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책이라는데 이론을 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배울 점이 있으며 인생을 살아가는지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여 늘 베스트셀러는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표면적인 그 이상의 무엇을 나타내는 지표와도 같은 것이다. 바로 우리 사회를 비추는 자화상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만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늘 있기 마련이니까...


우연한 기회에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을 읽게되었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생각해오던 과학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의미를 실제로는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든 책이다. 흔히 과학적 사고를 우리들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과학자들만이 사고하고 고뇌하는 그런 부류의 것으로 취급해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을 읽으며 이러한 개인적인 편견을 떨 쳐낼 수가 있었다.


우리들은 첨단과학에 바탕을 둔 기계문명과 늘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첨단 기계문명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기계적 매커니즘의 작동원리를 잘 아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것이 바로 과학과 사용자들 간의 괴리감을 형성해온 인자이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주는 메인아이디어는 대중들에게 과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자각토록 권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생물과 무생물간의 유기적 관계를 인정하고 인간의 본질을 위한 과학에로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있다. 다수의 과학적 소양은 과학의 올바른 지향점을 일궈내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서구의 과학적 사상이 과거 철저한 이성주의적 서양철학이라는 바탕위에 이루어진 결과물들 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고 볼 때,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는 서구인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 즉 유기론적, 통합적 사고의 지향점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리라 생각한다. 늘 그래왔듯이 미래의 과학적 방향은 현대인들의 사고에 달려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구의 최 첨단에 서있는 사람들이 피력하고 있는 유기론적 사유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과거의 서구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사유의 방식이다.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했더라도 지극히 국부적이었으며 이처럼 한 분야의 리더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적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상대방이 있으므로 나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상호 유기론적 사유의 방식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깊은 관련성을 가진 존재들이므로 그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스스로에게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내 것을 내 놓아야 하는 순간들에 직면한다. 서구인들의 이러한 사유의 변화는 그동안의 서구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은 다르게 만든다.

  

 

 

최근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라는 책이 연일 베스트셀러의 상위항목에 랭크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타자로부터 내가 얻어내고 싶은 그 무엇을 어떻게하면 잘 얻어낼 수 있는가가 핵심인 듯 하다. 책의 소개에서는 기존의 방법과는 차원이 다른 강의 내용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말한 인용문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협상이란 ‘상대의 감정이 어떤지 헤아리고 기분을 맞춰가면서 호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뒤 점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서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헤아리는 방법을 잘 소개하고 있을 것이다. 점진적인 접근법은 상대방에게 방어기제를 작동시킬 기회를 빼앗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그가 원하는 바를 내어주게 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윈윈이라는 기본적 이념이 깔려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도 그에 해당하는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는 표면적으로 매우 유익해 보이는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중국의 제나라 재상이었던 '관중'도 얻으려면 먼저 주라고 말 하기는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잠시 깜박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를 위해서인가’ 라는 문제이다. 그 무엇을 원하되 과연 그것을 누구를 위해 원하는 가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 목적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타자도 그 범주에 포함되어 있는가라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수많은 자기 개발서들이 가지는 전제는 자기 스스로를 목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흔히 자기개발서들의 특징이랄 수 있다. 대한민국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그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데,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자기 개발서들이다. 그 궁극적인 목적에 타자는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자기 개발의 중요성을 깍아내리는데 이 글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개발의 중요성을 그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자기 개발서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읽히는 책들은 그 중심에 오직 자신 밖에는 없다. 이러한 현상이 최근 들어 더욱 정도가 심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독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부동산 투자법, 주식 투자법, 그리고 경매투자법 등이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말이 좋아 투자이지 이는 사실상 법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지만, 법이 허용한 도박이나 다름이 없는 행위이다. 누군가가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겨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 반대 급부의 누군가는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의 옥상으로 올라가는 이도 분명 발생하는 것이 이치이다. 이러한 슬픈 현실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요즘 뉴스거리도 아닌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주식의 기본 개념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발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주식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를 무시해도 유분수라고 말이다. 그러나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위험성이 뒤따르는 새로운 투자를 삼가하고 인력을 줄여 그 차익을 주주들에게 나누어주는 현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인력이 필요하면 계약직 근로자를 쓰면 되는 세상이라는 것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주식의 긍정정 효과를 기대하는 시대는 이미 물건너 간 세상이다. 오직 합법적 투기의 대상일 뿐이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자기 개발은 목표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대부분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내고 투자의 호기를 이용하여 금전적인 이익을 취하는데 지향점을 가진 서적들이 자기 개발이라는 포장을 하고 세상에 나온다. 이익의 추구를 외면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력은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수단이 되고, 경제력의 바탕이 되지 않는 행복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임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라는 책에서 배운 좋은 교훈은 인간은 환경이라는 유기적 공생관계를 떠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분명한 인식은 사고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북극성의 역할을 한다. 북극성은 길을 잃은 항해사들이 의지하던 빛나는 별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 만을 모두가 지향할 때 모두는 방향성을 잃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손해를 보는 일도 알면서 행해야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왜냐면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그 어떤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누어 줄 수 있는 문화도 그만큼 필요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그러나 특히 부의 균형이 무너져가고 있는 시대적 현상을 외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사회가 빈곤하다거나 부유하다면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없다. 2500년 전에 이미 공자는 대동사회를 역설하면서 부의 분배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는 공자의 대동사회를 조금 더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발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사회가 가지는 문제점을 공자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겠다. 오죽했으면 제러미 벤담의 적통이랄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도 2500년 전 소국과민을 주장했던 노자와 같은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을 택했을까...그가 결코 바보라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순수했으며 인류를 향해 우환의식을 가지고 모두를 위한 자신의 생각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훌륭한 사람이었다.


과학의 첨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오로지 이성만으로 연구에 몰입 할 것 같은 현대의 과학자들조차도 통섭과 유기적 사고를 바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기존의 과학적 사고로는 함께 어우러져 살기가 어렵다는 전언이 아니던가...그러한 시점에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기술과 방법이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미래를 위해 지향해야 할 가치관으로 자리 잡는다면 자녀들의 미래는 더욱 어둡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얻기만 바라는 세계에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장 지글러의 저서인 빼앗긴 대지의 꿈은 얻기만을 바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임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권의 책 이라 하겠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얻기만을 바라는 것이 그 어떤 참혹함을 연출해 내는지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뜻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겠다. 자신의 것을 내 놓음으로서 사회는 더욱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하여 간혹 기부문화의 정착을 호소하는 분들이 계시다. 안타까운 이웃을 어떻게 보살피는지...학비가 모자라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의 처지를 보살피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를 주장하셨다고 해서 소유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법정스님은 스님이셨기에 사실상 사유재산이 필요치 않은 분이셨다. 다만 오직 얻으려만 하는 사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말하려는 것이고, 법정스님의 높은 정신을 우리 사회가 좀더 가질 필요가 있다고 느낄 뿐이다. 우리는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자가 원하는 것을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회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적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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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2-03-2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글에서 참 다양한 책을 소개하시네요. ^^
장 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은 벌써부터 읽어야겠다 맘만 먹고 계속 잊고 있었는데,
이 글에서 만나니 뜨끔하군요!

저는 베스트셀러 집계 같은거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서점에 나가보면 참 책이 많은데,
어떤 책은 수백권씩 쌓아놓고 팔고 있고,
어떤 책은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검색해보면 아예 재고가 없다고 나옵니다.
저마다 나름의 가치를 담고 있을 책이
출간되자마자 판매순위라는 잣대에 따라 운명이 완전히 엇갈리게 되지요.
베스트에 한번도 올라본 적이 없지만 가치있는 책들이 많겠지요.
그런 책을 찾아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차트랑 2012-03-22 15:13   좋아요 0 | URL
어구, 감은빛님께서 와주셨군요

책에도 사주가 있는 것인지 원..^^
베스트는 베스트인데 진짜 베스트가 아닌 책들이 베스트 노릇을
하고 있을 때 그게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장지글러의 저서들은 읽어도 좋은 책들이라 생각합니다.
감은빛님께서 좋은 책을 소개해주시면
독자들께 많은 도움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낭만인생 2012-03-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답게 베스트셀러에서 생존의 문제까지 논리적으로 잘 끌고 오셨네요. 글을 읽으면서 저도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부터 두 아들의 이름으로 해외 고아들을 지원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무소유는 곧 모두가 소요하는 공유가 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소유권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는 것 말입니다. 몇해 전에 읽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이 떠오르네요. 상생의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012-03-24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3-2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 엉뚱한 댓글을 달게 될거 같습니다...
최근 나온 책 중에 중국이 세계를 지배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책이 있더군요...
그런데, 중국은 그렇게 유기론적이고 세계를 전체로 바라보는 좋은 이념을 발전시켰는데
현재 세계에서 하는 행동을 본다면 어이없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과거에도 그랬죠....

저는 사실, 지배를 받아야한다면 중국보다는 미국이 낫다고 아주
현실적이고도고 공격받을만한 결론을 내리는 중이랍니다... 엉뚱한 댓글 죄송합니다.
요즘 뉴스를 볼 때마다 제 머리에서 헤매는 생각이거든요... 이긍.

차트랑 2012-03-2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말씀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요

지적해주신 중국도 그러하고
일본의 경우도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각 가정에서나 사회적으로 가르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어디 앞 뒤가 맞는 말이던가요..
과거 우리나라에는 물론 동아시아에 그 얼마나
많은 폐를 끼쳤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요 ㅠ.ㅠ

제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한들
행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도루묵입지요.

마녀 고양이님께서 중국에 대해 지적해주신 바
틀린 것 하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과학자처럼 사고하기 -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 37인이 생각하는 마음, 생명 그리고 우주
에두아르도 푼셋 & 린 마굴리스 엮음, 김선희 옮김, 최재천 감수 / 이루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과학의 지향점은 어느 곳인가?

        -독자들에게 과학적 소양을 기대하고 있는 과학자들-


우리는 과학자들을 일반적인 생활과 거리감이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나 하는 것 혹은 우리는 과학을 잘 알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과학’이라는 용어는 기술적 접근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 본질을 다루는 성질의 괴리감을 가진 용어이다.


그러나 이 책이 피력하고자하는 것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곳에 등장하는 모든 과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놓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과학적 성과를 알리고 싶어서 인터뷰에 응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이들을 과학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싶어서이다. 과학과 생활 영역이라는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에게 과학적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과학적 소양'을 기대하는 그들의 진실된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결코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과학자들이 소망하는 바는 사유의 과학이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우리는 과학을, 과학의 사유를 오로지 과학자들에게만 맡겨왔던것 같다. 과학이 전문가들의 과학적 기술만을 필요로 하는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분야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배타성을 지닌 과학적 기술이 아니라 과학적 사유이다. 사회가 올바른 과학적 소양을 지니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물이 가지는 진실들을 우리는 현대에 목도하고 있질 않은가...


 과학자처럼 사고하기’는 현대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타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연구결과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과학자 당사자들이 과학적인 사고라는 매체를 통하여 인류를 위해 과학적인 소양이 무엇인가를 또한 보여주려 한다. 비록 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이는 정치, 경제, 교육, 윤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를 움직여가는 모든 것들의 작동원리와 부합하게 마련이다. 왜냐면 진리는 어느 한 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영역을 불문하고 통섭의 기능을 하는 핵심의 한 축이 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과학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다수가 과학적 인식과 소양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가치평가는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소양을 갖춘 대중들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우리는 달걀을 낳을 수는 없지만 그 달걀이 상했는지는 판단 할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과학의 눈부신 편리함에 인류가 도취되다-과거 과학의 목적


과거 과학의 지향점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었는지는 현대의 과학적 진실들을 돌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그동안 수많은 문제점들을 일으키게된 배경에는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이라는 철학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즉, 과학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벗어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거 과학이 자라온 환경은 인류에게 큰 기여를 한 바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못지않게 큰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허점들은 인류에게, 지구에 부정적 영형력을 행사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서구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실용적 기술로 전이되었고, 인류의 역사, 사회, 경제 및 교육등 모든 분야의 작동원리가 되어왔다. 우리는 이것을 ‘발전’이라 명명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 발전이 거듭될수록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인간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져오면서 과학적 소양의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어쩌면 인류는 과학이 끈임 없이 제공해온 그 눈부신 ‘편리함’에 취해왔던 것은 아닌가... 인간은 어쩌면 정치력, 권력, 경제력, 곧 타자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데 그 가치를 부여했고 과학 기술은 그들의 시종노릇을 해왔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바탕으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랄 수 있다.



과학적 사유의 중요성

 

모든 것의 판단에 앞서 가치 평가의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과학과 그 기술에 대한 평가 역시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난 200 여 년 간의 과학기술이 걸어온 발자취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그 당위성과 조건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과학적 소양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유의 방식이 중요하다 하겠다. 성과물이 지향하는 방향은 사유의 방향과 일치하게 마련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과학적 소양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는 것이다.


과거, 과학은 지식의 결정체라고 생각해왔다. 인류를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이익을 가져다 주리라고 믿어왔지만 그 믿음은 현재 옳았는가? 지구의 한편에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생명들 병들거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과학이 인류를 위해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첨단 무기인가, 첨단 기술인가. 철저한 빈부의 격차인가.

 이 뿐이 아니다. 앞으로 기대되는 과학의 성과물들이 인류의 미래와 어떤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자연을 단순히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유의 방향성은 이제 유기적인 자연관으로 선회해야 할 것이다.


노화의 연구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커크우드는 ‘인간의 삶에 생물학적 한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수명에 앞으로 비약적으로 늘어갈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말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눈먼 시계공’을 저술하여 우리들에게 익히 잘 알려진 도킨스와의 인터뷰를 만나면 과학적 사유의 중요성이 좀 더 분명해진다. 그에 따르면 아주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소수의 생명체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생명체들이 인류 발생 이전의 세계에 살기위해 적응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출현과 그 테크놀로지는 세계의 생명체계를 급격하고 변화시키고 있다. 이 급격한 변화는 늘 모든 생명에 위협이 되어왔다. 인간은 자연적인 급변못지 않은 변화를 지구에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구에에로는 우리의 조상이 박테리아였다고 단언한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해본적이 있던가...우리들에게 과학적 사유가 정말 중요한 이유들이다.


 

과학자처럼 사고하기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의 생각


매우 인상적인 등장 인물 중 하나이며 흔히 인류학자라고 명명하는 로버트 새폴스키는 신경학, 신경과학, 생물과학등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과학자이다. 푼셋의 새폴스키와의 인터뷰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극히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이해하는 통로’라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인권과 물권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구달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달은 일생에 걸쳐 침팬지를 연구한 인물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과학자이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의 과학적 사유를 하고 있지만 인류를 위한 공통된 견해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폴스키는 ‘톡소플라즈마’가 쥐에게 작동시키는 원리를 인간은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이 왜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구달은 ‘ 연구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비로 인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권과 인권의 동시에 인정하는 구달은 인간을 동물계에서 분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동물은 우리의 일부로 여길 때 인간의 과학적 사유는 기존의 그것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새폴스키와 구달이 설명하는 도구는 비록 서로 다르지만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동물행동학과 영장류동물학을 연구 해온 조르디 사바테르 파이는 연구를 통해 동물들이 자의식과 문화를 가진 존재임을 증명했다. 그는 일차적으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라져야 함을, 자연주의자로서 인간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



그토록 깊은 과학적 연구를 해온 세계적인 명사들이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는 것일까?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는 목차에 수록된 과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고무적이다 못해 서양사상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기에 충분한 근거자료가 된다. 비교동물학자 윌슨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들은 진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에만 적응해 온 것이 아니라 공생을 통해 서로에게 적응하여 진화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서구의 사상적 흐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인간의 부정적인 활동은 그들이 적응해온 자연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새로운 종의 멸종에 일조하는 방식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타당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코자 하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과학의 미래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겠다. 어느 종의 멸종은 어쩌면 인류의 멸종과 무관하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형성해온 서구 사상은 종래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띄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관의 변화라고도 볼 수 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생존하기 위해서 상호 에너지의 흐름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중요한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서구의 과학계에서 불어오는 철학적 흐름의 변화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철학교수 대니얼 데넷이 지적한대로 인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는 존재인데, 이는 인간이 자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뜻한다고 한다. 과거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 혹은 소양을 가지지 못한 댓가를 우리는 충분히 목도해왔다. 이제 진정한 자의식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미래를 위한 우리의 설계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전정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신경학자 이나스가 말한 대로 이를 위해 과거 인간은 두뇌를 필요로 했다. 하여 인간은 올바른 미래의 예측과 설계를 위해 뇌를 지속적으로 진화시켜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바르게 설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마인드를 가진 두뇌에 의존해야 하는가.


과거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과학, 수학, 예술, 철학이라는 분야가 따로이 정립된 경계를 가지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 혹자는 이를 미개한 형태의 학문 간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거 서양에서는, 수학자가 곧 음악가요, 건축가가 곧 예술가였다. 동양의 고전에서도 수학 및 천문학이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미개한 형태로서의 학문이 아니라 오히려 최근 강조하고 있는 통섭의 학문적 소양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브레너는 이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그는 물리학자들의 문제는 화학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학문을 다양한 분야로 쪼개어 나누어 공부하고 연구하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분야 이외의 것에는 무지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지극한 전문성을 띄고 있으므로 그 효율성에서는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를 예방하는 듯 보인다. 즉, 집중력을 향상 시킨 연구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 영역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원활인 흐름을 막아 혈관을 결국 파열시켜 그 기능을 마비시키는 의학적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문제점을 브레너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가진 것이 현대의 학문이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면서도 바로 옆 라인에 사는 사람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학문의 형태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학문이 가져오는 역기능은 좁게는 그 사회,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 공동체에 의학적 마비상태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소통의 부재가 불러오는 폐단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과학적 소양을 다르게 분류하는 것도 이제는 조심성있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철학적 사고가 과학과 예술의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듯이 인문학적 과학적 소양이 미래에 끼칠 영향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다수의 과학자들이 사실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주연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 독자들이다. 우리들에게 과학자들은 인류 미래를 위해 지구와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면 우리야말로 지구를 살아가는 주인공이자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와의 사고에서 한 발 앞으로 더 나아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유기론적 자연관이 가져올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일은 바로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에서 나올 것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분자 생물학을 정립한 브레너의 말을 인용하며 끝을 맺고자 한다. ‘생명이 가지는 무생명과의 유기적 상관관계를 무시하지 말라.’  브레너는 과학에서 비롯한 절대적 진리를 이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적 사유를 재장전 할 때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를 망쳐서는 안된다. 무생물과 생물의 진화체계는 서로 교합한다. 지구는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우리는 그런 이곳을 파괴할 것인가? 우리의 원천을 파괴할 것인가” 라는 닐슨의 강도 높은 일갈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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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이라면 경끼부터 하고 보는 분야라...ㅠ

차트랑 2012-03-19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ㅠ.ㅠ

마녀고양이 2012-03-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기론적 자연관이라는 말씀에 절대 공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단편으로 보고 있고, 현대 사회로 나아갈수록 점점 파편화되고 있기에 그것을 제대로 통합하는 자가 미래를 예측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일거라고 생각이 드네요. 하기사 워낙 깊게 들어가니, 전문성과 다른 분야의 화합이 그리 쉽지는 않을거 같아요.

봄인데, 너무 춥네요. 좀 있다 나가야하는데, 오늘은 두껍게 입어야지 싶습니다. ^^

차트랑 2012-03-20 17:37   좋아요 0 | URL
"통합하는 자가 미래를..."
이 말씀 상당히 공명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전문성 = 밥그릇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그러므로 서로 이전투구인지라 수월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니 전문성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지요.

이기론적 자연관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될 듯도 싶구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몽유도원 세트 - 전2권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반값 행사에서 건진 소설...아..소설은 정말 잘 안읽는데 이 책은 어쩔수가 없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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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참 애매합니다.ㅋㅋㅋ
김진명이 호불호가 확실하죠.
근데 저는 그닥 내꽈는 아니라고 생각해 일찌감치 접어둔 작가라죠.ㅋ

하늘바람 2012-03-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날 것같은데요. 잘 건지셨네요

차트랑 2012-03-19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아시다시피 저는 소설이라는 분야 자체에 완전 꽝이랍니다 ㅠ.ㅠ
반값이라서 한 번 사본거죠 ㅋ

하늘바람님, 생각대로 좀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찿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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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의 사상가 이윤기선생

 

 

이제 고인이 되신 이윤기선생께는 늘 특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생을 통한 저술과 번역의 범주가 매우 확실한 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카테고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련의 번역들과 저술들은 독자들에게 자신만의 아우라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이윤기선생의 저서를 처음 접한 것은 뮈토스라는 책이었다. ‘시뷜레가 말하였다’로 시작하는 뮈토스는 그 시뷜레(아폴론의 연인이자 예언자)라는 어감이 주는 묘한 느낌 때문인지 아직도 인상이 깊이 남아 있다. 그 뮈토스에 이어 ‘변신이야기’는 당시 서점가를 강타했던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대출 순위가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저술활동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 던 중 이윤기 선생께서는 타계하셨다. 그의 역서들과 저서들을 살펴보면서 이윤기라는 인물이 ‘출판계의 사상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그는 분명 출판계의 사상가이다.

 

 

출판계의 사상가, 이윤기, 2개의 카테고리와 그 카르텔


 이윤기 선생의 역서를 대표하는 책들 중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는 독서력이 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든다. 그것을 역자도 알 고 있었던지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를 따로이 출간했다. 아마도 이 역서들은 이윤기 선생을 악명 높은(?) 저술가 혹은 번역가로 재탄생시킨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가 갑자기 그런 악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 전작들인 뮈토스나 변신이야기는 그 신호탄이나 다름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저서들은 역서와 저술이라는 범주의 일관성을 줄곧 지켜온 인물이다.

 

그러 던 중 좀 특이한 현상처럼 보이는 것은 이윤기 선생께서 ‘양들의 침묵’을 번역했다는 점이다. ‘플루타코스 영웅전’이나 199년 7월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인간과 상징’이라면 이윤기선생의 작품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길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양들의 침묵’은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해서 외도를 하지 말하는 법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기 선생의 작품세계에 뛰어든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윤기선생의 전체적 작품 활동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면 분명 이는 떨쳐버리기 쉽지 않은 의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양들의 침묵’, ‘신화의 힘’, 그리고 ‘신화와 인생’을  읽어보게되면 이윤기선생은 '양들의 침묵'과 '신화의 힘'은 선택했으나 '신화와 인생'은 왜 번역의 대상으로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신화와 인생은 신화의 연구와 저서에 매우 널리 알려진 조셉 캠벨의 작품이기는 하나 내용에 포함된 신화성이 매우 미약하고 인생이라는 포인트에 더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기선생의 저술서들이나 역서들은 분명히 특정 궤적을 만들어 왔다. 하여 ‘뮈토스’, ‘그리스로마 신화’, ‘플루타코스 영웅전’, ‘트로이아 전쟁과 목마’, ‘인간과 상징’,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샤마니즘’, ‘신화의 역사’, ‘헤라클레스’, ‘일리아스 오뒤쎄이아’ 등은 그의 주된 카테고리를 형성해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번역과 저술활동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출판계의 현상은 아니다.


 큰 맥락에서는 그러하지만 좀 더 가까이 살펴본다면 자전적인 에세이인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을 필두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헤밍웨이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 도나타트의 ‘비밀의 계절’등으로 볼 때는 또 다른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윤기선생의 작품들은 이렇게 뚜렷한 특징들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이윤기선생 만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신화와 영웅의 사건들을 보다 현대적이며 인간적 입장에서 해석을 시도한 하나의 카테고리와 심리적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를 가미하면서 초현실주의과 리얼리즘을 서로 관통하는 작품들로의 접근을 시도한 또 다른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윤기선생이 출간한 서적들의 범주를 지금과 같이 파악하고 나면, 그 두 개의 카테고리는 이윤기를 ‘독서계의 사상가’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윤기, 즉 ‘출판계의 사상가’라는 카르텔은 두 개의 카테고리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며 내면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고대의 신화를 지극히 현대적인 해석과 인류의 정신, 심리적 내면세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신화를 벗어났지만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특정 개인의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한 접근을 시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들의 침묵은 이러한 일련의 내재적 연속성의 일환으로 출간된 작품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 (빛나는 판도라의 해석)


최근 알라딘에서는 50% off 행사를 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이윤기선생의 그리스로마신화 전 5권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아주 다양한 작가들을 통해서 세상에 아주 잘 알려진 테마이다. 그런데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여타의 저술이나 역서들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차이점은 신화에 대한 이윤기선생의 해석 방식이다. 이윤기선생의 해석을 읽다보면 이것은 이윤기선생의 능력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야말로 참신하다 못해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윤기는 어떻게 신화에 대한 해석에서 그러한 독창성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독창성이 빛을 발하는 하나의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만날 수 있다.

 

 

이윤기의 견해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한 대목은 판도라를 해석하는 방식을 한 예로 꼽을 수가 있다. 이윤기는 판도라가 인간에게 화를 불러왔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한다. 이윤기의 견해에 따르면, 판도라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제우스인데, 사실은 프로메테우스에게 잘 보여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이윤기의 이 해석에 매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놀라운 것은,  제우스의 수많은 자식 들 중에서 어느 누가 제우스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가는 오직 선각자인 프로메테우스 만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중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헤르메스를 수 차례 보내어 그 비밀을 알려주면 죄를 사하겠노라고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하지만 그는 그 절대 회유에 넘어가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스토리이고, 다음은 이윤기만의 독특한 해석이다.)


 이에 똥줄이 타들어 가는 이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바로 제우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을 무지무지 사랑하는 프로메테우스를 회유하는 방법으로 여자를 만들어 인간에게 선물함으로서 제우스도 인간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프로메테우스에게 살짝 아부를 떨며 그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판도라를 생각해낸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본다면 판도라를 결국에는 프로메테우스의 아우가 차지하기는 했지만, 제우스가 판도라를 만들게 된 동기로 보건데 결코 악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여타의 올림포스 신들에게 한 가지씩 선물을 상자 안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게 되고,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선물을 넣게 되는 것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이 선물의 상자를 안겨주며 '절대로 당대에는 열어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게 되고, 갖가지 신들이 준 선물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얼른 뚜껑을 닫았을 때는 이미 갖가지 좋은 선물들 증발해 버린 뒤였고, 오직 '희망'만이 남게 되었다는 해설이다. 만약에 판도라가 당대에 열지만 않았더라만 그의 후세들은 무병장수는 물론, 미의 여신이 준 아름다움과 곡물의 여신이 준 농경법 등 이롭기로는 아주 이로운 선물들을 두루 누렸을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상자 안에 들어있던 온갖 나쁜 질병과 근심, 질투등이 빠져나와 인간세상에 퍼지게 되어 인간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보는 것이 이윤기의 설명이다. 그토록 나쁜 선물과 희망이라는 좋은 선물을 같이 버무려서 넣었다고는 이해하기보다는, 애초의 의도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점수를 따려는 의도였다는 점은 감안하면 이윤기의 이런 해석은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동안 미심쩍었던 부분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이런 행동에 마음이 움직여 그 비밀을 제우스에게 털어 놓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모로 보나 판도라는 결코 좋은 선물을 날려버린 것이지, 나쁜 선물을 증발시켜 버린 것이 아니다...

 

 

 

한국의 번역계에 주는 교훈


이윤기선생의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의 카르텔에 있지 않나 싶다. 범주를 다양하게 넘나드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윤기선생의 범주와 카르텔로보아 그 작품세계가 대단히 넓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이윤기선생의 고집과 일정 카르텔을 집중 연구하고 자신의 역작에 반영하기 위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카테고리와 카르텔을 형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도적으로 일정 범주를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제력은 그의 번역 실력으로 보건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연유로 이윤기선생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대한 일관성을 가진 사상가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애초에 뮈토스에서 느낀 바 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필체는 기타 동종의 책들과는 구별되도록 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 뮈토스에서 느낀 신화다움의 필체는 여전히 관련 역서 전반에 녹아있다. 뮈토스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윤기만의 독특한 필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축하고 있는 수준있는 역자의 모습은 우리의 번역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얼마전 어느 인물의 전기문의 역서를 두고 일말의 지적사항들이 발생했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역서의 문제점은 출판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부지불식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윤기선생의 고집스런 연구와 그에 걸맞는 카르텔의 형성은 말이 아닌 일생의 노고와 사상으로 남아있고 그 가르침은 오래도록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것이다. 

 

 

 이윤기선생의 저술 혹은 역서들이 특별하다고 느끼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일생을 거쳐 연구를 거듭하면서 그만의 카테고리를 형성하였고, 특히 이윤기 역의 벌핀치 신화가 벌핀치의 견해와 달리 생각하고 있는 이윤기만의 관점을 보여주는 대목들은 이러한 학구적 일관성의 소산임에 틀림이 없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윤기라는 인물이 일생을 두고 저술과 역장에 바친 그 자신만의 아우라는 부정할 수 없는 노고의 결정체이다. 이번에 알라딘에서 50% 할인가격으로 내놓은 그리스 로마신화는 이러한 이윤기의 생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역작이다. 저서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해당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도 다수 수록하고 있고, 더욱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이윤기의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이고 그의 카르텔이다.


그는 평생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이는 이윤기의 신화를 읽어도 좋은 이유들이다.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주는 그의 통찰력은 그렇게 빛이 난다. 그 누구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 이윤기의 글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각도의 해석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윤기의 산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여타의 신화와 이윤기의 신화의 차별하는 힘의 요인들이다. 나아가 이는 이윤기가 신화에 쏟아 부은 애정의 결실일 것이다. 같은 범주의 신화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정열을 기울인 작가도 없을 것이다. 애정이 없는 카르텔은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이윤기의 신화론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도 내가 이윤기의 또 다른 신화의 해석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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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사이 2012-03-1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소설가 겸 번역가가 이윤기 선생인데요. 이 선생이 번역가로서 나중에서야 비로소 빛을 보시게 되었지만, 초기 번역가로서 이윤기 선생의 번역은 그래도 문제가 좀 많습니다..ㅎㅎ 제가 읽었던 것들은 그렇더라구요. 그럼에도 이 선생을 흠모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멜빵 바지에 술자리 좌중을 압도하는 구라를 푸시던 선생이 조금 그립기도 하군요..

차트랑 2012-03-15 12:22   좋아요 0 | URL
좋아하시는 작가시라니 다행입니다^^
원래 글을 쓰시는 분들이 구라가 좀 있으십니다 ㅋ
돌아가시고 나니
저도 그립습니다 ㅠ.ㅠ
제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사이님

마녀고양이 2012-03-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라는게 따로 발간되었었군요...
정말이지 장미의이름과 푸코의추는 쉽게 접근한 독자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들죠. ^^

양들의침묵을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걸 몰랐는데,
지금 확인하니 토머스 해리스의 세작품 역자가 각각 다르네요... 음,
양들의침묵은 사실, 기타 스릴러나 추리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게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랍니다. ^^

좋은 글입니다,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네요.
차트랑공님, 즐거운 주말되셔요.

차트랑 2012-03-16 14:29   좋아요 0 | URL
그 당시 양들의 침묵을 보았다는 어느 학생이 와서
묻더군요.
'그런데 왜 양이 나오지 않는거죠??'
재밌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