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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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에도의 변두리 마을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복수가 이뤄졌다. 기쿠노스케라는 소년이 아버지의 원수 사쿠베에를 죽이고 잘린 목을 든 채로 사라진다. 항간에서 고비키초의 복수라 불리는 이 사건 이후 2, 한 남자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다며 극장을 찾아온다. 남자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거듭 묻는다. 동시에 사건과는 무관한, 목격자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과연 2년 전에 벌어진 복수의 실체는 무엇일까? 극장을 찾아온 남자가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목격자들의 진술 끝에 드러나는 진실은 무엇일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고비키초의 복수2023년 나오키상과 야마모토 슈고로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입니다. 나가이 사야코는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인데, 휴머니즘이 진하게 담긴 시대소설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장르인데다 복수가 이뤄지고 2년 후, 그 상황을 목격한 자들의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이라는 설정도 매력적이어서 읽기 전부터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모두 다섯 명의 목격자가 등장하는데, ‘극장을 찾아온 남자’, 즉 청자(聽者)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목격자들은 2년 전 사건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에 대해 마주 앉은 청자와 대화하듯 찬찬히,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이런 독특한 형식은 마쓰이 게사코의 유곽 안내서에서도 활용됐는데, 에도 시대의 정보를 쉽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화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듯한 생생함을 만끽할 수 있어서 이 작품에 딱 맞는 형식이었습니다.

 

몸을 파는 유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극장 호객꾼이 된 잇파치, 하급 무사 출신으로 역시 기구한 사연을 거쳐 무술 연기 배우가 된 요사부로, 천애고아가 되어 화장터에서 키워진 뒤 말단 배우들의 의상을 담당하게 된 호타루, 뛰어난 직인이었지만 소중한 아들을 잃은 뒤 연극 소도구를 맡게 된 규조, 그리고 상급 무사 출신이지만 미래가 보장된 무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집어던지고 각본가가 된 긴지 등 2년 전 기쿠노스케의 복수를 지켜본 목격자들은 하나 같이 내밀하고 고통스러운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을 품은 채 여기저기 치이다가 당도한 곳은 악처(아쿠쇼, 惡所), 즉 막부가 필요악으로 인정해 규제하고 관리하던 극장 마을이었고, 그들은 각자의 과거와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에도에 왔다는 15세 소년 기쿠노스케는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복수의 사연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절절하긴 하지만, 극장 사람들은 한편으론 기쿠노스케의 복수 준비를 도우면서도 동시에 그가 복수에서 손을 놓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복수의 대상이 자신에게 각별한 사람인 탓에 괴로움에 빠지고 만 기쿠노스케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이 복수는 성공해도 전혀 기쁘지 않은 일이고, 실패할 경우엔 평생을 회한에 사로잡혀야 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극장 사람들의 이런 심경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돼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기쿠노스케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조마조마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신분과 나이를 떠나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도우려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피의 복수를 전제로 이뤄진다는 이 아이러니는 이 작품의 핵심이자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고비키초의 복수는 복수 미스터리의 외양을 띠긴 했어도 천민으로 취급받던 에도 시대 극장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로지 무사의 길만 알고 살아온 소년 기쿠노스케가 극장 사람들 덕분에 또 다른 삶의 방식, 또 다른 가치관, 또 다른 꿈과 미래가 있음을 알게 되는 애틋한 성장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읽으면서 수시로 눈가가 뜨끈해지는 건 바로 이런 휴먼 드라마의 요소들 때문입니다.

미스터리가 해소되고 진실이 드러나는 막판 반전은 조금 일찍 눈치 챌 수 있어서 살짝 맥이 풀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쿠노스케와 극장 사람들의 엔딩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허겁지겁 전력 질주하듯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비린내 진동하는 복수극이 이렇듯 의외의 뭉클함과 애틋함을 남길 거라곤 예상 못했는데, 휴머니즘이 진하게 담긴 시대소설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나가이 사야코의 필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무척 기억에 남을 책읽기가 된 것 같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을 비롯하여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장르를 불문하고 다 좋아하는데, 부디 고비키초의 복수가 호응을 얻어 나가이 사야코의 다른 작품들도 머잖아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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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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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은 성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고 어엿하고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성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다양성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이른바 소수자들의 성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정욕의 주인공들은 다양성이나 소수자라는 범주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미친 사람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특이한성적 취향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분출하는 성적 욕망을 억누를 수도,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 할 수도 없는 이들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정욕의 핵심 서사입니다.

 

10대 때부터 서로의 비밀스런 성적 정체성을 알고 있는 기류 나쓰키와 사사키 요시미치, 그리고 뛰어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동성애자로 오해받는 모로하시 다이야는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성적 취향을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일부러 평범한 사람들 속에 녹아들어감으로써 자신을 숨기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극도로 꺼림으로써 자신의 비밀을 지킵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욕망을 풀 방법도, 비밀을 공유할 상대도 없는 암담한 현실과 희망이나 낙관은커녕 절망만 남아있을 뿐인 미래는 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 관계는 잠시나마 이들을 희열에 들뜨게 만들지만 현실은 잔인한 코미디와 함께 이들을 파국으로 내몹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정욕(正欲), 즉 바른 욕망이라는 점은 지독한 아이러니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가? 바른 것은 누가 정한 것인가? 바르지 않은 것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과연 욕망에도 바른 것이 있고 바르지 않은 것이 있는가?

사람들은 이성과 도덕이라는 잣대 아래 대다수가 지향하는 성적 욕망을 바른 것이라고 규정해왔고, 거기에서 벗어난 모든 형태의 성적 욕망을 바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여전히 편견과 혐오의 시선이 남아있지만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LGBTQ의 욕망은 더 이상 바르지 않은 것으로 매도당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욕의 주인공들처럼 LGBTQ에게마저 미친 사람취급을 받는 자들의 욕망은 눈곱만큼의 여지도 허락받지 못한 채 음지 중의 음지에서 숨을 죽여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순수하고 본능적인 욕망이 바른 것이겠지만, 세상의 잣대는 가차 없이 바르지 않은 욕망으로 처단할 뿐입니다. 그 세상의 잣대는 누가 만든 것일까요? ‘정욕의 주인공들은 정말 바르지 않은 욕망의 소유자일까요? 그들의 욕망이 바른 욕망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오긴 올까요?

 

다양성이라는 말의 안이함에 돌을 던지는 작품.”, “이제 다양성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하겠다.”라는 독자들의 서평처럼 정욕은 감당하기 어렵고 곤혹스런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는 작품입니다. 누군가에겐 공감의 여운을 남길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피하고 싶은 불쾌감만 남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덕과 철학과 심리학에 걸친 난해한 고민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정욕의 해설을 맡고 정말 많이 후회했다. 이 이야기는 너무 벅차다.”로 시작되는 후반부의 해설100%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저 역시 특정 물건이나 신체부위에 집착하는 온갖 페티시즘을 비정상적인 것’, ‘변태혹은 불법적인 것으로 치부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혐오 어린 시선으로 보기만 했지 그들의 욕망 자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아성애, 속옷 절도, 온갖 종류의 도촬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 욕망은 철저하게 단죄해야겠지만, ‘정욕의 주인공들처럼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롯이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할 뿐인 자들을 그저 미친 사람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과거 LGBTQ바르지 않은 것으로 억압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정욕의 주인공들에게 조금이라도 공감한 독자라면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해설자의 평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질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하고 특이한 성적 취향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적잖은 충격과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과연 주인공들의 처지와 심리가 얼마나 잘 그려졌는지, 또 원작의 미덕이 얼마나 잘 반영됐는지 궁금해서라도 꼭 찾아보려고 합니다. 묵직한 돌덩어리처럼 남은 여운이 영화를 보고나면 더 무거워질지, 조금은 가벼워질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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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오만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5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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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이 장기가 적출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자 경시청 수사1과 이누카이 하야토는 과거 담당했던 살인마 잭의 모방범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파트너인 아스카가 소년의 신분(중국인 빈민)을 알아낸 것은 물론 연이어 극빈층 10대 소년들이 비슷한 형태로 살해당하자 이누카이는 조직적인 장기밀매 범죄임을 깨닫곤 수사에 박차를 가합니다.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해 수사본부가 무기력해질 무렵, 이누카이의 직감이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을 포착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오히려 이누카이를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누카이와 아스카는 그 사태를 실마리 삼아 사건의 진상에 한걸음 다가가게 됩니다.

 

카인의 오만은 시리즈 첫 편인 살인마 잭의 고백에 이어 장기이식 혹은 장기매매 관련 사건을 다룬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특히 카인의 오만은 장기이식과 장기매매 자체의 윤리적 문제라든가 사회적 시스템에 관한 논쟁은 물론 빈곤, 청소년, 복지 문제까지 아우르고 있어서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외양 외에도 한 편의 강렬한 성명서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희생자들이 모두 10대인데다 극빈층 출신이며, 누군가 돈과 인맥을 가진 자가 가난한 자의 장기를 노렸다는 정황이 확실해지자 이누카이와 아스카를 포함하여 수사진 모두가 격분합니다. 평소 10대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아스카가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을 앞세워 수사하는가 하면, 수사결과에만 집착할 뿐 시니컬한 태도를 견지하던 아소 반장마저 상부와 각을 세우며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다만, 만성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받으며 장기이식만 고대하고 있는 딸 사야카를 둔 이누카이로서는 이번 사건이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지만, ‘밀매를 통해서라도 사야카의 장기를 얻을 수 있다면...’이라는 사념 역시 머릿속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락사를 다룬 전작 닥터 데스의 유산에서 사야카가 투병 끝에 극도의 고통에 빠진다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던 형사이자 사야카의 아버지이누카이가 이번에는 장기밀매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카인의 오만은 반전의 쾌감에 관한 한 나카야마 시치리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수사는 거의 돌직구처럼 전개되고, 막판 반전의 강도와 충격은 조연급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 남는 여운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강렬합니다.

서평을 쓰기 직전에 머릿속에 든 생각은 “‘장기이식이 궁극의 치료법인 현실에서 과연 장기매매는 나쁜 건가?”라는, 법과 상식에 반하는 자문이었습니다. 그런 자문을 떠올리게 만든 건 장기를 판 빈자는 돈을 얻어 좋고, 장기를 얻은 부자는 건강을 되찾아 좋고, 이식 수술이 거듭될수록 의료진의 기술이 향상될 수 있으니 그야말로 모두가 좋은 게 아니냐?”는 한 인물의 주장인데, 처음엔 그저 헛소리 같았지만 생각할수록 일견 그럴듯한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법과 시스템은 장기이식 자체를 극도로 제한하고 있고,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급은 중증환자들로 하여금 제때 장기를 기증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사형수의 장기이식과 보상을 제도화한 중국이 오히려 선진적으로 느껴진 건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평점과는 무관하게) 장기이식 또는 장기매매에 관해 거침없이 문제를 제기한 카인의 오만은 존엄사 혹은 안락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닥터 데스의 유산과 함께 이 시리즈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입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어쩌면 형사이자 사야카의 아버지인 이누카이에게 너무나도 큰 혼란과 갈등과 고민을 안겨준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 라스푸틴의 정원에서 이누카이가 어떤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작품에선 이누카이가 사야카의 아버지로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앞선 두 작품보다는 조금은 덜 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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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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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1과의 이누카이 하야토와 다카치호 아스카 콤비는 인터넷을 통해 안락사를 의뢰받고 실행에 옮기는 이른바 닥터 데스를 쫓습니다. 안락사한 인물만 12명에 달하지만 그 누구도 닥터 데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이누카이와 아스카의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뭅니다. 세간에선 닥터 데스의 행위에 대해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닥터 데스를 옹호하지만, 반대편에선 그를 쾌락 살인마로 비난하며 안락사 자체를 거부하는 주장을 폅니다. 신부전으로 장기입원 중인 딸 사야카가 겪는 고통 때문에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품게 됩니다. 그래선지 이누카이는 수사1과 동료들과의 협업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수사에 몰두합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는 사회파 메디컬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의료 문제가 얽힌 지독한 사건들을 다뤄왔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살인마 잭의 고백은 장기 이식과 관련된 연쇄살인사건을, ‘하멜른의 유괴마는 자궁경부암 백신과 관련된 연쇄 유괴사건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카야마 시치리가 정면으로 도전한 건 안락사 문제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의뢰를 받아 비밀리에 안락사를 시행하는 닥터 데스를 쫓는 이야기인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적극 찬성’, ‘혼란 속 고민’, ‘적극 반대등 안락사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예민하고도 현실적인 주제를 미스터리 속에 잘 녹여 넣었습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주인공 이누카이의 딸 사야카가 신장이식 외에는 치료법이 없는 신부전으로 고통 받으며 장기입원 중이라는 설정입니다. 즉 다른 사건은 몰라도 의료와 관련된 사건들은 이누카이에게는 남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입니다. 특히 닥터 데스의 행위는 이누카이로 하여금 딸 사야카가 장기이식을 받지 못한 채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곤혹스런 자문을 연이어 던지게 만듭니다. 경찰로서의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를 처벌 받아야 할 살인범으로 여기지만, 아버지로서의 이누카이는 그의 행위에 일정 부분 동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닥터 데스에 의해 안락사한 인물들이 하나 같이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뒀고, 유족들이나 주변 인물들 역시 당사자가 더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가게 됐다며 안도와 위안을 느끼는데,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는 정말 단순한 쾌락살인자일까. 어쩌면 종말기 연명치료의 숨은 선구자는 아닐까?”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답게 나카야마 시치리는 안락사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들을 직격합니다. 눈앞에 닥친 초고령화의 문제라든가 안락사를 회피할 수밖에 없는 의료계의 현실, 죽을 권리를 빼앗긴 채 지독한 통증과 고액의 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종말기 환자들의 고통 등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과감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그래선지 닥터 데스의 유산은 팔색조 스타일의 변화구 같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작들과는 달리 오직 정면만 바라보고 날아가는 돌직구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막판의 큰 반전을 포함하여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재미라는 요소가 잘 살아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안락사 문제를 더는 회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르포 스타일의 미스터리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안락사에 관해 적극적인 찬성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닥터 데스가 실제로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습니다. 특히 닥터 데스의 안락사는 살 권리 못잖게 중요한 죽을 권리를 존중하는 행동으로 보였는데, 전쟁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중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를 단 한 발의 총알로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장면과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화려하고 속도감 넘치는 반전 미스터리와는 살짝 거리가 있지만 공론화와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한 안락사 논쟁을 다루고 있어서 몰입감이나 공감의 폭이 훨씬 더 깊고 넓었던 작품입니다. 안락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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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의 비극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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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하카마 시의 새 시장은 ‘I(출신지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 프로젝트’, 6년 전 유령 마을이 된 미노이시(蓑石)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지에서 이주자를 모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모집과 관리를 담당할 소생과(蘇生課)라는 전대미문의 부서를 만듭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던 공무원 만간지 구니카즈는 자신이 왜 이런 황당한 부서에 배치됐는지도 이해가 안 됐지만 칼퇴근에만 진심인 니시노 과장과 학생 티를 못 벗은 신입 간잔 유카까지 단 세 명이 미노이시를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2가구를 유치했지만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삐걱거립니다.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무사히 정착하기를 바랐던 이주민들이 한두 명씩 미노이시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은 더 이상 낯선 뉴스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간혹 한국과 일본의 지방 가운데 성공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회복된 곳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의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까요? 대처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할까요? 요네자와 호노부는 미노이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이 어려운 질문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미 6년 전에 소멸된 미노이시에 적잖은 예산을 투자하여 이주자를 정착시키겠다는 프로젝트는 언뜻 바람직하고 진취적인 정책처럼 보이지만, 엘리트 공무원 만간지의 눈에는 기적을 바라는 정치 쇼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이주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관리가 시작되자 본성 자체가 성실한 공무원인 그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후배 간잔과 함께 이주민들을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연이어 사건과 해프닝이 벌어지고,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자 크게 당황합니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하고 6편의 연작단편으로 구성돼있는데, 각 단편은 이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일상 미스터리를 그립니다. 물론 해결사는 만간지를 비롯한 소생과 직원들입니다. 하지만 각 사건의 해결이 해피엔딩, 행복한 미노이시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구한 입주민들을 떠나게 만들거나 소생과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연 ‘I턴 프로젝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현실성이 있는 계획인지, 이런 식으로 부활시킨 유령 마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주인공 만간지는 수시로 딜레마에 빠집니다. 불평을 하면서도 미노이시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바람직한 공무원만간지의 모습이 딜레마의 한쪽이라면, 나머지 한쪽은 개선될 여지가 없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합리주의자만간지의 모습입니다. 즉 구급차나 소방대가 도착하는 데만 40분이 걸리고, 한정된 예산 때문에 마을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 시스템 구축마저 어려운 상황은 만간지를 숱한 고민 속에 몰아넣습니다. 특히 도쿄에 사는 동생이 미노이시의 프로젝트를 깊은 늪이라고 비난했을 때 만간지의 고민은 극에 달하고 맙니다. (다 읽은 뒤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단어도 바로 이 깊은 늪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부터 제목이나 주제에 비해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일상 미스터리가 전개돼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만간지와 소생과 직원들 캐릭터도 어딘가 만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도 진지하게 새 거주지와 삶을 고민하는 모습보다는 왠지 뜨내기나 오타쿠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외의 설정들은 마지막 챕터인 종장에서 뜻밖의 반전과 함께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겁게 전개됐더라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을 이 작품의 주제가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가볍지만 선명한 이야기 덕분에 더욱 생생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관한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무심결에 어떻게 하면 저곳을 되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인데, ‘I의 비극은 그런 저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입니다. 정의감, 동정심, 이상주의 같은 감상적인 태도로 접근할 게 아니라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관점이 필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만간지의 고뇌와 갈등이 고스란히 공감되듯 느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미노이시는 과연 깊은 늪일까요? 아니면 재도전의 가치가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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