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프레이야 > 오래된 정원
영화에서 '오래된 정원'은 두 사람이 숨어살았던 산골의 집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제목이 영화에 그리 접목되지 않는 느낌이다. 소설에서의 대목을 찾아보았다.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 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주인공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남긴 일기장에 적혀 있는 글이란다.(영화에선 이렇게 나오지 않지만)
2000년 황석영 작의 '오래된 정원'은 읽어보지 못했다. 지금 주문을 해 놓고 앉았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어딘지 께름칙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원작과 비교 아닌 비교를 해 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가의 눈과 영화감독의 눈이 같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확인하고 싶다. 80년대에 대한 진혼곡 쯤으로 썼다는 원작과 영화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임상수가 바라보는 눈이라 해도 그 시대를 진정 뜨겁고 아프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줄 수도 있는 영화인 것 같아 보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그런 삶을 살지 못한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영화였다. 영화 속 오현우도 부끄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면서도 현우가 실제로 현장에 몸 담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운동권이니 사회주의니 유물론자니 하는 단어들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길바닥에 버려져 흙이 묻은 막대사탕을 보는 것 같았다. 운동권 후배들이 나누는 토론과 결의의 대사들을 '지리하게 늘어놓는 문어체'로 일축하는 윤희의 시니컬한 대사도 그렇다.
영화는 16년 8개월만에 보호감찰로 풀려나는 오현우가 돌아온, 지금은 부를 얻은 집에서 어머니가 싸서 넣어준 상추쌈을 한 입 가득 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회상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초반부에서는 현재와 과거가 빠르게 교차하며 과거에 몰입하는 것도 막고 현재에 머물기도 막는 것 같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담담하게 과거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는 현우. 그런데 중반 이후로 갈수록 현우라는 인물이 생명력을 잃고, 제대로 살아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원작과는 별도로, 영화 속에서 '하나의 인물'로 살아나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한윤희의 사진이 끼워져있던 책장의 글귀다. "시를 쓸 수 없었던 시대", 사진을 들어내니 드러나는 글귀, "서정시를 쓸 수 없었던 시대". 80년대를 산 사람 중 이런 이유로 비난 받고 시 쓰기를 포기한 사람도 가까이에 있어, 연민의 여운이 길었다. 이 글귀부터 초반부에서 내가 느낀 감독의 의도에 대한 의혹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감독이 의도한 게 '그들'에 대한, 아니 그날 이후의 그들 삶에 대한 조소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에 의해 그들을 안아들이고 싶은 건 아닌지 싶어 조금 여유있게 보기 시작한다. 한윤희라는 인물, 그녀가 내뱉는 말과 행동, 그들만의 보금자리, 갈뫼에서의 시간을 통해. 특히 현우가 싼 김밥과 담근 술을 들고 높은 산에 올라 아주 오래된,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앉은 이들의 뒷모습을 통해서. 휴식과도 같은 시간을 주는 아주 크고 높은 느티나무 한 그루의 인상이 깊다.
시위 장면이 현장감 있어 놀랐는데 당시의 필름이 아니라 실제로 연출하여 촬영했다고 해서 좀더 놀랐다. 화염병에 맞아 불 붙은 전경의 모습은 나중에 법대생 여자근로자의 분신투신장면과 대조된다.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대고 부들부들 떨며 뜨겁다고 말하는 참혹한 얼굴을 비추다가 영화는 싸늘히 감정을 식히며 돌아선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말하는 윤희, 관객은 자꾸 부끄러워진다.
반효정, 윤여정, 박혜숙 등 조연들의 연기가 지진희보다 좋았다. 염정아는 마지막에 삭발을 하고 나온다. 분장이라 해도 두상이 아주 예쁘다. 그녀는 병색 짙은 얼굴을 캔버스에 담았다. 갈뫼의 그 집에서 오래도록 죽을 때까지. 끝장면에서는, 단 하나의 사랑을 옆에 두고 뒤로는 아버지, 딸 은결, 그리고 어머니... 모두 한 가족을 이룬 그림이 오래 비춰지면서 나윤선이 부르는 '사노라면'을 들을 수 있다. 청아해서 더욱 구슬프게 들리는 나윤선 식 '사노라면'이다.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끝까지 듣고 일어났다. 흘러흘러가는 것들, 그 속에 미래가 있다고 믿고 싶다.
옥에 티라면, 오현우가 출소한 시점이 1998년 쯤일텐데 딸 은결이 입고 나온 옷이나 말투가 너무 2006년 식이다. 특히 피식 웃음이 나온 은결의 대사 "완전 멋있네요." 그리고 고등학생 나이일텐데 화장이 진하고 머리스타일도 파격이다. 엄마처럼 씩씩하고 당차게 삶을 사는, 개성있는 인물로 그리는 건지. '외톨이, 외곬수, 고집쟁이...' 라는 말을 서로 나누고 인정하고 나쁘지 않다고 결론 내고, 지나칠 정도로 쿨하게, 처음 만나 다시 헤어지는 이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린다. 무수한 사람들 틈에서 이들 주위를 맴돌던 윤희의 환영이 뒤돌아본다. 그런데 스치듯 그녀를 본 현우의 마지막 대사에서 확 깨는 느낌이다. '이제 헛 게 다 보이네.'인데 그 어조가 너무 가볍게 농담조다. 임상수 식인가. 차라리 아무 말 없었다면...
2007년 내가 본 세번째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