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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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과 성실의 맥락.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자신의 소유가 아닌 집을 자신의 집보다 더 완벽하게 관리해야 하며,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보다도 집 주인을 더 우선시하여 섬겨야 하는 직업. 타인을 섬기도록 운명지어진 직업. ‘집사’라는 직업에 가장 어울리는 두 단어가 있다면, 충직과 성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섬겨야만 하는 주인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거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게다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까지 있을 경우, 이런 주인을 섬기는 집사의 충직함과 성실함은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러한 맥락에서도 여전히 충직함과 성실함이라는 덕목이 ‘위대한 집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대한 집사라는 개념이 과연 상황에 독립적일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은 평생 달링턴 경을 섬기며 그의 저택 (달링턴 홀)을 관리했던 총 책임자, 스티븐스 집사다. 그는 어릴적부터 집사였던 아버지를 통해 진정으로 위대한 집사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직접 보고 들으며 배웠던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에겐 위대한 집사의 자질일 수도 있는, 화려한 언변과 박학다식을 그저 집사의 부수적 능력으로 여기는 과감함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자질보다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충직함과 성실함에서 집사의 위대함과 품위를 찾는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도 집사의 본분을 다하느라 임종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아니 함께 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사람이다. 지독스레 충직하고 악착같이 성실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때의 일을 회고할 때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불효가 아닌, 가족까지 희생하며 본분을 다했던 집사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기억한다. 그는 실로 자타가 공인하는 위대한 충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함도 주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냐에 따라 훗날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제아무리 자신을 스스로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 결코 합리화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결국 집사는 주인의 그늘 아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영국, 때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국이 히틀러가 이끈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묻는 시기 즈음이다. 달링턴 경은 영국의 총리와 독일 대사를 자기 집으로 비밀리에 초대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엘리츠 층이었다. 그를 모시던 스티븐스에겐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달링턴 경이 최후에는 그의 고고한 (그러나 나중엔 나이브했다고 판명이 나는) 영국인스러운 신사다움 때문에, 역사적으로 독일의 히틀러 편을 들어준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슈는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를 충직하게 모시던 스티븐스 집사는 마치 달링턴 홀과 함께 일괄처리되는 품목 중 하나인 것처럼, 미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경의 집사로 넘겨지게 된다. 이 책은 패러데이 경이 출장 가는 시기에 맞춰 스티븐스 집사가 주인의 휴가 제안을 기어이 받아들이고 일주일 간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티븐스 집사가 고심 끝에 휴가를 떠나기로 결정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전에 달링턴 홀에서 총무직을 수행하다가 결혼 때문에 서부로 떠난 켄턴 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달링턴 경의 몰락으로 인해 달링턴 홀은 이름과 규모만 유지된 채 예전의 명성을 모두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 스티븐스에겐 고작 몇몇 사람만으로 큰 저택을 관리하고 있던 어려운 시기였고, 인원 부족으로 여러 사소한 문제까지 터지고 있던 찰나였다. 마침 날아온 켄턴 양의 편지에서 스티븐스 집사는 그녀의 결혼이 거의 파경에 이르렀다는 것과 그녀가 다시 달링턴 홀로 복귀하고 싶어한다는 뉘앙스를 읽어낸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이는 그가 잘못 짚은 것임이 드러난다). 함께 일할 때 앙숙이기도 하면서 남녀 간의 묘한 감정까지 그녀로부터 받았던 기억은 좀처럼 떨어지기 힘든 그의 발걸음을 기어코 옮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뜻 보면 이 책은 스티븐스 집사가 그의 일주일 간의 휴가 중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한 회고록이나 일기 정도에 불과하다. 잔잔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을 겪으며 떠오르는 상념들, 그리고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추억에 잠기는 등의 자연스러운 삶의 사소로움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나날들을 보내고 이젠 인생의 저녁을 맞이한 한 인간의 삶을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듯하다. 게다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터라, 그가 내뱉는 독백이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상념들에 이어진 과거의 추억들은 모두 우리 개개인의 내밀한 일상과 그대로 이어져있어, 평소에 잔잔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조용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합리화의 경계를 왔다갔다하며 자신의 과거를 곱씹는 건, 인생을 살며 낮은 곳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집사로서의 품위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에게 있어 집사의 품위는 곧 충직함과 성실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었던대로 살아냈다.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주일 간의 여행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변호한다. 변호는 방어기작이기에 누군가의 공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를 공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몰락하고 생을 다했던 달링턴 경에 대한 무성한 소문만 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스티븐스가 자신이 평생 믿어온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합리화까지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달링턴 경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겨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의 명예가 곧 그의 명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똑같은 논리로, 주인의 몰락이 곧 그의 몰락이가도 했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주인과는 달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집사였다. 몰락을 경험했지만 몰락하지 않은 중간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믿는 품위가 텍스트라면, 그의 옛 주인의 평판은 컨텍스트다. 컨텍스트의 몰락은 텍스트의 독립성을 저지한다. 택스트가 가진 고유한 가치까지도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며, 때론 정반대의 평가까지도 마다해야만 한다. 어쩌면 틀린 컨텍스트에서 바른 텍스트는 해적선에 탄 성실한 해적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처럼 충직함과 성실함이 평범함의 옷을 입고 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모습과 같을지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을 다시 한 번 힐끗 떠올리게 만드는 스티븐스 집사의 삶이 황혼 무렵 비스듬히 깊게 들어오는 햇살처럼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해적선의 성실한 해적과도 달랐고, 아이히만과도 달랐다. 책을 끊임없이 관통하고 있는 그의 내밀한 독백이, 다행히도, 자랑과 거들먹거림이 아닌 후회와 합리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평생 믿어온 가치를 스스로 의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치는 다시 아로새기면 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지나간 인생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인생에는 저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이번 여행이 그에게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5?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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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예배 -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티시 해리슨 워런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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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단조로움 속으로 찾아온 예기치 못한 기쁨.


티시 해리슨 워런 저, '오늘이라는 예배'를 읽고.

- 부제: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


늘 보던 일상, 늘 하던 일과, 지루하고 하찮아서 나 스스로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순간들. 아니, 그런 의미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타성에 젖어버려 기억에서 곧바로 삭제되고 버려지는 시간들. 하지만 내 하루를, 내 인생을 압도적으로 채우고 있는 그 기계적인 시간들. 때론 순식간에 우리를 다 커버린 어른으로 만들어 버리고, 때론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는 철학자나 그 이면에 놓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하며, 때론 심리학자로, 또 때론 무면허의 상담가나 사설탐정으로 우릴 만들어 주기도 하는 그 숱한 시간들. 바로 일상의 다른 이름들이다. 나와 당신의 인생, 나와 당신의 하루, 그리고 나와 당신의 오늘. 


그러나 그렇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 심지어 일기장에 끄적거릴만한 내용조차 하나 없는 날에도, 갑자기 훅 들어오는 전율의 순간은 종종 나를 찾아온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순간은 아까와 동일한 바로 그 시공간에서 일어난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순간. 가끔은 입을 쩍 벌리고 두 손을 위로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없이 겸허하고 한없이 경건한 자가 되어, 경이감에 휩싸인 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순간. 원한다고 찾아오는 순간들이 아니기에, 내 의지와는 분명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만, 나는 내가 그 순간을 맞이하기 이전에 화학적이고 전기적이며, 또 육적이면서 영적이기도 한 어떤 것들이 상호작용하였음을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 신비라고 하자. 이런 신비로운 순간은 순식간에 나를 압도하여 내 입을 다물게 하고, 비상하게 돌아가던 내 논리와 비판을 멈추게 하며, 보이는 것들 이면에 놓인 세계를 보라고 말한다. 마치 그토록 찾아 헤매던 답을 엉뚱한 시간과 공간에서 엉뚱한 방법으로 찾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기억할 수조차 없는 오래 전, 마치 태곳적에 나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은,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의 이성과 감성을 단숨에 제압해버리고 나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그 순간들. 아.. 어찌 이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왜 나는 그러한 비논리적인 순간들 한가운데서 내 안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남을 느끼고, 그제서야 비로소 계속해서 뛰고 있었던 심장을 느끼며, 그 심장을 통해 전신으로 따뜻한 피가 흘러감을 느끼는 걸까. 왜 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순간을 맞이할 때,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하고, 또 궁극의 답을 얻은 지혜자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인생의 굴곡진 곡면의 순간기울기를 살아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걸까. 왜 난 그 순간 살아있음은 물론 행복까지도 느끼고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걸까. 나의 존재 이유와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가 품어야 할 마음과 해야 할 일들이 왜 그 순간 선명하게 분별이 되는 걸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할 때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아, 하나님, 이렇게 훅 들어오시다니..."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순간들이 내가 성공을 거뒀거나 뭔가 특별한 일을 성취했을 때 찾아오지 않고, 따분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다. 그리고 분명하게 아는 것도 한 가지가 있는데, 이러한 예기치 않은 기쁨의 순간들을 내가 점점 더 기다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기다림은 나에겐 하나의 소망이 되어, 하찮을 만큼 평범한 내 일상에 밝고 아름답고 따스한 평안의 빛을 비춘다. 그렇다. 어쩌면 이러한 예기치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한 번에 훅 들어오는, 항복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순간들이 있어서 사소한 나의 하루가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이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 당신은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일상에서 마지막으로 가슴 설레어 본 적이 언제인가. 


습관처럼 길들여진 반복적인 삶의 패턴 한가운데에 신비가 있다. 그 신비는 발견하는 자를 행복으로 맞아준다. 누구든지 찾을 수 있지만,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그 순간들. 이 책은 우리가 누구나 경험하는 그런 사소한 하루를 특별한 (아니, 가장 평범하다고 해야 할까. 가장 평범해서 특별해져 버린 걸까) 시각으로 조명해준다. 부제인 '사소한 하루는 어떻게 거룩한 예전이 되는가.'에서도 간파할 수 있듯, 이 책은 하루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예전과 연결시켜 바라보며, 작은 순간들의 믿음과 자잘한 형태의 영적 성숙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잠에서 깨어 침대를 정리하고, 이를 닦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부터 끼니를 때우고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24시간을 이 책은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자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내밀한 관찰과 분석 및 해석은 그녀의 신학적 성찰로 승화되어 이 책을 잔잔한 한 편의 에세이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녀만의 수려하고 맛깔 나는 필력은 덤이다. 


우리는 모두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의식을 되찾는다. 나 같은 경우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그리고 한 명의 생물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더 깊고 더 실제적인 정체성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매일 아침 세례받은 자들로서 잠에서 깬다." 구약의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보호해주신 일들을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성공회 사제로서 저자는 예배당에 있는 세례반을 지나갈 때 손가락을 살짝 담근 뒤 성호를 긋는 행위가 기억의 행위임을 알려준다.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으며, 예수님이 행하신 일 덕분에 받아들여졌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모든 정체성을 무의식의 수면 아래로 내려놓았다가 다시 하나씩 주워 입게 되는 아침 시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사랑받은 자요, 용서받은 자요, 받아들여진 자라는 것을.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는 또 다시 단조로운 일상으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오늘을 구별해 주셨다는 것을. 오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낼 시간이라는 것을. 다시 시작할 날은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남편, 아빠, 과학자의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21세기를 들어 스마트폰은 버젓이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스마트폰 의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밤에 잠들기 직전, 그리고 하루 중, 예전 같으면 소위 '심심했을' 짬 시간의 모든 조각조각들 가운데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는 단짝은 스마트폰이 되었다. 스마트폰 덕분에 테크놀로지가 하루 중 비어있는 모든 순간을 채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야금야금 우리의 습관을 형성해간다. 저자가 간파한 것처럼, 정말 마치 지루함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두려움 때문인 것일까. 어느 사순절 기간, 그녀는 스마트폰을 침대 곁에서 치워버리고, 대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침대정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몇 분 동안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과 묵상,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 것 아닌 그 행위 덕분에 얻은 유익을 나눈다.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작은 혼란 속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 어질러진 집 안에 하나의 작은 공간, 질서가 잡힌 사각 공간이 생겼다. 신비롭게도 이 사각형은 나의 어지럽고 산만한 정신 안에도 작고 질서 잡힌 공간을 만들어냈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표방하는 세계관이나 특정 문화와는 상관없이, 검증되지 않은 매일의 습관들로 형성되어져 간다. 그녀 역시 이 통찰을 적극 동의하며 반복되고 단조로운 일상의 순간들이 가지는 의미에 신학적 성찰을 가한다. 반복성은 믿음의 리듬을 반영하는 것이며, 우리를 성숙시키는 훈련의 장은 바로 매일의 일상, 그 단조로움 안에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따끔하게 우리에게 도전도 가한다. 크고 즐겁고 극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열망하는 문화에서, 침묵과 반복의 공간이 있는 삶을 일구는 것은 믿음의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나는 바로 그것이 일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작은 저항이라 믿는다. 거창한 대의를 위한 거창한 저항이 아닌, 아주 작고 작은 저항. 누군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혁명을 원한다. 아무도 설거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깨달음처럼 나 역시 기독교 신앙의 일상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되었다. 아무리 혁명을 원하고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을 원해도, 설거지를 배우지 않고는 그것들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어진 3장에서는 이 닦는 사소한 행위에서 '유지와 보수'라는 저자의 신학적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단순한 유지 보수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며, 유한한 육체에 갇힌 우리 인간들의 한계와, 그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또 예배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저자는 그녀의 묵상을 조곤조곤 나누어준다. 특별히, 인간의 제한된 육체 안으로 들어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복음을 머리만이 아닌 몸으로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것의 의미와, 이성적으로 바르게 믿는 신앙을 넘어서는, 즉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예배의 실천에 대한 의미를 묵상한다. 몸과 기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나도 존경하는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을 인용한다. "바닥에 엎드리지 않고도 기도할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릎 꿇는 법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교회의 제도로서 기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면 몸을 구부리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도의 몸짓과 자세를 배우는 것은 기도를 배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참으로 몸짓이 기도다." 몇 달째 나 역시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땐 누구나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는 그 교묘한 위장의 순간의 단점은 수명이 짧다는 것이다. 문제는 생기게 되어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린 진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모든 순조로움이 멈추고, 통제력, 여유, 특권이 사라지고, 대신 궁핍함, 죄성, 신경증, 연약함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4장에서 저자는 바쁜 순간, 열쇠를 잃어버리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은혜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길을 잃었고 깨어진 존재였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고 그분의 용서와 죄사함과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도와준다. 바로 회개와 믿음의 반복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되는 일상의 리듬이자 호흡과도 같다는 것이다. 열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사건들이 우리의 성숙과 성화를 위한 기회라는 신학적 성찰을 저자는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고 조용히 아주 설득력 있게 풀어준다. 이 책을 읽는 묘미일 것이다.


5장에서 저자는 먹다 남아서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타코 수프를 먹는 행위에서 기독교 예배의 두 가지 요소, 즉 말씀과 성례전을 성찰한다. 두 가지 모두 음식처럼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요소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 행해야 할 일 가운데서 어떤 특별하거나 거창한 행위가 아닌, 굳이 식사라는 평범한 행위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반복적 일상에 깃든 신비를 읽어낸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식사는 너무나도 평범하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에서 곧장 사라져버리는 보통의 식사가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했다는 사실은 우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반복적이고 때론 지겹게까지 느껴졌던 식사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예배에서 말씀과 성례전 역시 매 주일마다 반복되는 (적어도 성공회 예배에서는 참이다) 순서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실제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조용하고 기억에 남지 않는 행위들이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며,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인다고 말한다. 흥분, 모험, 흥미진진하거나 충격적인 영적 경험 등을 파는 많은 현대 기독교 예배는 우리를 금방 목이 타는 영적 경험의 소비자로 전락시키지만, 말씀과 성례전이 중심을 이루는 기독교 예배는 우리의 정체성이 소비자가 아닌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역설한다. 전통적인 예전 안에 깃든 신비를 조금 맛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6장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남편에게 고함을 지르는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사실, 나도 다를 바 없다. 나는 '아내에게 큰 소리치고 말과 글이 앞서는 몽상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큰 이념을 표방한다 해놓고서도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 다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의 다툼에서 저자는 '평화의 인사 건네기'와 '평화를 이루는 일상의 일'에 대해 묵상했던 것을 우리에게 나눠준다. 가장 가까운 이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도 세상을 위한 급진적 사랑을 부르짖고,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묵과하고 막연한 다수의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큰 소리치는 이들.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우리들의 현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 없고 그 자체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평범한 사랑이 바로 땅 위에 존재하는 평화의 실체이며 일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그리고 다음을 믿으라고 권한다. 믿는 것이 신앙의 행위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의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 그렇다. 내가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소한 평화의 몸짓이 세상의 우주적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믿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이메일을 싫어한다. 이메일은 그녀를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자라고 느끼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녀는 이메일 확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임무라고 고백한다. 노동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 즉 일과 신앙 혹은 삶과 신앙의 조화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여기 7장에서는 소개되어 있다. 일과 성취감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에 저항하면서도, 우리의 일 안에서, 우리의 일을 통해 직업적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일하는 삶을 기도의 형태로 살아내도록 도와준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특히 베네딕트회 영성의 특징을 잘 대변해주는 로렌스 형제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성과 속을 구별하는 것에 길들여진 보수 신앙인들은 마치 목회자가 시장에서 반찬 파는 직업을 가진 서민보다 더 거룩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목회자 스스로도 교회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일을 할 때면 마치 세속적인 일을 한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도 믿는다. 거룩하다고 규정해놓은 일을 해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로서 성실히 일에 임하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일에 임한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저자가 싫어하는 이메일 확인 작업에서도 그녀는 거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혹은 속되다고 단정했던 일에서 우리는 거룩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일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우리의 직업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직업을 통해 행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장에서 저자는 시간 통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나눈다. 우린 모두 우리의 시간을 우리가 통제하며 산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은 반복된 습관과 무의식의 세계가 깊숙이 침투해있음을 알 수 있다. 통제는 보통 실행을 의미하지 기다림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삶. 저자는 교통 체증 가운데 모든 것이 묶여있는 경험으로부터 인내와 소망을 읽어내고 그 인내와 소망은 부활에 근거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작전 개시일과 전승 기념일 사이의 삶으로 비유한다. 이미 가졌다 함도 아니고 아직 얻지 못했다 함도 아닌, 언제나 길 위에 서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소망하는 순례자.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 하나임을 믿는다.


9장에서는 개인영성, 즉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개인의 회심과 영적 성장에만 배타적으로 치우친 복음주의권 문화에 일침을 가하며, 저자는 기독교가 개인영성 뿐만이 아닌 한 민족을 부르시고 형성하시고 구원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면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지 않았으며, 그분은 추종자들과 단지 개인적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셨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교회의 죄와 실패 안에서 어두움과 추함을 보는 그녀는 또한 하나님은 죄인들 한가운데서 구속과 회개와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다는 빛나는 소망도 본다. 그리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짚어준다. 손이 몸의 일부이듯, 나 역시 교회의 일부라는 것. 즉 내가 교회 안에서 죄를 볼 때, 나도 그 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나도 교회의 깨어짐에 한몫 거들고 있다는 것. 이 찔림에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이야기했듯, "우리가 함께 온전함을 이룰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아멘.


10장과 11장에서는 각각 차를 마시고 쉼을 얻는 시간과 하루를 마감하며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대한 저자의 성찰을 만날 수 있다. 쉼은 연습이 필요하다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일상에 깃든 아름다운 작은 순간들에 주목하여, 그것들이 맞닿아있는 신성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쉼과 잠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단조로운 일상을 찾아오는 예기치 못한 기쁨. 그 기쁨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임재. 나도 그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뿐 아니라, 그 기쁨을 마음 설레며 기다리는 시간에서도 저자처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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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악령과 인간의 본성.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악령’은 누가복음 8장 32-36절로 운을 띄우며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열린책들’ 판에 나온대로 공동번역을 따랐다.


|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 기르는 돼지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귀 (악령)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마귀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락으로 도망쳐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마귀 (악령) 들렸던 사람이 낫게 된 경위를 알려주었다. |


본문에 등장하는 ‘마귀’라는 단어는 성경 번역에 따라 ‘귀신’이라고도 표기된다. 영문으로는 ‘demon’ 아니면 ‘devil’로 번역된다. ‘열린책들’에서는 소설의 제목이 지닌 의미를 살리기 위해 ‘마귀’에 ‘악령’을 병기했다. 나 역시 이 감상문에서는 ‘악령’이라는 단어로 통일한다. 참고로 이 작품의 러시아 원서 제목은 ‘Besi’, 영문 제목은 ‘The possessed’, 'Demons', 혹은 ‘The Devils’이다.


성경본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악령의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그리고 이를 호령하고 제어하는 예수의 권세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 의거하면, 악령은 바이러스처럼 숙주를 필요로 하며, 숙주를 옮겨 다닐 수 있다. 숙주는 사람일 수도 돼지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악령의 존재방식과 힘, 즉 사람을 홀리고 장악하는 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혼란과 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전파 및 확산하는 일, 그리고 사람을 궁극적 파멸로 이끈 뒤 자신은 살아남아 또 다음 기회를 노리는 힘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이 책의 감상문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처음엔 단순한 궁금증이 있었다. 왜 이 성경본문인가? 그저 악령이 등장하기 때문인가? 악령이 등장하는 본문은 여기 말고도 다른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왜 하필 이 본문인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답을 얻지 못했다. 마지막 페이지인 1097 페이지에 도달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건만, 게다가 읽었던 곳을 읽고 또 읽고 하면서 다른 책보다 더 힘들게 읽어냈건만, 나의 이해는 여전히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틈틈이 읽고 생각하며 머리 속에서 재구성해보던 중, 어제 밤에야 비로소 실마리가 잡혔는데 그것은 전율과 함께 내게 갑자기 다가왔다. 계속 봐서 식상해진 글이 여태껏 숨겨왔던 의미를 마침내 드러낼 때 느낄 수 있는 그 소름 돋는 전율.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이 성경본문의 용도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용기가 났다. 이 성경본문으로 이 대작을 조금이나마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작품은 감상문을 쓰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작품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고, 그래서 그냥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누가복음 인용 용도와 목적을 중심으로 해서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풀어가다 보면, 비록 졸작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대가의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 Possessed: 먼저, 소위 ‘귀신 들렸다’라든지, ‘귀신에게 홀렸다’, 혹은 ’사탄에게 잡혔다’라고 표현되곤 하는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이 소설의 컨텍스트에서 악령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첫 번째 숙주 관점에서 접근해본다.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1869년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한 달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스끄보레쉬니끼 등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안똔 라브렌찌예비치'라는 사람이 기록한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연대기적 회고록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시점이 평범하지만은 않은 이유는, 소설 전체에서 볼 때,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는 소설의 화자가 실제 말도 하고 사건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는 인간 관찰자가 맞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전지적 작가 입장도 취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이 책의 본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라는 인물의 짧은 연대기로 시작한다. 소설 전체에서 스쩨빤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으로 등장하지만, 화자는 일부러 그의 젊은 시절을 간략히 연대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설의 서론을 대신한다 (이 소설의 화자 안똔은 스쩨빤의 가장 친한 젊은 벗이다). 왜일까? 왜 스쩨빤의 과거가 이 대작의 서론으로 자리잡아야만 했을까? 스쩨빤은 중요 인물이긴 하지만, 주요 사건을 일으키거나 상황의 전면에 나오지도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기력이 쇠한 노인네 아닌가). 화자가 밝히고 있는 이유에도 특별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저 뜬금없이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최근에 일어난 아주 이상한 사건을 기술하기에 앞서 약간 멀리서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말을 하며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화자가 아닌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도를 생각해 보았다. 이 소설을 악령의 존재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서론은 악령의 기원이라든지 아직 땅 속에 묻힌 채 발아를 기다리고 있는 악령의 씨앗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누가복음 본문에서 악령이 처음엔 돼지가 아닌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듯, 스쩨빤도 이 소설의 컨텍스트에 있어서는 악령 들린 첫 번째 숙주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장장 천 페이지를 넘는 이 대작의 서론이, 조금은 뚱딴지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스쩨빤 한 사람의 전기로 대체되어야만 했던 게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와 그 미미한 시작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 본다. 19세기 러시아 철학과 사상은 1840년대와 1860년대로 구분지을 수 있다고 한다.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1840년대 세대를 ‘아버지 세대’로, 1860년대 세대를 ‘아들 세대’로 나눈다. 역사를 이분법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경솔한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구분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여부를 떠나, 두 세대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이 가시적이자 상징적이었다고 보았다. 1840년대 러시아에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물밀듯 들어와 있었다. ‘인텔리겐찌야’라고 불리는 러시아 특유의 지식인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가졌는데, 각각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로 양분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스쩨빤은 1840년대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서구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입만 열면 프랑스어를 남발했고, 러시아 역사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현실감을 상실한 이상주의자로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1821년생이며 1881년에 타개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두 세대를 모두 직접 함께 한 장본인으로서, 이 소설의 주배경이 알렉산드르 2세가 1861년에 시행한 농노 해방령이 발효된 후 민중의 분노가 극에 치달았을 1869년인 것을 감안하면, 아버지 세대의 결코 안정하지 않았던 서구 자유주의의 급기류가 아들 세대로 하여금 결국 피를 흘리게끔 만든 악령의 씨앗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즉, 1860년대 말에 있었던, 혁명이란 옷을 입은 광기 어린 폭동을 일으킨 아들 세대에게 안착한 악령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저자는 고발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치 악령이 사람에서 돼지로 옮겨간 것처럼 말이다.


2. Moving to enter: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동하며, 죽지 않고 영원한 악령의 존재방식에 관해서다. 말하자면 두 번째 숙주 관점에서 풀어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미처 다 읽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 책의 창작 배경이 그 유명한 '네차예프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임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급진적 혁명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네차예프는 1869년 모스크바에서 '민중의 복수'라는 조직을 결성했는데, 조직원 중 하나였던 '이반 이바노프'라는 사람이 그의 방법론에 반대를 하며 조직을 탈퇴하려고 하자, 네차예프는 동료 4명과 함께 이바노프를 살해해 버린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러시아에 팽만했던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필두로 했던 극단적이고 광적인 혁명 운동을 상징하며, 혁명 세력의 비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을 접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정치 풍자적인 내용의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었고, 그만의 독특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며 또 심리학적이기까지 하면서 야생마처럼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그만의 총천연색 필체가 가미되어 이 책 '악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실제 작품 안에서도 '네차예프 사건'은 거의 그대로 모방된다. 소설의 절정 부분에 나오는 일련의 흉측한 범죄 중에서도 정점을 찍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살해 수단이 총이었다는 것, 살해 장소가 인적이 드문 연못 근처였다는 것, 시체를 연못에 빠뜨려 유기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이 다 밝혀졌다는 것까지 모두가 동일하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 나는 이 차이점에 착안하여 저자의 숨은 메시지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네차예프 사건'에서는 범죄를 주동한 네차예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고 이후 종신형으로 대체되어 투옥 8년 만에 병사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소설에서 네차예프 역을 맡았던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 (스쩨빤의 성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 표뜨르는 스쩨빤의 아들이다)는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공범과는 달리 홀로 잡히지 않고 도주하여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표뜨르는 표면적으로는 네차예프처럼 혁명을 일으키길 원하는 자처럼 그려진다. 적어도 그가 입김을 지속적으로 불어넣고 있는 조직원들에게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네차예프와의 공통점은 아마도 공모하여 살인을 주도했다는 점 빼고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네차예프는 당대 유명했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의 지원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조직을 결성하는 등 실제 혁명을 일으키려는 자였지만, 표뜨르의 경우는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뤄내자고 하는 겉으로 포장된 선전과는 달리 실제로는 혁명이 아닌 혼란만을 야기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식적인 지원자도 없었고, 훈련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재하는 조직조차도 없었다. 오로지 거짓과 위선으로 무장하여 경솔하고 간사하며 비열하고 뻔뻔하며 무례하기까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인조라는, 실재하지도 않지만 조직원들은 실재하는 것처럼 믿는, 오합지졸 같은 조직을 충동질하여 계획한 범죄를 깔끔하지 못한 방식으로 기어이 저지르고야 마는 악령의 실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죽거나 파멸 당한 자가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를 제외한 악령의 두 번째 숙주는 누가복음 본문의 돼지 떼가 몰살당한 것처럼 모두 희생당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표뜨르 개인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저질러졌던 것이다. 그렇다. 그건 혁명이 아니라 범죄였다. 그 범죄는 혼란이었다. 불이 났고 폭동이 일어났고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혼란 야기는 충분히 성공했다. 마치 마귀새끼 한 마리가 분탕질을 해놓고 도망친 것처럼, 마치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고 저 혼자만 내뺀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표뜨르를 살려두었을까. 아마도 악령의 존재방식에는 절대 끝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악령의 불멸성을 말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저 잠복기와 휴지기, 그리고 활동기가 구분될 뿐 악령의 존재 자체는 그 어떤 모습으로든 영원하다는 것을 상기해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3. Spiritual existence: 또 다른 축,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해본다.


여태까지 이 소설의 주인공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본문의 악령의 존재방식에 착안하여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표뜨르와 5인조로 대표되는 아들 세대로의 악령의 숙주 이동은 그 자체로써 독립적이고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이 구조로만 이루어졌다면, 그리 난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표뜨르를 주인공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스따브로긴이라는 인물을 대신 등극시켰다. 그는 이 때문에 작품을 전면 개정하는 수고를 더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 작품은 두 개의 축을 가지게 되었다. 두 축은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복합적이고 더 심층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어쩌면 이것이 이 작품을 대작으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일명 스따브로긴으로 대표되는 두 번째 축은 악령의 존재방식이라기보다는 악령의 습성 내지는 성품을 말해준다고 나는 보았다. 그는 비록 어릴 적 스쩨빤의 영향을 잠시 받은 적이 있고, 해외에 머물 때 표뜨르와도 관계를 잠시 맺었지만, 다분히 독립적인 이미지로서 이 소설의 저변에 흐르는 모든 어두운 힘의 움직임에 우월한 입지를 선점하며 관여되어 있다. 심지어 그는 저열한 모습으로 혼돈을 불러일으킨 악령의 행동대장 표뜨르가 선택하고 유일하게 우상시한 인물이었다. 그의 야심찬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스따브로긴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함과 언제나 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은 초월적인 이미지, 일탈을 일삼고 나서도 초연함을 잃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독과 우수에 차 있는 그의 이미지는 신비하게까지 느껴졌으며, 표뜨르를 포함한 주위 모든 사람들이 스따브로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나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건의 전면에 나서서 악령의 더러운 손과 발 역할을 했던 사람은 표뜨르였지만,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더라도 모든 사건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사람은 스따브로긴이었다. 어쩌면 표뜨르는 스따브로긴 한 개인 안에 들어있던 악령을 외부에서 증폭시킨 역할을 담당했던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이동이 아닌 악령의 영향력을 저자는 스따브로긴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굳이 숙주를 이동하는 수고로움 없이도, 거짓과 위선과 사리사욕에 눈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마치 악령이 거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악령의 힘을 묘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표뜨르를 움직인 건 어쩌면 스쩨빤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이동된 악령이 아니라, 그 악령을 섬기면서 그에 의지하여 표출하고자 애쓴, 한낱 가련한 인간의 탐욕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악령은 어쩌면 어떤 초월적인 인격을 가진 제 3의 영적 존재가 아니라, 탐욕과 거짓과 위선과도 같은 인간 스스로의 내밀한 본성일지도 모른다는 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해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간의 참담한 실체, 그 어두운 심연의 그림자를 가감없이 이 소설 속에서 보여준 건 아니었을까.


악령의 존재 유무를 논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는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싶다. 악령을 원망의 대상이나 핑계거리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이다. 악령을 탓하는 행위가 당면한 문제의 이면에 있는 영적 실체를 인지하여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 꿇고 마음을 낮추는 자세를 가져온다면 좋겠지만, 탓하는 그 행위에서만 머물며 마치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상황을 초래한다면 악령의 존재를 차라리 부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악령 탓만 하는 행위 자체가 악령이 가장 원하는 것일지. 그게 바로 악령일지.


한 달간 이 책을 읽어나갈 때도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독특한 필체 덕분에 정신이 없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정신 없기는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그 길고 긴 이름은 부수적인 스트레스일 정도다. 워낙 방대하고 심층적인 소설이라 해석 자체가 어려웠다. 아직도 난 이 작품을 얼마나 소화했는지 감도 잡을 수가 없다. 역사에 길이 남을 니체를 포함한 철학자들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학자, 신학자, 그리고 기타 여러 사상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이나 ‘백치’와는 또 다른 맛의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렇게 이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의 조잡한 리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의 글이 기라성 같은 이 작품에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7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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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 고전산책 6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안식하시길, 친구.


레프 톨스토이 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는 가방에 보통 한 두 권의 책을 넣고 다닌다. 마침 어제 감상문을 하나 마무리하며 책 한 권을 끝낸터라, 오늘은 새로운 책을 하나 시작할 참이었다. 출근 전 습관처럼 책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심코 가방에 집어넣은 책이 하필이면, 공교롭게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분 후 출근 길에서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의 죽음은, 사실이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이었다.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공간적 제약이 있었지만, 언제 한 번 만나 배드민턴도 치고 타코도 같이 먹기로 했었다. 그 약속을 한 게 바로 엊그저께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멈추고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방 안에 든 책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책을 골랐을 무렵 이미 그는 하늘나라로 간 상태였지만, 난 그 책을 고른 나의 선택을 바보처럼 탓하고 있었다. 먼저 간 거라 믿네. 친구, 심왕찬. 부디 안식하시길.


같은 책도 어떤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공감도와 이해도가 달라진다.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나는 이 책을 읽어냈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리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낸 두 사람이지만, 나에겐 책 속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현실 속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고 존경받는 법조인으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것과는 거의 무관하게 그 역시 한 인간이었다. 그가 살아낸 삶은 우리네 평범한 삶과 다를 바 없었으며, 그가 맞이한 죽음도 특별할 게 없었다. 또한 이 책의 탁월한 점이라고 할 수 있고, 저자 톨스토이의 집필 의도도 엿볼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방관적이고 형식적인 애도를 표하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심리 묘사에서도 난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인간 이야기였고, 모두 우리들의 이야기였으며, 또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신조는 대체로 ‘쉽게, 편하게, 점잖게’였다. 법조인의 바쁜 삶을 살아내면서 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비록 결혼 후 부부 관계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개인주의적으로 해결해버렸다. 이러한 모습 또한 우리네 삶에서 흔하게 겪는 일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지나갔다. 모든 게 대단히 멋있었다. 그는 일 뿐 아니라 상류계층의 삶도 즐길 줄 알았다.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뻐할 때는 브리지게임을 할 때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공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기쁨은 자존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고, 사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기쁨은 허영심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라는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 이면에 놓인 인간의 공통적인 습성을 날카롭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몸에 이상 징후를 발견한다. 아니, 벌써부터 느껴오던 것이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이었다. 맹장과 신장에 이상이 생긴 것이라 했다. 그 병은 그의 쉽고, 편하고, 점잖은 삶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몸이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자, 삶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지게임에서도 뭐가 잘 안 되면 금새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다. 그는 외로웠다. 능수능란하게 인간관계를 조절하며 그는 늘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병이 들자 그 관계들이 모두 위선과 거짓의 옷을 입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아내 조차도 남편의 병의 책임은 남편 자신에게 있고 자신은 남편의 병 때문에 죽겠다는 입장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존재가 주변 사람들에게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 같은 기분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에게조차도. 비참했다. 톨스토이는 여기서 이렇게 쓴다. “그는 파멸의 끝자락에 서서 이해하고 동정해주는 사람 없이 외롭게 버텨야 했다.”


공과 사를 탁월하게 구분했던 그도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직장 생활에서도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통증은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없이 절망했다. 그가 이뤄놓은 모든 삶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동안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차단하고 은폐하며 파괴하던 자세가 죽음에 대한 저항의 행위로써 먹혀 들었으나, 하루하루 커지는 고통은 그마저도 전혀 작동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심이 오로지 과연 그가 곧 자리를 비워주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야기된 산 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 스스로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 쏠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편과 모르핀이 없으면 잠을 자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마약 성분이 그의 정신을 잃게 만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그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집사 역할을 하던 농부 출신의 게라심이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게라심에게서는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바로 거짓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죽어가는 게 명백한데도, 조금 아플 뿐이라는 거짓말,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거라는 거짓말 등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은 죽음에 이를 것임을 알았다. 그것도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 하나도 없이 홀로 말이다. 죽어갈 때 외로움은 가장 큰 고통임이 분명한 것 같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면서 이 책은 점점 그 혼자만의 관념적인 서술로 채워진다. 저자가 기술한 이반 일리치의 독백 중 내 마음에 꽂혔던 문장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기쁨들은 더욱 부질없고 의혹투성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항상 똑같았던 사람. 계속되면 될수록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그만큼 내 발아래에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다 끝났어.”


그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계속 피해왔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혹시 내가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어서 그는 예전에 도저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 즉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 번 그 생각에 저항하고 반대하고 합리화를 해댔지만,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 와서 톨스토이는 그의 죽음 직전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그는 매 순간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이 두려워하던 것에 조금식 다가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가며 힘들어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그 구멍에 기어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더 힘들어한다는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구멍에 기어들어가는 걸 방해하는 건 자신의 지난 삶이 괜찮았다는 인식이었다. 삶의 정당화는 그를 붙들고 놔주지 않아 그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 점이 그를 제일 힘들게 했다.”


그가 사망하기 한 시간 전, 김나지움에 다니는 아들이 그의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갖다대고 그만 울음을 터뜨린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나락에 떨어져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자신이 살아온 삶이 그래서는 안 되는 삶이었지만 아직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과 자신을고통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순간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음을 본다. 그로부터 두 시간 임종의 고통은 더 지속되었지만, 그 자신은 죽음에 이른 게 아니라 빛에 이른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마음 속 독백은 다음과 같다.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이반 일리치의 삶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고 싶어하는 삶이었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여유도 즐길 줄 아는 보기 좋은 삶. 그러나 그 삶은 온갖 위선과 거짓으로 둘러싸인 삶이었다.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 높이 오른 사람들에게서 위선과 거짓의 힘을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미끄러져 내릴까, 아니면 피라미드 체제 자체가 무너질까.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진실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삶을 통해서도 인간의 추악한 이기적인 습성을 넌지시 드러내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죽음을 통해서도 인간 내면의 모습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삶을 화려하고 보기 좋게 만들었던 것들이 거품이었다는 것. 살았을 때 자신이 주인공 자리에서 이용하고 누리던 그 편리했던 것들이 죽을 때에서야 거치장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도구가 된다는 것. 결국은 아무리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을 때와 같이 바닥의 심연에 이를 때면 어린아이처럼 의지하고 동정받길 바란다는 것. 톨스토이는 분명 인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깊은 구멍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있게 철학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전 세계의 모든 독자에 의해서 이반 일리치는 매일 매시간 또 죽는다. 그러나 나의 친구의 죽음은 단 한 번, 오늘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무리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도 현실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일반적인 답이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 그것도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답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친구를 생각한다. 그의 삶과 그의 죽음. 그를 통해 보았던 여러 나라의 사진들. 가족의 행복함. 생각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희열. 구독하여 종종 듣던 그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와 기타 연주.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겠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을 난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한 번 애도한다. 부디 거기서 안식하시길.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53?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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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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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와 다른 맛의 성장소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읽고.


헤세를 읽으면 자아의 발견과 성찰, 성장과 성숙, 그리고 실현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는 자아의 분열과 대립마저도 점진적인 합일로 나아간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정도로 난잡하고 추잡한, 그러면서도 세밀하고 농밀한 인간 심리 묘사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헤세를 읽고 나면 무언가 흩어져 있던 것들이 모이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나면 벌거벗겨지고 더욱 파헤쳐지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자칫 불쾌할 정도의 씁쓸한 기분까지 들기 때문에 그런 감정으로부터 한동안 벗어나기가 쉽진 않다. 가끔은 정말이지 깔끔하게 목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비록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인간의 절망과 악함의 심연 가운데에도 소망과 사랑과 구원이 깃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렬히 보여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헤세가 절제되고 상대적으로 우아한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보다 낮고 어두운 길이 여러 갈래로 나있으며, 전혀 정돈되지 않아 어지럽고 복잡한 야생의 숲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내밀한 심리의 민낯을 대면하거나 탐구해보고 싶다면, 반드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것만이 아닌 언젠간 볼 수밖에 없거나 반드시 봐야만 하는 추악한 것들도 버젓이 혼재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번도 읽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읽는다면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당신은 분명 다를 것이며, 나의 이러한 권고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만의 묘한 매력을 맛보았다면, 아마 나처럼 다른 작품들도 접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네 번째 장편소설인 ‘미성년’에서 나는 헤세의 냄새를 맡았다. 이 책 '미성년'에서는, 이미 읽은 세 편의 장편소설, 즉 ‘죄와 벌’, ‘백치’, ‘악령’, 그리고 곧 읽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의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른 느낌의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이렇다 할 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는 서사가 부재하다. 또한, ‘죄와 벌’과 ‘악령’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념과 사상의 의인화’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보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독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작업을 통해 '아르까지 돌고루끼'라는 이름을 가진 한 청년 (미성년)의 성장기를 다루는, 그래서 헤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작품이다.


임팩트 있는 서사의 부재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건의 부재다. 그래서 누군가가 줄거리를 말해달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딱히 뭘 말해줘야 할지 난감하다. 커다란 사건들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은밀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선을 알아차리며 느끼는 전율과, 마침내 사건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과정에서 만끽할 수 있는 스릴이 고스란히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생각 흐름과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로 대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른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천 페이지를 육박하는 작품이니, 이 책 '미성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얼마나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 내면심리에 중점을 두었는지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헤세의 성장소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장소설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이 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미성년'은 '아르까지 돌고루끼'의 자서전적 수기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이 가리키는 바로 그 '미성년'이기도 하다. 즉,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돌고루끼를 통해,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현실과 이념 사이에서 부유하는 한 젊은 청년의 방황을 그려내고 있다. 모든 소설에서 작중 화자는 언제나 저자의 분신이다. 화자와 저자가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화자는 저자의 모습을 담아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특히 이 책처럼 거의 천 페이지 분량으로 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면서 어찌 저자의 영혼이 화자에게 담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서전적 소설로도 불린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이 아주 적절하다고 여겨진 건 화자인 돌고루끼에게 부여된 특성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돌고루끼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어설프게 산술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가진 고독한 이상주의자도 몽상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치'에 등장하는 미쉬낀 공작처럼 순수한 인간미를 간직한 인물도 아니며, 미쉬낀 공작과 대비되는 로고진처럼 돈의 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물도 아니다. 또한, '악령'에 등장하는 표뜨르처럼 인간의 탈을 쓴 악령의 모습도, 스따브로긴처럼 모든 사건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처럼 그려지는 인물도 아니다. 돌고루끼는 그저 미성년이다. 설익은 채로 마치 어른인 것처럼 행동하는 인물이랄까. 성년이 아니면서 성년인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미성년인 존재가 바로 돌고루끼인 것이다.


워낙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장황하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에, 이 책의 주를 이루는 돌고루끼의 독백이 장황하다는 점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젠 그의 장광설과도 같은 필체를 보면 오히려 익숙하고 반가울 정도다 (사실 이 책의 초반부부터 의외로 나는 빨려 들어가며 읽어낼 수 있었고, '악령'에 비해 두 배 정도의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다른 장편소설 주인공들의 독백이나 그들을 묘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필체가 돌고루끼를 묘사하는 필체와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그것들과는 달리 명료하지 않고 산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록 돌고루끼 스스로는 자신만의 이념을 위해 살아가려고 시늉하고 마치 그 이념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지만, 그의 이념은 실현되지도 않았고, 그의 행동은 다분히 돌발적이고 감정적이며 자기분열적인 색채까지도 띤다.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실수나 미숙함 때문일 리가 없다 (의도적인 미숙함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첫 번째 장편소설이 아닌 네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특히 미성년적인 특성과 정반대되는 강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악령'에 이은 바로 다음 작품이 '미성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작품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더욱 원숙한 작가 정신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 젊은 영혼의 방황을 이보다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까발려서 보여줄 수가 있을까. 그러한 미성년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황한 필체보다 더 적확한 방법이 또 있을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만의 그 독특한 필체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잘 활용되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 난 이 책을 통해 또 한 번 그의 명성을 확인한다. 내 책상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놓여있다. 일부러 장편소설을 그가 쓴 순서대로 읽어왔다. 어떤 이들은 '미성년'이 마치 오류인 것처럼, 마치 옥의 티인 것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직은 읽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그것이 증명되지 않을까 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2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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