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1
5.18 기념재단 엮음 / 한얼미디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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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월 대한민국은 충격의 문건을 발견한다. 과거 기무사령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될 경우,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동조자들의 정치적 권력에 도전하는 시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수천 명의 군사병력과 탱크 그리고 장갑차를 이끌고 수도권에 밀집하고, 계엄을 선포할 때 국회마저 계엄군 수중에 넣어 통제하려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어느 국회의원이 군부대가 쿠데타를 기획하고 있다는 충격적 발언을 했다. 발언이 일어나자 군부대는 아무 일이 없다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뒤에서 계속 은밀하게 공작정치를 실행하고 있었다. 국민을 감시하고, 체증카메라로 촛불시위하는 시민들을 몰래 촬영하여 군 지휘부 쪽으로 계속 정보를 제공했다. 편의대, 사복을 입고 정보를 수집하고 첩보를 실행하는 군사조직이 있다. 예비군 훈련을 하면서 그런 편의대가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계엄발령을 실행하면서 우린 끔찍한 일들을 역사에서 배웠다. 제주도 43사건은 제주주민들의 한으로 남았다. 아직도 살인에 동조세력에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 살해당해야 하는 그 통한과 여전히 피해자를 불순분자로 모는 사회적 죽음이 작용한 것이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경우 대부분 민간인의 신원은 회복되기 어렵다. 그들을 살해한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으로 밟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주체가 이양되기란 어렵다. 정치적 권력은 이데올로기적 지배논리 헤게모니를 더더욱 확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한 학살과 은폐, 조작, 왜곡은 죽음 이후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영원한 사슬인 것이다. 박근혜의 몰락은 최순실 게이트가 있었지만, 그 전초는 세월호 사건이다. 세월호에서 보여준 참사가 얼마나 끔찍하고 슬프고 화가 나고 분노로 일색 할 수밖에 없는 비극 중에 비극이다.

 

그 비극적 역사에서 사고 그 자체는 우연일 수 있지만, 사고 후의 일들은 우연이 아닌 하나의 인위적인 통제였다. 피해자 식구를 마치 반국가세력 내지 이권단체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애를 죽었는데, 어떤 부모들이 그 돈을 노리려 할 것인가? 물론 그런 사람은 있었다. 이혼 내지 별거하여 평소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춘 자가 이제 보상금 문제가 슬슬 나오자 하이에나처럼 튀어나오는 경우를 말이다. 인간에게 돈은 있으면 좋지만, 자신의 인간성을 모조리 팔아먹는 존재들도 있다는 게 슬플 뿐이다.

 

세월호 사건이 있을 때 가장 괴로운 이들은 바로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님이다. 물론 다른 희생자들도 있지만, 단원고의 피해가 가장 심했고, 죽은 자식은 1명이나, 그 자식의 부모와 형제, 친구와 친구 가까운 이웃마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 자식을 많이 낳던 시대에 자녀 1명이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부모 역시 병들어간다. 요새 같이 아이를 1명 내지 2명을 낳는 시대에 오직 하나뿐인 핏줄이 그렇게 사라진다면 부모의 가슴은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부모에게 짓는 가장 큰 죄는 부모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단원고 학생들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부모에게 가장 큰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식의 죽음을 규명하고, 더구나 자식들의 유해와 유품마저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들은 삶 그 자체를 포기하란 말과 같았다. 이런 고통을 받은 사람에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느 뉴스기사에 518 엄마가 416 엄마라는 제목을 보았다. 1980년 무더운 5월의 광주, 518의 비극은 그렇게 탄생했다.

 

국가에 의해 버림받고 농락당한 416 엄마는 국가에 의해 자식을 빼앗기고 통한의 시절을 보낸 518 엄마를 만난 것이다. 이번 계엄문건을 보면서 518의 그 끔찍한 일이 다시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소름이 끼친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하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할 때 모습은 정말 순화된 모습이다. 나는 아직도 광주의 주남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잊을 수 없다. 책을 보면서 어린 아이들이 더운 날에 주남마을에 있는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래저래 놀 때 군인들이 동네 아이들에게 총을 발사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아이는 얼굴 반이 날라 갔다. 뇌수가 터지고 피가 범벅된 아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갔다. 그냥 길거리에 다니다가 총을 받고 가슴 뒤에 사라진 학생도 있었다. 어느 여학생은 가슴마저 칼에 의해 베어졌다. 어떻게 사람에게 그것도 같은 나라 사람, 같은 민족에게 포악하게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울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슬프고 화가 나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죽은 이의 마지막 모습만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 사연을 담으려면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이 필요하다.

 

남은 가족들의 구술기록은 그야말로 통한이다. 부모의 반수에 가까운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총을 맞고 칼에 찔리고 몽둥이를 맞아 죽었다는 사실에, 또한 시체조차 참혹하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빨갱이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에 몸과 마음에 병들기 시작한다. 건강한 시골농부인 아버지들은 술만 의지하다 몇 년 안에 간암으로 뒤따라가고, 순박한 시골아낙들은 사나운 맹수가 되어 투쟁을 한다. 1명의 죽음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그것도 모자라 군경은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지내지 못하게 한다.

 

늘 감시하고 따라 다니고, 직장까지 찾아오며, 518유족들이 모이면 방해하고 심지어 어디 멀리 데려가 낯선 곳에 버리고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치장에 갇혀 형사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시위하다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온 몸에 멍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518 엄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낳고 기른 아이는 착하고 평범하며,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데 어떻게 빨갱이고 폭도란 말인가? 단지 집에 있는데 총알이 날아 들어와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 자기들끼리 오인사격으로 열 받은 군인들이 화풀이하기 위해 마을청년을 총으로 살해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그 죽음마저 농락한다. 심지어 시체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얼굴과 전신에서 악취와 액이 흘러나온다. 부패한 살집 속으로 구더기를 나오며, 심지어 신체조차 절단되어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소문을 듣고 자신의 시신을 찾아 광주일대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그들, 암매장에서 찾아낸 자식의 옷과 흉터나 점, 죽은 자식을 부여잡고 통곡하던 그들의 시계는 이미 멈추었다. 그들이 받은 굴욕과 모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작년 518 행사 때, 어느 여성이 나왔다. 그녀는 자신에 태어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부모님이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산모의 머리에 총격을 가했고, 뱃속의 8개월 아이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2사람의 생명은 1발의 총알로 사라졌다. 맹수조차 새끼를 배에 품은 암컷을 노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도 눈앞에 있던 임산부의 머리를 정확히 노렸다. 이런 죽음 앞에서 어떻게 자식의 죽음을 가슴 속에 품고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배상비는 그 죽음에 대한 정당한 가치로서 나오는 게 옳으나, 부모들은 돈이 원해서 배상비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 죽음에 대한 정당한 반성과 의미를 두기를 원한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서 보상비 많아 좋겠다고 말하는 인간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았다. 세월호 사망자 보상금이 억이든 몇 백억이든 그게 있다 해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518희생자의 가족이 남긴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해 5월 탱크와 군인들이 광주를 짓밟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518망월동 묘역이 민주화의 성역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어느 희생자의 가족이 거기서 일을 하는데, 군인과 경찰이 과거에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존재인데, 이제 군인과 경찰이 518망월묘역을 찾아와 추모한다는 게 가끔 믿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직도 광주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과거 독재정부의 마수가 남아있다는 점이 무서운 일이다. 광주에 사는 사람이 부산에 오면 생수통도 안 판다는 말이 있었다. 피해자의 그들이 오히려 반국가적 세력이 되어야 한 슬픈 일들, 416 세월호 역시 비슷했다. 518이나 416을 보면 518 당시 공안정치검사, 폭력경찰, 살인군대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416 때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이런 비극이 일어나도 그들은 국민을 속이고, 피해자의 가족을 억압했다. 심지어 쿠데타 음모까지 꾸며 전 국민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려 했다. 지금 내 고모 1분이 광주에 사신다. 연세가 칠순 정도 되셨다. 광주에 일어난 비극을 생각하자니 그 당시 군부세력을 용서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 든다. 시골에 내려가면 집안대대로 우리가족과 친분이 있던 먼 친척집안 1사람이 518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분은 518 당시 살해당하지 않았지만, 518의 업보를 평생 지고 살아간 사람이다. 그가 수배될 때 가족식구를 데려가 고문하였다. 지금은 그 분의 고향에 가면 마을주민들이 추모제를 열어준다.

 

유흥준 교수님이 그 분의 집을 해마다 방문하신다. 유홍준 교수님은 윤한봉, 그의 이름을 기억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세상을 쉽게 산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셨다. 광주에서 군부에 저항하다 사라진 그들, 군부에 의해 살해당한 그들, 모두 살기를 원했지만 죽음을 삶의 의지를 비켜가지 않았다. 죽은 자는 살기를 바랐고, 죽은 자의 가족은 같이 살아가길 바랐다. 그들의 억울함이 모두 풀리고, 그들을 살해한 그들의 죄악이 세상에 모두 드러날 때 그들의 죽음은 다시 삶으로 이어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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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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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라비, 알고보니 사회노동포럼연대 이영희님이다. 오랫동안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하신 분이고, 그동안 한국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메갈리아 사태부터 계속 비판했고, 이번에도 비판했다. 저분의 명언은 어떤 사상이든 휴머니즘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성난 승냥이떼를 보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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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5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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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오면서 우리는 진짜라는 의미에 많은 열정을 부여하게 되었다. 영화, 스타, 스포츠, 정치사회 이데올로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물어보면 뭔가 상세하게 답변하거나, A에게 질문에 답변내용이나, BC, 더 나아가 그밖에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특별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란 보편성이 작용할 줄 모르나, 보편성이란 하나의 상식에 기인하나, 개성이나 자기 안의 열정은 보편적 상식에 의해 등장하는 게 아니다. 개성에 대한 보편성은 대다수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캐릭터를 소유하고 있는 점이다.

 

문제는 캐릭터라 불리는 개인성이 어느새 보면 개인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관점을 띠게 되는 점이 많아졌다.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관, 자신만의 가치에서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사유는 자신에게 나올 수 없다.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여건, 그리고 교육적 특성과 사회적 변화 모두 개인의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이들이 그런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해서 다 같은 것만은 아니다. 결국 사회적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나, 개인성은 사회적인 영향만으로 다 성립되지 않은 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런 요소가 잘 보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는 20세기와 달리 TV,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한 미디어 환경이 구축된 게 아니라 PC, 인터넷, 더 나아가 스마트 폰의 등장 아래 네트워크 시스템 및 모바일 세계로 확장되었다.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공간적 활동제약은 매우 축소되었다. 누군가의 소식을 듣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침실에 누워 손가락으로 스마트 폰을 누르면 금방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최근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을 읽는데, 한국 전통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전통시장은 매일이 아니라 5일에 1번 열려 5일장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그 시장에 가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적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가는 것일까? 늘 같은 생활과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5일장은 늘 새로운 이야기와 소문 그리고 거기서 피어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통을 원하는 존재다.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던 인간이 이제 인터넷 창으로 가상의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보이지 않기에 마음 속 깊은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여기기도 하나, 정작 그것을 털어놓는 내 자신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진심으로 내 이야기를 수용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진심을 알 수 없는 투명한 장벽에 자신이 만들어낸 진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앤드류 조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현대사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에 대한 기만과 위선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도서이다.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어리석은 인간이라 여겼다. 그런데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오길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와 다르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현명한 인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것을 인식조차 못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기를 사람은 어느 지식을 알기 전에도 이미 자신은 알고 있다는 지성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다. 인간은 모르고 알고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가치 내지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세대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 어느 누가 일으킨 사회적 물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몰려 각종 덧글을 단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이버세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이버공간이 아니라 일상세계를 파괴한다.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 하차대기 중, 뒷문에 어느 어린 아이가 뛰어내렸다. 그 아이가 뛰어내리고 엄마는 당황했지만, 버스기사는 다음 정류소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내려주었다. 그게 인터넷에 소개되자, 버스기사의 삶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CCTV로 통해 보호자의 문제라고 드러나자 이제 아이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비판을 할 수 있어도 각종 욕설과 비난이 오고가는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인간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험악한 발언을 날리는 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당하다 여긴다. 왜냐면 누군가 잘못했으니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사람이니 비난을 날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전후맥락이 필요하다. 앞뒤를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고, 최종적으로 문제를 지적하여 개선하는 게 이성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는 뒷전이고, 오로지 공격만 존재하고, 적나라한 욕을 통해 자신이 악인을 응징했다는 착각의 세계에 빠진다.

 

착각은 곧 진정성에서 기인한 기만이다. 왜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것인가? 현대사회는 정보가 망라된 첨단사회다. 소통의 장은 언제나 열려있지만 열린 게 아니다. 자신만 아니라 자신 이외의 모든 이에게 열려있다. 과거 100년 선거할 경우 시장후보가 곳곳을 돌며 얼굴을 마주해야 하나, 이제 TV토크쇼에서 후보들을 볼 수 있다. 상대방의 정책안에 대해 관심 있게 듣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이 보는 것은 상대방 얼굴과 몸에 드러난 이미지다. 즉 겉모습에 나오는 분위기가 많은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어눌하게 말을 해서 혹은 말실수를 해서 지지율이 폭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도 토론회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몰아넣으면 역효과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에서 보여준 모습에서 이성보단 순간적 감성이 따르고, 그 감성을 드러나는 이들에게 하나의 진정성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이란 이토록 감정적이고 순간적이며,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란 말인가? 기 드보르가 저술한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매개로 하는 사회이다. 이미지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미디어로 보여주는 방송매체 혹은 신문 또는 인간생활 그 자체만으로 스펙타클이다. 이미지가 매개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주변은 이미지로 가득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세계로 인간과 대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스펙타클로 구축된 이미지 왕국의 세계이다. 진정성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 나온 최신유행인기가요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고, 그것이 길거리에서 들려야 한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취향이나 성향보단 지금 억지로 고의적으로 은폐된 사실에 모두가 열광해야 한다. 열광 속의 스펙타클러는 자신이 의지가 아닌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세계에 더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 시대에 흘러나온 이미지의 부산물에 같이 떠밀려가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회도 20세기 중반과 후반은 민주주의와 노동투쟁으로 많은 진보를 일구어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진보는 그렇지 않다. 이성적 판단력과 구체적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느낀다는 하나만으로 열광한다.

 

진정성의 의미와 사실적 관계, 사회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단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신봉하는 진정성만 남게 되었다. 거짓만 넘치는 진정성은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가득하다. 어떤 사회적 문제가 일어나면 그 행동의 원인 사회적 연결성이 있지만, 그 자체가 사회를 대표하는 인식은 아니다. 결국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성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인용하는 셈이다. 자신이란 존재가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너무 매몰되면 자신의 존재성은 사라지게 된다.

 

시대적 흐름은 읽고 변화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란 홍수에 몸을 내맡기면 안 된다. 홍수에 휘말린 사람의 최후는 상상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루소가 소개되는 점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당시 명사들의 오류처럼 인간이 숲에 들어가 곰처럼 사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세계인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듯이 실제 자연에 대해 예찬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되고, 인간사회의 인간은 본연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살아간다. 그런다고 루소는 숲속의 곰이 되는 게 아니라 자연을 누비며 식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루소처럼 자신의 본연으로 갈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농촌은 이미 인구가 말라 황폐화되어가고 있고, 경치 좋은 곳은 펜션과 호텔, 그리고 카페들만 즐비하다. 자연이란 공간에서 인간은 하나의 존재성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감성을 충전하는 관광지로 변모된 것이다. 그나마 자연이 가득한 관광지를 가면 힐링이 되겠지만, 그곳조차 갈 수 없는 이들은 늘 일상의 빡빡함만 기다린다. 과거 인간은 자동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민주주의 국가 이전에 왕국과 봉건영주국가였다. 게다가 교회세력이 왕족과 귀족하고 연합하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자신들의 결속력을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왕은 단두대 아래 사라지고, 귀족은 빈털터리가 되어 소부르주아로 되거나 심하면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이게 인간의 역사이다. 민주주의 가치가 도래하기에 바람직하나, 거기에 반해 문제점도 있다. 인간의 진정성은 각 개인과 국가적 관계로 대비한 근대국가로 이행되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은 붕괴했다. 한국사회도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대가족은 이미 사라진 문화제도이다. 일가족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은 거의 드문 케이스가 되었고, 그런 장소조차 관광문화지역으로 설정되어 버렸다.

 

강제소속이 없는 반면 자신의 정체성에서 모호하게 변질되었고, 정체성에 대한 심리적 빈곤은 진정성에 대해 감각적인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차라리 스포츠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 약할 수 있다. 적어도 그라운드 위의 선수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이미지 메이킹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은 어떨까? 그래도 대중은 거기에 열광한다. 열광은 진정성이 아니라 허구성만 남을 뿐이다. 진보적 사회는 이성에 의해 사회문제를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적 비판 없이 무비판적 열광이 남은 사회는 그저 같은 문제만 돌고 돈다. 진정성이란 참된 진실은 결국 이성의 눈이다.

 

근대화에 의해 인간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부여받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이성에 대한 자율성을 완전히 부여받지 못했다. 탈근대화 시대는 감성과 소통의 세계는 맞다. 하지만 감성의 소통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타인과의 조우라면 문제가 발생된다. 타인의 존재는 자신이 아니기에 전혀 다른 관점이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무리하게 부여받은 동질성은 자신의 판단력이 아니라 기 드보르가 지적한 스펙타클된 사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은 우리가 피를 흘러 쟁취한 자유의 대가이다. 자유를 원했는데, 고독의 시간이 도래했다. 고독을 탈피하고자 계속 진정성을 내세우나 이 책에서 말하듯 그건 자신을 기만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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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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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도서이다. 요새 진보세력의 방향을 생각 후, 사회경제적 관점을 보면 참으로 답답해보인다. 생산의 조건은 ˝재생산의 기반˝에서 시작된다. 내일도 모레도 10년 뒤나 20년 뒤나 사회적 인프라를 없이 살 수 없으면서 정작 거기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다소 생각해야 할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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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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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교수가 작고하신지 3년이 다 되어 간다. 한국 경제학과 학문에서 그 분이 보여준 업적은 정말 탁월하다. 특히 고전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유주의 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모두 알려주신 학자이니 일반 경제학자와 비교하여 그 기여도가 상당히 높지 않을 수가 없다. 김수행 교수님은 경제학을 전공했고, 영어 원문을 토대로 <국부론>을 번역하고, <자본론>은 독일어 원문이 아닌 영문 중역본으로 한국에 제시했다. 한국 마르크스 연구자로 <자본론>을 번역한 곳은 비봉출판사와 도서출판 길이란 곳이다. 비봉출판사는 김수행 교수님의 서적을 주로 출간한 곳이고, 도서출판 길은 강신준 교수님이 번역하여 출판한 곳이다.

 

한국의 <자본론>은 출판사 2곳에서 점유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 정도는 많은 서적업체에서 발간하나, 유독 <자본론>2곳에서 서로 대조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임승수 작가의 글을 봤다. 이분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운동가이고, 그는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을 토대로 글을 썼다. 그가 적은 페이스북 글이 생각난 이유는 최근 진보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진보언론사나 보수언론사는 모두 엘리트직종이 많다. 엘리트의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엘리트로서 보여준 행동들이 일반 서민 내지 대중과 부합되지 않는다.

 

보수언론은 대중을 겨냥하여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는 엔터테인먼트 계열이고, 진보언론은 대중을 선동하기보단 계몽하려 드는 선민의식이 너무 강하다. 노 키드 존과 관련하여 보수와 진보는 서로 가게를 중시하거나 기혼여성의 권리를 중시하는 답 없는 게임을 했다. 하지만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 공부>에서 이미 그분은 알고 있었다. 진보라는 분들이 <자본론 공부>라는 간단히 정리한 이 책을 읽었다면 생각이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최근 부동산 가격이 증가하고, 시장위축으로 인해 대부분 사람들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린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주변 다른 건물의 가격이 오른다. 문제는 주로 투기대상이 되는 아파트라도 아파트 단지 인근에 위치한 상가건물,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위치한 번화가 역시 투기의 열기에 의해 임대료가 마구 올라간다. 2년 임대한 가게주인이 수입이 2배가 오르면 임대의 가격은 그 2배가 아니라 그 이상이 된다. 잘 되는 가게 원래 계약자를 내보내고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를 세운다. 이미 그 건물의 식당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또 다시 찾아올 확률이 높다. 높은 가게세로 문을 닫거나 가게를 옮기는 부류가 많다.

 

지방도시 중하위층들이 많이 밀집한 주거지에서 가건물로 된 점포 한달 임대료가 70만원이 이른다고 들었다. 만일 아파트가 몰린 대규모 상가건물이라면 점포세가 수 백만원에 이르고, 고기 집은 천 만원 이상 호가하는 경우가 많다. 임금이 올라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장이 혼자 열심히 일해도 돈이 잘 벌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임대료의 고공행진이다. 편의점 한 달 임대료가 500만원이고, 아르바이트생 파트타임 고용은 100만원이라고 하자, 만일 임대료가 20% 오른 것과 이번에 최저임금 20%가 오른다. 아르바이트생은 2명을 이용한다.

 

임대료는 100만원이 오르고,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월급은 40만원이 오른다. 사장은 수익에 빟해 지출이 많아 결국 아르바이트생 1명은 해고한다. 시간당 1100원 올라 일일 8시간 월 22 근무해도 20만원이 추가로 나간다. 임대료는 수 백만원이 나간 것은 아깝지 않고, 아르바이트생의 임금상승은 아깝다고 중소기업이 죽는다고 한다. 1달 공장 임대료는 고정비용이고, 사람들이 먹고사는 월급은 고정비용이 아니라 호혜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임대료의 상승은 물가를 오르게 하고, 가게 점포가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 그러면서 고용노동자가 해고되고, 개인 사업가는 상가 문을 닫는다.

 

점점 갈수록 대규모 자본의 상점이 몸을 키우고, 개인사업자들의 자리가 없어지고, 이들 역시 고용노동자로 편입된다. 계속 되는 반복적인 오류에 경제는 어렵다. 물건을 생산하면 소비를 해야 한다. 소비를 하려면 경제적 여건, 즉 생계수단의 확립이 필요하다. 현재로 생계수단이 확립되지 않으면 누가 다른 사람의 상품을 살 것인가? 친구가 옻나무 액을 파는 일을 하다 접었다. 처음에 옻나무 액을 사는 부류는 적당히 먹고사는 중산층이다. 하지만 경기가 나쁘게 되니 옻나무 액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경제가 돌기 위해서는 생필품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필품에서 조금 더 나아가 약간의 여유를 소비할 수 있을 때 돌아간다.

 

휴일을 늘려도 사람들은 집에만 있는 이유는 생필품도 비싸지만, 여행경비는 더욱 비싸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물가와 더불어 임금의 격차이다. 임금이 혼자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가족부양이 어렵다. 최근 결혼문제와 관련하여 비혼자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자유주의적 발상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물질적 토대가 결국 사회적 시스템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결혼을 위해서 집이 필요하나, 집값이 너무 비싸서 통상임금으로 도저히 청년들이 자기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집을 사기 위해서 대출을 해야 하나, 대출도 어느 정도 수준을 지녀야 가능하다. 물가의 상승에 비해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는 어렵고 최저임금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경제는 잘 안 돌아가고, 부동산 시장은 여기저기 몰리나,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보다 아닌 사람들에게 그 혜택이 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대기업은 해마다 수익이 계속 증가하고, 거기에 더해 프렌차이즈 시장까지 점유하여 동네가게들을 모조리 문 닫게 만든다. 그러나 막상 고용하는 인력은 정규직보단 비정규직, 비정규직보단 인턴 내지 아르바이트생들을 추구한다. 임금의 가치가 낮을 뿐만 아니라 쉽게 해고될 수 있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든 지켜야 하니 필요이상의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것이다.

 

취업시장에서 늘 고용자들은 불안해야 한다. 서로 경쟁을 하고, 불리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면 계약조건이 고용주에게 유리해야 한다. 자본주의시장사회라면 계약조건의 그 목적은 이윤의 추가 창출과 임금의 추가 저감이다. 지금 언론과 여론이 참 한심한 수준인 이유가 청년실업과 결혼문제를 운운해도 그 모든 문제의 시작점은 임금과 고용의 관계인데, 그 문제를 사회적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다. 정말 그 개인이 공부도 안 하고, 아무 준비 없이 취업노선에 뛰어든다면 개인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대학4년은 기본이고 토익에 자격증 심지어 어학연수도 다녀와도 쉽게 자리를 찾을 수 없다. 물론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경쟁자가 몰린 탓도 있지만, 그들의 노력에 비해 찾아오는 대가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중소기업에 사람이 없어 문제라고 하지만, 실제 중소기업의 임금과 복지처우가 열악하기 때문이란 점도 이유다. 사실 임금문제 가지고 최저임금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자들이 받는 월급이 최저임금이라면 납득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받지 않는다.

 

자본론에 대해 공부하면 사회적 시스템이 경제적, 물질적 구조에 의해 지배받고, 법과 제도는 바로 그런 기득권을 위해 체계화시킨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해고는 법적인 절차에 의해 존중받지만, 노조활동에서 비롯된 파업과 단체행동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결국 가지지 못한 자들이 불리한 결과로 마무리된다. 다행히도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아직까지 군주정이 많았다. 프랑스는 민주정이 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로 되고, 그가 몰락하지 부르봉왕가가 다시 집권하다 또 다시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기도 했다. 독일이나 그 밖의 나라를 보면 왕이 없더라도 군사정권 내지 경찰세력을 지배하는 권력자들이 강력한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학적으로 자유가 있었지, 그것도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현대사회는 그나마 선거제도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정부가 어느 정도 경영권자들에 대해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쉽지 않다. 대한항공 회항사건을 두고 항공보안법으로 보면 분명 최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9개월 징역으로 끝난 재벌가의 모습을 보면 그 황당함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려면 사회적 권력이 어떤 관계성에서 드러나는지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체계가 도입되기 전인 농업사회와 봉건시대라도 제물이 많은 영주나 또는 상인들이 많은 영향을 주변에 미쳤다. 화폐가 중심이 아닌 농산물이 중심일 때 상인은 영주에 비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자금을 가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압력을 넣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공납폐단이 심한 이유가 관리들의 부정도 있지만, 상인들이 중간에서 이윤을 챙기기 위한 작업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대로 행정조율이 필요하나, 왕조시대나 봉건사회, 독재 및 관료주의 사회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이 상인들과 담합하여 서로 이익을 나누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투표권에 의해 결정되고, 추후 그 투표권으로 심판을 받는다. 물론 심판하는 자들이 어리석으면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영주와 군주는 태어나면서 비리를 저지르게 되면 결국 반정이 따라올 수 있지만, 민주주의국가에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면 자신의 비리조차 하나의 정당성으로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론 공부>를 읽는다는 것은 최근 이슈화된 경제민주화가 제대로 통용되기 위해 자본주의란 과연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다. 모두 힘들다고 말하나, 왜 힘든지를 모르면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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