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에 대한 강력한 비판 내지는 비난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수민족 문제 중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문제고 다른 하나는 티베트 자치구 문제다. 티베트 문제는 서구에서 가장 많이 내세우는 달라이 라마와 이를 지지하는 서구 세력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공론화 됐다. 이들이 항상 얘기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항상 다음과 같다. 티베트는 평화로웠지만,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이 점령했고, 수많은 티베트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나 또한 티베트 문제에 대해 단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서방의 악선전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오늘은 서구가 외면하는 티베트 근현대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티베트 민족의 등장은 기원전 1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냐트리첸포가 40세대에 걸친 왕정의 시조가 됐고, 거의 1000년 후에 중국과 티베트의 전쟁이 8세기 트르디축텐(36대 왕) 통치 기간에 일어나, 티베트가 중국의 여러 지방을 점령하기도 했다. 참고로 티베트의 승리를 기념하는 돌기둥이 20세기 말까지 포탈라 궁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티베트는 네팔이나 인도에 비해 불교가 상대적으로 늦게 전파됐다. 몽골 군대가 티베트에 도달했을 때, 몽골인들은 티베트의 라마교를 종교로 채택했고, 이에 따라 원 왕조와 만주족의 청 왕조 동안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공식 종교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 모든 티베트인의 10% 가량이 남려 승려였다고 한다. 사회체제는 봉건적이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에 따르면, 티베트는 종교적 중심지로서 자치와 평화를 누렸지만, 1896년 청나라 군대가 침공했다. 처음에는 티베트가 이를 격퇴했으나, 1903년 중국 장군 도살자 팽과 그의 군대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을 도륙하면서 티베트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잔혹함의 문제가 청나라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17세기 초에서 18세기까지 티베트 불교 종파들은 서로 무력충돌을 벌였고, 즉결처형도 빈번히 일어났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인도로 도망쳤던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신해혁명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티베트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와 불교도들이 통치하는 봉건사회였다. 적어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말이다. 티베트가 해방되기 10년 전인 1939년 전국에 약 6,000개의 수도원이 있었고, 소년 4명 중 1명이 승려였다는 얘기도 있다. 달라이 라마가 마지막으로 티베트를 통치했던 1959년까지 대부분의 티베트 농경지는 여전히 농노들이 관리했으며, 승려와 라마 개개인이 무역과 사업 그리고 사채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회였다.

 

그 중 드래풍(Drepung)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토지 소유주의 하나로 무려 185개의 영지와 25천명의 농노, 300개의 거대한 목장과 16천명의 목동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찰의 재산은 대부분 상위 계급의 라마승에게 귀속 되었으며 이들 대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세속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티베트 군사령관은 4천 평방 킬로미터의 땅과 35백 명의 농노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달라이 라마 내각의 회원이었다.

 

티베트에는 규모는 작았으나 정규 군대가 있었다. 이 군대는 일종의 헌병대로 지주를 위한 질서유지와 도망간 농노를 붙잡는 일을 하였다. 티베트의 어린 소년들은 대게 부모로부터 떨어져 사원에서 승려로 양성됐다. 그 시기 승려 타시 세링은 소작농의 자녀가 사원에서 성폭행 당하는 일은 흔했으며 자신도 9세부터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해왔다고 말했을 정도다. 또한, 사원은 빈곤에 시달리는 농부의 아이들을 징집하여 일생 동안 집안의 노예나 춤꾼, 사병으로 일하게 했다.

 

달라이 라마 통치 시기의 티베트에서는 도망친 농노와 절도행위자에 눈알 파내기, 혀 뽑기, 근육, 수족 절단 등의 고문과 사지절단 등의 처벌이 성행했다. 1959년 안나 루이스 스트롱(Anna Louise Strong)은 티베트 권력자들이 사용한 고문기구 전시회에 가본 적이 있었다. 이곳에는 모든 사이즈의 수갑이 있었는데, 아동용도 있었다. 코와 귀를 자르는 기구, 눈을 파내는 기구, 손목을 자르는 기구를 비롯해 무릎, 종아리, 다리 분쇄기, 불도장 집게, 채찍, 심지어 내장을 파내는 특수 기구도 있었다. 이러한 기구들만 보더라도 티베트 봉건 계급의 통치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던 티베트의 상황은 급반전됐다. 1949년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말이다. 중국 공산당이 처음부터 티베트에 군대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95110월까지는 그러했다. 티베트의 지배계급들은 혁명이 성공한 중국에서 지주의 재산이 몰수되고, 빈농들에게 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지배층들은 이를 막기 위해 농노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자행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서 이들에게 탄압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은 1959년 이후로 노예제와 무급 농노제를 철폐했으며, 과거 티베트 지배계급이 일삼던 채찍질, 사지 절단 등의 극단적인 처벌도 없앴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온갖 고문 및 가혹행위들이 금지됐다. 중국 공산당은 살인적인 세금제도를 없앴고, 직업 장려정책을 실시했으며, 이 영향으로 실업률과 노숙자가 크게 감소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대중 교육을 실시하여 사찰의 교육 독점을 없앴으며, 라싸 지역에 하수도와 전기시설을 만들었다.

 

당연히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나치 친위대 출신이자 티베트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펴냈으며, 영화화되기도 했던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썼다.

 

중국에 반항했던 티베트인들은 귀족, 유사 귀족 그리고 라마승들이었으며. 이들 귀족과 라마승들은 도로나 다리에서 노동하는 최하층 임무를 맡게 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들은 관광객 도착 전에 도시 청소를 하게 되어 더욱 모멸감을 느꼈다.”

 

중국 공산당은 1961년에 이르러 지주와 라마승들이 소유한 재산을 압수하고 농민들을 수백 개 자치구역으로 재배속했다. 중국은 수십만 에크르에 달하는 토지를 소작인들과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귀족 소유의 가축도 가난한 목동들의 집산농장으로 보내졌다. 가축사육이 개선되었고 새롭고 다양한 야채와 새로운 품종의 밀과 보리가 도입되었다. 배수시설도 좋아졌다. 이 모든 개선을 통해 자연히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해 일각에서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인들을 무차별 탄압하고 학살했으며, 그 숫자가 120만 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00~120만 명이 죽었다는 출처는 어디일까? 아래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달라이 라마의 막내 동생이자 측근이었던 텐진 체걀중국점령으로 인해 12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대대적인 탄압 6년 전인 1953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티베트의 인구는 1274천 명이었다. 다른 인구 조사에서도 티베트의 인구는 약 2백 만 명 정도였다. 만약 중국이 1960년 초에 120만 명의 티베트인을 죽였다면 도시 전체와 대부분 시골지역의 거의 모든 티베트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어야하고, 티베트 땅은 집단 처형장과 공동묘지가 널려 있는 도살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티베트를 공격한 중국 군대는 매우 소규모였으며,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처형만 한다더라도 부족한 숫자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인 1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 이후 티베트에 대한 통제를 좀 더 유연하게 했고, 피해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1980년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율과 자치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개혁을 실시하였다. 현재 티베트인들은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잔여 수확물을 팔수도 있고, 곡식 재배와 들소와 양의 사육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허용되었고 국경 통제가 완화되어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에 망명한 친척을 만나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냉전 시기 미국의 세계전략은 중국을 포위하여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만을 희생시켰다. 미국의 전선은 단순히 한반도와 베트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에도 있었다. 1950년대 중반 CIA는 수십 명의 반중국 티베트 투사를 무기와 통신 훈련을 위해 태평양의 사이판 섬으로 보내, 그들이 다시 티베트로 침투하도록 도왔다. 이는 미국이 동유럽과 소련에서 했던 행위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협력자인 스테판 반데라의 극우주의 무장 단체가 냉전 시기 소련에 침투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봉건 지배계급들은 타국으로 망명했다. 미국 CIA는 달라이 라마의 비행자금을 지원했다. 1998년 미 국무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1960년대를 통틀어 CIA가 티베트 망명 단체에 비밀리에 지원한 액수는 년 170만 달러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자 달라이 라마의 조직은 자체적으로 성명을 내고 자신들이 1960년대에 미국 CIA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지원받아 중국의 모택동 혁명을 음해하기 위한 망명자 무장부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CIA의 지원을 받았던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 세력은 10년간 중국 공산당에 맞서 저항을 하다가 1만 명이 죽었다. 달라이 라마가 CIA에서 받던 연봉은 186,000달러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티베트 분리주의 운동이 미국에 의해 지원을 받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리하자면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에 들어가 한 일은 억압받던 대다수 티베트인들에게 해방을 의미했다. 반면에 미국이 한 일은 민중들을 억압하고 고문하던 봉건세력을 지원한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의 티베트 민중을 해방했으며, 악랄한 반혁명 세력에 맞서 투쟁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서구 제국주의가 티베트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왜곡하고 있는 역사다. 중국 공산당은 분명히 티베트를 해방했으며, 그런 성격은 앞서 언급한 중국 공산당의 티베트 정책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티베트 봉건세력과 미국의 사기극에 속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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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5-11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티베트 봉건세력의 통치가 얼마나 잔인했는지에 대해 기레기들은 침묵하고 있으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의 폭력적인 티베트 탄압‘만 기억하고 ‘티베트 봉건세력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지요.
그래서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관점의 글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언론들이 ‘중국의 폭력적인 티베트 탄압‘에 대해서는 그렇게 목청높여 보도하면서도, 중국 편입 전 티베트를 지배한 봉건세력의 잔혹한 통치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은 ‘보수‘라는 가면을 쓴 친일숭미 뉴라이트매체 조선-중앙-동아일보나 자칭 ‘진보‘라는 경향-한겨레신문, 지상파/종편TV, YTN과 MBN 등 보도채널들 모두가 그런 보도태도를 보이고 있지요.)
 

파시즘의 창조자 무솔리니를 읽으며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Axis Power)에 대해 수업시간에 들어봤을 것이다. 1940년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유럽ㆍ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 전투가 전개됐고, 이 추축국에 맞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소련이 연합국을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추축국은 세계대전을 일으켰지만, 패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보통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 기원을 중일전쟁이나 스페인 내전에서 찾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서술은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이 단기간에 희생됐다. 무엇보다 히틀러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는 많은 이들에게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로 기록됐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따라서 파시즘에 대한 인식은 보통 나치와 히틀러와 등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파시즘의 창시자는 나치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다. 그는 비록 파시즘의 창시자였고, 히틀러의 선배라 한때 떠들었지만, 정작 그의 후배에 비해 전쟁에선 정말 어리석은 짓만 골라했다.

오죽하면 수많은 밀리터리 덕후들이나 역사덕후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을 밈(Meme)화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군이 전쟁에서 졸전만 거듭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940년 6월 독일이 서부로 진격을 가하여 프랑스를 점령할 당시, 이탈리아군 또한 남부 프랑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6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고작 13개 마을만 함락했다. 반면 프랑스군의 인명 손실은 37명이었다. 이와같은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이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제작한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서도 다음과 같이 묘사됐다.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

이게 바로 이탈리아군의 현실이었다. 심지어 무솔리니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친파시즘 국가인 그리스까지 침공했었다. 그러나 역으로 그리스군에 의해 격퇴당했으며,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구원부대를 보내어 점령을 마쳤다. 이런대도 무솔리니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20~30만 명의 지원군을 독일을 위해 보내줬다. 이는 무솔리니가 정말 이탈리아 군대의 현실에 대해 매우 무감각했음을 보여준다.

이번에 무솔리니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무솔리니가 한때 사회주의 운동을 열정적으로한 사회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솔리니의 태도는 극단적 국수 민족주의자로 변모했고,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무솔리니는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극단적 반공주의와 이탈리아 민족주의가 핵심이었지만, 놀랍게도 반유대주의는 없었다. 오히려 무솔리니의 정책이 유대인을 우대하는 정책이었다는건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러나 반공주의자 답게 무솔리니는 진지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으며, 이들은 지하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중간에 안토니오 그람시처럼 옥사한 운동가도 제법 많았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근복적으로 억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동적이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무솔리니가 두체로써 집권하게 되는 과정이다. 무솔리니는 1922년 군사적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그의 군사 쿠데타는 너무나도 엉성했다. 이탈리아 국왕이 이를 진압하면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었음에도 무솔리니의 호전적 행위를 방관했다. 그 결과가 바로 21년간 그가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무솔리니의 권력 축출과정도 황당하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1943년부터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파시스트 세력 내부의 반대파와 국왕이 마음먹고 그의 권력을 빼앗았으며 그를 구금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가택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하기 위해 특공대를 보냈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 살로에 친독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물론 이때부터는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사실상 거의 없고, 독일군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진격해오는 연합군 병사를 상대했다. 사실 독일 입장에선 이러한 병력 투입 자체가 불필요한 병력 손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에는 당연히 무솔리니의 어리석은 행위들 때문이다.

이 책은 1990년 대현출판사에서 출간한 ‘인물로 읽는 세계사‘ 시리즈 중 하나다. 국내에 출간된 유일한 무솔리니 전기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작년에 당선된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다.

현 이탈리아 총리 멜로니는 10대 때부터 정치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던 멜로니는 20살이던 시절 한 프랑스측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를 위해 헌신한 영웅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영상을 봤다. 도데체 뭘 보고 그런 얘기를 했는지 궁금해서 무솔리니에 대해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무솔리니에 대해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도데체 현 이탈리아 총리는 뭘보고 무솔리니를 존경한건지하는 생각말이다. 아무리봐도 무솔리니는 참으로 무능력한 인물이다. 특히 전시 지도자로서는 정말 아무런 지도력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파시즘 이데올로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무솔리니가 이데올로기를 급 전향한 점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냥 기회주의자라는 생각 밖에 안든다. 무솔리니의 생애가 궁금하다면, 도서관에서 이 책을 대출해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이 두껍지도 않고, 사진들이 많이 들어갔으니, 읽는데 부담감 거의 없을 것이다.

다음 번에는 그의 생애를 한번 정리해보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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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26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무솔리니에 대한 1권의 전기도 있었군요!

NamGiKim 2023-12-26 10:07   좋아요 0 | URL
자서전이 있긴 한데, 전기는 이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1592 격전의 길을 걷다 - 7년의 전쟁, 다시 돌아보는 임진왜란사
안광획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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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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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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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책이 번역됐다고? 정말 놀랍네. 또 읽어야할 책이 이리 늡니다. 명저에겐 별이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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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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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이런 책은 꼭 사서 소장해야합니다. 다시한번 뉴스타파에게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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