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쏟아진 어느 밤, 독실한 가톨릭 신자 리타가 성당 종탑에 목을 맨 채 발견된다.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리타의 어머니 엘레나는 딸이 살해당했음을 주장하며 재수사를 요구한다. 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사건의 진실은 따로 있다고 확신하는 엘레나.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본인 또한 병을 앓고 있어 직접 수사에 나서기는커녕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처지다. 상실감과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엘레나는 불현듯 이십 년 전 리타에게 큰 빚을 진 여자 이사벨을 떠올린다. 리타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룬 이사벨. 엘레나는 이사벨이라면 진실을 대신 파헤쳐주리라 기대를 안고 기차에 오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엘레나는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입증하려는 간절함 가득한 어머니지만 동시에 파킨슨병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환자이기도 합니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기 전만 해도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마이클 로보텀이 창조한 스릴러 시리즈 주인공)을 떠올렸던 게 사실인데, 실은 이 작품은 영어판 번역자의 말대로 범죄소설처럼 시작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줄거리를 품고 있습니다. 시작은 딸의 죽음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려는 파킨슨병에 걸린 엄마의 분투지만 몸통은 여성, 성역할, 종교사회의 억압, 가부장적 문화, 자기결정권 등 묵직하면서도 행간에 숨은 의미가 무척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엘레나가 딸의 죽음에 관해 대신 조사해줄 이사벨을 찾아가는 하루 동안의 여정을 그립니다. 중증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엘레나에게는 발걸음 하나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목 근육까지 손상돼서 그녀의 시선은 늘 바닥에 고정돼있고 그런 탓에 수시로 침이 흘러내리는 수치스러운 상황까지 감내해야만 합니다. 작가는 엘레나의 이런 일거수일투족을 지독하리만치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독자는 엘레나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엘레나의 생각에 집중한다. 독자는 엘레나라는 인물에 파묻혀버린다.”라는 추천의 말을 쓴 정보라의 표현대로 독자는 어느새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영역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됩니다.

 

기차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지난한 여정을 거치는 동안 엘레나는 딸 리타와의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돌아봅니다. ‘여성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결혼도 출산도 거부했던 리타. 짝수년마다 떠난 모녀의 여행에서 채찍질을 하듯 모진 소리를 퍼부으며 자신과 싸우곤 했던 리타.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무심하거나 반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학교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때론 타인에게 가톨릭 교리를 앞세우곤 했던 리타.

엘레나의 회상은 희로애락을 오가지만 대부분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서술됩니다. 하지만 이 모성애는 독자에게는 오히려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시한폭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리타도 과연 그러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말입니다.

 

엘레나가 도움을 받기 위해(엘레나의 관점에선 빚을 받기 위해’) 방문한 이사벨은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제 - 여성의 성역할, 육체의 존재의 의의, 자기결정권 등을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엘레나로 하여금 리타와의 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엘레나의 도우미가 될 거라는 초반부의 나이브한 기대와는 달리 20년 전 엘레나 모녀와 맺은 인연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며 묵직한 여성 서사를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좀 심할 정도로 장르물에 편식하는 취향이라 다소 낯선 아르헨티나의 여성 미스터리라는 카피 한 줄만 보고 덥석 집어 들었던 작품인데, 고백하자면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습니다. 무겁든 가볍든 선명하고 확실한 서사를 좋아하다 보니 이렇듯 단어 하나, 문장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행간의 의미와 무게에까지 집중해야 하는 작품은 다소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옮긴이의 말추천의 말까지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의 의미가 좀더 확연하게 다가온 건 사실입니다. 아마 한 번 더, 그리고 천천히 집중해서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공개된 걸로 아는데,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챙겨보려고 합니다.

 

엘레나는 알고 있다에 이어 대실 해밋 상을 수상한 신을 죽인 여자들이 최근 출간됐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세 자매의 종교적 신념을 소재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제를 폭로한 뛰어난 범죄 소설이라고 하는데,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범죄소설가로서의 명성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업자에게 잊혀진 시체 보관 기록 쿤룬 삼부곡 3
쿤룬 지음, 진실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살인마에게 바치는 청소 지침서’, 2선생님이 알아서는 안 되는 학교 폭력 일기에 이은 쿤룬 3부곡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1편이 무차별 살인집단 잭(Jack)의 조직원들에게 피의 복수를 펼치는 미소년 스녠의 이야기였다면 2편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살인괴물이 돼버린 장페이야의 이야기였는데, 3편은 이전까지 등장했던 모든 인물들이 총출연하여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3편의 핵심 서사는 그동안 스녠에게 속수무책으로 사냥 당하던 살인집단 잭이 드디어 스녠의 정보를 입수하곤 반격에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반격의 여파는 스녠뿐 아니라 이 시리즈의 주요 인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말 그대로 피의 광풍을 일으킵니다. 앞선 1~2편보다 더 많은 시신들이 등장하고 더 잔혹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더불어 2편에서 살인괴물로 변신한 장페이야가 종적을 감춘 연인 촨한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기억을 잃은 채 신입 시체 수거업자가 된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와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다가 끝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이야기 등 시리즈 대미에 걸맞은 살인마 스릴러가 실려 있습니다.

 

쿤룬 3부곡의 살인마 서사 자체는 무척 비현실적입니다. 전설적인 살인마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숭배하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잭이라는 조직도,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밤낮없이 조직원을 색출해 살해하는 스녠도,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하루아침에 살인괴물로 진화하는 장페이야도, 또 순전히 재미와 쾌감을 위해 음모를 꾸미고 살인을 조장하는 주요 조연들도 판타지에 가까운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비현실감을 거의 느끼기 어려운데, 그것은 아마도 각 인물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동기가 묘하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들에게 부여된 결코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은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잭의 조직원에게 누나를 잃은 스녠과 살인마에게 아버지를 잃은 뒤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됐던 장페이야는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독자를 응원군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감도 없고, 잔인한 장면들이 거듭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 어디 있어?”라는 자문 없이 마지막 장까지 단번에 달릴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설정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거의 순도 100%의 오락성 스릴러라고 할 수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복수심이 주요 코드라서 그런지 결코 사이다처럼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무겁고 어두운 여운을 남긴다고 할 수 있는데, 시리즈는 마무리됐지만 살아남은 인물들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날들이 지금보다 괜찮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묻은 피는 지울 수 있겠지만, 마음속의 지옥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다만 피의 복수를 거듭하면서도 종종 소박하고 따뜻한 행복을 그리워하던 스녠의 소망만큼은 조금이라도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1~2편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줄거리를 언급할 수 없다 보니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인상 비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잔혹한 살인마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더없이 흥미로운 작품이 되겠지만, 그 수위가 좀 높은 편이라 이야기와 관계없이 거부감을 갖는 독자도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시리즈가 종료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동시에 쿤룬이 어떤 이야기를 들고 다시 독자를 찾을지 사뭇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3부곡이 완결된 게 2018년이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셈인데, 조만간 그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4년 도쿄.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신문사를 그만뒀던 54세의 마쓰다 노리오는 현재 여성잡지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중입니다. 계약 만료 두 달을 앞둔 어느 날, 편집장의 지시로 심령 소재 취재를 시작한 마쓰다는 한 건널목에서 찍힌 긴 머리 여자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조작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다 여자의 모습은 분명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가 1년 전 그 건널목에서 피살됐음을 알아낸 마쓰다는 큰 충격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파악하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당시 그녀의 본명이나 주소는 물론 가족조차 경찰이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마쓰다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정보를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특종 이상의 흥분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제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글도 그렇고, 아마도 작가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아니었다면 읽을까 말까 한참을 주저했을 게 분명한 작품입니다. 물론 미쓰다 신조의 도조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였다면 체할 정도로 급하게 찾아 읽었겠지만, 기본적으론 현대를 배경으로 한 유령 호러물은 제 취향 중 좀 아래쪽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유령인명구조대의 개정판인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제노사이드이후 11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당장 읽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구매신청을 해버렸습니다.

 

주인공인 마쓰다 노리오는 54세의 월간지 계약직 기자입니다. 가정을 내팽개칠 정도로 사회부 기자로 평생을 일해 온 마쓰다는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뒤 절망감에 사로잡혀 신문사까지 그만둔 바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약직 기자가 된 그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취재하게 된 건 심령 소재입니다. 먼저 간 아내를 유령 형태로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곤 했던 마쓰다지만 정작 심령 소재 취재를 맡게 되자 심한 거부감과 함께 기자로서 막장에 이르고 말았다는 자조적인 태도까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 마쓰다가 취재를 시작한 이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직접 겪으며 혼란에 빠집니다. 심령사진 속의 여자가 1년 전 끔찍하게 살해된 장본인이라는 걸 안 뒤로 마쓰다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과거 사회부 기자처럼 열정적으로 취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리 없는 기이한 현상들도 경험하게 됩니다. 심령현상이 일어나기 직전의 전조라는 나무줄기 쪼개지는 소리를 자주 듣기도 하고, 여자가 살해된 새벽 13분만 되면 울리는 전화기 속에서 희미한 비명 소릴 듣기도 하고, 심지어 사건현장인 건널목에서 유령임에 분명한 존재를 발견하곤 기차가 달려오는 줄도 모른 채 건널목 안으로 달려들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한편에선 살해된 여자의 정체와 사건 이면의 진상을 알아내려는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의 취재 미스터리가 전개되고, 다른 한편에선 명백히 비현실적인 유령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실적인 나머지 (마치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마쓰다가 유령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고, 막판에는 마쓰다가 유령의 원통함을 통쾌하게 풀어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카노 가즈아키가 절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작가는 아니기에 헛된 바람이란 건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말입니다.

 

취재를 거듭할수록 마쓰다의 마음은 점점 어둡게 물듭니다. 그녀의 정체는 여전히 요원했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여자.”, “늘 음울하게 웃으며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성격 나쁜 여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평판을 얻기까지의 사연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지를 알게 되면서 마쓰다는 특종을 노리는 기자의 마음가짐 대신 쉽게 꺼지지 않을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마쓰다가 바라는 건 그녀의 유령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뿐이고, 실제로 마쓰다는 그렇게 되게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합니다.

 

정서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사랑과 영혼에 등장한 유령 샘도 생각이 많이 났고, 비참함으로 점철된 한 여자의 삶이란 점에서 일본 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카노 가즈아키 특유의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기자 마쓰다를 통해 저널리즘 미스터리의 진한 맛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무겁고 어둡지만 길고 오래 갈 여운도 함께 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11년 동안 신작을 내지 않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해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봐도 이후 신작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머잖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오길 간절히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 프럼 더 우즈 보이 프럼 더 우즈
할런 코벤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괴롭힘을 당하던 여학생 나오미가 사라지자 같은 반의 매슈는 형사사건 전문변호사인 할머니 헤스터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헤스터는 매슈의 대부인 와일드에게 나오미를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나오미를 찾아내긴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사라진데다 이번에는 사건으로 비화할 조짐까지 보이자 와일드는 초조해집니다. 와일드는 나오미를 괴롭히던 일당의 우두머리 크래시에게 나오미의 행방을 물으며 거칠게 몰아세우지만 그 직후 크래시마저 실종되자 당황합니다. 더구나 경호원까지 내세워 자신을 압박하던 크래시의 부모가 헤스터와 자신을 초대하자 크게 놀랍니다. 헤스터와 함께 크래시 부모의 저택을 찾은 와일드는 크래시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조건을 내건 범인들의 이메일을 보곤 더 이상 실종이나 가출이 아닌 납치사건임을 깨닫습니다.

 

보이 프럼 더 우즈는 할런 코벤의 와일드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주인공 와일드는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30여 년 전 숲에서 야생 상태로 발견됐을 당시 6~8살로 추정됐던 와일드는 자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전혀 없었습니다. 숲에 살면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인간은 형사사건 전문변호사 헤스터의 막내아들 데이비드뿐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와일드는 헤스터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위탁가정에서 제대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유일한 친구였던 데이비드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대자(代子)인 매슈, 그리고 데이비드의 아내 라일라를 각별히 살피기도 합니다. 학업과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특수부대원으로 파병된 경험까지 있지만 와일드는 여전히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는 숲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에코캡슐이라는 일종의 캠핑카에서 홀로 살아갈 뿐입니다.

 

와일드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종된 여학생 나오미 찾기로 시작되지만, 얼마 후 나오미를 괴롭히던 부잣집 아들 크래시까지 실종되면서 예상치 못한 형태로 확대됩니다. 몇몇 정황 상 나오미와 크래시가 동반가출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였던 점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고, 이내 크래시를 인질로 삼은 범인들의 협박 이메일이 도착하면서 와일드는 이제 납치범들과의 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할런 코벤이 즐겨 사용하는 실종으로 시작됐다가 납치극으로 이어지긴 해도 이 내용이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음모와 비밀을 넘어 학원폭력, SNS 등 인터넷 문화의 어두운 뒷면, 인종차별, 미디어와 정치의 부패로까지 이야기가 확장되면서 꽤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가정폭력과 오래 전 살인사건의 진실 등 여러 가지 소재가 가미되기도 했고 그만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해서 단 몇 줄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채로움이 개인적으론 이 작품의 가장 아쉬운 부분으로 느껴졌습니다. 시리즈 첫 편이라 이것저것 설명할 정보가 많아서 산만하기도 했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제각각 흘러가다가 하나의 줄기로 합쳐지곤 하는 코벤 특유의 서사와 달리 여러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보일 정도로) 각자의 흐름을 갖고 있는 탓에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이런 전개와 구성을 반길 수도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다른 서평들도 꼭 참고했으면 좋겠습니다.

 

와일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은 보이 인 더 하우스로 이미 한국에 출간돼있습니다. 당장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떡밥 때문에 와일드의 이후 행보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할런 코벤의 몇몇 작품에서 감초 같은 조연으로 활약하다가 이 시리즈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헤스터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다소 아쉬웠지만 두 주인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였습니다. 후속작에서도 매력적인 두 주인공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정없는 검사의 분투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학재단, 재무공무원, 국회의원까지 연루된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이 오사카지검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수사결과에 따라 정권을 위협하는 대형스캔들로도 비화할 수 있는 사건이라 오사카지검은 특수부를 비롯하여 유능한 검사들을 다수 투입하지만, 얼마 후 특수부 검사 한 명이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사카지검은 패닉에 빠집니다. 수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고 그때 바닥까지 추락한 지검의 신뢰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대검에서 조사팀을 투입하기에 이르렀고, 그때까지 특수부 파견을 거부해온 오사카지검의 에이스 후와 슌타로는 지검장의 명령으로 대검 조사팀과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2020년에 한국에 출간된 표정 없는 검사에 이은 후와 슌타로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2021년에 출간됐던 터라 곧 만나볼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거의 3년이 지난 후에야 한국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비범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지만 후와 슌타로는 이른바 能面檢事’, 즉 일본 전통극 ’()에 쓰이는 가면을 쓴 듯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는 기계와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오사카지검의 에이스라 불리면서도 후와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과거 도쿄지검 재직 시 저지른 최악의 실책 이후 제대로 된 사법기관으로서 역할하기 위해 표정을 지웠을 뿐 그는 타고난 반골은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좀전에 뭘 했는지 등 그야말로 머릿속의 모든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무관 소료 미하루가 후와의 곁을 지킵니다. 1편에서 후와의 사무관으로 배속된 이후 숱한 좌절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1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후와의 일거수일투족에 놀라고, 당황하고, 허둥댑니다.

 

1편에서 오사카 경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후와가 이번에 상대하는 건 자신이 속한 조직인 검찰입니다. 수년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특수부 검사의 증거조작이 또다시 되풀이되면서 오사카지검은 궁지에 몰렸고, 대검의 조사팀에게 지검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런데 대검 조사팀 중 한 명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후와를 수사에 합류시켰고, 결과적으로 후와는 대검 조사팀의 일원이 되어 오사카지검의 동료를 조사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성과를 올릴 경우 동료를 욕보인 원흉이 될 것이고, 실패할 경우에도 오사카지검의 공중분해를 야기한 주범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실 찾기에 나서겠다고 대응했고, 실제로 그는 주위에서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조사를 진행합니다. 문제는 그가 조사해야 하는 대상도 검사이고, 시기심과 공명심에 사로잡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는 것도 검사라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검사가 벌이는 검사와의 전쟁이라고 할까요?

 

다소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들이 난무하는 국유지 헐값 매각 사건과 증거조작 사건은 중반 이후 후와와 미하루의 현장 조사를 통해 과거의 다른 사건과 맥이 닿으면서 급물살을 탑니다. 이 대목이 살짝 비약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집요한 탐문과 현장조사를 통해 후와가 알아낸 진실은 원래 사건에선 도저히 유추할 수 없었던 소소한 감동과 안타까움을 선사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연속 반전의 쾌감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회의실에 앉아서 후와의 공을 훔치고 오사카지검을 공중분해시키려던 대검 조사팀을 제대로 물 먹이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애초 후와를 조사팀에 끌어들인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는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검사로 활약하는데, 그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다른 주인공 미사키 요스케의 아버지로 밝혀집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자신들의 업무를 소홀히 하는 공무원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와중에 영웅 같은 공무원이 활약하는 작품을 쓰는 것이 대중 소설가의 책무라고 집필의도를 밝힌 바 있는데, 요즘의 한국 상황을 보면 후와 같은 검사가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표정 없는 검사 후와 슌타로 시리즈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두 작품쯤은 더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옮긴이의 말에 나온 것처럼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신념 투철한 사법기계의 활약은 언제 읽어도 속 시원한 사이다처럼 짜릿하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