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류가헌 사진 전시 (2015.12.01-12.13)

 

 

 

 

 

 

 

 

 

 

 

사진집 정보:

 <바다로 떠내려가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 글/박태희 옮김/안목출판사

 

* 일러두기: 사진 전시를 보고 메모해둔 두서없는 글입니다.

 

 

 

 

 

#텅빈 철길에 메마르게 서 있는 나무가 있는 사진

   아마도 대부분은 우리 나라의 풍경일 듯하다, 불모의 겨울을 찍은 필립 퍼키스의 이미지들은 절제되어 있으며 고요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져 혼재해있는 어느 지점에 놓여 '거기에' 있는 죽은 생물들마저 겨울 풍경 속에 침잠해있다. 눈 덮힌 텅빈 들판의 풍경은 초월적인 공간의 이미지다. 앗제가 말년에 담은 파리 공원의 초월적인 공간처럼 보이기도한다. 마른 나무가지와 강이 있는 겨울 풍경은 내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기억해두었던 뉴욕 주 어느 시골의 겨울 풍경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필립 퍼키스가 대상으로하는 배경은 이미 지역이 갖는 특수성을 상실한다. 온타리오 호수를 따라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있는 기차 길 위에는 젊은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이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도시 버팔로에서 대도시 뉴욕으로,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지나갔을 기차길이 겹쳐있다. 나는 겨울 온타리오 호수 가의 적막한 철길을 떠올린다.

 

 #죽은 동물이 반쯤 잠겨있는 사진, ‘-시의 죽음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어둡고 음울하게 드리워진 검은 나무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고 있고, 그 경계에 죽은 동물이 있다. 사체는 수면위로 일부만 나와있다. 처음에는 새일까 아니면 강에 사는 비버 같은 동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면위로 나와있는 부위는 등과 동물의 뾰족한 귀로 보인다. 길다란 목은 한 쪽으로 힘없이 꺾인 채 가느다란 머리 부분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사슴같다. 내가 여기서 더 놀랐던 이유는 수면 위로 화살의 깃이 살짝 드러나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음의 전말이 조금 드러난다. 이 사체는 누군가의 화살에 맞아 죽은 후 물에 퉁퉁 불어버린 사슴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밀려나있는 이 존재마저 자연의 질서를 거부당한채 인간의 손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삶이란 죽음에대한 강렬한 저항의 몸짓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속한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수면 아래에 잠겨있는 동물에게 닥친 죽음은, 한 생명의 삶이 충만하고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없었던 불-시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 무진기행의 한 대목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다리를 건널 때 나는 냇가의 나무들이 어슴푸레하게 물 속에 비쳐 있는 것을 보았다. 옛날 언젠가 역시 이 다리를 밤중에 건너면서 나는 저 시커멓게 웅크리고 있는 나무들을 저주했었다. 금방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서 있었던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물 속에 비쳐있는 냇가의 나무들, 시커멓게 웅크리는 나무들을 소설의 후반에 나오는 자살한 여인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곧 이 시커먼 나무의 그림자들은 죽음의 이미지와 잇닿아있다. 주인공 윤희중은 냇가에서 자살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고, 아마도 여인이 새벽 통행금지 사이렌이 해제되던 4시 즈음 죽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시각 슬며시 잠이 들었던 주인공은 그 여인이 마치 자신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며 자기 분열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무진기행의 이 대목이었던 것이다.

 

 #다리 난간에 놓여있는 목장갑이 있는 사진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보면 다리 난간 사이로 검은 개가 사진가를 쳐다보고 있다. 사진가도 분명 난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난간 사이에 보이는 그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있는 검둥 개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늘 속 검둥 개와의 조우! 사진집에 나온 이 사진보다 실제로 필립 퍼키스 선생이 인화한 사진의 톤이 좀더 어둡다. 따라서 실제 프린트를 보며 이 검둥개를 발견하는 데 시간이 좀더 걸렸던 셈이다. 다시말해 필립 퍼키스 선생이 직접 인화한 사진이 내게는 좀더 비밀스럽게 느껴진다. 전시장에서 인화한 사진을 보다가 사진집을 보면 사뭇다른 느낌을 만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기도한다.

 

 #눈 덮힌 들판의 풍경

   위 아래로 거대한 트럭의 바퀴자국처럼 보이는 흔적이 화면의 가운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마른 땅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눈의 섬들과 왼쪽 위에서 화면을 꽉 덮은 구름의 살짝 열린 부분을 통해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이 정적인 이미지에서 동적 균형을 주는 요소들같다. 한편S자 모양의 바퀴자국은 이 두 요소 사이를 안내하며 나의 시선을 이끌고있다.

 

#고요 속의 움직임

   하늘에 던져진 나무가지가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잘 보이지 않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물에 뛰어들 테세다. 하늘에 정지해 있는 나무가지는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정중동(精中動). 이 사진집에 나온 이미지들은 이 전의 이미지들보다 더 비밀스럽다고 느낀다. 아마도 이 사진들은 2007년 사진가가 사진을 60년 가까이 찍어오면서 주로 쓰던 한 쪽 눈을 실명한 이후 찍은 사진들이기에 더욱 그럴 수도 있겠다. 사진가의 인화는 세세한 기교를 초월해있다고 생각한다. 구도가 어떠하고, 노출이 어떠한지에관한 문제들을 너머 사진가는 어둡게 찍힌 사진들은 어두운 그대로를 보여주기위해 인화를 했다고 말하는 대목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프린트 마스터 안셀 애덤스의 기교와는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투명한 천막 속 아주머니의 모습

   투명한 천막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오뎅 꼬치의 끝으로 보이는 나무 막대들이 있는 테이블에 무표정하게 앉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천막의 밖에 가스통이 있고, 그 위에 씌여진 강원 동해'라는 글자만이 대상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면 깍지낀 두 손이 슬며시 천막 밖으로 나와있다.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만 외롭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손은 뒤에 앉아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는 여인의 심리적 표출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 무위(無爲)의 손은 다시 오른쪽 가스통 위에 구겨진 채 놓여있는, 하얗게 빛나는 고무장갑에 가 닿는다. 이 고무 장갑이 특히 나의 시선을 끈다. 나에게 있어 이 고무 장갑은 이 사진의 전체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서 본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을 곧바로 떠올린다. 거리의 아이들을 찍은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에는 누군가 장난감 총을 쥔 채 한 어린 아이의  머리에 겨누고있는데, 정면을 응시하며 웃는 아이의 모습에서 롤랑 바르트는 유독 어린 소년의 썩은 이빨을 끈덕지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 나온 하얀 고무 장갑이 나에겐 롤랑 바르트가 계속 바라보았을 아이의 썩은 이빨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는 사진을 나의 기억과 경험치로만 느낄 뿐이다. 나의 기억과 나의 경험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세계를 탐색하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나의 기억은 내가 인식하는 시간성의 본질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나의 오감과 직관을 통한 나의 경험들은 내 외부 세계를 인지함으로써 나 자신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성을 확립하게 해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행위, 셔터를 누르게하는 그 무언가는 지극히 내밀한 나만의 개인적인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결국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내 개인적인 감정들은 나에게만 정답일 것이며,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는 요소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감성이 정답이라는 것(이는 나와는 다른 타인이 느끼는 감성도 그들에게 정답이며 옳다라고 인정하는 것,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이게 내가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현대 사진의 본질이다. 

 

#부인 시릴라의 모습

   차 안에 앉아있는 필립 퍼키스의 부인 시릴라는 유리창문을 통해 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반영이 부인의 왼쪽 어깨에 겹쳐져있다. 마치 함께 커플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하지만 연륜이 있는 커플 답게 익숙하고 편안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가의 부인 시릴라의 또 다른 사진. 그녀는 가로줄이 나있는 옷을 위 아래 입고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필립 퍼키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사진들,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가를 응시하거나 사진가의 시선을 받고 있다. 노년에 이른 부인의 사진은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THE SADNESS OF MEN>에 나오는 젊고 도발적인 모습과는 또 대비된다. 세월은 흘렀지만, 더욱더 깊어진 눈빛을 한 여인은 삶의 경이와 기적을 소박하고 겸손하게 나에게 증거하고있다.

 

#차 앞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백구의 모습

   사진에 등장하는 개는 흡사 다이도 모리야마의 길위에서 유랑하는 개의 존재같다. 뒤에 '민박'이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한국이라는 정보를 알 수 없었으리라. 민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만이 잠시 지나가며머무는 곳아닌가. 백구는 누군가를 주인으로 두고 마을 내에서만 돌아다니는 주인있는 개일 수도, 아니면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유랑하는 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 길의 한 가운데로 떠나온 자만이 자신과 삶에대해 더 잘 알게 되리라는 점이다.

 

이 사진을 보아서인지 나는 톨스토이가 생애의 말년에 쓴 한 책에서 만난 글에 크게 공감한다. 

 

「삶은 지나간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삶은 안락한 집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이다.

죽는 것은 육체뿐 영혼은 영원히 산다.

(…)

악과 고통은 나를 괴롭히지만

죽음은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니 어떻게 죽음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186

 

#뉴욕 거리의 울타리 사진, 경계

   필립 퍼키스의 사진에는 간간이 사진가의 상체 또는 머리의 그림자가 나온다. 사진가는 그만큼 대상과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된다. 뉴욕의 어느 거리로 보이는 한 사진. 어느 집의 철장으로된 울타리의 바깥에는 휠체어에 홈리스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잠을자고 있다. 하지만 울타리의 안쪽에는 집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커다란 개 뒤에서 벤조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이 관찰도 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안과 밖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자의적 구분은 나의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사람이자 이방인이기에 나의 편견을 발견하고 또다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해가 내리쬐는 어느 겨울 오후, 사진 속의 여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할아버지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단지 햇볕을 쬐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꾸고있는 것인지 누가 알 것인가.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 사진가는 프레임의 안쪽으로 들어간 자신의 그림자를 담음으로써 이들과 하나의 현장을 이루며, 홈리스로 보이는 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판단하려는 의도 없이 그저 존재 그대로를 응시하고 있다.

 

   뉴욕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J. D. 샐린저가 만들어낸 한 캐릭터를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직전, 바로 지금 이맘 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후 학교를 떠나게된 홀든 콜필드는 펜실베니아주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를 타고 뉴욕의 맨하탄에 내린다. 규정과 속박의 세계로부터 익숙하지만 매여있지 않은 세계, 곧 소외되고 고립된 공간으로 던져진 홀든은 추운 맨하탄 거리를 새로운 세계의 이방인처럼 배회한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나는 어느 한 책방에 쭈그려 앉아 잠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홀든이 메마른 뉴욕의 추위 속에서 지극한 외로움을 느끼며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에 이르러 울컥해지고 먹먹했던 적이 있다. 홀든이 안고있던 짐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지만,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떠올리며 헌 책방에 주저앉아 나의 것이기도 했던 홀든의 고독감을 발견한 적이 있다. 어쩌면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은 나의 경험처럼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해내는 사진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시장 사진집을 보고

   숲 속의 한 가운데 모여있는 세 개의 흰색 표식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모두 안개 속 아니면 흐린 날의 뿌연 숲 속의 이미지들이다. 사진가의 추억을 떠올리는 표식일까? 사진가는 이 세 장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배열 해 두었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찰나의 순간으로 대변되는 방식, 곧 한 장의 사진으로 승부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은 50년대 후반 사진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The American>의 사진 연결하기(sequencing) 방식을 닮은 것 같다. 사진 한 장에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근대 사진의 형태가 아니라, 사진의 연결을 통해 사진가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방식 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진가의 안목과 직관만이 사진 배열의 기준이 될 뿐이다.

   세 개의 흰 색 표식이 있는 사진의 앞에는 또 흥미로운 두 장의 사진이 배열되어있다. 글라이더로 보이는 동체의 긴 날개가 화면의 위아래를 가르며 잔디밭에 붙어 서있다. 그 뒤를 잇는 사진은 평범해보이는 수면과 초원의 사진이다. 하지만 수면과 대지를 이루는 경계의 면은 앞 사진의 글라이더의 형태를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두 사진에 나오는 소재들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두 이미지가 어떤 직관적인 연관성으로 이어져 있는 듯이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연이라는 것이 이미 존재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필립 퍼키스 선생은 무관하지만 지극히 인공적인 이 두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으며 이를 연달아 배열해두었다는 것. 이 사진에 대해 그 이상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편집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나 소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의 연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사진가에게 있어 한 사진집을 완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인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외부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퍼키스의 연결된 사진들은 사진가 개인의 마음 풍경(mind-scape)을 드러내주는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겠고, 그 연속된 전체로서 사진가의 삶의 이력을 드러내주는 자서전적(autobiographical) 작업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필립 퍼키스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관되게 흑백 사진을 찍으며, 현상과 인화를 하고 사진을 선별해내었다. 사진을 고르고 고르는 편집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저자의 손을 거친 이 사진집은 이 작업이 바로 필립 퍼키스 자신이라는 것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 전시를 본 후 메모

   사진집의 이미지들을 다시 하나 하나 떠올려보고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문학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나의 편견에 치우친 판단일 수 있겠지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은 톨스토이의 거대한 장편 소설들같이 느껴진다. 반면 이번에 나온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In a Box Upon the Sea>는 톨스토이가 노년에 쓴 아포리즘 선집 같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이 인간이 살아가며 맛보는 모든 보편적인 경험들 곧 희노애락의 다채로움을, 그리고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게되는 폭넓은 감정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인간의 슬픔>에서 필립 선생은 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마주해온 자신의 자전적인 삶의 모습을 아우르고 있다. 때론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혹은 위트가 담긴 시선으로 견고한 두 다리로 버티며 대상을 탐색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듯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때론 신비스럽기도하고, 교통사고를 당한 어느 자전거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 안타까운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집 <미국인들>에 나오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현장 사진에대한 오마주같기도 하다. 나아가 여기에는 딸의 어릴 때 사진과 성장한 딸이 아이를 낳아 안고 있는 기쁨의 순간도 있으며, 젊고 아름다운 부인의 모습도 등장한다. 다시말하면 필립 선생의 첫 사진집은 생동하는 한 인간이 경험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다 담겨있는 듯하다.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침에 새롭게 눈을 뜰 때 만나게 되는 삶의 경이와 같은 느낌의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들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첫 사진집에는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담겨있는 것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집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에 나오는 사진들은 전보다도 훨씬 더 절제되어있음을 느낀다. 물론 일부는 첫 번째 사진집에서 보던 연결고리를 놓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며 인생의 겨울을 담담하게 바라보는듯한 시선이 담겨있다. 이전에 보였주었던 호기심과 위트가 담긴 시선이 아니라 사진은 좀더 신비스러움을 주고있다. 인생의 내밀한 깨달음 같은 것이다. 글로 따지면 한 문장이 갖는 밀도와 무게가 더해져있는 그런 짧은 글을 보는 느낌이다. 노사진가가 담담하게 드러내 펼쳐 보이는 원숙한 삶의 정수(精髓)가 이것이리라. 사진가는 대상을 관조하며 이전보다 더 고요한 사진들을 보여주고있다. 마치 무위(無爲)의 자유속에 노니는 듯 하다. 내가 받은 이런 느낌들이 톨스토이가 만년에 집필한 그의 아포리즘과 같다고 느낀 것이다. 공교롭게도 톨스토이는 그의 아포리즘에서 노자의 무위(無爲)에대해서 언급하기도 하는데. 나는 이런 인상을 필립 퍼키스의 인화방식과 흑백의 톤, 그리고 절제된 사진의 구성에서 더욱 피부로 느낀다.

   필립 선생의 두 번째 사진집과 톨스토이의 아포리즘은 모두 삶과 죽음의 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사유하는 듯하다. 이 두 거장 모두 삶과 죽음을 두려움과 무지가 아닌 하나의 삶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다. 물론 사진집에 나온 모든 사진이 나와 공명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유독 특정한 사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수도 있을 것이며, 어느 날에는 다른 사진들이 갑자기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사진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립 퍼키스 선생이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셔터를 눌렀듯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이에 공명하는 사진들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특정 사진을 보다가 문득 나의 오래된 기억이나 경험들을 떠올리기도하고,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거나 삶의 경이를 느끼는 것. 그것 이외에 내가 필립 퍼키스 선생의 사진들을 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필립 퍼키스의 첫 번째 사진집

<인간의 슬픔 The Sadness of Men>

 

 

 

*사진집 관련 문의는 안목출판사 블로그에서...

http://anmocin.blog.me/2205644656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득 다시 만나게 된 사진가 필립 퍼키스의 글들.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 입니다.

대상에 반응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우린 항상 무언가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이란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매체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진가이므로 삶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도 모르겠어요.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박태희 옮김, 안목출판 (81면)

 

 

- 나는 내 삶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가지거나 이루었다는 성취감은 없다. 막연한 인생이다. 언젠가 내 일기장에 적어둔 문장이 있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나름대로 힘겹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힘든 일인 것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처럼." 하지만 오랜 '어둠의 터널'을 지나 새롭게 눈을 뜨게 된 '순간'은 있다. 삶의 순간 순간 나는 삶이란 것이 '기적'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조금 다른 눈으로 나의 일상의 풍경을 바라본다면 정말이지 나와 같은 무미건조한 인생경력으로도 삶 속에서 '기적'의 순간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응당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적으로 오래동안 수많은 '소수'의 사람들이 찾아낸 공공연한 비밀인 것이다. 아마도 내가 '기적'의 순간들을 발견하기 시작한 일은 사진에 관심을 가진 이후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는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을 읽으며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겠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시각을 찾을 수 있겠다. 그 계기가 나에게는 '사진'이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86) 매일 일하라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 86면)

 

 

우리는 매일 일해야 한다.

그것도 늘 힘들게 일해야 한다.

차이점이라면 무슨 일을 하는가에 있다.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순수한 기쁨이다.

 

 

무슨 물건이든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누군가의 힘든 노동이

낳은 결실임을 기억하라.

그것을 망가뜨리거나 쓰레기통에 던진다면

그것은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지옥은 즐거움 뒤에 숨어 있고

천국은 노동과 고통 뒤에 숨어 있다.

 

 

- 톨스토이는 육체노동을 매우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매일 매일 그것도 힘들게 일하라고 말하는데, 톨스토이는 두 손으로 일하는 목수나 요리사를 만나면 부끄럽다라고 하기도 했다. 매일 매일 힘든 일을 마치고 누리는 휴식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기쁨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이 글에서 매일 매일의 노동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사물에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 주목을 하게된다. 내가 쓰고있는 물건은 누군가가 힘들게 일한 결과임을 기억하는 것이 이 물건을 만든이에대해 그리고 이를 사용하는 나의 노동에대해 존중하는 태도라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를 경물(敬物)하기라 할 수 있다면, 이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박노해 시인의 시 경운기를 보내며이다.

 

 

 

경운기를 보내며

 

11월의 저문 녘에

낡아빠진 경운기 앞에 돗자리를 깔고

우리 동네 김씨가 절을 하고 계신다

밭에서 딴 사과 네 알 감 다섯개

막걸리와 고추 장아찌 한 그릇을 차려놓고

조상님께 무릎 꿇듯 큰 절을 하신다

나도 따라 절을 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23년을 고쳐 써온 경운기 한 대

 

 

야가 그 긴 세월 열세 마지기 논밭을 다 갈고

그 많은 짐을 싣고 나랑 같이 늙어왔네 그려

덕분에 자식들 학교 보내고 결혼시키고

고맙네 먼저 가소 고생 많이 하셨네

김씨는 경운기에 막걸리 한 잔을 따라준 뒤

폐차장을 향해서 붉은 노을 속으로 떠나간다

 

 

경물敬物할 줄 모르는 자는

경천敬天도 경인敬人도 할 줄 모른다는 듯

물건에 대한 예의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남아 있을 리 없어

 

 

사람을 쓰고 버릴 때 어떻게 하더냐고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아픔도 없이

돈만 알고 경쟁력과 효율성만 외치는 자들은

이미 그 영혼이 폐기처분된 지 오래라는 듯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393)

 

 

- 시는 지금과 같은 11월의 어느 날 농부인 김씨가 23년간 함께해온 경운기를 폐기처분하기 전 경운기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장면이다. 나는 시를 잘 감상할줄 모르겠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이 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여러 가치를 보여준다. 자신이 오래 써온 물건에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김씨는 성실한 노동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3번 째 연의 김씨의 말로 보이는 부분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평생 함께해온 배우자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부부의 모습처럼 숙연해지게 만드는 부분이다. 톨스토이가 말한대로 김씨의 경물하는 태도는 곧 자신의 노동과 경운기를 만든 누군가의 노동에 대한 크고 깊은 존중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물건에대해 이러한 존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에대한 자세를 의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시카고 경제학파가 중심이된)의 핵심 인물인 밀턴 프리드만의 영향이 전 세계적으로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현재, 나는 이들이 주장한 경제이론들이 지닌 가장 크고 중대한 결함은 여기에서 인간에대한 가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찾아봐도 순수한 상태로의 방임, 무역장벽 철폐 등등의 구호 속에서 이들의 수익성효율성제고를 위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경쟁상대로 몰아가고있는 모습밖에 찾아볼 수가 없다. 평생직장이 이제는 사라진 것도 결국은 인간 자체를 또 하나의 상품으로 보기에 인간을 쓰고 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대기업에 취직하기위해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4년동안 긴장한 상태로 취업준비생이 되고,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상이라는 기준에 우리는 스스로를 상품화하여 우리를 최적화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리고는 극소수의 직원을 제외한 대부분이 40대 중반에 권고사직을 통보받기 전까지 죽어라 일하고 받은 월급은 빚갚느라 털린다. 이게 우리의 삶이 되어버렸다. 톨스토이의 글을 읽다, 시를 떠올리고 다시 삼천포로 빠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이라는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쌀쌀해진 11월의 마지막 주말 아침, 사람의 온기를 더 많이 느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낯선 생각을 권하는 가장 따뜻한 사진

강윤중 지음/서해문집 

 

-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란 무엇일까? 아마도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어떤 윤곽과 색채를 지닌 대상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넓은 의미로 각자 사회 구성원의 내부에 사람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일종의 프레임이라 볼 수도 있겠다. 좀더 스스럼없이 표현한다면 일종의 편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편견없는 사람은 없다. 톨스토이는 편견의 근원이 거짓에 있다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유혹과 편견과 죄가 없다면 삶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나아가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한바 있다. 하지만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우리의 편견을 확인하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노력의 여정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여기 오랜기간 신문기자생활을 했다는 저자가 우리의 편견을 일깨울만한 사진들을 모았다. 바쁜 일상가운데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존재들을 저자는 좀더 유심히 들여다보고 우리에게도 함께하기를 초대하는 듯하다. 카메라는 우리의 편견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도록 해주는 도구로서 우리의 편견을 확인할 수 있게해준다. 외부를 향한 렌즈는 결국 우리 각자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해주고 이를 우리 밖으로 꺼내도록 해주는 통로인 셈이다. 사진 속의 아름다운 대상도 좋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선이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해며 관심도서로 선택해보았다.

 

 

 

 

 

 

 

 

 

 

 

 

 

 

 

2.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안천 옮김/자음과모음

 

- 드디어 나오고야 말았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로 국내에 상당한 관심음 모았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의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한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책을 읽는 것의 혁명성을 신선한 문체로 전달했던 사사키 아타루의 묵직한 야심작 <야전과 영원>을 줄곧 기다렸다. 개인적으로 아직 푸코와 라캉도 익숙한 사상가는 아니지만 올 겨울 천천히 읽어나가고 싶은 책으로 선정해두었다. 문체의 압도적인 힘에 놀랐다라고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 대해 평했던 장석주 시인의 언급처럼 이번에 나온 이 책에 대한 기대가 크다.    

 

 

 

 

 

 

 

 

 

 

 

 

 

 

 

3. <판타스틱 과학 책장> - 과학책을 읽고, 쓰고, 번역하는 고수들의

이한음, 조진호, 이정모, 이명현 지음/북바이북

 

- 이 책의 목차를 보니 네 개의 장으로 되어있고, 네 명의 저자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각각 한 개의 장을 맡아 과학책을 소개하고 있다. 목차만봐도 이건 읽어야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의 저자 모두 자연과학을 전공한 과학자들인데 이들은 외국의 과학서를 국내에 번역하여 소개하거나 강연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과학을 알리는데 노력해온 저자들이다. 책 제목은 그리 마음에들지는 않으나 많은 이들에게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일것 같다. 과학분야 지망생에게는 모델이 되는 과학자들을 발견할 수 있고, 과학자들에게는 자신의 전공분야 이외의 분야에대해 관심을 넓힐 수 있는 안내서가 되기도하고 과학자로서의 글쓰기에대해 살펴볼 볼 수 있는 책이되겠다. 한편 일반인들은 관심을 가진 부분의 책을 찾아 이 분야에 입문을 하거나 다양한 과학분야의 책을 소개하고 있기에 현재 과학분야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를 조망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될 수도 있겠다.     

 

 

 

 

 

 

 

 

 

 

 

4. <그림자 노동 Shadow Work> 이반 일리치 전집

이반 일리치 지음/노승영 옮김/사월의책

 

- 카톨릭 신부이자 사상가, 역사가이기도 한 이반 일리치의 절판된 대표작 <그림자 노동>이 사월의 책에서 이반 일리치의 전집 기획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덕분(?)으로 독립적인 사유방식과 거침없는 질문을 하기로 유명한 이반 일리치의 대표저서를 볼 수 있게되어 반갑다. 과거에 자신의 저서에도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을 던지며 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이반 일리치는 일종의 소책자 운동을 통하여 자신의 책에 있는 지식의 일방적인 흡수자가 되기보다는 질문과 토론하기를 바랬다. 독립적인 사유방식으로 진보와 보수, 종교계,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거센 비판을 받기도하고, 심지어 총격과 몽둥이 세례를 받기도 했던 이반 일리치는 살아남아 우리에게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다.

   이반 일리치의 사상과 질문이 신자유주의의 질서를 깊이 내면화해가는 현대인에게 갖는 의미는 남다를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남다른 것에서 나아가 우리는 한 번쯤 이반 일리치가 던지는 화두를 짚고 넘어가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점에서 이반 일리치의 선집이 다시 출간 계획에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나의 필독서 리스트에 들어가는 책이며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한 번쯤 권하고 싶은 책이다.

 

 

 

 

 

 

 

 

 

 

 

 

 

 

 

5. <파열의 시대>

에릭 홉스봄 지음/이경일 옮김/까치

 

- 20세기 역사학의 거목이라고 불리는 에릭 홉스봄의 유작이라 한다. 20세기의 문화와 사회라는 부제가 붙어있듯이, 저자가 몸담고 살았던 20세기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역사가의 안목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한다. 홉스봄은 자서전 <미완의 시대>를 비롯하여 상당한 양의 역사서, 문화 및 자본주의 비판, 재즈와 같은 대중문화에대한 비평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역사학자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본격적으로 홉스봄의 저작을 접해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유작인 <파열의 시대>를 시작으로 홉스봄의 발자취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  

 

 

 

 

 

 

 

 

 

 

 

 

 

 

 

 

6. <대한민국은 왜?> - 1945~2015

김동춘 지음/사계절

 

- 식민지 역사로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구조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조망한다. 특히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 이러한 사회구조를 갖추었을까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라고 칭하는 지배적인 집단이 그들의 왕국을 만들어온 기원을 밝히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에 분노하여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아예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알아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은 한국인임에도 잘 모르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왜?>는 이 피카소의 그림을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기 원하지 않는 지배권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게해줄 것이다.

   이러한 역사책이 다소 부담된다면 신천학살을 배경으로한 황석영 작가의 <손님>과 같은 작품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곧 신천학살이 공산주의 집단과 기독교에 기반한 반공 세력사이에 얽힌 복수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던 비극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되었듯이, 김동춘 교수의 <대한민국은 왜?>는 대한민국의 지배 세력이 된 이들의 기원이 바로 기독교와 반공주의에 경도된 세력임을 깨닫게해준다.  

(이 책은 10월 말에 출간되긴 했지만 지난달 관심도서 선정을 하지 못한 관계로 한 권 포함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 지음 (42)

고통과 실패에서 배우다

 

 

인간에게는 고통과 병이 필요하다.

인간은 고통을 이해하면서

육체가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과 실패가 없다면 기쁨, 행복, 성공을

무엇과 비교하겠는가.

 

인간은 작은 문제들로 균형을 잃는다.

반대로 커다란 문제는

인간을 영혼의 삶으로 인도한다.

 

 

 

-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톨스토이가 말년에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명상을 하며 써낸 모음집이라고 한다. 항생제가 없던 톨스토이의 시대에 그 자신도 폐렴과 장티푸스로 몇 달 간 사경을 헤맨경험이 있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고통과 병이 필요하다’는 말은 가족 중에 누군가 큰 병을 겪고 떠나 보낸 사람이나 암과 같은 큰 병을 선고 받은 사람의 가족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온다. 내 친구, 친구의 부모님 중에 암으로 고통받고 우리를 떠난 사람이 있기에 톨스토이의 말에 수긍은 하지만 내 가슴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을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몇 달이라도 지내본 사람들은 무상함을 많이 느끼게 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아프구나 하는 사실을 환기할 때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우리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기도 한다. 이 사소한 것들에 우리 삶의 여정이 잠시 빗나가거나 흔들리기도한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알았음을 알게된다면, 사소한 문제들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톨스토이의 말대로 진실로 영혼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할 것이다. 친구의 부모님이 큰 병을 진단 받은 날,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쿵’하는 충격을 받았다. 거대한 자연불변의 법칙 앞에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짐을 느낀다. 아울러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라고 썼던 나짐 히크메트의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