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열 - 하 - 김성종추리문학전집 5
김성종 지음 / 남도출판사 / 197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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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5

                                                                                                        김성종

  김성종(1941.12.31) 중국 제남 출생, 연세대 졸, 1974최후의 증인이 한국일보 공모작으로 당선되면서 대중적인 작가로 성공한다. 한국 최초로 본격적인 추리문학의 장르를 열었으며 1992년 해운대 달맞이언덕에 추리문학관을 개관하고 이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장편 추리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대동아 건설을 위해 결성대회를 연 대동회. 어느 날 K일보에 대동회(大東會)에 관한 논설을 쓴 최동희가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고 그의 아들 최진이 사건에 뛰어든다. 최동희는 살해되었다. 한국이름 김창근인 오오다께를 협박하던 변인수도 살해되었다. 변인수를 살해한 오오다께 역시 납작코에게 저격되기 전 호텔 19층에서 투신, “ZZZ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형사반장 김상배는 수사에 착수한다.

 

  거대한 음모가 잉태되고 있다. X+Y=Z라는 기본등식, XY가 결탁해서 Z라는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암호명 X는 정치깡패로 이름을 날리던 조남표, Y는 암흑계의 보스로 군림하다 일본 재계의 거물이 된 아낭 기사꾸다. 둘은 혈맹을 맺고 Z의 조종으로 거대한 음모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곧 있게 될 한국의 선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호텔, 마약, 밀수, 인신 매매로 자금을 마련키로 하고 경찰에 쫓기고 있는 킬러 B의 성형수술과 기존의 조직 10개파의 제거를 계획한다.

 

  최진과 협조하며 사건을 쫓던 김반장은 S기관으로 파견된다. 그들은 국가안전국 간부회의에 참석하여 그들의 조사 내용을 설명한다.

 

  Y측에서 파견한 10명의 킬러들은 국내의 불법 폭력조직의 두목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그 조직을 접수한다. 오오다께의 살해범 킬러 다비드 킴은 인터폴을 통해 수배가 내려지고 그를 추적하던 팽이 홍콩에서 살해 당한다.

 

  한국의 선거일정이 가시화되고 불법조직들의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일본과의 수사 공조도 긴밀해졌다. 최진을 노리는 자들이 있었으며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한. 그러나 그 중에 다비드 킴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요시다 마사하루. 일본측 최고인물. 암호명 RZ를 만나 음모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논의 한다. 대동회는 한국 수상으로 이창성을 당선시키면 그를 제거하여 Z가 권력을 차지하고 일본에서는 쿠데타를 일으켜 R이 집권하면 한·일 양국은 손을 잡고 대동아 건설을 실현한다는 야망의 달성을 위해.

 

  김형사는 최진의 정보에 의해 인력수출협회를 급습한다. 그리고 다비드 킴, 한국명 김철수의 신상도 파악한다. 다비드 킴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자신을 길러 준 고아원 원장을 살해한다. 쫓기던 X는 체포 과정에서 김형사들에 의해 중태에 빠지고 다비드 킴은 Z의 명령으로 X를 살해한다. 쫓기던 그는 백인으로 변장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S국 내에 제5열이 있어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도미에와 모오리 형사는 북한이 무기밀매에 관련되어 있음을 감지한다. 김반장이 살해당했다. 서로의 정체를 파악한 최진과 다비드 킴의 숨바꼭질이 계속된다.

 

 5열의 침투를 우려한 S국 엄과장은 새롭게 13명의 요원을 작전에 투입한다. 다비드의 체포와 장연기 후보의 경호를 위해서.

 

  Z는 다비드 킴에게 장후보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도미에는 미인계를 써서 일본의 조직에 침투하여 정보를 캐고 그녀의 활약으로 찢어진 암호문을 입수한다. 새벽에 무기를 싣고 니이기따 항을 출발하던 1만 톤급의 화물선이 자위대의 제지를 받자 자폭한다. Z의 이름을 알고 있는 김미령이 JAL기 안에서 피살된다. 국화 보스인 고오노와 그 일당들이 체포되고 고오노는 취조 중에 자살한다.

 

  다비드 킴은 점점 초조해져 장후보의 딸 기화를 납치한다. 그 동안 요원들과 몸을 피신하고 있던 장후보의 한강 백사장의 대강연회가 결정되고 다비드 킴은 그 기회를 노리게 된다. S, KIA, 각군 정보대, 헌병, 경찰 등 약 5천 명의 경호가 펼쳐지는 가운데 다비드 킴의 암살이 성공할 것인가? 방탄 조끼 덕분에 암살은 실패하고 기화는 풀려나 목숨을 건진다.

 

  Z는 다비드 킴을 살해하려다 실패하면서 둘은 대립 상태가 된다. 선거를 통한 정권 장악이 불가할 것으로 예상한 Z는 또 다른 작전을 구상하고 최진은 암호를 풀고 드디어 Z의 정체를 파악한다. 조직에 침투했던 도미에는 Z에 의해 살해 당한.

 

  페스트 환자가 발생하고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된다. Z는 다비드 킴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비드 킴을 제거하기 위해 홍콩에 간 최진은 오히려 최후를 맞는다.

 

  작가류의 추리소설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재미있었을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중간 중간에 인물과 사건들의 연관성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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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 - (상.중.하/전3권) 완결
범우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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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

                                                                                                         박종화

  박종화(朴鍾和 1901 1981) 호는 월탄(月灘). 시인, 소설가, 비평가. 서울 출생.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의 초대 회장이 됨.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제15·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흑방비곡, 금삼의 피, 임진왜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종화 [朴鍾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인천하는 1958년 한국일보에 연재되어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작품으로 자유당 정권 말기의 암적 사회 현상 중의 하나였던 소위 치맛바람을 고발하고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중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후궁들의 음모와 암투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거사 전 장인이었던 영의정 신수근을 죽인 반정공신 박원종으로부터 왕후의 폐비를 협박 받고 조강지처인 신비를 쫓아낸다. 그러자 공신들은 새 왕비를 들이라고 재촉하고 공신의 딸 7명을 후궁으로 들여 보낸다. 이렇게하여 전하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숙의 이씨, 숙의 홍씨, 숙원 이씨, 숙원 김씨, 윤숙의의 팔선녀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때 사등공신 윤임도 누이를 후궁으로 들여보내 윤숙의가 되었다.

 

  전하는 덕이 있고 성정이 어진 정실의 딸 윤숙의를 정비로 골랐다. 새 왕비 윤씨는 딸 하나를 낳은 뒤에 몸이 허약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 원자를 낳고는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가 왕비의 물망에 올랐다. 그러자 유림들은 대의명분을 내세워 어린 원자를 보호하리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박상과 김정은 폐비 신씨의 복위를 상소한다. 비록 공신 박원종, 성희안이 죽었다고 하나 정권을 잡고 있는 그의 일파들이 이의 불가함을 공박한다. 결국 두사람은 귀양을 가고 만다.

 

 이때 사간원 간관 중에 새로이 정언(正言) 벼슬을 한 조광조가 박상과 정은을 편드는 상소를 올리고 홍문관 신하들과 성균관 선비들이 일제히 조광조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이 물 끓듯 했다. 조정 여론은 완전히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임금은 어찌 조치해야 좋을지 몰랐다. 김안로가 양쪽편의 말이 다 옳다는 양시론을 주장하여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아 홍문관 직제학에서 이조참의로 이튿날은 광주부윤에 이어 이조참판을 제수하여 벼락 출세를 하게 된다. 밤 낮으로 원자 보호에 노심초사하던 윤임은 김안로를 찾아갔고 그의 아들 김희와 공주의 혼인을 주선한다. 가례를 치른 며칠 뒤 김안로는 판서로 승진한다.

 

  판부사 대감 윤임은 김안로와 작당하여 파평 윤씨 윤지임의 딸을 왕후로 밀어 모시기로 한다. 결국 윤지임의 딸은 왕비가 되고 윤지임은 일약 부원군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비롯한 팔선녀들은 누구누구를 가릴 것 없이 새 왕비를 질투하고 적이 되었다.

 

  서울 장안이 새 왕비의 일로 한참 수선거리고 호화로울 때 폐비 신씨는 아들, 딸 하나없이 죽동궁에 내처져 벌써 삼십일 세가 되었다. 왕비 윤씨의 국장을 접하고 한 때 희망에 부풀기도 했으나 이네는 조용히 불경을 읽으며 날을 보내게 되었다.

 

  새 비가 중전에 오른 뒤 조정은 후궁들을 배경으로 공신들의 뒤를 받치는 남곤과 심정의 한 물결, 왕도정치를 달성시키려는 조광조 등 선비들의 일파, 새로운 왕비를 모신 김안로와 윤임이 또 한 갈래의 흐름을 이루었다. 김안로는 윤임과 윤지임의 부자 윤원로, 윤원형과 은은히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다.

 

  조광조는 갈수록 임금의 신임을 얻어가고 남곤과 심정은 초조해 한다. 조광조는 대사헌이 되고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남곤과 심정은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조광조를 해칠 음흉한 계교를 품고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를 찾아 마음을 통한다.

 

  조광조가 밝은 정치로 민간에 인심을 얻고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젊은 선비들은 반정공신들의 삭훈을 주장하고 조광조는 이를 상소한다. 그러자 홍경주는 희빈 홍씨를 이용하여 비원 안의 나무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벌레들이 파먹게 하여 민심을 교란하고 전하의 마음을 움직이자 조광조는 대사헌을 사직하고 임금의 하회를 기다린다. 이렇게 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뿐만 아니라 성균관 대사성까지 총사직하며 임금을 크게 노하게 하였다. 결국 공신을 깎게되니 임금이 완전히 조광조 일파 선비들에게 굴복한 것이 되었다.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통해 走肖爲王을 확인한 임금은 조광조를 역적으로 몰아 하옥하고 죽음을 내리기로 결정하였으나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상소와 민심 안정을 위하여 죽음만은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 일당은 형장을 받고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다. 조정은 반조광조와 친조광조파로 나뉘어 대립을 계속하는 등 한동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조광조는 사약을 받았다.

 

  조정과 궁중가 온 나라 천지가 이런 수라장을 이루었을 때도 왕후 윤씨는 조용히 자신의 처신할 길을 살폈다. 오라버니 윤원로와 윤형원이 문안차 들릴 때에도 항상 몸조심하라고 타일렀다. 왕비는 회임을 계속했으나 딸만 넷을 낳았고 그러자 마침내 후궁들의 경쟁 대상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나라의 정치세력은 이제 남곤, 심정 일파와 원자를 보호한다는 윤임, 김안로의 세력으로 갈리게 되었다.

 

  어느듯 원자가 입학할 나이가 되자 임금은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윤원형은 정윤겸의 딸 난정을 첩으로 맞이했고 아이를 낳자 본집으로 불러 들였다. 난정은 그의 본처를 살해했다. 난정은 윤형원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부추기고 윤임편도 아니고 남곤, 심정의 편도 아닌 똑똑한 사람들을 미리미리 많이 사귀어 두라고 조언한다.난정은 외로운 왕비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왕비의 마음을 사로잡고 남곤, 심정의 세력들을 경계하게 한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임백령은 기생 옥매향에게 빠져 자주 그를 만나곤 하였는데 윤임이 그녀를 첩실로 데려가 버리자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다. 이런 풍문을 들은 난정은 윤원형을 시켜 그를 회유한다. 이렇게 하여 임백령의 벼슬은 한림학사에서 간관으로, 다시 대간이 되고, 승지가 되고, 승지에서 참판이 되었다.

 

  조광조의 세력을 꺾은 남곤, 심정은 김안로를 탄핵하고 경빈 박씨를 이용하여 그를 귀향 보냈다. 영의정 남곤이 중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대궐에 들어 온 난정이 아무도 몰래 쥐를 잡아 태워서 세자궁 뒤 당살구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이것을 전해들은 대비는 크게 노하여 범인을 색출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동궁과 후궁의 시녀들에게 국문이 시작되었고 세자의 자리를 노리던 경빈 박씨는 허망하게 쫓겨났다. 남곤이 죽고 김안로가 복직되었다. 심정은 사약을 받고 죽고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이 죽음을 받고 박빈의 인아족척들은 몽땅 몰락되었다.

 

  왕후는 사내 왕자를 낳았다. 임금은 난정에게 정경부인의 첩지를 내린다. 그러자 김안로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임금이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자 윤임과 김안로는 삼사를 움직여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전하는 이를 수용치 않는다. 난정은 임백령에게 서찰을 얻은 다음 옥매향을 임백령과 만나게 주선하고 그 서찰은 윤임에게 전해져 정경부인 문제는 해결되었다.

 

  난정의 계략으로 왕후는 임금에게 고하여 윤임에 의해 김안로가 제거되도록 한다. 김안로는 사약을 받았다. 김안로가 제거되자 정치세력은 윤임과 윤원형으로 대립되게 되었다. 나라의 정치는 완전히 전실과 후실의 싸움, 적자와 계자를 중심으로 한 파당 싸움으로 갈려지고 말았다.

 

  윤임이 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을 없애버리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후마마는 초췌해 갔다. 까닭을 알게된 전하는 임금의 자리를 내놓기로 결심하였지만 삼일만에 결심을 철회하였다.

 

  어느날 동궁전에 방화로 인한 불이 났으나 세자와 세자빈은 무사하였다. 그러나 동궁에 불이 난 이후로 전하는 정신과 몸이 더욱 피곤하고 늙어 갔다. 결국 전하가 승하하고 세자가 그 뒤를 이어 용상에 올랐으나 이미 병이 골수에까지 미친 상태였다. 대비의 생트집에 착한 임금은 유월의 폭염 속에 석고대죄를 한다.

 

  난정의 집으로 명산대찰의 중들이 드나들고, 무당 판수가 길을 터서 몰려들었다. 절마다 대군과 상감의 위패를 모셔 앉히고 대군에게는 수명장수를 상감에게는 빨리 세상을 떠나라는 암축(暗祝)을 올렸고 무당들은 굿을 했다. 상감이 병이 나자 대비는 거처를 상감이 있는 경복궁으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윤임 등의 반대로 크게 노하였으나 임금이 경원대군에게 선위를 하는 전교를 내렸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풀어졌다. 난정과 젊은 대비는 즐거운 웃음이 거둬질 사이가 없었다.

 

  인종이 승하하고 대비는 섭정을 시작한다. 윤원형 일당은 의기양양 우쭐대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대비는 윤임과 죄의정 유관을 귀양보내고 옥매향을 문초하여 그들에게 사약을 내린다. 이조판서 유인숙은 귀양살이를 떠났다가 사약을 받고 자진해 버렸다. 마침내 을사사화가 터지고 말았다. 섭정마마의 세상이 되었다. 그것은 곧 난정과 윤원형의 세상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문무백관들은 윤원형의 집으로 몰려들었고 곳간은 뇌물로 가득찼다. 삼천리 강산의 절반이 난정의 것이 되어 버렸다. 난정은 섭정마마를 부추겨 불교를 일으키고 요승 보우를 추천하니 그 또한 권세가 대단하였고 영의정 윤원형이 은근히 그를 도왔다. 윤원형과 난정과 보우의

세도는 이십 년을 뻗쳤다.

 

  명종은 이십이 넘고 섭정마마가 돌아기신 뒤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하게 되었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장살(杖殺)되고 난정은 독약을 마셨고 윤원형은 금부도사가 온다는 소리에 짐주(鴆酒)를 마셨다. 돌아간 섭정마마의 시호는 문정왕후(文定王后)였다.

 

  권력을 지향하는 음모와 암투, 권모술수, 여인이 등장하는 궁중비사는 항상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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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시대 100년 1-3권 (전3권) 세트
우리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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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시대(武人 時代)

                                                                                                         이성훈

  이성훈(1939. 3. 29 ) 서울출생. 서울사범학교, 성균관대 졸업. 1965년 문학춘추에 데뷔. 단편, 꽁뜨, 장편, 역사소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어서 썼다고 한다. KBS-TV에 방영되어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고려 인종 11년 섣달 그믐날 밤 나례(儺禮)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견룡대(牽龍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고 이에 격분한 정중부가 김돈중을 사정없이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부식은 정중부의 처벌을 요청했으나 인종은 그의 주청을 물리쳤다.

 

  그 때의 나라형편은 밖으로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면서 외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안으로는 서경 내란, 묘청의 난도 평정되었기 때문에 태평무사하여 문신이 무신들 알기를 제 집 종처럼 하고 있었다. 태조 왕건의 건국 초기에는 문무의 차별이 없었으나 광종 때 과거를 실시하면서 문무 양반의 차별이 생기고 관학(官學)의 성립과 사학(私學)의 발전에 따라 문귀무천(文貴武賤)의 사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인종의 뒤를 이어 20 여 세에 왕위에 오른 의종(毅宗)은 유흥에만 마음을 빼앗겨 놀이와 잔치를 지나치게 좋아했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날도 보현원 잔치에서 문신 한뢰가 임금의 놀이를 수행하여 수박희(手搏戱)하던 늙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신들의 참고 참았던 울분이 폭발했다. 밤이 되자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 등이 주동이 되어 문신들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피를 본 무신들은 더욱 흥분하여 눈에 보이는 문신들뿐만 아니라 궁으로 가서도 보이는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 북새통에 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와 김돈중은 몸을 피했지만 김돈중은 며칠 후에 붙잡혀 정중부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고 무비는 그 후 이의방의 차지가 되었다.

 

  거사에 성공한 무신들은 그동안에 다시 주색에 빠져든 무능한 의종을 폐하여 태자와 각각 귀향 보내고 그의 동생 익양후(翼陽侯) 명종(明宗)을 내세운다. 명종은 즉위한 다음날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정중부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고를 대장군 위위경(大將軍衛尉卿), 이의방을 대장군 전중감(大將軍殿中監)에 임명하는 등 하찮은 무부(武夫)들에까지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문신들의 도움없이는 아무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왕명으로 숨어있는 문신들을 불러내고 대사령도 내리는 한편 정중부, 이의방, 이고를 벽상공(壁上功臣)으로, 채원, 양숙을 차등공신으로 각상(閣上)에 도형(圖形)케 하였다.

 

  중방이란 원래 고려의 중앙 서반직(西班職 : 26)의 최고 무관인 상장군과 대장군 16명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기관이었는데 정중부 거사 이후에는 그 기능이 확대되어 무인정치의 핵심체로 군사는 물론 경찰 형옥, 백관의 임면 및 포폄 기타 주례의 판정 등을 처리하는 사실상 행정의 최고기관이 되었으며 더욱이 중방을 대궐 안의 왕이 거처하는 근처에 두고 항상 임금의 동정을 감시하고, 왕과 연락을 긴밀히 하도록 하는 등 중방정치를 실시하였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무능한 그들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나같이 그 전의 문신들과 같이 주색에 빠졌으며 내분까지 일어난다. 정중부의 아들 균과 사위 송유인이 감시를 하고 있는 중에도 이의방은 밤이면 무비를 중방으로 불러들여 그곳을 그의 놀이터로 삼는가 하면 궁녀는 말할 것도 없고 태후마마의 여동생까지 통간하고 그의 딸을 태자비로 앉히는 등 안하무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반역을 이유로 반란 동지 이고를 죽이고 채원도 죽인다.

 

  동북면 병마사인 김보당이 전 왕을 경주로 모시고 난을 일으키자 이의방은 양민과 문신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난을 평정하였으며 이의민을 시켜 전 왕을 시해케 한다. 의종은 살해된 후 큰 솥 속에 넣어져 연못에 수장 당했다.

 

  집권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세력과 피의 보복, 계속되는 민란으로 정중부는 지쳐 갔다. 정중부는 칭병하여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집에 들어누웠으나 이의방과 그의 형 이준희가 찾아와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된다. 그 무렵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어서 승려들의 반란도 일어났다. 이의방은 사원을 불사르고 승려들을 도륙했다. 그런 그는 결국 연회석상에서 벌거벗고 계집을 껴안고 있다가 균에 의해 살해된다. 명종은 기뻐 정중부를 다시 문하시중으로 임명하고 정균에게는 추밀원 승선 벼슬을, 송유안에게는 추밀원 부사에 병부상서를 겸하게 했다. 조위총의 난이 끝나갈 무렵 천민인 망이, 망소이가 또 반란을 일으키지만 가까스로 난은 진압 된다.

 

  이의방이 죽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의방 대신 정균이 안하무인으로 궁중에서 설치고 있을뿐. 정균은 이의방이 차지했던 집이며, 재물이며, 무비며,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빼앗았다. 태후의 사저(私邸)와 별궁도 가졌다. 권력을 잡고 보니 욕심 밖에 나는 것이 없었다. 왕에게 공주까지 아내로 달라고 한다.

 

  “뿌린대로 거둔다던가?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고 정균의 지나친 욕심과 오만방자함은 경대승에 의해 징치(懲治) 된다. 경대승은 그를 따르는 견룡대정 허승, 김광림과 손을 잡고 정균, 정중부, 송유인을 척살한다. 그리고 이의민을 붙잡으러 하였으나 그는 자취를 감춘다. 거사 후 경대승은 임금을 안심시키고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자신을 경호하기 위하여 일종의 사병 집단인 도방(都房) 설치하였고 이후 도방으로 인한 피해와 허승, 김광림에 대한 피해가 극심해지자 그는 손수 허승와 김광림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도 잠들었다 깨어나지 못한.

 

  이의민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 이의민은 키가 팔 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다. 정중부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보현원 거사, 김보당의 난, 의종 시해 등을 거치면서 대장군이 되었다. 경대승 집권시 숨어 있다가 그가 죽고 나자 임금을 겁박하여 중서문하 평장사의 공신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무신들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가 계집종과 상관하니 그의 처는 건장한 종놈과 수작을 벌였다. 그의 세 아들 지순, 지영, 지광도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그런데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일어나자 그의 아들 이지순을 시켜 신라 부흥을 부르짖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임금의 자리를 노리기도 한다. 이지영은 국경지대를 시찰하면서 미색이 뛰어난 자운선을 데리고 왔었다. 최충헌이 어느날 연회석에서 자운선을 보고는 그녀를 빼앗아 오기로 결심한다.

 

  최충헌은 동생 충수와 거사를 단행한다. 이의민 4부자가 척살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이의민과 그의 아들들은 삼족을 멸했으며 이의민의 일당, 심지어 그들의 노비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또한 최충헌의 숙청에 반대하거나 반기를 든 일부 장군들은 그 자식까지 죽여 반역의 씨를 말려 버렸다. 봉사 10조를 주상(奏上)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지만 임금은 미온적이고 해서 임금을 폐위시키고 신종(神宗)을 옹립(擁立)한다. 경승은 귀향을 보낸다.

 

  왕위 찬탈까지 권유하던 최충수는 태자비를 폐위하고 형과 상의 없이 그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자 하였으나 최충헌이 이를 반대하자 형제는 칼부리를 마주한다. 세에 밀린 충수는 임진강을 건너고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추격병들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도 태자궁에 들어가려던 그의 딸이 임진강까지 가서 물에 뛰어 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후 더욱 튼튼하게 지위를 다져 가며 그가 처음부터 꿈꾸었던 개혁 의지를 실천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정중부 이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의심이 가는 자는 가차없이 숙청을 가했다. 살해 음모에 대비하여 도방을 차리고 웬만한 것은 도방에서 처리했다. 때때로 자기 집에 문무관 3폼 이상을 모아 국사를 논의하기도 했다. 외출할 때에는 임금님 행차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했다. 물론 사병(私兵)도 양성했다. ‘더 이상 무신 간의 싸움은 없어야 한다. 내가 마지막이다이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꼭 필요한 자리에는 문신을 등용하고 과거를 실시하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나?” 민란은 계속되고 그의 종 만적도 난을 도모하다 붙잡혀 수장 당한다. 그는 더 한층 강경 일변도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최충헌의 허락을 받고 신종이 물러나고 희종이 보위에 올랐다. 희종은 최충헌에게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사(守太師),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상장군(上將軍), 상주국(上柱國), 판병부어사대사(判兵部御史臺事), 태자태사(太子太師). 희종은 특히 그를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부르며 그후로도 여러 칭호와 식읍을 내렸다. 최충헌은 흥녕부를 세우고 교정도감을 설치한다. 차츰 반란 세력의 소요가 줄어들긴 했으나 아직도 그의 목을 노리는 세력은 그치지 않았.

 

  최충헌은 이의민을 죽일 때, 아우 충수와 싸울 때,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할 때 등 항상 자신의 편이었던 생질 박진재를 의심하여 고문하고 다리의 힘줄을 잘라 귀향을 보내 그를 죽게한다. 물론 박진재의 문객들도 모두 숙청한다. 그는 진강후로 책봉되었고 사실상 나라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 희종 5년에 청교역 반란 음모가 발각되자 이를 구실로 희종을 폐위하고 강종을 추대한다. 60에 보위에 오른 강종은 2년 뒤 승하하고 고종이 그 뒤를 잇는다.

 

  고종 3. 나라의 형편이 외우내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몽고가 강국으로 등장하자 그에 쫓긴 거란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침입 해 오지만 평소 국방을 등한시 해 온 고려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결국 몽고와 형제지국으로 국교를 맺고서 위기를 수습한다. 이런 난리에는 최충헌이 맥을 못 추었지만 그의 자식을 왕손과 혼인시키고 자신은 왕씨 성을 하사 받는 등 경사와 영화가 그치지 않았다.

 

  최충헌이 병이 들자 또 한 차례 최씨 가문을 노리는 반란 모의 있었지만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그 뒤를 이었다. 고종 8년 임금은 최우를 진양후(晋陽侯)에 봉했다. 최우는 집권하자 인심을 얻는 일도 하였지만 교정도감, 도방, 정방 정치를 하였다. 그리고 좌·우별초와 신의군의 삼별초를 조직하였다.

 

  고종 12년 평소 횡포가 심했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에서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도 1, 2년 아무말이 없던 몽고가 6년만인 고종 18년에 갑자기 침략해 왔다. 그 이전 고종 14년에에 최우는 주연지와 관련하여 그의 심복 김희제와 그의 세 아들과 여러 사람들을 죽이고 귀향을 보냈다.

 

  최우의 아우 향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잡혀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종 18년 몽고의 살례탑이 압록강을 넘어 몽고 땅을 침입했다.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화의가 성립이 안되자 몽고군은 그들의 야만성을 그대로 발휘하여 집과 재물을 모두 불 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닭이나 개 등 가축까지 씨를 말렸다. 최우는 강화로 천도(遷都)를 결정한다. 몽고의 2차 침입은 처인성에서 살례탑이 승려 김윤후에 의해서 죽자 실패로 돌아갔다. 3차 침입은 당고(唐告)가 역적 홍복원을 앞세워 밀고 내려왔다. 이때 신라 이래로 국보인 황룡사 구층탑이 소실되었다. 조정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팔만대장경 조판에 착수 한다. 고종 24년부터 14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81,137판의 팔만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최우가 쓰러졌다. 최우는 창기인 서련방이라는 여자가 낳은 두아들 만종과 만전이 있었는데 모두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위인이라 머리를 깎아 중을 만들었으나 그 또한 비행이 극심하여 부득이 만전을 환속시켜 이름을 항이라 고치고 벼슬을 주고 가병(家兵)도 나누어 주었다. 그가 최우의 뒤를 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항하면서 그에 반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고 주색에 탐닉하다 죽고 아들 의가 그 뒤를 이었으나 김준이 반란을 일으켜 최의의 목을 베었다. 최씨 4대 육십 여 년의 무단정치가 막을 내렸다. 김준은 원래 최우의 심복이었으나 최우의 총희와 간통을 하다 적발되어 고성으로 귀향을 갔다가 다시 부름을 받은 바 있었는데 그가 반역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도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몽고는 침입을 계속하고 출륙환도와 국왕의 친조를 재촉하였다. 더 이상 몽고에 대항할 힘을 잃은 고종은 태자를 몽고에 보내 몽고를 섬기기로 하였다. 사실상의 완전 항복이었다.

 

  고종이 승하하고 태자가 귀국하여 임금이 되었다. 그가 곧 원종(元宗) 임금이다. 김준의 뜻에 따라 차일피일 환도를 미루던 원종은 친조하여 몽고의 세조를 만나고 환국한다. 횡포가 극심했던 김준도 임연에 의해 죽고 임연 또한 원종을 폐하였다가 복위시키기도 하는 등 그 횡포는 전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임연은 갑자기 등창이 터져 죽고 말았다. 아들 임유무는 자형(姊兄)인 홍문계와 송송례에 의해 죽고 원종은 환도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신으로 뭉쳐 진도, 탐라로 이동하면서 끝까지 몽고에 저항하였다. 그 뒤 삼별초의 잔당을 이끌고 다시 저항하던 김통정도 결국 죽고 생포돤 장수들도 처형 당했다.

 

  결국 무신정권도 외세에 의해 종말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의 악순환, 그 가운데 백성들의 엄청난 고통.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인데도 오직 자신의 권력만을 탐한 그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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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1-5 (전5권)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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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野人時代)

                                                                                                         이환경

  이환경(李煥慶 1950. 6. 20 ) 인천 출생. 대한민국의 대표 사극 드라마 작가. 한국인의 역사인식에 이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아직 없다고 한다. 대표작품으로는 무풍지대, 파천무, 용의 눈물, 야인시대, 태조 왕건, 영웅시대[2], 제국의 아침, 연개소문 등이 있다.

 

  김두한의 이야기는 장군의 아들 등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진 바 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일대기를 그린 동명의 SBS 드라마 원작 소설이다.

 

  1966. 9. 22 정기국회 이틀째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던 김두환은 국무위원들을 향해 똥물을 퍼부었다. 그리고 수감되었다.

 

  김두한은 1918. 5. 15 서울에서 아버지 김좌진과 어머니 박계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좌진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독립군 사령관이었고, 조부는 홍성의 만석꾼 김형규라는 인물이었다. 김형규는 김좌진을 김옥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개화사상이 투철했던 김좌진은 1907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애국운동에 뛰어들었다. 군자금 모금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1917년 대한광복단으로 활동을 하다 일본 순사의 총에 맞고 도주 중 박계숙을 만났고 김두한이 태어나기 전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는 항일전쟁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린다.

 

  그러나 김좌진이 명성을 날릴수록 박계숙은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다. 김두한의 외조모인 신씨가 비록 유복한 살림을 하고 있었으나 이로 인하여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정도였다. 김두한은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의 일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미와 경부는 박계숙을 매질하고 혹독하게 고문한다. 김두한은 일본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파랗게 불을 뿜고 있었다. 김두한은 순사들의 눈을 피해 외할머니와 원노인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만주로 떠나 아버지를 만난다. 김두한은 아버지에게 회중시계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서울로 향한다. 열차가 평양을 지날 무렵 외할머니는 숨을 거두고 김두한은 원노인과 달리는 열차를 탈출한다. 박계숙은 풀려났지만 고문에 의한 장 파열로 숨을 거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김두한은 개성에 있는 외삼촌 박도출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도박과 아편에 빠진 박도출은 아버지의 회중시계를 빼앗아 악질 고리대금 업자 가네야마에게 잡혔고 김두한은 시계를 되찾고 가네야마의 집을 불태우고 도망친다. 김두한은 산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태권과 나석주를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순사들에게 쫓기면서도 무사히 경성에 돌아온다. 종로경찰서 앞에서 미와 경부를 만나 쫓기다 거지 정진영과 왕코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그들의 식구가 되어 수포교 시절을 시작한다. 그리고 왕초의 횡포에 맞서 왕초를 꺾고 새로운 왕초가 되었다.

 

  김두한은 삼청동에서 할머니와 큰어머니 오숙근을 만난다. 그리고는 원노인을 따라 살게 되고 그곳에서 유태권을 다시 만난다. 유태권은 무술의 고수였다. 김두한은 매일매일 체력을 단련하며 훈련하고 그로부터 무술 필살의 도를 배운다.

 

  몇 년이 지난 어느날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원 박상실에게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백야 김좌진 그는 불과 41세의 나이로 머나먼 북만주 땅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유태권이 만주에서 김두한을 데리러 보낸 최석규가 체포되고 원노인과 김두한도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원노인은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고 김두한은 풀려났다. 삼청동에 들런 김두한은 할머니로부터 군자금 거금 1백 원을 받아 나와 종로로 향했다. 중국 밀선을 주선하겠다며 돈을 삼켜버린 털보를 조지고 김무옥을 병원에 입원시켜 버린다. 뿐만 아니라 보복을 위해 찾아 온 문영철을 돌려차기 한 방으로 끝내 버린다. 김영태의 전갈(傳喝)을 받고 만난 쌍칼은 돈을 돌려주며 독립운동은 만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듣고, 또한 그는 요시찰 인물로 만주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는 그의 부하가 되어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혼마찌의 하야시패가 종로를 넘보기 시작함으로써 종로 일대의 주먹세계에는 태풍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국의 주먹황제라고 할 수 있는 구마적 고희경은 총독부를 등에 업은 하야시패와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고 그에 가장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신마적 엄동욱과 쌍칼 김기환이었다. 신마적은 칼을 잘 쓰고 동경 유학까지한 인텔리였고 힘이 장사였지만 성격이 포악하여 부하들이 따르지 않아 독불장군으로 행세했다. 하지만 구마적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구마적과의 결투에서 패한 쌍칼은 조직을 떠나고 18세의 나이로 김두한이 종로 2가 주먹패의 새로운 오야붕으로 탄생한다.

 

  그런데 구마적은 종로 2가를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한다. 그러나 강하게 반발한 김두한은 구역을 접수하러 온 뭉치와 제비를 간단히 제압하고는 종로경찰서로 끌려 갔다 나온다. 김영태와 부하들은 구마적의 반격을 두려워 하며 마음 졸인다. 그런 중에도 신마적은 구마적의 부하들을 패고 김두한에게 행패를 부리고 일본 학생들을 두들기는 등 독자행보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구마적은 하야시와 결탁하여 종로를 넘기고 이권을 취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명월관에서 설향에게 행패를 부리는 신마적을 찾아 간 김두한은 격투 끝에 신마적을 병원으로 보낸다. 얘기를 들은 구마적은 김두한이 점점 무서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더 이상 놔두지 않기로 결심한다.

 

 종로패에게 상납금을 받으러 왔던 상하이박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김두한은 영철의 애인 아이란을 구하기 위해 하야시의 저택에 침입, 그로부터 현금 3천원을 강탈한. 하야시는 복면을 한 김두한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호시탐탐 앙갚음을 노리던 우미관패에 급습을 당하여 김두한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뭉치와 상하이박이 휘두른 각목을 맞은 김두한은 김영태에 업혀 길상사로 피해 누워 있었다. 그들이 떠난 종로는 우미관패들이 점령하여 상인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김두한이 돌아왔다,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김두한은 멋지게 구마적을 제압하고 우미관을 접수했다. 우미관패들은 뿔뿔히 헤어졌다.

 

  김두한의 변한 모습을 본 할머니는 크게 실망한다. 김두한은 오야붕 회의를 소집했으나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찾아 나선다. 서대문의 작두를 제압하고 마포의 용식이를 압박하고 있을 때 상하이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상하이박은 하야시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 당하고 결국 김두한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포의 용식이와 시구문의 짝코도 굴복하므로서 김두한은 명실상부한 암흑가의 황제가 되었다.

 

  훔친 아편을 국내로 들여와 처분하려던 와싱턴이 야쿠자 아사히마찌패의 두목 다나카에게 초죽음이 되었을 때 김두한이 나타나 다나카를 부수고 아편을 불살라버린 다음 그를 구해 치료까지 시켜 준다. 그런 중에도 하야시의 처제 나미코의 구애를 거절하고 불량 학생들로부터 구해준 박인애를 만나 데이트를 즐기던 김두한은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고발되어 미와 경부에게 체포된다.

 

  나미코의 방문을 받은 박인애는 아버지에게 김인식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김두한을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는 고발을 취소한다. 그러나 요 시찰 인물인 김두한은 8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난다. 출감하여 보니 종로경찰서에 마루오카 형사가 부임해 있고 조직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한 달 동안 김무옥을 시켜 마루오카의 약점을 파악한 김두한은 마루오카에게 도발하여 그를 굴복시키고 오히려 그와 친하게 된다. 그후 평양축구단과 231의 싸움으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도 마루오카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

 

  하야시패와의 대립은 서로 물러설 수 없게 되고 드디어 쌍방은 4040의 결투를 합의하였다. 그런데 김두한이 나미코를 만나고 있던 그 시간 아사히마찌패가 종로 곳곳을 기습하여 아수라장을 만들고는 들이닥친 순사들에게 우미관패들과 함께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위기에 처한 김두한은 새벽에 홀로 장충단공원으로 가서 40명의 사무라이와 혈투를 펼친다. 몇차례 칼을 맞은 위기의 순간 3명의 부하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어 함께 처절한 혈전을 펼친다. 지친 김두한 일행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고노예와 하야시가 현장에 나타나고 가미소리의 비겁함을 질책하며 그들은 물러간다. 그 후 병원에 찾아 온 하야시는 패배를 인정한다. 김두한은 우미관으로 돌아왔다.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 지고 일본의 압제도 더욱 극렬해졌다. 그 무렵 정진영은 공상당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레슬링 선수 황병관과 함께하던 자리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일본 헌병과 시비가 붙어서 3개월 동안 몸을 피해 우미관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부하들은 모조리 잡혀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김두한은 다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으나 노무라 대위와 약속한 유도 유단자 3명을 쓰러트리고 헌병대에서 석방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말썽을 피우던 상하이박은 마침내 주먹패 5백 명이 보는 앞에서 도끼로 손목이 잘리는 댓가를 치뤘다. 징용장을 받은 많은 주먹패들이 김두한에게 대책을 요구했다. 전국의 주먹패들이 모여 들었다. 총독부의 단게 총감을 만난 김두한은 반도의용청년대를 조직하고 주먹패들의 징용을 막아내었다. 그때 이정재가 청년대의 서기 일을 맡아 보게 된다. 일본은 또 김두한을 이용하기 위해 청년단 이정재 등 3명을 경찰로 임용까지 한다. 그런데 그들이 고등계 문달영을 체포해 취조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두한은 김부미와 결혼한다.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고 다이너마이트를 구해 주었던 김두한은 또다시 미와 경부를 만나 고문을 당한다. 일본이 항복하고 김두한은 석방되었다. 그를 괴롭히던 미와 경부는 그의 부하 신영균에 의해 타살되었다.

 

  해방 정국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산당이 싫어서 평양을 떠나 온 황병관과 이화룡을 만나고 백의사 박용직을 만난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상실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산주의 활동과는 손을 끊고 백의사 단원으로 가입한다. 그리고는 박헌영을 납치하는 임무가 맡겨진다. 그러나 임무는 실패로 끝나고 정진영과 적으로 돌아섰다. 김두한은 유진산을 만나 대한민청 감찰부장 자리를 맡는다. 조병옥과 장택상도 만난다.

 

  시라소니와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두한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 찬탁, 반탁 시위가 계속되면서 좌,우익의 충돌이 갈수록 심해졌다. 민청의 활동비가 부족하여 오숙근의 집도 잡히고 장안의 부호들도 털었다. 여운형 납치 사건과 관련하여 CIC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는가 하면 철도노조 총파업 현장에 뛰어 들어 사태를 진압하기도 하는 등 좌익 활동을 분쇄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을 계속 했다. 그 과정에서 여공을 강간하던 양코가 김두한의 총탄에 응징을 당한다. 조선민청 대원들의 함정에 빠져 총상도 입었다. 대한민청 대원들은 시공관을 습격하고 조선민청 정진영과 김천호를 타살한다. 김두한은 살인교사범으로 체포되어 CIC로 끌려간다. 김두한은 사형선고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 형무소로 이송 되었다. 그는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되었다. 이듬해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 했다. 부산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훈련시킨 김두한은 포항전투에 참전한다. 김무옥과 문영철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김두한은 서울로 올라 왔다. 휴전이 되고 김두한은 대한건설부흥단을 건중친목회로 전환시켰다. 그곳에는 막대한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주먹들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이정재는 해방전 반도의용대의 김두한 밑에서 총무를 맡기도 하였으나 그와 결별했고 피난시절에는 부산의 토박이 주먹들에게 위기에 몰렸을 때 시라소니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동대문파의 보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기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정치테러의 배후에 항상 그가 있었다.

 

  조병옥의 권유를 받은 김두한은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한다. 김두한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종로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자유당의 공작으로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 되어 자유당에 입당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건중친목회는 이권 분배 문제로 부하들간의 갈등이 표출된다. 평소 시라소니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정재의 부하들이 시라소니를 암습하여 만신창이를 만들고 이석재는 그나마 온전한 왼쪽 다리마저 쇠뭉치로 박살을 냈다. 이 사건으로 시라소니는 무려 6개월 간 병원 신세를 졌고 그 이후로 암흑계를 떠나 기독교에 귀의하여 죽을 때까지 선교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동대문파와 명동파는 결국 화해를 했다.

 

  김영태와 신영균도 이제는 국회의원인 김두한을 떠나야 했다. 이정재는 동대문 상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력조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라소니에 대한 복수로 전 켈로부대 대원들의 습격이 있었다.

 

  3선 개헌으로 국회는 아수라장이었다. 이정재를 위시한 정치 깡패들은 국회에까지 들어와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김두한이 특무대에 연금되는 동안 3선 개헌은 부결되었으나 정부는 사사오입하여 가결이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정치가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인 40명을 제거하라는 밀명을 받은 김동진이 이영숙과 손을 잡고 조직을 배신하자 이석재는 김동진을 저격한다. 이정재는 조직을 유지광에게 맡기고 구속된다. 유지광은 남은 이영숙마저 제압한다. 이정재는 18일만에 석방되었다. 부패한 정권을 등에 업은 동대문 사단의 행패는 갈수록 심해졌다. 연예계를 휘어잡고 있는 임화수는 김희갑을 폭행하기도 하는 등 온갖 행패를 일 삼았으며 유지광의 부하들은 선거 유세장마다 나타나 야당 활동을 방해했다. , 부통령 선거에서 개표부정까지 모의했지만 이기붕은 결국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이정재의 정치행사에서의 깡패 행위는 더욱 심해지고 김두한과는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국회에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며 김두한에게 도발하지만 김두한은 주먹이 아니고 국회의원이었다.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은 이대통령의 양자로 경무대로 들어 간다. 민주당은 장충단 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계획하고 그 경비를 김두한이 맡아서 옛날 부하들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연설장에 난입한 유지광이 이끄는 폭력배들은 국회의원들을 폭행하고 난장판을 만든다.

 

  이정재가 유지광을 앞세워 명동을 공격한다. 함정에 빠진 명동파는 차례로 구속되어 살실상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정재는 명동이 붕괴되자 이천으로 내려가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낙선을 우려한 이기붕이 이정재의 선거구를 가로챘다.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패배했고 이정재는 동대문을 임화수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조병옥이 서거하고 선거는 장면과 이기붕의 대결이 관심사였다. 마침내 운명의 3. 15. 자유당의 지시를 받은 임화수와 유지광은 몰표를 투표함 속에 넣기 시작했다. 한 낮이 되자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유지광 일당이 고대생들을 습격한다. 이것이 기사화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고 마침내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를 하고 만다. 결국 이기붕 일가는 자살하고 이승만 대동령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다.

 

  장면과 선거구가 겹쳐 홍성에서 출마한 김두한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과도정부가 들어서고 동대문 조직이 모조리 검거되었다.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고 종로의 보궐선거에 도전하였지만 다시 고배를 마신다. 그리고 5. 16 쿠데타가 일어났다. 폭력배 1,500. 전국에서 활약하던 주먹패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혁명재판부의 선고에 의해 이정재, 임화수는 사형 집행되고 유지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는.

 

  김두한은 김종필과 손잡고 애국단을 발족시킨다. 그러나 김종필이 외유를 떠나자 조직은 힘을 잃었고 김두한은 또다시 선거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김종필의 권유로 출마한 용산의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던 김두한은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나기도 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6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그 후 야인이 된 김두한은 여러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으나 잘 된 것이 없었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천하에 비열하고 뻔뻔스럽고 교활하고 음흉한 것이 정치인인데 김두한이 어울렸을까? 그는 국회에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풍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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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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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 훈

  김훈(1948. 5. 5 ) 서울출생. 고대 영문학 중퇴. 오랜 기자생활 후 1994년 문학동네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데뷔 여러편의 작품이 있다.

  작가가 20대 초반 난중일기를 읽고 그 때의 감정을 30년이 지난 다음 작품화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임진란이 나고 이순신 장군이 탄핵되어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나 백의종군할 때부터 적의 유탄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장군이 작가에 빙의(憑依) 되어 자기 서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남해안의 버려진 섬들, 그 위로 자욱하게 내려앉은 숨 막히는 적요(寂寥), 바다를 가득 메운 떠다니는 시체들, 간간히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시체 썩는 냄새, 징징징 칼의 울음이 들리는 듯하다.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수천수만의 적들의 노 젓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칠천량에서 대패, 전멸하고 원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원수 권률이 진주에 들렀다가 온다는 전갈이다. 그러나 진주성은 계사년 함락되어 5천 여 관민이 모두 성안에서 도륙되어 폐허로 방치되어 왔다.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어머니를 뵈올 때는 늘 어서 가거라.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고 하셨다. 임금으로부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았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 3마리를 잡고 술 10말을 풀어 굶주린 장졸들을 먹여 격려하고 인근 마을의 백성들에게도 보냈다. 군복도 제대로 걸친 자가 없다. 우수영엔 군사 120명과 배 12척뿐이다. 명량으로 유인하여 적을 맞는다. 일자진을 펼치고 나아가고, 밀고, 떨어져서 멀리 쏘고 적을 섬멸한다. 전투가 계속되는 중에도 탈영병은 수시로 발생한다. 명량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몰려왔고 수를 셀 수 없는 적들이 죽었다.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은전 스무 냥의 무게가 섬뜩했다.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은 열흘 동안이나 수영에 머물면서 탈영한 배설에 관해 조사한다. 임금은 수군통제사의 역모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면사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은 고향 아산에서 스물한 살의 나이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다 적의 칼을 받았다. 소금창고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명의 육군에 의해 남하하여 경상도에서 전라도에 이르는 남해안 8백리 포구마다 성을 쌓고 장기 농성 태세로 들어갔다.

간간이 새로운 배들이 만들어 졌다. 간헐적인 전투는 발생하지만 적들은 오지 않았다. 새칼에 검명(劒銘)을 새겼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임진년에는 갑옷을 벗을 날이 없었다. 임금은 의주로 피난하고 선왕들의 능이 파헤쳐졌다. 임금은 압록강 가에서도 자주 울었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크게 달랐다. 바다에서, 적들은 늘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적의 함대는 무수한 깃발로 뒤덮혀 있었다. 적들은 젊은 수탉처럼 치장하고 살기를 뿜어냈다. 적들이 무너지는 모습도 달려드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임금은 조속히 적을 무찌르라 독촉한다. 적은 조선인 포로를 전진 배치하여 또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정유년 지나고 무술년이 되어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 소문이 퍼져 있었다. 명의 총병관 진린이 수군을 지휘하여 남해안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군대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한다. 왜군은 이제 철수할 것이다. 진린은 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득만을 챙겨 돌아갈 것이다. 임진년보다 더 크고 깊은 무서운 적의로 나는 잠들지 않았다.

  밤이면 해안과 섬에 적들의 봉화가 올랐다. 비가 내리는 새벽 거금도 남단을 우회하는 적들의 외곽을 봉쇄하여 달이 뜰 무렵에 싸움이 끝났다. 적선 50척이 깨어졌고 50척이 달아났다. 적들은 부상자 5백 명을 죽이고 조선인 포로 중 병약자 3백 명을 죽여 바다에 버렸다. 적이 물러가버린 빈 바다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오는 적보다 가는 적이 더 무서웠다.

 

  노량의 물길은 사나웠다. 나는 빌고 있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을 계속 울려라 ……………

 

  앞에는 왜적 뒤에는 임금, 이순신 장군의 절망을 강하게 느낀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거룩함과 숭고함을 다시 새긴다.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은 당시 일본에서 조차 무서워 했음을 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그가 지휘한 해전은 세계해전사에도 그 이름을 남겨 일본의 장군들도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위태로움에 처했을 때 生卽必死 死卽必生으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민족의 영웅, 장군을 존경한다.

 

  여담이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장군의 동상은 그냥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적 경의의 실체(實體)이며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는 민족의 자긍심이다. 얼마전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의 장군 동상을 외진 곳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발상 자체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역사를 잊는다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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