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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주 ㅣ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안동과 영주 부근의 소도시 섭주의 초등학교 교사 강서경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 성격 탓에 왕따에 가까운 처지지만 그저 순응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중입니다. 어느 날 “인근 붕평마을의 정자에 가면 친엄마를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꾼 그녀는 폭우 속에서 붕평마을로 가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보자기에 싸인 특이한 방울과 거울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손에 넣은 이후로 강서경은 끔찍한 악몽과 환상은 물론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독한 몸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점입니다. 더 기이한 것은 그녀가 가는 곳마다 뱀이 나타나는가 하면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처음 읽는 박해로의 장편소설입니다. 실은 2018년에 출간된 ‘살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를 접했지만 초반부에 책을 덮은 탓에 인연을 맺지 못했고, 그 뒤로 이어진 그의 작품 역시 계속 관심 밖에 뒀던 게 사실입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를 무척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박해로의 호러는 제 스타일과는 잘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끝까지 읽은 박해로의 작품이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2014년에 출간된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에 실린 단편 ‘무당아들’이 그것인데, 메모해놓은 줄거리를 보니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그의 신작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특히 앞선 작품들의 공통된 무대였던 소도시 섭주를 제목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서 중도 포기했던 ‘살’의 아쉬움을 만회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흉가에 방치돼있던 특이한 방울과 거울, 그것을 손댄 자들에게 찾아오는 끔찍한 악몽과 지독한 몸살, 사방에서 뱀이 출몰하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 그리고 소도시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기이한 괴담과 전설 등 매력적인 호러 코드들이 잔뜩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다채로운데, 이기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는 소도시 초등학교 교사들, 꽤 깊은 내공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무당들, 무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은 목사, 무속과 관련된 사건을 수사하다가 30년 넘게 실종상태인 삼촌을 둔 경찰 등 설정만으로도 호기심을 일게 하는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속도감도 빠르고 지루할 틈 없이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는데다 섭주에 전해 내려오는 ‘사파왕과 우녀’라는 기이한 괴담까지 가미돼서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개인적인 호러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자로 하여금 공포 자체를 서서히 느끼고 만끽하도록 이끄는 게 아니라 조금은 강요하듯 ‘설명’하는 점이 거슬렸는데, 그 방법 역시 대부분 ‘꿈’이나 ‘환각’이라는 편리한 장치에 의존한 점이 안이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이야기를 이끌던 주인공 강서경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감을 잃어버렸는데, 반면 할리우드 모험극을 떠올리게 하는 전설 속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이야기의 방향 자체가 산만해진 점도 아쉬웠습니다. 긴장감 넘치고 소름 돋는 호러가 다소 생뚱맞은 액션극으로 마무리된 느낌이랄까요? 섬뜩한 죽음의 의례를 소재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불쾌한 공포심을 안겨줬던 미쓰다 신조의 ‘사관장’(蛇棺葬)과 ‘백사당’(百蛇堂)을 닮은 호러물을 기대했던 탓에 ‘섭주’의 막판 전개가 더 아쉽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웠던 건 표지입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해지는 사악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귀여운(?) 다섯 마리의 뱀 이미지는 이 작품을 ‘아동용 호러’처럼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다 읽은 뒤에 다시 표지를 봤을 땐 그 ‘귀여움’이 더더욱 아쉽게만 여겨졌습니다.
이 작품 덕분에 섭주라는 공간을 무대로 이어져온 박해로의 호러물들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섭주’에서 만족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전 작품들에서 채워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장르와 소재를 개척하고 꾸준히 이야기를 자아낸 박해로의 앞으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남다른 기대감을 유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