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요염하고 가녀린 미인, 살구꽃

五更燈燭照殘粧 오경등촉조잔장

欲話別離先斷腸 욕화별리선단장

落月半庭推戶出 낙월반정추호월

杏花疎影滿衣裳 행화소영만의상

오경의 등불은 남은 화장 비추고

이별을 말하려니 애가 먼저 끊어진다.

반 뜰 지는 달에 문 밀고 나서자니

살구꽃 성근 그림자 옷 위로 가득해라.

고려사람 정포鄭誧의 시 '별정인別情人'이란 시다. 어느 으슥한 곳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거기로 가끔 가서 놀았다. 때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하루는 밤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새벽에 사랑하는 여인과 작별하고 돌아오려 할 때, 그 순간의 광경을 그려낸 것이다. 살구꽃에 얽힌 로맨스를 담았다.

"살구꽃이 비록 곱고 어여쁜 것은 복사꽃만 못하고, 밝고 화려하기로는 해당화에 못 미치며, 아름다운 것은 장미에 미치지 못하나, 요염한 것은 도화 해당 장미가 또한 행화에 한 걸음 양보해야 할 지도 모른다."

살구꽃에 대한 묘사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장이다. 매년 때가 되면 살구나무를 찾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족한듯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볼 여유로움이 있다면 빼놓을 수 없는 꽃이다.

최근 내가 사는 마을 한쪽에 있던 살구나무가 사라졌다. 이사온 사람이 집을 새로 지으면서 잘려나간 것이다. 어찌나 아쉽던지 그쪽 방향으로 출입하는 것을 피할 정도였다.

살구나무는 친근한 나무다. 마을마다 여러그루가 있어 살구가 익을 무렵이면 나무 아래에서 서성이며 살구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어린시절 추억이 있다.

꽃도 이쁘고 열매에 대한 추억도 있기에 들고나는 대문 가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올해는 꽃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한해를 더 기다려야하나 보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천하의 한 구경거리, 수선화水仙花

鼓翼鷄鳴第一聲 고익계명제일성
明星晢晢月西傾 명성절절월서경
水仙枕畔如相狎 수선침반여상압
芳潔令人夢不成 방결령인몽불성

나래 쳐 닭이 울어 첫 홰 소리 들릴 적에
샛별은 반짝반짝 저 달도 기울었네.
수선화 베게 머리 가까이 친하다면
깨끗하고 아리따워 꿈조차 못 이루리.

자하 신위의 시 수선화다. 이 꽃을 보려고 제주도를 방문한 지난해 2월 말에는 한창이던 수선화가 올해 3월 중순엔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와 함께 연상되는 제주도의 꽃이다. 추사는 늦은 나이에 제주 유배생활이 10년이었다. 그때 이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더군요. 중국의 강남 지역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제주도에는 모든 마을마다 조그만 남는 땅만 있으면 이 수선화를 심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수선화는 온통 노랑색의 수선화가 아니다. 금잔옥대(金盞玉臺)라고 부르는 수선화로 모양이 하얀 옥대 위에 올려진 황금빛 잔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추사가 유배생활하던 제주도에는 "수선화가 하도 흔하다 보니, 제주도 사람들은 이 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쇠풀이나 말꼴로 베어내고, 아무리 베어내도 보리밭 같은 데서 다시 돋아나기 때문에 시골 아이들과 농부들은 수선화를 원수처럼 여긴다고 하였다."

제주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알뿌리를 얻어다 내 뜰에도 가꾸고자 한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꽃 없는 시절의 봄빛 자랑, 동백冬栢

臘底凝陰數己窮 랍저응음수기궁
一端春意暗然通 일단춘의암연통
竹友梅兄應互讓 죽우매형응호양
雪中花葉翠交紅 설중화엽취교홍

섣달 밑 음기 엉겨 운수 이미 다했거니
한 자락 봄 뜻이 남 몰래 통했구나.
대나무와 매화가 서로 응해 양보하여
눈 속의 꽃과 잎이 푸른 속에 붉어라.

보한재 신숙주의 동백에 관한 시다. 동백은 겨울철에 피는 까닭에 동백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동백꽃에는 네 종류가 있다. 홑잎에 붉은 꽃은 눈 속에서도 능히 꽃을 피우는 것이니, 세상에서 동백이라고 일컫는다. 홑잎은 남쪽 지역 바다 섬 가운데서 잘 산다. 혹 봄에 꽃피는 것은 춘백이라고 한다."

동백은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원래이름은 산다山茶다. 산다라는 이름은 잎사귀가 산다와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춘椿, 중국에서는 해홍화海紅花라고도 부른다.

이백李白 시집의 주를 보면 "해홍화는 신라국(海紅花 出新羅國)에서 나는데 매우 곱다" 라고 적혀 있다. 동백은 우리나라가 원산지다.

동백이 겨울에 핀다지만 따뜻한 곳에 사는 남쪽 식물이다. 애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강진의 백련사나 광양의 옥룡사지 고창의 동백숲 대부분은 봄이 무르익어서야 꽃을 피우니 춘백이라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내 뜰에도 사연이 있는 동백나무 두그루가 있다. 어린 나무라 아직 꽃은 볼 수 없어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차가운 아름다움, 매화梅花

細竹淸梅緣水涯 세죽청매연수매

東風春意滿香閨 동풍춘의만향규

가는 대와 맑은 매화 물가에 따라있고

동풍에 봄뜻이 규방에 가득해라

이는 보한재 신숙주가 서첩에 쓴 시구다. 매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인묵객을 비롯하여 모두가 좋아하는 꽃이다. 찬바람 부는 한겨울 탐매를 나선 사람이나 만발하여 상춘객을 불러 모으는 때에도 단연코 선두에 서는 꽃이라 할 수 있다.

䟱影橫斜水淸淺 소영횡사수청천

暗香浮動月黃昏 암향부동월황혼

물은 맑고 얕은데 그림자 빗겨 있어

달 뜬 황혼에는 그윽한 향기 떠다니네

매화를 좋아했던 사람으로 매화로 처(妻)를 삼던 송나라 사람 임포를 빼놓을 수 없다. 죽음을 앞두고 매화분에 물을 주라던 조선의 퇴계 이황도 있다. "천엽이 단엽만 못하고 홍매가 백매만 못하니 반드시 백매의 화판이 크고 근대의 거꾸로 된 자를 선택하여 심으려고 하였다"는 정약용도 있다.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매화를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돌보거나 이름난 매화를 찾아 탐매의 길을 나서기도 했다.

그 취향은 오늘에도 이어져 전국에 사는 벗들이 섬진강 기슭에 모인다. 해가 바뀌고 첫 꽃나들이 장소로 정한 곳이 섬진강 소학정이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매화꽃이 핀다는 곳이다. 오랜 꽃궁기를 건너 첫 꽃을 찾는 나들이이고 그것도 모두가 사랑하는 매화라 더욱 즐거운 나들이가 된다. 어쩌면 꽃은 애둘러 말하는 핑계고 벗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것이 우선인 듯도 하다.

매화타령의 한구절로 차갑고 아름다운 매화를 만난 소회를 대신한다.

매화 옛 동걸 봄 철이 돌아온다.

옛 피던 가지마다 피염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하도 분분하니

필지 말지 하더매라

*문일평의 '화하만필'을 정민 선생이 번역하고 발간한 책, '꽃밭 속의 생각'에 나오는 꽃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더하고자 한다. 책의 순서와 상관 없이 꽃 피는 시기에 맞춰 내가 만난 꽃을 따라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