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을 보다가 채널을 돌리던 도중, 어느 채널에서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를 하고 있는 거다. 시작한 지도 몇 분 안된 것 같다. 로잔나 아퀘트가 메가폰을 잡은 다큐로, 헐리우드 스타 여배우들의 뒤안길을 얘기하는 내용. 봐야지 하고 동그라미를 쳐놓고 못봤었는데, 이런 게 바로 케이블을 설치한 보람이다.
영화의 주제는 여러 가지였지만 내가 가장 공감한 대목은 아이 문제였다. 어제 애 때문에 일을 그만둘까 고민하는 페이퍼를 읽었었는데, 헐리우드의 스타 여배우들이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름을 모르겠는 한 배우는 ‘만델라’를 다룬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는다. 대니 글로버, 모건 프리먼도 나온다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까? 문제는 돌봐야 할 애가 있다는 것. 남편의 말이다. “만델라가 필요한 건 알겠어. 그래도 당신이 꼭 가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남편과 달리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일하는 여성은 일을 해야 해... 애는 괜찮아. 네가 문제지.”
남편이 반대한 이유는 뭘까? 영화로 인한 출연료보다는 자신이 애를 돌보는 게 귀찮아서가 아니었을까.
맥 라이언은 그래서 애가 학교에 다닌 후부터는 1년에 한편씩만 찍자고 결심, 8년째 그렇게 해오고 있단다. 그런다고 마음이 편할까? 내가 모르겠는 배우의 말이다.
“아이 때문에 거절한 영화가 흥행을 하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아쉽긴 하죠. 아마 20년 후에는 후회를 하겠지요. 제가 그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던 걸.”
애보다 영화를 선택했던 우피 골드버그는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행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해요? 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역시 멋지다, 우피 여사. 그 말 말고도 여사는 적나라한 말들로 날 즐겁게 해줬다.
보모에게 애를 맡겼던 제인 폰다, 그녀는 집에 가서도 애한테 전념 못한 게 후회된단다. 집에서도 영화 관련 일을 하느라 바빴다나.
“정신은 두고 몸만 집에 갔던 거죠.”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남자들도 분명 아버지일 텐데 그들은 왜 이런 걸로 고민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어느 배우는 말한다. 사는 건 줄다리기라고.
“애와 있을 때는 일에 소홀한 것 같고. 일을 할 땐 애들에게 소홀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고.
얼핏 생각하기엔 이해가 안간다. 영화 한편에 수백만, 못해도 수십만을 버는 배우를 아내로 뒀다면, 자기 일을 줄이면서 애를 돌보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겠는가? “애 키우고 돌아왔더니 도무지 들어오는 일이 없더라.”고 푸념하는 어느 여배우와 달리 남자들은 얼마든지 취업이 될텐데 말이다. 근데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맥 라이언은 일년에 3개월만 영화를 찍고-그것도 LA에서만-다른 배우는 애 때문에 캐스팅 제의를 거절한다. <일 잘하는 아내, 밥 잘하는 남편>라는 책을 보면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능력있는 아내 얘기가 나오는데, 결론은 그녀가 집안일을 전혀 안하는 남편의 성화에 못이겨 회사일을 줄이고 비정규직이 되는 거였다. 아내가 수입이 적으면 “그까짓 일 하느라 집안일을 안하냐?”, 수입이 많으면 “일을 줄이고 집안일에 더 신경을 쓰라”니 정말이지 희한한 논리다.
물론 모든 남편이 그러는 건 아니다. “세상이 달라져서 여성도 죄책감 없이 일할 수 있다.”고 말하는 홀리 헌터, 그녀가 그럴 수 있는 건 이래서다.
“남편은 제 일에 공감하고 지지해 줘요.”
그런 남편이 빙산의 일각, 아니 그보다 훨씬 적은 미미한 비율인 걸 감안하면 홀리 헌터의 말은 좀 철이 없어 보인다.
누드를 찍고는 헤퍼 보일까 걱정한다는 얘기를 들을 땐 얼마 전 17번째 개인전을 연 강리나 생각이 났고, 40대가 되면 은퇴 압력을 받는다는 고백에선 이곳과 그곳이 똑같구나 싶기도 했다. 재미있다기보다는 공감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다큐였는데, 스포일러를 한 가지 말한다. 이 영화에는 데브라 윙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