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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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영역으로 항상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연구하는 사회학을 찾아가면 그래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으로 돌아가는 현실이나 그 원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조류로 휘말려 있다. 마치 수수께끼로 얼룩진 미스터리 현상처럼 우리가 사는 일상은 늘 익숙하면서도 그 익숙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머리에서 에러 신호가 깜빡인다. 사회학이란 영역을 내 개인적으로 독학을 했다.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 한다. 돈도 안 주고, 봐도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내어야 하고, 초반에 책을 살 때는 박봉을 나누어야 했다. 지금은 도서사이트의 포인트가 총알이 되었지만, 그 총알이 장전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총알을 공중으로 뿌려야 했다. 어째든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란 결국 내가 모르는 세상에 대하여 내 스스로가 그 곳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의 투쟁이다.

 

책을 읽다보면 왜 그런 논리가 되는지가 이해가기도 하고,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을 경우가 많다. 책이란 지식의 보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읽혀지는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읽히는 책들은 그 안에 무엇인가 숨겨져 있는 함의가 현재도 통용되고 앞으로 통용될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책을 읽은 후 세상 안의 인간들을 만나면 순간 낯선 나를 발견한다. 사회에 살아가는 것은 그 안에 머물러가는 존재지만,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안에서는 자신이 어떤 세상인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사회학을 두고 현실적인 도구로 대체하자면 반투명 유리라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벽은 색으로 가려진 벽이나, 사실 그 밖은 안을 볼 수 있다. 단지 안쪽은 거대한 용기이기에 보는 사람은 그 벽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안에서 움직이는 인간을 볼 수 있는 규모가 작고, 너무 멀리 있으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멀리서 봐야지 다양한 인간군상을 알고, 세상만사를 알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멀리서 자세히 보려면 좋은 안경이 필요하고, 다시 확인하려면 녹화장치도 필요하다.

 

인간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반투명용기에서 사람들은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문을 여는 것은 주저한다. 문을 열면 시간을 괜히 낭비해야 하고, 그 문까지 찾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게 귀찮다. 그래서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이미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에 자신이 느끼는 바를 이야기하는 것과 멀리서 바라보는 인간이 말하는 것과 너무나 큰 차이점이 있다. 물론 멀리서 보는 인간들도 다 좋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이에나 같은 시시탐탐 기회를 보면서 자신의 잇속을 채울 수 있는 사냥감을 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에 살면서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가만히 있어야 할 경우, 그 위기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며 걱정을 한다. 돈을 벌고 연애를 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말이다. 단지 눈앞에 이익과 즐거움만 원한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심과 쾌락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원하고 찾으려 해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손에서 멀어져 간다. 신기루는 사라져가도 그 이미지의 상을 더 크게만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헛된 욕망과 스펙타클의 열렬한 선수가 되어 허상 위의 경기장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닌다. 현대사회는 모든 척도가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조에서 경제적인 빈부는 인간의 인성과 가치마저 형성하고, 그 사람이 가진 의식과 판단력조차 돈으로 결정된다. 좋은 옷과 좋은 잡화류는 자신의 신분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이미지에 상당히 집착한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기호는 상품이고, 상품은 기호이다.

 

백화점 고급핸드백에 빚을 내고 구입하는 여성들, 기름 값과 보험료에 고민하면서 고급 차량을 구매하는 남성, 이 모두가 자신의 처지와 실용성보단, 세상의 조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애절한 움직임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자신이 마치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위한 하나의 기만이다. 기만의 세계는 언제나 열려 있다.

 

사회성에서 책에서는 인정투쟁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지 못한 채 언제나 주변인으로 머물러 있는 게 현대인들의 슬픈 초상이다. 책에서 오타쿠가 차라리 나아보이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 없다. 힘없는 사람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위에 권력자에겐 바른 말 한마디 못하고, 아부를 밥 먹는 것과 유사할 정도로 잘 한다.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못해 고립된 상태이기에 남의 이목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에 시선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지 경계나 이형의 존재로 보이기는 싫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움직이는 이상한 세계의 인정투쟁,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해야지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한다. 대놓게 내가 입고 싶어서 혹은 지나가는 누군가 잘 보이려 입은 게 아니라 하나, 막상 그들의 정신분석을 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옳으나 그 입장에 숨어있는 타인에 대한 욕망은 인정하기가 싫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서모임에서 이런 대화를 자주 나눴다. 한국인은 개인주의화가 덜 된 나라 사람이다. 개인주의보단 오히려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가 활보치는 세상이다.

 

따라서 뭔가 이익이 목적되지 않은 이상, 뭔가 자신을 돋보이거나 더 좋은 것이 오지 않은 이상 더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에서 타인의 입장보단 나의 이익에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문제는 포커스가 남에게 무의식적으로 사소한 피해가 아닌 생존의 박탈 앞에서 무덤덤할 수 있는 자세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세계다. 주변을 돌아보기보단 자신의 주변을 스스로 뱅글뱅글 돌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가진 공동체 사회에선 인간은 소외되지 않은 존재였다.

 

태어나면 마을에서 크고, 마을에서 일을 하며, 마을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 죽어서는 마을에서 장례식을 지내고, 마을 산자락에 있는 언덕에 시체를 묻었고, 그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런다고 과거의 유산이 모두 좋다는 게 아니다. 적어도 과거의 인간에게 외로움이란 고독에 스스로를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직장과 학원으로 소원해지고, 아파트 이웃은 다정한 사람보단 집값을 위한 동원될 정예군이고, 층간 소음에 따른 불천지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만족해야 하나, 막상 감옥은 같은 규격이 아니라 돈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오브제로 구성되어 있다.

 

서평을 적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왜 말이 연결되는 것처럼 적어가나, 내용은 계속 여기저기 튀는 것일까? 사회학을 연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순은 사회란 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영역이 아니라 매우 복잡 다양한 미로라는 것이다. 미로를 찾아갈 때 미로를 향하여 발자국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처럼 다 볼 수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신이 아닌 이상, 새는 새대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꾀꼬리가 노래 한 수 불러주면 감사할 따름이나, 도시에는 꾀꼬리 대신 닭 같이 생긴 비둘기만 펄럭거린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은 이런 복잡 다양한 사회상의 문제를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더구나 자유롭게 서평이나 적는 독자이기에 이렇게 적을 뿐이다(나보고 이딴 식으로 글 적는 것에 불만 있는 분은 나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적어도 내 글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말이다). 사실 사회학 관련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엘리트의 시선은 왠지 피곤하게 느낀다. 이 책은 엘리트가 적은 글이나 그나마 엘리트라도 수면 아래서 코와 입을 밖으로 내놓은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다.

 

어떤 사건과 문제가 발생하여 거기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비판하여 최종적으로 어떤 대안과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거나 상관하기 싫거나 또는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판단내릴 수 없다. 사회학은 위에서 보는 게 아니라 차라리 아래로부터가 더 좋은 것이다. 거대한 반투명유리에서 위에 보다는 아래에서 보는 게 좋다. 빛이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일광욕을 하는 게 아니라 일부는 그늘에 가려 태양에 가린 채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학은 아래서부터 바라보는 시각이 있어야 문제의 원인과 해결대안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자신은 어떤 문제에 대해 겪을 일도 없고, 겪을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공감이란 단어는 물 건너갔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직접 노동자의 삶을 보고 저술했다면, 현대인 중에 엘리트들은 그저 마르크스의 저서가 어렵고 엘리트로서 볼 책 중에 하나로 취급당하면 난감한 상태가 발생된다. 물론 마르크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인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이론이 있어야 생각을 할 수 있는 판단력이 갖추어지나, 그 판단력이 어떤 판단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글을 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세상살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거리는 많다.

 

단지 어떤 원리이고, 무엇이 문제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이슈는 신경이 가지만, 현황에 대해 지겨워한다. 세상물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물정에 대해 돋보기로 보는 것은 불편한 것들에 대한 연속적인 만남이다. 대신 눈을 돌리면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더 불편한 것들이 찾아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계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세상물정은 어떤 맛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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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번에 터진 웹툰 사건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뭔가 조금은 관계성이 있어 보인다. 2014년인가? 부산대학교에서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정기세미나가 열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참석하여 수많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 그리고 부산경남권의 웹툰작가들을 만났다. 물론 2013년 부산CT교류대회에서 몇몇 웹툰작가들과 만났고 가끔씩 마주치는 때도 있다.


그당시 내가 지금도 만화애니메이션학회의 학회장으로 계시는 장동렬 교수님께 아주 무례한 발언을 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소비자를 조금 더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만일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님들이 그들을 무시하면 그들은 한국 만화애니메이션을 포기할 겁니다. 그러면 교수님들의 제자들이 졸업하면 나갈 길이 없을 겁니다."라고 말이다.


이 말은 재작년 7월 서울 SICAF에서도 다른 교수님들과 2차로 호프집으로 가서도 발언했다. 그들의 눈엔 그냥 지방에서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오타쿠 나부랭이가 학회에 논문 1~2편 집어넣어 뭐하는 인간인가 싶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오타쿠 소비계층은 한국에서 2000년대 신세기 에반게리온 열풍에 따라 당시 10대들이 20~30대로 진입하고 그들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구매되는 각종 문화콘텐츠를 생각하면 우리 만화애니메이션 학회나 산업은 무엇을 보고 느끼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웹툰시장은 진짜 말하자면 초기의 웹툰작가 혹은 웹툰 이전의 만화작가들이 노력한 시장이다. 도서가 전자매체로 변화하면서 책이 인터넷 웹으로 변화한 것이다. 만화책들이 이제 웹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볼 수 있다. 웹툰 역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있다.


그러면 플랫폼의 변경에 따라 콘텐츠 그 자체는 변화하는 것인가? 담겨지는 틀에 변해도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는 언제나 작가의 몫이다. 그리고 작가를 알아주는 것은 독자의 선택이다. 고맙게도 디시인사이드 한국애니메이션 갤러리는(다른 갤러리와 비교는 하지 마세요) 아직까지 희박하고 열악한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위해 응원한다. <고스트메신저>가 나오기 전에 이들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극장이 나올 때 서로 먼저 극장에 가서 감상했다는 인증을 남겼다.


그 작품이 성공하든지 안 하든지 제작자 입장에서 자신들을 응원해준 팬들이 있다는 점은 상당한 행운이다. 현대사회가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겨제로 인해 인간의 물화되어버렸다고 해도, 그래도 소비자 주권시대는 유효하다. 작가의 사상은 자유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은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와 권리는 타인에게 상처입힐 권리는 없다.


그리고 남자가 하면 용납되고, 여자가 하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더 더욱 어이 없다. 생물학적으로 남녀의 차이점은 분명하나,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서로 용납될 수 없다. 진짜 그 티가 미혼모, 소녀가장, 성폭행 피해자를 돕는 금액으로 간다면 좋은 일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를 일으킨 사람을 위해 소송비로 나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보고 거기에 대하여 반성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억울하여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식은 스톡홀룸 증후군의 말기 현상에 가깝다고 본다. 현재 작가에 대해 협박메일을 보내는 것도 문제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욕설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욕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욕설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없는가? 


어느 분들은 이 문제가 한국의 페미니즘 발전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이라 보는데 사실 나는 그 말에 비관적이다. 광우병사태로 인해 일베가 탄생하고, 그들은 애국서사를 내세우고 네오-메카시즘을 일으켰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조롱을 퍼붓고, 518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런 그들에게 애국서사 탄생은 한국사회에 일반화로 자리잡았는가? 일반여성들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일베를 일반남성 역시 불쾌감을 느낀다.


메갈리안 사이트가 일베의 미러링이 되었고, 그리고 그들은 페미니즘을 말한다. 처음부터 논조에서 일베의 미러링의 방법이 틀렸다. 과격파가 되어 사람들에게 쇼크를 주어 인식의 전환을 준다는 전략이 있겠지만, 그 전략의 사용이 영국의 서프러제트 운동(1910년대 영국여성선거권 획득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영국의 여성들은 정확한 이념과 목적의식이 있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려고 하면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 서로 풀어가려 했다. 지금은 대화조차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이 옳다고는 볼 수 없고, 그런다고 무작정 오류라 볼 수는 없다. 내 생각에도 구멍이 있고, 저들의 논리에 구멍이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 자체에 구멍 밖에 없다. 아래는 미디어투데이 이선옥 기자의 글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옳은 것인가? 내가 대학교 수업 수강 시 시간이 남아돌아 여성학 수업을 우연히 들었다. 교양수업을 하시던 여자교수님의 말을 듣는 것과 현실은 별개로 돌아간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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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원리 2 - 사회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7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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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 대한 서평을 적으면서 어느 분이 재미있는 의견과 조언을 주셨다. 그분이 주신 코멘트 중에서 인상 깊은 것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남겼다. 생각해보면 밀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이근식 교수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같이 일반적인 자유주의하고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일단 <정치경제학 원리> 2권째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존 스튜어트 밀이 자신의 아내인 해리어트 테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이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자유주와 페미니스트적인 자유주의자로 될 수 있던 원인은 해리어트 테일러의 영향이 컸다. <자유론>이나 <여성의 종속> 같은 책을 읽어봐도 밀의 자유주의 논조는 단순히 개인만의 자유를 강조한 게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했다. 어느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문제자가 속한 사회는 그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 이상으로 그가 다시는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과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즉 한국처럼 누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회적 단절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으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바라며 좋은 삶을 원할 경우 사회에서 도움과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밀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관은 공리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아버지의 동료인 벤담과 다르다. 벤담은 양적인 공리주의, 누군가 다름이 없이 모두 같은 것을 줘야 한다면, 밀의 경우 그 상대방이 처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국가사회에서 전부 국가적으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누군가에 따라 필요한 인프라나 서비스는 다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영역을 공공성의 여부를 가려 정책을 펼친다면 결국 국가나 민간에서는 자본이 이용된다. 정치적인 상황에서 경제적 조건을 따라가기에 경제학은 단순히 수학식으로만 볼 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적 흐름과 여건을 보는 것이 옳다.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그의 경제에 대한 관점은 바로 대다수로 이루어진 농민이나 노동자의 생활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자본과 토지 등을 판단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절에 영국 런던에 카를 마르크스가 와 있었고, 마르크스는 코뮤니즘 즉 공산주의 이론을 1848<공산당 선언>으로 통해 발표했다. 물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마르크스 말고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을 말한 것을 보면 마르크스 혼자 공산주의를 논한 것도 아니고, 당시 생시몽, 오웬, 푸리에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활동했다. 마르크스가 아마도 밀의 경제학에 대해 다소 공격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정치경제학 원리> 2권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밀은 생시몽과 친분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었다.

 

생시몽의 이론을 제법 책 시작부에서 많은 고찰을 했으며, 국민경제와 관련하여 어느 경제적 관점이 좋은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어느 것만이 좋고 나쁘다고 밀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 효용성에 대해 언젠가는 다시 확인해야 한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밀이 살고 있을 무렵은 경제학은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이었다. 즉 자본가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제도, 경제적 구조가 있었던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 밀의 정치사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게 된다.

 

밀은 인간의 비참한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인구에 대한 고찰과 인구조절을 위해서는 식량이 중요한 점을 검토했다. 그리고 식량과 더불어 인구증가를 단순히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인구정책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한다. 밀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적시한 부분은 너무 많은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들을 양육할 능력이 되지 않아 일부 아이들은 병으로 죽게 되거나 먼 미래 아이들은 가난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한다고 했다. 가난으로 인해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고, 약을 구할 수 없으며, 재산이 없으면 자식들이 새롭게 시작할 수 없다.

 

아이들은 2명 정도, 혹은 병이나 사고로 죽을지도 몰라 3명까지만 존재하는 게 맞는 것이다. 밀의 생각은 현재 한국이나 일본 사회에서도 놀랍게도 적용된다. 한국의 인구출산 비율이 1.2인에서 다운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여성 2명 중 1명만 자녀를 가질 것이고, 출산을 해도 몇몇은 사고나 병으로 죽는다면 인구유지는 1.1인으로 될 것이다. 인구의 감소는 경제적 생산력 축소와 경제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경제력이 축소되어 시장경기가 퇴보하면 나라는 극심한 빈곤으로 치닫게 된다.

 

밀도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을 위해서라면 사적인 투자와 공적인 투자가 있지만, 공적인 투자는 누가나 지원할 수 있기에 그런 직업을 가진 자는 넉넉한 임금이 오지 않은 점을 말했다. 이에 반면 사적인 투자, 즉 집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의사나 법조인으로 선택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변호사 수임료가 그토록 비싼 이유는 변호사가 되고 싶으나 되지 못한 사람의 몫까지 챙기기 때문에 비싸다고 했다. 결국 직업의 선택적 사항이 상황적 유리함과 불리함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정치경제학 원리>는 경제학에 대한 책이기도 하나, 사실 매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분도 강하게 반영되었다. 솔직히 책 앞부분을 보면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학문과 예술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했다. 정치경제학자인 밀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민들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하고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분명 심각한 문제다. 그 모든 것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농사를 짓는 농민의 상황을 제대로 고찰했기 때문이다.

 

본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현재 수준 이상의 인구가 필요하고, 재생산이 되려면 결혼 내지 남녀 간의 동의 아래 자녀가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양육비와 교육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을 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재생산의 기능을 위해서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충분한 생활비가 받아야 하고, 농민은 자신에게 돌아갈 수확물이 있어야 한다.

 

특히 농민과 같은 경우 밀은 자작농의 활약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자신이 밭의 규모가 작아도 그들 스스로가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기에 성실하게 일을 한다. 농지를 가꾸는 것은 어렵다. 유럽의 토지는 대부분 척박하고, 석회질이 많은 토질이 많기 때문에 시비관리나 수자원관리가 어렵다. 황무지개간을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이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가지면, 애정을 가지고 농지를 개간하고 수확물을 거둔다.

 

지주가 있는 땅을 빌려 차지농으로 일을 한다면 그 농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 농지를 관리하려면 계속 땅을 갈아야 하고, 잡초를 뽑아야 하며, 시비관리도 해야 한다. 토지의 양분을 위해 가축을 사육하여 가축분뇨를 퇴비로 이용해야 한다. 만일 자기 땅이 없다면 굳이 농민을 농지를 개선해야 할 의무는 없다. 또한 농민이 지주에게 땅을 빌릴 경우 지대를 지불해야 하는데, 당시 영국에서 지대를 납부하면 농민에게 돌아오는 소득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내년 파종을 위한 씨앗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금이야 식량생산이 기계화 농업으로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고, 부족하면 수익 농산물을 대량 구매하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때는 무역을 위한 교통수단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대량으로 운반하기에도 기술력이 부족했다. 자작농을 육성하면 자신의 노력에 따라 생활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충분한 생계유지를 통해 농업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차지농이나 농노의 경우 자신에게 돌아갈 양은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에 일을 열심히 할 수 없다. 같은 땅의 규모로 차지농과 자작농의 생산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이것을 현대에 두고 생각하면 굳이 농사만이 아니라 소규모 상업시장을 보면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가게를 가진 사람들이 밀집한 지역과 어느 큰 백화점 내 점포로 들어간 것에 대해 생각하면, 경제적 이용에서 소비자에게 나가는 금액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소비자가 사용한 금액이 배분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대규모상점 백화점에는 대기업에게 큰 이윤이 돌아가고, 직원으로 고용된 자에겐 단지 근무시간에 따른 임금만 지급된다. 만일 상점가의 개인상점들이 모인 곳에 같은 금액이 소비되었다면, 그 이익이 돌아가는 비율은 전혀 다르다.

 

소규모 운영되는 자작농이나 자영업자들이 줄어들면 그들은 임금노동자로 속해지고, 기존 임금노동자와 관계에서 임금인하에 따른 고통을 받게 된다. 즉 대규모 운영되는 상가에서는 인력을 최소운영인원만 필요하기에 많은 인원이 노동을 원할 경우 경쟁이 생기는 바람에 임금의 저하가 따른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론 원리>를 보면 영국에서도 농지에 대한 지대로 많은 농민들이 경쟁했다. 전임 차지농이 당초 자신이 대여한 가격과 비교하여 몇 배로 비싸게 다른 농민에게 파는 경우도 많았다.

 

밀이 경제적으로 자본을 얻는 경로는 임금, 이윤, 지대이다. 고전경제학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케인즈의 거시경제학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도 통용되는 기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부동산이 기능하는 지대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농지에서 생산력이 증가해도 지대가 너무 높을 경우 농민에게 돌아가는 수확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에 EBS 자본주의 특별4부작에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현대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어 마지막 고전주의 경제학자이면서 색다른 경제학을 보여주는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다(1권을 보면 20세기 초반에 경제학과 학생들의 교재로써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가 탁월하다고 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가에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 연구하는 도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먹고 잘 살려면 무엇을 보고 생각해야 하는가? 스미스의 고민을 밀도 역시 똑같이 생각했을 뿐이다. 단지 추가한 부분으로 리카도와 멜서스의 이론을 접목했다. 마르크스는 멜서스를 경멸했지만, 후에 문화유물론을 내세운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중요하게 여겼다. 식량이나 혹은 현대로 따지면 식량 같은 재원이 인구를 조절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라는 것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이용해야 하는 것인데, 대다수 국민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경제학은 단지 숫자만으로 결정짓는다. 도서 모임에 경제경영학 전공자에게 경제학에 대해 전반적으로 물어봤다. 그 분이 말하기를 현대 경제학은 수학논리로 움직이는 반면 보통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움직이지 않기에 경제학의 공공성이 없는 것이 한계성이 높다고 했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 1권에서 왜 후대 학자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서적을 높이 평가했을까? 경제학 속에 철학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경제는 결국 어느 대통령의 성공신화에 군중은 매몰된다.

 

성공한 기업가는 나라의 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와 기업을 성장시킨 것이다. 물론 기업 활동이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중요하지만, 기업의 목적은 기업이익증진이나 국가경제에서 국민생계수단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업화시대 자본주의 시장이 확실히 성장한 것은 사실이나, 경제규모가 성장했을 뿐이지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국민생활 현실을 지금 확인해보면 과연 우린 성장했을까? 철학이 없는 정치는 큰 죄악이다. 정치적 행위로서 정부의 운영은 예산이 움직이고, 예산은 경제성으로 움직인다. 아마 돈에 관심이 경제를 찾아가는 사람에게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는 아무 매력이 없을 책이나, 나라경제를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접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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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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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어떤 잘못은 저지르면 그것에 대한 책임감이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경우는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가끔 세상을 보면 그런 당연한 인간의 의무는 관심 없이 그저 개인적 이기심을 위해 모든 진실을 속이려 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오로지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면 그의 마지막 모습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끔 세상을 보면 국민의 눈과 마음은 의심하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진실을 은폐하는 자들이 많다. 진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그 이상의 자신의 명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는 매우 이기적이고 고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지, 때로는 우리 일상에서도 어이없는 일들로 다른 사람의 길을 막을 때도 있을 것이다. 이엄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소설 내용에 대해 주변 반응을 보자면 충격적이거나 혹은 대단하다고 하나, 내가 느끼는 바로는 상당히 표현이 뛰어나거나 또는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이다. 작가는 현재 영미소설가로 노년의 남성이고, 작가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린 소녀 브리오니, 그리고 마지막에선 77세 생일을 맞이한 할머니 브리오니이다.

 

그녀가 소설을 내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고, 작가는 소설가 브리오니를 만들어내었다. 예전에 미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나, 막상 독서모임에서 다른 분의 말을 들어보면 소설은 브리오니 중심이나, 영화는 로비와 세실리아 중심으로 간다고 했다. 문학과 영화는 단지 비교하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이지만, 문학서사인 소설은 작가 개인의 영역에서 창조되어 출판사 편집부의 검토를 받은 후에 대중에게 공개된다. 이에 반해 영화는 영화제작진과 투자자들이 모여 고액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까지 섭외한다.

 

문학과 달리 영화에 엔터테인먼트를 강하게 두는 것은 상업적 성공이 받쳐주지 않으면 제대로 앞일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안 봐도 결국 로비와 세실리아의 사랑을 중점으로 갔다는 것은 소설 <속죄>가 연애와 치정이 하나의 중요소재에서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이 된 점이다.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은 1999년 런던에서 브리오니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1부는 연애와 치정, 2부는 영국병사가 바라보는 전쟁, 3부는 18세로 성장한 한 소녀가 자신의 죄를 두고 성찰과 반성을 해간다.

 

흐름을 보면 1부는 연애물, 2부는 전쟁물, 3부는 성장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할리무드 스타일 영화로 사용하기는 2부가 좋고, 한국드라마로는 1부가 가장 좋을 것이다. <속죄>에서 말하는 것은 브리오니가 이때까지 살아온 생애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회고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은폐하려는 공범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순간적 감정, 일시적인 관찰로 이어진 어린 소녀의 추리는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언니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정작 그 상황에서 진실을 밝힐 사람들은 오히려 브리오니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다. 인간의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운명의 전환점이 추락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소설을 읽으면 우연한 목격과 순간적인 착각으로 비극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보면 불행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었다. 연애의 주인공은 터너와 세실리아이나, 그 연애에 대한 질투는 브리오니였다. 브리오니는 로비가 준 편지를 언니인 세실리아에게 주지 않고 자신이 먼저 읽었고, 롤라가 성폭행 당했을 때 자신이 받은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공개했다.

 

그 편지는 상당히 도발적이고 성적인 본능이 폭발하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단지 그 대상은 로비가 세실리아게 향한 것이었지, 그 누구도 아니었다. 롤라에게 가해진 잔인한 행위는 터로비 터너와 관계없었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순간 터너는 억울함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그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로비도 경찰에게 순수히 따라간 이유는 세실리아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다. 파티에 일어난 잭슨과 피에르의 실종, 롤라의 고통, 이제는 세실리아까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게다가 로비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 그가 세실리아와 오빠 레온과는 친구처럼 어린 시절을 보내도, 영국은 보이지 않은 신분의 벽이 존재했다. 현재의 영국 왕족이 가진 권력이 공고했다면 1930년대 영국은 더 공고했다. 서프러제트 운동 후 영국에서 1920년대 말부터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도 아직까지 모든 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은 세계명문 대학 중에 하나이다. 여자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던 점에서 여성의 인권 현실은 또 다른 요소로 본다면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권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점과 같다. 경찰을 대해 세실리아 어머니 에밀리는 마치 귀족이 자신의 집 근방에 있는 영지주민을 부리는 것처럼 대한 점을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의대준비생이 영락없이 최악의 범죄가 소녀 성폭행자로 낙인이 찍힌 것이다. 소설의 시작을 보면 히틀러가 나온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앞이다.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서 전쟁의 아픔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하나뿐인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세실리아의 아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삼촌에게 남은 유일한 꽃병, 인간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를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들이 있다. 세실리아에겐 삼촌의 죽음과 삼촌처럼 죽을 수 있는 연인 로비에 대한 마음이 운명의 장난처럼 보여준다. 그 장난 같은 운명을 브리오니가 만들었고, 세실리아는 가족과 인연을 끊고 혼자 살아간다.

 

작품을 보면 아라벨라는 브리오니의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아라벨라는 나중에 왕자에게 구원받는데, 그 왕자는 의사였다. 인간은 주변의 조건과 상황적 인지에 따라 사고한다. 상상력조차 거기에 의존하는데, 의사왕자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예비의대생인 로비였다. 로비를 좋아하던 브리오니에게 로비와 세실리아의 성행위를 본 것은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가졌던 마음에 대한 배신이었다. 인간은 이성으로 인지해도, 무의식 내부에 존재하는 감정은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한다. 다른 사람을 믿고 싶은 것도 있지만, 자기가 가진 마음을 믿고 싶은 욕구도 있다. 브리오니의 배신은 자신이 가진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매우 비쌌다. 터너는 죄 없이 3년 반 동안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형벌을 감형 받는 대신 전쟁에 나가야 했다. 브리오니가 언제 그의 무죄를 안 것인지 그리고 롤라를 범한 사람의 정체가 언제 알았는지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알 수 있는 것은 어릴 적에 브리오니는 터너를 좋아했지만, 브라오니의 소설 속에 보인 터너 역시 잘 생겼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마른 얼굴이나 몸은 다져진 점에서 성장한 소녀 브라오니는 터너에게서 남자의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터너는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1부에서 이미 폭격에 의한 파편조각에 의해 부상을 입어도 그것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사망한 것이다. 언니인 세실리아는 폭격으로 사망한다. 가장 사랑했던 남자와 가장 사랑하던 가족을 허무하게 보내야 했던 브리오니,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터너의 명예는 회복해야 했다. 롤라의 부모가 이혼할 때 영국신문에 나왔다면, 터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친구의 부모가 돌봐주고 학교까지 보냈는데, 그 가족을 범했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런데 정작 그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고, 롤라는 그 범죄자와 결혼하여 풍족하게 살고 있다.

 

속죄의 방법에서 양심이 없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상대피해자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마지막 순간까지도 용서를 구할 기회가 있다. 기회가 없다는 것은 용서할 사람도 없다는 점이고,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브리오니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 안에 존재하는 양심과 의무감이었다. 60년 넘게 짊어온 죄책감과 후회는 노령의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변함이 없다. 소설을 보면서 큰 감흥보다는 적어도 인간은 순간적 판단실수가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점이고, 특히 그 대상이 가까운 가족과 친구라면 상처받은 슬픔만큼 실수를 저지른 사람 역시 고통 받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원히 양심의 가책이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항상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점이다. 그런 것들이 자신에게 방해가 되면 부자에 유명인사인 마셜 부부처럼 되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이니 내가 이 책을 보고 좋게 느낀 것은 현실감 넘치는 상황묘사다. 리얼한 상황을 알기 위해 소설에서 전쟁박물관에서 병사의 편지와 간호사들의 수기들을 잘 이용했다. 소설 내 터너와 세실리아는 가공인물이나,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죽음으로 파시스트를 막아준 젊은 병사들과 그런 죽음을 지켜봐주던 그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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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원리 1 - 사회철학에 대한 응용을 포함하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76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동천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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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평소에 말하고 싶은 것은 존 스튜어트 밀이 이미 했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말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정확히 표현한 글은 존 스튜어트 밀이 가장 와 닿았다. “노동계급이 박탈당하고, 때로는 실로 비참한 지경에까지 내몰리는 결과로 수리 이뤄진다. 그와 같은 절박한 시기 중에서 형편이 가장 나쁜 경우조차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익을 얻는 시기가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사람들이란 통상적 여론의 관점에서 그들의 개인적 번영이 곧 국민경제의 번영으로 통하는 부류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가 흔히 알기론 자유주의 고전 철학자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적인 영역에서 갈등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갈등에서 벤담의 공리주의와 더불어 칸트의 정언명령에 의한 실천이성에 대한 갈등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 중에도 존 스튜어트 밀이 있다. 밀의 철학은 <자유론>이란 자유주의 철학도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밀은 단지 그것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국의 서프러제트운동에서 지도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자유주의 철학이 사실 영국 이전에 유럽사회에서는 남성중심에서 여성까지 옮기고, 거기에 정치이론과 경제학이론까지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가 정치경제학자란 사실을 알게 된 동기는 우연히 형님과 형수님 내외가 처갓집에 와서 조카 100일을 준비하면서다. 읽어보면서 다소 편견과 오만하다고 여겼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에서였다.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매우 훌륭했다. 나는 이전에 밀의 <자유론>을 읽은 상태였고, <자유론>에서 밀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했다.

 

밀이 정치경제학자란 사실은 사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읽기 전까지 몰랐다. 이 책을 반에 반 정도만 읽은 후 다시 내가 잡은 서적이 비봉출판사에 나온 <국부론> 상권이었다. 얼마 전 세상을 작고하신 김수행 교수님의 유작을 읽으면서 고전경제학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고전경제학을 보면서 현대사회의 자본주의 결성에서 우리가 아는 경제학은 상당히 다른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서평 머리 부분에 나온 밀의 말은 무엇은 의미하는가?

 

사실 이 책의 내용 전반보단 뒤에 나온 블레이든 교수의 해제와 옮긴이의 해제가 흥미로웠다. 현대 경제학 4대 학자를 뽑으라면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케인즈, 하이에크다. 경제학의 시작이 영국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미국이 중심인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경제학의 수준은 영국이 돋보인다. 경제학의 영역에서 밀의 경제학이나 혹은 그 이전의 스미스의 경제학은 우리가 아는 경제학과 상이하다. 경제학과 관련된 서평에서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고전 경제학은 즉 정치경제학이다. 정치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만 하는 정치적인 요소만이 아니다.

 

그 정치란 Political 공공의 영역이다. 공공성을 중시한 경제학이란 곧 자신의 이익에 목숨 거는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은 경제학이다. 한국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주머니만 황금으로 가득하게 차게 하는 경제학이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영국이 곡물법을 폐지하기 전까지 중상주의를 유지했다. 한국의 경제체계는 중상주의가 아니지만, 개인들이 추구하는 경제에 대한 사고방식은 완벽한 중상주의이다. 최근 나온 경제도서라고 하는 서적 중에서 월세로 부자 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파탄 나게 하는 망국병이다. 사실 경제학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되었고, 로마의 멸망과 스파르타의 멸망을 보아도 그것은 확실히 말하여 경제의 문제이었다. 왜 고대에 존재한 강력하고 위대한 전사국가들이 망했을까? 바로 그 전사국가의 토대가 되는 전사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사가 될 수 있는 부류는 오로지 시민이었고, 시민은 평소 생업에 활동하면서 위기 시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국가를 지키는 애국자이다. 애국자를 씨를 말린 것은 경제적인 원인이다. 가난이 민중에게 퍼졌고, 가난으로 인해 민중의 후예들은 점차 인원이 줄고, 영양실조에 시달려 전투에 나갈 수 없었다.

 

고대국가에서 병사가 되는 시민은 자기 자력으로 무기를 구매한다면, 무기조차 준비하지 못하는 셈이고, 전쟁나면 그대로 무너지는 마련이다. 평소 민중을 위협하던 용병들은 전쟁이나 참변이 일어나면 먼저 돈을 들고 도망친다. 이런 점은 고대가 아니라 현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모든 것이 정치경제학하고 관련된 것이다.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은 바로 그런 공공성을 중시한 경제학이다. 밀의 사상이 참으로 돋보인 점은 미래를 넘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말해주는 그의 상상력이다. 그의 논리력과 직관력은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보이는 상상력은 분명 우리가 받아들이어야 할 가치이다.

 

우리들은 어떤 사업에 대해 투자를 고민할 때 당장의 이윤을 가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모든 사업이 이익을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쓰라린 실패를 안겨줄 수 있다. 밀은 그런 이익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당장 받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먼 미래를 내려 보고 거기에 집중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내심과 관찰력, 그리고 나의 이익보단 먼 미래의 이익이 오히려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블레이든 교수의 해제처럼 밀과 스미스의 책이 제대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잘 나와 있다.

 

19세기 이후 고전학파 경제학이 아닌 케인즈주의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는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 철학이 없는 점은 부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판단할지, 부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터진 LEHMAN BROTHERS 사태나, 미국 증시거리에 터진 주식폭락 악몽은 누군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래서일까?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마셜 프리드먼의 가까운 경제학인 미제스가 밀을 두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보다 더 위험한 자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을 읽으면 현대 자본주의와 전혀 맞지 않은 사상을 들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사상에서처럼 경제활동을 두고 지상자유주의와 전혀 다른 방향이다. 밀은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정치경제학의 부란 반드시 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경제적 조건이 돈이다. 돈이 부의 척도가 되어 빈부격차가 오히려 당연한 사회가 되었다. 밀의 정치경제학에서 경제의 중요한 부분은 자본, 지대, 노동이었고, 이 중에서 노동이었다. 왜냐하면 노동이 없으면 그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기본은 노동을 할 수 있는 제원의 유지이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막 공업화가 되어 경기가 좋았다. 공황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산업발달에 의한 분업이 계속 진행 중이었다. 단지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밀도 분업이 가진 위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밀은 분업이 인간에게 한 가지 기술에 모든 것을 집중하면 효과적으로 생산할 수 있고, 그 분야의 업무로 어떤 신체적 능력이 발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기계와의 조합은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와 파괴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놓쳤다. 마르크스가 런던에 머물 때 밀에 대해 비방을 해도, 밀은 마르크스에 대해 악의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밀의 성격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을 추구하는 편이 있겠으나, 생각해보면 밀도 마르크스와 다른 방향이라고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인권을 중시했던 사람이었다. 일단 곡물법에서 밀이 중상주의 문제를 두고 비판한 이유는 인간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식량이 필수적이다. 식량을 두고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식량이 노동을 할 수 있는 제원을 늘리고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고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고, 심지어 많은 건축물이 있는 도시가 폐허가 되어도 어떻게 금방 그 이상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밀의 모든 관점은 인구노동력이고, 노동력을 결정짓는 것은 식량이다. 곡물법의 문제는 자국의 금은만 중시하니 외국에서 곡식이 제대로 수익되지 못했다. 스미스가 경제학 정책에서 그것을 강력히 비판한 이유는 기근이나 자연재해 시 식량을 구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게 원인이었다. 물론 자국의 농민에게 저렴한 가격의 식량은 적이 되나,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식량을 생산해도 농민이 직접 갖기보단 국가세금이나 대출 빚으로 갚는 경우가 많았다.

 

산업기술의 발전에서 단순히 그건 공장에서 생산력만 높이는 게 아니라 농업에도 큰 도움이 되어야 하는 점은 생존과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증가는 생산력도 증가하나, 그만큼 식량이 생산되어야 했다. 밀은 인구가 증가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폐허 된 땅에 다시 원상복구가 가능한 이유는 인구노동력이나, 식량공급량을 초과할 경우 다시 심각한 상태로 접어든다고 말한다. 밀의 인구정책은 우리 사회에 전해주는 상황과 많은 공감을 시사해준다.

 

한국에서 농업조차 기계화되고, 중국과 미국 각 세계에서 오는 농축산물은 식량으로 해결된다. 단지 필요한 게 식량에서 부의 축척으로 대체된다고 하면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처럼 베이비붐이 터진 이후 다시 인구감퇴기로 접어든 상태에서 현재 노동력 포화가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진다. 노동력이 없어지면 생산력이 줄고, 자본으로 매개되는 생산자의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균형이 깨진다. 노동자가 없어지면 생산력이 감소하고, 이에 반해 소비자가 없어지면 노동자의 임금이 감소(해고에 의한)된다. 생산력 감소와 경제활동 축소는 국가의 기반을 흔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밀의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노동자의 생활을 중요한 게 여긴 것은 바로 이러하다. 자본은 내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되고, 없으면 국가가 만들어주면 된다. 지대에 대한 부분에서 땅은 원래부터 계속 있었던 존재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셈이다. 생산력의 발달에서 노동자의 안전이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기술력 보전과, 새로운 노동인력을 만들기 위한 시간과 비용, 노동자의 가족들의 생계문제는 결국 사회적 문제로 되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미제스의 공격은 밀이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나 사회주의자적인 태도를 가진 점이었다.

 

밀은 독신이었지만, 후에 테일러 엘리엇이란 아주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과 결혼한다. 엘리엇에게 딸이 있었고, 밀은 엘리엇이 죽고 난 후 그녀의 딸은 친자식처럼 대해준다. 당시 영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정치경제적 입지가 좁은 점에서 엘리엇의 말을 듣고 많은 저서를 남긴 밀에게 당시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고, 미제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처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른 노선으로 전환되어간다는 사실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하고,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이 나가는 경우란 허다하다. 그러나 밀은 그런 현실에서 원하지 않은 방향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 방향을 가고자 했던 것이다. 실적을 중시하던 경제학이 아니라 인간을 중시한 경제학으로 말이다. 미제스의 논리는 사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계속 되풀이하여 언급해도 밀의 발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서평하면서 예전에 나하고 인터넷으로 말싸움 하던 사람이 생각난다.

 

어디에서 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상대방은 나에 대하여 상당히 매도적인 태도로 대했다. 상대보단 심하지 않았지만, 나도 조금 어이없다는 식으로 상대를 대했다. 그때 내가 한 말이 기계가 발달하면 노동자는 비참해진다라는 말인데, 그 단어가 마르크스 <자본>에서 나왔지만, 그 말은 마르크스가 먼저 거론하지 않았다. 그 말은 밀이 먼저 거론한 말이었다. 기술발전과 기계발명은 일자리를 잃게 만들고 노동자를 무직자로 만드는 현실에서 최근 네오 러다이트 운동이 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나보고 러다이트를 해야 하냐고, 그런 시대착오적인 말을 하냐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글을 보니 취업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는 학생이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처음 대기업에 가도 갈 수 있는 보장이 높지 않고, 간다 해도 인턴이나 비정규직에서 시작하고, 그것도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

 

내게 공격한 논리가 그 본인이나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를 바꾸기 어려워도, 사회는 개인을 농락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생각이다. 단지 개인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조직이 되면 사회를 움직일 동력은 된다. 그런 관점은 밀도 보여준다. 인간의 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나 밀은 적어도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중시하고, 인간의 권리를 중시했다. <자유론>에서 어떤 개인에게 만약 현실적으로 풀어가지 못할 어려움이 있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손길이 가지 않아 어떤 개인이 파탄에 이르면 그 사회는 올바른 곳이 아니며, 야만의 손길이 남아있는 곳이다. 사실 사회적으로 인간의 생활을 본다면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의 경제성이란, 그 사람의 효용성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효용성을 만들기 위해 조성해야 할 보호망이다. 인간에 대한 안전이 완비되지 않은 밀은 그 사회의 생산력은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경제학 원리>를 읽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의 이익이 나라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똑똑한 바보들이 판을 치고, 그런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세상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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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6-07-1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분은 뉴리버랄리즘으로.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자유주의 쪽 계통입니다. 고전자유주의에서 좀 벗어나신 분이죠. 자유주의자 라면 일단 로크, 칸트부터 시작하는게 가장 좋은 순서라고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7-11 10:57   좋아요 0 | URL
아직까지 로크는 안 읽어보았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정도 읽어보았군요. 사회자유주의라, 딱 적당한 표현이군요!

ㅇㅇ 2016-07-11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원래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는 성격이 완전 정반대입니다. 개인주의도 그렇고요. 자연권도 그렇고요. 저분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섞으려 하신 분이라 솔직히 전통 자유주의자들 분들이 좋아하지 않죠. 뭐랄까 특이한 분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07-11 13:04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경제학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라고 하나, 현실은 서로 필요한 것으 빼앗으니 자유주의와 경제 관계는 참으로 오묘하군요. 예전에 자본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에서 저 책 후기에서 나온 철학자가 만든 경제학 도서는 우리 후예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준다는 게 인상남네요.

ㅇㅇ 2016-07-11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통 자유주의 철학에서 사회과학 분야로 체계화 시킨게 경제학인데. 경제학 분야에서도 자유주의 경제학이 또 따로 있습니다. 주류하고 서로 티격태격하죠. 시장경제는 다들 그냥 교환현상으로 이해하지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개개인이 정보를 서로 소통하는 아주 중요한 시스템으로 여깁니다. 시장을 정부가 규제하고 통제하자는 쪽하고 또 티격태격합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시장경제는 자유의 원천이라 봐도 될정도로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시장거래로 전쟁도 막고 인종,국경,성별,종교의 차별도 넘어버리는 보편성을 띄거든요. 예를들어 어떤 사장이 흑인인 기업이 물건을 만들었지만 정작 소지바들은 그런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성별도 그렇고요. 국가조차 의미가 없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시장경제, 사유재산, 개인주의, 자유 이런것들을 지키려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루쉰P 2016-07-12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흠 어찌 이런 글을 대단합니다 ㅎ항상 만화애니비평님을 뵐 때마다 저 뇌를 빌리고 싶다는 충동을 받아요 ㅋ

루쉰P 2016-07-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책 읽는 거 보다 만화애니비병님의 리뷰를 읽는 게 지적확장에 큰 도움이 되네요 ㅎ 아 재미지고 유익한 리뷰 ㅋ 뺏고 싶네요 이런 글을 맥주 마시며 여유롭게 쓰시다니 ㅋㅋㅋ

만화애니비평 2016-07-13 08:48   좋아요 0 | URL
제 뇌를 빌리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환영처럼 보일겁니다 오덕의 파워로써 아스카짜응(신세기 에반게리온 여자 파일러) 다이스키! 하는 그런 덕질에 빠질 겁니다!!!!

제 뇌는 번뇌입니다..ㅎㅎㅎ

사실 이런 리뷰 맥주 마시면서 못씁니다. 집에서 빵을 씹으면서 합나딩??? 여유롭게 못하죠. 저 책이 4권 시리즈이니 아이고...

루쉰P 2016-07-15 00:15   좋아요 0 | URL
훗 이거 절 너무 낮게 보셨군요. 아스카짜응에 가로치고 설명이라니...어찌 덕후의 길을 걷는 자가 아스카를 모르겠습니까...

전 아스카보다 레이 적군파로서 차분한 레이를 숭배하는 브로마이드 소유자 입니다. 훗훗

하기사 저런 건 진짜 집중해서 써야 겠어요. 전 집중해도 저런 글이 안 나오는게 함정 ㅋ 다음 리뷰를 기대합니다. ㅋ

만화애니비평 2016-07-15 08:44   좋아요 0 | URL
아니 그런 부담을 주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