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숲에서 - 바이칼에서 찾은 삶의 의미
실뱅 테송 지음, 비르질 뒤뢰이 그림, 박효은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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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에 대한 갈급함은 책읽는 이들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익숙한 작가의 이름도 좋지만, 또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할 모르는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나는 전혀 거리낌이 없다. 아니 오히려 환영한다.

 

<노숙 인생>이라는 책으로 나는 실뱅 테송을 알게 됐다. 단편집인 <노숙 인생>을 읽다 말고, 그의 다른 책도 조금 읽었다. <눈표범>이라는 책도 재밌게 읽기 시작했는데 못다 읽고 결국 반납했다. <노숙 인생>도 마찬가지. 그래도 이 책을 쉽게 읽겠지 싶어 도전한 책이 바로 그래픽노블 <시베리아의 숲에서>란 책이다.

 

지구상에서 춥기로는 어디에 뒤지지 않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 6개월 정도 은둔하는 삶을 살겠다며 실뱅 테송은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득 오래전, 일 년 중 어느 계절에 미디어 다이어트를 하신다는 교수님이 기억났다. 우리는 너무 미디어에 노출되어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중동에서 분 바람 덕분에 당장 출퇴근하는 차에 넣어야 하는 기름값이 오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난 다른 건 모르겠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중단하고 시베리아로 몇 개월씩 떠날 수 있다는 작가의 여유가 부러웠다.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 묶여 도저히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수은주가 떨어지고, 여름이 되면 곰돌이들이 출몰하는 그런 곳이 이 기인 같아 보이는 작가에게는 낙원이었다니.

 

실뱅 테송이 시베리아에서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번잡한 도시생활에서 읽지 못한 책들을 읽는다던가,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고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주변의 지인들을 찾아가 말동무를 하거나 그러는 것. 아니 어쩌면 그런 거야 말로 우리네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없다면, 러시아의 기나긴 겨울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오두막으로 떠나기 전에 다양한 물품들을 준비하긴 했지만, 역시 나같은 책쟁이에게는 작가가 나름 치밀하게 준비한 책궤짝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윙거의 일기, 사라진 70년대>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 여기서 말하는 윙거는 내가 아는 바로 에른스트 윙거일까? 그의 책은 <강철 폭풍 속에서> 정도 읽은 게 전부인데, 전쟁일기도 있다고 하니 궁금해진다. 지금 찾아 보니 윙거 작가의 책들이 모두 절판되었군 그래. 이래서 책은 읽지 않더라도 이렇게 절판을 대비해서 일단 사두어야 한다는.

 

읽은 지가 제법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프랑스에 있는 여자친구가 작가에게 이별 선언 정도. 어떤 관계라도 단절은 참을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인 실뱅 테송에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시베리아 6개월 살기 체험은 글쓰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일지 모르지만, 그의 여자친구에게는 또다른 이름의 시련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뛰어 넘는 관계라면 실뱅 테송이 복귀했을 때 좀 더 단단한 관계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래픽노블에서처럼 빠른 정리가 필요하다.

 

도시인들에게 시간은 항상 부족한 무엇이지만, 바이칼 호수 통나무집에 살림을 차린 누군가에게 시간은 넘쳐 흘러 주체할 수 없는 물질이다. 그렇게 주변에 자신의 사유를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당연히 사유는 깊어지겠지.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지고, 그런 생각들을 가다듬어 자신만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까 실뱅 테송에서 6개월이라는 시간과 바이칼 호수의 외딴 통나무집은 작가로서의 삶에 있어 어느 순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노라고 지적하고 싶다.

 

나중에는 이웃에 사는 지인이 강아지 두 마리도 가져다 주지 않았던가. 가끔 너튜브로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면서, 야생에서 전문가처럼 뚝딱뚝딱 통나무집을 짓는 콘텐츠를 보고 하는데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화면에 강아지 한 마리라도 등장하게 되면 콘텐츠에 갑자기 활력이 생기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니 어쩌면 실뱅 테송은 과거에 이미 이른바 부시크래프트 콘텐츠를 기획한 선구자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늦겨울부터 시작해서 초여름까지 바이칼 호수에서 지낸 작가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스케치가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실뱅 테송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엉뚱하게도 수년 동안 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바이칼 호숫가로 떠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그 좋아하는 책읽기마저 금방 질려 버려서, 시시껄렁한 너튜브 콘텐츠 타령을 하게 되지 않을까.

 

이제 그래픽노블로 워밍업을 했으니 오리지널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전에 도중에 포기한 <눈표범>부터 읽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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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4-2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작가도 이렇게 알게 되네요. 그래픽노블이라 읽어볼려구요. 늦겨울에서 초여름까지의 숲생활 부러워지네요.

레삭매냐 2024-04-23 16: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새로 나온 책인
<노숙 인생>이란 책으로
실뱅 테송을 알게 되었네요.

그림만으로도 바이칼 호수
오지 언저리의 고독함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구요.
 
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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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다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었다. 그 때는 아디치에 작가의 책이 궁금해서, 그리고 이번에는 내일 참전할 달궁 모임 책으로. 처음 읽었을 적에도 그해에 손에 꼽을 만큼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다만 한 보름 정도 걸려서 천천히 하지만 막판에는 스퍼트를 내서 읽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리뷰를 썼겠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숙고하는 그런 느낌으로 뜸을 들여서 리뷰를 쓰게 됐다.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지금으로부터 21년에 발표된 작가의 데뷔 소설이다. 아니 그런데 초짜 작가가 이런 세련된 책을 썼다고? 지금은 예전처럼 활발하게 작품 활동(소설 쓰기)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좀 아쉽다. 그녀가 쓴 마지막 소설은 11년 전에 나온 <아메리카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다 읽고 나서 바로 9년 전에 읽다만 <아메리카나>를 펼쳐 들었다. 과연 이번에는 다 읽을 수 있을까.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화자는 이제 곧 15살이 되는 소녀 캄빌리 아치케다. 에누구에 있는 가톨릭 계열 여학교에 다니는 캄빌리는 무척이나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캄빌리는 웃지 않는, 또래 친구들에게 이른바 재수탱이 같은 존재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건 바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집안에서는 독재적인 모습의 짜르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영국 유학 출신의 타인을 돕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는 지식인 모습을 한 아버지 유진이 자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래서다.

 

자신의 아버지 파파은누쿠를 이교도라 부르며, 그의 개종을 원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다. 유진은 일찍이 서양 문물의 수혜를 입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전통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러니 여전히 미개한 전통주의 혹은 미신을 숭배하는 아버지와 결코 화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야말로 아치케 집안이 사는 땅인 나이지리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군인들이 헌정을 뒤집고 자신들만의 무법 천지를 만드는 건 일상이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유명한 산유국이면서도, 기름 부족으로 캄빌리의 지식인 고모 이페오마네는 자동차를 굴리지 못하고 정전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인식된다.

 

신문사 <스탠더드>를 운영하는 발행인 유진은 편집자 아데 코커를 전폭적으로 후원한다. 그가 정권을 탈취한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스타일의 칼럼을 실어도 그를 해고하지 않는다. 물론 그에 따른 후과는 예상을 초월하는 비극으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자신의 성공 방정식에 도취한 유진 아치케는 자신의 아들인 자자와 딸인 캄빌리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길 바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사 지식인 행세를 하는 유진이 구사하는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다. 아들 자자의 왼손가락을 망치질 않나, 사촌 형제가 그려준 파파은누쿠의 미완성 초상화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펄펄 끓는 물을 자식들의 발에 부어 징벌한다. 자신이 예전에 서양 출신 선교사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아디치에 작가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여전히 나이지리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위선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영국 제국주의는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리아 이보족과 하우사족에게 문명과 종교를 이식하는 동시에 그들의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착취했다. 우선 종교를 앞세워, 전통적인 것들을 모두 미신과 이교적이라는 이유로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렇데 정신적 불모지를 만든 다음에 자신들의 신을 강압적으로 나이지리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파파은누쿠 세대와 유진 세대의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전히 해방될 수 없는 식민주의 잔재의 어두운 그늘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포스트콜로니얼적 배경을 파악한 상태에서 아디치에 작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는다면 좀 더 수월하게 텍스트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아버지 유진의 꼭두각시 같았던 존재였던 자자와 캄빌리가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은수카의 이페오마 고모네 식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그동안 아버지 유진에게 세뇌 받아온 것들이 모두 모순적 위선에 기반한 무엇인가라는 점을 작가는 현란한 소설적 빌드업을 통해 구현해낸다. 당연히 자자와 캄빌리는 이 과정을 통해 삶에서 다음 단계로 성장한다.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현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자자와 캄빌리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변신한다. 평생을 아버지 유진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 과정을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아디치에 작가는 세련되고 점진적으로 내러티브를 진행시킨다. 소설 초반에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자자의 모습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속삭인다. 아니 어쩌면 선동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내가 믿고 살아온 세계가 붕괴되는 가운데, 어렵게 자각한 내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과거의 삶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독자에게 묻는 느낌이랄까.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은수카를 떠나 미국으로 간 이페오마 가족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리고 보니 아디치에 작가의 또다른 소설 <아메리카나>에서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물질적으로는 미국이 모든 것이 결핀된 나이지리아보다는 나을 수 있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낯선 땅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만 많은 것이라는 게 나의 조심스러운 추측이다.

 

캄빌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아마디 신부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웃지 않은 소녀 캄빌리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 같은 기분을 포착하고, 그의 곁에서 응원하고 결국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영국 출신 베네딕트 신부와는 결이 다른 아마디 신부가 아니었던가. 자신들에게 새로운 신과 종교를 가져다 준 또다른 서구 국가인 독일로 가서 사역을 한다는 설정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엔딩은 왠지 그리스 비극의 그것을 닮았다. 겉으로는 인자한 성공한 사업가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집안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정폭력을 행사하던 유진이 죽은 뒤 아들 자자는 교도소에 가 31개월의 징역 생활을 한다. 고난이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면, 확실히 자자 아니 추쿠카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캄빌리 역시 자신만의 삶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들이 가려고 하는 미국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다시 그렇게 이 작품은 <절반의 태양>을 지나 <아메리카나>로 연결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 리뷰에 모두 담았는지 모르겠다. 못다한 이야기들은 내일 달궁 독서모임에 가서 풀어보자. 언제나처럼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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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쓰레기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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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묘하다. 우리 역사에 뛰어든 어느 중국 병사의 이야기를, 중국 출신 작가가 영어로 쓴 글을 읽는다는 건 말이다. 거기에 다시 한 번 우리말 번역이 추가됐다. 하진 선생의 <전쟁 쓰레기>는 반세기 전 우리나라를 반으로 쪼개 놓은 한국전의 무대를 그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대륙을 탈취한 중국공산당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고사를 연상시키면서 한국에 출병했다. 소설에서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중국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에 파견된 쓰촨 출신의 유유안이 주인공이다. 지금은 인민해방군 소속이지만, 쑨원이 세우고 장제스가 교장을 맡았던 황푸군관학교 출신으로 공산주의 신봉자는 아니다. 지식인답게 유안은 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국민당 정부가 대륙에서 패퇴한 이유를 냉정하게 판단한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부가 어떻게 정권을 유지하겠는가.

 

유엔군의 북진으로 패망 위기에 몰린 북한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전쟁에 개입했지만, 사실은 전선이 만주까지 확대될지 모른다는 상황 판단으로 한국 땅에서 그들을 저지하자는 속셈이었다. 참전 초기 중국의용군은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하지만, 화력과 보급물자에서 미군에 뒤져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그런 와중에 유안은 다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미군의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유안의 영어 실력은 열악한 포로수용소에서 그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수차례에 걸친 수술 끝에 부상에서 회복된 유안은 거제도 수용소로 이감된다. 거제도에서 그는 본토송환을 거부하는 국민당 애호자들과 강력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광신적 공산당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유안은 그저 홀로 되신 어머니와 사랑하는 약혼자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에게 중국을 둘로 나눈 이데올로기 투쟁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수용소 내 생활을 통해 유안은 장교나 사병이 차별이 없는 공산주의 그룹에 호감을 느끼면서도, 국민당 애호자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 쫓겨난 장제스가 지배하는 타이완으로 갈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포로들이 본토로 돌아가 봐야 호된 자아비판을 받고, “전쟁 쓰레기취급을 받을 거라는 예언을 한다. 이 부분에서는 예전부터 일본 군대에서 이런 풍토가 있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중국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거제도 폭동과 제주도에서 포로생활을 통해 유안은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그들은 당과 조직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수용소 내 폭동 같은 처참한 살육의 현장에서 고작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하기 위해 그 많은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이 청년 장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저 지도자들의 말에 따라 장기판의 말처럼 움직여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엄혹한 현실에 좌절한다. 운명의 갈림길마다 유안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급박한 선택에 내몰린다.

 

하진 선생은 전쟁이라는 개인의 의지로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 내몰린 한 청년의 운명을 <전쟁 쓰레기>를 통해 예리하게 파헤친다. 작가는 수용소에 갇힌 전쟁포로를 죄수라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전쟁터에서 순교자로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으로 다가온다. 인간 존엄성은 물론이고, 생존에 필요한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담담하게 증언한다. 하지만, 전쟁포로들이 정말 두려웠던 건 불투명한 자신들의 미래였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토나 타이완으로 보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그들의 감정적 균형을 무너뜨렸다.

 

거제도 폭동에서 전쟁포로들은 미국의 제네바 협약 준수를 요구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의 정부나 북한이 해당 협약에 조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이 지급하는 물자를 거부하면서, 조국이 자신들에게 충분한 보급품을 보내줄 거라는 환상마저 품고 있었다.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된 전쟁포로들이 얼마나 현실에 대해 무지했는지 하진 작가는 고발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유세계를 상징하는 국민당 정권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부패한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대륙에서 패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테니까 말이다.

 

개인의 모든 행동이 감시되는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미연의 공포도 빼놓을 수가 없다. 유안이 자신의 영어 실력을 향상을 위한 교재로 성경을 사용했을 뿐인데도, 유물론자의 눈에는 혹독한 자아비판 대상거리가 된다.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이면에는 다른 동기가 있었고, 그 때문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했다. 유안은 그저 구속받지 않는 삶을 열망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유안은 거제도 수용소에서 국민당 간부가 말한 대로, 공산당이 아군보다 적에게 관대할 거라는 숙명적 예언을 떠올리며 갈등한다.

 

반공주의자의 눈에 <전쟁 쓰레기>는 정말 훌륭한 반공 교재로 보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하진 선생의 시선은 이데올로기보다 반전이라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다. 공산주의자들만큼이나 국민당 애호자들 역시 자신의 신념 앞에 무자비하고 잔인했다. 유안의 눈에 전쟁은 군인들의 시체를 연료로 삼는 거대한 용광로로 비칠 뿐이다(120). 실제 전장이 아닌 후방의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전쟁이 아니라 평화가 필요한지 이보다 더 좋은 증언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진 선생은 자신의 집필 의도를 충실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외국 출신 작가에게 배타적인 미국 문단에서 인정받은 하진 선생은 이 작품으로 두 번째 퓰리처상 도전에 나섰다. 아쉽게도 <전쟁 쓰레기>는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메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에 고배를 마셨다. 작가가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해학과 풍자 대신 선택한 진중한 주제는 새롭게 진화한 하진 선생의 작품세계의 이정표가 되었다. 궁금해서 하진 작가 책 국내출간을 검색해 보니 10년 전이 마지막이다. 하진 작가는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걸까.

 

[뱀다리] 2007<자유로운 삶> 이래 다섯 편의 소설이 더 발표됐는데, 국내 출간은 멈추어 섰다. 한동안 하진 선생의 팬으로 그의 모든 책들을 구해서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쉽다. 특히 2011년에 발표된 <난징 레퀴엠>은 왜 출간이 되지 않는지.

 

[뱀다리2] 어제 우연히 역전다방 유튜바에서 장진호 전투 관련 내용을 보다가, 문득 하진 선생의 이 책 <전쟁 쓰레기> 생각이 났다. 리뷰는 13년 전에 쓴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이 읽어 보고 싶어졌다. 물론 책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새로 사서 읽어봐야 하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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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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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뒤에 달궁 독서 모임이 있다. 지난달에 동지들이 이달 독서모임 책으로 정한 책이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 지난주에는 날강두 스타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고, 오늘은 도서관 전자책 6순위로 신청해서 단숨에 다시 읽었다. 그리고 보니 1년 만에 다시 읽었다.

 

만날 삼천포로 빠지니 오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맡겨진 소녀>는 원래 201027, <뉴요커>에 단편으로 소개되었는데 8달 뒤에 정식 책으로 나왔다고 한다. 영어책, 뉴요커에 실린 단편 그리고 번역책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번갈아 찾아가며 아일랜드 웩스포드 지방에서 19818월에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본다.

 

웩스포드, 클로너걸, 실레일리 그리고 카뉴라는 지명을 통해 이 동네가 아일랜드 동남부 지방이라는 걸 확인한다. 화자인 이른바 "맡겨진" 소녀인 나는 아버지 댄과 함께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비가 오지 않은 여름 가뭄의 시절에 맡겨진다. 왜 나는 존과 에드나에게 맡겨졌을까? 이유는 가난 때문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면,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부양할 수 없는 아버지 댄의 무능력함 때문이다. 게다가 댄은 거짓말쟁이기도 하다. 성실하지 않는 건 불문가지일 것이고.

 

두 명의 언니들, 남동생 그리고 또 엄마 메리는 임신 중이다. 아버지 댄은 나를 부탁하는 처지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도 않는 모양이다. 나의 짐도 내리지 않은 채 그렇게 황망하게 떠나가 버렸다. 상황이 참 그렇다.

 

에드나 아줌마는 나를 변신시키기 시작한다. 일단 무언가 좀 먹인 다음에, 목욕을 시켜 준다. 뜨거운 물이 참을 수 없지만, 괜찮아 질거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맡겨진 소녀는 그렇게 삶에서 참을 수 없는 것들도 때로는 참아야 한다는 걸 배운다. 그건 마치 우리가 가기 싫은 학교에 가거나, 일용한 양식을 사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출근해야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일까. 에드나 아줌마는 목욕에 이어 피부관리 그리고 귀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주신다. 가난과 많은 아이들 시중 그리고 살림에 지친 나의 엄마 메리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존 킨셀라 아저씨는 무뚝뚝하지만, 지낼수록 진국이라는 느낌이 든다.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킨셀라 집안의 유사 가족처럼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낯선 곳에서 첫날밤에 실례한 나에게 에드나 아줌마는 잠자리가 습기가 많다며 창피를 주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이게 바로 성숙한 어른들의 방식이 아닌가. 나의 아버지 댄의 빈정대는 건 정말 듣기 싫더라. 타인의 호의를 이상하게 비꼬는 게 왜 이렇게 듣기 싫은지 모르겠다.

 

짧게나마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당시 IRA 출신 청년들이 벌이던 단식 투쟁이 소개된다. 5월 바비 샌즈를 필두로 해서 그동안 7명이 극한의 단식 끝에 사망했고, 19818월에 세 명이 더 죽었다. 존 아저씨는 어떤 남자는 굶어 죽었는데 자신은 풍족하게 먹고 있다는 자족적인 말을 한다. 이에 에드나 아줌마는 그래도 당신은 밥값은 하지 않냐고 말한다. 되짚어 보면 작년에 <맡겨진 소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바로 이 극한의 정치투쟁에 대해 리뷰에서 상당 부분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나와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달라 기억이 휘발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랄까.

 

존 아저씨는 고리에 나가서는 나에게 주전부리라도 사 먹게 적은 돈이지만 일 파운드도 주고, 제법 괜찮은 드레스도 사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다 우연히 방문하게 된 이웃 마이클 레드먼드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킨셀라 부부에게 죽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여튼 간에 어디서나 오지라퍼들이 문제다. 이웃 밀드러드 아줌마는 마치 무슨 밀정처럼, 장례식장에서 부유하는 나를 돌본다는 핑계를 대고 자기네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겠다며 데려다가 갖은 질문 공세를 퍼붓고, 킨셀라 집안의 아이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그것 참, 꼭 그래야 했나.

 

적지 않은 시간을 살다 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맡겨진 소녀'는 정말 빠른 시간에 아주 간단한 그런 사실을 배웠다. 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배워도 좋을 것을, 소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때문에 강제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마 메리를 필두로 해서, 소녀 주변에 있는 이들은 아이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캐내려 하고 이제 조금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 소녀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정황들이 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꼬마 킨셀라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날, 존 아저씨는 소녀를 데리고 바다에 간다. 바다에서 소녀는 현재 자신의 위치와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대한 고민을 필두로 한 생각에 잠긴다. 어떤 점에서 <맡겨진 소녀>는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 소녀의 압축적 성장과정을 다룬 성장소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복귀를 결정한 소녀에게 사소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풍족한 킨셀라 가정을 떠나 결핍으로 채워진 집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녀. 집에 가니 아버지 댄은 해서는 안될 말을 소녀를 진심으로 보살펴준 존과 에드나에게 서슴지 않는다. 그 장면에서는 정말 분노가 치밀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댄은 상대방의 호의를 순수한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빌런이란 말인가. 엄마 메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소녀를 추궁한다. 삶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의 중요성을 깨달은 소녀가 굳게 입을 다무는 시퀀스는 정말 찬란하게 다가왔다. 바로 이거지.

 

<이처럼 사소한 것들>만큼이나 짧지만 강렬한 소설이었다. 클레어 키건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의 밀도는 왠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지만, 그만큼의 빈 공간을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우라는 밀명을 받은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과연 피할 수 없는 가난과 결핍에 잘 적응했을까? 언니들과 두 명의 남동생들 사이에서 제대로 밥은 먹었나 하는 실존적 질문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다시 포스터 차일드로 킨셀라 집에 가서 살게 되면 보다 더 행복했을 지에 대해서도. 그래서 삶이 미스터리라고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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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4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실존적질문은
선한 이웃집 삼촌^^의 마음따뜻한 관심이네요.
독자에게 빈공간을 채우게 하는 서사! 뛰어난 재능이란 생각입니다.

레삭매냐 2024-03-14 21:02   좋아요 2 | URL
작년에는 리뷰 참전을 위해 흑심
가득으로... 그리고 올해는 독서
모임책으로 만나게 되었네요 :>

클레어 기건 작가의 다른 책 2권
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새파랑 2024-03-14 19: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지 않았는데, <맡겨진 소녀>를 읽었을때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안땡기더라구요 ㅋ

레삭매냐 2024-03-14 21:04   좋아요 3 | URL
저도 작년에 처음에 읽었을 적에는
어 이기 뭐야, 그런 마음이었더랬지요.

올해 다시 읽어 보니 또 다르게 다가
오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좀 더 나간
느낌이랄까요.

뉴요커에 실린 단편 스타일의 작품도
읽어 보고는 싶은데... 실력이 딸려서
걱정이네요.

얄라알라 2024-03-29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댄은 공짜로 얻어가는.물건도 떨어졌을 때.제 손으로 줍지.않으려하는.인간형. 매냐님깨서 말씀하신.딱.그 부분. 고마운데.감사는.커녕.비난으로 돌려주는.대목에서 저도 화가나더라고요

레삭매냐 2024-04-01 23:07   좋아요 1 | URL
얄라님이 써 준 내용... 제가 지난 주말 독서
모임에 가서 써먹고 동지들의 아주 격한 공
감을 받았습니다 -
ㅇㅇ 얄라님의 아이디어라고 말했어야...
그랬다고 합니다.

영화 <콰이어트 걸> 꼭 보라고 하더군요.
기회가 되신다면 보시길 추천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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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날강도가 되었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출판사 다니는 동지가 나를 그렇게 규정했다. 알라딘 동지들의 버프에 힘입어 내가 클레어 키건 작가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서점에 가서 읽겠다고 했더니, 그가 나에게 던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고, 그의 말대로 나는 날강도가 되었다.

 

내가 클레어 키건을 만나게 된 건 작년 리뷰대회 참전 건이었다. 이 때도 나는 책이 사기 싫어서 부러 시간을 내서 먼 도서관까지 가서 대출해서 읽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되짚어 보면 그 시절에는 상당히 정치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은데, 아마 그게 패착이 아니었나 싶다. 아니 맥주 한 캔 한 김에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리뷰 대회 참전이라는 목적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튼 이번에는 그런 특별한 목적성(?)이 없으니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24년 동안 4편의 소설을 썼다는(대단하지 않은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들이 국내에서 무척이나 인기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실 전작 <맡겨진 소녀>의 서사는 국내 독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그런 요소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지. 참고로 우리 달궁인들은 이달 말에 <맡겨진 소녀>를 읽고 책에 대해 이바구를 털어볼 계획이다. 그전에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다시 읽어야 하나 어쩌나.

 

언제나처럼 서설이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알코올의 힘을 빌어, 그냥 글가는 대로 써볼 생각이다. 미혼모의 아들로 성공한 석탄 목재상인 빌 펄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성실한 가장이자,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들을 보살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 그의 일상은 아주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냥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남자다.

 

클레어 키건은 중년 아저씨 빌 펄롱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일상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누구나 그런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그리고 그는 어떤 사건을 목격하고 자각한다. 그리고 자각한 펄롱은 다시는 평범한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 타인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한 펄롱은 이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바로 이 점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비범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라고 생각한다.

 

미혼모였던 빌의 어머니는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미혼모의 아들이었던 빌은 전쟁미망인 미시즈 윌슨의 도움과 그녀의 농장에서 일하던 네드 아저씨의 후원으로 성장해서 한 가족의 어엿한 가장이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자신이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었던 직소 퍼즐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더 비참한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게 되었을 때, 그냥 무시하거나 없었던 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아내 아일린에게는 눈치껏 그녀가 가지고 싶어 하던 에나멜 구두를 그리고 다섯 딸들에게는 제각각 필요한 선물들을 준비하는 그런 멋진 성실한 가장이 바로 빌 펄롱이었다. 하지만 선한목자수녀회가 운영하는 수녀원에 평소처럼 석탄 배달을 하러 갔다가 자신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자기 딸 또래의 세라 레드먼드를 만나면서 빌의 운명은 거칠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누구는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바라던 선물을 받지만, 수녀원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착취당하던 소녀들은 탈출을 꿈꾸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성스러워야 할 수녀원에서 이런 불의와 부조리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펄롱 아저씨는 바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펄롱이 철저하게 기득권층에 속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런 고민이나 갈등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시 한때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소녀 세라에게 닥친 불행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그의 선택지는 이미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갈등하던 펄롱이 찾은 바의 여주인장은 그에게 경고한다. 모두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가톨릭교회의 질서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던 아일랜드에서 다른 곳도 아닌 수녀원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는 성가대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딸들은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인질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펄롱이 고민하는 모든 것들의 복합적 요인들을 이렇게 사소한 것들이라고 규정하는 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 구원은 어쩌면 도탄에 빠진 타인을 구원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나에게 무언가 이익이 되는 걸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이 나의 구원에 무슨 도움이 될까? 단순하게 순간적 행복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어떤 행동이 그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펄롱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결국 엔딩에 가서 소녀 세라를 구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전에 이틀 전에 읽은 책의 내용들을 메모하면서, 빌이 자신의 구원을 지향하는 공격수라면, 펄롱 가족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빌의 아내 아일린은 수비수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세라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빌이 자신의 친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클레어 키건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소설의 엔딩에 나오는 빌 펄롱이 내린 결정은 자기 구원의 길인 동시에, 펄롱 가족에게는 어쩌면 고난의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저간의 서사보다도 어쩌면 그 다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소설의 여백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서사의 힘이 클레어 키건 작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사람은 자신이 어디든 원하는 데로 가야 하는 법이지. 소설에서 빌이 자기 양심의 목소리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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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08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날강도 ㅋㅋ
그러다 좋으면 사는 거죠!
이 책은 워낙 인기있어서... 그래도 되지 싶네요 ;;
도서관에서 빌려읽는거나 서점에 비치된 책 읽는거나 같지 않나요?

레삭매냐 2024-03-09 09:3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도, 좋으면
사게 되더라구요.

너무 인기라, 제 순서까지 오지 않아
서 이런 고육책을 썼네요. 날강두 ㅋㅋ

페넬로페 2024-03-09 0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날강도, ㅎㅎㅎ~~
저는 구매해서 읽었는데 그냥 책꽂이에 꽂아 두기는 그래서 얼른 지인에게 읽으라고 줬어요.
돌려받아도 되고 안줘도 되고요.

저는 그렇기에 펄롱이 대단하다고~~
그냥 이 소설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나 할 수는 없으니까요^^

레삭매냐 2024-03-09 09:39   좋아요 2 | URL
우와 멋지십니다 -
이거야말로 저희 책쟁이들의 로망
이 아닐까요. 진정 대인배십니다.

좋은 책의 선순환. 저도 어제 본가
에 갔다가 예전에 사둔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 보고 저희 동지들
에게 주까 싶더라구요 ^^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소설
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두 하구요.

hnine 2024-03-09 0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막 이 책을 읽고 난 참인데 레삭매냐님 리뷰를 읽으니 알콜 기운에 쓰셨다면서 어찌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내용 정리도 잘 하시고 요점을 잘 파악하여 짚어 주셨는지.

레삭매냐 2024-03-09 09:55   좋아요 1 | URL
원래는 읽고 나서 바로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틀이나 밀렸다가 기억을 되살
리느라 고전했답니다.

에이치나인님이 최근에 읽으신 <맡겨진
소녀>도 다시 읽어 보려구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24-03-09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좋아서 저도 나중에 읽어 볼까 생각중이었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약간 기독교적 세계관이 느껴지기도 하고.
암튼 이달 말 달궁모임 이바구 잘 터시기 바랍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4-03-09 10:01   좋아요 2 | URL
원래는 날강두 스타일로 두 번에
걸쳐 읽을 계획이었으나 엔딩이
너무 궁금해서 바로 한 방에 갔습
니다.

달궁 모임에서는 또 입에 모터싸이
클 달고 털어볼 생각입니다.
오래된 동지들과의 만남이 그렇죠.

고양이라디오 2024-03-12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이 인기던데 이런 소설이었군요!

한 번 보고 싶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4-03-13 09:47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의 정보를 살펴 보니
무려 20쇄를 돌파했더군요.
대단하더라구요.

다른 나머지 두 권도 어서 소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젤소민아 2024-03-16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격수와 수비수 개념, 좋습니다. 전 이분 소설을 일부러 읽지 않고 있어요. 너무 좋아서 싫어질까봐요..뭐래..ㅎㅎ 좋은 리뷰 늘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4-03-19 20:51   좋아요 0 | URL
그냥 문득 안정을 추구하는 수비수,
무언가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공격수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너무 좋은데, 책이 네 권 밖에 없다면
그것도 참 답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