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는 자들의 밤
빅터 라발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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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원제인  'The Changeling(바꿔친 아이)'을 대신해  엿보는 자들의 밤이라 한글번역 제목을 한 것은 소설의 제재를 은폐하려는 편집자의 의지와 함께 수많은 익명자들의 엿보는 시선이 있는 오늘의 소셜 네트워크가 지닌 부패성의 부정적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 것 같다. 이 작품은 꽤나 다채로운 장르가 어우러진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동화와 아기 공양(供養)의 전설, 스마트폰과 컴퓨터 속 사진, 사생활의 고백이 넘쳐나는 소셜 네트워크가 야기하는 공포의 전율이 얽혀 이 세계의 음울한 정경을 풀어낸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세상은 외벌이로 한 가족의 삶이 지탱되지 않는 세계가 되어 아이의 양육은 하나의 사회적 중대 의제가 되었다. 이야기는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한 우간다를 떠나 자본주의 첨병인 도시 뉴욕으로 이주한 여성 릴리안으로 시작된다. 여인은 백인 남성 브라이언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아들 아폴로를 낳는다.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결혼 생활은 4년차에 이르렀을 때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브라이언으로 인해 모자에게 불가피한 결핍을 남긴다. 토요일 반나절의 시간은 누구에게도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던 릴리안은 네 살 박이 아이 아폴로를 집에 홀로 남겨두고 일을 하게 되고, 아이에게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자 릴리안은 이러한 상태를 지속한다.

 

어느 날 아이는 꿈속을 헤매듯 아버지가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나버렸다고 호소한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에 대한 고통,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집안에 가득했던 안개와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상자와 동화책, 그리곤 자신의 손을 놓고 같이 갈 수 없다며 자신을 두고 떠났다고 엄마에게 그 아픈 순간을 말한다. 이것은 성장한 아폴로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그가 결혼한 에마와의 사이에 낳은 아기 브라이언에 대한 사랑의 과잉의식으로 표출된다.

 

두 흑인이 꾸린 가정, 서적상(書籍商)으로서 불규칙한 아폴로의 수입은 에마의 도서관 사서 일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아폴로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출근하여 도서관 재고정리나 유품 정리 세일 장소를 찾아가 버리듯 내놓은 먼지 수북한 책 더미를 뒤지며 보석같은 책들을 건져내는 일을 지속한다. 그는 아이를 양육하는 아빠로서 자신의 기꺼운 행위에 기쁨을 느끼고, 장소가 바뀌거나 아기의 해맑은 미소를 볼 때마다 연속으로 사진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다. 이를 우연히 본 익명의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호응한다.

 

아폴로의 이 행위에는 수천 명의 이방인이 보내는 찬사가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애정을 보상해 줄 것처럼, 박수를 애걸하는 모습이 어렴풋 비친다. 이 궁핍한 행위가 어떠한 상황을 초래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폴로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아기를 연사(連寫)로 찍은 사진을 올린다. 소설에는 두 권의 책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유괴된 아기에 대한 어둡고 슬픈 이야기인 모리스 샌닥이 쓴 동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작품 속에서는 저 바깥에라는 원제로 번역됨)이고, 다른 하나는 피부색이 가져오는 오래된 편견의 불모성을 말하는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이다.

 

특히 저 바깥에는 반복적으로 아폴로의 의식을 지배하며, 플롯들을 연결하는 핵심적 소재로서 서사의 흐름을 횡단한다. 익명성의 세계, 그것은 다른 말로 엿보는 자들의 감시세계이기도 하다. 아폴로가 찍지 않은 그와 아기의 사진이 에마의 스마트폰에 전송되고, 바닥에 눕혀있는 전송된 아기의 사진은 에마를 불쾌하게 한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 온 아폴로에게 에마는 아기 브라이언을 바닥에 눕혀놓은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는 사진의 출처에 대한 의혹을 보내고, 그 메시지를 보자고 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다. 아폴로는 에마의 신경과민을 지적하며 아내의 말에 의심을 보낸다.

 


소설 도입부의 빠른 속도와 경쾌한 문장은 어둡고 호흡이 긴 문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불신은 긴장으로 고조되고, 이윽고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깜박 졸음에 빠진 사이에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깨어난 아폴로는 끔찍하게 변한 살풍경을 직면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 물체, 그리고 안와골이 부서지는 몽둥이의 타격으로 실신하고 만다. 아기는 죽었다, 그리고 에마는 사라졌다. 이 사건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소셜 네트워크에는 근거없는 이야기들로 들끓는다.

 

이런 일은 흑인 가정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흑인들은요, 그러니 악마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흑인들은 애초부터 나쁜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 부부라는 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는 이야기 등으로 각종 음모론과 함께 일면식도,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악의를 뿜어낸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유품으로 내놓은 어느 집 지하 창고의 케케묵은 상자에서 아폴로가 발견한 핍(트루먼 커포티)을 위한 사인 초판본의 발견과 더불어 이 흔한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끔찍함이 소설의 한 축임을 은밀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그리고 하퍼 리의 초판본은 또 하나의 주요 플롯 연결 소재로 작동하며 사건의 진행을 돕는 역할을 한다. 아무튼 작가 빅터 라발은 이렇게 재치있는 모티프의 활용으로 주제의식의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 독자를 안내한다.

 

자신의 끔찍한 사랑의 대상인 아기 브라이언의 죽음과 아내 에마의 돌연한 사라짐은 분노와 증오에 휩싸이게 한다. 주택 관리인의 발견과 어머니 릴리안의 도움으로 부서진 안와골을 맞춰 회복한 아폴로는 에마를 찾아 죽일 결심을 하게 한다. 도시의 골목길마다 설치된 CCTV, 인터넷 망으로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로 무작위하게 연결된 감시망은 에마의 흔적을 찾아내고 은거지로 추정되는 뉴욕 해안가에 흩어진 아홉 개 섬을 지목한다. 한 때 천연두 환자 치료시설로, 그리곤 2차 대전 후에는 참전용사들의 수용시설로 이용되었으나 폐쇄되고 버려져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 문명과 격리된 노스브러더 섬으로 아폴로를 이끈다. 악의가 도처로 연결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세계를 피해 여인들과 아이들만이 자신들의 세상을 구성하는 세계다.

 

상륙한 아폴로는 돌연 나타난 여전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대판 아마존의 리더인 칼을 통해 그녀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칼이 아폴로에게 들려주는 라푼젤 동화의 이야기는 환상에 현혹되어 황폐함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오늘의 세계를 가득채운 망상을 일깨운다. 인간세계를 장악한 오래된 마법, 그 주술에서 깨어나야 함을, 아마 아폴로는 이쯤에서 에마에 대한 증오와 자신들의 아기 브라이언의 죽음이 거짓된 환상이었음을,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조차 진실이 은폐된 무엇이었음을 인식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는 아폴로는 칼의 신뢰를 얻게되고 공동체의 어린 소녀 게일과 아이의 엄마로부터도 탈취자가 아닌 보호자로서 수용된다. 이야기는 여성 공동체의 이상향으로, 그리고 노르웨이 이주자들의 전설을 누비며 아이의 양육. 오늘의 세계에서 그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를 줄기차게 비유하고 설득한다.

 

어둠 속 거인, 아이들을 빼앗아 가고 아이를 대체하는 기만으로서의 대용물이 남겨지는 현대판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환유(換喩)는 인종과 성() 차별의 적절한 도구로 소설의 구성을 풍성하고 다의적 의미로 가득하게 해주는 듯하다. 소설은 마침내 환상적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어대는데, 아이를 공양으로 삼는 거인 트롤의 전설이 현실의 경계와 마주한다.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위험한 모험까지 감수하는 여인들, 아폴로의 어머니 릴리안, 아폴로의 아내이자 그들의 아이 브라이언을 지켜내려 한 에마의 고난의 현장을 마주하는 것이다. 소설은 여느 동화책처럼  그 후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사실 이 말이 동화 속 이야기의 이후 이야기들을 말 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부정성을 차단하는 의도이듯, 이 소설 또한 오늘의 세계에 경계(警戒), 그 위협의 요소들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현실에 있을 것이다.

 

기관사없는 기차를 모든 사람이 운전하는 꼴이 된 페이스 북의 페이지들, 이들은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에 글을 포스팅한다는 건 현관문을 열어놓고 아무나 우리 집에 들어오십사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라는 문장도 있다. 걸쇠 없는 창문이며 문 없는 집으로의 낯선 자들의 초대와 같은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SNS에 무심코 올리는 사진과 사생활의 기록들. 그리곤 아이의 양육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소비 경제사회가 부추기는 이기적 욕망들, 여전히 곤란을 겪는 여성에게 지워지는 양육의 경사진 부과, 각종 차별이 지닌 불모성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이 세계의 부패성은 삶의 조건을 더욱 어둡고 두렵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실 공포의 실체를 마주토록하기 위해 저 어두운 지하 동굴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슴 저미는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아이를 지켜내는 것은 곧 인류를 지켜내는 것일 게다. 이제 이 과업은 두 남녀의 몫으로 방관하기에는 이 세계가 어제와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다. 사회 공동체이자 국가 공동체가 더욱 직접적으로 양육의 몫을 나누어져야 하는 세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을 쓴 흑인작가 랠프 앨리슨의 문제의식과 평이한 문체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막힘없이 이동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나로 합친다면 바로 빅터 라발이라 했던 앤서니 도어의 말은 이 작품을 말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해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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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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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제 식민 치하의 항일 운동은 사회주의 강령에 의존해야 했는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조금은 뜬금없는 그러나 관련성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부패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미국의 뉴(new)아이비리그 25개 대학의 하나로 정치분야의 석학과 주요 정치리더를 배출하는 콜 게이트대학 정치학 교수인 마이클 존스턴(Michael Johnston)’은 그의 유명저술인 Syndromes of corruption(부패의 증후군)에서 한국의 독특한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 부패 유형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다.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다.“ 라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지적이 한국사회의 부패 근인을 모두 아우르는 분석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당부분 적확한 통찰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이방인이 쓴 이 아픈 지적으로 소설의 감상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제 국민의 대다수가 노동자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그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차근히 들춰보는 100여년의 서사 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게 되는 그 부정한 부패의 기원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새로이 선출된 권력들이 부패와의 싸움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지만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을 알고 있다. 마이클 존스턴 교수가 지적하듯 부패가 단지 어느 특정 시기에 발생한 일시적이거나 국부(局部)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유별나게 파렴치한 부패양상인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다시 말해 매우 구조적이고 오랜 시간의 네트워크로 다져진 부패 형상이기에 몇 년에 걸친 특단의 조치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점이기에 그렇다.

 

바로 지금 한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성장 저하, 정치적 불안정, 사회적 불신의 심화와 국제사회에서의 부정적 이미지 증가로 인한 외국인 투자 감소와 경제 손실 유발과 같은 심각한 영향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 고질적으로 고착된 기형적 부패 양상인 엘리트형 카르텔의 심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장기적으로 국가의 건강성과 안정성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에 단순하고 일시적인 법률적 처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문제가 있다. 즉 국가적 우선 과제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여러 정책 과제의 여느 하나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썩어있다는 말이다.

 

 

소설 철도원 삼대- 일제 유산으로서의 한국사회의 부패 고리

 

"혹한의 겨울밤에도 저 굴뚝 아래 아파트와 건물 빌딩들의 빛나는 창문들과 

강변 도로 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매끈하고 날렵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물결을 볼 때마다 세상은 언제나 그냥 무심하다는 걸 실감한다."  -412쪽


소설은 분할매각을 통해 회사를 해외에 팔아버리고는 시침 뚝 떼고 공장을 폐쇄시킨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한 파렴치한 자본가를 향해 부당한 해고와 복직을 요구하는 한 노동자의 45미터 굴뚝 위의 농성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농성은 사백일하고도 열흘 만에 자본가와 기만적인 타협을 이루어내고 내려오는 것으로 끝나지만, 말뿐인 복직으로 돌아 온 공장 현장에는 아무런 기계설비도 없는 텅 빈 장소이다. 해고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버려짐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농성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농성자인 이진오라는 인물의 증조부에서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으로 이어지는 이 땅 노동자의 역사를 쫓는 것이고, 그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에워싼 참혹하기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오늘에까지 싸워야하는 권력의 실체란 것이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개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지독하고 줄기찬 식민지민에 대한 차별과 탄압, 그칠 줄 모르는 폭력과 죽음 앞에서 그들이 무얼 할 수 있었으며, 그 무엇을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도록 한다.

 

본질은 이러한 것일 게다. 국가의 정체성은 물론 역사마저 부정하는 이 땅의 엘리트형 카르텔이라 지칭되는 기득권 집단은 식민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펼쳤던 민족해방 투사들을 빨갱이라며 그 의로움을 부정하고 나라를 팔아먹거나 자기 이익만을 위해 동족을 배반하고 적극적으로 일제 부역자 노릇을 하던 자들을 애국자라 옹호하는 기괴한 짓들을 벌이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되듯 조선의 항일운동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손쉽게 빨갱이로 매도되곤 했으며, 전쟁이후에는 또 냉전체제라는 지정학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 운동은 다시금 빨갱이 짓거리가 되었다. 결국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요구하게 되면 곧 빨갱이 짓이요, 종북 세력이라는 괴이한 낙인을 찍어 권력과 결탁된 자본은 수월한 부패욕구를 지속할 수 있었음을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제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조선인은 철도공작창의 최하위 작업자를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이진오의 증조부인 이백만은 성실성이라는 저항없는 순응성으로 고원(雇員)이라는 뜨내기 직을 이어나간다. 아내 주안댁은 남편 이백만의 생활비도 안 되는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시장을 누비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나가지만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한다.(소설은 먹은 것이 체해 죽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아마 심장마비였을 것이다.)

 


이백만은 슬하에 아들 일철(一鐵, 한쇠)과 이철(二鐵, 두쇠)을 두고, 일철은 철도원양성소를 졸업하여 일본인이 독식하던 기관사가 되는 어려운 길을 걷는다. 이철은 아버지 이백만과 같이 철도공작소의 말단 공원(工員)이 되지만 노동쟁의에 가담했다는 이류로 해고되어 방직공장 임시기술직으로 들어가 자본에 의해 저질러지는 노동착취와 차별적 대우에 조직적인 항거를 위한 노동자 조직을 일궈 나간다. 식민치하의 노동자들의 단결은 제국주의 일본의 자본 이익에 반하는 행위였으니 그 낌새만으로도 잔악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때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그 어떤 세력도 식민지 조선인들의 곤궁한 삶의 형편을 위해 대변자로 나서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 평등한 노동처우의 요구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그들의 지원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불가피하게 지하화된 조직은 공산주의 강령에 의존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한일합병 직후, 잠재적인 앞잡이(부역자 무리)로 본다면 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적의 앞잡이가 되어 몇 푼의 생활비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306

 

이쯤에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특이한 부패 유형인 엘리트 카르텔의 발원이 목격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친일 부역자 무리다. 돼지 도살로 살아가던 최달영이란 인물의 일제순사 밀정으로의 변신과 후일 고등계 형사가 되고, 해방 후 용산 경찰서장이 되어 동족에게 폭력을 거침없이 겨누고 죽음으로 몰아댔던 그 비열한 세력들이 이 땅의 주요 정치경제세력이 되는 과정이다. 일본 순사들보다 더욱 극악하게 조선인을 못살게 굴던 인간, 식민 기간 내내 노동자들 조직을 괴멸시키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각종 고문으로 절명시키고, 그 가족을 파멸시키는데 주도적인 성과를 이뤄낸다. 일제의 개(走狗)가 되어 가치를 입증함으로써 일본의 정식 고등계 수사과장에 올라 불의한 부와 권력을 쌓아올린다.

 

해방된 조선의 통치자는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점령군의 이름만 바뀌었으니 조선의 독립이란 말은 사실 공허한 얘기에 가깝다. 미군정은 고스란히 일제의 관료시스템과 관료들을 그대로 인수했다. 이에 조력한 인물이 바로 이 나라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되어 쫓기듯 권좌에서 내려온 썩어빠진 이승만이란 인간이다. 다시 말해 해방 후 이 땅의 정치 경제 세력은 친일부역자들이 그대로 - 동족을 착취하고 죽여 쌓은 부정한 지위와 재산을 - 이어가게 되는 부조리함이다. 이이철은 야마시타(최달영)에 잡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수감된 감옥에서 사망한다.

 

형 일철은 조선인이 차지하기 어려운 기관사라는 자리를 성취하지만 항일 운동을 위해 공산주의 노동자 조직을 위해 투쟁하던 동생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해방 후 일철은 노동운동의 주요 인사가 되어 참여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경찰서장이 된 최영(야마시타)은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노동운동 조직은 빨갱이 짓이니 조심하라고 협박한다. 일철은 일제의 주구였다가 다시금 미군정 경찰의 개에게 쫓긴다. 붙잡히면 개처럼 죽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 의해 분단된 38선을 넘어 북으로 탈출하고, 북쪽의 기관사 양성교육자로 살아간다. 이제 일철의 아들 이지산은 아비를 찾아 할아버지 이백만과 어머니 신금이를 떠나 북으로 떠나 아버지로부터 기관사의 교육을 받지만 전쟁 기간 물자배송을 하다 포로가 된다.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간 불구의 몸을 하고 어머니 신금이가 있는 영등포 고향집으로 찾아든다. 발전소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이진오는 그렇게 살아 돌아온 이지산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온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며 겨우 한발짝씩

아주 느리게 변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게 되었다.” -408

 

일제 때부터 전쟁까지 겪으면서 우리 집 남자들 모두가 노동자였거든. 이라고 세기가 지난 21세기 오늘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똑같은 한국사회를 말하는 이진오의 기억은 한국사회의 부패와 맞닿는다. 이 부패는 역사적 부정과 불의에 대한 국민적 정리를 하지 못한 실패의 되새김이며, 이의 여아한 정리만이 외부의 시선이 지적하는 한국사회의 기형적 부패의 고리를 끊는 시작이 될 것이다. 일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민족배반의 세력들이 여전히 이 땅의 지배권력자로 군림하며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을 미화하는 불의한 시간에 우리들은 서있다. 일제와 해방후 국가 행정권력을 쥔 친일집단은 노조파괴와 노동운동가 개인에 대한 테러를 정치적 목표로 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확대하는 데 몰두한 세력들이다, 이들이 곧 오늘의 엘리트 카르텔이라는 국민을 등쳐먹는 세계에서 찾기 힘든 희한한 부패 형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의 1989년 방북에서 영등포가 고향인 북한의 한 노인과의 대화로부터였다고 구상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대동강변에서 들려주던 철도 기관수였던 노인의 월북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거장의 30년에 걸친 집필의 노고로 독자의 눈앞에 놓였다. 그리고 그 강렬한 서사는 이 땅의 백여 년에 걸친 핍박받는 노동자들의 삶의 노정을 거쳐 그 뿌리를 드러내 여실하게 이 사회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 기묘하게 신자유주의의 자본탐욕과 일제부역자들과 그 후손들의 역사부정과 맞물려 괴물스런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초판이 출간된 2020년에서 4년이 흐른 2024, 소설 속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 문제로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였다. 한국인의 삶의 역사에서 일제부역자의 민족 배신행위를 망각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짓거리고, 또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부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세상에서 노동자 삶의 조건은 결코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이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빨리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 우리 한국민의 역사적 정서를 대표하는 문학거장, 황석영 작가의 부커상 수상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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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나는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는 까닭일까? 부쩍 사람의 마음이 그립다. 그러다보니 읽는 책들의 글마다 마음, 손길, 친구, 선한 영향력, 동고와 같은 단어들에 시선이 붙들려 꼼짝하지 않곤 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同苦)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4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의 한 문장이 그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예스런 동고(同苦)’라는 단어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사유로부터 우리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고통을 읽는다. 그가 말하는 의지(wille;意志)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통제, 지향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목적 없는 충동인 이 의지를 인간은 다만 오감으로 직관하여 파악할 뿐인 표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밖에 없다.

 

이 목적 없는 움직임인 의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모든 번민과 고통은 바로 타자인 개체가 바로 의 의지의 표상에 불과함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수시로 망각하곤 한다. 타자인 실재와 내 의지의 표상과의 불가피한 간극, 그로부터 출현하는 서로 다른 의지들의 충돌로 갈등하고 적대한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의지의 현상체에 불과한 것을,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린 서로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성정을 뜻하는 '동고(同苦)'야말로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의 유일한 동기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에 좌우되기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삶의 의지에 대한 통찰이 아무렴 요구되는 즈음이다. 사실 안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각성하고 의지로부터 자유, 의지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평정의 길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길은 가까우면서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얼추 나이든 세대에 속하게 되면서 내 삶에서 친구나 신의(信義)의 자리에 고작 메마른 성()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게다가 우정은 동성애라는 의심의 눈초리로까지 변질되어 우정이 발 딛을 공간이 극히 협소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간의 유대를 점점 상실해가는 지금, 내 주변의 공동체는 부쩍 약화되어가고, 동고의 연민은 극단적으로 희소해졌음을 체감한다.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63권에 이렇게 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올까?"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지성과 사랑, 아름다움과 윤리가 함께 어우러진 벗과의 이 드문 교류를 '최상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팔 만한 물건이라곤 맹자일곱 권이 전부였던 청장관은 이를 팔아 밥을 실컷 먹고 희희낙락하여 벗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을 찾아가 자랑한다. 이 말을 들은 영재(冷齋, 유득공)또한 굶주리고 있던 터라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다 함께 마시며 이렇게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한다.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간본아정유고6)"

 

찾아 온 벗을 대접할 길 없는 가난했던 영재의 마음이나, 책을 팔아 밥을 먹었다는 거짓없는 삶의 얘기를 들려주는 청장관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들이 아끼는 책의 이야기와 어울려 삶과 우정이라는 그 소소한 일상의 진의를 엿보게 해준다. 이것이 동고이고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사랑이라 할까?

 

중국 공푸전옌 영화사 부사장이자 신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후이구냥(輝姑孃)은 의기소침해진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세상은 몰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사방팔방 온통 장벽으로 막힌 듯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해 좌절과 체념으로 포기와 죽음같은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응원하고 부축하고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의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어느 날 무심히 내민 손길이나 신경 쓰지도 않던 평범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두들기고 구원의 한줄기 빛이 되어 용기와 희망의 언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쩌면 전혀 기대치 않는 때에 우리에게 온기를 보내고, 고통스런 인생을 바꿀 용기를 주어 그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구현된 의지만을 긍정하려 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류, 오판을 저지르는가? 내 외로움은 어디선가 응원하고 있을 또 다른 의지의 이해로 위안을 받는다. 고작 표상에 붙들려 갈구하는 이 척박한 외로움에 대한 소박한 이해가 나의 걸음에 용기를 불어넣는다.

 

불현 듯 "추론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믿고 있는대로 계속 믿기 위한 논리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한없이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아마 나는 서로 다른 의지의 소산인 그 분개하는 마음을 알기에 오히려 내 마음을 걸어 잠그기 일쑤였던 것 같다. 아마 내 믿음이라는 자존감을 형성하는 근본 축의 훼손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이를 반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타인의 자존감을 존중해주어 그의 믿음이 훼손당했다고 생각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일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공감이라는 우호적 존중은 곧 친근감으로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추론을 변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 우리 인간의 신념이란 수많은 약점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들은 서로 동류(同類)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마련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사랑을 찾기 위한 내 인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 우정을 쌓는데 인간의 생래적 취약점을 어루만지는 능력을 갖는 것이 당연히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들은 분명 나만 모르는 비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조금은 어제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의 마음이 부둥켜안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동고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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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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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자는 자신과 닮은, 하지만 자신보다는 저열한 이야기를 필요로 해.”

- 르 주르날사장 데니소프의 신념 중에서, 596

 

 

공동체의 무관심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채 빈곤과 자기경멸의 삶을 지탱해가야 하는 상이 병사들과, 전쟁(1차 대전)을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 부의 토대로 인식하는 계층의 혐오스러움을 동일한 광기의 흐름 속에서 경합시켰던 오르부아르의 풍요로운 이야기는 이제 잊어야 한다. 세상에 대고 우스꽝스런 주먹 감자를 날리며, 미칠듯한 행복감을 안겨주던 그 멋진 작품의 추억은 이 위대한 소설 대단한 세상을 위한 전주곡이었음을. 그 기막히게 잘 연출된 우아한 비극 속에 소박한 사랑과 평범성의 꿈을 쫓던 알베르와 폴린이 30여년의 풍파를 거쳐, 그네들 네 자녀의 파란만장한 사연으로 1940년대 전후 세계의 험한 세상을 풀어낸다.

 

그랑 몽드(Le grand monde)’, 위대한? ? 혹은 대단한? 이라 해석될 수 있는 그랑이 오직 대단한이라 번역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이 소설은 충분하고도 넘치게 풀어내고 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를 가히 ~단한으로 발음되는 조롱의 뉘앙스로 역설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배경은 프랑스 위임정권이 서서히 저무는 1940년대 베이루트(오늘날 레바논의 수도)를 기반으로 글로벌한 비누공장을 일궈낸 펠티에 가문의 일곱 명 프랑스 가족, 펠티에 부부와 세 아들, 한 명의 딸, 큰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까지, 이들 독특한 개성의 인간들마다 각개의 독자적 서사를 이끌며, 차별적 장르를 형성하여 읽는 이의 다채로운 욕구를 충족시킨다.

 

항상 충분치 못함, 부족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뚱땡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장남 ’, 학업에 성과를 보이는 둘째 아들 프랑수아’, 그리고 둥둥 떠 있는 듯한 이상 없는 이상주의자인 에티엔’,과 오빠들이 모두 떠난 베이루트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고 여기는 열여덟 살 막내 딸 엘렌’, 우체국장의 내 딸 중 가장 아름답지 못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 장의 아내이자 펠티에 가문의 큰 며느리가 된 준비에브가 열연하는 홍수처럼 맞닥뜨리는 인생의 사건들에 홀딱 빠지게 된다.

 

장남 장은 가업인 비누공장의 전무로 취임하지만 아버지 루이 펠티에의 후계자로서의 수업은 실패로 끝나고, 아내와 함께 파리로 도피하듯 떠나지만 그의 뼛속까지 배어있는 무능력은 삶에서 미래를 어둡게 한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로의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 잇따르듯 부모를 떠난 프랑수아는 진학에 실패하고, 황색미디어에 가까운 르 주르날의 데니소프 사장으로부터 임시직 리포터로 채용된다. 셋째 에티엔은 프랑스 용병인 벨기에 출신 레몽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복무지가 베트남으로 이동하자 식민지 베트남 외환국에 취업하여 부모를 떠난다. 유일한 딸인 막내 엘렌은 교활한 성()착취자인 학교 선생의 성적 노리개로 전전하며 형제들이 모두 떠난 베이루트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루이 펠티에 자식들의 현실적 삶의 실제는 그의 희망찬 기대와는 꽤나 먼 것들이다. 잡화 영업사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하는 장은 그의 쪼그라든 자존감만큼이나 성적 무능력까지 더해져 파리에서의 귀족적 생활을 꿈꾸었던 아내 준비에브의 욕망은 엉뚱한 호기심과 거친 탐욕으로 표출된다. 사이공 식민지 외환국 직원이 된 에티엔은 본국으로의 수입대금인 외환대금 인가업무를 담당하지만 곧 이 업무가 고질적으로 왜곡된 환차익을 위한 합법성의 가면을 쓴 부패자금 생성의 근원지임을 알게 된다. 베트남 화폐로 송금하면 파리에서 두 배가 넘는 프랑화로 환산되는 환율의 왜곡을 이용한 해외송금의 공식 승인업무인 것이다.

 

이로 인해 승인담당자들은 은밀한 수수료를 챙기고, 송금자들은 합법적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는다. 에티엔의 베트남 사이공의 이주는 연인 레몽과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소식이 두절된 연인을 찾지 못한다. 그의 출전지에 대한 정보는 군사전략이라는 미명하에 접근이 불가능하고, 결국 레몽의 처참한 전사소식을 듣게 되자 에티엔은 고독의 고통으로 외환국의 가장 부패한 외환송금 승인자로 돌변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으로부터의 이익을 위해 외국 용병에 의존한 저항 군()인 베트민(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저항 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는 프랑스 자국민의 출혈 없이 국익만을 거둔다는 전시적 효과로 인해 프랑스인들의 관심 외() 지대가 되어 부정과 부패의 온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에티엔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이공의 이야기는 식민제국주의 프랑스 기득권 계급의 더러운 욕망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에티엔으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여느 첩보물에 버금가는 긴장감과 함께 적국의 군사재원 확보 자금 수단이 됨과 동시에 프랑스 고위정치가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의 상시화가 이용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한편 파리의 장과 프랑수아의 현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 형제와 준비에브가 함께하는 영화 관람 중 발생한 유명 여배우의 살인사건을 사이에 두고 이것이 이들의 고단한 삶의 투쟁의 중심 언어가 되어 흥미진진한 두 줄기의 서사를 대차게 밀어붙인다. 이 우연한 영화관람 중 벌어진 살인사건의 현장에 있음으로 인해 프랑수아는 모든 신문을 앞질러 독점적이고 생생한 기사를 써내고 르 주르날의 사장 데니소프의 신임을 얻어 잡보(雜報)부의 정식 기자가 된다. 이와 달리 장은 잡화영업을 전전하던 끝에 본사 상임 영업직으로의 전환이 실패하자 사직한다. 장은 자신의 내적 한계에 대한 무력감으로 인한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우발적인 여성 살인을 반복하는데, 영화관 여배우의 살인 또한 그의 돌발적 살해충동의 결과이다.

 

동생은 해당 살인사건의 취재기자이고, 형은 살인 당사자라는 구도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 수사와 취재, 그리고 장과 준비에브가 벌이는 해프닝들은 한 편의 코미디극과 추리극을 오가며 전쟁 후 프랑스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부패, 그리고 불안정한 치안과 사법제도의 무능력이라는 실상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자기 미래 설정이 없는 열여덟 엘렌의 약물복용과 성적 탐닉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전후 사회상일 것이다. 도덕성이 총체적으로 붕괴된 무질서한 1940년대 프랑스의 드라마틱한 초상(肖像)을 그 누가 이보다 다채로운 시선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사이공의 에티엔은 베트민의 자금 확보수단으로 외환국의 승인이 이용됨을 발견하고, 모국 프랑스의 국부(國富)가 적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식민지내 자금원의 브로커들을 추적하다 자금 세탁 은행들과 본국 고위 정치인들로 추정되는 이니셜을 발견하고 그 증거를 수집한다. 점진적으로 가까워지는 살해 위협의 징후들로 인해 파리에 있는 형 프랑수아에게 이니셜과 함께 자신의 파리로 탈출이후 증거를 제시할 것을 다급하게 전하면서 기사화를 요청하지만 프랑수아는 이를 시급한 문제로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정보누설로 인해 곤란을 겪을 자들의 사전 폭발물 설치로 인해 탈출 비행기의 공중 폭발로 에티엔은 사망한다.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프랑수아는 에티엔의 마지막 전언인 이니셜을 통해 부정한 자금 세탁기관인 은행들과 연루된 정치인들을 추정하고, 당사자인 최고위 상원의원을 인터뷰하기도 하지만, 신문사내 권력 다툼에서 희생 될 위기와 함께 알지 못하는 정보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협박을 받기에 이른다. 작가는 가히 폭력적인 함정을 설치해 독자를 기만하기도 하는데, 연쇄 살인범인 장과 향정신성 약물의 탈취에 연루된 엘렌이 별개의 장소와 시간에 체포되게 함으로써 그네들의 범죄가 처리되는가 싶지만, 이는 프랑수아의 프랑스 정국을 혼란에 빠뜨릴 정치와 경제의 총체적 부패에 대한 신문의 공개 고발을 제지하기 위한 정부 정보국의 교활하고 위협적인 거래를 위한 전술로 드러난다.

 

이 전술은 시효는 만료되었지만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 펠티에 가문을 붕괴시킬 수 있는 오르부아르의 그 유명한 전몰장병 가족을 대상으로 한 희대의 사기사건 주범 공개라는 사건과 프랑수아의 정치금융 부패사건 공개와의 거래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전쟁 기념비 사기사건의 주범인 알베르와 폴린은 이름을 바꾸어 루이 펠티에 부부가 되어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불의한 자금을 기반으로 사업을 일궈낸 것이다. 프랑수아는 신문사내 입지를 굳히고 탁월한 신문기자로 성장할 기회를 목전에 두었지만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의 안녕이라는 선택지에서 고뇌한다.

 

이후 아버지 루이 펠티에가 자식들을 위해 음지에서의 끝없는 격려와 사랑을 보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들이 당대 혼란과 계급적 부패가 극성을 부리던 프랑스 사회에서의 약자가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성과 함께 부모와 형제, 가족의 안위를 선택케 한다. 아마 프랑수아가 최초로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의 미래와 이익이라는 이기심에서 가족 공동체로 시선을 옮기는 첫 걸음을 디뎠음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새로운 소설이 출간될 때 출판사들이 뽑아낸 광고 문구들은 고장되기 일쑤고, 특정한 몇 몇 화려한 문장으로 독자를 현혹하곤 한다.

 

때문에 이 작품 역시 소설에서 무엇을 더 이상 바랄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은 더 타임스의 극찬의 문구에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화려하고 다양한 서사와 시대에 대한 고발을 녹여낸 플롯들은 오히려 이 수사 또한 부족함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19세기 발자크의 인간극시리즈에 버금가는 20세기 인간극이라는 최고의 칭찬을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 발자크의 풍속, 철학, 분석이라는 범주하의 구성과 달리, 피에르 르메트르는 연대기적으로그만의 인간극을 써내고 있는 것인데, 1차 대전 후인 1910년대를 시작으로 이제 1940년대를 완성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미 70대 고령에 접어든 작가의 마지막 정열의 투사일 것이다. 프랑스 부흥기인 영광의 30년인 1945~1975년을 배경으로 하는 4부작 <영광의 세월>,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서 모두 완성되어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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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밍고 섬의 약혼 서문문고 17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박종서 옮김 / 서문당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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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세기 전환기의 독일 작가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오래된 소설작품을 읽도록 견인한 것은 두 여성 인문학자의 글 속에 등장한 단편 칠레의 지진으로 인해서이다. 각기 기억과 수치심 문제의 논의 중 인용되었는데, 인간의 비이성성과 자기 합리화의 기만성에 내재된 폭력성의 사유였다.  생존 시 빛을 보지 못한 작가였으나, 그 내막은 정부 시책 비판자로서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 그의 출판이 불가능했던 탓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34년의 짧은 생애를 산 이 천재 작가의 비판적 사유는 실러나 괴테를 넘어서는 가히 현대적 인식능력에도 손색이 없는 작품을 써냈음의 뒤늦은 발굴이다.

 

200쪽 남짓의 이 작은 문고판에는 세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어쩌면 그의 단편작품들 중 그야말로 엑기스라 해도 될 것이다. 작가의 자살을 예고한 작품으로서 추정되기도 하는 표제작 성 도밍고 섬의 약혼은 물론, 폭력적 기억의 부정으로 빈번하게 인용되는 칠레의 지진과 성()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O 후작 부인이 그것이다.

 

1.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백인들의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하던 흑인들에게도 프랑스혁명의 자유에 대한 여파는 그들의 의식을 깨워댔던 모양이다. 작품의 배경은 대략 1803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랜 억압의 사슬을 끊고 흑인들의 반란이 거대한 폭력적 봉기가 되어 성 도밍고 섬에 피의 바람을 몰고 온다. 자유 신분으로 거대한 농장을 맡기고 유산까지 줄 정도로 백인 농장주에게 신뢰를 받던 흑인 콩고 호앙고는 주인을 살해하고 농장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흑인 반란군에게 무기와 재원을 공급하고, 백인들을 함정으로 몰아 학살하는 주체가 된다.

 

자신의 집이 된 전 농장주의 거처를 흑백혼혈인 늙은 아내와 열다섯 살 딸을 이용해 피난하거나 도주하는 백인들을 꾀어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하고 참살하는 짓을 반복한다. 이때 스위스 인으로 친척 일가의 피난을 주도하던 프랑스군 장교인 구스타프 폰 데어리트는 호앙고의 집에 음식거리와 숙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든다. 호앙고의 아내인 늙은 노파 바베칸은 내심 그를 잡아두고, 그 일가족까지 도륙할 기회로 삼으려 한다. 딸 토니를 이용하여 유혹하여 붙잡아두고 호앙고가 다시 집에 올 때 넘기려 계획하는 것인데, 혼혈의 미색을 지닌 토니는 구스타프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약혼의 언약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바베칸은 딸의 변심을 의심하고, 호앙고가 들이 닥쳤을 때 토니의 배신으로 구스타프가 도주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방에 이르지만 토니는 이미 도주할 통로가 막혔음을 예견하고 구스타프를 몪어 배신의 행위를 은폐함과 동시에 구스타프의 죽음을 지연시킨다. 그리곤 몰래 홀로 탈출하여,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그의 일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구스타프의 구출이 시급함을 알린다. 이상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주제는 바로 이 구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에 개입된 사람들의 말, 다시 말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인 인종적 편견의 적대감이다.

 

구스타프의 친척들로 구성된 소수의 사내들이 토니의 안내로 급습하여 호앙고와 바베칸을 포박하는 것인데, 토니가 이를 주도한 것을 알아차린 호앙고는 토니에게 말한다. 네가 그런 창피한 짓을 하고 기뻐하기도 전에 천벌이 내릴걸.”이라고 동족인 흑인을 배신한 토니를 질책한다. 그때 토니는 난 배신한 일 없어요. 백인 여자인 나는 당신들이 붙잡아 둔 저 청년과 약혼한 사이예요.”라고 답한다. 혼혈 여성인 토니는 부모인 호앙고와 바베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백인인 자신이 백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런 부당함이 없다는 항변인 것이다. 이것은 피부색이 옅어진 흑인 여성의 백인사회로의 동화(同化)에 대한 갈망이지만 바로 이러한 의식 자체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이어서 구스타프를 구출하기 위해 감금되어 묶인 방으로 토니와 습격자들은 향하는데, 토니를 본 구스타프는 구원자들에 의해 풀려나자마자, 어쩔 작정인지 알아 볼 사이도 없이, 분노의 이빨을 갈면서 토니에게 피스톨을발사한다. 총알은 토니의 심장을 관통하고 그녀는 죽는다. 이 장면도 흑과 백에 대한 차별의 의식이 구스타프의 마음 저변에 있었음의 한 상징일 것이다. 그는 전후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단지 토니가 자신을 묶어 둔 행위에 대한 적의만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그를 살리기 위한 토니의 임기웅변으로서의 행위였음을 그는 애초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놀란 친척들은 그를 살리기 위한 토니의 술책이었음을 구스타프에게 설명한다. 은혜를 살해로 갚은 것인데, 이 사실을 알자 구스타프 또한 피스톨을 자신에게 겨누어 자살하고 만다. 자신을 지배하던 차별의 의식에 대한 수치인 자괴감과 성급한 판단이 약혼한 여성을 살해하게 하였다는 깊은 죄책감이었다고 해석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이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은 인간 세계에 무수히 다양한 갈등의 문제로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성찰의 이야기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내성적이고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혐오로 인해 은둔을 희구했던 작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불치병을 앓고 있던 유부녀인 헨리에타 부인과 사랑을 나누던 클라이스트는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인과 함께 피스톨로 머리를 쏘아 이중자살(二重自殺)했다. 이 소설은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작품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구스타프는 작가 클라이스트의 분신이었던 것일까?

 

 

2. 칠레의 지진

 

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실제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산의 파괴로 기록된 사건이다. 소설의 발단은 산티아고의 최고 부자인 귀족 돈 엔리코 아스테론의 고명딸인 돈나 요제페와 가정교사인 청년 예로니모 루쮀라와의 은밀한 사랑이 알려짐으로서 루쮀라는 해고되고, 요제페는 수도원으로 보내진다. 요제페가 루줴라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청년은 형무소에 수감되고, 요제페 역시 수도원에 감금된다. 도시는 이 젊은이들의 사건을 불상사이자 범죄행위라 하여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는다. 루줴라는 목숨을 끊기위해 형무소의 기둥에 노끈을 묶고 결심을 굳히려는 순간 갑자기 온천지가 무너지고 갈라진다. 대지진이 산티아고를 강타한 것이다. 아비규환의 폐허 속에서 탈출한 두 사람은 아기 젖동냥을 하던 귀족 돈 페르난도의 아이를 도움으로써 그들 부부로부터 귀한 영접을 받는다. 그리고 요제페와 루줴라, 그들의 아기 필립에게 마치 재난이 그들의 영혼을 치유라도 한 듯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지위와 신분의 구별 없이 서로 돕고 희생한다.

 

지진이 끝나고 마음의 안정을 찾자 산티아고 도미니크 성당으로 미사를 올리려는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몰려온다. 요제페와 루줴라 역시 열렬한 마음으로 하늘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성당 미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성당의 늙은 승정(사제)은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인 지진에도 불구하고 전멸당하지 않은 죄악이 남아 신을 모독하고 있다고 저주에 가득찬 어조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분명하게 부른다. 이때 미사 군중 속에서 설교를 가르는 외침이 들려온다. , 여기 바로 그 죄인들이 있소!” “어디 있느냐!” “여기 있다!” “돌로 때려라, 때려 죽여라!” 성당에 모인 신자들이 모두 외친다, 그리곤 곤봉으로 내리쳐 그들을 때려죽인다. 이어 저년과 함께 저 사생아도 지옥으로 보내라!”라는 소리와 함께 어린애(요제페의 아이가 아닌 페르난도의 아이)를 낚아채 다리를 붙잡아 빙빙 돌리다 교회 기둥 모서리에 부딪쳐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머리가 터져서 골이 삐어져 나온 채 아이는 바닥에 내팽겨 쳐진다.

 

인문학자인 오카 마리는 소설의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대지진이라는 폭력적 사건으로 부정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기만적인 헛소리(신의 의지, 헛소문)에 의거한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사건 자체가 지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관동(關東)대지진시 재일조선인이 약탈과 폭력으로 일본인을 학살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자신들의 재앙을 조선인의 탓으로 돌렸던 그 범죄적 기만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자신들의 대재앙을 해소할 희생양을 찾아 그것에 들씌우는 폭력과 기만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주 민감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인간들의 이 잔혹한 폭력성이 드러난 그 날의 기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어떤 참혹한 사건의 당사자로 있어야 했던 존재가 과연 그 사건을 단지 의미가 흐릿해진 막연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제페와 루줴라는 맞아 죽었고, 그들의 아이는 오인된 죽음을 맞이한 페르난도의 아이를 대신해 페르난도의 자식으로 양육된다. 그런데 클라이스트는 과연 이 소설을 칠레의 지진이 야기한 인간 폭력의 기억이라는 재앙적인 인류 트라우마를 증언하려 한 것일까라는 점에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페르난도는 필립을 판과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 그에게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되기도 했다.”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들이 사건을 사건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즉 의미가 모두 바랜 단지 문자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건을 다수의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한 증언이 아니라 한낱 이야기로서의 소비에 멈춘 그저 그런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사자랍시고 울고 짜대는 그것이 진실의 면목일까 하면 그것이야말로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사건의 말 할 수 없음 자체를 증언하려는 기억의 서사문제를 클라이스트는 이미 선취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아마 이러한 가능해석으로 인해 이 작품은 오늘날 여전히 기억 나눔의 대표적 서사로 회자(膾炙)될 수 있는 것일 게다.

 



3. ‘O’ 후작부인

 

조금은 황당한 신문 광고 문장이 소설을 연다. 아기 아버지를 찾는 사연의 광고를 자신의 신원을 밝힌 채 모든 신문에 낸 것이다.

 

저는 뜻하지 않게 모든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낳을 아이의 아버지는

계신 거처를 알려주십시오. (...) 당신과 결혼할 결심을 했습니다.”

 

왜 이런 광고가 게재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사연이 소설의 거의 4분의 3을 채우고 있다. 이탈리아 유명도시 M시 요새의 사령관 G씨의 딸이자, 남편과 사별한 젊은 미망인인 O후작부인은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요새가 점령당하면서 러시아 병사에 의해 끌려 다니며 온갖 수치스러운 학대를 받게 되자 도움을 구하는 비명을 지른다. 이때 러시아군 중령 F백작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구원되지만 이내 실신하여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다. 이 러시아군 장교는 요새사령관인 G씨의 항복을 받아내고 편의를 봐준다. 세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평화로운 어느 날, F백작이 느닷없이 O후작부인과 그녀의 부모인 G씨 부부가 살고 있는 M시의 저택으로 찾아와 O후작부인에 청혼하며 이 결혼을 승낙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O후작부인은 그 어떤 남자와 관계를 맺은 기억이 없음에도 마치 임신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마침내 의사와 조산사에게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이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해한다. 의사는 조롱하듯 동정녀 마리아 이외에 그러한 임신을 들어본 적 없다. O후작부인은 부모로부터 암캐의 염치없는 행실에 여우의 간사한 꾀를 열 갑절 보태도 그년의 그것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라며 집에서 내 쳐진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 즉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의 기울어진 잣대를 비판하려 한 것 같다. O후작 부인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V시의 영지로 거처를 옮겨 두문불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마침내 인과성에 대한 자연법칙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은 알지 못하는 아비를 찾는 광고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딸의 결백함을 반신반의하던 O후작부인의 어머니 G씨 부인의 한 실험에 의해 딸이 주장하는 이해 불가능한 임신의 결백성을 확인하고 남편과 가족들과 딸의 화해를 주선하며, 남자들은 O후작부인의 순결성을 품는다. 사실 O후작부인을 수태케 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독자들은 어렴풋 짐작할 수 있는데, 러시아군이 요새를 습격했을 때 F백작의 구원 이후 그녀가 완전히 실신한 장면이 있다. 그리곤 이후에 비록 청혼 수락이 훗날로 미뤄지긴 했으나 F백작이 구혼한 사실이 있다. 신문 광고의 문장에 따르면, 나타나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기에 F백작이 자신임을 고백하려 약속된 기일에 나타났으나 O후작부인은 완강히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던 그 고통스런 시간에 F백작이 추행한 것이니 용서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에 이와 동일유사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리고 후일 그 당사자가 혼인을 요청한다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논쟁적 주제가 될 것이다. 불량한 인간들로부터 구출해준 선의의 기사이자, 실신 상태에서 간음한 인간이 후일 나타나 청혼을 할 때, 당사자인 여성은 이 황당무게한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당대의 성적 환경 하에서는 이는 대범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실제 소설 속에서 F백작은 O후작부인의 처분에 맡기고 그녀의 신뢰를 쌓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곤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사실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오늘 누군가 이러한 소재의 이야기를 쓴다면 과연 어떤 귀결을 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많은 영지와 재산을 지닌 귀족인 F백작의 자본주의적 관점의 외형적 지위는 일단 현대 여성들에게 장애요인은 당연 아닐 것이고, 더구나 전쟁에서 적군병사의 노리개로 취해질 수 있는 순간 구원해준 기사이기에 그의 도덕성도 평범성 이상의 수준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는 여자의 심신이 가장 취약한 틈새를 이용하는 성적 비열함을 보였다. 한편으론 아이의 생부이기도 하며, 정식 청혼을 함으로써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하지 않았다. 클라이스트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한 건가?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젠더()에 내재된 차별과 폭력성을 다룬 선구적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또한 클라이스트의 작품들은 당대 여타 작가들의 소설들과 달리 인물의 심리나 정황 묘사가 거의 없이 사건전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때문에 조금 건조한 느낌마저 들지만, 그의 다수의 작품들이 오늘날에 논의되는 주제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에바 폰 레데커오카 마리두 인문학자의 글 덕분에 다시금 엷어진 의식을 환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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