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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한 장을 넘겼을 때 재미가 없다면 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한 장을 넘겼다면 분명 오늘이 가기 전에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될 거라고 자신한다.”
말 그대로 자신감 넘치는 출판사 소개글의 한 대목입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습니다. 과거를 꽁꽁 숨긴 채 고된 택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45살 남자 ‘행운’이 주인공입니다. 그가 맡은 구역이 행운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범상치 않은 이력과 함께 심연과도 같은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단 몇 조각의 단서만 주어질 뿐 독자는 그의 본명은 물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처가 얼마나 크고 깊기에 비아냥 가득한 말장난과 썩은 농담으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는 것인지, 또 도대체 어떤 이력을 지녔기에 문(文)과 무(武)는 물론 예술과 영화와 팝음악에 이르기까지 가히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끝까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행운이 과거의 어느 지점 – 아마도 그가 백지처럼 지워버리고 싶었던, 하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는 떡밥을 남겨놓음으로써 후속작에서 이어질 그의 행보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만 어마어마하게 부풀려놓습니다.
이 작품을 읽게 된 건 2021년에 출간된 ‘파괴자들’에 관심을 가진 덕분입니다. 소개글을 잠깐 훑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제멋대로 이름 붙이자면 ‘희대의 공처가이자 무적의 살인청부업자 방의강의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쯤 됩니다.)와 닮은꼴처럼 보였고, 알고 보니 주인공 K의 택배기사 시절을 다룬 ‘침입자들’이라는 전작이 있다기에 순서대로 읽기로 결심했던 겁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추리/미스터리’로 분류해놓았지만 실은 스릴러로 분류될 작품입니다. 하지만 하위 장르까지 따지면 딱히 ‘이것’이라고 명명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약간의 액션과 납치극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뼈대는 “거친 노동과 중독 수준의 알코올과 장서가 수준의 독서에만 몰두하는 비밀 가득한 한 남자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비밀을 털어놓고 하소연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맺는 다채로운 관계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음험하기도, 냉소적이기도, 친절하기도, 소심하기도 한 복잡미묘한 행운의 캐릭터 자체는 하드보일드 스릴러와 아주 잘 어울려 보여서 피와 살이 난무하기는커녕 대부분 택배기사의 고달픈 일상으로 채워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행운은 대놓고 철벽을 쳐놓은 45살의 택배기사인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대체로 멀쩡함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인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매일 같은 자리에서 멍 때리다가 행운만 나타나면 담배 한 개비를 요구하는 우울증 환자, 경찰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헛소리만 떠벌리는 동네 바보, 난데없이 나타나 행운에게 경제철학 강의를 늘어놓는 노망난 노교수, 은밀한 눈빛으로 그를 유혹하는 게이 바 직원, 빈곤과 가난의 중간에서 삶을 저울질하는 폐지 줍는 소녀가 그들입니다. 가끔 칼을 품은 양복쟁이들도 등장하고, 별 일 아닌 일만 해줘도 거액을 주겠다며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의의 침입자’도 있고 ‘악의를 숨긴 침입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행운에게는 그들의 사연과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침입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은 그들의 침입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줍니다. 때론 거칠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때론 스스로도 모를 이유로 그들을 감싸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택배기사로서 고된 시간들을 보내며 다양한 인연들을 맺었던 행운은 착잡한 심정으로 다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모습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립니다. 아마도 후속작인 ‘파괴자들’은 그렇게 떠난 행운이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또다시 과거의 K로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꽁꽁 감춰진 그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시니컬 액션스릴러’가 제대로 터져줄 것 같아 나름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좀 길지만 쓴 소리 한마디만 꼭 하고 싶은데(재미있게 읽고도 별 1개를 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학, 영화, 그림, 사진, 음악, 심지어 경제와 수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묘사되는 행운의 과도한 천재성 때문에 읽는 내내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도 했던 게 사실입니다. 두세 번이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요하듯 반복된 행운의 ‘올 라운드 천재성’은 실은 작가의 지적 허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어느 대목부터는 “OOO는 이렇게 말했지.”라는 문장만 보이면 아예 그 문단을 통째로 건너뛰곤 했습니다. 작가 스스로 인정한 켄 브루언과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오마주까지는 괜찮았지만, 적정선을 넘어 잘난 척으로밖에 안 보인 인용들은 오히려 행운의 캐릭터를 훼손시킬 뿐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지적 허영을 반복할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자신의 소설을 죽이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작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 행운이라면 그런 식으로 ‘잘난 척’을 일삼는 인물에게 과연 어떤 냉소 섞인 비아냥을 보낼까, 생각해보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