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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평점 :
“인생 초보자, 실패자들이 모인 동네라서 늘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죠. 한마디로 끈적이는 동네예요. 장사 안 되는 식당 주방처럼 찌든 때가 여기저기 붙은 곳이죠. 우울, 슬픔, 비루함, 분노, 모든 것이 뒤섞여 끈적거려요.” (p51)
막장과도 같은 동네에 자리 잡은 원룸 건물 3층에는 여섯 명의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 층인 무속인, 디자이너, 사회복지사, 지적장애인, 액세서리 노점상,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50대 여성이 그들입니다. 모든 소음이 넘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그녀들 사이엔 타인의 영역에 절대 무관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녀들은 서로의 삶의 대부분을 눈치 챕니다. 일부러든 아니든 엿봐서 알게 된 것도 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알게 된 것도 있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건 복도에서 발견된 한 남자의 사체입니다. 경찰은 여섯 명의 여성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이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 경찰마저 손을 뗀 상태에서 그녀들이 사는 3층에는 더욱 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독특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작품입니다. 변사(變死) 혹은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의 일그러진 탐욕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지독할 만큼 궁지에 몰린 밑바닥 삶의 피폐함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혹은 현실과 유리된 듯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인 진술서 혹은 녹취기록으로 구성된 1부는 다분히 미스터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녀들의 진술 내용은 사건에 관한 것보다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 혹은 어딘가 4차원인 듯한 세계관을 토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각자의 ‘독백’을 담은 2부는 변사 사건 이후 사뭇 달라진 원룸의 분위기와 함께 여섯 여성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거나 소통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음조차 차단하지 못하던 얇은 벽이 변사 사건 덕분에 뻥 뚫린 듯 그녀들은 서로를 탐색하거나 호기심을 드러내는데, 문제는 그녀들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온한 기운이 파국 이상의 결말을 예고라도 하듯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눈길을 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서사 때문입니다. 앞서 미스터리, 탐욕, 피폐함, 망상과 광기 등 다양한 코드들을 언급했는데, 이 가운데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다 읽은 지금도 명확히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라는 뒤표지의 카피나 “망설이면 진다. 한 번에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 시간을 끌고 미루는 순간 내가 먹잇감이 된다.”라는 본문 속의 강렬한 문장이 이 작품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과연 이게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미스터리 혹은 장르물이라 하기엔 ‘사족’이 배보다 더 큰 배꼽처럼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청춘들을 그린 사회고발물이라 하기엔 그녀들의 ‘상태’가 하나 같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또, 어떤 독자의 서평대로 마치 ‘악녀선발대회’마냥 파국으로 치닫는 클라이맥스에 제대로 이입할 수 없었던 건 그 자체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미스터리인지 광기 서린 쇼인지 애매모호했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다 읽고도 한두 줄로 요약이 안 되는 이리저리 뒤엉킨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이긴 했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가 ‘동시상영’된 탓에 오히려 그 미덕이 가려진 작품이 됐습니다. 출판사는 홍보글에서 ‘화차’와 ‘미야베 미유키’를 언급했는데, 개인적으론 서사 자체가 대중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것이 캐릭터 묘사를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부풀려진 사족들은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에 더 가까웠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홍보성 멘트로 보였습니다.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였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슬림한 분량 속에 직설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악녀선발대회’에 좀더 충실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지독히 통속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뭔가 ‘있어 보이게’ 포장하긴 했지만, 그 포장지 때문에 정작 진짜 통속적인 재미가 가려졌다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이 영화화될 때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된다면 ‘저주받은 걸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