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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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랭던 길키 저,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출판)를 읽고,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의 심연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를 대면하는 시기다. 우리가 고난이라고도, 환란이라고도 부르는 순간이다. 소스라쳐 뒤로 물러서거나, 없는 것처럼 무시해버리지 않고, 이를 정면으로 맞설 용기만 있다면, 반드시 그 심연으로부터 우리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 삶을 편리하게 만든 문명의 발달과 사회에 팽만한 구조적 악은 불행히도 우리가 그 순간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가 숨을 수 있는 여유까지도 충만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우린 좀처럼 그런 순간을 기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준비 없이 오는 것처럼, 고난 또한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어찌 보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우린 그 씀씀이를 관리할 수 있을 뿐, 정작 그 시간 자체를 조작할 수는 없다.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나는 그 경이로운 순간에도, 육신의 끝을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도, 시계의 초침은 매정할 만큼 미동도 하지 않고 동일한 속도로 무한을 향하여 째깍째깍 달려간다. 시간 안에서 살고, 시간 안에서 죽는, 결국 우리 인간은 시간의 굴레 안에 묶여 있는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말, 이십 대 중반의 랭던 길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도 타지인 중국 산둥 (위현)에 위치한 수용소에서 일본인의 감시 하에 자칫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2년 반을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미국 중산층에서 엘리트로 자란 그에게 있어선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기일지도 모를 시간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 곳에서 그는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민낯과 미래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오래되고 낡아빠진 수용소에는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서구인 남녀노소들이 천 명이 넘게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제한된 좁은 공간 안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종결을 기다리며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불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 집결한 모든 사람은 각자가 스스로 자신도 인간임을 직시해야만 했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수용소라는 한 배를 탄 구성원은 모두 동일한 계급장을, 아니 계급장을 모두 뗀 체로 맨 몸으로, 맨 인간으로만 존재하며 대우받는 존재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사람은 물론이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거나 돌리기만 하면 물이 쏴하고 나오는 화장실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변을 보고 난 후 배설물을 치워주는 사람도 없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도 없었으며, 권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허드렛일을 시킬 수도 없었다. 더 앞서 있거나 더 위에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더 뒤쳐지거나 더 아래에 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원점에 덩그러니 놓여졌던 것이다.


수용소 생활 전의 재력과 권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원점에 놓여졌다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전쟁으로 인한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된 입장 덕분에, 수용소 사람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더욱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룰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자들이 주구장창 얘기하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진보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같은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생기는 특별한 공감능력과 인간이 가진 도덕성과 합리성만으로는 문제의 발생을 모면하기엔 부족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넘어서는 보다 강력한 힘이자 인간 존재의 심연에 각인된 ‘이기심’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표현형이기도 하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자기의 유익에 의거해서 판단해 버리는 이기심. 랭던 길키 역시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통해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죄’야말로 본질적으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수용소 경험을 통해 배운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회에서 통용되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이다. 마침내 서로 이웃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고찰을 수용소 생활 초기부터 했던 것은 아니다.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중국에 왔었고, 철학이나 종교적인 믿음에 관련된 영적인 삶이라는 것의 우월성을 신뢰하고 있었던 그는 수용소 초창기 삶의 실제적인 문제들이 물질적이고 정치적임을 간파했고, 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경험과 기술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적이고 무한한 문제 해결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진짜로 필요한 도움이며, 종교나 철학은 오직 선호하는 사람에게만 필요할 뿐,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간 낭비라는 확신도 그는 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기술적인 지식과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결국은 도덕적이거나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기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인격의 실패로 인해 야기되었다. 도덕적인 건강함이 없다면, 물질적인 공급이나 혜택이 결여된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 랭던 길키에게는 수용소 생활에서 배운 가장 깊은 깨달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점철된 행동을 과감하게 하게 되며, 이후에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실체인 이기심을 합리화한다. 교육을 많이 받고 존경을 받던 사람이라면, 혹은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사람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랭던 길키가 목격한 바로는 오히려 그런 사람일수록 더 그럴듯한 말로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화했다고 한다. 위선을 행해서라도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까지도 인간은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와 자기 소유를 사랑하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과 그 이기심을 치장하려는 위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실재를 전제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 아니면 의지을 이용한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인간 내면에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며 선한 모습, 즉 희망이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발현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인간의 이기적인 본 모습, 즉 끊임없는 자기 사랑을 사실로 인정하는 대신,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과 지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반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모습일 것이다. 진짜 신앙은 자신이나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됨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랭던 길키의 머리를 어지럽혔던 문제, 인간의 도덕적 삶의 딜레마를 풀어준 가장 심오한 해답이기도 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옷으로 우리의 실체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입고 있는 보이지 않는 옷은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무게를 자각하고 있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옷이 몸과 하나가 되어 분리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정작 인간이란, 외압에 의해 억눌려진 상태가 되어야만 껍질을 벗고 실체를 드러내는 존재인 것일까? 그러나 그래서 그 외압도 결국에는 인생의 필요악임을 깨닫고 또 다시 불분명한 미래로 겁 없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


책을 덮고도 여전히 많은 생각이 내 마음과 생각에 충만하다. 인간으로서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칼빈이 그의 5대 강령에서 말한 인간의 전적 타락을 거짓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수용소라는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되게 된다면, 아니 수용소가 아닌 나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주 드러나는 나의 이기심과 위선의 모습에서도,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말문이 막히고 무릎이 꿇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래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 불가항력적 은혜를 더욱 감사함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귀한 경험이기도 했다. 인간의 실존적 자아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해 알고 싶어 액면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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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대화 - 일상에서 쓰는 평화의 언어, 삶의 언어
마셜 로젠버그 지음, 캐서린 한 옮김 / 한국NVC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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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아니란 건 알지만, 여기선 관행이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상관의 명령이기도 하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냥 그랬어.”

“나도 이러긴 싫지만, 학교 교칙에 따라서 나는 너에게 정학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어.”

“성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일이 너무 싫지만, 교육청 방침에 따라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위의 문장들의 공통점은 책임을 부정하고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마셜 B. 로젠버그는 그의 책 “비폭력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바꿔서 말해보라고 제안한다.


“나는 이것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알지만, 내 직업을 유지하는 것이 더 큰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어.”


그러나 우리들은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책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린 알아야 한다. 우리들이 은연중 저지르는 불의에 대한 무책임한 방관이나 암묵적 동조는 나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전범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의 아이히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비폭력 대화” 중 제 2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왔다. 만약 인류의 파괴 기술이 점점 더 발달해서 언젠가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다. 그 잔혹함이 일으킨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가져올 보복 때문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일반 대중의 온순함과 책임감의 결여, 그리고 모든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굴한 순종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끔찍한 일들, 또 앞으로 일어날 더욱 전율할 만한 사건의 원인은, 이 세상 여러 곳에서 반항적이고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


일상에서 만나는 의외의 사건 (아내와의 다툼, 김재수 교수와 허현 목사님의 포스팅)으로 내 손에 들어온 책, “비폭력 대화”. 기존에 알고 있던 폭력에 대한 정의가 바뀐다. 정말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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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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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짧은 책은 우리를 1세기 로마로 데려간다. 푸블리우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우리는 브리스가 아굴라의 가정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의 삶의 예배에 참여하게 된다.


아굴라를 인습에 매이지 않는 유대인으로 소개받은 푸블리우스는 아굴라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이를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다. 그는 아굴라의 과거 삶의 경험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동행했던 글레멘드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의미 있는 대답을 듣게 된다. 아굴라가 그 동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인 이유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이유는 글레멘드와 유오디아가 고린도에서부터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와 함께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새로운 관점은 예수 복음을 의미했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 삶의 예배에 마침내 푸블리우스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 가치관과 세계관, 이것은 칭의와 성화의 개념을 넘어 그것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좀 더 실제적이고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방인인 현재의 우리보다 유일신 하나님을 익히 알고, 로마에 속국된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 중 하나였던 아굴라가 세계관의 변화를 겪고 이를 삶에서 반영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무릎이 탁 쳐졌다. 그 모습이 바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며 오늘을 그날처럼 살아가며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평신도 전도자의 모습이라는 생각까지 진행이 되자 난 한동안 책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 일행이 브리스가 아굴라 집에 도착하여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즐기고 있는데, 아굴라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끌었다. 식사 준비를 하러 식당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푸블리우스는 이 분위기 전환을 예배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글레멘드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실제로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형식만 남은 가식적인 제사와 예배를 겨냥한 듯했다.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그것이 예배인지 삶인지 분간이 잘 안될 정도로 신앙과 삶이 일치가 된 모습,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할, 그리고 보여져야 마땅한 모습일 것이다.


한편, 이해하지 못해 브리스가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정도였지만, 그 모임에 처음으로 참석한 푸블리우스는 식탁에서 보통 최고 귀빈을 위한 자리에 앉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식사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는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상황을 여러 번 포착한다.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가 신분상 차이가 분명히 나는 사람들을 맞이할 때 차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분상 식탁에서 그의 자리에 앉아야 할 아리스도불로와 그의 종 루시아와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모임의 모든 참석자들이 동일한 발언권을 가지고 열띤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광경에서도 푸블리우스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식사와 교제 가운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던 성 만찬에서 푸블리우스는 예수 복음을 듣게 된다. 몸이 살려면 빵이 필요하듯 참 생명을 경험하려면 신의 독생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굴라는 이어서 그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얘기했고, 그분은 지금 모임에 함께 하신다고 기도했다. 푸블리우스는 아굴라의 기도 중 그 내용도 처음 듣는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든 일이 바로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졌고 또 평범한 목소리로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단순하고 실제적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여태껏 생각하던 신에 대한 방식을 포함한 그 자신의 세계관과의 충돌을 한번 더 경험하게 된다.


아리스도불로의 종 루시아의 신분 해방에 대한 토론이 뾰족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무렵,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바울이 예전에 보낸 편지 속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낸다. 주인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종들도 본질적인 면에서는 실제로 자유인임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였다. 덕분에 토론은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대화가 바울의 판단 근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또한 푸블리우스조차 자신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생겼다고 고백한다.


이후에 진행되었던 순서에서도 푸블리우스는 자신이 짐작했던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친구 글레멘드 역시 아굴라처럼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쓰며 기도하는 모습이나, 그 기도의 내용 중 '세상은 우리에게 온 신의 선물'이라는 말에서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너무나 당연시했던 것들이 모두 신의 손길에서 온다는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책은 푸블리우스의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처음 만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단지 첫 만남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하나님나라 세계관과의 첫 만남이며, 그로 인해 아무런 압력 없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변화의 기운이 싹트는 모습을 그리는 책이다. 푸블리우스는 책의 끝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상하게도 그들 (이미 예수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게 되고 삶에서 교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브리스가 아굴라 부부를 포함한 그 일행)에게는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초청받은 다음 주 모임에 갈지 안 갈지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가게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나라,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현재 우리들의 예배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가상의 이야기로 보여주며 이 책의 저자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난 제 2의 푸블리우스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 아니 교회인 나 자신으로부터도 같은 메시지를 받길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것은 객체지향적인 전도 방법을 연구하거나,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커다란 교회당을 건축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열심을 내거나, 언제나 새신자 환영 코스프레하듯 가식적인 스마일을 지으려고 노력하거나, 마치 아무런 근심이 없는 척하며 가짜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신앙을 살아내는 것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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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그날처럼 - 어느 치과의사의 일터신앙 이야기
이철규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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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읽는 속도에 비해 3배 정도 느리게 읽었다. 그만큼 책을 꼭꼭 씹어가며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작은 꼭지는 평균 2-3페이지 정도로 짧고 쉽게 쓰여져 있고, 공감이 가는 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져 페이지를 휙휙 넘기려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책을 가만히 덮고 묵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쉼호흡을 하고 책을 폈다. 저자의 삶에 녹아 있는 하나님나라를 충분히 느끼고 싶었고, 가능한 많은 것을 배우고 내 삶에 적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자를 존중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여겼다.

나 역시 직장 현장에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하나님백성으로서 늘 신앙과 일치하는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인간으로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심정이리라 생각한다. 늘 마음 한 켠에 부담처럼 존재하면서도 딱히 정답이 없는 문제처럼, 아마도 나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백성들에게 이 문제는 일종의 아킬레스건 같은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여정에 접어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인간의 존재와 창조의 섭리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점점 더 깊게 만드는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에 뾰족한 정답이 있다고 말하진 않는다. 삶과 신앙의 일치는 공식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그러한 문제가 하나님백성의 삶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치과 의사라는 컨텍스트에서 작성된 하나의 모범 답안 정도가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찾아 오신 하나님을 볼 수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따스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책을 관통하는 큰 물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신학적 배경의 중추를 이루는 요한 계시록에 의거한 종말론적 삶과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 “오늘을 그날처럼”도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미래의 관점으로 현재는 사는 것. “여기서 (Here)” “지금 (오늘, Now)” 자신의 일상적 삶이 “거기서 (There)” “그날 (Then)”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속함을 드러내는 것. 바로 하나님백성이 추구해야 할 사명이자 삶과 신앙의 방향일 것이다. 신앙과 일치된 삶은 바로 여기에서 근거한다.

저자의 진료실에 찾아온 하나님의 통치가 저자의 삶 전체에 임하게 되는 과정은 성령의 내주, 인도하심에 의한 점진적인 변화 (연속성)와 순간순간의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은 은혜 (불연속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의 삶에 개입하심을 (결국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실 수 있도록 그의 삶의 쓴 뿌리들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 고난으로 다가왔으나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일련의 과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을 지금도 부단히 해나가며 그의 삶 전체가 변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동의하게 될 것이다. 아,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다. 저자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큰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보다도 그의 안에 있는 예수님이 보인다. 내 안에도 같은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무뎌졌던 내 맘을 다시 감사함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음을 물론이고, 나아가 나도 내 현장에서 믿음을 살아내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신앙과 일치하는 삶이란 일회성의 사건이 아닐 뿐더러 그 결과를 우리의 삶에서 오감으로 늘 체감할 수 없기 때문에 자칫 그런 삶을 추구하면서 낙심할 수 있는데, 저자 역시 그런 과정을 겪어가며 하나님나라를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연습이라는 평상시 나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명제가 한번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난 답이 없는 인생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해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믿음과 생활은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구현된다는 문장이 맘에 꽂혔다. 사랑 없는 배려는 통제나 이해 타산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역으로 배려 없는 사랑 역시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말도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또한 미덕과 성품의 근육을 훈련해 강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당면 과제라는 사실도 아멘으로 화답했다.

공평과 정의를 비롯한 모든 성서적 가치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어 현존하는 미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왔다. 종말론적 윤리가 제거된 인간의 종교성은 결국은 소비주의와 신분 상승의 도구 외에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다는 말에도 깊숙히 찔림을 받았다. 또한 종교와 생활로써의 기독교는 있을지 몰라도,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신앙으로써의 기독교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복음의 공공성을 묵상하고 있는 요즈음 이철규 박사님의 “오늘을 그날처럼”은 내게 적시에 온 단비와도 같았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라는 답의 힌트를 크리스토퍼 라이트로부터 배웠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김근주 교수님으로부터 배웠다면, 이철규 박사님은 나에게 그 배움이 이론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현장에서 구현되어짐을 보여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나도 과학자라는 컨텍스트에서 하나의 실례가 되고 싶다.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행운으로 말미암는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직한 성실과 일상에서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그저 과학자의 삶에도 적용하는 일이 내가 할 몫이다. 그 열매가 어떻든 옳은 과정을 밟기를 다짐한다. 그 과정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과학자. 바로 내가 되길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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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공공성 -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
김근주 지음 / 비아토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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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처음으로 공의 (쩨다카)와 정의 (미슈파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은 창세기 18장 19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의와 정의는 한 사람, 아담의 반역으로 시작되어 죄악에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부르시고 보내시며 시작된, 소위 ‘하나님의 선교’에서의 핵심 포인트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보내시고 함께 하심은, 하나님을 믿으면 단지 높아지고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표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통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복의 목적지는 만민이지 아브라함이나 그 민족이 아니다. 즉,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빠른 출세나 성공과 같은 사적인 욕망의 채워짐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복음은 처음부터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사적인 소원성취나 문제해결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복음은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가 아닐 뿐더러, 부적도 아니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이 선택되었다는 점이 자칫 운좋게 선택받은 사람만 복을 받을 수 있고, 그 복을 받은 사람은 구원받게 되고 남은 인생은 어차피 장망성과도 같으므로 대충 고난과 핍박을 받다가 죽을 때 어딘가 있을 천국으로 건져지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한 사람과 한 민족을 선택하심으로 그 사람과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했고 만민 가운데 있으면서 만민과는 구별된 하나님백성이 되어야 했다. 그 하나님백성이 주어진 현재를 살아야 할 자세가 바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인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이며 그렇게 살아갈 때에 거룩함과 평안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거룩함과 평안함은 만민에게 보여지게 되어 있고 여호와를 높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백성의 선교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 인간과 대화하시고 함께하시며 일상 속에 깃든 우리들의 공의와 정의를 행함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김근주 (Keunjoo Kim) 교수님의 신간, ‘복음의 공공성’을 읽으면서, 창세기 18장을 다시 읽었다. 그러면서 눈여겨 본 부분이 있다. 공의와 정의가 첨 등장한 19절 바로 뒷 절인 20절에 곧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죄악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다는 점이다. 비신학자이고 성경 전체를 꿰뚫는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단정짓긴 어려우나, 문맥상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는 사건에서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공의와 정의를 보길 원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소돔을 향해 중보하는 아브라함의 기도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롯이 나그네로 등장한 두 천사를 대접하는 모습에서도 공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는 폭력적이고 자기 유익만을 위하는 소돔 사람들을 멸하시는 부분에서도 정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동성애가 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주요 성경본문이라는 점은 모두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배웠었다. 그러나 오늘 꼼꼼히 창세기 18장과 19장을 여러번 읽어봐도,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동성애가 죄라거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하셨다고 하는 해석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는 지가 더 주요한 포인트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고, 소돔과 고모라 전체 사건은 여호와의 공의와 정의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만약 수능 언어영역이나 본고사에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본문으로 던져주고 저자의 의도를 쓰라고 하는 문제가 나왔다면, 난 서슴치 않고 동성애 문제보단 나그네와 공의와 정의에 무게를 두고 답을 쓸 것이다.

동성애가 죄라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도 무시하고 차별하고 악한 사람으로, 아니 인간 이하로 멸시하는 행위는,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또 성경을 근거로 해서 죄악시하는 행위에 대해선 난 동의할 수가 없다. 만약 중세시대였다면 지금처럼 동성애자들을 벌레 취급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성애자들을 화형시키자고 주장하고도 충분히 남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서 소돔 사람들의 악함을 본다. 그들은 선과 악을 스스로 구분짓고 (이것은 소위 원죄사건이라 부르는 창세기 3장 사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라고 한다), 그 구분지어진 악을 제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판결권과 그 판결을 집행하는 집행권은, 미안하지만 당신들에게 없다.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건 당신들 자유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는 악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당신들의 실제 무게중심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악을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고 (제거할 권한도 능력도 없으면서), 당신들의 관점에서 본 악을 제거하여 당신들이 정한 선을 지키려는 행위에 있을 뿐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중심의 자기애를 의미하는 원죄사건과 똑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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