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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번역판 표지가 일본 원작과 똑같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사카 고타로 읽기를 주저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표지’ 때문입니다. ‘사신 치바’나 ‘마왕’ 정도는 몰라도 그 외 대부분은 라노벨로 오해받기 좋은 이미지들이라 계속 주저하고 또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표지와 내용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알지만, 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표지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야기의 주 무대는 개성 넘치고 특이한 킬러들의 세계입니다. 자살 유도 킬러, 무적 칼잡이 킬러, 등을 떠밀어 교통사고사를 유발하는 밀치기 킬러, 또 그 킬러들을 돈과 권력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고용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아내의 복수를 위해 그 세계에 위장잠입한 평범한 소시민 스즈키가 각각의 킬러들과 엮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만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중심 내용입니다.
서로 일면식도, 관계도 없던 킬러들이 살인 사건 하나 때문에 서로 얽히게 되는 구조는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이나 ‘방해자’를 연상시킵니다. 즉, 각자 열심히 자신의 본분(?)을 다해 살인을 저지르다가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 교집합을 이루게 되고 한데 얽힌다는 뜻입니다.
만 하루 동안 벌어지는 사건 자체는 등장인물 수에 비해 단순하게 설정되어 있지만, 정작 이 작품의 재미는 ‘별난 킬러’들의 캐릭터를 흥미롭게 만끽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트라우마, 뇌구조, 무의식 등 킬러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사카 고타로의 묘사는 기발하고 독특한 재미를 주면서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엄청나게 가속시킵니다.
“난 일가족 몰살 전문이야!”라고 떠들어대는 칼잡이 세미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살인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쾌락이라고 주장하듯 그야말로 신나고 경쾌하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결코 신나지도 경쾌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고용주 이와니시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에 “난 이와니시의 인형에 불과한가?”라는 고뇌에 빠집니다.
단 몇 마디의 말과 표정으로 상대방을 알아서 목매거나 투신하게 만드는 구지라는 끊임없이 주변에 나타나는 망령들(자신이 자살하게 만들었던)의 속삭임에 시달립니다. 또한, 그가 느끼는 죄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문고판 ‘죄와 벌’을 소품으로 설정합니다. 구지라는 자신의 타깃들이 스스로 죽을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태연히 ‘죄와 벌’을 꺼내 읽으면서 곳곳에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음미하곤 합니다.
평범한 스즈키가 아내의 복수를 펼치며 이야기의 뼈대를 끌고 나간다면, 세미와 구지라는 ‘킬러들의 살인행위와 그 행위를 지배하는 무의식과 철학’이라는 블랙코미디 같으면서도 한없이 진지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주로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지만, 어쨌든 독특한 미덕을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호불호도 확연히 갈릴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나중에 실망하더라도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작품이라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