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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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 두려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일은 인간의 본능이자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어렵다면 어떻게 될까. 진정한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사랑하는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것이다.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는 바로 그런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알렉시티미아감정 표현 불능증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자 화자 윤재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뜻밖의 사건을 목격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심박사, 윤교수, 곤이를 만나면서 삶의 큰 부침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다.

 



알렉시티미아1970년대에 처음 보고된 정서적 장애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편도체가 작았던 윤재는 웃지 않는 아이여서 놀라게 했고 자라는 내내 엄마를 애태운다. 어린아이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잘 웃는데 언제나 침착하고 겁이 없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윤재는 중학생쯤 되는 한 아이가 여러 명에게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근처의 구멍가게 아저씨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저씨는 믿지 않았다. 무서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아저씨의 아들이었다니.

 



그 얘기는 사람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더욱 문제가 심각해졌다. 바로 앞에서 넘어진 친구를 보고도 괜찮아?”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는 걱정이 되어 머릿속의 아몬드가 커지길 기대하며 열심히 아몬드를 먹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친구들은 윤재를 냉혈한’, ‘사이코’, ‘로봇등 온갖 별명으로 불렀다. 다급해진 엄마는 상황에 따른 감정 표현을 종이에 적어 학습하도록 했다.



차가 가까이 온다. 몸을 피하거나, 가까워지면 뛴다.

사람이 다가온다. 부딪히지 않도록 한쪽으로 비켜선다.

상대방이 웃는다. 똑같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윤재에게는 어렵기만 했다. 이럴 때 이 감정인지 저 감정인지 감정의 이름조차 헷갈렸다.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암기로 가능할까. 엄마는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어서 7년 동안이나 연락을 끊고 살았던 친정엄마에게 SOS를 날렸고 셋이 살게 된다. 엄마의 끈질긴 노력 덕분인지 그럭저럭 학교에서 별문제 없이 지내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당연했던 본능적인 규범을 배우는 것이 윤재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세 식구가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듯했는데 윤재의 생일이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밖에 나갔다가 괴한에게 할머니를 잃고 엄마는 식물인간 상태가 된다. 엄마와 할머니의 빈자리를 느끼긴 했지만 여태 살아왔던 것처럼 슬픈 것도 몰랐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두 여자가 윤재의 세계에서 전부였는데 다른 사람이 하나씩 윤재 앞에 나타났다. 이때 심박사와 윤교수, 곤이를 차례차례로 만나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유일한 낙이 있었다면 엄마가 운영하던 헌책방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는 시간이었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 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애초에 달랐다.’(P54)

 



윤재가 책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여러 사람 손에서 막 자란 곤이는 거칠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하는 아이였다. 툭하면 윤재를 폭행하고 괴롭혔다. 그것은 윤재에게 통과의례였을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두 소년은 어느새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때리던 곤이에게 윤재는 어떻게 마음을 열게 되었을까. 본의 아니게 윤교수의 아들 노릇을 하게 된 빚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모두 다 나쁜 아이라고 했지만, 윤재는 곤을 착한 아이라고 했다. 감정 표현을 하는 걸 어려워했던 윤재가 곤이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간 것은 너무나 의아하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엄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듯이 서서히 윤재 안에 웅크리고 있던 단단한 어떤 것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손원평 작가는 첫아이를 낳고 그 아기를 보면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썼다 한다.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변함없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큰다 해도 변함없이? 그런 상상에서 윤재와 곤이의 캐릭터를 만들었단다.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교수님의 아들로 곱게 자랐을 텐데.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이 이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윤교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곤이를 보면서 인간이란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흔히 아이를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디 아이뿐이겠는가. 타인도 그렇고 나 자신도 그렇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은 따로따로다. 공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윤재는 못 느껴서 괴로운데 곤이는 두려움도 아픔도 죄책감도 전부 못 느꼈으면 좋겠다며 울었다. 할머니가 괴한의 칼에 맞아 쓰러지던 날도 아무도 나서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윤재도 그랬다. 우리도 그렇다. 멀리서 일어나는 일은 그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바라본다. 아몬드는 국내에서 1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아시아권 최초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 전 세계 30개국에 번역 출간되는 등 청소년, 부모, 성인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이야기를 담은 것 같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하듯이 누구나 내 안에 괴물이 있다. 감정 표현에 장애가 없는 멀쩡한 사람이면서도 우리는 이웃의 어려움을 방관하며 외면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몰입하며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대단한지. 해피 엔딩의 결말도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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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하이쿠
마쓰오 바쇼 외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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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이쿠 선집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하여 하이쿠의 대가인 마쓰오 바쇼와 이름만 들어도 설렐 만한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16명의 하이쿠 444구가 실려 있다. 하이쿠(俳句)5, 7, 5의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일본 고유의 정형시이다. 에도 시대에 하이카이(俳諧)라고 하는 연가(連歌) 형식이 유행하였는데 한 사람이 5, 7, 5음으로 첫 구를 지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7, 7음으로 구를 짓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가는 시가 형식이었다. 그때 첫 5, 7, 5음의 구를 홋쿠(発句)’라고 하는데 에도 시대 하이쿠의 성인으로 불리는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는 바로 이 홋쿠를 가리킨다고 한다.(역자 후기 참조)

 



하이쿠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자연계, 또한 그에 따른 인간계의 현상을 읊은 것이다.’-다카하마 교시(책 뒤표지)

 



이처럼 선집에 실려 있는 하이쿠도 사계절로 나뉘어 있다. 보통 하이쿠 선집에는 해설이 달려 있는데, 이 책에서는 해설을 싣지 않았다 한다. 독자 저마다의 방식과 느낌으로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번역은 원문에 맞춰 열일곱 자로 옮기려고 했지만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에 중점을 두었고 원문과 함께 음독을 병기 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본문의 작자명은 성씨를 빼고 표기하였다고 일러두기에서 언급한다. 많은 하이쿠 중에서 여운을 남겼던 몇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불을 덮고

편지를 쓰는구나

봄날의 감기

-시키(p18)

 


목련나무의

꽃으로만 가득한

하늘을 본다

-소세키(p22)

 


봄비로구나

몸을 바싹 붙이고

우산은 하나

-소세키(p23)

 


목련꽃과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동일시하여 묘사한 소세키의 하이쿠가 절묘하다.

봄비가 내리는 우산 속에 두 사람. 연인일까, 친구일까, 아이와 엄마일까.

아무튼,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에 젖지 않으려면 바싹 붙어서 갈 수밖에.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어 읽기를 권한다. 짧은 하이쿠에서 계절의 흐름과 리듬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짧은 하이쿠처럼 경제적이고 심플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여름

 


병이 나아서

내 손으로 장미를

꺾었다네

-시키(p51)

 



마사오카 시키는 메이지를 대표하는 문학자 중 하나로 근대 하이쿠를 정립했다 한다.

20대부터 악화된 결핵으로 7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서른넷에 세상을 떠났다. 한 송이 장미를 꺾는 일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건만,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 참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아프고 난 뒤 건강을 찾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많이 아파본 적 있는 이라면 모두 공감할 만한 하이쿠다.

 



양귀비꽃

그런 식으로 지니

버릇이 없네

-소세키(p56)

 



양귀비꽃이 어떤 모습으로 지는지 모르겠다.

소세키는 양귀비꽃을 아주 좋아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예쁘게 지는 꽃이 있을까. 피어있을 때는 아름다워도 떨어진 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버릇없이 진 양귀비꽃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재치있게 쓴 하이쿠에 미소가 지어진다.

 



짧은 밤이여

얕은 여울에 남은

한 조각의 달

-부손(p63)

 



때리지 마라

파리가 손 비비고

발도 비빈다

-잇사(p70)

 



한여름에 귀찮게 달라붙는 파리들. 쫓아도 쫓아도 계속 날아든다.

쫓다가 지쳤나. 왠지 측은지심이 발동했나 보다. 손과 발을 비비며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듯한 파리의 모습이 애처로운지 때리지 말라고 한다.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옛 문인들은 유머를 즐길 줄 알았다.

 



가을

 


뾰로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도라지꽃이네

-소세키(p98)

 



새하얗고 신비로운 보라색으로 활짝 핀 도라지꽃을 처음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뜨거운 어느 여름날 바람에 하늘거리던 도라지꽃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봉오리 맺은 도라지꽃을 입을 다문 듯 뾰로통하다고 표현한 소세키 님은 나를 더욱 감탄하게 했다.

 

가을의 비가

멎고 나면 눈물이

마르려나

-도요죠(p109)

 



가을밤이여

장지문의 구멍이

피리를 분다

-잇사(p115)

 



가을을 노래한 하이쿠도 재치가 느껴진다. 무슨 마음 아픈 일이 있었나. 가을비를 보면 더욱 눈물이 나는 걸까. 어서 빨리 가을비가 멈추면 좋겠다. 화자가 눈물을 멈출 수 있게.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시원한 바람에 안도하지만, 어느새 살갗에 소름이 돋는 서늘함이 찾아온다. 장지문 구멍으로 들어온 바람. 장지문도 피리를 부는구나. 이렇게 일상에서 계절이 바뀌고 변화하는 것을 시인은 놓치는 법이 없다. 하이쿠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며 한번 말을 걸어보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겨울

 


못 다 쓴 원고에

틀어박힌 겨울의

해가 짧구나

-소세키(p135)

 



글 쓰는 작가에게 있어 원고 마감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책상 앞에 마냥 앉아있다고 해서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닐 테니.

금세 해가 저무는 겨울의 짧은 하루가 못내 아쉽다.



오므려 붙인

추운 밤의 무릎이여

책상 아래

-히사죠(p159)

 



왠지 나도 쓸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쉬운 하이쿠다.

책상 앞에 앉아 곱은 손을 호호 불며 글을 쓰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사람 가고

두 사람 다가오는

모닥불인가

-만타로(p162)

 



추운 겨울의 모닥불. 한 사람 한 사람 모닥불 앞에 빙 둘러앉는다.

여럿이 모여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정겹다. 모닥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이웃들의

다정한 이야기도 솔솔 피어오르겠지.

 



이 선집에는 나쓰메 소세키와 시키의 하이쿠가 특히 많이 실려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대학 시절 친구인 마사오 시키에게 하이쿠를 배웠으며 2,600구의 하이쿠를 남겼다 한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보냈던 시키는 병든 자신의 상황을 묘사한 하이쿠가 많았다. 아픈 몸이지만 붓을 놓지 않았던 문학에 대한 열정에 뭉클해졌다. 초록이 무성해지는 요즘 공원을 걷다 보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살아가는 이끼는 이끼대로 연두색 새잎이 계속 자라나는 나뭇잎들은 나뭇잎대로 그 자체로 아름답다.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바쁜 일상이지만 자신을 위해 짧은 시간이라도 휴식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하이쿠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마음의 여유를 찾는 멋진 휴식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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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살고 죽고 -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 개정판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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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뜻이 있어 번역가들이 쓴 책을 읽어나가는 중이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막연한 꿈을 꾸게 된 건 2016년 여름이었고 벌써 몇 해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한 권의 책을 썼고 올해는 4개월 과정의 번역 수업 클래스를 졸업했다. 나이 들어도 정년이 없고 혼자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최적의 직업이라는 점 등 번역가의 장점에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부풀곤 했다. 그런데 번역가들이 쓴 책을 읽으면 상상한 것처럼 멋지기만 한 직업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살짝 두려운 마음 까지 생긴다. 일반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며 휴일도 없이 여행도 거의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삶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우선은 실력을 쌓는 게 먼저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벌써 빠져나가려는 핑계를 앞세우는 것 같다.

 



3년 전에 권남희 님의 에세이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도 정말 재미있다. 번역가 인생 20년을 돌아보며 정리하여 2011년에 출간한 것을 다시 엮은 책이다. 좀 더 상세한 작가의 삶을 알게 되었다. 싱글맘이 되어 딸을 키우며 얼마나 치열하게 번역을 하며 살아왔는지. 하지만 자신은 번역을 취미처럼 즐긴다고 했다. 맞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특히 번역일은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힘든 일일 것 같다. 번역 수업에서 강사님은 번역가의 수입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에 절실하게 공감하였다. 첫 번역을 하고 재번역을 하고 교정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외국어 실력도 중요 하지만 국어 실력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설이 길었다.

 



자신의 번역 인생의 8할은 운발에 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무라카미 류가 슬슬 독자들에게 알려지며 젊은 일본 문학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침투하기 시작할 무렵에 번역을 시작했다 한다. 친구의 상사의 지인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출판사를 소개받고 번역 인생이 시작된다. 열심히 번역한 책이 처음엔 다른 역자 이름으로 실리거나 악덕 출판사에 번역료를 떼이는 등의 베테랑 번역가라면 누구나 겪었을 난감했던 에피소드도 들어있다. 9년 만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딸을 키우며 번역일을 해서 집도 사고 베테랑 번역가로 자리매김하는 찡하고도 뭉클한 스토리를 얼마나 담담하고 재미있게 풀어냈는지. 얼마나 번역에 진심인지, 그 치열한 삶의 이야기에 금세 몰입하며 읽었다.

 



권남희 님이 번역한 몇 권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츠바키 문구점, 달팽이 식당등 몇 권 안 되지만 공통점은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일본 소설 하면 권남희 님이 떠오를 정도다.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도움받을 이야기가 가득하다. 처음부터 번역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지만 번역을 하게 되면서는 그 일을 즐겼다. 8할이 운발이라는 얘기가 여러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마치 이 운발이 열정적인 태도가 끌어당긴 시크릿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이 끊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때도 있었지만 10년이 지나면서는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고 인지도도 높아지면서 수입이 늘어났다고 한다. 30년 넘도록 번역한 작품에 대한 애정, 편집자와의 관계, 번역 노하우 깨알 팁, 번역료 수입은 얼마인지 등 번역가 지망생들이 궁금해할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베테랑 번역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건 아니었다. 번역하면서 자신이 실수했던 에피소드를 반성하며 들려주는 조언은 번역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꿀팁과 삶의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끈기도 없고 싫증을 잘 내서 무슨 일이든 작심삼일을 되풀이했지만, 번역은 연애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하고 있단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즐겼고 소설가를 꿈꿀 만큼 문학을 좋아한 덕분이 아닐까. 번역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삶에 대한 절실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읽는 내내 부러운 마음과 함께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싶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이제 시작이고 언제 이룰지 모르니까. 그럼에도 한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좀 더 즐겨 보기로 했다. 번역가의 꿈을 이룰지 어떨지 모르지만, 시험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도전일 테니. 내게 커다란 격려와 응원이 되었던 말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서 리뷰를 마치려고 한다.

 



내게 이란 거의 취미생활에 가깝다. 일에 쫓기며 일의 노예처럼 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일하는 자체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에 다른 짓을 하고 놀다가도 바로 노트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이어도 종종 슬럼프는 찾아온다. 사춘기 되돌이 현상인지,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뭐 하나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인 것이, 그러다가도 새로운 작업이 들어오면 언제 슬럼프였느냐는 듯 밤샘도 불사하는 열정이 팡팡 솟는다.’(P115)

 


번역하기 쉽고 재미있는 책만 선호하다 보면,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만 좋아하다 치과 가는 아이 꼴이 날지도 모른다. 이건 내 힘으로 절대 무리일세, 싶은 작품만 아니라면 다양한 작품을 매끈하게 소화해내는 것이 능력이다.’(P151)

 


몇 번 성의 없이 교정보고 넘겼더니 일 끊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동안 쌓아온 인지도고 경력이고 다 소용없었다. 번역의 세계는 실력, 이름, 학벌, 그중에 제일은 실력인 곳이다.’(P159)

 


일이 없을 때는 무조건 읽고, 쓰고, 공부하기,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들, 긁적거린 글들이 쌓여서 분명 다음 번역을 반짝거리게 할 것이다. 안다. 조급함과 초조함에 여유롭게 활자를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걸. 그렇지만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드문드문 들어오던 일마저 떨어질지 모른다.’(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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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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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바티스트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때문이다. - P9


물론 악취가 가장 심한 곳은 파리였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도시였기 때문이다. 파리 안에서도 특히 악취가 지옥의 냄새처럼 배어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페르 거리와 페론리 거리사이에 위치한 이노상 묘지였다. 8백 년 동안 시립병원과 주변의 교구에서 죽은 시체들이 이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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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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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때 두 차례 진보초 고서점가를 다녀온 후, 언젠가 그 책방 거리를 누비면서 나날의 기억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번역 수업 시간에 야기사와 사토시의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을 알게 되고 꼭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다. 두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시점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히데아키와 1년 동안이나 사귀고 있던 다카코는 어느 날 그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던 다카코는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10년 동안 만난 적 없던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그가 운영하는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내면서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는 이야기다.

 


허리 아픈 외삼촌이 병원에 다녀올 동안 서점을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씨구나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아직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다카코가 곰팡내 나는 중고책 서점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몰입하며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면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잠에 빠져사는 다카코를 보며 외삼촌은 걱정한다. 어느 날 아침 다녀올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외삼촌의 말에 다카코는 시큰둥한다. 앞으로 몇 시간을 자든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자 할 수 없이 따라나선다. 50년도 넘었다는 외삼촌의 단골 가게라는 카페 스보루는 다카코의 기분 좋게 하였고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스보루에 다녀오고 나서 다카코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반전처럼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될 만큼 그곳을 좋아하게 된다. 데면데면하기 그지없던 외삼촌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숙맥이라고 여겼던 외삼촌이 다르게 보였다.

 


돌연 집을 나가 5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외숙모 모모코, 잔소리꾼 같았던 단골손님 사부 씨, 카페 스보루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점점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다카코의 인생 대반전을 기대했는데 약간 밋밋한 결말은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참 따뜻한 소설이다. 다카코를 천사라고 여기며 응원해 주는 외삼촌을 보며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뉘우친다.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는 외삼촌의 마음을 이제야 알다니. 갑자기 떠났던 외숙모는 왜 돌아왔을까. 외삼촌은 모모코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다카코에게 부탁을 하지만 모모코는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모모코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채 따라나선 다카코는 지난날의 외숙모의 아픔을 알게 된다. 다카코가 쓰라린 실연을 겪은 후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낸 날들은 다카코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어쩌면 모리사키 서점은 사람들을 이어주고 품어주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외삼촌은 다카코에게 오랫동안 방황했던 경험을 들려주면서 모리사키 서점이야말로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야.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내 인생의 전반부가 지나갔어. 그리고 나는 이제 가장 마음에 드는 항구로 돌아와 거기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한 거야. 나에게 이곳은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야.”(79P)

 


다카코는 어느새 히데아키를 원망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늘 적당히수동적으로 살았던 태도를 반성한다. 헌책들의 곰팡내가 떠도는 모리사키 서점 2층 작은 방이 그렇게 소중한 공간이 될 줄이야. 책을 좋아하고 진보초 책방 거리를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따뜻한 이야기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자신이 좋아하는 소중한 공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닐까. 모모코가 다카코에게 여행을 권유한 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이 공간으로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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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1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p.79에 나오는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라는 말이 굉장히 공감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나리자 2024-04-01 1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쵸. 이 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네요. 4월에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1 10:44   좋아요 1 | URL
예 감사합니다. 모나리자 님도 보람찬 4월 되시길 바랍니다!

모나리자 2024-04-01 11: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