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15주년 기념판)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은 상식적이고 논리적이며 정당한 비판을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머리가 숏컷이라고 하여 페미니즘이라는 '오명'를 씌워 도를 넘는 비난을 거침없이 하는 데에는 어떤 상식과 논리도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맹목적인 혐오만 가득하다.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소심한 빈정거림이 "꼴페미"라는 노골적 적대감을 드러내는 용어로 요약되기까지, 여성운동은 수년 사이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둬온 만큼이나 만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왔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성주의라는 개념에 굳이 몰두하지 않더라도 많은 성역할 규범들에 정체 모를 불쾌함과 부당함을 느껴본 경험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당함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힘이다. 그 언어가 없거나 적절하지 못하게 사용된 탓에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너만 힘드나, 나도 힘들다" 식의 성별 싸움으로 인식된 측면이 있다.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남성의 역차별을 들어 굳이 비아냥대는 사람은 페미니즘을 이분법적이고 반체제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성별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언하여 싸우자고 덤비는 것을 페미니즘의 본질로 알고 있는지 모른다. 페미니즘은 반대 급부를 상정하고 그 반대편에서 약자 혹은 피해자로서의 권리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고, 정상적인(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범주 밖으로 내몰린 모든 타자들을 옹호하고 긍정하려는 학문이다. 타자성을 가르는 폭력적인 기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문이다. 이런 불합리는 구조적으로 굳어버려 이미 모든 체계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는 이들은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혐의로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

구조는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이 왜 문제인지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날카로운 언어를 가진 정희진의 이런 글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학문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및 이주민 등 타자화된 정체성을 갖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에 한정된 문제 의식이 아니라 인권 전반에 관한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그러니까 잠재적인 인권 운동가라는 말이다. 페미니스트를 욕하기에 앞서 왜 당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라. 그 전에 이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5박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박민우 지음 / 박민우(도서출판)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여행기를 왜 돈 주고 사서 봐야 하나? 인터넷에 널린 게 여행 정보인데. 다양한 사진과 가격, 교통 정보, 구글맵 링크까지 클릭 한 번이면 가능하지 않은가? 여행 서적의 효용을 정보 습득으로 한정 지으면 더 이상 책은 필요 없다. 책의 효용을 여전히 믿고 있는 나도 여행기에서 자주 보게 되는 숙련되지 않은 문장과 단물 빠지게 우려먹은 ‘청춘’이니 ‘방황’ 같은 키워드들을 보면 견디기 힘든 기분이 된다. 여행은 자유도 방황도 일탈도 아닌 일상이 된 지 오래다.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제목이 얼마나 정직한가. 이 책은 제목만큼 담백하다. 여행의 낭만이란 이름으로 경험을 미화하지 않는다. 화해와 이해가 동반되는 가족애의 위대한 깨달음이라는 대단원으로 마무리되지도 않는다. “늦기 전에 효도 하세요”같은 꼰대의 잔소리도 없다. 그냥 제목 그대로 25박 26일 부모님을 치앙마이로 모시게 된 불효자의 애환이 가득한 여행기다.

70대의 부모를 모시고 여행하는데 어려움이 왜 없겠는가. 그 갈등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묘미. 그렇다고 부모와의 갈등은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것처럼 자극적이지는 않다. 맥락 없이 코를 풀거나 식당에서 요란하게 국물을 들이켜는 것, 공연히 한국인 여행자에게 말을 걸어 사서 무안을 당하는 것. 이 모든 게 아들은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제목처럼 ‘몹쓸 불효자’의 효도 코스프레는 결코 아니다. 구구절절 부모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아들의 모든 신경은 부모의 만족을 향해 곤두서 있다. 윤라이 전망대에서 “아들아, 뭐 하냐? 어서 사진 찍지 않고.”라는 아버지의 성화 한 마디에 하늘을 날 듯이 행복해한다. “이런 방은 10만 원을 줘도 안 아깝지.”하는 아버지의 총평에 감성 숙소에 대한 오랜 기준도 쉽사리 내던진다. 아들의 마음은 이런 것이다.

반면,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어머니, 아버지는 여행 중엔 무조건 배가 안 고프고, 목이 안 마른 사람이 된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면 아버지 표정이 특히 안 좋아지신다. 맥심 커피믹스가 천하제일인데, 어쩌자고 비싼 돈 처들여서, 더 맛없는 걸 마신단 말인가? 윤라이 전망대에서 파는 죽이 800원이어서 망정이지, 2~3천 원만했어도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로 배가 고프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껏 감상에 빠지고 눈물을 짜내도 되는 ‘부모의 사랑’이라는 프리패스를 쉬운 방식으로 소모하지 않고, 이렇게 유머러스하고 담백하게 표현하는 데서 오는 글맛이 있다. 유쾌 발랄한 화법 이면에서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것이 박민우식 글쓰기다. 왜 인터넷에 널린 여행기를 두고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이 책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마르크의 소설에서는 텍스트를 뚫고 나오는 전쟁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병사였던 개인의 경험이 녹아든 체험적 글쓰기가 특징이지만, 체험에 함몰되어 서사를 소홀히 하는 일은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처럼 오직 전쟁터만이 배경이 되는 소설에서도 전쟁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것이 레마르크의 특징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데, 초반에서 묘사되는 전쟁터의 현장감이 <서부전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다양한 심상을 사용해 전사한 시체를 묘사하는 소설의 첫 문단은 압도적으로 문학적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비감에 더 초점을 두는 것 같다.


소설은 전쟁 막바지 패전의 징조가 곳곳에 드러나는 독일이 배경이다. 패전이 분명한데도 전쟁을 거부할 수 없는 한 개인의 딜레마를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이 책은 전쟁터에서 병사들 앞에 펼쳐지는 비정한 현실 뿐 아니라 연합군의 폭격이 쏟아지는 한 도시의 잿빛 풍경 또한 생생하게 재현한다. 전쟁 시기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보여주며 승자와 패자, 선과 악, 권력과 비권력으로 역사를 이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범국이라고 해서 국민 모두가 가해자인 것도 아니며 나치에 동조하는 인간이라고 모두가 사악한 본성을 가진 악한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범국의 악행을 옹호하려는 의도는 읽히지 않는다. <서부전선>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노골적인 반전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므로. 다만 전쟁이라는 비극을 개인의 차원에서 바라보려 할 뿐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전범국이지만 각각의 개인으로 초점을 돌리면 이 또한 전쟁의 피해자인 것이다. 포탄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나치의 돌격대장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독일 민간인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했는가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물론 레마르크는 건조하고 차갑게 현실을 이야기하는 리얼리스트다. 이 책은 동화적인 휴머니즘을 보여주기보다 역사의 물결에 휘말린 한 개인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하려는 절박한 마음의 그래버와 눈 앞에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무생물처럼 감정을 잃어가는 그래버 사이에는 불과 며칠의 시차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삶의 낙차는 너무 크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죽을 수 없다. 죽을 때는 오로지 죽음만을 생각해야하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에게 자행한 이 거대한 모순을 작가는 집요하고 철저하게 그려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많은 작품을 낸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는 그 작가의 전작의 계보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와 영향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그것이 만년에 이른 대가의 작품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작가가 자신만의 확고한 원형적 세계관을 끊임없이 변주해 온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 기원을 파고들면 하루키가 40여 년 전 발표한 단편 소설에까지 거슬러 간다고 하니 하루키의 문학 세계의 중심을 그야말로 정확히 가로지르는 소설로 봐도 될 것이다.


하루키 소설을 꾸준히 관통하는 화두는 관계의 단절(보통은 일방적인 방식으로)이다. 그는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노르웨이의 숲>,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든 초현실주의 기법이 가미된 소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 감는 새>)이든 한결같이 관계의 상실과 그 상실을 견디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노르웨이의 숲>이 한국에서 처음 <상실의 시대>로 소개된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주인공이 겪는 상실은 필연적으로 여정을 동반한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떠도는 인물의 여정이 견고한 하루키 월드를 구성하는 것이다.


글짓기 대회의 시상식장에 나란히 앉게 된 남녀 고교생이 편지를 주고받고 만남을 가지며 사랑을 키워가는 청춘 연애물일 수도 있었던 도입부의 이야기가 확장되고 깊이를 얻게 되는 지점은 시공간을 뒤틀어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 기교에 있다. 현실 세계의 ‘나’와 ‘너’는 서로를 안은 채 입 맞출 수 있고 서로를 욕망할 수 있지만 끝내 온전한 결합에는 실패하고 만다. ‘네’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탓이다. 한편, ‘도시’ 속의 ‘너’는 ‘나’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집에 가는 길을 늘 함께하지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곳에 흘러들어온 ‘나’와 ‘너’의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현실에서 공간의 단절로 소통하지 못했던 인물들은 도시 안에서는 한 공간에 있지만 시간이 엇갈려 소통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도시를 둘러싼 벽은 이 두 세계를 무심하게 나누며 ‘나’에게 계속해서 반대편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너’의 ‘본체’가 있는 이 도시는 ‘나’에게 그림자를 버리고 ‘본체’만을 남길 것을 강요한다. 그림자를 버린 자만이 도시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규칙은 도시의 벽과 더불어 두 세계의 소통을 방해한다. 도시 안의 삶이란 그림자와 분리된 채 벽 바깥의 모든 기억을 남겨 두고 정지된 시공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본체라고 주장하는 도시의 사람들이야말로 흔히 사용되는 메타포 그대로 ‘그림자’ 같은 존재라는 혐의가 든다. 본체들의 일부는 ‘꿈’이라는 형식으로 이 도시의 도서관에 박제되고 도시에 남은 사람은 그 본체들의 흔적을 더듬는 그림자인 것이다. 본체와 그림자가 분리된 순간 두 자아는 진위가 혼동되고, 도시와 현실 세계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두 자아는 결국 어느 세계에서도 만족하는 삶을 누리지 못한다.


애초에 ‘도시’라는 세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 도시에 흘러오는 자들은 ‘시간’이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고 느끼거나, 말 그대로 ‘현실 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은 상태다. 그들은 마음으로 도시를 원한다. 한낮의 따분함이 앨리스를 토끼 굴로 이끈 것과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뿐 아니라 <오즈의 마법사>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도 상관없다. 인물들을 ‘이세계(異世界)’로 이끄는 힘은 언제나 현실이다. 따분함이든 불안감이든 외부적 힘이든 상관없이 현실에서 불만의 상태에 놓인 자아는 늘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도시의 벽은 이들의 욕망에 의해 열리고 닫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벽을 뚫고 나가는 일은 일종의 성인식이다.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하면 이 도시는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한 두 고교생이 함께 지어 올린 것으로, 이들의 행위 자체가 창작을 은유하는 메타픽션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탈로 칼비노가 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정성껏 창조해 낸 도시처럼 점점 선명하게 실체를 이루는 도시의 모습은 창작자의 손에서 차근차근 쌓아 올려진 이야기 같다. 인물들은 도시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에 구체성과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낯설고 모호하다. 중세의 성벽을 연상시키는 벽은 말할 것도 없고, 망루나 문지기, 일각수 같은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을 소환해 몽환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창작자의 손을 떠나 스스로 생명력을 얻게 되는 픽션의 세계처럼, 일단 완성된 그 도시는 세포처럼 자가증식 한다.


이제 이 도시는 독자적인 유기체로 보인다. 이 도시에 관한 한 ‘나’는 어떤 통제력도 행사할 수 없다. 도시에 남고자 하지만 어떤 이유로 현실 세계로 내보내 지고, 그 도시에 가고자 하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도울 수 없다. 다시 도시로 보내졌을 때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도시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도시의 무기력함을 끝내는 방법은 낙하하는 자신을 받아 줄 누군가의 존재를 믿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 유일하게 ‘영속적인’ 것이라 믿었던 ‘비가 쏟아지는 드넓은 바다의 광경’을 떠올리며 자신의 의지로 ‘불확실한 도시의 벽’을 뚫고 나가고자 한다. 만년의 하루키는 의식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현실을 긍정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년기의 끝 -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 기념판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남을 겁니다.” 잰은 불쑥 내뱉고는 덧붙였다. “우주는 이미 충분히 보았습니다. 이제 제가 궁금해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바로 제 행성의 운명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고독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주적 차원의 고독일 때 나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비감에 잠기곤 한다. SF는 이처럼 짐작도 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을 건드리는 장엄한 상상력을 가졌다.

스타게이트를 통해 저 홀로 토성의 내부로 추락해 가는 데이비드 보먼(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항성 간 전쟁에 징집되어 인류의 모든 진화 과정을 놓친 채 수 세기를 지나 보낸 윌리엄 만델라(영원한 전쟁), 그리고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홀로 목성, 토성, 천왕성을 지나 해왕성까지 항해하는 브래드 피트의 고독한 여정에서는 인간 실존에 대한 심오한 물음이 언제나 전제된다.

이런저런 디테일을 걷어내고 보면 <유년기의 끝>은 행성의 탄생과 소멸까지의 생애주기를 의인화한 소설로 보인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유년기의 끝>을 끝끝내 영화화하지 못했지만, 대신 <2002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통해 이 소설의 심상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려 했던 것 같다. <2002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스타 차일드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유년기의 끝>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행성의 진화 과정을 장면의 거대한 도약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유사하다. 세대와 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장면 전환은, 과거와 현재를 ‘가능한 미래’와 자연스레 연결시키면서 미래에 대한 경이감을 선사한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구라는 행성은 (성숙함의 측면에서) 태아 상태에 지나지 않고, (진화적 측면에서) 아메바만큼 보잘것없다. 우주를 상상하면 지구에서 벌어지는 온갖 갈등과 대립이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최후의 호모 사피엔스가 된 잰 로드릭스가 홀로 행성에 남기를 결정하게 되는 존재론적 깨달음의 과정이 이해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