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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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존 윌리엄스 저, '스토너'를 읽고.


 


새로운 작가의 글, 처음 만나는 세상, 가슴 설레는 기쁨. 하지만 이런 것들도 잠시. 어느새 난 책 속에 빠져들어 책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가슴 설레는 구경꾼이 아닌, 그 세상의 일부가 된다. 내겐 낯설기만 한 시공간, 하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세상에선 나만 이방인이다. 그곳에서 난 바라보고 듣고 느끼는 일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외적인 사건과 내적인 의식의 흐름까지도 파악해가는 유일한 자리를 꿰찬다. 그렇게 난 그 낯선 세상에서 어느덧 신적인 이방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기꺼이 또 다른 한 권의 책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낯선 세상을 여행했다. 오늘 오후에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모든 세상이 다르듯 모든 여행은 다른 느낌을 선물해 주지만, 이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기분은, 음 뭐랄까. 조용한 절망감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느낌 속에는 예기치 않게 묘하도록 깊이 공감했던 나 자신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 내 인생도 주인공의 인생과 똑같이 조용히 절망스럽다고 해야 할까 봐, 내 인생도 그렇게 고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봐, 어쩌면 난 그렇게 내심 두려웠했던 건 아니었을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비록 내겐 짧은 시간이지만, 덕분에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잔에 가득하게 따랐던 커피가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심지어 입도 대지 못한 채 빠져들어가며 읽었던 책이다. 책을 약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 즈음 깨달았다. 이 소설은 분명 내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아직도 멍하니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볼 때면 스토너가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나와 함께 조용한 절망 위에 앉아있는 듯하다. 




책을 통해 그의 인생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고독했고 절망적일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정작 스토너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절망에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충분히 절망적일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끝까지 선을 넘지 않는, 바보스러울만큼 부드럽고 순응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제어된 열정을 조용히 간직한 채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분열되었던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회복되지 못한 채로, 유일하게 영혼의 사랑을 나누었던 캐서린과의 재회도 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던 로맥스에게 제대로 한 방도 먹이지 못한 채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그가 침대에 누운 채 가까스로 들었던 자신의 저서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밤의 적막을 가르며 바닥에 떨어지던 그 순간. 그의 마지막 순간. 아.. 인생이란 이런 걸까 싶었다. 평범함의 옷을 입고 있어 비록 아무런 티가 나지 않지만, 그의 인생은 분열과 고독으로 점철된 슬픈 삶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특정한 목적도 없이 투박한 인생을 시작했지만, 우연찮게 대학이란 곳에 들어가게 되어 영문학이란 낯선 영역에서 자아의 눈을 뜨게 되는 여정과, 부모님이 바랐던 농부의 미래 대신 영문학을 전공하여 나중엔 그것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살아가는 여정이 소설의 도입부를 이룬다. 그리고 성격장애 기질이 농후한 아내를 만나 죽기까지 지속되었던, 조용한 지옥과도 같았던 분열된 결혼생활, 아내에게 느껴야 했을 공감 충만한 영혼의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서 느끼며 억제된 본능이 표출되었던 그의 슬픈 외도와 아픈 이별,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거침없이 발현된 교만함을 고급스럽게 외교적으로 포장하여 스토너의 영혼을 죽는 날까지 쪼아대며 갉아먹었던 동료 교수의 횡포 등의 굵직한 내용이 소설의 중간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 스토너는 그가 가졌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외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병들고 쇠약해진 모습, 급기야 암을 진단받고 외로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참 고독했다. 그렇다. 내가 이 책에서 묵직한 울림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독’이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며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나에게 이 책은 아주 묘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내가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나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을 수년간 해보지 않았더라면, 결혼생활에서 아내와 다투고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았더라면, 직장생활에서 능수능란하지만 사악하게 외교적인 악질을 만나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이 책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사건들과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에 녹아있는 분열과 고독,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것들을 그대로 안고 결국은 일상을 살아내는 우리 인간의 무섭고도 놀라운 적응력, 그 어긋난 각도를 가진 삶의 모습은 아마도 모든 사람, 아니 적어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스토너의 인생은 곧 우리의 인생에 다름 아닌 것이다. 평범한 삶이란 영점 조정이 되어 아무런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진공 속을 살아가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삶이란 분열과 고독을 머금은 채 슬픔을 안고 어긋난 각도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함께 하는 이의 사랑과 공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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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자 -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양희송 지음 / 북인더갭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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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속성자다.




양희송 저, '세속성자'를 읽고.




'가나안 성도'에 합류한 지 반 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어느 특정한 제도권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여러 교회를 방문하며 사뭇 다른 예배 스타일을 접하기도 하고, 주일성수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 물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일요일을 보내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부터 교회라고 불리는 잘 지어진 독립된 건물에서 거의 매주 일요일, 상당한 시간을 보내온 나로선, 또한 한때는 교회오빠였고, 성인이 된 이후엔 차세대일군이나 리더로 불렸던 젊은이였으며, 나중엔 안수집사직까지 제의 받았던 나로선, 교회를 스스로 걸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간만 생각해도 30년이란 세월은 교회 생활이 내 삶의 일부가 되기엔 충분했었다.




이 책에서 저자 양희송 청어람 대표는 '세속성자'라는 새로운 단어를 제시한다. 낯선 단어이지만 자크 엘륄도 오래 전 그의 책 제목으로 사용했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세속성자'라는 형용모순의 의미를 이 책 제목으로 사용하면서까지 굳이 다시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거룩함의 역설을 통해 진정한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다시 묻고 생각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세속적이란 게 무엇인지도 다시 진지하게 돌아봄으로써,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속이라는 말과 성자라는 단어의 역설적인 대비를 통해, 비단 가나안 성도만이 아닌 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든 하지 않든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세상 밖이 아닌 세상 속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중간기의 하나님나라를 살아내고자 고군분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다시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이 책은 성찰과 그것으로부터 끌어낸 예언자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회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님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다.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고작 신대원 몇 년 졸업한 뒤 마치 자기들이 갑자기 성도들의 영적인 아버지나 유일한 제사장으로 승격된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믿으며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목사들도 허다하다!) 특권 누리기를 거듭해왔다. 무지한 교인들을 이용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가며 자신의 부와 명예, 혹은 성적인 욕망 같은 파렴치한 사리사욕을 채워왔다. 집권당과 언제든 결탁할 준비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성경을 요리조리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해석해대며 교인과 교회를 어지럽혀왔다. 최근 몇 년간 언론을 통해 보도된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교회 목사들의 실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낯이 뜨거워 도저히 끝까지 기사를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거룩함과 구별됨을 그렇게나 강조해놓고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인 일들을 자행해온 그들이었다. 이 모두는 정말 부끄럽지만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 교회의 민낯인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각성과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는 한국의 극우 보수세력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함께 가야 할 공동체로서 한국 교회를 도저히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것보다 먼저 각 개인이 깨어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해야 할 일들과 살아내야 할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답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개인이 깨어날 때에야 비로소 이 책에서 말하는 세속성자의 역할이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고 믿는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개신교는 신앙을 개혁했다는 의미의 개신교 (改新敎)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신앙이란 의미에서 개신교 (個信敎)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사제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적인 신분이라는 깨우침을 우린 다시 기억해야 한다. 매개자를 통해야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여겼던 중세의 잔재에서 과감히 벗어나야만 한다. 그래야 세속성자의 참 의미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잇는 매개자를 자처했지만 스스로 타락해버린 목사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왔던 거룩함과 세속성에 대한 의미도 재정의되고 재구별되어야 한다. 교회 안과 밖을 더 이상 성과 속 내지는 거룩한 하나님나라와 타락한 세상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21세기 현재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건 참 다행이기도 하지만, 이걸 사실로써 깨닫기까지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러므로 제도권 교회 안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따르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스럽고, 나를 포함하여 제도권 교회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다시 제대로 알길 원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기를 외로이 지나고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마치 더렵혀졌다거나 타락했다고 여기는. 이른바 성속이원론에 입각한 어처구니 없는 논리는 파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제도권 교회를 출석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교회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은 거부하기 힘들고 나도 그렇게 아직은 믿지만, 이때 교회라는 개념은 제도권 교회를 지칭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변하듯이, 성과 속의 이분법을 넘어, 성벽 바깥의 신앙을 상상하며 담대히 바른 기독교를 실현해내고자 우리 모두는 각자 세속성자가 되길 다짐해야 할 것이다. 주일을 세속적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종교생활을 위한 주말 영성이 아닌,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낼 수 있는 주중 영성을 추구하고, 일과 쉼, 노동과 놀이를 제대로 포괄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멋진 세속성자가 되자. 아니, 우린 이미 세속성자다. 이 정체성을 깨달았다면 이제 교회생활만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그것을 살아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그렇게 살아내자. 용기를 내자. 함께 하는 공동체와 함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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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사색 믿음의 글들
C. 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 홍성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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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읽기를 위한 또 하나의 좋은 가이드.


C. S. 루이스 저, '시편 사색'을 읽고.


유진 피터슨의 '한 길 가는 순례자'처럼 이 책 역시 시편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온 느낌입니다. 위에서 아래가 아닌 바로 옆에서 말을 건네는 느낌이랄까요. 아무래도 저자가 목사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그 차이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화자와 청자의 거리가 좁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렇습니다. 저자인 루이스도 '들어가는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비전문가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쓴 글입니다. 루이스의 명성에 비하면 겸양의 뉘앙스가 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독자와 같은 학생으로서 '의견 교환'을 하려는 것이지, 선생으로서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목사의 설교나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의 경직된 자세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은 흐트러져도 될 것 같고 정장이 아닌 편안한 차림으로 저 앞이나 위가 아닌 그저 옆을 바라보면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면 되니까요.


루이스의 책을 여러 권 읽다 보니 한 가지 요령이 생겼습니다. 루이스의 필체에 익숙해지려면 다른 책들을 읽는 속도보다 조금은 빨리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존대어를 사용한 번역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루이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조금 빨리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용이 결코 쉽지도 않고 편안한 필체도 아니기 때문에 저 역시 처음에는 집중해서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한 번 읽는 것보단 빨리 두 세 번 읽는 편이 루이스를 읽기에는 더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루이스가 하고 싶은 말이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맞습니다. 루이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숲을 먼저 명확히 인지한 다음 나무의 설명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루이스가 친절하게 전해주는 이런 저런 비유를 섞은 나무 설명을 듣다가 정작 그 안에 담긴 핵심 메시지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영국성공회 신자로서의 루이스가 그의 다른 저서에서보다 더욱 두드러진 느낌입니다. 비록 그가 교파 간에 논쟁이 되는 문제들은 피하려고 애썼다고 이 책의 앞부분에서 밝히고 있지만, 여러 시편에서 그가 사색하고 해석하여 우리에게 말해주는 부분 (특히 마지막 장, '시편에서 두 번째 의미들'에서)에선, '우리의 기도서' 같은 성공회 신자가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와는 달리 기독교를 변증하는 내용이 아니라 성경의 시편을 해석한 뒤 본인의 묵상을 나누는 내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가 속한 배경이 묻어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요.


루이스는 우리들이 시편을 읽을 때 무엇보다 시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에 몸을 주는 하나의 작은 성육신'이라는 멋진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지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만 해도 시편을 가끔 읽을 때면 산문 형태로 써진 내러티브를 읽어나갈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자세로 대하거든요. 운문을 가진 형태로 시편을 대하는 것이 아마도 시편 저자의 바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각 언어에 따른 번역에 따라 시의 운율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평행법'과 같은 시적 기술은 번역에 상관없이 어느 나라 말이든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시편을 시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아직 시편의 맛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저에게는 아주 좋은 조언이 되었습니다. 내년에는 유진 피터슨과 C. S. 루이스가 조언해준대로 시편을 즐겨보기로 다짐해봅니다. 성경이 가진 문학성을 즐길 수 있다면 성경을 더 맛있게 달게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루이스는 시편에서 말하는 흉악스러운 단어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우리들과 나눕니다. 이를테면, '심판', '저주',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들입니다. 시편을 몇 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 테지만, 많은 시편에서 시편 기자는 성난 고소인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으로 상정을 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바라는 마음이 전제가 되어 있는 내용이 의외로 많은 곳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처럼 자신을 법정의 피고석에 배치해두는 형사재판에서나,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원고석에 앉아 있는 민사재판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바른 심판을 소원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약하고 힘없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과 해방을 받을 것이고, 불의를 행하며 갑질을 한 이들은 처벌을 받고 배상을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심판뿐만이 아닙니다. 시편에는 보란 듯이 악인을 향하여 분노를 솔직하게 표출하며 가끔은 속물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 중 하나인 23편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그들을 배 아프게 만들어야 비로소 자신의 행복이 완전해진다고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루이스는 잊지 않고 한 가지 조언을 합니다. '어쨌든 성경에 나오는 것이니 시편 기자의 복수심도 분명 선하고 경건한 것이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지요. 다만, 그 분노의 원인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노 후 복수심을 품는 것은 죄이지만, 시편 기자의 솔직담백한 분노와 복수심의 표현은 적어도 복수심을 품는 사람들이 그러한 죄의 유혹을 느끼는 것 이하의 수준으로는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마치 하나님도 악인이 시편 기자의 바람대로 복수를 당하는 것을 기뻐할 줄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고 지적해줍니다. 하나님은 의인뿐 아니라 악인이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죄에 대해서는 시편 기자들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가차 없는 적대감을 갖고 계십니다.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말입니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에는 신약성경과는 달리 내세에 대한 믿음이 거의 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그저 죽은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내세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중심에 둔 신앙에 뒤따라오는 필연적인 결론 같은 거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사실 천국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지 않고 지옥이 그분과의 결별을 의미하지 않는 곳이라면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믿음은 해로운 미신에 불과하다고 일축해버립니다. 내세에 대한 바른 믿음은 하나님을 생각의 중심에 둔 상태에서만 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지요.


이어서 루이스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에 대해 해석을 하며 예배를 이야기합니다. 루이스에게 시편의 가장 큰 가치는, 다윗이 춤추게 만든 즐거움 같은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이 표현되어 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자주 행하게 되는 마지못한 예배 참석과 힘없이 처진 형식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종교적인 요소와 단순한 축제적인 요소의 구분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결국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에는 놀라우리만큼 강력하고 활기 있고 용솟음치는 무언가가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선의의 시기심으로 바라보게 되는, 우리 자신도 거기에 감염되기를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지요. 저 역시 예배가 한낱 종교의식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재미있는 부분도 나오는데, 그것은 루이스가 처음 신앙에 끌리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신앙을 갖고서도 꽤 오랫동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신앙인들의 귀 따가운 소리가 늘 걸림돌이었다는 고백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누군가가 자기를 찬양하면 무언가를 그 댓가로 해주겠다고 한다면, 지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콧방귀를 끼거나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고 비웃거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언젠가부터 하나님은 찬양 받을 자격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찬양 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고 입법자로서 우리에게 찬양을 명령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까지도요. 또한, 찬양은 그저 찬사나 경의를 표하는 데 쓰이는 것만이 아니라, 기쁨이 자연스럽게 넘쳐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똑같은 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영화롭게 할 것을 명령하심으로써 자신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다고 역설합니다. 찬양이 세속화되고 하나의 형식이나 순서에 지나지 않는 수준으로 전락한 우리 시대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임을 다시 고백합니다. 진정한 기쁨으로, 그분을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삶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있다는 믿음의 선진들의 고백에 아멘으로 저도 화답합니다.


시편을 통해 노래도 할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다고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좋은 방법들만을 숙지하고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내년에는 시편을 묵상하고 사색하며 노래와 기도를 맛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좋은 가이드를 만난 축복의 마침표는 가이드가 먼저 경험했고 전수해준 노하우를 실제로 체험하는 순간에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시편을 운율이 있는 시로 읽어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하나님나라의 거대한 두 기둥인 정의와 공의를 맛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098756400169131

2. 고통의 문제: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26994814011956

3. 헤아려 본 슬픔: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138735802837857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471812539530180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559914580719975

6. 순전한 기독교: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47418798636218

7. 시편 사색: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816749868369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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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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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시바타 쇼 저, '그래도 우리의 나날'을 읽고.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그저 화려한 옷과 같다면, 그 옷을 벗게 되는 날, 나는 누구일까? 벌거벗은 몸으로 흙이 되는 날, 나는 무엇일까? 내가 부숴지고 갈아지면, 나는 과연 무슨 맛을 낼까?




죽음 앞에서 진지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음의 탄환은 단 한 번도 육체를 빗나간 적이 없다. 죽음은 궁극의 승리자다.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날만이 아니다. 우린 살아가면서도 죽음을 경험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겐, 언젠가는 적어도 한 번 이상,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꺾이고 무너지고 부숴질 시기. 인생의 낮은 곳을 지날 때다.




이 책,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문득 마주한 생각 역시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 관해서였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생각할까?' 그리고 그는 그 질문과 동시에 번개처럼 무서운 답을 스스로 한다. '나는 배신자다!' 그 이외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홀로 외딴 산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과량의 수면제에 몸을 맡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언저리, 제 2차 세계대전 직후다. 사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공산당에 가입할 정도로 진보적인 혁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메이데이 궁성 앞 광장에서 벌어졌던 시위 현장에서 경찰 진압대의 공격에 공포를 느꼈고 죽을 힘을 다해 그곳을 도망쳤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비록 대학에 진학하여 공산당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이어갔지만, 사노는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를 배신하고, 당을 배신하고, 자신을 배신해버렸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괴로운 정신적인 이중생활의 시작이었다. 이는 결국 수 년 후 그를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사노 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화자 후미오의 애인, 세쓰코 역시 사노가 남긴 편지를 읽고 동일한 질문 앞에 선다.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왔을 때 무엇을 떠올릴까?' 다행히 그녀는, 사노와는 달리, 죽음을 택하진 않았지만, 후미오와의 결혼도 취소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미를 묻고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사노가 죽음을 상징했다면, 세쓰코는 삶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전후 세대가 겪은 가치관의 혼란을 보여준 작품이라면, 그 혼란은 각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갔으며 또 각 사람으로부터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켰음을 저자는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서도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언가 죽음이 아닌 삶,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희망을 끝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린 각자의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지금 우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무모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진 않을까. 한 번쯤은 자신을 죽음 앞에 세워두고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묻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노처럼 과거의 트라우마에 잡혀 현재를 저당 잡히고 미래까지 스스로 포기하는 인생이 아닌, 세쓰코처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 내가 가진 것들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 진정한 나는 빈손과 맨발로 죽음 앞에 서있는 벌거벗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묻는다. 나는 어떤 맛을 내는 사람일까? 인생을 살아가며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화하고 체화시켰을까? 그렇게 해서 내가 맺어온 열매는 과연 어떤 맛을 낼까? 내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른 생명에게 도움이 되는 자양분이 될 수는 있을까? 혹시 쓴 맛만 내는 건 아닐까? 유한함의 종착역인 죽음 앞에서 아직 붙들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미 그런 계기들을 수없이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01?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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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참담한 현실인 한국의 구조악: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고발/고찰하기.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이 책은 비유나 상징이 아닌,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저자의 직접적인 해석과 더불어, 가부장제 문화에서 습관처럼 배제되었던 여성과 소수자의 시각을 되살려내는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정상적인’ 해석의 편협함과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재해석 작업, 그리고 그로 인해 젠더나 성별 이슈를 넘어 인식의 모든 대상에 대한 대안적 인식론을 우리 모두가 가지기를 소원하는 저자의 한이 가득 담긴 글의 모음집이다. 실제 저자는 페미니즘을 ‘지식의 형성 과정, 권력의 작동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학문이자 실천’으로 정의하며, 여성학이나 여성주의라는 명칭조차도 생물학적 여성에게 국한된 문제로 보는 협소한 관점을 지양한다. 단지 여성의 지위를 남성의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올려놓는 목적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보자는 것이 이 책에 흐르는 저자의 주된 메시지다.


이미 치우친 배를 가운데로 맞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동안은 일부러 반대쪽으로 치우칠 필요가 있어서였을까. 개정증보판이라지만 여전히 2019년의 시각을 만족시킬만큼 충분히 업데이트되지 못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길들여진 가부장제라는 내 안의 색안경을 보호하려는 본능과, 또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안전한 유익을 여전히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나의 무의식 때문이었을까. 일관된 관심과 집중을 가지고서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기는 힘들었다.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저자가 사례로 드는 구체적인 사회문제를 내가 깊고 정확하게 알거나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나는 이 책을 깊이있게 공감하기엔 역량이 모자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평소 정치 사회적인 이슈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고 둔감했던 나의 성향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결과로 기득권 세력이 내어놓은 해석에 길들여져온 나의 안이한 태도가 걸림돌로 작용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나의 준비되지 않은 자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가진 색깔과 요지가 선명했음을 반증하는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책엔 여러 단편적인 글들이 모아져 있지만, 무작위로 아무 글이나 선택해서 읽더라도 저자의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을만큼, 저자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분명하다.


한편, 저자는 다양한 여성폭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문제의 심각성만 강조하면서 여성의 비참한 현실과 남성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밝힌다. 또한 그 문제들에 대해 대책을 논할 생각도 없다고 밝힌다. 다만, 한국 사회의 시각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 명의 독자로서 내가 느낀 저자의 스탠스는 충분히 여성이 당하는 모든 폭력의 심각성을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로 인해 여성이 여태까지 당해왔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과, 가해자인 남성의 비인간적인 습성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저자의 주된 비판이 실제론 이러한 폭로의 향연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 여러 충격적이고 적나라한 사건 폭로에 정신을 빼앗기느라, 저자가 원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까지는 미처 집중을 하지 못했다. 참담한 뉴스를 보고 난 직후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깊이 생각해볼 만큼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한편으론, 저자가 매트릭스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아직도 가부장제라는, ‘정상적인’ 상황을 자처하는 매트릭스 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얼마나 마음에 커다란 상처와 아쉬움을 느꼈을지, 함께 아파하는 마음도 있었다. 허나, 다른 한편으론 동일한 메시지를 여러 구체적 사례를 동원하며 많이 반복해서 나열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회에 각인된, 거의 악마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며 폭력적이고도 차별적인 체계를 가능한 모든 형용사와 수식어구를 동원하여 적나라하면서도 고급스럽게 묘사하는 방법이 저자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또한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비슷하거나 동일한 메시지를 그저 수평적으로 열거하는 방식이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혹시 독자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참담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는 충분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이 책이 결국 얻어낸 건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독자들은 금새 저자의 통쾌하면서도 강한 표현에 면역이 되어 저자가 주장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진 않았을까, 등등의 여러 의문까지도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생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 번 쯤은 꼭 읽으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둔감하거나, 그래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아픈 진실들을 습관처럼 놓치며 살고 있는, 가부장적 남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하나의 도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단, 나처럼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작품에서 인간에 내재된 폭력과 악의 모습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어찌 할꼬?’ 하며 마음이 아파 가슴을 치는 부류의 사람들은 이 책이 결코 문학책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적나라한 현실보고서와 그 이면의 시선들을 발견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것들을 포괄하는 체제의 부조리 등이 궁금한 이들에겐 서슴없이 추천할 책이다. 호흡이 가빠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8?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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