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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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크라우스는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계 유대인인 어머니와 미국계 유대인인 아버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독일과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나중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고, 친조부모는 각기 헝가리와 벨로루시 태생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지명들은 2005년에 출판된 '사랑의 역사'에서 그 배경이 됩니다. 크라우스는 1992년에 스탠포드 대학에 등록했고, 그 해 가을 그곳에서 조셉 브로드스키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와 브로드스키는 근 3년 동안 교류를 지속합니다. 이후 1996년에는 마샬 장학금을 받고 옥스포드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석사 과정에 등록하고, 미국 예술가인 조셉 코넬에 대한 논문을 작성합니다. 그녀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4편의 작품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간다','사랑의 역사'.'그레이트 하우스','포레스트 다크'로 유대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정체성 문제 등을 다루면서, 특히 언어로 매개된 기억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통 그녀를 평가할 때, 포스트모던 문학으로 자주 그녀의 작품 세계를 한정하기도 하는데요. 다만, 여기에서 밝히고 싶은 부분은 이 '유대인의 정체성' 이라는 부분 역시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문학적 주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Great House"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7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서사 형태는 4명의 화자가 서로 두번씩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각자가 지난 삶에서 체화된 경험과 그런 기억이 긴 나레이션을 통해, 온전히 재발견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부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다니엘 바스키라는 인물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상'은 서로 맞물려, 이와 연관된 인물들의 숨겨진 배경이 곳곳에 드러나 극은 마치 음악의 절정처럼 몹시 요동치게 됩니다. 전자의 다니엘 바스키는 태생이 유대인으로 직접적으로 두 명의 인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비극적인 실종과 더불어, 후자의 책상은 3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몇 명의 소유주와 상이한 지역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서 책상은 일종의 '상실의 비극'을 은연중에 내포합니다. 즉 책상의 '전해짐과 상실'은 극에 등장하는 소설가인 로테 버그와 시인인 나디아의 뜻하지 않은 불행을 초래하는데요. 또한 책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중부 유럽 유대인의 역사적 비극, 그리고 당사자인 '미스터 와이즈'의 가족사는 분명 우리 인류가 기억해야 될 상흔이기도 합니다. 작중 어떤 화자의 독백에서, "유대인은 항상 죽음과 가깝다.","유대인에게 죽음의 의미는 기독교와 불교와는 상이하게 다르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전체 역사에서 이들이 얼마나 거짓된 모함과 편견으로 여타 다른 민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한 민족이 마땅히 누려야 될 삶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음습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맥락의 아픈 서사는 저의 마음을 절로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과 당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소재한 '가족의 집'에 불현듯 나치 독일의 재앙이 들이닥쳤던 그 날의 기억은 마땅히 안온함으로 채워져야만 했던 어린 와이즈의 삶을 그대로 산산히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성년이 되어서도 필생의 과업으로 지난날 조부와 아버지가 구축한 가족의 세간살이 즉, 유산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게 되는데요. 이런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자식들은 이렇게 '인간의 정'을 상실한 아버지와 결코 가까워질 수 없게 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유일한 자식들인 요아브와 레아 남매의 억눌리고 주눅든 성격, 이 뿐만 아니라 요아브의 여자친구이자 4명의 화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한, 이사벨이 이런 와이즈을 평범한 사람의 감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자신의 가족사를 쉽게 털어놓을 없었던 요아브를 그녀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데요. 요아브와 잠시 떨어졌던 이사벨이 결국 다시 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지한 고백은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 놓여진 사랑의 끈이 그만큼 굳건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에 저자는 한편으로 지난날 비극적인 유대인의 가족사를 치유하는데 있어 중요한 힘은 서로를 진정 이해하게 만드는 사랑이며, 이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에 의한 치유는 굴절된 기억, 몸에 새겨진 슬픔과 상처, 그리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증오를 역사의 진정한 치유와 함께, 중요한 회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극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다니엘 바스키는 칠레 출신의 유대인으로 자신의 모국이 곧 중대한 위기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CIA와 시카고 보이스가 협력한 피노체트의 불법적인 군부 쿠데타 획책이었습니다. 바스키는 결국 극에서 몇번이나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결국 피노체트 군에 끌려가 행방불명 됩니다. 칠레가 아닌 미국의 폐쇄적 이익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쿠데타에 나섰던 피노체트는 훗날 영국에서 등 수술을 받다가 당국에 체포되었다는 짤막한 기사를 통해, 이날의 비극이 얼마나 보잘것 없이 희화화 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데요. 작가인 크라우스가 신변의 비밀을 안고 있는 바스키의 실종을 피노체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점은 유대인으로서 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분명 대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극중에 하인리히 힘러가 짤막하게 언급되는 부분은 그대로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지는데요, 또한 다른 화자들의 서사를 통해, 피노체트가 벌인 극단적인 군사 행동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바스키의 안위의 문제와 결부되어, 당시 칠레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것을 보면 칠레 사태가 그저 한 자락의 뉴스꺼리만은 아닌 것으로 이해됩니다. 작가인 크라우스 본인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적 운명 자체에 있어, 이들 민족이 역사의 부침에 의해 산산히 흩어지는 것을 도식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닐 겁니다. 역사가 유대인의 궤멸을 바란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아닌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느끼기에도 이들이 겪은 지난날 역사의 고난은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고통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말입니다.   

또한 작게는 이 '책상을 둘러싼 복잡한 기억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이것의 여파가 때에 따라 화자들과 연관된 인물들의 말 못할 비밀과 면밀히 연계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의 남편이자 화자 중 한 사람인 아서 벤더가 아내가 죽음으로써 드러난 충격적인 '비밀'이 이 부부의 삶에서 떠난 그 책상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고, "과연 아내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자포자기한 감정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예전의 삶을 숨기고 이중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는 바로 2차 대전 당시의 '뉘른베르크에서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증오의 전쟁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고, 동시에 처절한 현장에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마음의 골에 아로새기게 됩니다. 단순히 신문 기사나 티비 뉴스에서나 등장하는 전쟁은 몸소 체험해 보지 않는 이상, 이것의 파멸적 의미를 누구든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요. 바로 이 책상의 복잡한 의미가 앞서 제가 설명한 '비극적인 상실의 의미'를 폭력적으로 내포하게 된 연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의 학살과 그로 인한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파괴와 절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책상과 매개되어 있고, 이것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책상을 '상실한' 화자들의 불안한 삶과 더 나아가 예기치 않는 불행으로까지 귀결됩니다. 그저 일상에서 봄직한 사소한 불행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요. 소설가 아내의 굴곡진 인생과 그것을 수동적으로 대면한 어떤 화자, 자신의 삶에 오롯이 서지 못한 인물들의 서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들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마치 우리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는 그런 불확실성 말입니다. 분명 이 책상의 주인이기도 했던 다니엘 바스키, 그의 생사불명과 존재성을 두고 얽히게 되는 숱한 오해의 문제들은 화자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파생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실종과 갈 곳을 잃은 책상의 존재는 단순히 오고감의 단절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극의 서사를 이끄는 이 축은 결국 4명의 화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러면서 이들 각자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것은 진실의 대면이거나, 과거의 드러남이거나, 혹은 추악한 비밀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작가는 이 노련한 작품을 쓰기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의 외가와 친가의 불행한 가족사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현재 이런 유대인들이 정착한 이스라엘이 어떤 의미로 '불완전한 정착지'라는 점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그 끝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뭐 이것을 단순히 역사에서 예정된 '유대인의 고난'쯤으로 가볍게 치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다른 누군가에게 쉽게 전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증오'이며, 이것을 지워내고 희석시키는 것에 필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더할 나위 없는 큰 사랑'과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인류에게 사랑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자기 파괴적인 폭력과 증오를 제어하고 제한하는 역할이라고도 읽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요아브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이사벨의 사랑과 그 결실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울림을 안겨준다고 여겨집니다. 이와 상반된 결말을 맞이한 인물들인 로테 버그와 나디아의 사뭇 의미심장한 파국은 극의 중요한 문법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의 나무랄 데 없는 번역과 그에 따른 밀도 높은 서사의 울림 자체는 이 작품의 크나큰 장점으로 여겨졌는데요. 여기에 여러 의미로 쓰인 상징적 장치들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꽤나 훌륭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처음엔 듣지 못한 어떤 배경음 같은 것. 혹은 아침에 일어날 때, 잠에서 빠져나와 깨어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가 들린 적도 있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자기가 읽은 모든 문학 작품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면, 머리와 영혼에서 지워진다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너의 눈이나 살짝 기울어진 입꼬리에 무언가가, 고통, 아니 정확히 고통이라곤 할 수 없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아내는 자신의 자유에 대해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말 것을 분명히 했고, 내 쪽에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와이즈 씨는 1944년의 그날 밤 게슈타포가 부모님을 체포해 갈 당시, 부다페스트의 아버지 서재에 있던 물건들을 되찾으려고 애썼고, 자신의 서재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은 모두 그렇게 되찾아 온 것들이었다.

그때, 왜 바로 그 순간에 움슐라그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 사진이 떠올랐는지 생각났다. 그러니까, 링겐블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던 바로 그 시기에, 게슈타포가 추방 혹은 처형을 당한 유대인의 집에서 약탈해 온 가구나 가재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한 유대인 사원이나 공장 사진들도 함께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한때는 닮은 점이 있었지만, 삶에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 때문에 뒤틀려서, 이젠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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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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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에서 태어나 인근인 이베토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도시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카페와 식료품점을 운영했는데요. 그녀는 루앙 대학과 보르도 대학에서 공부하고 교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1970년대 초에 그녀는 오트 사부아 보네빌의 고등학교와 아네씨르비유의 이비르 대학에서 가르치다, 그후 국립 원격 교육 센터 Center national d'enseignement à distance 에서 23년간 근무합니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그녀는 특유의 자전적 소설로 프랑스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2022년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프랑스 대통령인 엠마뉘엘 마크롱은 특히 "여성과 잊혀진 사람들의 자유의 목소리"라는 헌사를 보냅니다. 다만, 그녀는 정치적 행동주의라는 측면에서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장 뤽 멜라숑을 지지했으며, 거의 공개적으로 반이슬라엘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에르노는 이란 정부에 맞서는 민중 봉기에 연대를 보내고, 이란의 '히잡 의무법'에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La Place"로 지난 198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4월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아르노의 이 소설 역시, 그녀 스스로의 자전적 기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친을 배경으로 간단하지 않은 가족사를 그리고 있었는데요. 우선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라는 주제로 세상에는 때론 아버지를 경멸하고 멸시하는 딸들이 있는 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겁니다. 모성애 대한 지극하고 일관된 찬사와 입장에 반해, 부성에 대한 태도 혹은 그런 평가는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양가적 감정으로 다뤄지고 있기도 한 데요. 저는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1936년 이후 나치 독일의 프랑스 강점과 이후 1944년의 노르망디 지역에서 연합군 주도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 벌어지면서 발생한 그 혼란의 시기에 처자식을 건사한 '한 아버지'의 노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작중의 그녀가 마르셀 프루스트와 시몬 보봐르를 알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어떠한 감정을 가졌을지는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우리들의 부모님을 빗대어 보면, 자신에게 향한 교육과 문명의 혜택이 공짜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아버지를 단순히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혹은 더 나아가 아버지, 당신의 삶을 통해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충분히 공감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녀가 말하는 "기초 교육 내지는 일반적인 교양과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의 열등감이 과연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그런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항상 노력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단순히 가엽다거나 깊은 감정의 숙고가 배제된 그저 안쓰럽다는 태도로 일관해서는 어떤 한 사람의 삶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물론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해보고 그의 결핍에 대해 가늠해 보려는 노력이 아주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평범한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라는 모습 자체는 단순히 이성적인 측면에서, 남성이 여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다는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물론 훌륭한 고등 교육을 받은 것과 책을 항시 손에 놓지 않는 딸은 말 그대로 평범한 예는 아닐 겁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가족 간의 소소한 갈등, 그럼에도 어머니와 아버지 간의 살뜰한 애정과 서로를 향한 사랑은 충분히 감동적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삶이 어떻든 간에, 딸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아버지의 삶이 어느 정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매번 숭고하게 여겨지는 모성애와 비교될 만한 주제로도 읽혔는데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탁월한 교양을 쌓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사위와도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고, 딸이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매번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며, 무엇보다 노르망디 지역에서 나치 독일군이 초래한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에서 가족을 무사히 건사한 가장의 존재는 '어떤 자연의 혜택' 정도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에르노 자신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온 사력을 다한다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치열한 삶이 객관화 되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딸과 아버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자기 변명에 숨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제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불편한 감정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 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못된 성질은 그를 지탱해 주는 원동력, 가난을 견뎌 내게 하고 자신이 사내임을 믿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웃음을 억눌렀다. 나는 커가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성적인 암시들을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좁은 길을 아슬아슬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이런 작업에 수반되는 소외에 대한 고발 사이에 낀 좁은 길 말이다.

아버지는 뭔가 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앞에서는 소심해지고 뻣뻣이 굳어져서 상대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요컨대 똑똑하게 처진했다.

우리 식구들은 서로 쥐어짜는 어저로 말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화법을 알지 못했다. 정중한 어조는 외부인들에게만 사용했다.

식구 대부분이 고학력자이며 대화 중에 끊임없이 <아이러니>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가 어떻게 이 순박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즐거울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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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7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작품 중 그래도 덜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4-04-27 16:14   좋아요 2 | URL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삶을 투영해가며 쓴 일종의 자기 고백이 어떨 때는 심하게 날 것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 그나마 이 작품은 술술 잘 읽히기는 했습니다. ^^
 




오늘 퇴근 후에 가본 곳은 경춘선 별내역 인근에 위치한 '지구별 헌책방'입니다.

저는 대중 교통을 이용해 방문을 했는데요. 이 별내역 근방은 저로서도 처음인 방문길이었습니다.





별내역에서 지도 어플의 정보대로 길을 따라 책방이 있는 모 오피스텔 건물에 도착을 했는데요. 책방은 오피스텔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해 있었고, 따로 이정표는 있지 않았습니다. 건물이 총 2개이니, 안쪽에 길을 따라 잘 찾아 들어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가는 크게 4개 정도로 길게 놓여져 있었고요. 상당히 빽빽하게 책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맨 왼쪽 서가에는 제법 오래된(1980년대) 책들이 있었고, 전체적으로 책 분류가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매장 자체가 매우 깔끔한 공간이라 예전 헌책방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 사진은 입구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이고요. 대충 보시면 알겠지만 책들 대부분은 상태가 좋아보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따로 가격 책정이 되어 있는 책을 제외하고는 권당 1천원으로 판매하고 계셨는데요. 이곳은 무인 헌책방이라 책을 고르고 나서 사장님의 계좌번호로 입금을 하시면 됩니다.




다른 블로거들의 책방 소개글로 보건대, 여기의 책들은 대부분 기증을 받은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책방이 있는 오피스텔이 신축 건물이고 상가 건물도 꽤나 규모가 있어 보여서 과연 월세 운영이 되실지 조금 걱정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책도 권당 1천원에 판매하고 계셨으니까요.




이렇게 도합 8천원에 구매를 했는데요. 책방에는 이외에도 양질의 책들이 많으니 한번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저에게는 열화당에서 나온 보들레르의 저 책이 득템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요.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도 꽤나 반가웠습니다. 저도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지 새로운 판형에 새로운 번역보다 이런 옛날 번역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저 중에 우선 아니 에르노의 얇은 소설부터 읽어볼까 합니다. 그럼 헌책방 방문기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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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7 0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내역에도 헌책방이 있었네요.요즘 서울에도 헌책방이 많이 사라지는 추세인데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4-04-27 14:55   좋아요 1 | URL
싸고 양질의 헌책을 다루는 책방이 많이 사라진건 사실이죠. 서울도 이제 헌책방 구경하기 어려운 도시가 된 것 같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4-04-28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말만 들었던 그 헌책방이네요. 너무 멀어서 갈 엄두가 나지 않네요.

베터라이프 2024-04-28 14:40   좋아요 0 | URL
저도 집에서 좀 거리가 있는 곳이었는데 더 더워지기전에 가보자 했지요 ^^; 책값이 매우 저렴해서 그래도 가볼만한 곳이었습니다 ^^

호시우행 2024-04-28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가격은 가히.ㅎㅎ
 
21세기의 승자
자크 아탈리 지음, 유재천 옮김 / 다섯수레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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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는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 이론가이자 작가로, 이외에 정치 고문과 정부의 고위 공무원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3년 11월 11, 당시 프랑스 속령이었던 알제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시몬 아탈리는 오로지 독학으로 알제에서 향수 제조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의 가족은 알제리 독립 전쟁이 시작된 지 2년 후인 1956년에 부친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가족이 모두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후 아탈리는 파리 16구의 고등학교인 리세 쟝송 데 세이 (Lycée Janson-de-Sailly) 에서 수학합니다. 뒤이어 1966년에는 에꼴 폴리테크닉을 졸업하고, 에꼴 데민, 파리 정치 연구소 (Sciences Po), 국립행정부 (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를 졸업합니다. 2년 뒤인, 1968년에 니에브르에서 인턴쉽을 하던 중에 당시 학과장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을 만나게 되는데요. 미테랑은 모두가 알다시피 프랑스 제21대 대통령이었습니다. 아탈리는 결국 1972년에 프랑스 유수의 그랑제콜 중 한 곳인, 파리 도팽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자크 아탈리는 그의 전체 이력 가운데, 크게 두 가지 이력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을 텐데요. 미테랑 전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을 비롯, 내각의 특별 고문을 수락해 여러모로 조력을 한 경력과 다른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이력은 영국 런던에 있는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를 설립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탈리는 냉전 전후로 유럽에서 경제 정책과 각 정부의 조언자로 자리매김하고, 경제학 관료로서 활발한 이력을 쌓게 됩니다. 더욱이 그는 1969년부터 2023년까지 54년동안 총 86권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의 노력을 인정해 2009년, 미국의 국제 외교 잡지인 포린 폴리시 Foreign Policy)는 그를 세계 100대 '글로벌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원제, "Lignes D'Horizon"으로 지난 199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1992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번역된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연히 제게 발견된 아탈리의 이 오래된 논저는, 모 헌책방의 책들 사이에서 먼지만 먹고 있던 것을 힙겹게 찾아낸 것인데요. 이런 아탈리의 논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일독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처음 읽었던 글은 '위기 그리고 그 이후'인데요.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책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전에 대충 읽다 접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한 역자 역시 꽤나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인데요. 과거에 KBS 이사장을 역임했던 유재천 교수입니다.

자크 아탈리의 이 책이 쓰여진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그가 21세기를 준비하며 예측한 내용들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주시하는 21세기 국제 정치 및 세력의 동향 가운데, 일본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정치경제적 배후지로 두고, 아시아 태평양 시대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상반되게 중국과 관련해서는 "만약 중국이 세계 경제와 시장 속으로 완전히 통합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예측이 대부분 뒤집혀 질 수 있다"고 언급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비롯 인도와 중동은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단언하기에 이릅니다. 사실 중국의 개혁 개방을 논하기에 앞서,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과 그에 따른 산업 개편에서 중국이 다국적 기업들의 현지 공장 역할을 하게 된 것이 그야말로 지금의 경제 성장의 원류가 된 것인데요.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워싱턴과 런던이 중국의 이 정치경제적 대두를 과연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지 매우 궁금한데요. 일전에 지오바니 아리기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들 서구 엘리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만 자크 아탈리 역시, 이런 그의 예측이 빗나간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지 마찬가지로 매우 궁금합니다.

글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1장 중반부터, 저자는 앞으로의 세계는 '폭력을 돈으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만큼 시장의 존재는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하에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미국과 서구 유럽 국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논법이기도 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 제 목소리를 내고 여론을 주도하는 등의 '선도국'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견 경제력과 군사력, 즉 양자 간의 균형 있는 투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그리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앞으로는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위기는 세계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미국 경제의 건전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아탈리는 간곡히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980년대의 미국 시민들이 일본에서 유입된 자금으로 '신용 카드 소비'라는 무절제한 신용 생활을 했으며, 이러한 측면의 서술은 훗날 2000년대 초중반, 중국이 미국 국채에 막대한 투자를 벌임으로써,미국 시민들이 마찬가지로 신용 생활을 반복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자크 아탈리가 강조하는 것은 '시장과 민주주의의 합치'였습니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대등한 관계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가 같은 유럽인의 관점에서 앞으로 동유럽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점과 모든 지역에서 군사적 기술의 발전으로 단순한 물리적 충돌을 떠나, 각 지역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기에 무엇보다 권역 간의 힘의 분리 내지는 본질적인 권력의 분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비판적 분석대로, "시장 만으로는 산업을 일으킬 수 없고, 건강과 교육 제도라는 기본적인 사회구조를 세울 수도 없고, 이런 시장만 가지고서는 원자재를 가지고 이윤을 낼 수 없다"는 진술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민족주의 국가들이 더 나은 국가 체제를 위해, 보다 큰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시장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확대는 그만큼 세계 평화(말 그대로 거창한 담론이긴 하지만)의 요구는 이론과 더 나아가 머릿속의 상상에 끝나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직접적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논법을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민주주의적 가치와 그런 제도를 구축한 국가들이 핵무기와 화학 무기를 동원한 인류 절멸의 전쟁을 쉽게 용인하기란 그만큼 어려울 것이라 여겨집니다.

끝으로 콜린 크라우치의 경고와도 일맥상통한 '전체주의의 잔재'가 유럽에 여전하다는 저자의 우려는 단순한 억측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또한 가난한 국가에게서 민주주의가 굳건히 뿌리 내리기 어렵다는 것은 앞으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처한, '뿌리 깊은 빈곤의 굴레'는 이제부터라도 북반구의 선진국들이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현재 유럽에서 불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공포증", "인종차별주의라는 망령"이 다시금 지구를 떠돌고 있다는 경고 역시 우리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특히 인종차별주의를 기반으로 극단주의 세력이 정치 무대에 속속 등장하고 있는 이 현실은 그만큼 두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시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 시대의 요청"은 어떠한 진정성에 기반해야 하는지 이처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선험적이고 무엇보다 선명한 요구는 모두의 경제적 안정과 그런 체제가 항유하는 가치에 기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말로만 내뱉는 것 만으로 위안을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96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종교에, 다음에는 군사력에 좌우됐던 이전의 질서와는 달리, 새질서는 주로 경제력에 의존하여 이 폭력을 통제할 것이다.

확실히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정의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기는 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체제는 합치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 형태를 파괴해 버릴 정도로 위협적인 적대관계를 줄이기 위해 인간은 서열을 존중하는 조직을 스스로 만들고, 그 조직의 우두머리에게 이같은 폭력을 조정하거나 행사할 권력을 부여했다.

만약 미국의 경제적 쇠퇴가 현실로 굳어진다면 유럽은 고통받게 될 것이다.

어쨋든 다음 세계경제의 중심지가 되고자 하는 모든 후보지가 갖추어야만 할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 그러나 일본이 그같은 조건을 갖추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일본이 과연 전세계 인류를 포용할 만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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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세계의 극단주의 - 광신, 인종차별, 분노
애덤 클라인 지음, 한정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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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애덤 클라인은 미국 메릴랜드 주의 공립 대학인 솔즈베리 대학을 거쳐, 마이애미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워싱턴 D.C에 소재한 사립 대학인 하워드 대학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특히 그는 혐오 표현과 온라인 극단주의, 비주류 인종주의 운동 등에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 그는 미국 정치계에서의 인종 혐오적이고 극단적인 발언과 여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미국 뉴요의 연구 중심 종합대학인 페이스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연구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anaticism, Racism, and Rage Online ; Corrupting the Digital Sphere"로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6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현재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보이는 유대인과 흑인을 향한 극심한 인종 혐오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내수 부진과 그에 따른 경기 하락,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미국 이민 정책의 사실상 실패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 시민들의 대다수가 정치적 변별력을 포함한, 건전한 민주주의적 여론 형성을 위한 역량 구축에 실패한 점도 미국 내부의 극단주의를 더욱 부채질 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헐리우드 발 영화에서 희화화 된 인종 혐오 단체로 자주 언급되는'KKK단'은 현실 세계에서 직접 그 유산을 계승했다는 돈 블랙에 의해 오늘날 새롭게 변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히 제2의 부활을 알립니다. 블랙은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600만 이상의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절멸시킨 사건 즉, 홀로코스트를 "유대인들의 음모"로 몰아갔습니다. 지금도 구글에서 홀로코스트 음모라고 치면 여러 자료들이 검색됩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많은 시민들이 이런 유대인들의 음모에 속고 있다고 강하게 질타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터무니 없는 맥락의 발언들을 과연 한 막의 코미디 정도로 취급해야 하는지는 작금의 인터넷 여론이 매우 심상치 않은 점을 먼저 고려해야 될 것 같습니다.


소위 페이스 북과 같은 근래의 'SNS 혁명'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좀 더 여론 친화적이고, 시민들을 위한 공개된 발언의 기회가 크게 확장될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던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면밀한 인터넷 커뮤니티와 시민들 간의 온라인 연결성을 배후로 오히려 과거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 내부의 '병리적 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소설과 영화 등으로 잘 알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세계 지배 전략'과 같은 입에 담기에도 저열한 음모론들이 이제 온라인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사실상 '유대인들의 세계 금융 지배 전략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 통제"라는 삼류 소설과 같은 것으로 현재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평범한 미국 청년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적인 수법들은 이 글에서 애덤 클라인 교수의 논증을 통해, 여러 방향성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흑인들은 백인보다 덜 진화되었다'라든지,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에 기독교 어린이들의 피를 사용한다'는 식의 모략을 이용하는 등 전근대적인 행태들이 여전히 미국의 보통 가정에 침잠하고 현실은 참으로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은 정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큰 형이면서, 헌법이 보장하는 '총기 소유의 자유'는 조장된 혐오 발언의 부추김이 시민들에게 어떤 식으로 악영향을 끼치게 될지 예견이 되는데요. 이것은 결국 저자의 언급대로 극단주의와 인종혐오에 포획된 일반 시민들이 미국 사회에 가하는 참혹한 폭력이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향하기에 이릅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2장의 '시온 장로 의정서'에 대한 역사적 근원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이 완벽한 '가짜'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해악을 유대인의 그것과 연결시켜, 마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유대인이 전세계에 퍼트리고자 한 '거대한 음모'로도 읽히는 부분은 이러한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 연원에 기인하고 있는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데요. 사실 제가 이러한 내용을 키보드 자판으로 기록하고 있는 지금도 이 거짓된 논답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가진 대학의 훌륭한 저변을 통해, 질 높은 교육을 받은 미국 청년들이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성을 잃고 동조하는 몇몇의 사례들은 더욱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인터넷에 접속한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노출과 미러링을 시도하는 세련된 웹 페이지 구축은 물론 유사 과학이나 다름 없는 거짓된 논변을 좀 더 고급스럽게 포장하여, 소위 '대안적 사실'과 같은 기법 등으로 극단주의자들이 끝내 고안했다는 실정은 여기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거짓 선동과 극히 차별적인 인종주의, 미국 내부의 만연된 반이민 정서로 나날이 세력을 얻은 '대안 우파'와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한 데요. 특히 이 글의 5장에 수록된, "평균 웹 트래픽에 따른 혐오 웹사이트 검토"라는 하나의 증명된 도표는 미국 온라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혐오 커뮤니티들의 월간 방문자와 링크하는 웹 사이트 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검색 기업의 사실상 '의무와 윤리의 실종'이라는 측면과 오로지 기업의 이익 만을 추구하는 비윤리적 기업의 행태를 반증하는 사례로도 읽히는데요. 즉, 단순히 인터넷 검색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블로그와 SNS으로 상호 연결되는 상황까지 이르러 그것의 폐해가 가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09년 6월 10일 제임스 본 브런 James von Brunn은 "홀로코스트는 거짓말이다. 오바마는 유대인들이 만들었다. 오바마는 그의 유대인 주인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돈을 빼앗았다. 유대인들이 대중 미디어를 통제한다."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메모로 남기고, 박물관 경비원으로 6년 동안 일해온 39세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존스의 가슴에 곧바로 총을 발사했습니다. 이 아프리카 계 경비원은 바로 그 자리에서 숨졌고, 그 외 신원을 알 수 없는 1명은 중상을 입었으며, 총기 난사범 브런은 경비원들과 총격전 끝에,얼굴에 총을 맞고 중상을 입었습니다. 저자는 이 브런의 백그라운드를 면밀히 체크하고 그가 얼마나 혐오에 찬 수사법의 노예가 되었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일전에 네이딘 스트로슨은 이 혐오 발언이 미국 헌법에서 보장하는 '시민들의 생각과 발언의 자유'의 일종으로 현재 유럽 여러 국가에서 제정된 '혐오표현금지법'이 과연 이슬람 이민에 대한 증오와 인종주의 철폐에 있어 어떠한 효과적 대응이 되었는지 자신의 논저를 통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소위 시민들이 '대항 표현'을 통해, 저 왜곡된 극단주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이르렀는데요.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 '정치적 이성'과 나날이 소원해져 가는 현실은 광범위한 혐오 발언의 대상이 되는 무고한 LGBT, 유대인,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에게는 더 이상 '도덕적 건전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정치적 변별력을 마냥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애덤 클라인의 이 글은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 집단과 극우주의자들, 이민 반대와 일부 공화당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는 등의 일견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광범위한 혐오 운동까지 포함해 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상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터무니 없는 혐오 발언과 그것을 교묘히 구축하고 있는 수사적 기법들은 나날이 많은 시민들을 포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인간의 저열한 속성에 끊임없이 호소'하거나,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다른 이민자들에게 갈취당했다는 식으로 사회적 권리에 대한 왜곡된 수사까지 미국에 유입된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데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의 묵시록적인 어감으로까지 읽히게 되는 지난날 히틀러 치하의 독일 시민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벌였던 일상적인 증오 등을 논하면서, 이러한 파시즘적 기법들이 시민들의 내면에 파고들 때,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데요. 여기서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점은 이런 극단주의 세력들과 이를 지지하는 현상 자체는 이미 주류 정치 무대로 올라왔으며, 단순히 일부의 지나지 않거나 혹은 현상에 대한 과대 평가 같은 것은 분명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저자는 결론에서 이 21세기의 편협한 현상들이 과거 우리 인류에게 남은 어두운 잔재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들의 후예들이 그 이전보다 세련되고, 평범하고, 교활하다는 점 역시,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절망적인 파국은 보다 가까이에서 현실화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유사 과학에 빠진 인종 혐오주의자들과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을 단순히 정신병에 걸린 '병리적 인간 무리'로 취급할 수 없는 명확한 근거는 문명의 운명과 계몽의 유산을 뒤집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자의 비판적 분석은 바로 이들이 "정치와 소위 커뮤니티로 가장하여 이런 복잡한 분열들과 맞물리려고 하는데, 오직 진보의 궤도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다."는 폭로로 논증은 사실상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악은 여태까지 구축한 인류 문명의 붕괴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는 셰익스피어 식의 논법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



인터넷은 시민들이 비록 디지털 방식이지만 참여 민주주의에 직접 관여하여 변화를 가져오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공 영역 public sphere‘의 현대적 구현으로 종종 생각되었다.

혐오 발언의 새로운 목소리는 이제 아래 깔린 실제의 인종차별적 신념 체계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대중문화와 정치의 언어로 말해지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에 기독교 어린이들의 피를 사용한다고 수세기 동안 주장된 악명 높은 "피의 비방 blood libel"이 있다.

그것은 깔때기처럼 오늘날의 급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웹사이트로 검색자들을 집합적으로 이동시키는 검색엔진, 뉴스 아울렛, 정치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의 상호 연결 시스템이 지닌 합법화 요인이다.

이 맥락에서 이러한 콘텐츠들은 주의 깊게 선택되고 강도되며, 어떤 경우에는 오직 뚜렷한 인종차별주의적 관점만을 전달하기 위해 작성자가 이를 추리기도 한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를 혐오집단과 개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이게 만든 것은 아마도 청년 공동체가 모든 문화를 손쉽게 환영하기 때문일 것으로, 새로운 친구와 생각들 모두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거의 유보없이 "받아들여지고""좋아요"가 된다.

페이스북 경영진은 서비스 이용 약관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며 궁극적으로 홀로코스트 부인 단체들을 제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혐오발언을 둘러싼 풀뿌리 논쟁은 전국적으로 상당히 분열되어 있으며, 대체로 이것은 법적으로 정의되어 있든 아니든 실제의 혐오발언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이해 탓으로 여기는 게 타당하다.

나치 운동이나 현대의 어느 (혐오) 이데올로기에도 쉽게 영향받는 자들의 경우, 사회학습 이론은 그들이 문화적으로 편협의 메시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사실상 그들이 자기 자신의 유혹 과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폭력으로 분출되는 인터넷 편협의 어떤 단일 사례보다 훨씬 더 공통적인 것은 온라인 혐오발언의 확산이 오늘날 공공 담론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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