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소설은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국 남북전쟁(Civil war)이 한창일 19세기 후반의 어느 해, 크리스마스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하고 있다. 북군에 속해있는 군대에 종군 목사로 아버지를 떠나 보낸 마치 가문의 여인들이 겪는 에피소드로 소설의 전반을 이루고나머지는 장성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딸들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이룬다.

   네 자매의 어머니, 마치 부인은 특정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어머니'의 역할로서만 등장하고 있다.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내면화하고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한편으로는 독립적이고 분명한 본인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자매들에게 지혜로운 말을 하는 든든한 어머니이다. 인습에 저항하는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속한 사회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포용하고 화합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네 자매의 아버지 마치 목사는 전쟁 통에 가문이 몰락하여 가난한 집의 가장이 된다. 하지만 근면 성실하고 돈독한 신앙과 사람들의 신임을 듬뿍 받으며 가족을 지켜나간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간다. 마치 목사는 부인과 네 자매의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실제로 루이자 올컷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 이유로 소설에서의 비중은 크지 않고, 전쟁터에 보낸 설정으로 마치 가의 여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네 자매를 살펴보면, 맏이인 메그(마가렛 마치)가 있다.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따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있어 고민한다. 노래를 잘 불러서 매일 전통처럼 이어지는 가족의 합창 시간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언니이다.

   둘째 (조세핀 마치)는 네 자매 중 가장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 루이자 올컷의 분신처럼 보인다. 여성적인 예절과 관습을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책읽기 글쓰기를 좋아한다. 겉으로는 남자 아이같은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자세히 보면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다. 또 모험을 좋아해서 돌아다니기, 이야기를 매우 좋아한다. 글을 쓸 때면 의식처럼 항상 작업복을 입고, 소용돌이 속에 빠진 상태로 글을 쓴다.

   셋째 베스(엘리자베스 마치)는 수줍음이 심하여 모르는 이가 말을 거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 음악을 사랑하여 피아노치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매우 여성스럽고 말없이도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타입이며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네 자매의 막내는 에이미(에이미 커티스 마치). 미술에 심취하여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예술적 감각이 풍부하다. 한편으로 자존심이 매우 강한 캐릭터로 나온다.

   이들 다섯 명의 여인들 외에 중요한 남자 캐릭터가 한 명 더 있다. 이름은 로리(시어도어 로렌스)로서 마치 가의 옆집 부유한 인도 무역상의 손자로 등장하며,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소년으로 마치 가의 둘째인 조와 동갑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150년 전 즈음에 그것도 미국에서 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정도로 소설에 나오는 많은 문제들과 대화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들과 많이 겹쳐있다. 특히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가족, 사랑, 결혼, 죽음 등)을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날 웃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감동을 주는 장면도 있다. 남자 작가들이 쓰기 힘든 그런 일상의 소소한 디테일들이 녹아있었다.

   우선 내가 가장 낄낄거리며 웃었던 장면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 <데이비드 커퍼필드David Copperfield>에 나온다는 한 캐릭터 '거미지 부인'을 언급한 장면이었다. 거미지 부인은 디킨즈의 소설에서 과부로 등장하는데 미국으로 이민가는 길에 탔던 배의 요리사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곧바로 거미지 여인은 옆에 있던 양동이에 담긴 물을 그 요리사에게 부어버리는 장면이 있다. 결혼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는 조에게 로리는 거미지 부인이라고 놀려대는데, 나는 조의 덤벙대고 선머슴같은 캐릭터를 상상하며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한편 나에게 감동을 주었던 장면들은 네 자매와 마치 부인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 격려와 위로를 해주는 장면들이 나올 때였다. 상대방에대한 공감과 배려로 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굳건하게 가족을 지탱해나간다. 소설 전체를 통해 어머니 마치 부인의 충고와 인생의 조언들이 나오는데, 여전히 유효한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교육의 기회가 흔치 않았던 당시의 여성들에게 이 소설은 여자로  태어나 마추치게 되는 인생의 제 문제들에대해 삶의 선배로서 충고하고 격려하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보면 불만스러울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여성들은 인습의 철폐를 주장하고 전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체제 내에서 화합하며, 당대의 가치를 내재화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한계는 지적해볼 수 있겠다. 인류의 역사를 고려해볼 때 지난 150년간의 변화는 가히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단지 현재의 급변한 여성의 지위와 관점에서 과거를 비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의 관념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면 된다. 하지만 150년 전의 사회를 현재 우리의 시각에서 틀렸다라고 비판한다면 그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인식하고 그 시대의 관점에서 당대의 시대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부분, 감동적인 부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든 장면도 보인다. 셋째 딸인 베스의 죽음은 죽음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베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의연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베스의 모습에서 제대로 죽을 권리를 박탈당한 현대인들을 떠올려본다. 현대인들은 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평균 수명의 증가를 자축한다. 각종 발암물질, 중금속 및 유사 호르몬 물질, 자연파괴 등으로 인류의 삶의 질에 거대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는 이 시점에도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전을 절대화된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은 병원이 보유한 고가의 장비에 둘러싸인 채, 생명 연장이 강제되고 집이 아닌 병실에서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릴 때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숭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죽음은 기피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베스의 의연한 죽음을 통해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또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죽어가는 베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아름다움을 깨닫는 장면을 보고 더욱 숙연해진다.

 

 베스는 종종 주위를 둘러보며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라며 간탄하곤 했다. 가족들이 모두 햇살이 환한 베스의 방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베스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게 비춰졌던 것이다. 쌍둥이들은 바닥에 누워 발을 차며 까르르 웃고, 엄마와 언니들은 가까이에서 바느질을 했으며, 아버지는 즐거운 목소리로 옛 성현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어주었다. 이런 책들은 수 세기 전에 쓰였지만 그 속에는 좋은 말과 위안을 주는 말이 가득했다. 이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베푸는 작은 예배와도 같았다. 아버지는 희망이 사랑으로 애끊는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믿음이 어려움을 감내하게 할 수 있다는 설교로 가족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신앙심이 깊은 아버지가 감정을 다스리듯 더듬거리며 말하는 목소리에는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는 앞으로 다가올 슬픈 시간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주어진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 장면에서 얼마전에 읽었던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 상공에 미군 폭격기가 도쿄를 공습 직전, 죽음의 문턱에서 가토 슈이치는 문득 도쿄의 일상을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묘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면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잊고 있던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 장면들은 나에게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인생의 가치관들은 아마도 루이자 올컷의 아버지와 교류했던 당대의 초월주의 작가들(소로우, 에머슨 등)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것같은 소박한 삶에의 긍정과 의지 역시 소설 전반을 통해 어머니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통해 드러난다. 또한 루이자 올컷이 이 초월주의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단서는 올컷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월든>에서도 소로우는 군데군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지식을 엿볼 수 있다. 아니면 그리스 로마 신화에대한 지식은 당대의 중요한 교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로서 당연히 알아야하는 필수 교양처럼 말이다. 그 밖에 여러 작가들에 대한 저자의 독서량이 방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찰스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했는지, 디킨즈의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고 여러 소설을 써내어 당대에 금서로 지정된 책들도 있었던 디킨즈의 소설을 좋아한 점은 루이자 올컷이 지녔을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준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역사의 결과물이며 당대의 시대, 존재했던 환경적 요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 가정의 네 자매와 어머니가 이어가는 이 장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 바로 이 여인들이 각자 강한 개성을 가지진 했어도, 결국 작가 루이자 올컷의 분열적인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내 주위의 여성들을 살펴봐도 네 명의 자녀에게서 나타나는 개성들을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작은 아씨들>은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딸들이 어머니가 되는 삶의 소소한 과정을 통해 다시금 삶의 의미를 환기시켜주었다. 더불어 글쓰기를 말할 때나, 소설 속 바에르 교수를 언급할 때나, 삶을 바라보는 진정성을 얘기한다. 아울러 이 소설은 현대에들어와 가족이라는 관념이 파괴되기전 마지막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상화된 가족의 모습은 우리가 가족 사진을 찍을 때처럼 우리가 그러하길 바라는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우리의 욕망마져도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전통적인 가족의 관념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은 작가 루이자 올컷의 삶에대한 경건함을 바탕으로 나온 소설이란 생각을 해본다.  

(1부-115면) 엄마의 말
"지금 존재하는 행복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 마저도 사라질지 모른다."

(2부-15면) (딸 메그의 결혼식 준비에대해 마치 부인이 하는 말)
"이런 모든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가정적인 일은 사랑이 담긴 손길을 거쳐야 더욱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2부-275면) (막내 에이미가 로리에게 하는 충고)
"평생 조 언니를 사랑하고 싶으면 그렇게해. 하지만 그 일로 자신을 망치지는 마.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다고 인생의 수많은 선물을 내던지는 건 나쁜 짓이니까. 자, 내 쓴소리는 여기까지야."

(1부-234면)
"그렇다고 노예처럼 일만 해서는 안 된단다. 날마다 규칙적으로 일하고 쉬면 하루가 충만할 거야. 시간을 잘 분배해서 사용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고 말이야. 그렇게 지내면 젊은 날은 보람찰 것이고 늙어서도 후회가 별로 남지 않는단다. 가난하더라도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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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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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 처음으로 시집을 사보기도 하고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나 문학 밖에서 살아왔던지, ‘문학동네라는 출판사도 올해 처음 알게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 가까이 참으로 무식하게 살아온 같다. 그동안의 반성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뭏든 올해 나는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겐 변화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에서 말한대로, ‘책을 읽는 다는 ’, 그리고 문학 읽는다는 (물론 아타루는 문학을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 , 철을 아우르는 폭넓은 의미에서 사용했다.) 하나의 혁명이라고 말했듯이, 나에게는 혁명 시작이었다( 믿고싶다). 물론 이제 책을 열심히 읽자라고 마음먹은지 1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금방 그렇게 바뀔리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글못쓰기로 말하자면 해도해도 너무한 이공학도 아니었나.

 그동안 소설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필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되었는데, 문체를 나름 주목해가면서 읽어가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읽으면서 간결하고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는 문장이 어떤 것인가 조금은 알게되었다. 아울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읽으면서 김훈 작가의 문체가 나에게 주는 느낌과 헤밍웨이의 문제가 주는 느낌이 비슷한 부분이 일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하나의 문장이라도, 아주 간결한 주어-동사 형태의 건조한 문장이 이어지는 방식을 보여주는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한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문체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읽게 되니, 빨리 읽지는 못해도 나름 색다른 재미를 느끼면서 읽게되었다.  나아가 올해는 국내의 출중한 여러 젊은 작가를 처음 알게되었는데, 김연수, 김영하, 김애란, 박민규 등의 작가들이었다(사실 아직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최근에는 김영하 작가의 글에 재미를 느끼게 되어 조금씩 읽고 있다.

  김훈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김영하 작가의 문체는 어떨까 궁금했다. 그래서 읽어보게 소설이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짦은장편소설이었지만, 당황스럽기도하고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흥미와 혼란을 함께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은 어떻게 읽어야할까.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잔인한 살인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조금씩 오싹오싹한 느낌도 주는 것이,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블 아이> 나오는 단편소설 같은 느낌도 주었다. 장면을 이끌어가는 1인칭의 화자는 마치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처럼 의식의 흐름들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살인자의 입장에서 일관되고 치밀한 의식의 흐름들을 모아둔 기록의 형태가 아니다. 그보다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파악이 안되는 나약한 인간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이기도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며, ‘기억 통해 지식의 축적과 전수 그리고 사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라는 요소가 빠진 알츠하이머 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않고 기억해내기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자신의 병에 굴복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던 화자의 인식 체계가 뒷부분에가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계의 즈음 발견되는 여자의 부위는 이따금 나를 섬뜩하게 만들며 강한 인상을 남기고있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 특성을 소설 하나로 파악하기는 힘들겠지만, 문장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간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김훈 작가의 문체처럼 길고 짧은 문장의 호흡을 의식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했다. 속도감있게 읽혀지는 이유는 아마도 김영하 작가의 간결한 문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무리에서 보여지는 극도로 혼란한 상태는 소설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과연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을 것인지에대한 막연함때문이 아닐까. 마치 알츠하이머 환자의 머리 속에 들어갔다 나온 같은 김영하 작가의 고민과 연구의 흔적을 느껴본다. 소설을 읽고 당황스러운 막연함과 혼란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를 김영하 작가가 본다면 성공이군!’하면서 좋아하실지 모르겠다. 나에겐 짧지만 모호하고 쉽지않은 소설이지만,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 그리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작중 화자의 상황과 성격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핍진성 강한 인상을 받았다.

(7면)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48면)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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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미네르바의 올빼미 4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 정종훈 그림 / 푸른나무 / 200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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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에 아이허 숄 지음

 유미영 옮김/정종훈 그림

 

그리고

서경식의 <내 서재 속 고전>

백장미를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겹쳐읽기

소설책의 제목을 닮은 책의 원제는 백장미이다. ‘백장미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뮌헨 대학 학생들의 조직 이름이다. 책의 저자는 백장미소속의 학생이자 나치에 체포되어 처형된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나이자 언니인 잉에 숄이다. 서경식 교수의   < 서재 고전>에서 책에 대해 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치하에서 독일인이 저항했던 역사를 훨씬 훗날에나 알게되었을 것이다. 마침 얼마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 읽고 강한 인상이 아직 남아 있던 차에 책을 발견하게 되어 바로 읽어보게 되었다. 가토 슈이치는 나에게 방관자이기를 그만둘것 아무리 과거의 일이든, 나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든 알아야한다 교훈을 주었기에 더욱 진지하게 읽어나갈 있었다.

그렇다면 독일 학생 교수가 백장미활동으로 처형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히틀러에 대항해서 투쟁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삐라 6종을 42년에서 43년에 걸쳐 살포한 혐의다. 마지막 삐라를 뿌리던 , 학내 나치당원인 수위에게 발각되 체포되었고, 몇일 형식적인 재판을 통해 판결을 받은 바로 처형되었다. 나치는 유대인에게만 끔찍한 일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발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독일을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던 것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는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두려움으로 인해 행동으로 표출된 사례는 매우 드문 같다.

 

잉에 숄이 남긴 얇은 책을 통해 알게 놀라운 사실은 나치가 장애인과 다운 증후군 같은 증세가 있는 아동들을 집단 학살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들이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저해할 여지가있다고 나치가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사에 관심이 덜했던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위대한 철학자와 사상가의 나라에서 자행되었다고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무엇이 나치를 이런 광기로 몰고 갔던 것일까? 어떤 이유로 75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해야 했던 걸까? 이러한 집단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기술하듯, 나치 동조자인 아이히만의 생각없음으로만 설명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보다는 이러한 결과를 체계적이고 집요하게 추진하게했던 동인(動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잘못된 사상에의 믿음이 절대적인 정치권력의 힘과 결합하면 얼마나 파괴적일 있는지 역사는 보여주고있다.

서경식 교수는백장미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에서  나치의 역사를 거쳐 다시 현재 일본 사회를 조망한다. 일본 자민당의 헌법 개정 추진움직임으로 눈을 돌린다. 헌법 개정의  뼈대는 자위대를 국군으로 바꾸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여 외국인의 인권을 명백히 부정하려는 내용이라고 경고한다. 일본의 파시즘화는 어디까지 진행될까?  이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안보나 외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것이고, 심지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과 연관된 모든 일들에도 영향을 미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토 슈이치가 말한 방관자이기를 그만두라그리고 알아야한다 명제는 현재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절실한 물음이라 생각한다.

 

백장미활동으로 체포되어 처형된 독일인들을 기억해보려 한다. 괄호 뒤의 날짜는 이들이 처형된 날짜이다.

조피 (1921-1943.02.22): 당시 철학, 생물학과 학생

한스 (1918-1943.02.22): 당시 의대생

크리스토프 프로프스트(1919-1943.02.22): 당시 의대생

알렉산더 슈모렐(1917-1943.07.13): 당시 의대생

쿠르트 후버(1883-1943.07.13): 당시 신학및 철학과 교수

빌리 그라프(1918-1943.10.13): 당시 의대생

이들 외에 백여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이후 재판을 거쳐 사형되었을 것이라고 잉에 숄은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나는 현대 실존 철학의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나치에 동조하고 몸을 사렸던 하이데거보다는 학생들 및 교수를 포함한 백장미단 위대해보인다.

 

조피 숄이 처형을 앞두고 다른 수감자에게 한 말

"나는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의 행동이 몇 천 명의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깨우칠꺼야. 틀림없이 학생들 반란이 일어날 거야."

한스 숄이 교수대에서 마지막으로 외친 말

"자유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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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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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우리의 삶에 노예로 살지 않기위해 끊임없이 물어야하는 질문일 것이다. 이에대해 고미숙 선생은 동양철학적 시각에서 접근한다.  우선 우리를 삶의 노예로 만드는 요소로 두려움 충동 말한다.

두려움의 원인은 사회구조나 인간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권력관계 그리고 구조로부터 억압과 소외를 겪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워즈>식으로 말하면 나를 파괴할 있는 어둠의 두려움 것이다. 한편 저자는 동양사상에서 좀더 근본적인 두려움의 원인은 생로병사라고 말하고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우리가 겪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이 것이다. 특히나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죽음에대한 공포는 우리가 죽음을 모르기때문일 것이다. 

우리를 삶의 노예로 만드는 또다른 충동의 원인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식욕, 성욕이다. 나아가 지배욕, 인정욕은 이러한 기본적인 욕망의 변형이라고 한다. 우리가 뉴스에서 빈번하게 접하는 지도층의 성범죄(정치인, 대학교수 등등) 자신의 희생을 쾌락으로 보상받아야한다는 signal 몸에 내재화 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미숙 선생은 분석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가 법을 만들고, 이를 개정하거나 사회제도를 바꾼다고해서 개인인 내가 두려움과 쾌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 그러므로 내적인 접근을 통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져야 한다 말하며, 고미숙 선생을 이를 위해 동양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 우주 같이 연구했으나, 서양철학은 일찌감치 이를 분리하여 연구하여 분석에는 뛰어날 모르지만 요소들을 종합하는 데는 미숙한 결점이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우주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볍게 얘기하는 관상학, 사주명리학에서는 본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읽어내야 비밀을 있으며, 내가 어떤 리듬을 갖고 운명을 창조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년말 혹은 매년 , 소위 점집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내년에는 나의 운세가 어떠할지, 나의 배우자는 어떤 사람일지, 나의 사업은 어떻게 될지를 궁금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주명리학과 관상학을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들은 고객에게 진실을 얘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때문일 것이다. 고미숙 선생은 중요한 것은 지도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나의 지도를 결핍과 상처 간주하게 되면 지도는 무용해진다는 . 모든 사람이 모든 장점을 골고루 가질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넘치는 조율하고, 모자란건 채우는 이라고 후천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것이 진정한 공부이자 수행이며 이를 하지 못하면, 두려움이 자라고 나아가 영혼이 잠식당한다는 것이다. 괴테가 고뇌와 슬픔을 노래와 글로써 승화했으며, 니체가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스스로를 극복해나가라고 외쳤듯이, 우리의 두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라고 주문한다.

인문공부를 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있는 이점 중의 하나는 우리가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인간 되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자유로움은 구속 내지는 소속을 전제한다. 우리를 속박하는 대상으로부터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거리를 있는 행위는 대상을 남과 다르게 인식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까? 만약 이게 아니라면? 하고 의문을 던지는 일로부터 우리는 삶의 자유로운 주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강연기록의 마지막에는 고미숙 선생과 청중과의 질의응답이 들어있는데,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고미숙 선생의 답변이 있다. 질문자의 철학과 선배는 취업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과를 했는데 이렇게 외부적 요인에 의한 두려움에 어떻게 맞서야하는지를 물었더니, 고미숙 선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류의 미래는 백수다. 백수밖에 없다. 앞으로 웬만한 일들은 모두 기계가 것이다. 하지만 백수가 자유인이 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인문학을 알아야한다. 철학하는 백수. 이것이 인류가 나아가야 길이다.”

 

 

 

내적인 접근을 통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따져야 한다.

내가 어떤 리듬을 갖고 내 운명을 창조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사주명리학을 언급하면서)

(관상학을 언급하며)
중요한 것은 이 지도를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나의 지도를 결핍과 상처로 간주하게 되면 이 지도는 무용하다.

(사주명리학이나 음양오행론이 알려주는 사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오행에 치우쳐 있으므로, 모든 이의 팔자는 평등하다. 모든 걸 골고루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할 일은 넘치는 건 조율하고, 모자란건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공부이자 수행이다. 이를 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자라고, 강박증, 분열증을 통해 영혼이 잠식하게 된다. 두려움은 정면으로 돌파해야한다.

자유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 즉 운명애를 갖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과 충동이라는 삶을 노예화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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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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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박웅현 편 -‘왜는 왜 필요한가’그리고

          박웅현의 <여덟단어> 중 ‘자존自尊’ 편 겹쳐읽기

 

 

   박웅현 선생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제시하며 강의를 시작한다. 인생의 즐거움은 느낌표를 찾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물음표가 있어야 느낌표가 따라온다. ?라고 질문하고, 아하!하는 깨닮음과 발견의 기쁨을 크게 누리는 것이 의미있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왜는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의 강의는 우리의 삶에서 ?라고 묻는 일이 필요한가에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해본다. ? 내가 좋아하던 자연과학을 선택하여 공부했는가라고. 하지만 지금은 왜 그만 두게 된 것일까? 분명 나는 ?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진 일이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답을 찾기는 커녕 회피로 일관했다. 결국 좀더 나이가 들어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대한 답을 구해야만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나는 위기상황에서 나 스스로 무너졌던 것이다. 사상누각. 나는 나의 실패의 원인을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회피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싶은가? 나는 왜 이러한 주제를 선택했는가? 등등 나의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나는 그때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했는데. 매번 내 안으로 움츠려들었던 것이다. 나는 나를 가두고 있던 알을 스스로 깨고 나오지 못했다. 아니 깨고 나올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뭐가 그렇게 부족했기에 용기를 내지 못했던걸까. 그 실마리 중 하나로 박웅현 선생은 자존自尊을 제시하고 있다. , 나에게는 나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아 아닐까. 나의 인생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가치를 지키려는 용기가 되어주는 것이 자존이라 할 수 있겠다. 박웅현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자존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동의할 수 없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곧 ?라고 묻는 일은 관습과 권위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도록 해주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수긍할만한 것에는 느낌표를 가지고 수긍할 수 있게 하는 반면, 동의할 수 없는 가치에대해 이건 아닌데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박웅현 선생의 다른 책 <여덟 단어>는 여덟가지 단어를 통해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혹은 태도를 생각해보려는 시도이다. 그 중 가장 첫 장이 자존自尊 편이다. 우리 나라는 다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한 면역반응을 보이곤 한다. 근래에 들어 다문화라는 표현이 사용되고있긴 하지만, 내가 학창시절에는 단일민족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이야기하던 시대였다. (대체 신라 시대 50여개, 고려 시대 60여개, 조선 시대 30여개, 도합 140여개의 외국 성씨가 귀화했던 나라에서 단일민족국가라니!) 우리 사회는 이 다름을 강박적으로 두려워하며 심지어 분노하기도 한다. 내가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나는 실패자인가? 40대의 나이에 외제차를 타고, 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가? 우리는 이 자존自尊을 스스로 보살펴 키우지 못했기에 남과 다름을 두려워하고, 때론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는 그 이유로 나의 기준점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준점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나아가 자존을 키워주는 교육과 관련하여 미국과 한국의 교육제도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교육제도는 네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교육이라면 한국의 교육제도는 네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미국 교육이 학생의 안에 있는 자질과 열정을 발견하고 외부로 끌어내도록 도와준다면, 한국 교육은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삶을 살도록 필요한 것들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한 교육제도는 없으니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한 세부 사항들은 제외하기로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생의 자존감을 북돋우는 교육을 말하려한다는 점이다. 결국 박웅현 선생은 자존이란 그 기준점을 나의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그 기준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길을 무시하지 말것을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생의 답이 지금, 여기 우리의 인생 안에 있으며,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사랑할 것(amor fati)도 잊지 않고 당부하고 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에서, <생각수업> (29면)에서 재인용

Be Yourself
"여러분은 모두 폭탄입니다. 아직 뇌관이 발견되지 않는 폭탄이에요. 자존을 찾고 자신만의 뇌관을 찾으세요."
- <여덟 단어>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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