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는 대체 누구인가? 

우리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내겐 무척이나 흥미로운 현상으로 여겨진 것인데, ‘소설가 구보씨’에 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가 구보씨가 등장하는 소설, 시 등 문학작품은 물론 구보씨의 소설 속 동선을 정리해 놓은 책이 나올 정도이고, 나아가서는 “좌절한 의식”을 대표하거나 ‘박태원’의 소설 속 시대인 일제강점기의 무력한 대중의 감성이나 시대상을 상징하는 기호가 되어 사용되기까지에 이르렀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의 기원이 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5년 발표)」이라는 박태원(1909~1986)의 단편소설은‘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매일이라는 것은 무수히 찍어낸 하루처럼 반복의 반복을 이루며, 무목적성의 하루를 사는 인물이다. 물론 소설의 주제는 다분히 시대의 불온성이나 불의의 사회가 지닌 한계성에 대한 탐험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히 시대를 달리하며 작가들이‘소설가 구보씨’를 반복하는 이유는 변혁되고 시정되어야 할 우리사회의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해결되지 못한 사회적 문제나, 구보씨로 대변되는 인물상이 오늘에도 동일하다는 착상만으로 이러한 현상이 빚어졌다고 단언하기에는 이상의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박태원의 소설 표제를 반복한 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현대문학에 있어서‘소설가 구보씨’만큼 많은 패러디와 오마주를 남긴 작품도 없으리라.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72년 발표)』처럼 제목이 완전히 동일한 오마주 작품에서부터, 주인석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나, 시인, 건축가, 사진작가에 이르는‘구보씨’는 그야말로 무수히 변형되어 재현되고 있을 정도이다. 구보씨와 문학작품과의 無言의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알 수 없는 힘으로 그네들의 작품으로 끌어댄다. 시대와 상황을 달리하는 이들 작품을 하나하나 접하는 시간은 흥미롭고 지적인 탐험이 될 것만 같다....  

아! 본론을 빠뜨렸다. 내가 이해한 구보씨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 말이다. 좀 현학적으로 말하면 ’동시대인’이라 해야 할까? 시대에 들러붙어 사는 인간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 부러진 등뼈의 틈새를 인식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어쩜 파편화된 오늘의 사회에 통증을 느끼는 우리들 모두의 표상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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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의 지성사회를 휘저었던 여성이다 보니‘조르주 상드(1804~1876)’를 따라다니는 지적이고 정신적인 여성이라는 후대의 평가를 위선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색적인 수식어와 호칭이 만만치 않다. 사회제도와 규범의 위에 군림한 여자, 위선을 거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혁명가로서의 여성을 향한 독설은 돈주앙에 비견되는 그녀의 남성편력 탓이긴 하지만 모욕적이기 조차 하다. ‘보들레르’는‘상드’를 향해 공중변소, 오물을 세척하는 배수구라고까지 모독하였다니 가히 전설적인 스캔들의 여왕소리도 점잖은 측에 속한다.

이러한 비난에도 무려 90여권의 소설을 출간하고 산문 및 서간집 등 250여 편에 이르는 저술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매혹적이고 지적인 그녀의 환심을 얻지 못한 비뚤어진 남성들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들이 상드에 대해서 욕 할 때 상드를 더욱더 명예롭게 한다고 느꼈다.”고 했다니 사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라 하여도 될 것이다.
상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초기 소설중 하나인『렐리아』란 자전적 작품을 접하면서 부터라 고 할 수 있는데, 작품 속 인물 중 하나인‘스테니아’라는 젊은 시인의 사랑과 좌절을 보면서 당대 낭만주의 시인‘뮈세’를 떠 올리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루 헤아리고 거명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상드의 연인은 수두룩하지만, 비록 1년 남짓의 짧은 시간일  망정 뮈세는 상드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도취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며, 행복입니다. 천국입니다. 아! 나는 맹세코 예술가의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나의 좌우명은 자유입니다.”라고 외칠 정도의 상드에게 6살 연하의 여위고 아름다운 금발의 물결치는 머리칼을 지닌 어린 시인은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열광적이며 야성적인 성격을 충족시키는 데 적절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뮈세는 실연 이후 여러 아름다운 밤의 시편과 상드와의 사랑의 고백서를 남겼는데, <세기아의 고백>이나  <추억>, <슬픔> 등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대체 상드의 어떠한 측면이 당대 예술과 지성계를 지배하던 남성들을 이토록 헤어나지 못하게 한 것인지 진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미덕과 고귀함은 없어도 사랑은 한다. 강하게, 전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사랑을 한다.”라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신조처럼 허위를 걷어내고 육체의 본능에 충실하며, 사회주의적이고 인도적인 그 분방한 나눔(?)의 정신 탓이었을까?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보면 인간사를 거의 초월한 신적인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녀가 발산하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광휘, 경외를 느끼게 하는 이상의 숭고함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더 옳은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남성이 있는데,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우수에 차고 때론 아름다운 전원의 햇살을 그리게 하는‘쇼팽’의 음악들이 상드의 사랑과 지원 속에서 창작되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상드의 이해와 열정을 느끼게 한다. <빗방물 전주곡>이란 것이 있는데, 연인인 상드가 외출했다가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낡은 마차로 건너다보니 늦게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를 모르는 쇼팽은 상드가 자신을 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연주한 창작이라 하니, 사랑이란 이 착란적 두뇌조작이 없었다면 인간사란 정말 아무 즐거움도 없는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전원 교향곡>, <야상곡>등 주옥같은 쇼팽의 연주곡들이 모두 상드의 치마폭에서 나왔으니, 과연 보들레르의 독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던 못난 남자의 갈망이란 역설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남자를 좋아하던 상드가 쇼팽의 예술을 위해 금욕적 생활까지 했다니 평범한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성임에는 분명했던 것 같다.
‘나는 사랑한다.’그리고 나의 좌우명은‘자유’라는 신조를 정말 생의 말년까지 지켜나간 그녀의 남성 편력이 사실 혀를 내두르게 하지만 말이다.

그녀의 작품은 대개 4부분의 시대로 분류되는 듯하다. 1832년~1838년까지 주로 사회적 편견이나 인습에 항의하고 자유로운 정열의 권리를 주장한 초기작품으로『발랑틴』,『앵디아나』,『렐리아』, 『앙드레』가 있으며, 1838년~1846년에 이르는 사회주의 소설로서『프랑스여행의 동료』,『오라스』, 『앙지보의 방앗간 주인』, 『앙투완씨의 죄』,『칠현금』등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44년~1853년의 시기에는 『잔』,『마의 늪』, 『사랑의 요정』, 『피리부는 사람들』과 같은 전원 소설을 주로 발표하였으며, 1853년 이후의 말년에는 자서전과 서간집, 『마지막 사랑』, 『타마리스』등 연애모험소설들을 쓰면서 초기의 작품세계로 회귀한 양상을 보인다. 아마 다음의 구절은 그녀를 대변하는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사랑의 찬가를 요구하기 전에 숭고한 영감이 고무시켜야 되는 민감한 리라와 같은 것이다.”(『렐리아』초판본에서 삭제된 문장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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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


작품 면면이 저항적이고 비딱함이 뚝뚝 묻어나는‘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라는 2010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몇 가지 주목되는 일화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왜 작품의 제재들이 그럴까하는 의문을 부분적으로 해소시켜줄 것 같다.

마리오의 인생 전반에 아마 결정적이고도 커다란 영향이 되었을 사건이라 할 수 있으리라. 고모 훌리아(Julia urqui di illanes)와의 결혼이다.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9살 유부녀와 19살 조카의 결혼은 페루 상류계층이었던 이들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버거운 사건임에 분명했다. 뛰어난 가문을 가진 미모의 여성인 고모와 미소년 마리오의 사랑은 그의 자전적 소설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에서와 같이 감각의 떨림, 밤의 신화가 아니었을까?

1955년 결혼하여 1964년 마리오의 배신으로 헤어지기까지 10년간 이어진 이들 부부생활을 엿보게 하는 몇 몇 사진을 보면 훌리아가 주도하는 그들의 관계를 추측케 하는데, 그녀가 1988년 출간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함께한 나의 인생』이란 자서전에서 마리오의 작가적 역량이 꽃을 피우게 하는 절대적 존재였음을 주장하는 것처럼 그녀의 헌신적인 지원은 그의 사회진출에 중대한 기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두 번째 아내인 파트리샤(patricia Llosa)의 출현이 이들을 갈라놓았으니 훌리아의 증오와 상처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어쨌건 이 결혼 생활은 『새엄마 찬양』이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라는 작품에서 변조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할 수 있는데, 결코 배신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여신으로서 숭배되었던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하나 마리오와 남미문학의 거두로 잘 알려진‘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erquez)’와 치고받은 사건은 폭소를 자아낸다. 마르케스와 요사는 부부가 함께 어울릴 정도로 친근한 사이였는데, 요사가 한동안 스웨덴 여성과 바람이 나자 요사의 아내인 파트리샤를 위로하던 마르케스부부에 적의를 갖게 되었고, 급기야 요사가 마르케스에 주먹을 날려 그의 눈에 시퍼런 멍과 상처를 남긴 사건은 1976년 남미사회를 시끌벅적하게 하였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었던 모양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의 여성에 대한 소유욕은 그야말로 그의 작품 속 작중 인물처럼 집요한 것 아니었을까? [사진: 멍든 마르케스]

이후 마르케스와 요사의 사이는 원수지간으로 변하였고, 2002년 마르케스가 자서전의 추천사를 요사에게 요청하면서 근 30년간의 오해를 풀었다고 하니, 이 에피소드는 거장들을 인간적 친근함으로 다가오게 한다. 성 모럴에서부터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주류의 정신에 예리한 반란과 저항의 성향이 그의 사생활과 오버랩되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매력적인 소년이 75세의 노작가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 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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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0-18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에요. 요즈음 제가 요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필리아님으로부터 얻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0   좋아요 0 | URL
훌리아의 자서전이 출간되면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감사합니다~~

릴케 현상 2010-10-19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정말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0-10-19 08:52   좋아요 0 | URL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마르케스의 미소짓는 얼굴이 재미있잖아요..ㅋㅋ,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1-05-25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를 읽다가
이 페이퍼를 읽게 되었어요. 정말 재미있는 에피소드네요.
특히 훌리아의 실물을 보게되다니요.
마르케스의 눈탱이 밤탱이도 ㅎㅎ
요사의 다른 책들도 더더 읽고 싶게 만들어요.
 

인간사회의 모순은 시대의 현상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형태를 띠지만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상충하는 속박과 억압의 고통은 변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인간을 절망하게 한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의 편향성과 양극화의 해소 등등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되어야 할 부정적 모습은 이젠 생태계 복원과 보전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가 출산해내는 병폐까지 더해져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인지 인류의 지성들은 시대가 안고 있는 인간사회와 삶의 태생적 문제에 대한 본원적 현상을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 사회를 설계하고 전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왔다. 이처럼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하고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장소,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ou + topos)’, 즉 인간의 세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Utopia)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꿈은 실패한 낙원, 암울한 현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상적 사회를 꿈꾸지만 오히려 그 추구는 반(反)유토피아,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낳기도 하고, 경계와 비판의 사회로서 실로 다양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케케묵은 갈등으로 그 균열이 날로 커져만 가는 듯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고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실현키 위한 사색의 시간으로서‘대안사회’에 대한 지성사의 뼈대를 성찰하는 것은 아마 유익하고 또 유익할 것이다. 

 

*[참조]반(反)유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나 <1984>는 ’예브게니 자마찐’의 작품<우리들>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자유가 없는 행복이냐, 아니면 행복 없는 자유냐”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하는 디스토피아 작품의 최고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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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프랑스 작가‘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첫 발표한 작품 『그로 칼랭(Gros-Calin)』을 접하자, 우연히도‘니콜라 파르그’의 작품에서 지적 아름다움의 비유로 인용된‘진 세버그(Jean Seberg)'를 발견하게 되었고, 한동안 미루어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다. 1962년 결혼한 로맹가리와 진세버그의 관계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로맹가리의 작품에서 진세버그의 영향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자살이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하는 것들...

             

1914년5월8일 러시아에서 출생한 로맹가리와 1938년11월13일 미국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무려 24년의 연령 차이를 둔 이들에 대한 궁금증은 두 사람의 명성만큼이나 적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인지는 정황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진세버그의 데뷔작인 <성 잔다르크>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슬픔이여 안녕』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세실’역으로 출연하면서, 당시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로맹가리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자의 배우자가 있던 두 사람으로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위해서 이혼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60년 6월 진세버그는 첫 번째 남편인‘프랑스와 모레이유’와 서둘러 이혼한다. 그러나 가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그의 외교적 업적을 가능케 했던 아내‘레슬리’와의 이혼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슬픔이여 안녕>이 상영된 1958년 이후부터 서로를 동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0년 프랑스‘장 뤽 고다르’감독의 발탁으로 일약 세계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 그녀의 출세작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1960년) 이미 프랑스의 유명작가이자 고위 외교관이었던 로맹 가리의 어떤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호감과 영향의 행사는 두 사람을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1961년 봄부터 이 두 사람은 동거에 돌입하고, 레슬리와의 이혼이 매듭지어지는 1962년10월16일 결혼식을 올린다.

진 세버그의 영화촬영이 있는 날이면 로맹가리가 항시 동행하여 격려하는 모습이 행복해보였다고 증언하는 것이나 1963년 이들의 아들인 디에고의 출생이 있었던 사실로 보면 두 사람은 성격이나 사상적으로 상당한 일체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눈부신 외모와 밤톨을 깍아놓은 듯한 단단하고 새침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극히 내성적이고 자신을 꾸미는데 인색하며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진세버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고통 받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이 민감한 프랑스 작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닐 수 없게 하였던 모양이다. 나긋하고 순종적이며 헌신적인 여인, 그래서인지 괴팍하기만 했던 가리의 성격이 다 변할 정도였다니 진세버그의 현명함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가 진 세버그의 영화 촬영장에 따라다녔다는 것은 그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촬영 장소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몇 개월 간의 체류에서 외교관 시절 딱 한 번 가본 경험이 있는 페루의 해변으로 이어진 것이다는 작가의 설명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들 부부에게는 그리 훌륭한 것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맹 가리는 이 작품으로 영화를 제작 감독하게 되는데, 아내인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면서 심한 균열이 발생한다. 환상적이고 적나라한 촬영을 요구하여 극한의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정신적 상처를 주기에 이르는데, 아마 이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되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고 미국에서 X등급 판정이 내려질 정도였으니 아내로서 진세버그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편, 진 세버그의 타인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사회활동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조명하는 것도 이후 그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은 실체를 추측케 하는 유용한 성찰이 된다.‘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가입해 인권운동을 하고, 흑인자경단‘블랙펜더(Black Panther)'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등 민권운동가로 활약하는데, 이는 미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 결국 당시 FBI국장‘존 에드거 후버’의 지휘 하에 매스컴을 동원한 입체공작을 통해 진 세버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1970년 그녀의 실명까지 공개하며 진세버그가 불법시위를 주동하고 마약에 빠져있으며, 흑인과격단체 중 한명과 추잡한 섹스를 하여 임신까지 하고 있다고 악질적이고 근거 없는 추문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잔인한 공격을 지속한다. 남편과의 정신적 갈등에 더해 정치적 음모로 한 여인을 무차별로 공격해대는 광적인 공작으로 진 세버그는 가리와의 사이에 잉태한 두 번째 자녀인 딸‘니나’를 조산하게 되고, 니나는 이틀 만에 사망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처럼 사악한 정치권력의 폭력은 한 여자의 삶을 완전히 몰락시켜 버리고, 급기야는 1979년 9월 8일 그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추측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것이다에서 FBI의 살해다라고 분분하지만 이 역시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도 남을 이야기다.

 

이에 분노한 로맹가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사회에 분노하며, 한 고귀한 생명에 대해 가해진 FBI의 끔찍한 공작이‘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발하기에 이른다. 로맹 가리는 1970년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겪던 진 세버그의 요청으로 이혼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대략 1년 후인 1980년 12월 1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로맹가리가 죽기 8개월 전에 작성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텍스트가 몰고 온 세상에의 파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라는 고백이다.
자살하면서 가리가 남긴 <결전의 날>이라고 쓴 한 쪽의 유언 또한 그야말로 의문투성이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 할 것이다 ; La Nuit sera calm』라는 내 자서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자신의 자살은 이혼한 아내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으니 부질없는 추측은 하지 말라는 얘기이며, 상심한 마음이나 신경쇠약의 문제는 아니라고 못 박는다.

다만 자살이란 죽음이 자신의 문학 작업을 완성하는 수단이며, 궁극에는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완성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 대단한 작가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위대한 작가와 은막의 대스타의 결합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기치 않은 탐색을 다하여 보았다. 대작가인‘F.스콧 피츠제럴드’와 혹독한 정신병으로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렀던 그의 아내‘젤다 세이어’가 오버랩 된다. 닮은꼴의 커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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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6-25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딱 궁금했던 스토리를 이렇게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진 할로우와 혼동하기도 했어요. 둘 다 은막의 스타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서도 공통의 교감을 보여주어서 신기합니다. 로맹 가리의 유서도 참 흥미롭네요. 아내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 지적하는 대목도^^;; 잘 읽고 갑니다.

필리아 2010-06-25 21:24   좋아요 0 | URL
로맹가리는 자기문학에 일종의 신성을 부여하려했던것 같습니다. 여기에 모두 기술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의 프랑스총영사까지 지냈던 사람이 장관 비서까지 하면서 자기작품의 PR에 열을 올리기도 했구요, 사실 에밀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그로칼랭을 발표하는 행위의 숨겨진 의도에는 추락한 자신의 이미지를 회피하기위한 방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세버그는 그야말로 천사였지요. 엄청난 지원자였던 첫번째 아내 레슬리를 떠나게 할 정도의 여자라면 아마 그 이상의 헌신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지거든요. 아무튼 이 두사람의 관계는 알수록 흥미로운 요소가 많습니다...

반딧불이 2010-06-27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끔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0-06-27 17: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맹가리의 작품을 읽을실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별헤는밤 2010-06-2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읽었었는데, 이렇게 또 마주치게 되네요.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

필리아 2010-06-28 12:45   좋아요 0 | URL
<그로 칼랭>이 당시 출간될때 배제되었던 부분까지 수록되어 결정판으로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고 있답니다...

비연 2010-06-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의 팬으로서, 잘 정리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내와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불행하게 마무리되어 슬픈.

필리아 2010-06-28 12:45   좋아요 0 | URL
진 세버그의 죽음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로맹가리가 과연 자신의 문학을 완성한다는 이유로 자살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구요...

레와 2010-07-0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자기 앞의 생]을 읽었어요.
이 작가에 대해 더욱 궁금해지는데, 남은 작품중에 어떤 책을 먼저 읽는게 좋을까요? ^^

실례가 안된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

필리아 2012-06-26 07:20   좋아요 0 | URL
읽으신 <자기앞의 생>은 <그로칼랭>,<가면의 생>,<솔로몬 왕의 고뇌>와 같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이구요, 그 밖의 작품들은 '로맹 가리'로 발표된 작품입니다.
특히 이들 작품은 '아자르 語'로 불릴만큼 선명하게 문체와 서술방식이 다르기때문에 이들을 우선 읽으신 후, 여타 작품을 읽게되시면 보다 폭넓은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제 私見이니만큼 절대성은 없사오니 레와님의 독서 취향에 따르시는 것이 오히려 답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