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짧은 이 시를 보는 순간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에 지친 화자가 이제는 그만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삶이란 어차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좋으나 싫으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래서 아주 작은 공간이나마 내(화자)가 쉴 수 있는 곳을 그리는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우리에게 이란 단어는 어떤 이미지인가? 고립이나 소외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마음 편히 쉬는 곳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도 분명히 있다. 모든 게 복잡다단한 현시대에 이르러 이 휴양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주도라든가 그리스의 섬들이라든가 발리 섬 등이 휴양지나 신혼 여행지로써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충분히 납득될 것이다.

 

그렇기에 복잡다단할 일이 없는 예전에는 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유배지로나 쓰였을 뿐이다.

 

한편,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상략) 시인이 꿈꾸는 섬은 먼 바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감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꿈이다. 현종은 무척 외로울 때 이 시를 썼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 섬에 가는 길은 우정이나 연대(連帶)에서 찾을 수 있다. 동시에 홀로 있더라도 시를 읽거나 춤과 음악·그림에 몰입하는 영혼의 항해를 통해 이르는 섬이기도 하다. 그 섬에서 사람은 삶의 진짜 알맹이를 실감할 수 있다.(하략)”-박해현/기자, 조선일보 '문학산책'-

 

내 감상이나 해석과 다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이 옳다는 주장을 하지 않겠다. 현대시의 맛은 난해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평이하게 해석되거나 정답 같은 감상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란 시에서의 을 절대자나 잃은 조국으로만 보다가, 근래 들어 실제 연인으로서의 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순실 국정농단일로 온국민이 패닉에 빠진 것 같은 요즈음, 이 시가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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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關)’이란 한자어가 있다.

 사전에서는 이 글자의 뜻을 여럿 제시한다. ㉠관계하다 ㉡닫다 ㉢끄다 ㉣가두다 ㉤감금하다 ㉥주다, 받다 ㉦관문(關門) ㉧세관(稅關) ㉨기관(機關) ㉩빗장 등등. 그런데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제시된 ‘㉩빗장’이란 뜻이 모체일 듯싶다. 어떤 사물의 형상을 곧바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門’의 가운데로 무엇이 끼어 있는 꼴, 즉‘문을 가로지르는 빗장’이다.

 '빗장 관(關)'.

  이렇듯 뜻(훈)을 정리하고 봤을 때‘대관령’이란 글자가 아주 선명하게 이해가 되질 않던가. 영서지방에서, 험준한 태백산맥 너머 영동지방에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 대관령. 그 때의 대관령은 높이 솟은, 빗장 걸린 문에 다름 아니다. 우리 한반도에서 이 정도로 거대한, 빗장이 걸린 문이 어디 또 있을까.

 

  한자는 본래 우리 동이족이 창안했지만 중국의 문자처럼 되었다. 중국 땅에 '관'자가 붙는 지명이 있다. 그들이 천하제일이라고 자랑하는 만리장성. 그 동쪽 끝에 있는 ‘산해관(山海關)’과 서쪽 끝의 ‘가곡관(嘉浴關)’이란 지명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 옛날 나라 밖의 오랑캐들을 막는다면서 만리장성을 쌓되,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빗장 걸린 문’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지금은 물론 외국의 관광객들을 유치하여 외화를 버는 명소로 쓰인다.  

 

‘대관령’이란 명칭의 유래를 정식으로 조사해 보았다.

“대관령이라 처음 부른 것은 16세기경인데, 12세기 고려 시인 김극기는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이처럼, 큰 고개를 뜻하는 대(大)자를 붙이고 험한 요새 관문이라는 뜻을 담았다. '크다' 의미를 사용한 것은 고개의 상징성이며, 관(關)이라 함은 중요한 경계적 요새로서 영의 동서를 가르는 출입구를 말한 것이다.(중략) 풍수가들은 대관령을 '자물쇠 형국'이라 하는데 이것은 관문으로서 대관령을 넘나드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말한다.”

  위의 내용에서도, 비록 풍수가들이 한 말이긴 하지만 대관령을 자물쇠 형국으로 보았다고 했다. 내가 빗장으로 본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표현이다.

 ​그런데, 영동고속도로가 확장되면서 대관령이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차량들이 높은 대관령을 넘어가기는커녕 그 밑의 터널로 해서 일사천리로 다니게 된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토목공사 기술은 세계적이라 한다. 그런 대단한 기술로 드높은 대관령 고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의 대관령도 산해관이나 가곡관처럼 관광 명소로나 남을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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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어느 날 '강 건너 등불’이란 노래를 처음 들었다.

라디오로 듣던 그 순간 나는 반했다.‘그렇게도 다정하던 그 때 그 사람----’이라며 시작되던 정훈희의 촉촉한 목소리. 강 건너에 있는 어떤 사람을 그리며 노래 부르는 소녀의 애절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는 이 노래에 빠져들었다. 그 즈음 정훈희는 톱 가수였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들마다 힛트되었다. 이 노래도 물론 힛트되었는데 웬일인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정훈희의 다른 노래가 뜨면서 이 노래가 가라앉았는지, 아니면 다른 가수의 노래가 뜨면서 이 노래가 가라앉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유행가의 속성은 묘해서 어떤 노래가 '뜨면' 다른 노래들은 일제히 가라앉는다. 동시에 두 노래가 '떠서' 유지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노래의 제목부터 나는 좋아하는데 특히 그 절묘한 운율의 짜임에 놀랄 뿐이다. 

'강 건너 등불'이란 다섯 글자가 빚는 운율의 조화부터 살펴본다. 운율은 같거나 비슷한 소리의 반복에서 생겨난다는 상식에서 살폈다. ‘강 건-’에서 ㄱ 소리가 반복되는 것에서 운율이 시작된다. ‘건너’에서는 ㄴ 소리가 반복된다. 곧 ㄱ 과 ㄴ이 반복되며 이어진다. 이런 배치는 사실 우리 입에 배어 있다. ‘가나다라---’에서‘가나’로 이어지는 순서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듯싶다. 우리 입에 익숙한 운율로 시작되니 장단점을 낳는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데에서 오는 편안함이 장점이라면, 맥 빠지는 느낌의 상투성이 단점이다. 이 때 단점 되는 부분을 메워주는 게‘등불’이다. 등불은 된소리로 발음이 돼‘등뿔’이다. ㄷ에서 시작되어 ㅇ의 밀치는 힘에 의해서 'ㅂ'이 'ㅃ'이 되는 것이다. 결국 '강 건너’에서 상투성을 띄면서 맥빠질 수 있는 음의 기운을 ‘등뿔’에서 떠받쳐 올리면서 마감지었다. 이렇듯 절묘한 운율적 구조라서‘강 건너 등불’이라는 제목이 우리 입에 오르는 순간 물흐르듯 하는 게 아닐까.  

 

이 노래의 노랫말을 지은 분이 그렇듯 치밀한 계획 아래 제목을 정했을 것 같지는 않다. 쉽게 제목을 정했을 거라 보는데 그 근거는 이렇다. 우선 ‘강 건너--’란 표현은 우리 입에 익은 표현이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란 명시의 한 구절에도 보인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에서 '강'과 '건너'가 '나루'란 디딤돔을 두고 편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입에 익은 '강 건너'에 이어 ‘등불’을 덧붙임으로써 노래 제목이 완성되었으리라. 

 

더 깊게 분석해 본다.‘강 건너 등불’에서 사용되는 글자의 끝소리들이 대부분 울림소리라는 사실이다. ‘강’에서 ㅇ, ‘건’에서 ㄴ, ‘등’에서 ㅇ, ‘불’에서 ㄹ . 이렇게 네 개의 끝소리가 울림소리여서 혀를 굴리는 매끄러운  소리로 일관된다. '-너'는 가운데소리로 끝나지만 'ㅓ'라는 모음은 기본 속성상 울림소리라는 것을 안다면 결국 '강 건너 등불'이란 제목은 울림소리로 끝을 일관하는 특징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입에 익은 노래의 후렴들이 그렇지 않은가? '룰룰루'라든가 '라라라' 등. 민요의 후렴도 그렇다. '아리랑’의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이 그 예이다. 대표적인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후렴구 또한‘얄리얄리얄랑셩얄라리얄라 ’이 아닌가.  

 

제목에 사용되는 소재의 이미지 구성 또한 곱새겨 볼만하다. ‘강’이라는 흐름의 것과‘등불’이라는 고정된 것의 대비가 매우 좋다. 흐르는 것 너머에 있는, 빛을 내며 고정되어 있는 것의 대비이다. 상징적인 의미를 찾는다면 ‘흐르는 세월 속의 인간 삶’이라 할까. ‘강’이라는 큰 자연물과 작은 인공물 ‘등불’과의 규모적 대비를 맛봐도 좋다. 캄캄한 밤의 강물과 빛을 내는 등불이 함께 하는 명암적 대비도 그 맛이 만만치 않다. 

 

이런저런 대비적 관계들 속의 '등불'은, 결코 꿋꿋하게 자리잡고서 강물을 비쳐주는 느낌의 것이 아니다. 쉼 없이 흐르는 강 가에서 깜빡이는 약한 등불이다.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정처 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

우연한 기회에 가수 정훈희씨를 라이브 현장에서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마치 동네 미장원에서 보는 아주머니처럼 깔깔 대며 농담만 잘했다. 그러다 이 노래를 부르려할 때는 자세를 가다듬고 '그렇게도 다정하던----' 하며 아득한 밤 강 건너 등불을 바라보는 애절한 소녀로 변신하던 것이다. 과연 명 가수였다.

   그녀는 노래를 마친 뒤 이런 얘기를 했다. "소녀 시절에 이 노래를 불렀을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불렀지만, 지금은 이 노래가 가진 가사의 뜻을 음미하며 깊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이 노래를 언제나 잊지 못해 앵콜하는 팬들이 많아서 놀라곤 합니다."하였다.  

  나도 그런 팬에 속할 듯싶다. 나는 요즈음의 가수들에 질려버렸다. 특히 '화장들 요란하게 하고 나와 기계체조인지 춤인지를 추며 노래 부르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 가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귀에도 안 들어오고 가슴에도 와닿지 않는다. 그럴 때 나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정훈희씨의 '강 건너 등불'을 감상한다. '그렇게도 다정했던' 하며 시작되는 순간 나는 어두운 밤 강 건너 흔들리는 등불 하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옆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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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12-19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훈희씨의 과거 모습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강건너 등불‘ 곡 해석 읽어보고 들으니 더 좋아요 ^^*
감사합니다
 

 

오늘 부부는, 이랑을 낸 밭에 비닐을 다 깔았다. 이 과정을 생략했다가는 벌떼같이 자라나는 잡초들 탓에 옥수수가 싹을 틔우기도 어려워진다. 800평 밭에 멀칭 작업을 하다가 날이 금세 어둑해졌다. 부부는 밭 한 쪽에 놓은, 5평 되는 컨테이너 농막에서 옷들을 서둘러 갈아입고 차를 타고 밭을 떠났다. 밭에서 차도(車道)까지는 자갈 많은 하천 길을 십 분쯤 나와야 한다. 차도에 다 와서 아내가 말했다.

휴대폰을 농막에 두고 나왔어. 이걸 어째!”

남편의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푸짐하게 퍼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퇴직한 늙은 남편이 그런 만용을 저지를 수는 없다.

, 다시 농막으로 돌아가면 되지.”

하고는 좁은 하천 길에서 차를 간신히 돌렸다. 다시 농막에 갔을 때만 해도, 멀리 산 아래 동네 풍경이 그런 대로 보였다. 그런데 아내가 농막 안에 들어가 제 때 휴대폰을 못 찾으면서 동네 풍경이 하나도 안 보이는 밤이 금세 된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빨리 찾아.”

조금만 기다려요. 조금만.”

도시 근교에 있는 산속 밭이 순식간에 깜깜한 세상이 될 줄은 몰랐다. 몇 년 전만 해도 멧돼지가 출몰했다니…… 깜깜한 숲 어디서 그 멧돼지가 불시에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겁이 나서 자기도 농막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다. 남자 체면이 있지 않은가.

한 십 분 걸려, 아내가 휴대폰을 찾아들고 농막에서 나왔다.

글쎄, 한복바지 주머니에 있더라고요.”

한복바지란, 부부가 농사지을 때 편히 입으려고 산 개량한복바지를 말한다.

그런데 멀리 산 아래 동네의 불빛은 보이지만 부부가 있는 산속에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었다. 부부는 칠흑 같은 밤에 낙오돼 있었다. 남편이 차의 시동을 켜고 전조등을 밝히자 그제야 깜깜한 어둠 속에 불빛뭉치가 한 가닥 등장했다. 그래도, 도대체 차를 몰고 나갈 농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만했다. 하찮은 농로이지만 날이 훤할 때나 보이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일대가 깜깜한 어둠에 휩싸이자 그 농로는, 밭은 물론 근처 숲과도 구분되지 않았다. 아내가 뇌까렸다.

이거 어떡해?”

이럴 때일수록 남자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뭘 어떡해? 내가 아주 천천히 차를 몰고 갈 거니까, 당신이 앞에서 농로를 안내하면 되지 않겠어?”

아내가 차에서 내려 남편의 말대로 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농로가 바르게 된 길이 아니라 구불구불하기 때문이다. 결국 차의 앞바퀴가 농로에서 벗어나 숲에 빠졌다. 남편이 후진 기어를 넣고 애를 써도 차는 꿈쩍도 않았다.

어떡하지?”

“119를 불러. 그런데 여기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하천 길로 들어오는 거라서 그 사람들이 찾아올지 걱정이네.”

여보. 휴대폰 밧데리가 다 나갔나 봐.”

남편이 본색을 드러냈다.

에이 ㅅㅍ. 칠칠맞지 못하긴.”

어떡해야 해?”

부부는 깜깜한 어둠속에 망연하게 서 있다가, 자칫했다가는 조난사(遭難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체면불구하고 산 아래 동네 쪽을 향해 목청껏 외치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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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시 폐지가 확정되었다. 사실 그 놈의 사시 때문에 이 땅의 멀쩡한 청춘들이 얼마나 많이 상처받고 폐인이 되었나? 범죄의 여왕이란 영화는 그런 폐인이 급기야는 살인을 저지르면서 삶의 나락에 떨어짐을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자식 앞에서는 죽음도 무릅쓰는 이 땅의 어머니 상을 구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403강하준(허정도)’이 보여주는 사시 제도의 폐해’, 그 무게감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느꼈다.

    

허정도는 특별한 생김의 배우는 아니었다. 극히 평범한 인물이어서 만일 골목길에서 마주쳤다 해도 배우 허정도임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표정 연기는 일품이었다. 나는 무표정이 표정 연기 이상의 감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사시 공부 하는 늙은 청년의 절망을 허정도처럼 잘 보여주는 배우가 어디 있을까! 초점을 잃은 듯 상대를 보던 그의 무표정 연기는 겨울바람 부는 허허벌판의 허수아비 그 이상이었다.

범죄의 여왕은 비교적 잘 만든 영화이다. 모든 배우들이 저마다 맡은 역에 최선을 다한 결과라 여겨지는데 나는 특히 403호 강하준 역의 허정도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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