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 더 리퍼 밀리언셀러 클럽 115
조시 베이젤 지음, 장용준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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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의사의 고백, 나는 킬러였다.’는 부제를 단 <비트 더 리퍼>를 읽으면서 아니 모두 읽고나서도 혼란스럽습니다. ‘킬러와 의사’라는 이미지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범죄와 관련하여 살인을 저지른 경우는 많습니다만, 킬러가 그 힘들다는 의과대학 수업을 마치고 의사가 되었는데 여전히 누군가를 죽인다는 설정이 낯설기 때문일 것입니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에서 수정 제정한 제네바판 히포크라테스선서에는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하겠노라’라고 인간생명은 그 선과 악을 떠나 소중한 것임을 인식하고 지키겠다고 선서를 마치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인데 킬러로서 생활을 접으면서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 의업을 택할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조부의 직업이 좋아보였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캘리포니아대학 샌프란시스코분교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저자의 직업적 특성을 녹여 창작해낸 호러 스릴러물은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하기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약하면 소설은 뉴욕시 가톨릭병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피터 브라운이 어느 겨울 아침 출근길에 어설픈 킬러를 만나는데서 시작되는 현재형 스토리와 그 사이에 세로줄로 짜여 들어오는 킬러로서의 행적이 교차되는 구조입니다. 아무래도 과거 스토리를 먼저 이해해야 될 것 같습니다. 피터 브라운의 본명은 피에트로 브라우나, 고교시절 함께 지내던 조부모가 폭력배에 살해된 다음에 복수를 위하여 무술학교로 전학하고 마피아 가문의 장남 스킨플릭과 절친이 되는데 친구의 아버지는 그를 조부모를 살해한 자들에 대한 정보를 미끼로 전문 킬러로 조직에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킬러 피에트로는 마땅히 죽어야 할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일만 한다는 조건을 고수합니다. 조직의 보스는 아들의 상대를 제거하라 요청을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그리고 피에트로는 운명적으로 비올라를 연주하는 루마니아 태생의 막달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떠나려는 피에트로를 붙잡으려는 조직에서 마지막으로 맡긴 임무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살인혐으로 체포되는데 그 과정에서 검찰과 플리바게이닝을 하고 증인보호프로그램의 적용을 받아 의사로 변신하게 되는데, 어설픈 킬러를 제압하고 출근한 병원에서 조직원 로브루토를 만난 것이 사단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병원일을 처리하는 한편 로브루토를 제거할 궁리를 하는 동안 로브루토는 조직에 피에트로의 존재를 알리고 킬러들이 급파되어 사생을 건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적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다는 이점을 바탕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죽음을 피하는 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아마도 그래서 제목을 ‘사신을 물리치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비트 더 리퍼(Beat the Reaper)로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중으로 된 스토리가 반복해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읽는 호흡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의외로 빠르게 읽혀집니다. 다만 작가나 책을 번역하신 분이 꽤나 친절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목을 원본을 그냥 한글로 옮긴 것부터 시작해서 환자진료과정에서 등장하는 의학용어, 특히 줄임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엉덩이 사내의 바이탈 사인 챠트(25쪽)’은 활력징후표 정도로 옮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환자는 PCA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엉덩이와 쇄골하단 통증 OUO를 보이고 있습니다.(108쪽)” 같은 경우는 의학을 전공한 저도 모르는 줄임말이어서 번역하신 분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줄임말로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단어전체를 읊지 않아도 뜻을 통할 수 있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일반인들에게 보안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주를 통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상황도 적지 않은 것을 보아 이런 불친절에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비로운 마음도 듭니다. 이런 요소들은 전체 스토리를 읽어내는 흐름을 깨트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짚고 갈 부분은 오늘날 미국병원의 심각한 환경을 적나라하게 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근무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의료사고(조직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브라우나가 위험한 샘플이 담긴 주사기에 찔리는 장면 혹은 수술과정에서 집도의의 부주의로 비장을 잘라내게 되는 과정 등등입니다. 이는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하여 누적된 피로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이해는 합니다만, 막상 그런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환자입장에서 보면 소름끼칠 일입니다.

종합해보면 마피아조직의 킬러의 세계와 병원에서 늦깎이 인턴생활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호러물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피에트로 브라우나 역을 맡아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뉴욕에 있는 병원과 뉴저지의 농장을 무대로 한 섬찟한 살인현장이 거슬릴 것 같습니다만, 긴박감은 맥박을 최대한 끌어올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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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강유정 지음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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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언젠가 생각없이 펜을 들면 글이 줄줄 써진다는 싸가지 없는(?) 고백을 한 베스트셀러 작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타고난 글쟁이라고 자랑질하는 것 같아 밥맛이 싹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이 엄청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제 경우는 많이는 아니지만 읽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글쓰는 연습을 나름대로 해온 덕분에 이런 저런 글을 써내고 있는 처지입니다.

마음에 새긴 상처를 글로 달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이 만들어낸 상처인 경우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평론가 강유정씨가 그랬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에 베인 상처’라는 제목을 단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의 프롤로그를 강유정씨는 “사랑이 고통인 시절이 있었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고통을 달래셨을까요?’라는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때 영화가 위안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영화 속의 주인공들에서 나를 만났고, 그들이 자신을 닮은 듯해서 안타까웠고, 그런 그들을 위로하고 달래주려고 “그래서 글을 썼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강유정씨가 글을 쓰는 힘은 사랑에 베인 상처인 셈입니다. 씨는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에는 사랑을 모티브로 한 영화 서른여덟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다양한 사랑방정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나쁜 영화를 좋아하고, 나빠지고 싶은 여자. 모든 극한에는 어떤 삶의 경지가 있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독특한 관점 때문인지 그녀가 해부해서 갈라놓은 서른여덟 편의 사랑이야기를 읽는 동안 ‘불편하다’는 찜찜한 앙금이 마음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아마도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 중에서 로맨틱코미디물을 즐기는 저의 영화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백하건데 서른여덟편의 영화 가운데 제가 본 것은 세편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영화관에서 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그녀의 영화해부는 거침이 없습니다. 마치 변사체를 마주한 부검의사가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서 날카로운 메스를 거침없이 휘두르듯이 말입니다. “여자는 몸에 남은 기억을 증오한다. 하지만 또 영원히 그 기억을 사랑한다. 여자는 몸으로 배운 기억을 수치스러워한다. 하지만 수치스러운 만큼 강렬히 그 기억을 원한다. 몸은 원하고 또 원하지 않는다.” 요즈음 즐겨보고 있는 드라마 “최고의 사랑”의 여주인공처럼 나쁜 남자와 좋은 남자로부터 대시를 받으면서 고민하지만 결국은 나쁜남자 쪽으로 기우는 것도 여성의 마음은 참 독특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여자의 마음은 참 복잡해서 사랑은 남들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가는 모양입니다.

‘고장난 사랑기계’라는 소제목에서 소개하는 영화 <어톤먼트>에서 강유정씨는 “사랑하는 남자를 쓰다듬던 아름다운 손길이 더 이상 그를 소유할 수 없는 순간엔 죽음의 손길로 바뀌기도 한다.”고 설명하면서 그 죽음의 손길이 자신을 향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텐토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에서 남편을 살해한 나기 유키오에게 스즈토가 전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사랑했다면 아무리 싫어하고 아무리 미워해도 죽여서는 안됐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주길 바라야 했어요.” 그것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가 되겠지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메인 테마로 했던 영화 <사랑의 은하수>에서 다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좌절한 남자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도 자기파괴적인 사랑을 단죄(?)하고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은 영화평론가가 썼지만, 평론이 아닌 주인공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모아 전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마치 본 것처럼 주인공의 아픈 사랑을 오롯이 전해 받는 느낌입니다.

책읽기를 마치면서도 저자는 여전히 아픈 사랑이 마음에 새긴 상채기의 아픔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아픈 상처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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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50
피에르 쌍소 지음, 김주경 옮김 / 동문선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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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매사에 대응하는 것이 느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느려지고 있다는 의미는 식사하거나 걷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로부터 업무처리방식도 변해서 눈앞에 닥친 일을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나던 젊은 때와는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외국인들까지도 “빨리, 빨리”라는 한국말을 익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성격 급하고 바쁘게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도 슬로우 시티가 지정될 정도로 느리게 사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야 책꽂이 한 귀퉁이에 오랫동안 숨어있던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눈길이 가게 된 것은 아마도 일상이 느려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쌍소는 ‘느림’“내게는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진다.(10쪽)”고 고백하고 “나만의 리듬에 맞추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팔자가 내게 운명지어 준 리듬에 맞추어 조용히 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고 감히 그들에게 정중히 부탁하고 싶다.(17쪽)”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자들은 그들만의 에고이즘에 갇혀서, 느림보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고, 그들의 특기는 느림보들을 완전히 녹아웃시킨 뒤 문 밖으로 몰아내고 만다.(22쪽)”고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저 또한 삶을 바쁘게 살아낼 때는 타인을 배려하는 생각은 정말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요즘 세상에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살다보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지만 나름대로의 스타일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한국에서 오셔서 같은 동네에 사시는 분들이 자주 모여 세상사는 일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삶의 여유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모임에는 불러주시곤 해서 왕따까지는 아니라고 위안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모임에서 빠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던 분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쌍소는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권태, 꿈꾸기, 기다리기, 마음의 고향, 글쓰기, 포도주 등을 주제로 삼아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의 주제 가운데 가장 끌리는 부분은 ‘한가로이 거닐기’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41쪽)”라고 한가로이 거니는 것을 정의하고 있는 쌍소처럼 한가롭게 걷는 것은 생각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가끔씩 원고청탁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제가 정해지는 경우는 글 전체의 윤곽을 잡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주제의 범위가 커지면 글머리를 잡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게 됩니다. 그럴 때면 양재천 산책에 나서서 평소보다 느리게 걸으면서 써야 할 글에 담아야 할 내용을 다듬어나갑니다. 하지만 저는 쌍소처럼 소설의 주인공과 함께 산책을 하는 능력까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쌍소의 독특한 시각에도 마음이 끌립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기다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죽음 이외에 무엇을 기다릴 수 있을까? (…) 깊이 살펴본 죽음이 결코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남은 생에 대한 유일한 행복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면 (…) 죽음 앞에 선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신의 은총뿐이다. 이유도 없이 우리 안에 확신으로 자리잡아 온 그 소망만이 우리를 죽음이 가져온 두려움과 낙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88쪽)” 하지만 이러한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스스로 구하려는 노력을 쏟은 사람에게 분명 기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공통된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 죽음마저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포도주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정말 배워야 하겠습니다. “포도주는 때로 우리의 모든 기능을 약하게 만드는 효과도 지니고 있다. 취기가 살짝 돌면 우선 흥분을 일으키게 되고, 그 다음엔 점점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진짜 술꾼은 순식간에 벌컥벌컥 마시는 법이 없다. 조금씩 그 멍한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만일 너무 급하게 마시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기능이 점차 마비 상태로 빠져드는 감각을 좀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120쪽)” 천천히 우리의 신체가 술에 의해서 지배되는 과정을 느낄 수 있는 경지, 누군가 이야기한 주신(酒神)의 경지가 이런 경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제가 즐기는 단숨에 술잔비우는 버릇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주신(酒神)께서 제게 할당한 양의 술을 이미 초과해서 마셔왔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이젠 술을 더 이상 마시면 주신(酒神)에 대한 반역이라는 생각이 들어 술을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쌍소는 느린 삶의 중요한 요소를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라는 큰 제목 아래 작은 제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라는 제목에서는 느린 삶의 문화 사회학적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두 개의 큰 주제 사이에 ‘리듬의 교체’라는 막간의 시간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 극단에서 무대를 정리하기 위한 막간시간을 지루해할 수도 있는 관객들의 관심을 잡아두기 위한 막간극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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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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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은 예스24 블로그 이웃이신 슬로우 리더/라이터님의 이벤트를 통해서 받게 된 책입니다. 몇 가지 책들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지만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에 끌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철학적으로 완성한 그는 진정한 구원자>라는 리뷰 제목을 달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와 공감하고 싶어 하셨을 것 같던 슬로우 리더/라이터님의 뜻이 담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군가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고인에 대하여 “그 분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 분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누구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그 사람이 당신의 설명을 듣고 독특한 자세를 취하면서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말을 전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습니까? 혹시 맛이 살짝 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다음 국어사전에 따르면 애도(哀悼)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기 마련입니다. 한편 자신과 직접 인연은 없었지만 주위 사람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다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위로의 이야기를 건네기 마련입니다. 명복(冥福)이란 말 그대로 ‘죽은 이가 사후에 받게 될 복덕’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와서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애도한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애도하는 사람” 사카쓰키 시즈토는 텐도 아라타가 세상에 내놓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시시껄렁한 삼류잡지 기자인 마키노 고타로와 시즈토의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 그리고 남편을 살해한 여인 나키 유키요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세 사람을 통해서 평범한 회사원이던 시즈토가 죽은 이를 찾아 애도하는 구도의 여행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면 시점에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혹은 가까이 있던 사람이 어느날 곁에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는 일일지 모릅니다. 제 경우는 중학교 2학년 때 할머니께서 간암으로 고등학교 때는 동급생이 사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증조할머님께서 치매로, 대학에 들어가서는 외할머니께서 중풍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통사고의 현장을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렸을 적에 만난 죽음이 특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즈토 역시 어렸을 적에 근친의 죽음을 만나게 되고 창밖에 서있는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었던 직박구리 새끼의 죽음을 만나면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특히 직박구리 새끼의 죽음을 마음에 담겠다는 뜻을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그의 애도의식의 전형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른손을 둥지가 있는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새끼가 떨어졌던 땅을 향한 다음,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져와 심장으로 밀어 넣듯 포개는... “여기에 넣어둘 거야 … 잊지 않도록, 이 아이, 여기에, 넣어둘 거야.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걸 … 내 안에 넣어둘 거야.(124쪽)”

영화 ‘금지된 장난’이나 ‘여행자’를 통해서 섬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아이들이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근친의 죽음은 아이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이기 때문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다만 시간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절절하게 설명하여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고인을 잊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고인의 생각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즈토에게도 어렸을 적에 만났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성년이 되어 병원 소아과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어린환자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친한 친구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에 담아두려는 개인적인 노력이 확대되어 구도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서 누군가가 와서 고인에 대하여 질문할 적에 어떤 기분이 드실 것 같으냐는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시즈토 역시 종교단체의 포교활동,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 등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순수함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애도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고인에 대한 그의 애도를 특별하게 부탁하는 가족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시즈토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텐토 아라타는 세상사람들이 애도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마키노 고타로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 얻은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태어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이 ‘애도하는 사람’이 된데는 가족과 환경, 인생의 상처 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당신도 분명 모른다. 그렇게 보였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432쪽)”

텐토 아라타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나기 유키요에게 살해당한 남편 사쿠야의 설명으로 완결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애도하고 있어요 … 죽는 순간, 그저 숫자가, 유령이 되어버리고 … 가까운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는지 잊어버리는데 … 이 남자는 죽은 자가 지나온 삶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습니다. 그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소박하게나마 기리고 있습니다.(566쪽)” 그리고 보면 우리네 장삼이사도 세상에서 기억되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저 소박하게 가까운 사람들만이 기억해주어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텐토 아라타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배려도 피해자를 세 번 애도하면 가해자 역시 애도할 수 있다는 시즈토의 애도철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일 것 같기도 합니다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남편 사쿠야를 살해하게 되는 나기 유키요에게도 자신이 진정 사쿠야를 사랑했다면 아무리 그가 강압적으로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죽여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했다면 아무리 싫어하고 아무리 미워해도 죽여서는 안됐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주길 바라야 했어요.(587쪽)”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시즈토의 애도철학을 설명하는 세 사람의 화자 가운데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는 말기 위암을 앓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혼전임신한 딸이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그리고 아들 시즈토가 돌아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으면 하는 희망으로 생명의 끈을 놓치 않고 버텨나가는 그녀의 죽음을 만나는 방식은 분명 참조할만합니다. 대체적으로 죽음을 맞기 몇 개월 동안 생애동안 쓰는 의료비의 상당부분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으면서 죽음을 맞지 않고 가정에서 재택치료를 받으면서 가족들과 같이 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늘려가는 그녀의 방식은 독특합니다. 특히 죽음을 맞는 순간 불필요한 생명유지를 위한 처치를 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담은 사전유언(Living will)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하는 등의 죽음맞이는 분명 우리가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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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완성 -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 보고서’ 그 두 번째 이야기
조지 베일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흐름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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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비율이 과거에 비하여 훨씬 적어졌다고들 합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중산층이 엷어진 탓도 있겠지만, 옛날 같으면 자신을 비교할 대상을 주변에서 찾던 것과는 달리 대중매체를 통하여 과장되게 전달되고 있는 상류층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은 행복한가에 대한 답변은 눈높이를 어디에 두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의 완성>은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의 거의 생애에 걸친 행복에 대한 탐구생활의 완성판이라 할만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 실험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1937년 시작되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진행하고 있는 성인발달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성인의 발달과 성장에 관한 전향적 종단연구가 벌써 74년에 달하고 있고, 베일런트박사는 지금까지 43년 동안이나 이끌어오고 있어 어느 정도는 마무리단계에 들어가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성인발달연구는 1937년에 시작하였는데, 행복하고 건강한 삶이 어떤 법칙에 의하여 결정되는가를 조사하기 위하여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2학년생 268명의 삶을 지속적으로 추적하여 왔는데, 최근 들어 50대 이전에 행복의 조건 7가지를 얼마나 갖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 내용을 <행복의 조건>에 담았다고 합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인데 처음 하버드대학생을 대상으로 시작하였다가 일반인 남성 456명과 천재여성 90명을 추가로 연구대상으로 포함시켜 총 814명의 삶을 꾸준히 쫓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를 회상하여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바로바로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행복의 조건은 1. 자기 방어 기제, 2. 교육, 3. 금연, 4. 금주 또는 적정소량의 음주생활, 5. 안정적인 가정생활, 6. 규칙적인 운동과 레포츠활동 마지막으로 7. 적정한 체중 등이라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방어기제인데,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항상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사업실패와 같은 삶의 심각한 위기가 닥쳤을 때 스스로 이를 극복하려는 심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행복의 완성>에서 베일런트교수는 행복을 완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이 책의 제1부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제목 아래 모아둔 사랑, 희망, 기쁨, 용서, 연민, 믿음의 여섯 가지 감정입니다. 이들 요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긍정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뇌졸중을 앓았던 하버드대학의 질 봍트 테일러 교수의 <긍정의 뇌; http://blog.yes24.com/document/2962895,http://blog.joinsmsn.com/yang412/12000747>를 보더라도 하버드대학의 분위기는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베일런트교수가 글을 통하여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긍정의 힘은 이 책을 추천하신 문용린박사의 추천사에서 읽혀집니다. “책 전체를 일관하는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 도전적이고 희망적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음침하고 어둡고 이기적으로 가정해온 기성의 이론들에 도전장을 내민다. 죄의식, 이기심, 공격, 욕망, 경쟁, 분노, 폭력성 등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려 한 마르크시즘, 정신분석학, 사회생물학에 반기를 든다.(9쪽)” 문교수님의 추천사때문인지 역자후기에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발언에 대하여 종교를 비판하려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대중이 삶의 고통을 아편으로 달래는 현실을 가감없이 묘사하는 은유였다는 해석을 인용한 것이 조금 옹색해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행복을 이끄는 중요한 인자를 설명한 1부에 이어 제2부에서는 ‘인간의 감정은 진화하면서 완성된다’는 제목으로 긍정적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이어서 이성과 감정, 그리고 감정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대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작 <행복의 조건>에서 제시하였던 인간의 영성에 대하여 진일보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역자의 요약에 따르면 영성-여기에서 말하는 영성은 종교와는 다르다는 것이 베일런트교수의 주장입니다-이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주고 우리가 ‘신을 어떻게 이해하든 우리를 신에 대한 경험과 결부시키며, 나보다 우리에 주목하게 하는 긍정적 감정들의 혼합체이다. 이 영성의 기초를 이루는 긍정적 감정들, 즉 사랑, 희망, 기쁨, 용서, 연민, 믿음, 경외, 감사는 하나의 생물종인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그래서 인간의 뇌에 고정 배선되어 있다. 긍정적 감정의 생존가치는 치유와 공동체의식이라는 두 개의 가치로 압축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일생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성장해왔다는 것인데 이를 진화라는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은 신체적인 조건만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역시 꾸준하게 진화해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체에 상하를 정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 생각합니다만,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가지는 본능적 욕구와는 달리 인간은 이타적 사고를 비롯하여 신체적 취약점을 보완하는 공동체적 사고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정신이 진화해왔다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지구와 인간의 미래에 대하여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우려합니다. 긍정적 사고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베일런트교수의 긍정의 힘이 인류의 미래에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족일 것 같습니다만, 한 가지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베일런트교수는 인류의 문화적 진화사례를 인용하는 가운데 “그리고 560년 전에 유럽인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했다.”라고 인용한 점은 분명 인류최초의 금속활자는 고려시대에 직지심결요체를 찍은 금속활자로 구텐베르크보다 138년이나 앞섰다는 점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탓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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