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팔 세트 - 전2권 왼팔
방진호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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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따르면 방진호는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 분야에서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2018년이었는데, 엄청난 살상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소심한 공처가이기도 한 살인청부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방의강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죽어도 되는 아이를 통해서입니다. 이후 앞서 발표된 세 작품을 연이어 읽었고, 그 뒤론 신작 소식을 궁금해 하며 기다리게 될 정도로 홀딱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왼팔을 비롯하여 적잖은 작품이 있는 걸 알게 됐고, 이미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그를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로 만든) ‘왼팔을 읽게 됐습니다. 더 놀랐던 건 처음 접했을 때 생소한 이름이라 대략 데뷔 5년 안팎의 신인과 중견 사이라고 여겼던 방진호가 왼팔을 처음 출간한 게 2001년이란 점입니다. ‘한국이라는 무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액션 스릴러와 피와 뼈가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구축해온 방진호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할까요?

 

왼팔은 독자에 따라 ‘SF 액션 스릴러로 규정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1960년대부터 비밀리에 존재해온 국방부 산하의 기관은 각종 실험체를 통해 가공할 인간 살상병기를 만들어왔고, 거기엔 인간과 맹수의 유전자를 조합한 괴수, 좀비처럼 피를 필요로 하며 극강의 재생력까지 지닌 존재, 그리고 흥분이 임계점을 넘으면 온몸이 금속으로 변이하는 괴물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피조물들이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슬로터라 불리는 그들은 중무장 시 1개 대대와 맞먹을 정도의 살상력을 지니고 있는데, ‘왼팔의 주인공 장도검은 그 슬로터 중에서도 최강의 능력을 지녔던 남자로, 터미네이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각종 무기가 장착된 기계 팔과 기계 눈을 가진 인물입니다.

 

기관과 그 산하의 연구소가 첨예하게 갈등을 벌이던 10년 전, 장도검은 목숨을 걸고 기관과 대결을 벌인 뒤 그곳을 뛰쳐나왔고, 지금은 연구소출신 주장서가 운영하는 레드아이라는 피자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거구의 몸집에 (기계 눈을 가리기 위해)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다 성대가 망가진 탓인지 스피커 소리와도 같은 음성을 내뱉는 등 겉으론 꽤나 위협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그의 직업은 절반쯤은 피자집 종업원이고, 절반쯤은 심부름센터 수준의 의뢰를 받는 소소한 청부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장도검 주위에선 끊임없이 대형 사건들이 터집니다. ‘기관이 파견한 슬로터가 장도검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들기도 하고, 봉인해둔 실험체가 탈출하여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탓에 장도검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방진호 특유의 잔혹한 액션 스릴러와 하드보일드 누아르가 펼쳐지고, 독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장면들이 내뿜는 쾌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런 살벌한 서사를 중화시켜주는 건 피자집 레드아이에서 벌어지는 막간극 같은 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론 방의강 시리즈에서 맛봤던 영국식 블랙유머 혹은 촌철살인 같은 독설만큼 짜릿하진 않았지만, ‘기관과 얽힌 쓰라린 과거를 지녔거나 큰 사건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던 인물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며 소박한 코미디를 펼치는 장면들은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던 두 어깨를 잠시나마 쉬게 해주는 맛깔난 양념입니다.

또 사방팔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벌어지다 보니 경찰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울 중앙서 강력범죄수사팀의 막내형사 이명희(남자형사입니다)는 신경질적인 팀장 주인환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하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행동력을 갖춘데다 장도검 및 레드아이멤버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 인물이라 등장할 때마다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1~2권 합쳐 9개의 챕터로 구성돼있고, 각 챕터마다 사건이 설정돼있어서 연작단편의 형식이긴 하지만 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 장편이나 다름없습니다. 두 권을 합치면 748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이지만 워낙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서 하루 안에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저런 설정이 가능하다고?”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겠지만, 그런 반감만 지워낸다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오락성 강한 액션 스릴러+하드보일드 누아르라서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강렬한 여운과 함께 뒷이야기를 위한 대형 떡밥만 남긴 채 막을 내린 건 무척 아쉬웠지만, 찾아보니 3부작으로 출간된 적경왼팔의 후속작인 것 같아 오늘부터 부지런히 중고서점을 다시 뒤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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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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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200713회 문학동네 소설상수상작입니다. 출간 즈음에 읽었으니 대략 14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인데, 최근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던 책들을 골라내다가 유독 달을 먹다에 시선이 머문 건 당시 꽤 파격적이란 느낌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만끽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부분적인 기억만 남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한 이유 중 하나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달을 먹다는 캐릭터, 이야기, 시대적 배경, 그리고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 속에 깃든 서늘함과 애틋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주목받았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정조와 순조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역사소설인 건 분명하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역사는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의 순도와 위기감을 고조시킬 뿐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네 가문의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무대를 현대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보편적인 인물과 감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소설이라는 외피는 독자로 하여금 똑같은 금지된 사랑이라 하더라도 엄격한 법도와 완강한 신분질서가 작동하던 그 시절이라서 더욱 불온하고 위험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설치된 일종의 보조장치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능하거나 비겁하거나 가부장적인 권위만 앞세우는 남자들의 권세와 허영 속에서 맥없이 시들거나 분노만 삼킬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굳은 심지로 자신의 입지를 지키는 여러 여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호색한에 난봉꾼이던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시집간 뒤에도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묘연, 서녀로 태어났음에도 양반처럼 애지중지 키워졌지만 결국 중인의 첩으로 들어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하연, 첫 아이를 유산한 뒤 피폐한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딸을 낳았지만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후인, 어머니가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뒤 무책임한 부성의 굴레에 갇혀 살다가 끝내 파국을 맞이하고 마는 향이 등이 그녀들입니다.

 

또 하나는 지독히도 비극적인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리를 저는 12살 소녀에게 반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뒤 폐인에 이르고 만 여문, 학대에 가까운 남편의 태도에 지쳐 모든 것을 놓고 싶어 하는 15살 연상의 여자를 흠모한 나머지 그녀를 훔쳐 달아나는 후평,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두꺼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다른 이종사촌 간의 금지된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른바 막장에 가까운 설정이지만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서정성 높은 문장과 역사소설이라는 외피 덕분에 오히려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돋보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달을 먹다는 독자에게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닙니다. 간결하고 단정하지만 서늘함과 애틋함이 깃든 문장들은 베껴 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화자는 10명 가까이나 되고, 또 그들이 특별한 경계(줄바꿈이나 챕터 바꾸기)도 없이 시공간을 수시로 바꿔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구성은 꽤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심사평 중에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라든가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의 퍼즐 맞추기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이지는 느리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지금 읽고 있는 대목이 앞의 어느 부분과 연결된 이야기인지를 세세히 살피며 읽어야만 합니다. 독서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구성이지만, 반대로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자 매력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달을 먹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김진규의 다음 작품인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2009)까지 내쳐 읽었다가 (재미있긴 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달을 먹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을 방문했다가 알게 된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후 출간된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2010)을 끝으로 김진규의 작품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감정을 후벼 파면서도 절대 오버하지 않는 문장들, 영국식 블랙유머를 연상시키는 촌철살인 같은 독설, 침향과 꽃차와 자수(刺繡) 등 온갖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묘사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가로 여겼기에 10년 넘게 무소식인 김진규의 새 이야기가 더 안타까울 뿐입니다. 절필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새 작품으로 독자들과 꼭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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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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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인 침입자들에서 범상치 않은 45살 택배기사 행운으로 등장하여 시니컬한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전직 용병 K. 과거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던 그는 한때 전 세계를 함께 누볐던 동료 안나로부터 5년 만에 부탁 전화를 받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K가 도착한 곳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에 자리한 러시아풍의 저택. 그런데 안나를 만난 K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소박하기만 한 안나의 부탁에 놀랍니다. 자신의 동생 이레네와 조카 마리를 이 이상한 마을에서 데리고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택의 노부인과 그녀의 망나니 손자들이 벌일 유혈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듣곤 깊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결국 안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K는 다른 용병들과 함께 저택에 머물며 특유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피비린내가 진동할 전쟁을 준비합니다.

 

파괴자들에 앞서 출간된 침입자들을 먼저 읽은 이유는 같은 주인공의 활약을 그린 시리즈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침입자들에서 그저 묵묵히 노동에만 전념하는 말수 적은 택배기사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과거를 지닌 것으로 보였던 그는 단지 자신이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 내내 행운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침입자들이 택배기사로 일하며 자신 못잖게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과 인연을 맺고 다양한 사건을 겪는 행운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행운이 과거의 자신, 즉 용병 K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바탕 전쟁에 참여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듯한 작은 어촌마을, 그곳에 생뚱맞게 자리 잡은 러시아풍 저택, 그리고 치외법권 지역이라도 되는 듯 마약, 매춘, 도박을 통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끌고 있는 노부인과 손자들, 거기에다 그들에게 고용된 무자비한 글로벌 용병들.

K가 한바탕 전쟁을 준비하는 공간은 다소 판타지에 가깝게 설정돼있긴 하지만, 그곳을 채우고 있는 인물들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자체가 워낙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읽는 내내 조금도 위화감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특히 이미 세 차례의 전쟁으로 숱한 피비린내를 겪고도 네 번째 최후의 전쟁을 준비 중인 노부인과 세 손자들 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그들에게 고용된 용병들 사이의 속고 속이는 두뇌싸움, 그리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상을 저지르는 무자비함은 마치 영화로 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쉼 없이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K의 본색과 능력을 알아본 노부인과 세 손자들이 어떻게든 K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거액을 베팅하거나 협박을 일삼기도 하지만 오로지 K는 안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데만 열중할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침입자들에서도 익히 본 적 있는 K만의 특유의 비아냥과 냉소와 썩은 유머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물론 조금의 자비심이나 주저함도 없는 어마어마한 폭력 재능 역시 독자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그려지는데, 그가 과거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을 박살내고 얻은 별명 아미고 델 디아블로’(악마의 친구)의 진가를 확인시켜주는 흥분지수 만점의 대목들이기도 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차지하는 대규모 유혈 전쟁도 짜릿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용병들의 잇따른 반전입니다. 그야말로 용병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 반전들은 자칫 애매한 권선징악으로 끝날 수도 있던 이야기를 묵직하고 비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침입자들의 서평에서 주인공 행운의 입을 빌린 작가의 지적 허영이 과도했다는 쓴소리를 한 적 있는데, 다행히도 파괴자들K에게선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이야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침입자들에서 맛봤던 작가의 필력이 단발성이 아니란 점, 또 그가 오마주를 바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대가 켄 브루언의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 만족스런 책읽기가 됐습니다. (저는 켄 브루언의 작품들에게 높은 평점을 주진 못했지만 그의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한 문장들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작가가 앞으로 K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주인공을 창조하더라도 한국형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신세계를 개척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처럼 앞으로도 자신만의 특화된 장르에 더욱 공을 들여주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액션 스릴러 혹은 누아르에 관한 한 뜨거운 피의 김언수, ‘방의강 시리즈의 방진호에 이어 신작 소식을 기다리게 만든 한국 장르물의 기대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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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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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

 

말 그대로 자신감 넘치는 출판사 소개글의 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습니다. 과거를 꽁꽁 숨긴 채 고된 택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45살 남자 행운이 주인공입니다. 그가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범상치 않은 이력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단 몇 조각의 단서만 주어질 뿐 독자는 그의 본명은 물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기에 비아냥 가득한 말장난과 썩은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것인지, 또 도대체 어떤 이력을 지녔기에 문()과 무()는 물론 예술과 영화와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가히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끝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행운이 과거의 어느 지점 아마도 그가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던, 하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떡밥을 남겨놓음으로써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의 행보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만 어마어마하게 부풀려놓습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2021년에 출간된 파괴자들에 관심을 가진 덕분입니다. 소개글을 잠깐 훑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제멋대로 이름 붙이자면 희대의 공처가이자 무적의 살인청부업자 방의강의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쯤 됩니다.)와 닮은꼴처럼 보였고, 알고 보니 주인공 K의 택배기사 시절을 다룬 침입자들이라는 전작이 있다기에 순서대로 읽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추리/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스릴러로 분류될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위 장르까지 따지면 딱히 이것이라고 명명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약간의 액션과 납치극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거친 노동과 중독 수준의 알코올과 장서가 수준의 독서에만 몰두하는 비밀 가득한 한 남자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비밀을 털어놓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맺는 다채로운 관계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음험하기도, 냉소적이기도, 친절하기도, 소심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행운의 캐릭터 자체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와 아주 잘 어울려 보여서 피와 살이 난무하기는커녕 대부분 택배기사의 고달픈 일상으로 채워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행운은 대놓고 철벽을 쳐놓은 45살의 택배기사인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대체로 멀쩡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매일 같은 자리에서 멍 때리다가 행운만 나타나면 담배 한 개비를 요구하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헛소리만 떠벌리는 동네 바보, 난데없이 나타나 행운에게 경제철학 강의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교수,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 바 직원, 빈곤과 가난의 중간에서 삶을 저울질하는 폐지 줍는 소녀가 그들입니다. 가끔 칼을 품은 양복쟁이들도 등장하고, 별 일 아닌 일만 해줘도 거액을 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의의 침입자도 있고 악의를 숨긴 침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운에게는 그들의 사연과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침입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은 그들의 침입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줍니다. 때론 거칠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그들을 감싸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택배기사로서 고된 시간들을 보내며 다양한 인연들을 맺었던 행운은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립니다. 아마도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그렇게 떠난 행운이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또다시 과거의 K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꽁꽁 감춰진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가 제대로 터져줄 것 같아 나름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좀 길지만 쓴 소리 한마디만 꼭 하고 싶은데(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그림, 사진, 음악, 심지어 경제와 수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묘사되는 행운의 과도한 천재성 때문에 읽는 내내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두세 번이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요하듯 반복된 행운의 올 라운드 천재성은 실은 작가의 지적 허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대목부터는 “OOO는 이렇게 말했지.”라는 문장만 보이면 아예 그 문단을 통째로 건너뛰곤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 인정한 켄 브루언과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오마주까지는 괜찮았지만, 적정선을 넘어 잘난 척으로밖에 안 보인 인용들은 오히려 행운의 캐릭터를 훼손시킬 뿐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지적 허영을 반복할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자신의 소설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작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행운이라면 그런 식으로 잘난 척을 일삼는 인물에게 과연 어떤 냉소 섞인 비아냥을 보낼까, 생각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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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미스터리 2021.겨울호 - 72호
계간 미스터리 편집부 지음 / 나비클럽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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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광팬이라 자처하면서도 그 분야를 다룬 평론이나 문예지 혹은 장르물 잡지를 읽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뭐랄까, 어렵고 학구적일 거란 선입견도 작용했고, 직접 읽은 작품의 후반부에 실린 해설이라면 모를까, 광범위하고 원론적인 주제에 대한 전문가의 식견은 그리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접하게 된 건 순전히 제가 가입한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를 소개한 글이 실렸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긴 분량은 아니지만 종종 서평도 올리고 댓글도 자주 달곤 하는 카페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내용은 제법 흐뭇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카페 소개글 외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270여 페이지의 분량 안에 담긴 다양한 글들을 읽으면서 내심 놀랐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 리부트라는 제목 하에 실린 죽어야 하는 여자들’(듀나), ‘추리 소설의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한이)는 그동안 장르물을 읽으면서 여러 번 생각했던 바를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어서 무척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살해 혹은 고문당하는 장면조차 관음증의 대상으로 여겨진 여성 캐릭터의 문제라든가 그것을 고의적으로든 무의식으로든 애용해온 작가들의 태도, 그리고 마초 주인공이 날뛰던 하드보일드 시대에 더욱 저급한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찰 등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한 내용들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신인상 수상작’, ‘단편소설’, ‘특별 초청작’, ‘미니픽션’,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트릭의 재구성등 다채로운 미스터리 작품들도 눈길을 끌었는데, “확실하게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단편 혹은 미니픽션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작품도 꽤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잔인하지만 동시에 정갈하기(?) 짝이 없는 소시오패스를 그린 인간을 해부하다’(류성희)는 장편으로의 확장이 기대되는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소재인 장기 기증을 일종의 복수코드와 접목시킨 토요일의 예고 살인’(황세연)은 비록 미스터리 자체는 평범했지만 설정 자체가 매력적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나도 한 번 써볼까?”라는 소심한 욕심을 품기 마련인데, 수록된 미스터리 작품들을 보며 그런 욕심이 조금은 더 생긴 게 사실입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도 없고 연마한 필력도 없으니 그저 소박한 희망사항일 뿐이지만 어쩌면 계간 미스터리덕분에 무모한(?) 도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처음 접한 미스터리 전문 잡지의 독특한 재미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과월호도 찾아보고 싶어졌고 앞으로 나올 신간들 역시 그 목차를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미스터리의 탄탄한 토대를 위해, 또 화수분처럼 재능 있는 한국 장르물 작가들의 산실로서 앞으로도 계간 미스터리가 늘 건승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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