달에 이르는 데 가속도가 붙는다. - P219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식 조각‘의 양, 즉 의식이 많고 적음이라고 생각한다..... 초능력이란 집중력. - P222

달리기와 식사와 글쓰기, 그 모든 것들이 ‘크로스‘해 있다는 사고방식이 있으면, 실제로 그것들이 가지는 연관성 이상으로 숙달을 촉진하게 된다... 움직이든 달리기든 반복해서 그 리듬을 몸에 스며들게 만들어 그것을 글쓰기에 활용한다. 독자의 신체가 작가의 신체에 동조 하기도 하고 호응하기도 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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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코드 (특별합본판) - 재능을 지배하는 세 가지 법칙
대니얼 코일 지음, 윤미나.이지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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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탤런트 코드 THE TALENT CODE (지능을 지배하는 세 가지 법칙)

지은이: 대니얼 코일 , 옮김이: 유미나 이지민

   : 포기하지 않는 마음

 

 

 

1912년 미국 육군 항공대 소속의 조종사 14명중 8명이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의 비행기 조종사들은 조종 실력보다 운에 맡겨 놓고 비행을 했다고 보면 된다.

1934년 겨울, 미 육군 항공대는 항공 우편을 운송하다 한 달 사이에 9번에 이르는 사고가  나면서 유능한 파일럿 들이 죽어 나갔다.

그 시절 조종사의 능력은 만들어 지는게 아니라 타고 나는것 이라 믿었다.

실제 비행 훈련을 받을때 멀미 나지 않고 루프와 롤 훈련을 잘 마치면 훌륭한 조종사가 되리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25퍼세트나 달하는 조종사의 사고 사망률을 낮출 수는 없었다.

당시 대통령 루즈벨트는 '도대체 언제 항공 우편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 하냐' 면서 항공대 사령관을 문책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었을까?

 

 

 

이 책<탤런트 코드> 는 유튜브에서 박문호 박사의 추천으로 구매하여 읽게 된 여러권의 책들 중에 한권이다.

이 책은 저자 '대니얼 코일'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능, 탤런트를 어떻게 점화하여 폭발 시키는지에 대한 법칙을 소개하는 책이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 되는 집단들, 예를 들어 러시아의 테니스 훈련소, 브라질의 축구 교실, 뉴욕의 허름한 음악 학원, 카브리 해의 작은 섬등을 찾아 다니며 그들의 재능에서 발견한 공통 분모를 소개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이 가진 재능의 꽃이 피는 조건을 뇌 과학과 연결하여 여러 일화를 통해 제시한 작가의 통찰이 돋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두가지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

첫째, 뇌에는 '미엘린'이란 신경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과 둘째는 앞서 항공 우편 연쇄 살인 사건을 어떻게 해결 했는가에 대한 답이다.

 

먼저 미엘린은  뇌속에서 신경 섬유를 감싼 절연 물질로 전선의 피복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전선이 두꺼울 수록 전기 신호 전달이 빨라지듯이 미엘린이 많을 수록 뇌의 신경 섬유는 두꺼워져 전기 신호의 속도는 빨라지고, 강도는 쎄지며, 또한 정확하게 전달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뇌속에 초고속 광케이블을 설치 하는것과 같은 뜻이다.

그래서 미엘린은 한마디로 쓰면 쓸 수록 더 빠르고 강해지며 정확하게 만드는 절연 물질인 것이다.

모든 훌륭한 운동 선수들은 훈련을 통해 미엘린 층을 결과적으로 두껍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훈련을 해야 미엘린을 많이 생성시킬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루즈벨트가 고심했던 '항공우편 연쇄 살인사건(?)' 을 어떻게 해결한 것과 연결 된다.

 

 

 

세계 최초 무착륙으로 미국에서 파리로 대서양 횡단 비행(1927) 에 성공한 '찰스 린디버그' 의 이름을 따서 당시 조종사의 운빨에 의한 이착륙 실력을 지칭하여 '럭키 린디' 라 불렀다고 한다.

운이 없는 조종사들은 항공 우편배달중 속절 없이 죽어 나가는 중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게 된다. 마치 가제트 형사가 범인 잡듯이...

찰리 채플린의 배다른 형제 시드니 채플린에게 50달러 수업료를 주고 비행 기술을 배운 '에드윈 링크' 라는 사람이 만든 모형 비행기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이 모형 비행기는 마치 놀이 기구의 탈 것과 같은 형태로 사람 한명 탈 수 있는 공간에 실제 비행기 계기판과 비행기 주요 부품을 우겨 넣고 만들어 냈다고 한다.

처음엔 육군 당국으로 부터 아이들이 타는 조잡한 놀이 기구 취급을 받다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갑자기 파일럿 훈련용으로 수요가 급증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링크 비행 트레이너 기구' 라 불리게 된 이 기구를 통해 조종사들이 비행 조종 기술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기구를 통해 조종사들은 수 없이 많은 모의 비행 연습을 할 수 있었고 50만명이라 숫자의 파일럿을 양산 시켰다.

결국 이런 결과로 육군 항공대는 '미 공군' 으로 정식 승격하게 되었다.

에디윈 링크는 그의 공로를 인정 받아 이후 전투기, 폭격기, 아폴로 달 착륙선에 사용하는 모든 조종 시뮬레이션 기구 계발 까지 참여 하게 되었단다.

 

 

여기서의 핵심은 링크 트레이너 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심화 훈련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재능을 계발 시킬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 음악, 예술 분야 등 인간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깊이 있게 훈련하는 것이 곧 미엘린을 강화 시키는 지름길 이란 것이다.

이는 미엘린이 곧 재능이 되는 것이다.

연습에 또 연습, 그리고 실패에 또 실패, 다시 또 연습 이걸 그냥 반복 하는것이다.

그렇게 반복 훈련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스위 스팟' 지점을 찾게 된다.

이 지점을 찾게 되는 순간 점화가 되어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재능은 폭발하게 된다.

 

 

 

저자는 재능 발현은 훈련 장소가 허름해도 상관없으며 오직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세분화 해서 연습 하면 된다는 것이다.

브라질 축구가 풋샬 훈련을 통해 세계적 선수를 배출하고 허름한 테니스 코트에서 공도 없이 정확한 자세만 반복 연습하는 러시아 선수들, 카브리해의 외딴 섬에 사는 큐라소 출신의 시골 리틀 야구단 일화등을 통해 탤런트의 코드의 법칙을 설명 한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탤런트 코드란 오직 반복 연습이다.

세상엔 자고 일어나니 하루 아침에 초능력이 생기는 마법같은 기적은 없다.

이는 또 다르게 말하면 재능을 믿는게 아니라 반복 훈련을 믿어야 된다는 뜻이 된다.

 

2009년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쿨 우승자 '츠즈이 노부유키' 라는 사람이 있다.

선천적으로 소안구증을 가진 시각 장애인이 정상인도 참가하기 어려운 세계적인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노부유키는 3살때 장난감 피아노로 치다가 그의 피아노 재능을 부모님에 의해 발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능이 있다고 해도 시각 장애인인 노부유키는 악보를 전혀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피아노를 배울 수가 있었을까?

그는 레슨선생님을 통해 받은 점자로 된 악보를 먼저 읽는다고 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왼손으로만 악보의 내용을 쳐서 녹음을 하고, 또 이어서 오른손으로만 연주한 음을 녹음한 후 노부유키에게 전달 했다고 한다.

노부유키는 그 각각의 녹음을 듣고 그대로 따라 치는걸 연습을 한다. 이때가 정상인의 입장에서는 겨우 악보를 본 것이나 다름 없는 단계가 된다.

그렇게 노부유키는 각각의 손으로 연주를 숙달한 이후에는 다시 왼손 오른손을 합쳐서 비로소 양손으로 연주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가 한 곡을 배우려면 보통 재능이 있는 사람이 습득하는 수준보다 3배 이상의 연습을 하는 셈이다.

이건 재능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레벨이다.

 

그리고 2022년 반 클라이번 우승자 '임윤찬' 은 단지 2마디를 익히기 위해 7시간을 연습 했다고 한다.

그는 첫 건반을 누를 때 심장을 강타하지 않으면 그 음을 다시 반복해서 친다고 했다. 자신의 심장을 강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겨우 다음 건반을 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장을 강타라는 수준이라니... 말도 안되는 비유다.... 상상이 안가진다.

, 이건 또 어떤 레벨인가?

결국 역대급 천재들도 사실 반복 연습 밖에 답이 없다는 것 인가?

 

성경에는 한 달란트(TALENT) 를 땅속에 파뭍고 주인을 기다린 어리 석은 종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원래 탤런트는 달란트에서 나왔다.  달란트는 본래 유대인들의 화폐 단위를 말한다.)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며 자신의 종들에게 5달란트, 2달란트, 1 달란트를 맡긴다.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장사를 해서 각각 10달란트 4달라트로 2배의 이익을 얻게 된다.

반면에 1달란트를 받은 종은 잃어 버릴까 두려워 그걸 땅 속에 파뭍고 주인이 올 때 까지 기다린다.

여행길에서 돌아온 주인은 이익을 늘린 2명의 종에게는 칭찬을 했지만 땅속에 달란트를 묻었던 종은 게으르고 사악하다면 내 쫓아 버렸다.

그리고는 쫓겨난 종이 가졌던  1달란트를 10달런트를 가진 종에게 줘 버린다.

 

여기에서 성경의 다른 의미로 달란트는 화폐 단위가 아닌 우리가 아는 재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달란트는 숨기지 말고 달란트를 적극 활용해서 성장하라는 뜻으로 해석 가능 하다.

즉 재능은 숨기는게 아니라 찾아서 써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책에서 언급한 신경물질 미엘린 하고도 상통한다.)

 

이번생에는 안 될 것 같아 보이는 나의 배드민턴 A조 승급 목표.

어쩌면 할 수 도 있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금 더 세밀하게 나누고 또한 정확하게만 하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결국 포기 하지 않는 마음.

그게 바로 주장자를 세우는 것이다.

 

(선가(禪家)에서는 '너의 주장자가 있으면 내 주장자를 줄 것이것요.

네 주장자가 없다면 네 주장자를 다시 뺏을 것이다.' 라는 공안이 있다. 이는 자신의 마음 중심, 주장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인 종이 1달란트를 뺐겼던 것은 자신의 주장자를 갖지 못해서 였다.)

 

 

 

 

 

그대가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그것을 시작하라.
대담함에는 비범한 재능, 힘, 마력이 담겨 있다.
지금 바로 그것을 시작하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P5

먼저 악기를 튜닝하고, 그런 다음에는 여러분의 귀를 튜닝하세요...중략...
음정이 맞지 않는 현을 들으면, 신경에 거슬려야 합니다. 아주 많이 거슬려야 해요. 여러분이 느껴야 하는 건 바로 그거예요. - P99

시간이 부족했던 파인버그와 레빈은 부치 캐시디(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에 나오는 은행강도) 의 원칙을 따랐다. 다시 말해 필요한 것을 훔치기로 했다는 뜻이다. - P195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아이를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끌어 올리는 거죠. 그게 바로 코칭이에요. - P273

이소룡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번에 만 가지 발차기 연습을 하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나는 한 가지 발차기 연습을 만 번 하는 사람이 두렵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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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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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1984

지은이: 조지 오웰

   : 자오샹 하오! 오웰 시엔셩(早上好! 奥威尔先生) , 응답하라 1984!

 

내가 전해 듣기로 조지 오웰(1903~1950) 의 소설 <1984>는 전체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했다.

'빅 브라더' 가 텔레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감청하고 사상을 세뇌, 통제 하는 미래 사회를 그려냈다고 많은 평론가나 독자들은 조지 오웰의 미래 예측에 호평을 했다.

더구나 시대가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고 인공지능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자  조지 오웰이 예측한 디스토피아적 미래 사회가 정말로 현실화 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함께 존재 한다.

이렇게 <1984>의 명성에 대해서 드문드문 어릴 때 부터 들어 왔었지만 읽어 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언제가는 읽어 봐야지 하고 미루어 왔다가 이제야 비로소 책을 구매하여 읽게 되었다.

 

 

1984년 이라면 지금 기준으로 40년 전이다. 즉 현재 2024년 기준으로는 과거다.

하지만 소설 속에 1984년은 미래다. 오웰이 1948년에 책을 썼기 때문에 그 시간 기준으로는 겨우 36년 미래를 예측한 소설인 셈이다.

1948년에 내다본 미래1984년은 생각 보다 암울하다.

그런데 더 암울한 것은 그 내용에 대한 공감이 하나도 안됐다.

중간에 읽다 말다를 여러번 반복했다.

나의 문해력 문제도 한 몫 했겠지만 이렇게 까지 가독성이 안 좋을 줄 몰랐다.

그동안 들어 왔던 이 책에 대한 정보와 호평이 무색하게도 나에게는 전혀 와 닿지가 않았다.

 

 

먼저 이 책을 읽기전에 오웰의 <동물농장> 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1984> 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고 했는데 도대체 빅 브라더가 뭘 어쨌길래 다 들 그렇게 경각심을 가져야 된다고 했을까?

<동물농장> 처럼 미래 사회의 전체 주의에 대한 풍자나 비판를  우화식으로 풀어 낸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이 책, 내가 생각 했던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아예 읽기 자체가 싫어졌다.

대체 이건 왜 그런거지?

 

어쩌면 내가 실제로 경험한 1984년도의 현실과 소설 속의 1984년 미래세상 사이의 간극에서 느끼는 괴리감이 너무나 커서 그런게 아니 였을까?

내가 경험했던 현실속의 1984년 세상은 소설속 세상처럼  디스토피아 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세상이였다.

그 시절 나는 어린이 였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 하면 몇가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1984년도엔 미국에서  L.A 올림픽이 열렸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체 10위를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있었고 다음 올림픽이 열리는 1988년에는 서울에서 개최하는 걸로 확정이 되어 온 나라가 시끌벅적 했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국민은 국뽕에 취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의 새나라의 어린이인 나는 우리나라가 제일 좋은 나라라고 생각 했다.

TV만 틀면 맨날 뉴스 첫머리에는 '전두환 대통령은  어쩌구 저쩌구' 로 시작하고 올림픽에서 우리 나라 선수들의 감동적인 금메달 따는 장면에 감격했다.

그 시기엔 학교 가기전에  항상 꼭 '뽀뽀뽀'를 저녁 시간에는 미래소년 코난과 가족 오락관이 우리를 텔레비 앞으로 모이게 했다.

또 우리들 사이에서는 배추머리 아저씨의 '지구를 떠나거라~' 같은 유행어를 따라 하는게 당시 코 흘리게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현재의 나에게 1984년은 동심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지난 시절의 추억을 소환 했던 <응답하라 1988> 처럼 나에게는 '응답하라 1984' 가 되어 버렸다.

 

 

 

이 처럼 조지 오웰이 예측한 미래의 <1984> 와 현실의 1984년은 전혀 달랐다.

현실의 1984에는 빅 브라더는 존재 하지 않았고, 소설에 등장하는 전체주의 국가는 전 세계를 통 털어 중국, 소련, 동독, 북한 정도의 공산권 국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그들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무시 당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오웰이 예언한 1984 같은 미래세상은 오지 않았다.

이러한 오웰의 틀린 예언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 출신으로 세계적인 예술가 반열에 오른 백남준은 1984 1 1일에 그의 대표적인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는 당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통해 5개 국가를 동시에 연결하여 생방송으로 <굿 모닝! 미스터 오웰>을 진행 한다.

당시 미국에 거주 했던 백남준은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 등 5개 국가를 동시간 으로 연결하여 라이브 퍼포먼스를 내 보낸 것이다.

T.V 를 이용한 퍼포먼스는 오웰이 두려워 했던 텔레 스크린의 도청, 감시라는 악()기능이 아닌 '시 낭송, 무용, 락 음악, 행위 예술' 등을 통해 문화의 선()기능을 보여준 것이다.

, 문명과 기술의 발달은 인류를 감시하고 통제 수단이 되는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간의 연결, 그리고 소통, 마지막엔 화합을 이룬다는 메세지를 과거의 오웰에게 전달한 셈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드디어1984년이 됐네요. 우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네요.

당신의 걱정은 이제 끝났으니 이제 그만 미래는 우리에게 맡겨 두세요' 라고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 이 시대는 전세계로 라이브 방송을 송출하는게 너무나 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너도 나도 다 유튜브를 본다. 또 영상 하나 쯤은 혼자 찍고 만들고 세상 누구와도 공유하는 세상이 왔다.

수십억의 리틀 백남준이 연결된 시대가 온 것이다.

실제 1984년 백남준이 보여준 TV퍼포먼스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어린이 였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백남준의 이러한 시도는 미래세상에서 벌어질 다양성과 연결성을 보여준 또 다른 백남준식의 예언이 아닌가 싶다.

결국 오웰 예측한 소설속의 1984 미래는 확실히 틀렸다는 것은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한 마음이 드는것은 무엇 때문 일까?

 

 

<1984>에 나오는 주인공 윈스턴은 빅 브라더가 통제하는 오세아니아 가 싫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지켜보는 텔레 스크린 속의 수염 달린 빅 브라더가 싫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를 한다니...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을 말살하는 당의 통제 방식이 싫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거짓말, 모든게  다 거짓이다. 모든게 다 날조다.

이중사고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통제하는 빅 브라더 체제는 타도해야 한다.

빅 브라더를 배반하고 지하 세계에서 활동 중인 골든 스타인의 형제단에 가담하고 싶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런 자유를 찾아야 한다.

여기까지 보면 윈스턴은 철저한 혁명가가 될 것 같았다.

<브이 포 벤데타> 라는 영화속 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V' 처럼 민중과 함께 싸워 빅 브라더를 타도하고 당을 전복시켜 승리하는 형제단의 영웅이 되길 바랬다.

실제 역사에서 '가이 포크스(1570~1606)' 1605 11 5, 영국 국회의사당을 화약으로 폭발 시키려 했던 16세기 테러리스트였다.

가이 포크스는 당시 지배체제를 전복 시키려 했다.  웨스트민스터 궁을 통째로 날려 버릴 심산 이였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는 내부자의 밀고로 준비했던 거사는 결국 실패 하고 말았다.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V'의 상징이었던 승리(Victory)는 소설<1984>에서는 당의 선전용 브랜드로 전락했다.

'승리 맨션, 승리 담배, 승리 술, 승리 면도날' 등으로 초라한 물품에 붙혀진 '승리'란 이름은  당의 모든 선전은 거짓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도 형제단이라고 믿고 싶었던 '오브라이언' 에게 결국 변절 당하고야 만다. 또한 자신은 육체적, 사상적 유일한 동지나 다름없는 '줄리아'를 변절 하고야 만다.

고문과 세뇌를 통해 자신이 가졌던 신념은 모두 남김없이, 깨끗하게 지워져 버린다.

윈스턴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투쟁은 승리했다고 믿었다.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아니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라니?

 

도대체 왜 이런 결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의 소설은 '가이 포크스' 사건 처럼 윈스턴의 바람은 실패가 되고 말았다.

오웰은 환타지 소설같은 혁명을 하고 멋지게 성공을 하고야 마는 결말보다 승리의 역설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더 강한 메세지를 남겼다.

그렇게 보면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가이 포크스 일화의 성공 버젼인 셈이다.

어쩌면 오웰은 '가이 포크스' 의 실제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1984>의 결말은 과거 영국에서 발생했던 역사적 현실을 반영했고 또한 작가 자신이 윈스턴의 입장에서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론이라 생각된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면 '조지 오웰' 은 영국인이란 사실에서 실마리가 있다.

그가 작품을 쓴 1948년의 영국은 2차 대전 승리국중 하나였다.

영국은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였던 대국이였다.

오웰은 그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뱅골에서 태어 났다.

그는 영국식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국의 식민지 나라였던 버마(미얀마) 에서 경찰로도 활동 했다. 또 후에는 스페인 내전까지 경험한 이력도 지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나라 제국주의인 영국과 그의 식민지 사정을 누구 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제국주의가 어떤 수단으로 식민지를 다스리는 지를 몸소 겪은것이다.

남을 다스리려면 수단은 통제밖에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핍박했듯이 영국이란 나라도 그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당시 소련의 스탈린식 체제에 대한 오웰의 경계심은 또 다른 제국주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였을까?

그래서 오웰이 묘사한 빅 브라더의 모델은 사실 스탈린 모습이라고 한다.

 

오웰은 제국주의 , 전체주의가 싫었던 것이다.

자신도 제국주의에 속한 사람이지만 오웰은 작가적 양심을 지녔다고 보아진다.

나치즘의 광기를 보여준 히틀러의 충직한 부하 '아돌프 아이히만' 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인정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웰은 윈스턴의 마지막 모습에서 작가적 양심을 역설로 대답한다.

그냥 믿고 사는게 행복이고 승리라고. 그리고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고.

 

책을 덮고 나야 마지막 결말이 의미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점차 두려워 지기 시작한다.

단순히 1984년 이란 시간에 집착하면  그 시절 추억이나 굿모닝 오웰 같은 감정에 빠지게 된다. 오웰의 예언은 틀렸다고.

이 책이 시간이 지날 수 록 무서운 통찰이라 여겨지는 점은 '빅 브라더' 가 진짜로 우리를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주위의 수많은 CCTV ,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는 수많은 알고리즘, 내 편 아니면 전부 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정치, 빈부의 격차, 가짜 사이비 뉴스의 범람, 그리고 사상을 통제 하는 언론들등 소설속의 빅 브라더와 골드 스타인이 바로 우리 곁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질문해 보자.

2더하기 2 4라고 말 할수 있는 자유를 우리는 과연 가지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내가 속한 집단이 4가 아닌 답을 한다면 나는 집단의 의견에 거역 할 수있는가?

내 적이라고 규정한 집단이 옳은 소리를 했어도 난 그 의견에 동조 할 수 있는가?

더 쉽게 말해 내가 지지한 당이 사실 틀렸어도 난 따라야만 하는가?

나는 과연 떳떳하게 세뇌 당하지 않았다고 자신 할 수 있는가?

보이고 들리는 정보에 휘둘리지 않을 자유가 나에게 진정 있는가?

소설속 마지막의 윈스턴 처럼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 했다고 믿으며 사는 것은 아닌가?

 

니체(1944~1900)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너의 영혼이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그러나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길 자처한다면 질문하라'

<1984>를 통해 오웰이 던지 메세지는 희망을 전해 주는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려했었고 실제 역사 1984년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응답하라 1984' 같은 추억을 떠올렸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 로 그가 그린 세상이 오질 않았다고 자신 했다.

그러나 다시 40년이 지난 오늘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우리는 또 다른 불안을 느낀다.

결국 오웰이 진정 두려워 했던 것은 자유가 없는 미래였다.

그래서 그의 두려움은 이제는 현재 우리의 두려움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2더하기 2 4 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자유.

이미 대답하기에 망설여 지는 시대에 접어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그가 말 한 1984는 지났지만 우울 하게도 빅 브라더는 그 날 태어났다.

어쩌면  우리는 윈스터와 같은 결말이 되지 않기 위해 다가 올 미래에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써야 될 지도 모르겠다.

오브라이언은 분명히 ‘우리는 어둠이 없는 곳에서 만날 거요.‘ 라고 말했었다. - P40

모든 역사는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쓰는 양피지 위의 글씨와도 같은 것이었다. - P59

위기의 순간에 싸워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육체라는 사실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 P142

그들은 당이나 국가나 이념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충실했다. - P230

우리 사회에서 현재 어떤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른다. - P295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스스로 당이 될 만큼 당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그때는 불멸의 전능한 존재가 된다네. - P365

마지막 까지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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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2
헤르만 헤세 지음, 박지희 옮김, 김선형 해설 / 코너스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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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수레바퀴 아래서

지은이: 헤르만 헤세

   : 방황, 그 순수한 몸부림, 새로운 세계의 시작

 

 

헤르만 헤세(1877~1962)의 소설에는 헤세 본인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헤세의 소설은 자전적 성장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헤세가 중점을 둔 성장은 어린이 시절에서 청소년으로 다시 청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 내고 있다.

시간을 달리하며 내놓은 그의 소설에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조금씩 변주해 나간다.

유년 시절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던 마음과 청소년기의 질풍노도의 감정, 그리고 그시기 폭풍우를 견뎌낸 뒤 어느덧 불쑥 성장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헤세 본인의 어린 시절에서 어른이 되는 경험이 단순히 보면 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방황과 성장 이란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 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헤세는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을 받은게 아닌가 싶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내가 읽은 헤세의 작품중 읽었던 순서로 치면 <데미안>을 먼저 읽었고 다음으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에 이어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다.

헤세가 이 소설들을 출간한 시점으로 보면 <수레바퀴 아래서> 1906년 헤세가 29살 때, <데미안> 1919 42살에 , <싯다르타> 1922 45살에, <유리알 유희> 1943 66살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이 작품들을 각각 읽을때는 미처 알아 채지 못했지만 이들을 전부 읽고 난 후 이 작품들 사이에는 연결점과 공통된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소설 작품들을 묶어 '헤세의 세계관' 이라 부르기로 했다.

헤세의 세계관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배움과 성장' 이라는 주제의식을 올곧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헤세 세계관의 출발은 <수레바퀴 아래서> 에서 시작하고 <데미안> <싯다르타>를 거쳐  <유리알 유희> 에서 완성을 이룬것으로 보인다.

헤세의 세계관을 분석한 공통된 구조는 이렇다.

첫째, 세계관 속의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은 순수하고 행복 했다.

둘째, 세계관 속의 주인공은 배움의 공동체(학교)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사춘기를 맞이 한다.

셋째, 주인공은 공동체 안에서 정신적 힘든 방황을 격하게 겪는다.

넷째, 그 모든 방황의 중심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주인공의 성향과는 완전히 다르다.

다섯째,  결국 친구를 통해 힘겨운 방황을 끝내고 성장하게 된다. 즉 어른이 된다. 또는 깨달음을 얻는다.

 

 

세계관의 틀에 대해서는 지극히 개인적 생각이니 당연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구조가 내가 본  4개의 소설에만 해당 되는 것이니 다른 헤세의 소설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수레바퀴 아래서>에 이에 어울리는 표현이 나온다.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같아 보여도 속은 다른 법이다.) 의 문구 처럼 헤세 세계관의 작품은 뭔가 다 비슷하게 닮아 있지만 다른점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관 속엔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강하게 투영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관 속에 주인공과 관계된 친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엔 친구와의 갈등으로 주인공은 방황하지만 결국 그 친구를 통해 배움과 성장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밴라트 와 헤르만 하일너,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와 데미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와 고빈다 , <유리알 유희> 의 요제프 크네히트와 플리니오 데시노리 등의  관계가 그렇다.

 

 

내가 보기엔 실제 헤세가 경험한 자신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소설화 하는 과정에서 본인과 친구의 관계를 좀더 극적으로 그려 내지 않았나 싶다.

즉 소설속의 주인공과 친구는 현실속의 헤세와 그 시절 헤세가 사귀었던 실제 친구 를 반영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설은 소설 이기 때문에 어쩌면 친구는 허상의 존재이고 본인의 또 다른 자아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주인공과 갈등하는 친구는 주인공 본인의 또 다른 자아 혹은 헤세가 이상화 시킨 또 다른 자기 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실의 우리는 한가지 고정된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우리의 자아는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는것이다. 항상 변한다.

현실의 나와 내가 추구하는 이상형의 나는 내 안에 공존하는 셈이다.

어쩌면 비록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에 나는 도달하지 못 할 수도 있지만 그 둘의 존재는 본래 하나 라는 것이다.

이게 심리학인지 소설적 장치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헤세가 추구하는 완벽한 인물상은 주인공 혹은 본인의 반쪽 자리 성향과 소설속에 나오는 반쪽 짜리 친구의 성향이 합쳐져야 완성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실과 이상의 대립은 결국 둘은 하나 라는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소설속에 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중에 배움과 성장은 딱 맞는 주제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출발하여 <데미안> <싯다르타>를 거쳐 <유리알 유희>로 완성 됐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헤세 본인이 나이를 먹어가며 실제로도 성장하고 깨달아 가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수레바퀴 아래서> 는 헤세가 29살에 쓴 작품으로 본인의 실제 경험했던 청춘의 시절과 시간적으로 무척 가까운 시기이다.

 

그래서 헤세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소설속에 가장 많이 녹아져 있다.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했고, 시인이 되고 싶었고, 자살 시도를 했으며 , 정신 치료를 받아야 했고, 또 기계공이 되야만 했던 자신의 모든 경험이 온전히 들어가 있다.

특히 헤세가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고민했던 죽음에 대한 성찰이 가장 진지했다.

그래서 <수레바퀴 아래서>는 수레바퀴의 상징으로 표현 되는 '바퀴 아래에 깔리면 죽는다' 는 표현이 복선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수레바퀴에는 위 아래가 없다.

바퀴는 지면에 닿아야만 위 아래가 존재하게 된다.

소설에는 모두 3개의 바퀴가 언급되어진다.

물레바퀴, 수레바퀴, 톱니바퀴.

이들 바퀴 모두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레바퀴는 순수한 어린시절의 동심, 수레바퀴는 죽음을 사색하는 고뇌, 톱니바퀴는 현실적인 삶과 타협을 해야 하는 심정을 상징 한다고 볼 수 있다.

한스 기벤라트는 3개의 바퀴를 순서대로 접하며 성장했고 이는 곧 헤세 본인의 상처 받은 그 시절의 아픔을 상징한 것이라 생각 된다.

 

결국 세계관 초기 작품인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 본인이 회상하는 아픔을 가장 많이  담아 냈고 42살에 나온 <데미안>에서는 그 시절 아픔을 치유 하는 시도로 풀이가 된다.

사실 <데미안>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시기의 헤세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시도를 한다.

소설 속의 '아프락삭스' 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이미 헤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승화 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 3년뒤에 나온<싯다르타> 에서 헤세는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붓다' 라는 인간 완성자를 향한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 한다.

싯다르타의 여정을 통해 헤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서기를 통해 결국 붓다가 깨달은 경지를 본인도 이루겠다는 의지를 표현 했다.

 

 

 

그리고 말년의 <유리알 유희> 에서는 앞서 경험한 모든 과정을 유리알 하나에 응축 시킨 경지를 보여준다.

<유리알 유희> 는 미래의 시점으로 동서양 모든 정신 문명의 최고 경지에 오른 인물 유리알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 의 전기를 쓴 것이다.

여기서 요제프 크네히트의 결말과 <수레바퀴 아래서> 의 한스 기벤라트의 결말을 비교 하면 참으로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하다. 즉 같으면서도 다르다.

겉으로 볼 때 주인공이 모두 물속에서 최후를 맞는 것은 같다.

그런데 한스 기벤트를 떠올리면 많이 아쉽고 동정심에 측은하기 까지 하다.  

하지만 크네히트는 아쉬운 마음 보다는 이뤄야 할 것을 이미 다 이룬 성자의 모습으로 승화가 되었다.

 

결국 헤세 본인이 방황 뒤에 오는 성장의 완성을 말년의 작품속에 이렇게 이루어 낸 셈이다.

방황을 통해 배움과 성장을 하고 결국 깨달음이란 가장 이상적인 경지로 승화 시킨 것이다.

 

 

 

우리가 경험 했던 모든 방황은 순수 했다.

방황속에서 순수는 때묻고 오염 되어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염이 아닌 순수의 또 다른 형태 였던 것이다.

그 모든 방황은 결국 우리가 성장하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 이었던 것이다.

새가 알을 깨고 나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 가듯이, 방황은 알을 깨는 과정 이었고, 수레 바퀴가 굴러가는 과정이었다.

멈춰진 수레바퀴 아래에 있지 말고 바퀴는 계속 굴려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윤회의 바퀴를 결국엔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방황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순수한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이제 방황은 기대가 된다.

또 어떤 세계를 맞이 하게 될 지...

헤세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로 들어 가는 문을 알려줬다.

방황, 순수한 몸부림, 그 끝에 새로운 세계가 기다린다.

 

 

 

 

Per aspera ad astra(시련을 거쳐야 성공 하리라)! - P109

Differendum est inter et inter(같아 보여도 속은 다른 법이다) - P123

마치 수레바퀴에 치인 길가의 달팽이 처럼 한스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약간 상처를 입은 채 촉수를 집어넣고 몸을 웅크렸다. - P175

어휴, 그만합시다. 당신이나 나나, 어쩌면 우리 모두 저 아이를 너무 소홀히 대했던 것 같지 않습니까?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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