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복 같은 소리 - 투명한 노동자들의 노필터 일 이야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기획 / 동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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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동절에는 쉬었다. 쉬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쉬게 되어 정말 좋았다. 쓰고 보니 초등학생이 쓴 일기의 마지막 문장 같다. 쉬어서 좋았다는 문장이면 다 일 것 같다. 다른 이유가 무엇 있을까 싶다. 직장인 열 명 중에 세 명은 노동절에도 일을 한다는 통계를 알려주는 뉴스를 보았다. 쉬는 7인에 속하는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운이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일 년에 넉 달은 제외하고(왜 넉 달이냐면 중간/기말고사가 있는 달) 주말과 공휴일에는 쉬었다. 추석이나 설에도 쉴 수 있었다. 이건 운 좋은 일.


근로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당연히 4대보험도 들지 않았다. 2년 후에는 월급을 올려줄 거라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초과근무수당은 받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보면서도 임금 계산법을 몰라 그러려니 했다. 정말 바보같이 일했다. 이건 운 나쁜 일. 포악하게 굴지도 정색하지도 않기에 계속 다녔다. 나중에야 알았다. 법을 지키지 않는 이 모든 일이 포악하게 군 것이라는걸.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 바닥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44인이 지은 『일복 같은 소리』는 프리랜서, 무기계약직, 기간제, 촉탁직, 파트 타이머라고 불리는 이름만 다르게 불리는 비정규직인들의 현장 노동 기록을 담은 책이다. 알라딘 독자 북펀드에 참여한 계기는 책의 목차 때문이었다. 목차는 일하는 공간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가로수길, 가습기 공장, 고용센터' 등으로 말이다. 내가 일했던 곳도 있었고 일하진 않았지만 현장이 궁금한 곳도 있었다. 놀라운 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느 공간에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놀라운 일이 아닌 건가. 노동부가 운영하는 고용센터에도 비정규직이 있었다. 내일배움채움카드를 신청하고 일자리 상담을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상담사는 자꾸 교육 신청을 하지 말라는 쪽으로 유도했다. 왜 그랬는지 『일복 같은 소리』를 읽으니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차도 없고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지라 지금 일하는 곳에서 그만두면 나 역시도 비정규직의 세계로 들어가는 건 자명한 일이다. 최대한 집과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데 그런 곳은 거의 파트 직원을 뽑는다. 


평화시장의 전태일 열사는 분신하기 전 일기장에 자신에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근로기준법에는 한문이 많고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8시간 근무에는 한 시간의 휴게 시간이 법적으로 주어지고 휴일에 일을 시킬 시 초과 수당을 줘야 하며 노동자는 단체행동권, 교섭권, 의결권을 가질 수 있다는 법 조항을 공부를 많이 한 대학생 친구와 이야기하고 싶었던 전태일 열사의 소망이었다. 그 대학생 친구들은 이제 법을 알면서도 법에 이용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학을 나온 게 오히려 죄가 되는 세상이다. 


『일복 같은 소리』에는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 졸업 후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일단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 5일이라고 했지만 가게 스케줄 때문에 근무 시간은 불규칙하고 한 달짜리 근로계약서를 쓰며 초단기 계약으로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서 일을 한다. 언제 그만둬야 할지 몰라 불안하다. 일 년이 지나면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고 해서 자격증을 따며 근무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정규직 티오가 없다는 말이었다. 좌절의 언어가 『일복 같은 소리』에 산재해있다. 


나이가 들어도 일하고 싶다는 건 나이가 들어도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한탄이 깃든 소망의 말이다. 어른들은 말했다. 지 먹을 복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이 말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무수저들은 지 일할 복은 가지고 태어난다고로. 먹을 복 대신에 일복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에게 제대로 된 일복이 주어지기를. 다치지 않고 화장실을 자유롭게 가고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똑같이 커피를 타 먹을 수 있는 그나마의 정상의 일복을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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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가난의 시대 - 2020 문학나눔 선정도서
김지선 지음 / 언유주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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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이런 짓을 했다. 디저트 가게에 들어가 유리 진열장을 보면서 이것 빼고 다 주세요 하는 중국 부호들이나 한다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진열장에 들어 있는 디저트 하나를 빼고 전부 산 건 아니고 첫 번째 줄에 있는 디저트 한정이었다. 진열장이 컸냐 그건 아니고 가정용 광파 오븐 정도의 사이즈였다. 그날 왜 그랬을까 잠시 이성을 차리고 생각해 보았다. 연차를 냈고 나흘이나 쉬는 날의 시작일이었다. 들떠 있었다. 그렇게 구입한 디저트의 가격은 20,400원.


인터넷 게시물에 이런 글이 있어서 누워 있다가 격한 공감을 했다. '일 안 해도 재산이 늘어나면 부자, 일 안 해도 재산이 그대로면 중산층, 일 안 해서 재산이 줄어들면 서민, 일해도 재산이 줄어들면 빈곤층.' 바야흐로 고물가 시대, 절약방에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소비를 제재해 주는 시절에 계층을 이렇게 나누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서민. 아. 그래서 내가 혼자 사는구나. 중산층 정도는 되어야 결혼을 한다지 않는가. 


우아와 가난은 서로 어울리는 단어인가.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국어 교과서에 역설법의 새로운 예시로 실어도 될 정도로 '우아한 가난'은 시대적 사명을 띠고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의 언어이다. 김지선의 『우아한 가난의 시대』는 빈곤 속의 풍요를 이야기한다. 집은 사지 못하지만 브랜드 지갑은 살 수 있다. 미술품은 모을 수 없지만 책은 모을 수 있다. 티파니 귀걸이는 못 사지만 샤인 머스캣은 살 수 있다. 


가성비, 가심비를 따지며 대체재로 가난한 오늘을 위로하며 사는 우리들. 『우아한 가난의 시대』는 소비, 가난, 청춘, 미래라는 주제로 우리를 걱정하는 책이다. 작가의 경험담을 곁들여 가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행동을 분석한다. 증여, 상속이 아닌 이상 집을 가질 수 없는 청년들의 소비 패턴은 왜 그럴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를 고민한다. 


소확행을 하다가 소확횡을 한다. 내가 이것도 못 사겠어 혹은 이것도 못 먹겠어 폭발하면서 돈을 쓴다. 그러곤 후회한다. 잘 참다가 이번 달 예산 설정을 하고 여기까지 써야 생각했다가 충동적으로 외식을 하고 물건을 사들인다. 우아해지려다 가난해지는 슬픈 하루의 끝이다. 가난이라는 단어 앞에 긍정의 단어를 붙여서 지금의 가난을 위로하려는 시도이다. 그렇게밖에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가난은 그냥 가난인 것을. 가난은 우아해질 수 없고 그저 누군가는 이 가난을 훔쳐서라도 자신의 성공 서사에 한 줄을 보태고 싶어 하는데. 


물건 살 때 가격표를 보지 않는 것을 죽기 전까지 할 수 있을까. 햄 한 봉지를 사더라도 그램 수를 비교하느라 냉장 매대를 떠날 줄 모르는 뒷모습인데. 『우아한 가난의 시대』에는 나와 너를 합친 우리들의 서성이는 뒷모습이 있다. 책에 나온 주제 중 하나에 나도 답을 해보련다. '잊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자꾸만 잊게 되는 것'은 월급 받기 전 주의 나의 통장 잔고이다. 삼 주 차까지는 잘 참았다가 막판에 닦아 쓴다. 하나 더 엄마와의 기억. 


환승하면 되는데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엄마는 비가 와도 버스를 타고 오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걸어왔다. 돈을 쓰고 나면 죄책감과 우울해지는 이유다. 『우아한 가난의 시대』를 추천한다. 나의 비정상성은 그래도 괜찮다고 어루만져 준다. 가난의 시대에도 일상은 우아해야 함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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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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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가쿠타 미쓰요의 소설 『종이달』을 읽었다고 착각했을까. 티빙에 올라와 있던 김서형 주연의 드라마 《종이달》의 썸네일을 보면서 소설을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자꾸 생각했다. 내 블로그를 검색했다. 『종이달』이 아니라 『달의 영휴』였다. 제목에 달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소설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상황에 맞는 단어를 기억해 내지 못하고 한참 후에 떠오르는 일도 잦다. 


드라마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은 상태. 조급증 때문에 완결이 나지 않은 시리즈는 시작하지 못하니 소설을 먼저 읽어보자. 『종이달』은 우메자와 리카가 태국 치앙마이에 도착한 시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녀는 전업주부로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대를 나와 카드회사에서 근무를 했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은 그만두고 살림에 능숙한 아내로서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갖기 위해 혼자 노력 중이었다. 


리카의 남편 마사후미는 다정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다. 어느 날부터 리카에게 돈으로 위화감이 드는 말을 툭툭 던진다. 리카는 묘하게 기분 나쁨을 느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 자신은 돈을 벌지 않으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게 당연한 건가, 익숙해져야 하는 건가 의문이 들 뿐이다. 집 안에 가라앉은 공기처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은행에 시간제 사원으로 취업한다. 


그때부터 리카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종이달』은 은행의 공금횡령 사건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 고객의 돈을 편취하고 사라지는 여성 행원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어떤 내막이 있었는지 소설은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보여준다. 41세의 리카는 고객의 집에서 만난 12살 연하의 남자 고타와 연애를 시작한다. 부유한 할아버지 집에 인감도장을 훔치러 온 고타. 회식이 끝나고 우연히 둘은 재회를 한다. 고타의 "처음 만났을 때, 좋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라는 말에 리카는 마음이 흔들린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으로 현재의 행복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종이달』은 현대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돈에 대한 어두운 강박을 보여준다. 돈을 아끼는 것으로 돈에 대한 걱정을 잊고자 하는 유코, 쇼핑 중독으로 이혼 당한 아키, 과거 부유한 시절을 잊지 못하고 현재를 비관하는 마키코 등 『종이달』에서는 돈 때문에 자신의 삶이 불행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녀들이 마지막에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돌아가자. 만족감, 만능감을 돈으로 얻기 위해 분주한 현재를 버리고 풍족하진 않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과거로. 리카와 아키는 쇼핑으로 돈을 많이 쓰고 온 날에는 죄책감을 느낀다. 가격표를 보지 않고 옷을 마구 샀으면서 자신이 먹을 음식값에는 예민하게 군다. 평범한 주부였던 리카였다. 돈을 썼을 뿐인데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에 리카는 돈이 필요해진다. 돈으로 자존감을 높이려 한 시도는 파국으로 끝이 난다. 


결말을 알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기로 한다. 가짜 달이어도 좋다. 그 아래에서 꿈을 꿀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한다. 돈이란 이 정도면 됐다는 안심을 주지 못하기에 오늘을 불행하게 만든다. 『종이달』은 내가 가지지 못한 돈에 환상을 갖는 대신 내가 벌어서 가진 돈에 안도하라고 말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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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 베이비
김의경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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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러 갈 때마다 마주하는 풍경이 있다.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아이들이 서 있는 곳으로 노란 버스가 들어온다. 선생님이 내리고 서로 배꼽 인사를 한다. 손을 흔들어 주고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언덕을 내려간다. 간혹 버스를 놓칠세라 아이를 안고 뛰는 부모도 있다. 이건 옆으로 보는 풍경이다.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아이는 칭얼칭얼. 엄마는 달래느라 바쁘다. 이건 앞에서 보는 풍경. 


저출산·고령화 시대. 합계 출산율이 1명이 안 되는 시대. 2075년에는 인구 소멸의 길로 들어설 거라는 암담한 예측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 물가는 오르고 돈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다는 걸 누구도 믿지 않는 시절을 살고 있다. 이런 곳에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하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김의경의 소설 『헬로 베이비』는 그럼에도 아이를 낳고 싶다는 간절함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소한 아이가 하고 싶은 건 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능력이 되지 않으므로 아이가 있는 누군가들의 아침 풍경을 보기만 한다. 『헬로 베이비』는 난임병원에 다니는 문정, 정효, 혜경, 소라, 지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연 임신이 되지 않아 시험관 시술을 선택한 그녀들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열망으로 친밀해진다. 직업도 사는 곳도 다른 그녀들은 서로의 절박함을 알기에 단톡방에서 근황을 주고받고 모임을 갖기도 한다. 


소설은 난임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시험과 시술, 인공 수정 등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헬로 베이비』만 읽어도 병원에서 난임치료를 위한 시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난임 치료는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노력과 고통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문정은 병원에서 만난 그녀들을 모아 헬로 베이비라는 단톡방을 만든다. 정보를 주고받고 위로를 나누는 곳, 헬로 베이비에 가장 오랫동안 난임병원에 다닌 정효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올라온다. 


모두 정효를 축하해 주러 가기 위해 모이면서 소설은 반전을 선사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주체는 누구인가. 결혼이라는 제도 없이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2075년 이후에도 한국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을 수는 있다. 낳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이후가 문제다. 제도는 뒷받침되지 않았고 편견 없는 시선은 부족하다. 


멍하니 듣는 아이 키우는 이야기. 듣다 보면 마음이 아파진다. 분명 힘이 들 거라는 예감이 있었을 텐데도 나를 낳아준 한 사람이 떠올라서. 낳아줘서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왜 낳았냐고 화를 냈던 그때의 나를 참아준 그 사람에게 미안해서. 어쩌다 한 번은 기쁜 순간이 있는 날들이다. 간헐적인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여기는. 그런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는 혹은 나온 베이비들 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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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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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복 입고 학교 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그때가 그립지 않냐고 물어 온다면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한 편 생각은 해볼 것이다.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어떤 순간은 그립다고. 빈 방에 누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던 시간들. 가방에 만화책을 넣고 집으로 가던 저녁.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듣던 새벽. 주로 혼자 있던 풍경 속으로 한 번쯤 가서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나에게. 괜찮아, 버텨봐. 학교 밖의 시간들에서는 자유로웠다. 


이꽃님의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 박서은과 지주연을 둘러싼 소문과 사건의 실체를 밝혀 나간다. 박서은이 쓰레기 소각장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서은이 죽기 전날 주연과 함께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이어진다. 주연이 서은을 죽였을 거라는 이야기가 퍼져 나간다. 서은의 곁에 주연의 지문이 찍힌 벽돌 조각이 나왔기 때문이다. 


서은과 주연의 주변인들의 인터뷰로 소설은 채워진다. 주연은 그날 서은과 쓰레기 소각장에 함께 있었던 것 까지는 기억한다. 이후의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주연은 혼란에 빠진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서은을 죽였다고 한다. 모든 정황이 서은을 죽인 용의자로 자신을 가리킨다. 과연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죽이고 싶은 아이』는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때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건 관계 맺음이었다. 다들 단짝 친구가 있었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옆자리에 앉을 누군가가 있었다. 내밀한 사연을 주고받아도 소문으로 이어지지 않을 친구가 있었다. 친구를 사귀고 유지하는 일이 버거웠다. 서은과 주연은 친구가 되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친구였다. 서은이 죽고 주변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그들 관계의 불온함이 드러난다. 


친구가 되어도 서열은 나뉜다. 그들 안으로 들어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었던 나로서는 친구 맺기는 포기해야 했다. 『죽이고 싶은 아이』의 주인공 서은은 엄마와 둘이 산다. 엄마는 고깃집에서 일한다. 친구 주연은 그런 서은에게 자신이 쓰지 않는 물건들을 준다. 서은은 주연에게 받기만 하는 자신이 싫어 편의점에서 일을 한다. 돈이 좀 생기면 자신도 주연에게 무언갈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소 과격한 제목의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를 읽고 나면 제목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죽이고 싶은 아이는 누구였을까. 주연에게 내일이란 있을 것인가. 진심이 닿지 못한 관계는 파국으로 끝난다.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아이들에게 보내는 슬픈 내용증명 같은 소설 『죽이고 싶은 아이』. 이곳이 끝이 아니야. 서늘한 예언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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