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에를렌뒤르 형사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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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직전의 호텔 지하실에서 도어맨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피해자의 신상을 알 수 없어 수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힌다. 호텔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확실한 건 구드라우구르라는 이름뿐, 원한관계나 범행 동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형사반장 에를렌두르는 호텔에 숙박하며 수사를 진행한다. 얼마 후 호텔 직원들 사이의 갈등과 수상쩍은 거래가 드러나고, 구드라우구르를 찾아온 영국 관광객을 통해 피해자의 기구한 어린 시절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그는 왜 가족과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끊었을까? 왜 아버지와 누나는 그에게 그토록 적개심을 보이는 걸까? 호텔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직원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서울 영등포구와 인구는 거의 비슷하지만(37), 땅덩어리는 무려 4,000배에 달하는 아이슬란드는 말하자면 총기난사나 살인사건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조용하고 한적하고 광활한 이미지를 가진 나라입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은 그런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주 무대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2010년까지) 모두 11편 출간한 인기 있는 대중작가입니다. 아무리 조용하고 한적한 나라라고 해도 역시 사람 사는 곳에서는 사건과 사고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미스터리와 스릴러 역시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은 모두 네 편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7편이 검색되는데 그중 목소리를 비롯하여 무덤의 침묵저주받은 피는 각각 개정판이 출간된 탓에 중복 검색됩니다.) 재미있는 건 그의 이름 Arnaldur Indriðason이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또는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으로 제각각 표기된 점인데,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이름이라 더 헷갈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 Erlendur도 엘릭시르가 펴낸 작품은 에를렌뒤르, 영림카디널이 펴낸 작품은 에를렌두르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시리즈 중 유일하게 읽은 작품은 저체온증인데, 읽은 지 6년이 지났어도 음울하고 냉기가 몰아치던 분위기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써놓은 서평을 찾아보니 스릴러라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에 더 가깝다.”, “어디 한군데 밝은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냉기만 내뿜는”,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등 저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문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살인사건이 벌어진 호텔에서 태연히 식탐을 부리며 뷔페 음식을 공짜로만끽하는 에를렌두르의 첫 등장 모습은 꽤 의외였습니다. 마치 가볍고 코믹한 경찰소설의 도입부처럼 읽혔는데, 이런 분위기는 얼마 못가 급변합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의 비극적인 과거와 가족사가 밝혀지면서부터 에를렌두르의 평생의 트라우마가 다시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에를렌두르는 어린 시절 8살 동생과 함께 산에 올랐다가 화이트아웃에 휘말린 뒤 자신만 구조되고 동생은 시신조차 발견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만 충격적인 사고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붕괴됐고,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게 마무리된 것은 물론 자식들과도 거의 연을 끊은 채 피폐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재회한 자식들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성장한 딸 에바는 마약 중독에 매춘을 일삼다 유산을 겪었고, 아들 신드리는 알코올중독 상태였습니다. 시체조차 발견 못한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그의 일생을 저체온 상태로 밀어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역시 에를렌두르 못잖은 참혹한 10대를 보냈습니다. 한때 촉망받는 소년성가대원이었던 그는 일찌감치 찾아온 사춘기와 변성기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직후 자신은 물론 가족마저 철저하게 붕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후 집을 떠나 가족들과 연을 끊은 채 호텔에서의 밑바닥 삶을 살아왔고 누군가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입니다. 에를렌두르는 형사반장으로서 냉정하게 수사를 지휘하면서도 구드라우구르의 삶을 자신의 그것과 자꾸만 비교해가며 끝없는 우울감에 빠집니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찾아온 딸 에바는 급격한 감정 변화를 보이며 안 그래도 힘든 에를렌두르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저체온증에 썼던 서평과 마찬가지로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을 이번에도 피할 수 없었는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은 바로 이 에를렌두르의 트라우마입니다.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물론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대략 비슷한 서사가 아닐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살해된 도어맨 구드라우구르 외에도 이 작품에는 에를렌두르와 비슷한 고통을 겪은, 그러니까 가족의 붕괴나 반목 혹은 상실을 겪은 인물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기고 만 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때론 누가 범인?’보다도 그 인물들의 행로가 더 눈길을 끌기도 합니다. ‘저체온증에 비하면 책 읽기 자체는 비교적 덜 고통스럽고 덜 힘들었지만 역시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은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 시간 속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본인의 변대로 목소리는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가족으로 인한 거대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그린 비극 서사입니다. 편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는 없지만 아이슬랜드의 혹독한 추위를 체감하면서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형사 에를렌두르 시리즈

01 Synir duftsins (Sons of The Dust, 1997)

02 Dauðarósir (Silent Kill, 1998)

03 Mýrin (Jar City, 2000, 한국 출간 저주받은 피’)

04 Grafarþögn (Silence of the Grave, 2001, 한국 출간 무덤의 침묵)

05 Röddin (Voices, 2003, 한국 출간 목소리’)

06 Kleifarvatn (The Draining Lake, 2004)

07 Vetrarborgin (Arctic Chill, 2005)

08 Harðskafi (Hypothermia, 2007, 한국 출간 저체온증’)

09 Myrká (Outrage, 2008)

10 Svörtuloft (Black Skies, 2009)

11 Furðustrandir (Strange Shore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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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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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인챈티드 존스는 실력 있는 가수 지망생이자 수영 선수다. 맏언니로서 책임감 있게 동생들을 돌보며, 흑인이란 이유로 억측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백인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한다. 전설적인 R&B 가수 코리 필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인챈티드를 유망주로 점찍고, 그녀는 코리와 투어를 떠나면서 가수로서 성공할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코리는 꿈과 사랑을 미끼삼아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다. 코리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인챈티드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른들의 세상이 나를 널빤지 아래로 떠밀어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본문 속 한 줄이자) 홍보 카피와 흑인소녀가 그려진 표지 때문입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관한 묵직한 서사일 거라고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본문이 시작되기 전 일러두기경고 : 성적 학대와 강간, 폭행, 아동학대, 납치, 마약중독이 언급됩니다.”라는 문구를 보곤 그 이상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노래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 세계적인 가수가 되고 싶은 순수하고 뜨거운 열망, 17살에 어울리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적당한 반항심,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믿을 수 없는 행운과 사랑에의 흥분 등 인챈티드 존스의 17살은 눈부심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던 R&B 가수 코리 필즈로 인해 인챈티드의 17살은 참혹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신뢰를 얻은 뒤 행해지며 피해자를 길들이고 가스라이팅을 일삼아 피해자의 정신상태를 지배하는 범죄인 그루밍 성폭력이 인챈티드를 망가뜨렸던 것입니다.

 

이야기는 경찰이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인챈티드와 코리가 온통 피범벅이 된 공간에 쓰러져있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과거로 되돌아가 인챈티드의 에너지 넘치던 시절과 오디션장에서 코리를 만나게 된 사연을 소개합니다. 분명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작가가 그려낸 인챈티드의 빛나던 시절은 부디 이 이야기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행복한 성장소설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게 만듭니다. 속도감 넘치는 짧은 챕터와 짧은 문장들은 바닷가에서 성장하며 물과 노래를 사랑하게 됐던 인챈티드의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를 더욱 싱그럽게 만들었고, 10대다운 반항심과 미국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계층이라는 흑인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있지만 언니로서, 딸로서, 학생으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인챈티드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챈티드가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여 그루밍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은 눈부시게 그려진 그녀의 빛나던 시절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게 읽힙니다.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여전히 꿈과 사랑을 믿으며 폭력의 고리 안에 머물고 마는 인챈티드는 가스라이팅을 통한 그루밍 성폭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흑인여성이 입은 피해를 보듬기는커녕 거꾸로 외면하고 의심하는 대중과 언론과 경찰의 행태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그루밍 성폭력과 결합됐을 때 얼마나 더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챈티드가 코리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심문기록은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조종당한 소녀들을 향한 노골적인 비판에 관한, 죄를 저지른 장본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관한, 피해자들이 용기를 낸 순간에 그들을 보호하고 도와야 함에도 절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는 소녀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피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은 그 입장이 돼본 적 없는 사람으로선 상상하기 힘들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피해자라면 딛고 일어설 용기를, 그동안 방관자였다면 한걸음 다가갈 용기를 17살 인챈티드의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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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사냥 스토리콜렉터 108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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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분야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한 두 명의 천재, 로버트 헌터와 루시엔 폴터. 룸메이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며 라이벌로서 함께 수학했던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른 뒤에 적이 되어 재회한다. 한 명은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의 강력계 형사로, 또 한 명은 역사상 가장 위험한 연쇄살인범으로. 그러나 헌터와의 맞대결에서 패배해 3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루시엔은 자신의 오랜 복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잔혹한 살인과 함께 세상으로 탈주한다. 그리고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볼모로 다시 한 번, 자기가 설계한 살인 게임에 헌터를 끌어들이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악의 사냥2022년에 출간된 악의 심장의 후속편으로, 희대의 연쇄살인마인 루시엔 폴터가 3년 반 만에 탈옥한 뒤 저지르는 끔찍한 연쇄살인과 그를 쫓는 LAPD 특수강력범죄수사대 로버트 헌터의 고통스런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대학시절부터의 두 사람의 오랜 악연은 악의 사냥에서도 꽤 상세히 소개되고 있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전작인 악의 심장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악의 사냥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대결, 즉 헌터를 겨냥한 루시엔의 복수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사연을 모르면 아무래도 제 맛을 즐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서를 뒤바꿔 읽어도 괜찮긴 합니다. 그럴 경우 악의 심장은 프리퀄이 되겠죠.)

 

루시엔은 지금까지 픽션에서 접한 그 어떤 연쇄살인마와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역대급 사이코패스입니다.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일반 사이코패스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우선 족히 수백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그의 희생자들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살해된 탓에 3년 반 전 루시엔이 우연한 사고로 체포되기까지 그 어느 수사기관도 그가 저지른 수많은 살인 가운데 동일범의 소행으로 여긴 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희생자를 고르는 단계부터 범행 실행과정은 물론 범행 후에 느낀 감정들까지 꼼꼼하게 기록해놓은 53권의 백과사전은 그가 체포된 뒤 FBI의 필수교재가 될 정도로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악마의 경전입니다.

 

나는 학자야. 사이코패스를 연구하는 사이코패스야 그들의 수법, 속임수, 사고방식, 행동... 모든 걸 연구해. (중략) 나는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통제 불가한 내적 충동에 이끌리는 법이 없어. , 내 행동의 모든 게 계획적이라는 뜻이지.” (p268)

 

루시엔에 맞서는 LAPD 특수강력범죄수사대 로버트 헌터는 월반을 거듭한 끝에 16살에 대학에 들어갔고 그가 23살에 쓴 박사학위 논문은 FBI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뛰어난 범죄심리 전문가입니다. FBI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LAPD의 강력계에서 일해 온 그는 특별히 잔혹하고 가학적인 살인사건과 연쇄살인의 수사를 위해 LAPD가 창설한 특수강력범죄수사대의 팀장에 올랐는데, 바로 그 시점에 20여 년 전 대학에서 악연을 맺은 루시엔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3년 반 전 가까스로 그를 체포해 영어의 몸이 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악의 사냥3년 반 만에 탈옥에 성공한 루시엔이 헌터를 상대로 벌이는 게임이자 복수극을 그립니다. 루시엔은 철저한 계획에 의거하여 그가 지금까지 시도한 적 없는 엄청난 살육극을 벌이는 것과 함께 헌터를 돌아올 수 없는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만일 루시엔의 목표가 헌터를 죽이는 것이라면 진작 수백 번은 죽이고도 남았겠지만, 그는 고도의 범죄심리 전문가답게 헌터를 죽이지 않고도 죽이는방법을 택합니다. “영혼을 비운 다음 오로지 고통으로만 그 빈 곳을 다시 채우는, 즉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는방식으로 헌터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갑니다.

 

내 계획은 네 삶과 항상 함께할 죄책감을 네 안에 불어넣는 거였어. 내면에서부터 너를 집어삼킬 죄책감, 네가 절대 없앨 수 없고 죽는 날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죄책감.” (p468)

 

악의 심장이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잔혹한 연쇄살인 때문에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면 악의 사냥은 고도의 심리전에 어울리는 비교적 느리고 완만한 서사를 통해 으스스한 긴장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립니다. 가끔 뭘 이런 것까지 이렇게 상세하게 묘사하나?”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다 읽고 돌이켜보면 실은 그런 디테일들이야말로 루시엔과 헌터의 대결을 짜릿하고 팽팽하게 만드는 기초들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사건 자체는 몇 가지 없지만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디테일의 힘이라는 생각입니다.

 

후반부에 로버트 헌터 시리즈전체 목록이 소개됩니다. 모두 12편이 출간됐는데, ‘악의 심장6편이고 악의 사냥10편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북로드에서 시리즈 전체를 순서대로 출간해줬으면 하는 건데, ‘악의 심장악의 사냥이 호응을 얻는다면 조만간 헌터의 맹활약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사족이지만, 두 편 모두 잔인한 묘사가 꽤 심한 편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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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는 사람들 스토리콜렉터 107
마이크 오머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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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경찰 최고의 인질협상가인 39세의 애비 멀린은 어느 날 아들이 납치됐다며 도와달라는 한 여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30여 년 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함께 지내다가 대규모 참사에서 자신과 더불어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이든 플레처임을 알곤 깜짝 놀랍니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애비는 당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든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아들 네이선 납치 사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배후에 심상치 않은 사이비 종교집단이 존재한다는 걸 알곤 더욱 긴장합니다. 얼마 후 애비는 납치범이 이든의 딸이자 SNS 인플루언서인 개브리엘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눈치 챕니다. 일반적인 납치와는 다른 행태를 보이는 범인 때문에 애비가 궁지에 몰린 무렵,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 현장에서 네이선의 흔적이 발견되어 애비를 큰 충격에 빠뜨립니다.

 

2020년 한국에 소개된 두 편의 조이 벤틀리 시리즈’(‘살인자의 사랑법’, ‘살인자의 동영상’)를 읽고 마이크 오머의 팬이 됐지만 2년 넘게 후속작 소식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에 인질협상가 애비 멀린을 앞세운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돼서 다소 의외였습니다. 검색해보니 조이 벤틀리 시리즈3편인 ‘Thicker Than Blood’에서 종료됐고, 이후 애비 멀린 시리즈2022년까지 모두 세 편이 출간된 상태입니다. 어쩌면 애비 멀린 시리즈역시 3편에서 종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시리즈의 주인공 조이 벤틀리가 돌직구 스타일의 범죄심리학자라는 캐릭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면 새로운 주인공 애비 멀린은 언론에도 여러 차례 노출될 정도로 유능한 인질협상가이자 골칫덩이 남매 때문에 고달픈 싱글맘이자 30여 년 전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성장하다가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벗어났던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라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애비가 맡은 사건의 배후에 신흥 사이비 종교집단이 자리 잡고 있어서 아직도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녀가 어떤 태도로 사건을 대할지 궁금증을 증폭시킵니다. 또한 충성도 높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점에서 사이비 교주와 일면 닮은꼴이라 할 수 있는 SNS 인플루언서의 이야기가 병행되어 더욱 흥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두 우상(사이비교주, SNS 인플루언서)과 그들의 맹종자들(추종자, 팔로어) 사이에 놓인 어둠의 미로라는 출판사 소개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조이 벤틀리와 마찬가지로 애비 역시 형사가 아닌데다 인질협상가라는 캐릭터를 부여받은 탓에 그녀의 주된 활약은 을 통해 발휘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애비는 파트너인 뉴욕경찰청 형사 조너선 카버와 함께 형사 못잖은 활약을 펼칩니다. 탐문은 물론 필요할 때는 고글과 글록을 휴대하고 적진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뒤 적절하고 신속한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인질협상가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말하자면 추리도 잘 하고, 행동도 민첩하고, 협상까지 잘 하는 완벽한 주인공입니다.

 

살인사건이 등장하긴 하지만 소년 납치사건이 중심이다 보니 여러 명의 참혹한 희생자가 발생했던 조이 벤틀리 시리즈에 비해 사건성은 다소 약합니다. 또한 30여 년 전 애비가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겪었던 과거사도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10대 남매를 키우는 고달픈 싱글맘 사연까지 심심찮게 등장해서 마이크 오머 특유의 잔혹한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싱겁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인질협상가의 고뇌와 결단과 고도의 심리전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며, 그런 면에서 조이 벤틀리 시리즈와는 사뭇 결이 다른 재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슈퍼 히로인이 아니면서도 캐릭터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하는 애비 멀린의 매력은 이 작품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압권입니다.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떡밥을 남겨놓은 채 마무리됩니다. 그 떡밥이 애비의 과거 트라우마와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인지는 후속작이 나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벌써부터 출간소식이 기다려지는 건 저만의 기대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조이 벤틀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Thicker Than Blood’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피를 마시는 무자비한 소시오패스가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는 조이의 마지막 활약은 꼭 지켜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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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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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피터 스완슨은 2016년 한국에 소개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하 죽마사’, 원제 The Kind Worth Killing, 2015)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입니다. 13살 때부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완벽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여주인공 릴리 킨트너의 맹활약(?)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7년 만에 그 후속작인 살려 마땅한 사람들’(원제 The Kind Worth Saving, 2023)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러 인물이 화자를 맡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작에서 연쇄살인 용의자 릴리 킨트너를 추격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 형사 헨리 킴볼(이 작품에선 사립탐정)이 메인 화자를 맡았고, 30대 중반이 된 릴리 킨트너는 킴볼을 도와 자신의 능력을 또 한 번 유감없이 발휘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 외에도 10대 시절부터 비밀 친구가 되어 수차례에 걸쳐 완벽한 살인을 저질러온 남녀가 중요한 화자로 등장합니다.

죽마사가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만드는 연쇄살인마 릴리 킨트너의 통쾌하고 속 시원한 폭주 스토리였다면, ‘살려 마땅한 사람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심리스릴러의 면모를 갖춘 작품입니다. 사건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의 심리와 동기가 강조되고 있고, 킴볼과 릴리가 상대해야 할 범인이 일찌감치 노출되기 때문에 ?’어떻게?’에 서사가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전작에서 릴리를 쫓던 형사 킴볼은 이제 고만고만한 사립탐정이 돼있습니다. 소소한 일거리 외에 무기력한 삶을 살던 킴볼은 과거 딱 1년 동안 재직했던 교사 시절의 제자 조앤이 나타나 남편의 불륜을 입증해달라는 의뢰를 하자 당혹감 속에서도 일을 맡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킴볼의 조사는 개운치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고 맙니다. 끝내 의심을 지우지 못한 킴볼은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릴리를 찾아가 의견을 나눈 끝에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대목이 여러 곳이라 애매한 줄거리 요약이 되고 말았는데, 킴볼과 릴리의 미묘한 관계 역시 죽마사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더는 자세히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큰 뼈대는 오래 전부터 잔인하고 교묘하게 살인을 저질러온 두 남녀의 행각을 킴볼과 릴리가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사실 두 남녀의 행각도 그렇고 킴볼과 릴리의 조사 과정 역시 스펙타클하거나 반전이 거듭되는 숨 가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차분한 전개 속에 각 인물들의 심리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작품입니다. ‘죽마사의 속사포 같은 서사를 기대한 독자라면 초반에 다소 처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차 고조되는 긴장감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실에 다가가는 킴볼과 릴리의 조사,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완벽하게 살해해온 두 남녀의 뒤틀린 심리와 공포, 그리고 킴볼에게 닥치는 거대한 위기와 릴리의 끝내주는 마지막 한 방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완만한 전개 속에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죽마사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죽마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랄까요?

 

죽마사이후 피터 스완슨의 팬이 되어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작품들을 전부 읽었지만 매번 아쉬움을 느껴온 게 사실입니다. 데뷔작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데, ‘살려 마땅한 사람들역시 릴리의 대폭주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인지 살짝 아쉽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래도 애착 캐릭터 중 하나였던 릴리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릴리 킨트너 시리즈가 세 번째 작품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카메오로라도 좋으니 피터 스완슨의 다른 작품에서 한번쯤은 재회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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