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무녀전 조선의 여탐정들
김이삭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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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궁녀였지만 절친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궁을 나와 무당골에 은신한 뒤 탐관오리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신기 없는 무녀무산, 서자라는 처지에 신내림까지 받아 남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는 능력을 갖게 된 설랑, 앞 못 보는 무당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는 돌멩 등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이 이끌어가는 역사추리소설입니다. 도성과 경기 일대에서 발생한 괴력난신, 즉 복수와 저주를 대신해준다는 두박신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실에 다가갈 기회를 잡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등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합니다.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우선 이 작품의 미덕부터 소개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인물들의 캐릭터입니다. 신기 없는 무녀, 신내림 받은 서자, 앞 못 보는 무당 등 세 명의 주인공은 과거의 이력은 물론 현재의 처지나 성격, 그리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재능 등 모든 면에서 매력적으로 설정된 인물들입니다. 특히 감찰궁녀였다가 자진해서 궁을 나온 뒤 사이비 무녀가 된 무산은 시리즈물 주인공에 어울리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중무장하고 하고 있어서 반강제로 떠맡게 된 두박신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을 돕는 조연들 역시 다양한 계층과 신분을 갖고 있는데다 개성도 강해서 흥미를 유발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놀랄 만큼 꼼꼼하고 세세했던 고증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무당 혹은 무격에 관한 폭넓고 깊은 자료조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방대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조선시대 초기 여러 공간에 대한 묘사 역시 감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고증 등 화려한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그 재료들의 맛을 살려내지 못할 만큼 산만하고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47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 속에서 무산 일행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조사를 벌이고, 때론 살인사건과 마주치기도 하고, 심지어 살해될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 중 선명하게 읽힌 대목은 별로 없습니다. 두박신 조사가 살인사건 수사로 비화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맥이 툭 끊어지고 맙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무산과 그 일행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애초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활인원 한증소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활인원은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저는 활인원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인물들은 너무 단편적으로만 소개됐고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퇴장하거나 죽어버리곤 합니다. 사건 역시 뜬금없이 벌어졌다가 흐지부지됐고 범행동기도 방법도 불분명하게 마무리됩니다. 그 와중에 무산 일행은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만 다닐 뿐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뭘 얻어낸 건지, 뭘 해결한 건지도 알 수 없으니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무산 일행이 품은 짙은 회한과 분노에 공감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독의 우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서평을 쓴 뒤 별도로 대략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곤 하는 제가 무산의 행보만이라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한 걸 보면 100% 오독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독의 우를 확인하기 위해 감찰무녀전을 다시 읽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저의 야박한 평점보다는 다른 분들의 호평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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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
한새마 지음 / 북오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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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어선에서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강시호는 광역수사대 3팀장이 된 지금도 당시의 범인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유일한 단서는 범인이 강시호의 등에 새겨 넣었던 라플레시아, 일명 시체꽃 문신입니다. 비슷한 문신의 소유자들은 꽤 있었지만 산스크리트어로 꽃잎을 채운 진짜 시체꽃 문신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한편 고급 아파트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맡은 강시호와 3팀은 여러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리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해 고전합니다. 그러던 중 피살자가 과거 사이비 종교에 몸담았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 부분을 추적하던 과정에서 강시호는 충격적인 사실과 직면합니다.

 

그동안 여러 편의 앤솔로지나 수상작품집에서 이름만 눈여겨보곤 했던 한새마의 첫 장편입니다. 아쉽게도 읽은 작품이 없어서 성향이나 장점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장편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강시호와 광역수사대 3팀이 수사하는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이고 또 하나는 12년 전 인생의 밑바닥을 살던 김민서가 우연히 만난 또래 여성을 통해 종교에 입문하며 겪은 미스터리한 일들입니다. 이에 덧붙여 시체꽃 문신 살인마를 쫓는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가 간간이 끼어들면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풍성한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관 없어 보이던 세 개의 미스터리는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한줄기로 묶이면서 강시호에게 큰 충격과 시련을 안깁니다.

 

일단 강시호라는 주인공 캐릭터가 가장 눈길을 끕니다. 20년 전의 참혹한 사건은 강시호의 몸과 마음에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희생된 아이들 중엔 여동생도 있었기에 강시호의 트라우마와 복수심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날것처럼 생생합니다. 범인이 등에 새겨 넣은 끔찍한 시체꽃 문신을 일부러 지우지 않은 것은 강시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20년 전의 참극에서 살아남은 뒤 최연소 광역수사대 팀장이 되어 문신 살인마를 쫓는다는 설정도 매력적이고, 다혈질이지만 필요할 때마다 냉정과 이성을 되찾는 점이나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대단한 폭력 재능과 함께 뛰어난 추리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미스터리 주인공의 필수 스펙은 빠짐없이 장착한 인물입니다. 문신 살인마에 집착한 나머지 잔혹한 살인사건이라면 자청해서 맡는 강시호 덕분에 3팀이 잔혹범죄전담팀이라는 별명을 얻은 설정도 흥미로웠습니다. 만약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잔혹범죄전담팀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강시호라는 캐릭터 덕분일 것입니다.

 

다만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가장 큰 건 짧은 분량에 세 개의 미스터리를 담다 보니 서사의 깊이나 밀도가 얕고 옅어 보인 점입니다.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은 막판에 여러 차례의 반전을 거쳐 진범이 드러나긴 하지만 메인 사건이라고 하기엔 전개나 해법 모두 다소 가볍고 급해 보였습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어울리는 소재였다고 할까요?

12년 전 김민서가 종교에 입문하며 겪은 미스터리는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은 물론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와도 접점을 이루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왠지 그 접점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접점에 자리 한 인물이나 사건 모두 필연적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딱 떨어지는 쾌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느낌입니다.

강시호의 개인적인 수사 역시 그녀가 20년을 짊어졌던 죄책감과 복수심에 비하면 너무 쉽게 마무리됐습니다. 물론 그녀의 수사는 완결되지 않았고 후속작에서 계속 이어질 거라는 떡밥이 남겨지긴 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찜찜함이 남은 게 사실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인물, 사건, 심리(감정) 묘사가 가볍거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듬성듬성 이뤄지는 미스터리에는 좀처럼 몰입하기가 쉽지 않은데,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역시 그런 인상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강시호의 트라우마와 고통이 진심으로 전해지지 않은 점도, 고급 아파트 살인사건의 발단이 된 안타까운 사연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강시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지금보다 100페이지 이상 분량이 늘어나도 좋으니 좀더 디테일하고 깊이 있는 서사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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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낭군가 - 제7, 8회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6
태재현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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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를 불문하고 좀비물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장르지만 이상하게도 그동안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한국 좀비소설은 무척 재미있게 읽어왔습니다. ‘광인들’(김중의), ‘난쟁이가 사는 저택’(황태환), 3~4ZA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크르르르등이 대표적인데, 그래선지 표제작의 제목이 단번에 눈길을 끈 제7~8ZA문학 공모전 수상작품집 좀비 낭군가도 남다른 기대를 갖고 읽게 됐습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수록작마다 소재도 다양하고 이야기의 개성도 강해서 역시 좀비물은 무한한 확장성을 갖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좀비 낭군가 (태재현)

과거 시험을 보러갔던 낭군이 좀비가 되어 돌아와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활을 익혀온 한씨는 목숨을 걸고 괴물들과 맞서기로 합니다.

 

침출수 (최영희)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16살 도아가 자신을 추행해온 남자를 살해한 날, 오염된 침출수가 일으킨 좀비 바이러스가 온 마을에 퍼집니다. 도아는 망치를 들고 좀비를 처리하러 나섭니다.

 

메탈의 시대 (서재이)

첫 공연을 1주일 앞둔 인디 메탈밴드의 베이시스트 밸지는 홍대 일대를 휩쓴 좀비의 공격에 망연자실해집니다. 동료를 모두 잃었지만 밸지는 사선을 뚫고 공연장으로 향합니다.

 

삼시세킬 (정예진)

감염병이 확산되고 감염자들의 공격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남편의 삼시세끼를 챙기기 위해 분투하는 70대 할머니 보배의 괴물과의 전쟁’.

 

화촌(火村) (경민선)

업무 차 강원도로 가던 구대리는 화촌휴게소에 발이 묶입니다. 휴게소 앞뒤의 터널 두 개가 붕괴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의 공격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 (전효원)

숙취에 시달리며 잠을 깬 채하는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에 놀랍니다. 빠른 사람(속인)과 느린 사람(완인)으로 갈라진 세상은 이내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살육장으로 변해버립니다.

 

각시들의 밤 (장아미)

섬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 진홍은 매년 봄마다 치러지는 혼례의식을 이용하여 섬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진홍은 은밀하게 감춰져온 섬의 비밀을 알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표제작인 좀비 낭군가는 스토리와 구성 모두 정직하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감칠맛 나는 문장과 생생한 캐릭터가 돋보인 작품입니다. ‘침출수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장편 사회파 호러물로의 확장성이 기대됐기 때문입니다. ‘삼시세킬은 영화 킬 빌의 우마 서먼을 연상시키는 70대 노파의 블랙코미디 풍 좀비물이라 흥미로웠고, ‘화촌제발 조금만 천천히는 좀비라는 소재가 얼마나 신선하고 새롭게 구사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 작품들입니다.

가장 아쉬움이 많이 남은 건 마지막 수록작 각시들의 밤인데, 아이디어는 너무 좋았던 반면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 특히 구성이 다소 허술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필요한 정보들을 제때 풀어놓지 않은 채 새로운 인물들을 계속 등장시키다 보니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고, 막판에 한꺼번에 공개된 정보는 왠지 뒷북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구성만 좀더 짜임새가 있었다면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은 작품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다양한 소재와 개성 강한 서사들로 채워진 덕분에 한국 좀비소설의 특별한 맛을 즐길 수 있었고, 이름을 기억해둬야 할 작가들과 처음 만난 것도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취향과 거리가 먼 장르라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재미있게 읽는 걸 보면 어쩌면 저도 이미 좀비물의 팬이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하면서 읽을 만한 한국 좀비소설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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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방 나비클럽 소설선
홍선주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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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미스터리 소설집입니다. 한 편을 제외하곤 2020년부터 2022년에 걸쳐 계간 미스터리에 실렸던 작품들인데,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를 통해 읽은 적이 있지만 (미안하게도) 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있진 않았습니다. 수록작을 읽던 도중 기시감이 들어 예전에 써놓은 계간 미스터리 2021 겨울호서평과 요약해놓은 줄거리를 보고서야 이미 짧게나마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작가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발표됐던 작품들을 모은 소설집이라 그런지 일관된 주제의식과 작가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어떻게?’보다는 ?’를 좇으며, 기억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우연과 운명의 드라마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라고 했고, 후반에 실린 작품 해설에서도 “(사연의 세계, ) 동기의 문제에 천착하는 예외적인 미스터리 작품집이라고 지칭했듯 수록작 대부분은 사연과 동기, 그리고 그것들이 촉발시킨 심리적 불안정과 동요를 잔혹한 범죄 혹은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의 변주라 할 수 있는 푸른 수염의 방은 복수극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미스터리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를 집요하게 그림으로써 짧은 분량에도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품입니다. 역시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한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가 떠올랐는데 그와는 달리 홍선주만의 새로운 설정이 가미돼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등단작인 ‘G선상의 아리아는 어려서부터 폭력과 착취에 길들여진 소년이 사이코패스에게 지배당하다가 스스로 괴물이 돼버리는 이야기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앞선 두 수록작이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의 성격이 도드라졌다면, 나머지 세 편은 살짝 결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모는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한 여고생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교생이 9년 만에 재회하여 벌이는 로맨스 심리극으로, 요약하자면 사이코패스의 사랑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최고의 인생 모토는 세태를 꼬집는 블랙 코미디로 다른 수록작들과는 톤 자체가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수록작 자라지 않는 아이는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무겁고 애틋하고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로, 행복이라곤 찰나의 순간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채 평생을 불운과 불행에 짓눌려 살아온 한 여자와, 첫 만남부터 그녀의 애증의 대상이 됐던 한 아이의 비극적인 사연을 그립니다.

 

시작과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비극의 주인공이 독자에게 공개되기 때문에 누가 범인?’ 스타일의 사건 중심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별미를 맛본 듯한 기분 좋은 책읽기였습니다. 규격화된 미스터리 서사에서 벗어나 사건 이면의 사연과 가해자의 동기와 비극의 민낯을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풀어낸 작가의 필력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이런 주제나 소재를 다룰 때 억지로 무게와 난해함을 앞세운 문장에 기대는 경우가 있는데, 스스럼없이 재미와 반전을 추구한다고 밝혔던 작가는 조금의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 매력적인 문장들을 구사하여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검색해보니 두 편의 장편이 나오는데, 제목부터 관심을 끄는 나는 연쇄살인자와 결혼했다POD 출판이라 구하기 어려워 보이는 반면, ‘푸른 수염의 방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장편 심심포차 심심 사건은 제목 자체가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래도 찾아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앤솔로지와 계간지를 통해 탄탄한 필력을 입증 받은 홍선주의 장편이 기대되는 건 분명합니다. 비록 다섯 편의 단편밖에 읽지 못했지만 나름 깊은 인상과 믿음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독하고 센 이야기를 홍선주 특유의 재미와 반전을 담아 장편으로 펴낸다면 주저하지 않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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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품집 : 2023 제17회
박소해 / 나비클럽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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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름만 들어왔던 황금펜상 수상작품집을 처음으로 읽게 됐습니다. 한 해 동안(202211~202310) 문예지와 단행본에 발표된 단편 추리소설 가운데 수상작과 우수작을 뽑은 작품집으로 한국 추리소설의 현 주소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아직 그 이름이 생소한 작가들부터 서미애, 홍정기, 송시우 등 낯익은 작가까지 포진해있어서 예전에 유명작가와 신인작가들의 작품을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황금가지의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수상작인 박소해의 해녀의 아들은 팔순이 넘은 한 해녀의 죽음에서 출발하여 그녀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70여 년 전의 비극 제주 4.3사건을 재조명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그 상처가 현재 진행형인 역사적 비극을 미스터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보였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는 복잡하거나 정교하게 설계되진 않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러 인물들의 심리가 돋보인 작품입니다. 그 외의 우수작들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서미애 죽일 생각은 없었어

독초를 기르던 할머니 품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겼던 주희는 어른으로 성장하며 본투킬 살인마로 진화합니다.

냉정과 열정을 모두 갖춘 여성 빌런 주희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기대됨.

 

김영민 ‘40피트 건물 괴사건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인적이 사라진 마을에 도착한 대학 사진클럽 멤버들은 기괴하게 생긴 건물에서 중년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곤 각자의 방식으로 추리를 전개시킵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지만 다소 아쉬웠던 미스터리의 해법과 엔딩.

 

여실지 꽃은 알고 있다

다양한 꽃과 식물이 자라는 마당 딸린 집. 히키코모리이자 불치병 환자인 와 그 가족들은 그곳에서 점차 몰락과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스티븐 킹의 공포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불온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

 

홍선주 연모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한 여고생과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 교생이 9년 만에 재회하여 벌이는 로맨스 심리극입니다.

사이코패스의 새로운 면모를 맛볼 수 있었던 작품.

 

홍정기 팔각관의 비밀

대기업 회장 박순찬의 생일잔치 도중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참석자들은 모두 죽은 자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고, 현장은 기이한 형태의 팔각관이어서 진범을 특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십각관의 비밀을 떠올리게 하는 미스터리. 단편보다는 장편에 어울리는 설정.

 

송시우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한 초등학생이 납치 살해당한 뒤 손목이 사라진 채 발견됩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범행을 부인하는 가운데 이른바 자기 캐릭터 커뮤니티라는 온라인 역할극이 수사진의 관심을 끕니다.

역시 단편보다는 장편에 어울리는 미스터리. 서사도 탄탄하고 미스터리도 쫄깃.

 

단편 특유의 맛과 다양한 소재 덕분에 꽤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아쉬움이 좀 많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추리문학상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을 법한 미스터리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쉽거나 평범해 보였고 때론 수상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추리보다는 스릴러나 서스펜스로 분류될 작품이 적지 않았던 것도 아쉬웠던 점입니다.

하지만 장편으로 확대하거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수록작도 있었는데, 송시우의 알렉산드리아의 겨울과 서미애의 죽일 생각은 없었어는 작가의 내공과 함께 흥미진진한 서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여러 작가의 작품이 함께 수록된 수상집이라 한 편 한 편 긴 코멘트를 달기는 어려워서 전체적인 인상밖에 언급할 수 없었지만, 애초 가졌던 한국 추리소설의 현 주소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기대에는 조금은 부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내년 이맘때 출간될 18번째 수상집에서는 좀더 탄탄하고 신선한 미스터리 단편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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