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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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실과 믿음: 집으로.

얀 마텔 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고.

단 일주일 만에 토마스는 어린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차례대로 잃는다. 이후 그는 세상을 등지고 신을 등지고 뒤로 걷기 시작한다.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발하기 위해서다.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긴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반발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 보조로 일하는 토마스는 어느 날 박물관에 기증된 유물들의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 성공회 기록 보관소로 파견된다. 거기서 그는 리스트에서 누락된 얇은 책을 발견한다. ‘율리시스’라는 신부가 쓴 일기였다. 그는 그 일기장에 곧 빠져들었고, 율리시스 신부가 포르투갈의 식민지 섬, '상투메'에 머물 당시 쓴 글에 매료된다.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집이다.” 이 짧은 문장은 여러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독특한 스케치도 발견한다. 어떤 얼굴을 그린 것 같았는데, 몇 분만에 그는 그 눈에 깃든 슬픔에 빠져든다. 토마스 역시 커다란 상실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일까. 어떤 공감대를 느껴서일까. 그는 그 일기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나온다.

아내가 죽을 당시 손에 꼬옥 들고 있었던 것은 십자고상이었다. 토마스는 그것을 빼내려고 했지만, 사지가 경직된 이후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상실로 인해 신앙적으로 표류하고 있던 그는 분노가 일었다. 십자고상을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당신! 당신 말이야! 내가 당신을 상대해주지. 두고 보라고!” 그렇다. 그는 신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토마스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에서 신부가 만든 어떤 종교적 조각품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의 흔적을 좇는다. 그 조각품은 스케치에서 본 눈을 가진 십자고상이 분명했고,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사제였던 율리시스 신부가 노예들이 당하는 인권유린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잔학함과 악함을 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품이었다. 기독교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한 십자고상이었다. 그 조각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토마스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서 신이 자신에게 한 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숙부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이용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자동차가 희귀했던 시절, 토마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보는 자동차를 몰며 별의별 고생을 다한 끝에 (죽을 위기도 넘긴다. 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부분에는 코믹한 부분도 나오고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부분도 나온다), 겨우겨우 목적지에 다다른다. 불행히도 예상했던 교회에서는 그가 찾던 십자고상을 볼 수 없었다. 낙담하던 찰나, 차를 운전하던 중 그는 어린 남자아이가 차 앞에 장난 삼아 매달려있는 줄도 모르고 출발하다가 그만 아이를 치고야 만다. 아이는 죽었다. 토마스는 뺑소니를 친다.

그는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 때문인지, 뺑소니를 쳐서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인지, 몸의 상태가 지극히 나빠진다. 구토가 쉴새 없이 나오려 한다. 어느 작은 교회를 우연찮게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토마스는 그렇게 찾길 원했던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신의 아들은 사람이 아닌 침팬지였던 것이다!

작가는 1부를 이루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끝을 맺고 2부를 시작한다. 독립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1부를 읽었다면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부에서 토마스가 죽인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최근에 죽은 남편의 시신을 들고 병리학자 에우제비우를 찾아와 부검을 요청하고, 실제로 부검이 진행되는 장면이 2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검 결과, 놀랍게도 죽은 남편의 배 안에서는 한 마리의 침팬지와 죽은 아들이 들어있었다. 마리아는 그제서야 말한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그리고 그녀는 옷을 다 벗고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부탁해요.” 에우제비우는 그녀의 마지막 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아듣고 실과 바늘로, 부검이 끝나면 늘 그랬듯, 메스로 가른 시신의 모든 부분을 능숙하게 봉합한다.

에우제비우 역시 최근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마리아였다. 사실, 죽은 아이의 엄마 마리아가 찾아오기 직전에 아내 마리아의 환영이 다녀갔었다. 늦은 밤 홀로 작업에 여전히 몰두해있는 그를 찾아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복음서의 비교를 통한 놀랄만한 해석을 늘어놓고 자리를 떠난 직후였다. 아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에우제비우는 갑작스럽고 괴기스러운 부검 의뢰를 받고 계획에도 없던 일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두 마리아 모두 환영이었을까? 어떻게 죽은 사람 몸 안에 침팬지와 아이가 들어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있는 여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에우제비우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까? 이런 온갖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같은 궁금증이 최고점에 오를 무렵, 작가는 슬그머니 2부를 끝내고 3부로 넘어간다.

3부 역시 연결점을 가진다. 3부의 주인공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고 캐나다에서 상원의원으로 일하는 피터라는 포르투갈인 1.5세 남자와 ‘오도’라는 이름을 가진 침팬지이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 때문인지, 피터는 상원의원직이 그저 직분일 뿐이다. 어느 날 오클라호마로 출장을 갔을 때 우연찮게 만나게 된 한 마리의 침팬지를 구입하게 되고, 그는 안락한 모든 삶을 정리하고 오도와 함께 그가 태어난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좌충우돌하며 도착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그는 오도와 함께 살 집을 하나 구하게 되는데, 그 집은 마침 2부에서 등장했던 마리아의 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터가 마리아의 남편 카스트로의 손주였던 것이다. 캐나다에서 걸려온 아들의 전화에서 그는 말한다. “이곳이 집이야. 이곳이 집이야.”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피터는 정말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침팬지와 함께. 그리고 어느 날 오도와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 그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전경이 다 보이는 높은 바위 위에서 오도와 함께 전설의 이베리아 코뿔소를 목격하고 조용히 최후를 맞이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 죽은 아이와 그 집안, 그리고 침팬지와 침팬지의 십자고상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 두 가지가 더 있으니, 그것은 바로 ‘상실’과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1부의 토마스도, 2부의 마리아도, 3부의 피터도 한결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들 모두 상실로 인한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어떤 믿음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그것을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집’이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세 가지 이야기의 제목에서 ‘집’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이를 뒷받침하며, 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 ‘집’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믿음’을 통한 구원과도 같은, 어떤 바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상실로 인해 생겨난 빈 공간을 각자의 독특하고 다른 모양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다다름으로써 메워가는 여정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실은 여러 모양으로 발현되는 법이다. 토마스에게서는 신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으로, 마리아에게서는 죽은 아들과 남편과의 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터에게서는 아내의 부재에도 여전히 쫓기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마음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발현은 모두 일차적으로는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는 결국 십자고상을 찾아내고야 말았고, 마리아는 원하던 재회를 맞이했으며, 피터는 오도와의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 속에서 평화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상실감이 과연 메워졌을지는 끝까지 의문으로 남는다. 피터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린아이를 죽임으로써 타자에게 큰 상실을 안겨준 결과를 낳았고, 마리아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으며, 피터 역시 아들과 누이를 남기고 먼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쉬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선 작가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변주를 들려주었지만, 결국은 하나의 곡을 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상실을 개념화하거나 공식화하여 상실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상실 그 자체에 대해서 함부로 규정짓지 않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실이란,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으며, 그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는 또 다른 상실을 낳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이야기가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시기는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집이라는 단어의 추상화로 인해 인간이란 언제나 무언가를 상실하고 또 그 빈 공간을 메우려고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잃고 메우고, 그러다가 또 잃고 또 그것을 메우려고 하고... 이러한 윤회적인 운명 속에 인간이 놓여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건대, 만약 네 번째 이야기가 존재했다면, 제목은 1부의 제목과 같이 ‘집을 잃다’이지 않을까. 마치 돌고 도는 고리처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일 것이다. 나는 이 판타지적이고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름다운 책을 통해, 희미하지만 하나의 묵직한 메시지를 건져본다. 상실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 그리고 그 상실을 메우려고 본능적으로 어떤 형태의 믿음을 통해서든지 그것을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존재, 그러나 그러다가 또 다른 상실을 맞이하고야 마는 존재, 결국 상실을 늘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또한, 상실이 각 사람에게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을 통해서, 내 주위에 상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조금은 더 넉넉하게 바라보고 공감하며 위로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그래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난 끝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817?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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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일상 -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
프레드릭 비크너 지음, 오현미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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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일상의 조각을 찾아서.


프레드릭 뷰크너 저,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내가 만약 신이었다 하더라도 진리처럼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빛나는 곳이 아닌 오름직한 곳, 먼지가 끼고 빛이 바래 손님을 맞이할 때면 늘 분주하게 빗자루질과 걸레질을 해야하는,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들의 ‘일상’ 가운데 감추어두었을 것이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눈이 깊고 겸손한 자들에게 이런 소중한 가치가 먼저 발견되는 이유를 자연의 이치와 신의 섭리에서 찾는 나는 지나친 착각에 빠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프레드릭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우리 서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좀 더 예민해지고, 그 사실을 좀 더 의식하고, 그 사실에 좀 더 민감해지십시오!”


그렇다. 우리가 제한된 육신에 갇혀있음에도 영원한 나라를 살아낼 수 있는 현장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다. 우린 일상을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우리가 한계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역설적인 해방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그 안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노래할 수 있다. 뷰크너는 이러한 성경적 신앙이 가리키는 신비, 즉 우리가 흙과 별에서 온 물질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표를 지닌, 거룩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 가장 깊은 신비라고 덧붙인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 주목하는 행위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한다.


“렘브란트의 눈으로 보고, 바흐의 귀로 듣고, 외피 아래 무엇이 있든 그것을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의 눈으로 보십시오!”


그리고 예술과 신앙은 아주 흡사한 목표를 향해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면서, 성경적 신앙은 다른 뭔가를 말하기에 앞서 우리의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의 방식대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시공간이 다름 아닌 우리들의 일상이기에, 그 한 가운데 멍하니 서서 일상을 놓쳐버리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 밖의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자라면, 그리고 개인구원론만 강조되고 사적인 복음이 부끄러움 없이 정당화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복음의 공적인 본질을 알아차린 자라면, 일상의 의미를 결코 ‘반복', ‘타성’, 혹은 '장망성'이라는 단어에 종속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와 교차하는 시공간이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말이다.


세상은 우리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곳이다. 저자는 세상에 주목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목한다는 것, 마음을 쓴다는 것, 눈을 뜨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서 가장 으뜸 계명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서 그 둘은 똑같은 일이라고 말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가까운 이웃의 얼굴을, 하도 자주 보기 때문에 실존에서 배제시켰던 그들의 얼굴을 주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가장 가까운 이웃을 향해 우리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는 구체적인 행동에 달려있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계명과 같은 거대담론만을 외치는 관념론자들은 그들의 머리는 뜨거울지 몰라도 손과 발은 차가운 법이다. 사랑의 이해와 깨달음이 차가워진 손과 발까지 따뜻한 혈액이 되어 전달되기 위해서도 우린 먼저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상이 소중하고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이유는 거기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뷰크너는 모든 예술 중에서 스토리텔링 예술보다 더 성경적 신앙의 본질에 기본이 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성경이야말로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앙적 의미에서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비단 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뷰크너가 간파했듯, 우린 모두 개성을 가진 독립된 존재이지만, 어떤 차원에서는 결국 우린 모두 같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타인의 내러티브에서 자신의 내러티브를 읽어내는 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하는 작업이며, 그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디엔에이를 읽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매혹적인 일이다. 성경을 읽어가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에 감동을 받고 그것이 던져주는 큼직한 메시지에 마음이 움직이는 단계를 지났다면, 이제 나아가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일상이다. 거대 서사를 이루는 것도 결국 작은 일상들이라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나의 작은 일상의 이야기와 성찰, 그리고 그 작은 그릇에 담긴 하나님의 디엔에이 조각을 읽어내는 소소한 작업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정직하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주목할 이유를 잃어버린 나의 일상을 돌아본다. 아, 우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가는 걸까? 매순간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린 모든 순간을 마치 흐르는 물에 종이배를 떠내려 보내듯 그냥 흘려 보내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새 둔해져버린 알아챔의 근력을 다시 키울 필요가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나 사용하지 못하는 힘. 조금은 더 낮은 자세로, 조금은 더 감사한 마음으로, 잠시 멈추어 숨을 가다듬고 창조세계를 바라보자. 그리고 귀 기울여보자. 경이감은 최고의 도우미가 될 것이다.


지나갔던 과거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도 모두 우리 영혼을 내려놓고 안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누리는 일은 현재 나의 작은 일상을, 반복되어 지겨워졌던 그 보잘것없고 누추하기만 한 일상을 낯설고 새롭게 보는 작업이 수반된다. 우리는 이제 선택할 수 있다. 아니, 원래 그럴 수 있었다. 한 장인 것만 같았던 카드는 실은 두 장이었다. 우리는 지나치지 않고 멈출 수 있고, 흘려보내지 않고 경이감에 찬 채 사랑스럽고 겸손한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내려두었던 영혼의 이어폰을 다시 꽂고 귀 기울여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마침내 우리도 자연세계의 일부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62?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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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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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꿈꾸며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는 용기).


황정은 저, ‘百의 그림자’를 읽고.


며칠 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편두통이 말끔히 사라진 오늘, 공교롭게도 날씨가 흐리다. 그림자 하나 생기지 않을 정도로 빛이 자취를 감췄다. 정오 즈음 되니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모처럼 말끔한 머리로 맞이하는 간만의 흐린 하루. 밖을 나와 비 냄새를 맡으니 이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함께 젖어가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의외로 안정감과 편안함까지 느껴진다.


N과 일대일 미팅 중이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그녀가 응답하는 사이, 난 오피스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랗고 투명한 창을 통해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조용히 비가 오고 있었다. 순간 뜬금없이 엄마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수 십 마리의 마우스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어찌 보면 꽤 살벌한 (?), 미팅이었지만, 오늘 미팅이 내게는 그저 '따뜻한 비'의 기억으로 자리잡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엉뚱한 순간이 난 참 좋았다. 기억에 남는다. 전화를 끊고, “Is it raining?” 하며 N이 물었다. 그제서야 비가 내리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답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 그녀의 눈은 잔뜩 쌓인 서류에 머무르며 무언가를 계속 뒤적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아까부터 내리는 비를 모를 수가 있지? 하고 생각하면서 난 영락없이 쫓기는 과학자의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소소한 일상에 반응하고 있는, 인간인 나를 본 것이었다. 아, 이것이구나 싶었다. 문득 가슴이 따뜻해졌다.


우연찮게 오늘 집에서 들고나온 책이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였다. 얼마 전, 신형철의 추천 소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어보려고 작정했는데, 이 책이 그 리스트 중 나에겐 두 번째 작품이었다. 어제 밤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겨우겨우 나를 다스려 중간 쯤에서 접고 잠을 청했다. 편두통에서 간신히 벗어난 참에,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말짱 도루묵이 될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아마 한 번에 다 읽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늘 점심 시간,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먹먹해진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실 작정으로 내린 뜨거운 커피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책상 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간도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식은 커피를 죽 들이켰다. 작품해설을 쓴 신형철과 나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뭔가를 써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왠지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침내 거대한 암초와도 같은 서사를 알아채기 시작할 때가 있다. 그때의 숨막히는 느낌, 떨리는 가슴, 가쁜 호흡으로 소설 속으로 본격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정말 매력적이지만 (이때는 시간이 책장 넘기는 것으로만 간다), 이 책처럼 거대 서사와는 거리가 먼, 오히려 아무런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민의 일상을 조곤조곤 정직하고 사실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묘사하면서 인물의 내면과 외부상황을 진부하지 않고 긴장감 있게 풀어내며, 읽는 이로 하여금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거대 서사가 주지 못하는 큰 울림을 선사하는 방식도 놀라우리만큼 매혹적이었다. 보통 서사를 한바탕 읽어내고 나면, 비로소 긴장이 풀리면서 해소 단계에 접어들며, 가슴에는 커다란 주먹으로 한 방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 잔잔한 묘사로 이루어진 책을 읽고 나면, 먹먹해지는 가슴으로 마지막 책장 덮기를 주저하게 되고, 급기야 아쉬운 듯 또 다시 훑어보게 된다. 이 책은 후자 스타일의 글쓰기에 있어서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황정은의 글은 뭔가 달랐다.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필체나 필력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내 좁은 눈엔 '한 강' 작가도 보였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보였으며 '주제 사라마구'도 보였다. 그러나 황정은 고유의 필체라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살면서 이런 작가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특히 편두통의 그림자가 일어나 나를 떠났던 1월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읽게 된 건 운명의 장난인 걸까.


이 책은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그렇다고 은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만도 없는 소설이다. 은교의 내러티브라기 보다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 같기 때문이다)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다.


도심 한 가운데에 위치한, 40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전자상가의 철거가 이 소설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다. 화자인 은교와 그녀의 애인 '무재'는 둘 다 전자상가에서 일한다. 은교는 조그만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고 있고, 무재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의 견습공이다. 두 사람 모두 주류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성공의 피라미드와는 거리가 먼, 어찌 보면 사회적 약자 층에 속하는, 소시민이다. 황정은 작가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 (이를테면 금수저)의 눈이 아닌 은교와 무재라는, 99%의 서민들과 흙수저를 대변하는 두 평범한 소시민의 눈을 통해, 철거 상황에 처한 전자상가 안의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사회의 현실을 나지막하게 고발한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소중한 서민들의 일상이 곧 철거될 오래된 전자상가를 대변한다면, 공원을 만들기 위해 철거를 요구하고 실행하는 집단은 효율적인 경제와 '모두'를 위한답시고 휘두른 권력이 선두가 된 국가의 체제 (알고 보면 '모두'는 99%를 배제한 1%의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을 의미할 것이다)를 대변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은 이 두 가지 세력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대립을 강자가 아닌 약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보고한 글인 셈이다. 또한 역사라는 것도 일반적으로 강자나 승자의 과거에 대한 해석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은 그 이면에 가려졌던 눈으로 기록된, 서글픈 한이 서린, 아픈 기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담겨 있다고 난 생각한다. 이는 이 책이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제목에 등장한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백의 그림자'에서의 백은 百, 일백 백자다 (白, 흰 백이 아니다). 즉, '백의 그림자'는 '하얀 그림자'가 아니라, '모두의 그림자'를 뜻하는 것이다. 사실 소설의 도입부에서 난 이 소설이 좀 공포스럽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었다. 은교가 비 내리는 숲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장면이 이 소설의 시작인데, 이 장면에서 난 일종의 무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일어나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혹시 '죽음'의 복선은 아닐까, 결국엔 은교가 죽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단순히 '죽음'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익숙하기라도 한 듯 다 알고 있는 현상일뿐 아니라 각별히 조심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일어난 그림자와 점점 더 자란 그림자를 따라가다가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은 오히려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한계를 스스로 체감하고 자포자기하고 싶은 순간, 혹은 끝내 견뎌온 삶의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릴지 아닐지 결정해야 하는 기로, 정도로 해석하는 게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백의 그림자'라는 제목이 확 와 닿는다. 나도 절망 가운데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은 상실과 고통의 연속이며 슬픔과 견뎌냄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배경인 전자상가의 철거 상황을 놓고 볼 때,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하는, 그래서 그것이 그 한 사람의 전부가 될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현실 앞에서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의례히 상실과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사회적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생각해 보면, '백의 그림자'에는 역시 흙수저이며 소시민인 나의 그림자도, 우리 모두의 그림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은교와 무재는 죽지 않는다. 정말 다행이다. 둘 다 그림자가 일어나는 현상을 경험했고, 그때 서로의 혼이 나간듯한 모습도 목격했다. 그러나 어쨌든 둘은 그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았고, 절망과 상실, 아픔과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삶을 선택했다.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난 결말을 읽고 나서야 긴장했던 몸을 풀 수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고장 난 차를 놓아두고, 혹시나 도움을 청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난 그것을 아주 용기 있는 결단이었고, 희망을 상징한다고까지 해석하고 싶다. 어두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하고, 용기를 내어 전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림자도 (우리를 따라오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린 약자들이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으로 뭔가 잘못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은교와 무재로 대표되는 우리 '을'들은, 비록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황에 노출되었지만, 소설의 결말에서처럼 결국은 이겨내는 것이다. 작가가 책의 마지막에서 직접 말하듯, 나 역시 은교와 무재가 어두운 섬에 하루 동안 갇힌 꼴이 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한다. 건강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나 역시 내 그림자가 일어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런 상황 자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무속과도 같은 가르침을 준수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따라오게 만드는 결단과 행동을 할 수 있길 바래본다. 무재에게 은교가, 은교에게 무재가 있었듯, 그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함께 할 동지와 손을 붙잡고 말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66?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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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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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짐. (개인적 제목: 단문의 미학)


 


크리스토프 바타유 저,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원제: ANNAM)를 읽고. 




신형철은 평론가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그의 글은 정확하고 예리한 칼이 되어 읽는 이의 머리와 가슴 깊숙한 곳까지 찔러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공감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좋은 글이 내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어려웠다. 독서량이 부족해서도, 독서 편식을 해서도, 또 분석적인 글읽기를 못해서도 아니었다. 매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신형철의 책을 집어 들고 한두 페이지를 정독해온 지도 벌써 여러 주다. 여전히 난 적응을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그의 신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끝에 보면, 그가 추천한 도서 목록이 나온다. 그가 직접 쓴 글 말고 그가 추천해 마지않는 글을 읽어보면, 내 문제를 푸는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가가 아끼는 책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따라가다보면 신형철 글쓰기의 여러 프로토타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 중고서점에 들려 추천 리스트에 있는 모든 책을 검색했다. 운 좋게 두 권이 있었다. 이 책,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그 두 권 중 하나다. 




일견에도 아주 짧은 소설이다. 전체 분량도 짧지만, 한 챕터의 길이는 물론 한 단락의 길이도 짧다. 무엇보다 저자가 사용하는 문장이 아주 짧다. 그래서 다른 책에 비해 여백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가 아닌 소설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단편소설. 과연 이런 제한된 형식 안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출판되어 수많은 찬사와 함께 상까지 받았다 하고, 수 천 권도 넘게 읽었을 신형철에게 선택 받은 소수의 추천 리스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 책은 분명 독특하고 고유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증거를 찾는 탐정이 된 기분으로 난 이 책을 읽었다. 




소설은 '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곱 살 나이의 베트남 황제가 프랑스 왕을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농민 봉기로 말미암아 폐왕이 된 황제가 왕위를 되찾고 왕국을 구하기 위해 급히 아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원조를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황제가 프랑스에 도착한 건 이미 9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배를 타고 험난한 길을 왔기에 사실 살아있다는 것만해도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왕은 루이 16세, 때는 1787년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루이 16세는 물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곧 처형될 운명에 놓였던, 즉 프랑스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루이 16세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는 베트남을 도울 수가 없었다. 자국의 문제만으로도 버거웠던 것이다. 원조 요청이 거부되었지만 어린 베트남 황제는 그 상황의 진정한 핵심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폐렴으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린 황제가 죽기 전 늙은 주교와 우연찮은 만남이 있었다. 비록 그는 그 만남의 의미를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만남은 이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의 발단이 되었다. 왕의 권한이 아닌 그 주교의 권한으로 베트남에 선교사들을 소수의 군인들과 함께 두 배에 태워 파송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도미니크 수사를 비롯한 작은 무리의 수도사들과 다섯 명의 수녀들이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어있었다. 




베트남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 베트남에 간신히 도착하고 나서도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 프랑스에서도 마침내 대혁명이 일어났고 수도원도 혁명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파송기록은 불타버렸다. 베트남에서 살아남은 자들조차 조국으로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잊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선 폐왕이 되었던 황제가 왕위를 되찾게 된다. 아들을 보냈음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그리고 아들을 죽게 놔두었던 프랑스에게 분을 품은 황제는 자기 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모조리 죽여버린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 단 두 명이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옮겼기에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벌써 결말에 이른다.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 저자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수사와 수녀의 타이틀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대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성직자가 아닌 인간이란 타이틀을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들은 미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목숨까지 걸고 머나먼 땅까지 온 선교사였다. 생명의 위협이 있었던 여러 상황을 거쳐오면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선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와 사명감은 약해져갔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함께 잊어왔거나 아님 애써 무시해왔던 인간성은 뒤늦게 발아하기 시작했다. 생명처럼 아꼈던 성서와 교리문답으로 보내는 시간은 하나의 거추장스런 옷처럼 여겨졌고, 그들에게 현재 주어진 베트남이라는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낙을 느끼고 누리기 시작했다. 수사와 수녀의 복장은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베트남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었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선 그것마저도 번거로웠다. 비가 끊이지 않고 내리는 우기 한 가운데의 어느 날, 진흙이 흘러내리고 곧 무너질 수도 있는 움막 집에서 둘은 그동안 금기라고 여겼던 남녀 간의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 책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머나먼 베트남이란 나라에서 그들이 잊혀져가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베트남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였지만, 끝내 잊혀진 존재가 되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오히려 자신들의 조국 프랑스가 다다를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를 통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에서 결국엔 죽어간 선교사들이 성직자 이전에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독교인인 나의 눈엔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따져보고 싶은 부분이 충분히 있을법한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소설은 아름다운 소설로 놔두기로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저자가 이 책을 썼을 땐 스물 한 살의 나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처녀작이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짧은 문장들로, 마치 무관심하고 냉정한 인상까지 풍기는 듯한 필체로, 이 모든 서사와 묘사를 다룬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느낄 수 있는 묘한 감동도 이 때문일 것이다. 커다란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이 책에는 저자의 단문으로 된 필체가 오히려 아주 효과적이고 의외로 완벽한 궁합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짧다는 건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짧은 문장들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하는 신형철이 이 책을 추천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 책을 평가했다. 이젠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이 소설의 번역자인 김화영 선생의 말씀. ‘책을 다 읽고,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그리고 번역을 하고 마침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적요함, 거의 희열에 가까울 만큼 해맑은 슬픔의 위력으로부터 완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읽은 지 십 년이 됐지만 나 역시 아직도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토프 바타유는 신형철이 그의 책에서 말했듯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말을 충실하게 충족시키는 글쓰기를 해보인 것이었다. 짧지만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 좋은 글을 쓰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소중한 것을 배웠다. 단문의 미학을 느껴보고 싶다면, 난 이 책을 서슴없이 추천한다. 나도 여러 번 이 소설을 더 뒤적일 것 같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75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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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과향 가득한 투명한 달밤.


마루야마 겐지 저, ‘달에 울다’를 읽고.


시와 소설의 절묘한 조화. 읽는 내내 한 문장 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시적 이미지와 소설적 내러티브에 심취해 가빠진 호흡과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기조차 아쉬웠던 매혹적인 책. 이런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숨막힐듯 아름답고 푸르도록 서글픈 달빛과 그 투명한 달빛에 비친 사과향 가득한 조용한 시골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것만 같다.


오감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풍성한 필체를 단문만으로 해낸 마루야마 겐지. 난 어제밤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필체는 철저히 계산된 듯 정확하다. 글쓰기를 집짓기에 비유하는 평론가 신형철이 이 소설을 추천한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러나 정확함만으로 마루야마 겐지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뭔가 더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치명적이고 매혹적인 아름다움.


정확하고 아름다운 필체가 만들어낸 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시. 이 책 ‘달에 울다’는 이름도 밝히지 않는 한 남자의 독백이다. 사과나무 밭을 일구며 평생 시골마을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는 한 남자의 애잔한 이야기다.


그가 자는 방엔 병풍이 하나 놓여있다. 사계절이 그려진 묵화다. 그 묵화는 하늘과 달을 품고 있으며 물과 바람도 담고 있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자연에 거스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남자도 있는데, 그는 법사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흠집 많은 비파를 켜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법사다. 그는 주인공의 분신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 야에코이기도 하며, 때론 아버지, 때론 촌장이기도 하다. 법사는 주인공의 상상 속에 살며 그와 함께 늙어간다. 주인공은 평생 그 조그만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과나무를 일구며 단조로운 삶을 살아갔지만, 법사는 병풍 안에서 유유히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닌다. 법사는 주인공 내면을 반영하기도 하며 그것을 충족시켜주기도 하는 매개물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아마도 주인공에겐 유일한 평생지기 친구였을 것이다.


‘달에 울다’는 마루야마 겐지의 필체 그 자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며 충만함을 유지하며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절제된 방식으로 조용히 지속해서 내뿜는 그의 글쓰기. 그를 만난 것은 나로선 굉장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배우고 닮고 싶은 글. 베껴 쓰고 싶은 글. 아,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마루야마 겐지의 필체를 넘어서는 필체를 구사하고 싶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을 읽은 게 아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 것이다.


#김영웅의책과일상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929?category=751509 [흩 어 진 행 복 의 조 각 을 찾 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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