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노크
케이시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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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보자, 실패자들이 모인 동네라서 늘 사건과 사고가 끊이질 않았죠. 한마디로 끈적이는 동네예요. 장사 안 되는 식당 주방처럼 찌든 때가 여기저기 붙은 곳이죠. 우울, 슬픔, 비루함, 분노, 모든 것이 뒤섞여 끈적거려요.” (p51)

 

막장과도 같은 동네에 자리 잡은 원룸 건물 3층에는 여섯 명의 여자가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젊은 층인 무속인, 디자이너, 사회복지사, 지적장애인, 액세서리 노점상,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50대 여성이 그들입니다. 모든 소음이 넘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살지만 그녀들 사이엔 타인의 영역에 절대 무관심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녀들은 서로의 삶의 대부분을 눈치 챕니다. 일부러든 아니든 엿봐서 알게 된 것도 있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때문에 알게 된 것도 있지만, 결코 내색하진 않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 건 복도에서 발견된 한 남자의 사체입니다. 경찰은 여섯 명의 여성을 상대로 참고인 조사를 벌이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 경찰마저 손을 뗀 상태에서 그녀들이 사는 3층에는 더욱 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독특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작품입니다. 변사(變死) 혹은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자 생존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의 일그러진 탐욕에 대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지독할 만큼 궁지에 몰린 밑바닥 삶의 피폐함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혹은 현실과 유리된 듯 망상과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인 진술서 혹은 녹취기록으로 구성된 1부는 다분히 미스터리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녀들의 진술 내용은 사건에 관한 것보다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 혹은 어딘가 4차원인 듯한 세계관을 토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각자의 독백을 담은 2부는 변사 사건 이후 사뭇 달라진 원룸의 분위기와 함께 여섯 여성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계를 맺거나 소통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소음조차 차단하지 못하던 얇은 벽이 변사 사건 덕분에 뻥 뚫린 듯 그녀들은 서로를 탐색하거나 호기심을 드러내는데, 문제는 그녀들 사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온한 기운이 파국 이상의 결말을 예고라도 하듯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눈길을 끈 독특한 설정과 탄탄하면서도 유려한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서사 때문입니다. 앞서 미스터리, 탐욕, 피폐함, 망상과 광기 등 다양한 코드들을 언급했는데, 이 가운데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다 읽은 지금도 명확히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라는 뒤표지의 카피나 망설이면 진다. 한 번에 목덜미를 물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 시간을 끌고 미루는 순간 내가 먹잇감이 된다.”라는 본문 속의 강렬한 문장이 이 작품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과연 이게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인데, 미스터리 혹은 장르물이라 하기엔 사족이 배보다 더 큰 배꼽처럼 분량과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청춘들을 그린 사회고발물이라 하기엔 그녀들의 상태가 하나 같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 어떤 독자의 서평대로 마치 악녀선발대회마냥 파국으로 치닫는 클라이맥스에 제대로 이입할 수 없었던 건 그 자체가 현실인지 망상인지, 미스터리인지 광기 서린 쇼인지 애매모호했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다 읽고도 한두 줄로 요약이 안 되는 이리저리 뒤엉킨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새로운 시도가 곳곳에서 엿보이긴 했지만, 너무 많은 이야기가 동시상영된 탓에 오히려 그 미덕이 가려진 작품이 됐습니다. 출판사는 홍보글에서 화차미야베 미유키를 언급했는데, 개인적으론 서사 자체가 대중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았고, (설령 그것이 캐릭터 묘사를 위한 장치였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부풀려진 사족들은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에 더 가까웠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홍보성 멘트로 보였습니다.

정말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벼랑 끝에 몰리면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요.”였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슬림한 분량 속에 직설적이고 선명한 이야기를 담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악녀선발대회에 좀더 충실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지독히 통속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뭔가 있어 보이게포장하긴 했지만, 그 포장지 때문에 정작 진짜 통속적인 재미가 가려졌다는 느낌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이 작품이 영화화될 때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된다면 저주받은 걸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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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의 사육사
김남겸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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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표지에 실린 카피만 봐도 이 작품이 사적 복수를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지만 이제 더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래서인지 엇비슷한 전개 혹은 억지스러운 설정에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끄는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했던 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과연 이런 사적 복수를 계획할 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물과 설정 모두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줄거리를 거의 공개하지 않은 출판사의 간략한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의 요점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상식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이 택한 복수의 방법은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과 반발심만 들었던 건 그 어디에서도 그럴 듯하다라는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적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 애초의 사건은 충분히 비극적이긴 했지만 과연 이런 식의 극단적인 복수를 계획하게 만들 만큼 참혹하고 잔인했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복수 가담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과연 적절하고 치명적인가? , 그 방법이 상대방에게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복수 가담자들의 목표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 목표 자체가 과연 가해자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No”입니다. 복수 가담자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입은 상처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만, 이후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한 그들의 행보, 즉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연구하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복수를 계획하는 과정은 전혀 상식적이지도 않고 납득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복수는 오히려 가담자들에게 더 큰 상처만 남길 뿐 정작 가해자가 똑같은 상실의 슬픔을 겪을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가담자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도 없었고, 그 방법조차 억지스러웠던 탓에 이들의 사적 복수 이야기는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을 뿐입니다.

 

앞서 얼마든지 가능하고 잘만 다룬다면 새로운 사적 복수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설정이라고 언급했듯 설정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 설정을 독자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기에는 인물도, 사건도, 복수의 방법도 허술하거나 억지스러웠고, 또 문장과 구성 등 전반적인 필력 역시 부족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적 복수 이야기를 좋아해서 기대감이 높았던 탓에 조금은 신랄할 혹평이 되고 말았는데, 많은 작가들이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댄 소재인 만큼 사적 복수를 구상하는 작가라면 좀더 치열한 고민과 정교한 설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독자의 고언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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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여 오라 - 제9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이성아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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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를 바라보는 독일어 번역가 조한나의 본명은 변이숙입니다.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은 수십 년에 걸쳐 그녀의 가족을 산산조각 냈고, 20대에 이른 그녀는 결국 한국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릅니다. 이름까지 바꾸며 과거와의 단절을 바랐지만, 얼마 못가 어처구니없는 누명과 함께 또다시 조국의 잔혹한 폭력에 짓밟히고 맙니다.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며 20여년을 지낸 조한나는 2015, 다시 한 번 한국을 떠나고 싶은 간절함에 사로잡힙니다. 가까스로 봉인했던 공포와 분노를 되살아나게 만들 가당찮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번역한 소설의 원작자인 마르코 라디치의 초대를 받은 조한나는 멀고도 먼 발칸반도를 향해 먹먹한 여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가 마주친 것은 너무도 낯익은 상처들입니다.

 

내전과 인종청소로 얼룩진 발칸반도의 비극과 대량학살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제주 4.3사건을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만, ‘밤이여 오라는 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고발장입니다. 특히 이념, 민족주의, 종교를 앞세운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궤멸시키는지, 또 수십 년이 흘러도 결코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집요하면서도 차분하고 명징한 태도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중심 이야기는 20여 년 전 참혹한 내전과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발칸반도 곳곳을 여행하는 조한나의 여정입니다. 자그레브, 비셰그라드, 부코바르 등 가는 곳마다 추모비가 이정표처럼 세워져있는 발칸반도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심신이 완전히 파괴됐던 조한나에게는 발칸반도의 상처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붕괴시킨 제주 4.3사건과 빨갱이낙인을 상기시키는 닮은꼴의 흔적들을 발칸반도 곳곳에서 목격합니다.

 

나는 발칸에서 제주를 보았고, 제주에서 다시 발칸을 보고 있었다. 발칸에서 나는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중략) 내가 정말 무서웠던 건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도무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p207~208, ‘작가의 말)

 

발칸반도에서 조한나가 만난 사람들은 여전히 20년 전에 얻은 상흔에 갇혀있습니다. 아내와 딸을 잃고 폐인이 된 남자, 군인들의 윤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떻게든 발칸반도를 떠나려는 청년, 내전의 피해자지만 비무장 상태의 적군을 죽인 일로 트라우마를 겪는 남자, 고향은 같지만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운명을 물려받은 연인 등 살아서 지옥을 배회하고 있는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조한나는 때론 그들에게서 일란성 쌍둥이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철저히 망가진 가족과 연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통점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여다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다시금 악몽과 착란에 시달리기 시작한 조한나는 오랫동안 봉인해둔 기억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릅니다.

 

다소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인 건 맞지만, 선언적이지도 않고 교훈적이지도 않은 서사 때문에 오히려 깊은 인상과 여운을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조한나의 상처의 근원이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겪은 국가(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에 의한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닮은꼴의 상처를 지닌 발칸반도에서의 여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지만 훨씬 더 피부에 와 닿게 그린 점은 이 작품만의 가장 특별한 미덕입니다. 또 발칸반도의 풍광을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낸 문장들은 그곳의 비극과 대비되어 더 처연하게 느껴졌고,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대목에서조차 서늘함을 유지했던 차분하고 정갈한 문장들은 역설적으로 작품 속 인물들의 공포와 분노를 더 강렬하게 만들었는데, ‘9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은 바로 이런 점들이 높이 평가받은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워서 일부러 과거의 참혹한 이야기를 외면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밤이여 오라는 고통스럽긴 해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좀더 다양한 계층의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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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식범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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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식범은 고즈넉이엔티의 케이스릴러27번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11번째 만난 작품인데, 다소 편차는 있더라도 그동안 읽은 작품들 모두 개성과 매력을 갖춘 수작들이긴 했지만, ‘면식범은 탄탄한 이야기와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가 잘 조합된 명품으로 그 어느 케이스릴러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전직 경찰이자 지금은 유명한 범죄 심리학자인 도경수는 어느 날 갑작스런 교통사고 후 누군가에게 납치됩니다. 감금된 채 자신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들을 떠올리던 도경수는 얼마 후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의 얼굴이 자신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납치당한 이유가 6년 전 한 소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가족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들어간 페이스 스릴러라는 표현 때문에 자칫 이 작품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페이스 스릴러가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건 맞지만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등장인물 모두의 심장을 한없는 무게로, 그것도 영원히 짓누를 죄와 벌에 관한 서사라는 게 더 정확한 설명입니다.

6년 전, 한 소녀의 죽음에서 시작된 두 가족의 비극은 오해와 은폐와 복수와 절망이라는 어둡고 긴 여정을 거쳐 마지막 페이지에서 거대한 마침표를 찍게 되지만, 실은 훨씬 더 고통스러울 남은 날들을 위한 쉼표일 뿐 진짜 마침표는 아닙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족을 지키려던 자에게도,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분노를 복수로 어루만지려던 자에게도 해피엔딩이란 어울리지 않으며, 더 무겁고 가혹한 굴레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여정 속에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는 페이스 스릴러도 포함되고, “누가? ? 어떻게?”라는 범인 찾기 미스터리도 끼어들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심리 이기심, 분노, 복수심, 두려움, 욕망 등 에 좀더 관심을 두고 읽는다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비극에 말려든 모든 인물은 6년 전 사건에 대해 각자만의 처지와 감정을 끌어안고 있지만, 그것들은 이야기 속 인물 그 누구에게든 쉽게 털어놓을 수도, 이해받거나 용서받을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의 괴로움과 고통은 독자를 향해 발산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 못잖게 각각의 인물의 처지와 감정에 더욱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다소 거친 면도 있고, 시비를 걸자고 작정하면 몇몇 흠결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면식범은 그것들을 다 덮을 만큼의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을 보면 독자마다 평가가 엇갈리는 걸 알 수 있는데, 그중엔 단지 이 작품이 한국산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이유만으로 편견 섞인 시선을 드러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준 이하의 작품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거나 잔인하기만 할뿐 온통 억지로 가득 찬 일부 외국 작품들에 비하면 면식범은 충분히 호평 받고도 남을 만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언급된 작가의 전작 찾고 싶다를 당장 읽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동시에 이 작가가 앞으로 잘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 역시 그에 못잖게 간절합니다. 지금은 톱클래스에 오른 도진기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 여러 신인들의 매력적인 데뷔작처럼 면식범역시 그만한 인상과 여운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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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홈즈
전건우 지음 / 몽실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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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선주공아파트에 사는 네 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주부탐정단. 수개월 간 곳곳에서 출몰한 성추행범 쥐방울을 잡기 위해 결성됐지만,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여성의 잘린 손목과 함께 2년 간 경기도에서 일어난 미제 연쇄살인사건(일명 스마일 맨 사건)의 상징이 발견되면서 주부탐정단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쥐방울의 범행이 대범해졌을 수도 있고, 연쇄살인마 스마일 맨이 활동 영역을 서울로 옮겼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주부탐정단은 본격적으로 살인범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탐정단의 막내가 한밤중에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단순가출로 치부하는 경찰에게 격분한 주부탐정단은 위험천만한 단독수사를 결심합니다.

 

경찰들이 잘하는 것과 주부들이 잘하는 것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냥 지나쳤던 중요한 장면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 (p113)

 

고백하자면 할머니 탐정’, ‘학생 탐정’, ‘바리스타 탐정’, ‘어린이 탐정등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사건 자체도 덜 독하고, 해법 역시 주인공 캐릭터에 맞춰 아마추어 냄새를 풍기거나 감동 코드가 강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맥주집 가나리야의 주방장 구도가 손님들의 미스터리한 사연을 듣는 단편집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같은 예외가 있기도 합니다.) 2년 전에 출간된 살롱 드 홈즈를 외면해온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데, 이 작품이 프랑스에 진출했다는 소식에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걸까, 라는 호기심에 뒤늦게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명의 주부탐정단의 중심인물은 30대 후반의 주부 공미리입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탐정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그녀는 지금은 우울증에 걸린 초라한 중년이 됐지만 여전히 탐정에의 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또래이자 세 자리 수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지닌 추경자, 장차 프랑스 풍 카페를 꿈꾸는 광선슈퍼의 주인 60대 전지현, 대학 중퇴 후 친정에 살며 아기를 키우는 싱글맘 박소희가 주부탐정단의 멤버로 가세합니다. 이들은 주부들이 잘하는 것의 힘을 발휘하며 작은 단서에서부터 차곡차곡 미스터리를 풀어나갑니다.

 

초반에 바바리맨 성추행범 쥐방울을 잡는 것이 목표일 때만 해도 역시나...”라는 편견을 가졌던 게 사실인데, 범인이 화자인 챕터를 읽고 그녀들이 마주할 사건의 규모와 잔혹성을 깨달은 뒤론 어지간한 미스터리를 읽을 때처럼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는 평범한 이들이 비범한 사건과 만나 아등바등하는 이야기라고 소박하게 표현했지만, 주부탐정단이 마주한 사건은 잔혹한 소시오패스 살인극입니다. 언뜻 영화 세븐과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초반에 도쿄의 공원 쓰레기통에서 여자의 오른팔과 핸드백이 발견됩니다.)이 연상되는 연쇄살인은 치졸하고 무능한 남편들에게 무시당하고 사회의 주류에서 내쳐진 주부탐정단 멤버들에게 그저 비범한 사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하고 끔찍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부탐정단이 유명한 주인공들처럼 빛나는 추리와 화려한 액션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야말로 주부의 눈에만 보이는 사소하지만 명확한 단서들을 포착해내고, ‘함께 있으면 든든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자들만의 소속감과 유대감과 우정을 통해 경찰 못잖은 협업을 이뤄내며, 순수한 분노의 에너지를 앞세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아줌마 스타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부 캐릭터 때문에 한계가 분명했던 건 사실입니다. 경찰이 놓친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긴 했지만 그건 주부탐정단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주인공들을 위해 태만하거나 모자라게 설정된 경찰 캐릭터 덕분입니다. 리더인 공미리의 추리는 분명 반짝반짝 빛나긴 했지만 (리얼리티 때문인지) 역시 아마추어 이상의 내공을 발휘하진 못했고, 잔인한데다 용의주도해 보인 범인이 다소 허술한 최후를 보인 점도 중반까지 잘 유지돼온 긴장감을 흐트러뜨린 요인입니다.

 

작은 규모의 광선주공아파트에서 또다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질 것 같진 않기에 이들의 활약을 다시 보기는 어렵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다른 동네를 설정해서라도 혹은 주인공 격인 공미리를 이사를 시켜서라도 제2의 주부탐정단을 조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반에 인용한 문장처럼 주부들이 잘하는 것은 경찰 혹은 명탐정 미스터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설정이기에 실제로 제2의 주부탐정단이 결성된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응원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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