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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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브리다-파울로 코엘료 

코엘료가 <연금술사> 이후에 출판한 소설로, 90년도에 처음 나온 소설이 <브리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금술사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으며,
연금술사의 여성판 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이룩한 자아의 신화가,
마녀로서 신비주의적인 자아의 각성을 이루는 브리다의 자아 발견의 여정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그녀를 돕는 인물들을 보면서 산티아고의 여정을 돕는 인물들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그 인물들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조력자로서 산티아고를 돕던 인물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심지어, 책 중간에 양치기가 나오는데 그의 이름이 산티아고 입니다.^^
*p.195
오후 내내, 그들은 눈 덮인 숲을 거닐었다. ...(중략) 그러다가 양떼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을 만났다.
"안녕, 산티아고!" 마법사가 목동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신께서는 목동을 각별히 총애하시지. 자연과 침묵, 인내에 익숙한 이들이거든.
그들은 우주에 소통하는 데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까지 코엘료의 문학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아무리 봐도 신비주의적 각성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연금술사>,<브리다>가 위치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브리다>와 <연금술사>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랑에 관한 중요도의 차이입니다.
<브리다>에서는 사랑이 핵심적인 가치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그 무엇보다 소울메이트와의 만남 및 그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소설의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올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과 인간들간의 운명적인 사랑의 의무,
그리고 여성들이 품고 있는 신성은 <피에트라~>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사용됩니다.
(<피에트라~>에서는 여성들이 품고 있는 신성이 신의 여성성이라는
더욱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또 섹스를 통한 신비적인 합일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11분>의 예고편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둘러보니 <브리다>는 파울료 뒷작품들이 잉태된 씨앗같은 느낌입니다.

에, 어쨌듯 지나치게 코엘료스러운 신비주의 소설이라서
오히려 저에게는 신비적인 느낌이 떨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영적 각성 과정은 흥미로웠고,
사랑의 신비함을 새삼 실감하는 소설이었다 정도로 <브리다>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문뜩 허탈해집니다.
<브리다>는 소울 메이트도 만나서 필생의 사랑을 이루고,
영적 각성까지 해서 미래에 마스터가 될 인물이 되고,
스승인 마법사와의 인연으로 진실한 사랑의 의미도 깨닫는 판에
저에게는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이거 이런식이라면 저도 마법사를 찾아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당장 쓸만한 마법사 찾아서 숲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내 소울메이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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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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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빌린 책,산 책,버린 책-장정일  

오랫만에 읽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독서일기라는 형식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답게, 그의 서평은 일기의 형식을 빌고 있지만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하나의 글이다. 서평이 단지 책을 평가하는 글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읽을만한 하나의 형식임을 보여주는 책.
어떤 블로거는 그의 글이 힘이 약해졌다고 혹평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의 자유롭고, 때로는 날카로우며,삐딱하며,비판적인 글들에 통쾌함과 매혹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책 제목과 달리 그가 소개한 책들은 나의 미래의 독서목록에 읽어야 책으로 등재될 예정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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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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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빵가게 재습격-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는 지금 '~이즘'과 '~주의'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사상이나 철학,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냉혹하고도 비정하며 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이다.
현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즘'과 '~주의'보다는 생존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더욱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서 조각조각 해체된 사상의 잔해들을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이 해체는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체된 사상을 대신해 주도권을 잡은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원자회된 개인들은 자신들의 좌표와 방향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불안해다가 결국 생존이라는 현실 명제에 주도권을 넘겨줘버렸다.
그것이 아마 지금의 우리 모습일 것이다.

나는 항상 그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린다.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좌절된 학생운동의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모습을 도시적인 감성으로 그려내기 시작한 이 작가는 지속적으로 거시적인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혼란스럽고,불안하고,모호한 모습과 
그러한 개인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자신만의 개인주의적인 스타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 단편집인 <빵가게 재습격>이 있다. 여전히 카오스적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그럼에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하루키적인 개인들이 펼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의 모음집이나 다름없는
이 단편집에는 하루키 특유의 스타일을 바탕으로 해학과 익살의 맛까지 보여주며 하루키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한다.
참을 수 없는 허기 때문에 한밤중에 맥도날드를 습격해 돈이 아닌 햄버거를 훔치는 부부의 이야기와, 수수께끼의 코키리 실종 사건의 진실을 쫓는 남자의 이야기와,
바른 생활 사나이인 여동생의 결혼 상대에게 반감을 느끼는 바람둥이 오빠의 이야기와,
헤어진 쌍둥이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남자의 이야기와,
집에서 일기를 쓰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1881년의 인디언 봉기와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을 연관시키는 사람의 이야기와,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시작으로 기묘한 하루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에서,
방향성을 상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하루키적인 개인들은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무기로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구성해내며, 그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쫀득쫀득한 고기를 씹는 것 같은 소설을 읽는 맛을 선사한다.

혼란스러운 도시적 개인의 삶을 읽을 만한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하루키의 능력에 감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은 끝나있었다.
너무나 빨리 끝나버린 독서의 시간에 당황했고, 당황하다니 보니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허기에 시달리다 보니 홀연히 하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그것은 '빵가게를 습격'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렇게 소설이 끝나고 나는 소설의 첫부분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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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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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1)질문
1740년 7월 20일 페루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진다.                                               

당시 식민지 페루의 가장 멋진 다리로,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던 이 다리는 혼자 무너지는 것이 아쉬웠는지,
그때 다리를 걷고 있던 다섯 사람을 죽음의 세계인 명부로 끌고간다.

신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몰두하던 주니퍼 수사는 우연히 그 다리 근처에 있다              

다섯 사람이 발버둥치며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그것을 목격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회라고.
신의 섭리가 세상을 작동하는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그에게는
완벽한 불의의 사고로 죽은 다섯 사람이야말로 신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였던 것이다.
만약 그의 조사로 그들이 죽을 만한 죄를 저지른 사실이 증명된다면,
그때의 사고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사는 죽은 다섯 사람의 조사에 매달린다.
6년의 시간동안 걸쳐 조사를 한 수사는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출판한다.

장장 6년의 세월동안 다섯 사람의 삶의 궤적을 쫓은 수사.                                                     

수사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2)대답
수사는 거기에서 인간을 보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을.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음이 삶의 절대적인 기본 조건을 이룬 상황에서
각자의 욕구와 감정과 이성이 덧붙여져 각자의 삶을 형성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때의 인간이란 평범하기도 하고, 평범하지 않기도 했다.
때로는 광기에 휩싸이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사악해지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살기 위해 비겁해지고, 때로는 남을 괴롭히고,
때로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때로는 삶이 버거워 도망치기도 하고, 때로는 탐욕스럽고,
때로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때로는 마음의 어두움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때로는 짐승과 같은 욕망에 휩싸이고,
천사와 악마,어린애와 어른을 왔다갔다하는 인간의 모습들.                                                           

단순하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평범함이라는 외피를 쓴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이상하며 특별한 것인지 드러내주는
글에서, 그가 본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신비였다.

3)결말
자신감있게 시작한 수사의 책은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오묘함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책이 증명하는 사실에 당황한 교단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의 논리에 책이 위배된다는 생각을 하고,
책과 수사 모두를 이단으로 결정해 화형을 명한다.
누구보다도 신의 섭리를 믿었던 수사는 그렇게 자신의 책과 함께 화형당한다.
단지, 인간 삶의 흔적을 따라가 그들 삶의 복잡함을 드러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4)살아간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오묘한 것이다.
수사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려 시작한 행위가 죽음이라는 예상밖의 행위로
끝나버린 것처럼.
우리는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삶이란, 인간이 살아간다는 행위란
그렇게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원시적인 욕망과 감정, 
문명화된 이성과 내적인 규율의 충돌을 계속하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이기에,
그리고 그런 존재들 다수가 모여 만들어낸 사회와 문명과 문화와 공동체를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네 삶이란 쉽게 얘기하거나, 비하할 수 없다.
이 어렵고도 쉬운 삶의 진실을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더해 그려내기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소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생생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로서,
영문학의 고전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고전의 힘이란 우리네 삶의 힘과 일치한다.
삶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삶이 되는 가상의 이야기로서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그 문장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소설로서
 내 머릿속에 깊이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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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아카가와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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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결혼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연애가 이상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면,
같이 오랜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결혼은 필연적으로
현실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한 사람과 같이 자고,먹고,마시고,싸우고,슬퍼하고,기뻐한다는 의미이다.
이같은 현실의 힘 앞에 연애할 때의 환상과 이상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날것 그대로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건, 때로는 인간적인 위력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을 느끼며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혼하지 않는 이상은 결혼한 부부는 이 나쁜 인상을 덮어두는 방향으로 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쌓이면 익숙함이라는 삶의 관성이 되고,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렇게 흘러가는 삶의 관성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 수가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와 평소의 불만이 함께 섞여서
어느 순간 '펑'하고 터지는 것이다.
이 폭발은 때로는 싱겁게, 혹은 평화롭게 마무리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이 폭발은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릴 수 있다.

<악처에게 바퀴는 레퀴엠>은 삶의 관성에 이끌려 살아가던 남자들이
'펑'하고 터질지 모르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이 '펑'하고 터지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어느날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도중에 야금야금 폭발의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코믹한 상황극에,
유머 미스터리의 기수라는 아카가와 지로 특유의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전개에 휘둘리면서
이 폭발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삶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고,
남자들과 여자들은 언제나처럼 다시 삶의 관성에 휘말려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이 남편과 아내 모두를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세상 누구나 나쁜 아내, 나쁜 남편이 될 수 있으며,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살인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끌어가는 두 주체의 삶이 금이 간 얼음처럼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것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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