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한다. 착하다는 말이 멍청하다는 말과 통하는 사회는 좋지 않은 사회다. 똑똑하다는 말이 영악하다는 말과 통하는 사회가 좋지 않듯이.


  착하다는 말은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못한다는 말과 통하기도 하는데, 이익 우선 사회에서 착함은 곧 뒤처짐을 뜻하기도 한다. 뒤처짐,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패배라고 할 수 있는데,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에서 패자는 다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착함이 이익을 챙기지 못함, 패배함,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의미하게 되는 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착함이 멍청함이라고 해도 여전히 착한 사람들은 존재한다. 착한 사람들은 천성이 그렇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착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더 불편하고,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런 착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패자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착함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착하다고 멍청하다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착함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갈 수 있도록.


그것을 [4.3이 나에게 건넨 말]에서 '선의 시민성'이라는 말로 나온다. 개인의 착함이 집단으로, 사회로 번져나가 시민성이 착함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행복한 사회다. 바람직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다. 말은 누구나 다 함께 사는 사회,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꾼다고 하지만, 권력을 쥐고자 하는 자들은 말로 포장을 할 뿐이다.


그들의 말은 착함과는 거리가 있다. 말로야 무엇을 못하랴는 식으로 그들은 온갖 착함의 수사학을 구사하지만, 그것은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불과하다. 말로만 끝나고 실천은 착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이런 권력자들,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사회가 되지 않게 하려면 '선의 시민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라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착함이 무엇인지, 착한 척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언제라도 돌아설 수 있는 자들의 말과 진정 착함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착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그들이 발휘하는 착함은 상황을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냥 그들은 당연히 해야할 행동처럼 할 뿐이라는 사실을.


[빅이슈] 이번 호를 읽다가 그런 착함, 선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선함을 생각하게 하는 표지와 글들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빅이슈] 자체가 선함이다. '이번 호에도 사랑과 선의와 희망을 믿는 기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없더라도 그것을 믿는 독자들과 앞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기를.'(8쪽)라는 편집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빅이슈에 나오는 그들은 바로 이런 사랑과 선의를 보여주고 있다. 착함이 철철 넘쳐흐르는 글들이다. 그런 착함이 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함께 착함의 세례를 받는다. 개인의 착함이 아니라 시민의 착함으로, 그러한 착함이 사회를 더 좋은 쪽으로 만들어간다.


그렇게 착함은 멍청함과는 거리가 멀다. 함께 착함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다가 만화 [좋은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다. 착한 주인공. 그가 퍼뜨리는 착함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만화. 


이 참에 [좋은 사람]을 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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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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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부음을 들었다. 돌아가셨다고. 그가 쓴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의 형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 속에 남아 있었는데, 지금 기대수명으로 따지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서경식. 내게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기억하게 한 사람.


그가 오래 전에 낸 책이다.


화가와 작품과 역사가 나오는 그런 책.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는데, 예술 속에 작가의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에 예술가의 생물학적인 삶은 짧겠지만, 그의 예술적 삶은 길다.


서경식과 같은 작가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글들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삶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말했듯이 삶은 곧 기억이다. 기억이 계속되는 한 삶은 지속된다.


이 책에는 많은 작가들이 나와 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서양 사람들이 '벨 에포크'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절이 있기도 했지만, 주로 전쟁으로 점철된 시기다.


아름다운 시절 역시 무언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작가들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민감성이 작품 속에 시대가 녹아들게 한다.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시대를 녹여낸 작품들도 있지만, 시대에 편승한 작품들도 있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군국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그린 작가도 언급한다.


왜냐? 그런 작가를 기억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의 작은 제목이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이지만 아닌 화가가 한둘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악몽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악몽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니, 다룰 만하기는 하다.


이제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글들은 우리 곁에 남아 있으니... 그의 글 중에서 지금 우리가 새겨야 할 말을 인용한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역사의 천사라고 설명하는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클레의 이 그림을 발터 벤야민이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의 일이다.



'벤야민이 죽은 뒤, 인류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벤야민이 예감했을 뿐 실제로 목격하지 못한 이 사건을 '역사의 천사'는 목격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새로운 피해자를 낳는 암울한 변증법까지 목격했다. 진보라는 강풍에 날리는 천사의 눈에 지금은 어떤 폐허의 풍경이 비치고 있을까' (106쪽)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역사의 천사들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늦게나마 서경식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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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곳에 틈이 있다. 이미 있는 틈을 메워도 시원찮은데, 하나로 되어 있던 곳을 헤집고 파헤쳐 기어코 갈라놓는다.


 서로 닿아서는 안 되는 듯, 이 편과 저 편이 극명하게 나뉜다. 둘을 이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과일 이름까지 동원해가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 아니 밝히라고 한다. 틈 사이에 서서 양쪽을 당겨서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그런 역할 자체가 문제라고 한다. 그냥 갈라져 있는 편이 좋단다. 애초에 하나였던 적이 있었던가? 하나였는데, 하나였음을 잊어버리고, 이쪽 저쪽으로 나뉘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이런 힘겨루기 상황에서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 옷을 입을 때 이 편과 저 편을 각각 집어넣지만 마지막으로 양 쪽을 이어주지 않으면 제대로 옷을 입었다고 할 수 없다.


더워서 또는 멋으로 양쪽을 붙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한때일 뿐. 본질은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단추다.


그런데 손택수 시에서는 이런 꽃이 단추 역할을 한단다. 시인의 상상력은 역시 한 발 더 나아간다.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다니... 꽃이, 이제 봄!


땅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이들이 바로 이렇게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단추 역할을 하는 꽃단추라는 생각을 하니, 더 귀하게 여겨진다.


       꽃단추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나무의 수사학. 실천문학사. 2010년. 11쪽.


우리 사회에 많은 일들이 있다. 봄! 봄! 지상과 지하를 채워주는 꽃단추들이 많이 나오는 때.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에 봄이 왔는가?


각자 자신의 영역을 고수한다고,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면서 이 틈과 저 틈이 벌어져서 그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데도, 틈과 틈을 이어주는 단추 역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서 있을 자리가 없다.


꽃단추가 아니라 사람단추가 필요한 때인데, 사람단추에 달 실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이 편과 저 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좋다고, 그대로 가자고, 단추는 필요없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단추는 필요하다. 단추를 채우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마냥 지속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단추를 채워야 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사람단추가 더더욱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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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3-26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네요. 단추에 대해 생각하는 글...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kinye91 2024-03-26 18:49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가 좋아요. 손택수 시인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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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소설인데 제목이 '유년기의 끝'이다. 유년기라고 하면 어린 시절 아닌가. 그런 유년기의 끝이라면 성장이 되는 시기인 청소년기를 말해야 하는데, 청소년기는 어른에게서 독립해서 나아가려는 시기로 정의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유년기란 무엇인가? 행복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행복으로 충만한 시기. 인류의 역사로 따지면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유년기의 끝은 인류에게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때가 왔다는 말인데...


그런 시기에 닥친 인류는 행복할까? 유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 중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에 사람은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그런 시기를 거치는 인간은 개인이다. 다들 이런 시기를 보편적으로 거치지만 경험은 개인적으로 하게 된다.


즉 잘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기를 제외하면 청소년기부터는 자아라는 개인의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즉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소설은 반대다. 개별적인 인간들이 보편적인 인간처럼 개성을 잃어가면서 행복하게 살던 시대가 중간에 나온다.1부가 '지구와 오버로드'이고 2부가 '황금시대', 3부가 '최후의 세대'다.


지구에 외계인이 나타난다. 엄청난 과학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그들은 인류에 개입한다. 즉 전쟁을 없애고, 지구연합을 결성하게 한다. 선의를 지닌 독재자가 된다. 그들을 인류는 오버로드라고 부른다.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연합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좋겠지만, 개별성을 잃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인간의 자율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들은. 국경으로 인해 나타난 여러 폐해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버로드의 뜻대로 지구연합을 결성한다.


그것이 1부다. 지구엔 이제 전쟁은 없다. 살육도 없다. 굶주림도 없다. 그야말로 황금시대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일하고 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대. 그럼에도 이런 황금시대에도 그런 행복이 외부로부터 왔다는 사실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 스스로 찾아낸 행복이 아니다. 오버로드들에 의해 주어진 행복이다. 이런 결과에 완전히 거스르지는 않지만 자신들만의 자율 공동체를 결성해 살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2부에 그런 내용이 펼쳐진다.


여기에 오버로드들과 교류하는 인간도 나오고, 도대체 오버로드들이 왜 지구에 왔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몰래 오버로드의 별로 가는 사람도 나온다. 그리고 지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3부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은 기존 어른들과 다르게 성장한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변해간다. 즉 의식의 공유라고 해야 하나. 개별적인 몸이 그들에게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가족이란 개념도 이제는 사라져야 할 시기다. 유년기의 끝이다.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과 반대 방향으로.


우리에게는 유년기의 끝은 보편성에서 개별성으로 나아가는 시기라면, 이 소설에서 유년기의 끝은 개별자로 존재했던 인류가 보편적 인간이 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제 개인 인간은 없다. 의식을 공유하는 보편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지구는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니까. 지구는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2부에서 오버로드들의 우주선을 타고 그들의 행성까지 갔다 온 잰이라는 사람의 눈을 통해 서술한다.


이렇게 소설은 오버로드라고 불리는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구가 사라지는 순간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지구의 시간으로 하면 100년이 넘는 시간. 그 과정에서 인류가 살았던 지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인류는 우주에서 계속 살아간다. 오버로드를 통제하고 있는 존재를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나가 된 정신을 다른 우주로부터도 계속 충원하고 있는 존재를 부르는 말이다.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인데, 이것을 디스토피아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외계인에 의해 잠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지만 지구가 사라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행복은 외부에서 올 수가 없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이 추구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다면, 또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자신들의 운명에 개입하지도 못하고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을 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인류보다 고도로 발전한 지성체인 오버로드들도 오버마인드를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오버마인드가 왜 인류를 새롭게 개조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불확실만이 현실인 세상이다. 


아마도 1950년대 역사적 불확실성 속에서 작가는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여기서 길을 잃으면 인류의 종말로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표현하고 있단 생각이 들지만...


지금 우리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소설에서처럼 우주 개발을 오버로드들에 의해 하지 못하게 되었던 인류가 아니라 다시 달을 기지로 활용하고자 달에 가려고 하고 있으며, 그런 달을 기반으로 삼아 화성에 인류를 보내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주에 우리가 모르는 생명체가 있을 수 있고, 다른 문명이 있을 수 있지만, 발전된 문명에 의해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비록 느릴지라도 서서히 탐구해나가는 것이 인류의 본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에서처럼 외계 생명체에 의한 행복이 과연 황금시대라 될 수 있을지 그런 오버로드들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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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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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시집이다.


카프카가 시를 썼다고?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카프카 작품이 있단 말인가?


호기심. 그가 쓴 소설들이 결코 단순하지 않기에, 시도 역시 살아 있을 적에는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을테니, 곳곳에 남겨진 그의 글들 속에 시라고 포함되어 있었을 듯.


그런 작품을 찾아 하나로 묶어 책으로 내었으니, 다시 카프카다.


어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작가. 이 시집에는 카프카가 직접 그렸다는 그림이 실려 있다. 그런 그림을 보는 재미도 있고.


왼쪽에는 독일어 원문이 있고 (카프카는 현재로 말하면 체코 작가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체코 작가 하면 떠오르는 세 사람. 한 사람은 카렐 차페크 - 그는 체코어로 작품을 썼고, 카프카는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했고, 밀란 쿤데라는 체코어와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오른쪽에 한글로 번역된 작품이 있다.


원문 시와 번역된 시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장점이다. 독일어를 몰라서 독일어로 해석은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원문이 있는 시집이 좋다.


그냥 읽는다. 무슨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기억해 놓으면 된다. 그래서 몇 작품 적어 놓는다. 내 마음에 든 작품들.


지금 시대와도 연결이 되기도 하는 시들이니.


43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69쪽)


51

사랑은,

당신이 내게

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 칼로

내 마음을 들쑤신다. (77-79쪽)


68

가시나무 덤불은

옛날부터 길을 막아 왔다.

네가 계속 나아가려면,

가시나무 덤불은 불태워져야 한다 (123쪽)


69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대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123쪽)


92

진실의 길은

공중 높이 매달려 있는 밧줄이 아니라,

땅바닥 바로 위에

낮게 매달린

밧줄 위에 있다.

그것은 걸어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161쪽)


92라고 붙은 시. 진실을 알았을 때 그 진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걸려 넘어져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진실의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하기 위해서는 68라고 붙은 시처럼 가시나무 덤불을 불태워야 한다. 


대낮에 별이 보이지 않겠지만 가시나무 덤불은 보이니, 69라고 붙은 시에서 말하듯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고 51시처럼 내 마음을 들쑤시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한다. 43시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지만, 그 망설임 속에서도 우리는 가야 한다. 우리는 길 위에 있으므로.


가끔 책을 펼쳐 아무 부분이나 읽고 생각에 잠기고 싶어지는 그런 시집이다. 여전히 카프카는 매력적임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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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4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1번 시詩가 내 무릎을 치게 합니다. 대학시절, 날 버린 여인은 내 마음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거든요, 결국 그게 나의 욕심임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kinye91 2024-03-24 06:40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 님이 극복한 경험을 카프카의 시가 떠올리게 하고. 호시우행 님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지 않았나 싶네요. 이런 시를 만나면 저는 좋더라고요.

호시우행 2024-03-24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래서 명시라고 평가받지요.

그레이스 2024-03-25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카프카의 시집이네요!

kinye91 2024-03-25 20:54   좋아요 1 | URL
네. 카프카 시를 모아놓았더라고요. 카프카 시집이라니 생소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좋다는 느낌을 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