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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ㅣ 에를렌뒤르 형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23년 10월
평점 :
크리스마스 직전의 호텔 지하실에서 도어맨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피해자의 신상을 알 수 없어 수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호텔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확실한 건 ‘구드라우구르’라는 이름뿐, 원한관계나 범행 동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형사반장 에를렌두르는 호텔에 숙박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얼마 후 호텔 직원들 사이의 갈등과 수상쩍은 거래가 드러나고, 구드라우구르를 찾아온 영국 관광객을 통해 피해자의 기구한 어린 시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는 왜 가족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끊었을까? 왜 아버지와 누나는 그에게 그토록 적개심을 보이는 걸까? 호텔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직원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서울 영등포구와 인구는 거의 비슷하지만(37만), 땅덩어리는 무려 4,000배에 달하는 아이슬란드는 말하자면 총기난사나 살인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하고 한적하고 광활한 이미지를 가진 나라입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은 그런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주 무대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를 (2010년까지) 모두 11편 출간한 인기 있는 대중작가입니다. 아무리 조용하고 한적한 나라라고 해도 역시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건과 사고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미스터리와 스릴러 역시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7편이 검색되는데 그중 ‘목소리’를 비롯하여 ‘무덤의 침묵’과 ‘저주받은 피’는 각각 개정판이 출간된 탓에 중복 검색됩니다.) 재미있는 건 그의 이름 Arnaldur Indriðason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또는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으로 제각각 표기된 점인데,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이름이라 더 헷갈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 Erlendur도 엘릭시르가 펴낸 작품은 에를렌뒤르, 영림카디널이 펴낸 작품은 에를렌두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읽은 작품은 ‘저체온증’인데, 읽은 지 6년이 지났어도 음울하고 냉기가 몰아치던 분위기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써놓은 서평을 찾아보니 “스릴러라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에 더 가깝다.”, “어디 한군데 밝은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냉기만 내뿜는”,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 등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살인사건이 벌어진 호텔에서 태연히 식탐을 부리며 뷔페 음식을 ‘공짜로’ 만끽하는 에를렌두르의 첫 등장 모습은 꽤 의외였습니다. 마치 가볍고 코믹한 경찰소설의 도입부처럼 읽혔는데, 이런 분위기는 얼마 못가 급변합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의 비극적인 과거와 가족사가 밝혀지면서부터 에를렌두르의 평생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에를렌두르는 어린 시절 8살 동생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화이트아웃에 휘말린 뒤 자신만 구조되고 동생은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만 충격적인 사고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붕괴됐고,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게 마무리된 것은 물론 자식들과도 거의 연을 끊은 채 피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재회한 자식들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성장한 딸 에바는 마약 중독에 매춘을 일삼다 유산을 겪었고, 아들 신드리는 알코올중독 상태였습니다. 시체조차 발견 못한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저체온 상태로 밀어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역시 에를렌두르 못잖은 참혹한 10대를 보냈습니다. 한때 촉망받는 소년성가대원이었던 그는 일찌감치 찾아온 사춘기와 변성기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직후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철저하게 붕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후 집을 떠나 가족들과 연을 끊은 채 호텔에서의 밑바닥 삶을 살아왔고 누군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에를렌두르는 형사반장으로서 냉정하게 수사를 지휘하면서도 구드라우구르의 삶을 자신의 그것과 자꾸만 비교해가며 끝없는 우울감에 빠집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온 딸 에바는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며 안 그래도 힘든 에를렌두르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저체온증’에 썼던 서평과 마찬가지로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을 이번에도 피할 수 없었는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은 바로 이 에를렌두르의 트라우마입니다.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물론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대략 비슷한 서사가 아닐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외에도 이 작품에는 에를렌두르와 비슷한 고통을 겪은, 그러니까 가족의 붕괴나 반목 혹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기고 만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때론 ‘누가 범인?’보다도 그 인물들의 행로가 더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저체온증’에 비하면 책 읽기 자체는 비교적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들었지만 역시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은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 시간 속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본인의 변대로 ‘목소리’는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가족으로 인한 거대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그린 비극 서사입니다. 편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지만 아이슬랜드의 혹독한 추위를 체감하면서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
01 Synir duftsins (Sons of The Dust, 1997)
02 Dauðarósir (Silent Kill, 1998)
03 Mýrin (Jar City, 2000, 한국 출간 ‘저주받은 피’)
04 Grafarþögn (Silence of the Grave, 2001, 한국 출간 ‘무덤의 침묵)
05 Röddin (Voices, 2003, 한국 출간 ‘목소리’)
06 Kleifarvatn (The Draining Lake, 2004)
07 Vetrarborgin (Arctic Chill, 2005)
08 Harðskafi (Hypothermia, 2007, 한국 출간 ‘저체온증’)
09 Myrká (Outrage, 2008)
10 Svörtuloft (Black Skies, 2009)
11 Furðustrandir (Strange Shores,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